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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고 간결하게

등록일 2021-08-29 19:46 게재일 2021-08-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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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수비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

해가 뜨기 전 출발했다. 고요한 숲에 우리 발소리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일찍 잠을 깨웠다. 아직 잠이 덜 깬 7번 국도를 달리니 바다에 아침노을이 붉다. 동해에 잠겼던 해가 몸을 막 건져 올려서인지 바다와 주위의 구름까지 물들여 놓았다.

가을 여행길에 어울리는 곡을 틀었다. 어제 음악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노래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우~돌아선 그 사람 우~생각나네~’ 정경호의 ‘회상’이 차 안에 울려 퍼진다.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읊조리듯 부른다. 진짜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부르는 열창이 아닌, 배우가 기교 없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백한 수필 같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한 번 더 들었다.

예배시간에 이런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순서에 맞춰 강대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선 집사님, “예수님 우리 집에 멸치젓갈을 담갔는데 지금 딱 맛이 들었으니 한 번 오셔서 따뜻한 밥 한 숟갈에 얹어 맛보아 주세요. 그리고 베란다에 들여놓은 소국이 한창이니 향기도 함께 맡아 주세요.” 시를 써와서 낭독하듯 들려주는 기도가 생전 처음 듣는 기도라 가만히 고개를 들어 어떤 분이신가 하고 살폈다. 보통 장로님들은 나라 걱정으로 시작해서 태풍이 쓸어간 곳의 피해주민 안부를 챙기고,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넘쳐나길 염원하며 긴 기도의 끝을 맺는다. 그 많은 기도 중에 몇 해 전에 들은 그날의 기도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그 집사님의 기도가 예수님을 친구라 여기고 드리는 담백한 초대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도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가 좋다. 한자 말을 주저리주저리 엮어 펼쳐 놓거나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걸친 어려운 글보다 이야기하듯 쉽게 쓴 글이 좋다. 오늘 찾아가는 숲도 그런 곳이다.

사진 찍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곳, 가봐야지 하다 몇 년이 쓰윽 지나버렸다. 이번에는 꼭 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매일 비가 쏟아져 길동무인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일기예보를 수시로 찾아보다가 내일이 태풍의 눈인지 하루 맑다고 나왔다. 코로나 걱정도 되어서 사람들 뜸한 새벽에 가서 보고 오자고 부추겼다.

7번 국도에서 영덕 상주 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며칠 내린 비가 하늘로 오르며 구름을 만들었다. 우리가 갈 영양 수비면 방향의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렸다. 구름 아래 동네 논에 벼가 벌써 알을 채웠고, 고추 고랑마다 반짝 맑은 날이니 식구들 모두 나와 고추 따느라 바빴다.

영양 수비면 죽파리 주차장에 다달았다. 대여섯 대 정도 댈 수 있는 주차장이라는 이야기에 우리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싶어 더 일찍 왔더니 다행히 세 번째였다. 차 한 대 정도 올라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3.2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숲이 나타난다니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 오롯이 남편과 나뿐이었다.

며칠 내린 비가 골짜기에 쏟아져 내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원하게 큰지 귀가 먹먹하다. 한시가 바쁜 매미의 한껏 몸을 떠는소리도 물소리를 뚫고 나왔다. 또 걷자니 구부러진 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코끝에 느껴졌다. 칡꽃 향기다. 세찬 비에 보랏빛 꽃잎을 한 자락 길에 뿌려놓았다. 그 옆에 개머루가 터키옥처럼 파란빛으로 익어간다. 그렇게 물멍을 한참 매미멍을 또 한참, 한 시간쯤 걸으니 어느 순간 어둡던 숲이 환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작나무의 세계에요 한다.

산 하나가 자작나무의 세계다. 드레스코드가 하얀색인 파티에 초대받았다. 모두가 흰색인 틈에 남편과 나만 색깔 옷이라 확 튀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자작나무가 자신의 순백의 삶을 들려준다. 자작자작, 숲의 목소리는 맑게 끓인 닭곰탕의 맛이다. 막냇동생 백일에 이웃에 돌린 백설기 떡이다. 담백하고 간결하게 하늘로 뻗어가는 문체다. 가을의 문턱에서 듣기 좋은 맞춤 곡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기도이다.

산을 내려오며 뺨을 만지니 촉촉하다. 가을이 담뿍 묻어 있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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