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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부디 시인의 말처럼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나태주 시인의 ‘멀리서 빈다’라는 시이다. 이 시에서 필자의 마음에 오래, 또 간절히 머물러 있는 말은 “부디 아프지 마라”이다. 특히 “부디”라는 말의 울림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그 어느 해보다 길고 긴, 그리고 더 힘든 2020년도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부디 마지막 남은 12월만큼이라도 세상 모든 사람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인의 뜻에 더 간절한 마음을 보탠다. 그래서 “부디 아프지 마세요!”라는 말을 주문처럼 왼다.필자는 평소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을 진리(眞理)처럼 믿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면 꼭 이 말을 크게 적어 둔다. 하지만 절대 진리가 사라진 지금엔 이 말 또한 경우의 수에 지나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절대 진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코로나 19와 같은 불가항력 상황이 자리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죽을 만큼의 간절함도 소용없다.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기적(奇蹟)조차 바랄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시의 내용처럼 나와 너 한 사람으로 인해 아침과 저녁이 오는 아름다운 세상 이야기는 이제 전설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희망조차 고문이 된 지금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할까! 암흑천지도 이런 암흑천지는 없다.“노량진 확진자 67명 임용고시 못 봤다” 너무도 가슴 아픈 뉴스 제목이다. 시험 볼 기회조차 빼앗겨 버린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전투구를 멈추고 정부는 이들을 위한 특별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그리고 더이상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제 대응을 해야 한다. 이제 곧 우리나라의 가장 큰 시험인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치러진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수험생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금 수험생이 느끼는 제일 큰 압박감은 시험이 아니라,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이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부의 모습은 수험생들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우리는 심리적 방역이라는 말을 만들 정도로 방역 시스템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심리적 방역에만 맡길 수는 없다. 그래서 수험생 부모로서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응시하는 모든 수험생과 감독관 등을 대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수능 관계자 모두가 코로나 19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면 수험생들은 불안감을 떨치고 더 최선을 다해 시험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필자는 지난주부터 수능 수험생을 위해 위의 시를 매일 필사하고 있다. 필사할 때마다 “부디 아프지 마라”라는 부문을 더 힘주어 적는다.

2020-11-24

백두혈통의 장손 김한솔의 운명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2017년 2월 말레이시아공항에서 김정남은 독침에 의해 사망하였다. 북한 공작원 소행이 분명하지만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며칠 전 미국 시사 주간지 뉴요커에는 그간 궁금했던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에 관한 기사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김한솔은 마카오에 살면서 프랑스 국제학교에 유학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다. 갑작스런 김정남 사망 후 그에 대한 소재는 오리무중이었다. 이번 ‘자유 조선’ 대표 에이드리언 홍창(36)의 증언으로 그의 최후 행적이 드러났다. 북한 백두혈통의 장손 김한솔은 유랑자 신세가 되어 있었다.북한 세습체제에서 권력보위에 방해되는 사람은 누구나 처벌된다. 집권 초기 2012년 12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은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북한 언론은 장성택이 반혁명 부패분자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장성택의 딸 장금송은 파리에서 자살했고, 고모 김경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행적이 수상했던 이복형 김정남도 결국 말레이시아공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김정은의 이복 삼촌 김평일은 외국 대사직을 하면서 떠돌다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평양의 친형 김정철은 소식이 없고 여동생 김여정은 김정은 권력의 최측근이 되었다.이번 뉴요커지는 김한솔의 마지막 행적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미국 시민권자 홍창은 예일대 시절부터 북한 인권문제의 해결책으로 반북단체인 ‘천리마 민방위’를 조직하였다. 미 해병대 출신 한국계 크리스 안이 이 조직을 돕고 있다. 이 조직이 미 CIA에 연관된다는 추측은 분분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홍이 이끄는 이 단체는 ‘자유조선’으로 개명하고 지난해 스페인의 북한 대사관도 습격하였다. 2017년 2월 김정남 사망 후 김한솔은 파리 유학 시부터 알고 지내던 홍창에게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 홍창은 김한솔을 타이페이공항으로 탈출시키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공항으로 이동시키는 수속을 도와주었다.이번 기사에 김한솔의 소재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건재한 것만은 확실하다. 미 CIA가 그를 보호하고 그가 북유럽 아니면 미국에 거주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백두 혈통 김한솔이 매우 불편한 존재일 것이다. 홍창은 공항에서 본 김한솔은 178cm 키에 잘 생긴 외모였으며, 미모의 어머니와 영어를 잘하고 쾌활한 여동생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한솔은 아버지 김정남의 유산으로 많은 현금을 가졌으며, 북한에서 할아버지 김정일과 낚시하던 일도 토로했다고 한다.북한의 탈북자는 현재 3만5천명을 넘고 있다. 탈북민 중에는 서유럽에 정착한 사람도 더러 있다. 최고 통치자 김정은의 조카 김한솔도 이제 탈북자 신세가 되었다. 그가 남한 행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마카오 국제학교와 파리에서 유학한 그는 안전을 보장 받는 서방 어디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론에 보도된 그의 모습은 과거의 해맑은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핸섬한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김한솔의 운명에서 또 다시 분단의 비극을 실감한다. 김일성 가계의 장손 김한솔이 과연 언제쯤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을까.

2020-11-24

해넘이 전망대

일몰(日沒)이란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지는 순간의 시각을 뜻한다. 우리 말로는 해넘이라 부른다.보통 일몰이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은 일몰 순간에 나타나는 저녁노을이 있기 때문이다. 서쪽 지평선 부근을 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보는 이에게 감동과 낭만을 주기에 족하다. 특히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다면 그 광경은 황홀경 이상으로 깊은 감명과 추억을 안겨 준다.일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세계 3대 일몰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이 있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와 그리스 산토리니섬 그리고 남태평양 피지섬이다. 이곳은 신비로운 석양의 모습 하나로 세계적 관광명소로 소문난 곳이다.산토리니 해안은 하얀색 벽과 파란색 지붕 그리고 석양이 쏟아내는 붉은색이 함께 어울어지면 거의 환상적 경관을 연출한다. 보랏빛 석양으로 유명한 피지섬은 우리나라 젊은이가 즐겨 찾는 낭만의 신혼여행지다.저녁노을은 태양광선이 지평선 가까이 통과하는 동안 파장이 짧은 푸른색의 빛은 미립자에 의해 흩어지고 파장이 긴 붉은색만 관측자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면서 보이는 현상이다. 그래서 저녁노을이 나타나는 다음날은 대체로 날씨가 좋다는 속설이 있다.포르투갈의 까보다로까는 유럽 대륙의 서쪽 땅끝마을이라는 이유 하나로 세계적 관광지가 됐다. 천혜의 자연과 위치를 배경으로 뜨고 있는 핫플레이스는 국내외 얼마든지 많다.지난 8월 대구 남구 앞산 빨래터 인근에 조성된 높이 13m의 해넘이 전망대가 새로운 명소로 인기를 모은다는 소식이다.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붐빈다. 전망대서 바라본 대구의 일몰이 새로운 구경거리가 된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핫플레이스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1-24

스마트폰 없는 주말

현대인들은 하루 중 어떤 물건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까?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스마트폰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단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한다. 밤새 확인하지 못 한 문자나 메일을 보며 답장을 한 뒤, 포털 사이트 어플에 들어가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한다. 이동하거나 짬짬이 시간이 날 땐 습관적으로 SNS에 들어간다. 지인의 사진에 ‘좋아요’를 클릭하고 인기 게시글을 빠르게 훑는다. 어느 때엔 이미 본 것이라도 또 본다.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엔 독서등 하나만 켜둔 채 침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추천으로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취향에 맞지 않을 때나 삼십 분이나 걸려 클릭한 영상이 오 분도 못 가서 종료 버튼을 누르고 마는 순간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난감하다. ‘내 황금 같은 쉬는 시간을 삼십 분이나 소비했는데! 어서 더 재미있는 걸 보여줘!’ 답답한 마음에 아무거나 눌러보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하지 못 하고 힘만 빠지게 된다.인터넷 세계는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이국적인 거리를 보여주고 다양한 언어를 들려준다. 손가락 터치 몇 번만으로도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아이디어를 얻는다.문제는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 없을 때 불안을 느끼는 ‘스마트폰 중독’에 걸린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 중독되어 지나친 시간을 소비하는 탓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경우가 크다.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 거북목, 손목 통증 등 다양한 몸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한국과학기술개발원에서 진행한 설문 결과 우리나라에서 스마트폰 중독군에 속하는 사람은 39.8%, 위험군에 속한 사람은 19.5%로 상당수가 이미 스마트폰 중독에 해당한다고 한다.그러나 자신이 중독인지 아닌지 묻는 문항에서는 단 1퍼센트만이 스스로를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스마트폰 중독은 자신이 중독인지 의식조차 할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나 또한 중독을 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자 디지털 디톡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디지털 디톡스란 디지털(digital)과 ‘독을 해소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톡스(detox)를 결합한 용어로, 디지털 기기 사용을 잠시 중단하고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디지털 디톡스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쉽게 해볼 수 있는 건 휴대폰 사용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주 업무 외에 인터넷 서핑 시간을 제한하여 정하거나, 자기 전 휴대폰을 침대에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해볼 수 있다. 정기적으로 계속 울리는 어플의 각종 알람을 끄거나 필요 없는 어플을 삭제하는 방법도 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 멍 때리기나 단순 취미 활동, 산책을 통해 질 좋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디지털 디톡스를 돕는 각종 어플도 있다. ‘스테이프리(StayFree)’는 원하는 시간만큼 핸드폰 사용을 제한하고 사용 시간과 사용 빈도를 상세히 알려준다. ‘타임스프레드’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15분마다 1캐시씩 적립된다. 캐시를 모아 아이스크림이나 음료 등 원하는 물건으로 교환할 수 있다.‘스라밸’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스마트폰의 사용 시간을 제한하도록 돕는다. 스마트폰 잠금 뿐만 아니라, 자녀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공유하고, 데이터 사용량을 확인할 수도 있다.‘Forest: 집중하기’는 숲에 씨앗 하나를 심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을 때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된다.하루에 한 그루씩 나무를 만들어 숲이 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며 전 세계 사용자와 자신의 숲을 공유할 수도 있다. 프리미엄 버전을 따로 구매했을 때 아프리카에 실제 나무를 한 그루씩 심을 수도 있다.디지털을 사용할 수 없는 새로운 여행지도 주목받고 있다. 강원도 홍천의 ‘힐리언스선마을’은 휴대폰 통신망이 잡히지 않는 곳에 위치해, 마을에 들어섬과 동시에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 잣나무 숲길 걷기와 명상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이곳에서 제공되는 모든 음식이 저염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신체 디톡스 또한 진행할 수 있다.경상북도 영주에 위치한 ‘국립산림치유원’은 숲의 다양한 환경요소를 활용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신체와 정신 건강을 회복시키는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이곳은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와이파이 또한 쓸 수 없다. 디지털과 단절된 채 오롯이 홀로 숲속을 걷거나 휴식하며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회복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사실 장시간 손에 쥐고 있었던 스마트폰을 갑자기 내려놓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자주 사용하던 앱을 화면 안에서 따로 분리하여 정리한 뒤, 하루에 십 분에서 십오 분씩만 사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제한했다. 종이책을 읽는 것과 종이에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했고,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집안일이나 취미 같은 단순하고 가벼운 일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면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간 일과를 파악하기 위해서 휴대폰 속 달력과 메모장을 번갈아 열어 보았다면, 이제는 멍하니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일과나 약속을 정리한다.그러면서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에는 용기 내어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노선을 묻는 이에겐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어르신께 지하철 자리를 내어드리면 내 짐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두겠다는 고마운 말도 받는다. 평소엔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을 두 손이 조금 쓸모 있게 부지런해졌다.가을이 지나간다. 지금 사는 집은 창이 무척 커서 울긋불긋 물든 나무를 내려다보는 일이 즐겁다. 스마트폰이 없는 주말엔 창문에 붙어서 글도 쓰고, 일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그간 미뤄두었던 고민도 한다. 좋아하는 길을 산책할 땐 가을이 끝나간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눈으로 천천히 풍경을 뜯어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계절의 냄새도 맡아본다. 카메라를 꺼내는 대신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 좋은 순간을 기억하려고 “또 오자”는 말을 또박또박 건넨다.디지털을 스스로 제한했을 때, 그렇게 스스로 필요한 때에 맞춰 조절할 수 있을 때에 자신이 일과 쉼의 경계 중 어느 부분에 위치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스스로 일상의 균형을 재어보며 정작 놓치고 있는 건 무엇인지, 내게 현재 어떤 게 중요한 지 정리해 볼 수도 있다. 비록 스마트폰이 없는 일상은 고요하고 심심하지만 잔잔히 오래 이어지는 소소한 기쁨은 무척 크다. 주말 하루 만큼은 스마트폰을 멀리 두면서, 올해의 가을을 천천히 잘 보내줄 것이다.

2020-11-24

국수 언제 먹여줄거야

나는 국수를 싫어했다. 첫애를 갖기 전까지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신을 하자 국수가 자꾸만 먹고 싶었다. 국숫집 순례를 다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빈동에 있는 여러 색깔의 면을 파는 칼국수 집이 단골이었다. 그걸로 부족해 남편이 퇴근길에 한일 냉면에 들러 매콤한 비빔냉면을 포장해온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남편 말로는 돌아가신 시할머니가 하루 두 끼 정도 면을 드셨다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라면이라고 할 정도로. 배 속에 아이가 할머니 식성을 닮았던가 보다. 그 아이가 지금 청년이 되었고 면을 여전히 즐긴다. 나는 임신했을 때 입맛을 기억하는지 싫어하진 않게 되었다. 아들이 스마트폰까지 이용해서 끓여주는 늦은 밤의 라면이 몸매를 두껍게 만들고 있다.남편이 잘하는 음식 중 하나가 잔치 국수이다. 일단 국물부터 기가 막히게 만든다. 고명까지 부엌에서 콩콩콩 만들어서 양념장까지 곁들여주니 밤 열 시라도 한 젓가락은 먹게 된다. 이 또한 나를 살찌게 하는 이유다.구룡포 시장 국숫집에 갔다. 이번 방문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KTX매거진에 소개될 정도로 이 집이 요즘 인기이다. 처음 갔을 때는 쌓아 놓은 면발만 보고 돌아왔다. 이번엔 마침 말린 면발을 자르고 포장하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한 곳에 담아 놓으셨다. 무엇에 쓰냐고 물으니 다 쓸데가 있단다. 애교 섞인 웃음으로 가르쳐 달라니 따로 사가는 이가 있단다. 가져가서 무얼 하는지 모르시냐고 꼬치꼬치 물으니 국수를 살 거냐고 한다. 네, 팔아드릴게요 하며 또 여쭈었다. 새도 먹고 짐승도 먹는단다. 아하! 할머니 혼자서 사람 먹이고 짐승도 먹이고 새도 먹인다. 거룩한 직업이다. 집에 도착하니 부엌에 일찍 귀가한 우렁각시가 물을 끓이고 있다. 내가 국수 사 올 걸 알기나 한 것처럼. 저녁으로 따끈한 잔치 국수 한 그릇 먹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손 안 가고 얻어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는 법이다./이진아(포항시 남구 중앙로)

2020-11-23

조바심내다

할머니가 조를 추수하고 있다. 창 넓은 밀짚모자를 쓰시고 동그마니 앉아서 조 이삭을 말려 두드리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손에 든 것은 법주 빈 병이다. 그 모습이 재밌어 옆에 앉아 이것저것 여쭈었다. 이거 떨어서 뭐 하실 건지, 자식들 오면 준다기에 자식은 몇이나 되는지, 얼마나 자주 오는지 묻자, 좋은 회사에 다닌다며 자랑도 하셨다.친구 아들이 주말에 에버랜드를 다녀왔단다. 사진을 보니 신난 표정이다. 그런데 돌아다니다 용돈을 잃어버렸단다. 에고, 아까운 거, 얼마나 속상했을까. 내 어릴 적 그날이 떠오른다. 할아버지 삼촌이 집에 다녀가시면서 주신 용돈을 모으고 모아 운동회날에 군것질하려고 들고 갔다. 체육복 주머니가 얕아 어디서 흘린 건지 솜사탕 하나 겨우 사 먹고 하늘로 날아간 내 용돈. 학교 운동장 가의 나무 밑에서 기다리던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달려갔다. 잃어버린 돈 때문에 속이 상한다고 울먹거리자 삼촌이 잃어버린 니가 죄 많다고 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길질을 하며 울어버렸다. 그걸 위로라고 하는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서럽다.오래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상처를 줬다. 가슴이 너무너무 아파서 놀러 온 친구에게 넋두리했다. 그럼 그 사람이랑 다신 보지 말면 되겠네 한다. 그걸 위로라고. 내 마음을 알아 달라는 거지. 누가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했나.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거지. 어줍잖은 충고를 하라고 했나. 속상하겠다 하며 밥이라도 먹든지 소주 한 잔이라도 따라주면 그만인 것을.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은 위로하는 방법을 모른다. 운전면허처럼 위로면허도 따도록 법으로 정하면 좀 나아지려나.타작한다는 말을 옛날에는 ‘바심’이라고 했다. 조를 추수하면 그것을 비벼서 좁쌀을 만들어야 하는데 쉽게 비벼지지 않는다. 그래서 방망이로 두드려서 떨어낸다. 쪼그린 할머니 옆에 앉아 법주 한 병 나발불고 해질 때까지 조바심이나 내야겠다./이지헌(구미시 양호동)

2020-11-23

동서뎐

현관문 앞에 동서가 귤 한 봉지를 두고 갔다.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덤으로 얻은 것. 시월드이다. 그중에 제일 고마운 존재가 동서이다. 내가 시집가서 십 년이 지나도록 시동생이 독신이어서 동서 구경을 못 하다가 뒤늦게 맞은 식구이다.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난다. 그런데도 내게 잘 맞춰주며 시댁에 적응을 잘해주었다. 그래도 신세대답게 내가 바꾸지 못하던 것들도 웃으며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아버님 앞에서 눕는다던가 바닷가 시댁에선 먹지 않던 배추전과 솎아낸 푸성귀로 만든 겉절이도 슬쩍 밥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조심스러워 어머님이 하라는 음식만 했었는데 지금은 모두 동서의 음식을 좋아한다.똑순이라 물건도 잘 고른다. 시댁에 냉장고나 세탁기를 바꿔드려야 할 때도 전자매장에 가서 장단점을 잘 따져 묻는 걸 보면 매의 눈을 가졌다. 여기저기 인터넷에 가격도 찾아서 비교하고 찬찬히 살핀다. 나처럼 대충 가격 보고 사는 그런 엉터리 주부와는 차원이 다르다.나와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건망증이 심하다. 그것도 아주 심하다. 어느 정도냐면 시댁에서 출발해서 집에 도착하니 자기 부츠 대신 어머님 슬리퍼를 신고 있던 일, 조카가 아기일 때 아기 짐을 몽땅 현관에 두고 가기도 해서 어머님을 놀래켰다. 그래도 ‘얼라’를 놓고 간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어머님은 내 건망증을 보고 걱정했는데 더한 아래 동서를 보더니 두 손 다 들었다 하셨다며 웃으셨다. 젊디젊은 나이부터 그러면 나이 들어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한걱정이 늘어지셨다.그런 동서가 자꾸만 헛갈리는 일이 있다. 남편과 시동생이다. 얼마 전에도 호박잎을 따다가 저기 고추밭에서 오이고추를 따는 남편 뒷모습에다 “여보”를 외치며 찾았다. 남편이 고개를 들자 “엄마야” 하며 방으로 뛰어들어 간다. 자주 그런다. 난 분명 잘 생긴 시동생과 조금 더 잘생긴 우리 남편이 구별되는데 말이다. 동서 덕분에 또 한 번 웃고 간다./최순자(포항시 북구 용흥동)

2020-11-23

골목길 소경

오래된 동네의 골목길은 내가 즐겨 찾는 사색의 장소이다. 지치고 힘이 들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면 안식을 위해 고향을 찾듯 발길이 가는 곳이다. 그 골목길들은 대부분,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가파르고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그 언저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의 굴곡진 삶을 고스란히 닮았다. 겹겹이 모여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는 투박한 지붕 아래로 몸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대문이 나 있고 그 대문 앞에는 자그마한 콘크리트 계단이 한두 칸씩 디딤돌처럼 자리하고 있다. 좁고 작은 부족함이 일상이 되어있는 미니멀 라이프의 공간이다. 풍족함의 정도가 과해서 불필요함이 넘치는 지금의 미니멀 라이프가 태초부터 다른 이유로 존재했었던 그곳이다. 가난이라는 불편함으로 힘에 겨워 한숨지으며 벗어나려 애썼던 미니멀 라이프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찾는 동네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기존의 주관적 관점에 대한 지향을 배제하고 사진 작업에 임한다. 오롯이 나만의 시공간 속에서 본능적인 심미적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에 집중한다. 이러한 나의 작업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난 예술사조인 미니멀리즘에 근거한다. 대상으로의 접근에 있어 추론적인 접근을 피하고 꾸밈과 표현을 자제하여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형태와 색상을 통해 나의 내적 지향성에 충실해지려 한다.오래된 골목길은 나에게 그리움의 고향이 되기도 하고, 편안한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하며, 가슴 설레는 연인이 되어 있기도 하다. /박숙희(사진작가)

2020-11-23

이 계절도 기러기 날아가듯… 울산 석남사(石南寺)

떠나는 가을이 아쉽다. 일주문 안에는 늦가을 풍경이 전하지 못한 인사를 부여잡은 채 우리를 기다린다. 초췌한 계절의 끝자락과 잔뜩 흐린 하늘,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약간의 고독과 우수가 실려 있다.유모차를 탄 손녀의 손에 들려진 나뭇잎 하나, 돌 지난 아이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코로 가져가 냄새도 맡는다. 그리고는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이 작고 아름다운 교감을 바라보며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대화를 나누다 수시로 찾아드는 적적함에 가끔은 까칠한 허공을 응시할 수 있어서 좋다.곧게 뻗은 700m의 거리가 지겹지 않다. 누구나 자연 속에 서면 몸과 마음은 넉넉해지고 상대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배려심도 생긴다. 몸살과 감기 기운으로 힘든 몸을 추스르고 나온 나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겸허해진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즐기며 반야교를 건넌다.석남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헌덕왕 16년(824년), 최초로 우리나라에 선을 도입한 도의 선사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한다.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6.25전쟁 이후에 폐허가 되었던 절을 1957년 비구니 인홍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여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 받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최대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으로 정수원, 금당, 심금당 등 세 곳의 선방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 정수원은 여느 선방처럼 동안거와 하안거 결제, 해제를 지키지만 금당은 해제가 따로 없이 수좌 스님들이 모여 정진하고 있으며 심검당은 노스님들이 자유롭게 수행한다고 한다.누하진입식으로 침계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석가탑을 닮은 삼층 석가사리탑이 크지 않은 마당을 지키며 우뚝하다. 스리랑카 스님이 가져온 사리를 모셔놓은 대석탑이다. 대의 선사가 세웠다는 소석탑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극락전 쪽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 연륜이 쌓인 탑은 뒤로 보이는 선방 때문인지 정숙한 여인과도 같은 품격이 흐른다.작지 않은 사찰이지만 전각의 위치나 정원의 짜임이 빈틈없이 아름답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영남 9봉 중 가장 높다는 가지산이 넉넉하게 절을 품어 주어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아늑하고 평화롭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절은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조용하다.대웅전 뒤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 369호 승탑이 나온다. 정갈하게 비질이 된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스님 한 분이 정원에서 풀을 뽑으며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사는 스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 흔하디흔한 대화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육신을 절집에 가두고 사는 스님들의 절제된 삶 속에 녹아든 각별한 동료애가 유난히 애틋하다.삶은 인연의 늪이며, 대부분의 인연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마음속에 달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 마음껏 그리움에 젖어들고 싶다. 젊은 날, 친구와 둘이서 탑돌이를 하던 승탑이 변함없이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때는 재미삼아 해보던 탑돌이였다. 문득 내 생활 반경에서 사라진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다.나이가 들수록 만남이 조심스럽다. 친한 벗을 잃고부터는, 남은 인연조차 이별의 무게로 클로즈업 될 때가 있다.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새로운 범주의 사람들을 알게 되고 친분 있게 지내던 사람들과는 소원해졌다. 소식이 뜸하거나 끊어진 인연들도 나뭇잎 지고 새잎 돋듯 무탈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두 손을 모으고 마음도 모아 탑돌이를 한다. 하나씩 떠오르는 인연들, 그들과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를 떠올리고 싶은데 서둘러 꿰맨 상처자국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흔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좀 더 사랑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시간들도 보인다. 젊은 날엔 인연의 귀함을 몰랐다. 아둔했던 나에게 지혜의 눈은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모양이다.조낭희 수필가사색에 잠겨 승탑을 돌고 있는데 딸이 손녀를 안은 채 내 뒤를 따른다. 성큼성큼 따라오는 딸의 건강한 발길에 묻어나는 소원들, 해맑게 웃는 손녀의 하얀 앞니에 머무는 계절은 얼마나 눈부신가. 소소하고 작은 것들이 아름다운 날, 나를 성장시켜 준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탑돌이를 마친다.반야교를 건너 내려오는데 계곡에 홀로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쏠리듯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가슴 속으로 하염없이 가을이 쌓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하얀 수첩이 눈길을 끈다. 그는 분명 시인이거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계절의 품에 영혼을 맡기고 앉아 있는 그에게 훌륭한 시적 영감이 내려앉기를 기도한다.남과 나를 향해 마음이 모아지는 계절, 가을은 무언지 모를 허전함을 남긴 채 기러기 날아가듯 또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2020-11-23

고양이의 눈에 비친 기묘한 세상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그다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당연스레 알고 있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1905년 1월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에 그저 장난처럼 실은 이 소설로 소세키는 일약 일본의 국민작가가 될 수 있었다. 도쿄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곳저곳의 중, 고등학교에서 교사나 대학의 강사를 하고 있던 소세키는 대학 친구인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를 따라 하이쿠를 짓거나 하면서 문학 창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별로 대단한 시인은 못됐던 소세키는 시키가 만든 하이쿠 잡지에 예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게재했고, 그로부터 메이지 말년에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됐다. 고양이의 눈으로 비친 성격이 고약한 서생에 불과한 소세키 자신과 그가 바라보고 있는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풍자가 당시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줬을 것이 틀림 없다. 여전히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존재이다.사실,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본다고 하는 시선이나 상상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고양이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작가가 제멋대로 보고 싶은 대로 떠올린 것뿐이다. 고양이 같은 동물이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인간의 사고를 동물에게 투영하는 인간주의의 기운이 이 소설의 한켠을 붙들고 있다. 하지만, 저만치서 나를 응시하면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자기 논리를 갖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속에 인간이나 할 법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이 주는 응시의 힘이다. 이 소설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를 떠올리며, 그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투영하는 사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고양이가 바라보고 있는 인간 세계가 바로 작가인 소세키 자신이라는 것도 재미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여기에서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선생 노릇을 고달파하면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불평을 늘어놓고 있거나 서재에서 낮잠을 자면서 펼쳐 놓은 책에 침을 흘리거나 엄청난 양의 대식을 하면서 신경성 위장병을 앓고 있는 소세키의 민낯이 고양이의 눈을 통해 가장 투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 소설 이후, ‘마쓰야마’에 내려가 교사를 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 ‘도련님’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맹목적 허위의식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보여줬던 소세키는 여기에서도 다름 아니라 고양이의 눈을 통해 자기 모멸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손에 쥐고 있던 동전이 땅에 떨어지면, 그 순간 왠지 그 동전이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기존에 만들어진 인간 관계들로부터 벗어나 삶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좀 더 기묘해지고, 좀 더 재미있어진다. 우리가 아직 이름도 없는 이 고양이의 눈을 따라 성격 고약한 주인과 그 주변의 인간 세계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으로 자동화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좀 더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목매고 있는 모든 의미들이나 가치들은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다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앞서 마사오카 시키 문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1874~1959)는 소세키를 기억하는 글에서 소설가로 유명해진 이후의 소세키가 아니라 함께 시를 짓거나 하면서 좌충우돌했을 때의 소세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른바 소세키적인 세계는 여기에서 출발해서 더 먼 어딘가로 나아갔지만, 그 세계의 본령은 늘 이 지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홍익대 교수

2020-11-23

차세대 인증기술

차세대 인증기술은 기존의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인증기술로, 지문이나 홍채, 얼굴, 정맥 등을 이용하는 생체인식기술, 블록체인을 이용해 고객 식별정보를 분산 저장하는 분산ID기술(DID) 등이 꼽힌다.우선 생체인식기술은 지문이나 홍채, 얼굴, 정맥 등 인체의 생체정보 중 일부를 이용해 복제가 어려워 보안성이 높은 기술이다. 스마트폰, 금융결제 등에 많이 쓰이면서 특허출원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 달 미국 최대 e커머스 업체 아마존이 유통 분야의 새로운 결제 시스템으로 손바닥 인증 기술을 선보여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시장 분석업체 모틀리풀은 아마존의 손바닥 인증 기술인 아마존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에 따른 비대면접촉 방식의 쇼핑이 늘면서 더욱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했다.아마존원은 아마존이 최근 공개한 비접촉식 손바닥 정맥 인증 기술을 토대로 내놓은 인증·결제 기술로, 신용카드를 단말기에 먼저 삽입하고 손바닥 정맥을 스캐닝해 등록하면 그 후에는 사용자가 단말기에 손바닥을 보이게 가까이하면 자동으로 인증해 결제를 처리한다. 이 기술은 단말기만 교체하면 구현할 수 있어 매장이나 콘서트장, 테마파크 등의 다양한 장소에서 활용할 수 있어 어디까지 확산될지 주목된다.이와 달리 분산ID기술은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활용해 암호화한 개인 식별정보를 블록체인기술을 통해 위·변조되지 않았음을 검증하는 기술이다. 분산ID기술도 시장주도권 경쟁이 치열한 유망한 기술로, 마이크로소프트와 IBM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발빠르게 서비스개발에 나서고 있다. 차세대 인증기술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비대면 서비스의 필수요소로 선제적으로 지식재산권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는 첨단기술분야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1-23

스트레스에 대한 단상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몇 년 전 몸에 이상을 느껴 몇 가지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결과는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그 이후 내 생활의 중심을 스트레스 관리에 두었지만, 그것을 혼자 관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우리가 흔히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것은 외부 요인에 대한 개체의 반응이다.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 요인은 스트레서라고 한다. 스트레스 관리가 어려운 것은 스트레서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최근 읽은 ‘나의 슬기로운 감정생활’이라는 책에서는 스트레스가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감정이 문제라고 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도파민이나 세레토닌, 옥시토신, 엔돌핀 같은 행복 호르몬이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긍정적 반응을 선택하라고 조언해준다.그러나 도파민이나 세레토닌, 옥시토신, 엔돌핀 같은 호르몬이 나오는 스트레스는 유스트레스라고 해서 우리가 보통 말하는 부정적 스트레스와는 상황이 다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 갈고닦은 실력을 뽐낼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 기록을 깨고 싶은 암벽 등반가 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유스트레스이다. 반면에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는 직장인, 적성에 안 맞는 공부를 해야 하는 수험생, 시댁과의 갈등에 힘들어 하는 며느리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디스트레스 상황이다. 이런 디스트레스 상황에서 긍정적 감정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같은 상황이라도 유스트레스로 느끼는 사람이 있고, 디스트레스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다잡아도 디스트레스를 유스트레스로 전환시키기는 어렵다. 그래도 여러 이완법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출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쉽지는 않다. 이미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개체는 스트레스를 조절할 힘을 상실한 지 오래됐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가장 좋은 방법은 심각한 디스트레스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는 않다. 원시시대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야생동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죽음은 아니다. 사회적인 죽음 역시 생물학적인 죽음만큼 두렵다. 그렇게 사회적인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결국 몸에 이상을 느낀 후에야 알게 된다. 이미 몸에 이상이 온 후에는 산책하기, 명상하기, 잠 잘자기, 영양가 있는 음식 먹기 등 여러 스트레스 해소책은 무용지물이기 십상이다. 몸의 힘도, 마음의 힘도 소진되었을 가능성이 많다.여기까지 읽으면서 독자 여러분의 스트레스가 가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과도한 스트레스로 집중력이나 판단력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면,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자주 점검해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몸에 이상을 느낄 정도로 진행이 되었다면, 이런 자가 치유서를 읽느라 애쓰지 말고, 당장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2020-11-23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관상

강희룡 서예가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 선생의 이론서인 ‘인정, 측인문(人政,測人門)’에 ‘행사상(行事相)’이라는 관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관상은 상을 살피는 것으로 그 방법이 다양하며 얼굴의 구성을 살피는 면상(面相), 뒷모습이나 골격을 살피는 배상(背相), 또는 골상(骨相), 마음을 살피는 심상(心相)이 있다.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심상, 즉 마음의 상으로 최종적으로는 마음의 씀씀이가 어떠냐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관상이 별로였던 사람이 많은 선행을 베푼 뒤에는 좋은 인상으로 바뀌어 있더라는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경우이다.언제부터인가 미신적인 요소로 치부되면서 우리 곁에서 멀어졌던 관상술이지만 실은 오랫동안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일종의 경험과학이다. 관상을 단순히 얼굴 생김새만을 본다면 그 정확도가 많이 떨어진다.왜냐면, 사기꾼의 상당수가 좋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고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관상을 보는 방법이 있다. 행사상(行事相)을 요약하면, 면상은 배상만 못하고, 배상은 심상만 못하다. 이 심상도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행사상만 못하다. 면상, 배상, 심상의 길흉 모두는 반드시 행사에 드러나므로 행사를 버려두고 사람의 상을 살핀다면, 이는 곧 마무리하지 못한 문기(文記)인 셈이다.최한기는 이론에 따라 외면을 살피는 것을 상법(相法)이라고 하고, 이론에다 관상가의 직관이 더해져서 내면을 살피는 방법을 상술(相術)이라 하면서 이 상술의 어려움에 대해 논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보완적 방법으로 행사상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모든 상의 길흉은 그 사람의 행위로 드러나기에 살피기 어려운 심술을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실제 행사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초나라 관상가에게 장왕(莊王)이 그를 찾아가 상법에 대해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신은 사람의 상을 잘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관찰하고 그 사람의 벗을 관찰합니다”. 일상적인 처신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그 사람의 상을 보았는데 거의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결국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느냐의 여부가 그 사람의 선악과 길흉을 판단하는 주요 요소인 셈이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이 관상까지 보는 시대다. AI 관상가가 최근 정치권에서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창총장에 대해 분석한 관상을 보면 둘 다 강한 고집으로, 추에 대해서는 “성실하고 의지가 강한 편이나 강한 고집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결론을 냈고, 윤에 대해서는 “의지가 강하고 목표를 세우면 이를 위해 노력과 최선을 다 하는 편으로 고집스럽게 보여질 수 있으나 이는 목표를 이루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상앱의 이러한 결과를 단순 재미로 볼 수 있겠지만, 사람은 삶의 족적에 따라 그 얼굴상이 변한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국민들은 이들의 얼굴상을 보면 누구의 삶이 더 부끄러움이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2020-11-23

포항공항 존폐위기 ‘공항명칭변경’으로 넘어보자

안병국포항시의회 운영위원장오늘날 우리 국민 대다수가 포항하면 포스코를 떠올리지만 사실 역사 속 포항은 공항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포항공항은 과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오천면에 세운 오천비행장이 시초다. 이후 6·25전쟁 당시 미 공군 제1전투비행대가 이곳(K3)에 주둔한다.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 1951년 9월 3일 F9F 펜서를 몰고 폭격임무 중 대공포에 피격돼 포항공항으로 비상탈출한 기록이 있다.민항공항의 역사는 지난 1970년부터다. 그해 2월에 민항시설이 설치되고 3월에 서울∼포항노선이 취항한 이래 2020년 2월까지 50년간 공항이 유지돼 경상북도 내에서 유일한 공항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50년을 달려온 포항공항도 항공사의 경제적 어려움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승객급감 등으로 지난해 2월부터 항공기 운항을 중단하게 된다.하지만 기회는 위기 속에서 찾아왔다. 코로나19로 국제선 취항에 발이 묶인 (주)진에어가 포항공항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저비용항공사인 (주)진에어가 지난 7월 31일부터 경상북도, 포항시, 경주시와 협약으로 포항공항의 하늘길을 다시 열었다.지역경제의 관문인 하늘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은 환동해 거점도시 포항에 새로운 피가 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런 기회의 순간을 어떻게 하면 새로운 지역경제부상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까. 작금의 우리 현실을 보자. 지진의 고통, 지역 주력산업인 철강산업의 침체,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지역민의 생계난이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포항이 환동해권 중추도시로 거듭나고 인근도시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은 무엇일까.필자는 지역상생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바로 포항공항의 명칭을 “포항경주공항”으로 변경, 지역거점발전의 플랫폼으로 양도시가 공유경제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이 절실하다.경주시도 협력의 주체로서 힘을 보탠다. 매년 취항사인 (주)진에어의 재정지원금 10%를 분담한다.포항공항지원 조례도 이미 제정했다. 경주시는 천년고도 역사문화도시인 경주에 공항이 없는 만큼, ‘포항경주공항’으로 이름을 바꾼다면 대외적인 홍보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따라서, 경주를 찾는 외래 관광객을 유치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는 것이다.포항시도 경주시를 방문하는 항공 수요를 늘려 장기적으로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포항공항을 활성화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공항이라는 주요 시설을 두 도시가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도로 및 시외버스 등 접근교통의 확충이다.경상북도의 지원이 절실한 대목인 것이다.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길은 열리게 돼 있는 것이다.포항·경주 78만 시민 모두가 새로운 지역의 역사를 다시 세운다는 마음으로 함께 협력하면 ‘포항경주공항’의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또한, 장기적으로는 포항과 경주가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2020-11-23

실패에서 배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다. 실패를 거울삼아 재창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에 들어 실패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의도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2008년 실패공유 컨퍼런스가 생겨났다. 페일콘(failure conference)이라 불리는 이 모임은 남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실패를 껴안고 성공을 만들어가자는 사회 캠페인으로 발전,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핀란드 헬싱키에서는 매년 10월 13일을 실패의 날로 정해 갖가지 행사를 벌인다. 학생과 교수, 창업자 등이 모여 자신의 실패 경험을 이야기하며 서로가 실패를 축하해준다.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문화를 확산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날이다.이런 실패문화에 힘입어 성공한 것이 핀란드의 모바일 게임인 앵그리 버드다. 앵그리 버드를 만든 로비오 엔터테인먼트사는 이 게임을 무려 51번이나 국제시장에 출시했으나 실패했다. 그동안 기업이 도산 위험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이라 한다.최근 일본에서는 실패를 학문으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많고 실패의 경험이 귀중한 자산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실패 박람회가 개최되는 등 실패가 주는 교훈에 대한 중요성을 점차 깨달아 가는 추세에 있다.20여 차례 쏟아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집값을 잡기는커녕 집값을 되레 올려놓았으니 국민의 분노는 당연하다.그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실패를 반면교사 삼는 정부 자세부터 바꾸지 않는다면 실패는 거듭될 뿐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1-22

위원회… 그 ‘승자독식’의 덫

안재휘 논설위원‘정치꾼은 다음 선거만 생각하고, 정치인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말이 참이라면 지금 이 나라는 절망적이다. ‘가덕도 신공항’ 악성 분열 바이러스가 시나브로 대한민국 민심을 강타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도 갈피를 통 못 잡는 제1야당 국민의힘 영남 권역은 남북으로 확실히 쪼개지고 있다.정부 여당의 ‘김해신공항 백지화-가덕도 신공항 추진’ 이야기는 어제오늘 등장한 주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권은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짜놓고 다 결정된 김해신공항 건설을 미적거리며 물밑작업을 해왔다.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부울경) 선거를 ‘가덕도 선거’로 몰고 가서 큰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나서는 곤란한 처지의 국토교통부를 배제하고 국무총리실에 악역을 맡겼다.국무총리실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는 ‘근본적인 검토’라는 알쏭달쏭한 여섯 글자를 검증결과라고 내놓았다. 결과발표가 나기도 훨씬 전에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부산에 가서 “더 이상 희망 고문을 하지 않겠다”는 수상한 말을 했고, 국토교통부 차관은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로부터 ‘가덕도 신공항 검토 용역비’ 문제로 쌍욕을 얻어먹었다.검증결과 발표가 나던 날은 아침나절부터 국회 정론관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의 ‘가덕도 신공항’지지 선언 릴레이가 벌어졌다. 검증위원회 김수삼 위원장은 뒤늦게 “김해공항 백지화라는 건 한 번도 생각 안 했다”는데 정치권은 ‘가덕도 신공항’ 합창부터 부르고 있으니 다들 제정신인가 모를 일이다.결론 다 정해놓은 다음 알량한 ‘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당성을 조작하는 협잡질은 비단 이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대 정권들이 다 그렇게 ‘승자독식’의 덫을 민주적 절차로 위장해서 써먹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김해신공항 검증위원들도 검증결과를 ‘백지화’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검증 과정부터 샅샅이 뒤져보는 게 순서다.‘가덕도 신공항’과 관련한 비판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은 권영진 대구시장이 내놓은 “부산의 정치권 몇몇하고 부동산업자하고 건설업자 카르텔이 이어져 부산시민들도 속이고 영남권 전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는 분석이 가장 정확하다. 4년 전에 끝난 육상경기에서 꼴등을 한 선수를 이상한 수작질로 갑자기 1등으로 바꾸는 건 우리 젊은이들이 기겁하는 ‘불공정(不公正)’의 문제이기도 하다.벌써 조국 전 장관은 ‘가덕도 신공항’ 작명에 들어가서 ‘노무현 공항’으로 하자고 초를 치고 있다는데, 8년 전에 “신공항 10조면 고교 무상 교육 10년이 가능하다”며 반대했던 SNS 글이 소환되며 또 한판 웃음거리가 됐다. 아무래도 조 전 장관은 일구이언(一口二言) 기록으로 머지않아 기네스북에 오르게 생겼다. 그나 마나, 검증위의 발표조차ㅁ 수상쩍은 판에 빛의 속도로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안’을 제출한 부산지역 국민의힘 의원들을 어찌해야 하나. ‘정치꾼’ 말고 어디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곤 이 나라에 정녕 한 명도 없는 것인가?

2020-11-22

영양 전통시장 배송서비스로 전화 한통이면 집 앞까지 배달해요

오도창영양군수영양전통시장은 1918년 5월 4일 개장해 1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오래된 시장이다. 최근 소비자들은 상품의 다양함과 이용의 편리함을 이유로 인근 마트를 이용하거나 도시의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 지난 세월 골목의 노점 리어카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과 물건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던 영양 전통시장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점차 줄더니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경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해 예전의 활기찬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최근 온라인이나 모바일을 통한 거래가 많아짐으로써 힘들게 발품 팔며 시장을 거니는 일도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군은 지역 특성상 대형마트나 배달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 전통 시장을 이용하는 소비층이 대부분 고령의 어르신들이라 영양 전통시장을 활성화를 비관할 상황은 아니다. 대형마트가 전무한 영양에서는 소비자들을 전통시장으로 이끌 수 있는 경쟁력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전통시장이나 5일장을 이용하는 어르신의 비중이 우리군은 많기 때문에 영양 전통시장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이에 영양 전통시장 상인들은 힘을 합쳐 ‘장보기 좋은 시장’으로의 변신을 시도했으나 운영이 영세한 상인들의 힘만으로는 대형마트와 온라인 매장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군은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 전통시장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특히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손님이 편하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영양전통시장 도로확포장 공사, 전통시장 점포 창틀(새시)교체, 전통시장 화재안전시설 개보수(CCTV), 전통시장 노후 전선 교체 및 누전차단기 설치 등을 시행했다. 향후에도 영양전통시장 공영주차장 건립사업, 전통시장 화재감지시설 설치, 클린 5일장 육성사업 등이 완료가 되면 보다 쾌적한 전통시장 환경을 조성하면 소비자들의 방문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또한 여기서 주목할 점은 2020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시장 장보기 배송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 점이다. 영양 전통시장에서의 배송서비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장보기 배송서비스는 다른 지자체에서 성공적으로 정착이 된 사례도 있지만 일부는 준비과정에서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 해 실패한 사례도 많아 배송서비스 시행에 따른 우려 때문에 사업 추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배송전담 인력(2명) 확보와 차량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전에 2019년 7월 3개월간 시범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장보기 및 배송서비스는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현장에서 직접 구매하거나 배송서비스 콜센터를 통해 전화 주문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영양읍 소재지(화천, 무창리, 기산리 등 제외) 내 지역은 2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 대해 무료 배송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외 지역은 영양시장 내 상품을 5만원 이상 구매한 후 배송 수수료 2천원을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다. 이 장보기 배송서비스는 교통편이 어렵거나 몸이 불편해 시장 방문이 어려운 어르신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장을 보기 힘든 젊은 층까지도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장보기 및 배송서비스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적정 이상의 배송 건수가 성립되지 않으면 운영비, 인건비를 마련하지 못해 서비스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군은 배송직원에 대한 인건비를 지원해 상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그리고 영양전통시장 상인회에서는 각 점포별로 진열된 상품의 질을 높이고 가격대를 비슷하게 책정하는 등 소비자들이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전화로 주문하는 품목에 대해서는 눈으로 직접보기 사지 못하기 때문에 더 신선하고 질 좋은 상품을 엄선해 배달함으로써 재구매율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전통시장도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몇 년 전까지의 영세하고 낙후된 시설의 영양 전통시장을 잊어버리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뒤지지 않는 최적의 쇼핑 공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우리군에서 지원가능한 모든 방안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군과 시장상인회가 상호협력해 소비자의 입장에서 눈높이를 맞춰 양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영양 전통시장이 활기를 띌 것이라 확신한다.

2020-11-22

식혜 대 식해

안동 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시골 접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짠지와 나박썰기 한 무가 동동 뜨는 김치를 먹으며 살았더랬다. 내게 김치는 국물이 시원한 동치미였고 배추에 고춧가루 버무린 양념을 묻힌 건 짠지였다. 또 한 가지, 말간 국물에 밥알이 동동 뜨는 건 감주이고 고춧가루와 생강 맛이 나는 음료수는 식혜였다. 칼칼한 안동식혜.제사가 많던 우리 집은 겨울이면 늘 식혜가 숭늉처럼 밥상물림에 따라나왔다. 할아버지 상에는 강정과 함께였고, 우리에게는 인절미 구운 것이 떨어지면 생고구마를 깎아서 함께 차려졌다. 늦은 밤 속이 출출하던 참에 살얼음이 살살 낀 식혜 한 그릇을 마시면 겨울밤이 더 든든했다.식혜의 역사를 알아보니 이랬다. 안동은 양반이 많이 사는 곳이라 제사가 많다. 좋은 재료로 조상님을 모시는 기름진 음식을 만들었다. 만들며 또 제사 후에 잘 못 먹던 고기와 생선 등을 먹게 되니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소화제 역할을 하는 음식이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게 안동식혜라는 것이다. 보통 식혜는 그냥 밥풀이 동동 뜨는데 안동식혜는 고춧가루 넣고 맵게 생강도 첨가한다. 거기에 무채도 들어가니 소화제로서 그저 그만이다.조상님들이 간만에 고기를 먹는 후손들이 배앓이를 할까 봐 소화가 잘 되게끔 배려해서 만든 음식이다. 매운 고추와 생강이 소금만 들어간 제사음식의 밍밍함을 눌러 준다. 더불어 채 썰어 넣은 무는 소화제 역할이다. 접실에서는 저녁 늦게 무를 깎아 먹는 습관도 있었는데 생무를 먹고 나면 트림이 잘 나온다. 소화가 잘 된다는 뜻이다. 안동식혜와 같이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먹어도 체하거나 속이 불편하질 않다. 안동 사람들은 안동식혜가 나와야 음식이 다 나온 걸로 알 정도다.안동식혜를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도 먹기가 쉽지가 않다. 비주얼은 물김치 비스무리하지만 찬이 아니라 음료수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맛이 감주에 가깝다. 그러니 첫입에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남편도 처가에 와서 장모가 권하는 손길에 못 이겨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워낙 식성이 좋은 사람이라 조금씩 먹다 보니 이젠 한 그릇 비워내, 친정엄마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경지에 이르렀다.김순희수필가안동의 카페 메뉴판에는 안동식혜도 있다. 포항 대부분 식당에 반찬으로 밥식해가 오르는 것처럼. 밥풀이 많이 보여 ‘밥’ 자가 앞에 붙어 있다. 가자미나 홀때기를 주로 넣고 삭힌 발효음식이다. 식해는 주로 함경도, 강원도, 경북 등 동해 지역에서 널리 발달했다.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 지역이 생선을 소금으로 절여 염장 발효한 ‘젓갈 문화권’이라면, 상대적으로 소금이 귀한 동해는 쌀이나 기장, 조 등 곡물로 발효시킨 ‘식해 문화권’이다.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다니러 가면, 휴일 새벽에 아들을 깨워 감포항에 나가셨다. 배에서 금방 내린 생선을 사기 위해서였다. 멸치로 젓갈을 담고 가자미로는 식해를 만들어 단지에 넣고 방 윗목에 헌 이불을 덮어 놓았다. 발효가 잘되게 하는 방법이었다.포항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장기면으로 시집온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식해를 반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편이 안동식혜 한 잔을 호로록 비워내는 거에 비해 나는 노력이 부족하다. 비린내가 날 것이다며 입에 대지도 않은 탓에 아직도 식해의 깊은 맛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식해뿐만 아니라 다들 좋아하는 회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에서 생선 굽는 비린내는 거의 풍기지 않는다.어릴 때부터 먹지 않았던 탓인지 조개구이를 저녁으로 먹었던 날에 밤새 배앓이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회가 풀코스로 나오는 곳에서 대접을 받았던 날에는 먹는 중에 체하기도 했다. 생선이 귀한 식혜 문화권 사람이 식해 문화권에 들어와 겪는 시차 적응 현상이다. 30년을 채우면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2020-11-22

‘과메기의 날’을 만들자

얼마 전 젓가락 같은 과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부터 거의 장대 같은 과자를 직접 만들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던 ‘빼빼로의 날’이라는 11월 11일이 지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과 직접 기다란 과자를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부모나 좋아하는 이성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어떤 것이 좋을지 가게 앞에서 심각하게 고르는 학생, 젊은 직장인들이 아니라면 이날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하고 매출로 연결하려고 신경을 쓰는 곳은 아마도 편의점이나 마트를 경영하는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하지만 중국은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원래부터 달과 날이 겹치는 중일(重日)을 귀하게 여기고 양수인 1월, 3월, 5월, 7월, 9월에는 각각 1일, 3일, 5일, 7일, 9일이 양수(陽數)로 겹치는 날이어서 명절처럼 지내기도 한다. 그동안 11월의 중일은 큰 의미가 없었으나 1이 싱글을 뜻하는 숫자이기도 하고 무려 4개나 겹치기에 중국의 한 대학생이 이성 친구가 있는 이들이 기념하는 ‘밸런타인데이’에 대항하는 뜻으로 ‘독신의 날’ 또는 ‘독신자의 날’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착안하여 비즈니스로 연결한 곳이 알리바바(阿里巴巴)그룹이었다. 알리바바그룹은 이날을 ‘온라인쇼핑의 날’로 삼고 판매행사를 기획하였다. 그러자 중국의 다른 대형 쇼핑플랫폼들까지 이벤트에 동참하여 이제는 중국의 대표적인 소비행사인 ‘솽스이(雙11· Double 11)’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2009년에 시작한 ‘솽스이’가 11번째다. 그동안 중국 소비자들은 이날 0시부터 12일 0시까지 이루어지는 이벤트에 대비하여 미리 사고 싶은 물건들을 상거래사이트의 ‘쇼핑카트’에 담아두었다가 이벤트가 개시와 동시에 가장 먼저 클릭하여 구매하는 경쟁 심리까지 생겨났다. 실시간으로 이 이벤트를 중계하는 곳도 생겨나 주목을 모으고 있기도 하다.11월 11일 오전 0시부터 개막한 ‘솽스이’에서 알리바바그룹의 쇼핑사이트인 티엔마오(天猫·Tmall)가 원화 환산(1위안 169원 기준) 약 1조6천900억 원에 이르는 100억 위안의 거래액을 기록하는 데는 96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작년보다 29초가 빨라졌다. 이 이벤트에서 티엔마오가 12일 오전 0시에 폐막하기까지 24시간 동안의 거래액은 무려 2천684억 위안(약 45조3천596억 원)이었다. 중국 상무부가 14일 발표한 11월 1일부터 11일까지 중국 온라인소매판매액은 사상 최대인 8천700억 위안(약 147조300억 원)이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6.7%가 증가한 수치다. 11일 동안 하루 평균 13조3천553억 원어치의 매출을 기록한 셈이다.이와 같은 세계적인 판매전에 각국이 손을 놓고 있을 리 만무하다. 이날 알리바바가 달성한 거래액은 일본 최대 상거래사이트인 라쿠텐(697D天)의 1년 매출액보다 많다. 일본 교토 통신에 따르면 알리바바 플랫폼에서 솽스이 행사 개시 1시간 만에 10억 원 정도의 매출을 기록한 곳으로는 중국업체 외에 애플, 나이키 등 미국기업, 파나소닉이나 시세이도와 같은 일본기업도 있다고 한다. 특히 올해 중국의 솽스이 이벤트에서 매출 규모가 10억 위안(약 1천690억 원)을 넘긴 기업은 15개사였는데 거기에 일본 유니클로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 솽스이 이벤트에 일본기업들은 일찍부터 참여해왔다. 솽스이에서 팔린 외국 브랜드 매출액 순위에서 일본이 4년 연속 1위를 차지하였는데 가오(花王)의 일용품, 시세이도의 화장품, 야만의 미용기기는 특히 중국 소비자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식품저장 용기 회사가 이곳에서 큰 매출을 일으킨 적도 있다.전자상거래로 유명한 아마존도 중국의 왕성한 구매력을 그냥 두지는 않았다. 올해 솽스이에 참여한 곳은 아마존 미국 외에 영국, 일본, 독일이 특별 코너를 만들어 인기 있는 국제브랜드 60여 개 이상 품목을 특별할인하는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중국의 온라인상거래 이벤트이기는 하나 말 그대로 온라인세상에 넘지 못할 국경은 없다. 이 엄청난 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솽스이에 전 세계 기업들이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올해에는 총 25만 개에 이르는 브랜드를 가지고 500만 개의 업체가 티엔마오에 진출하였다. 올해 처음 진출한 해외브랜드만 2천600개가 넘는다. 38만 개에 이르는 중국 지방기업들도 이번 행사를 통해 판로를 새로 개척하였으며, 이번 이벤트에서 팔린 물품을 유럽 각국으로 배달하기 위해 참여한 중국 택배회사만해도 400만 개가 넘는다고 하니 입이 절로 벌어질 뿐이다. 그동안 세계의 공장이었던 중국이 세계의 시장으로 바뀐다는 이야기는 오래되었지만 명실공히 세계의 시장 중국의 구매력을 이번 행사에서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포항에는 신선한 농수산물이 많고 제법 명성이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해외는 별개로 치더라도 국내 소비자들에게 온라인상거래를 통해 꾸준히 팔 수 있는 최종제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특정 시기에 생산되는 농산물, 수산물 등이고 이것을 2차, 3차로 가공하여 연중 판매하고 맛볼 수 있는 식품으로 고부가가치화한 상품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중국 솽스이의 판매실적을 그냥 보고만 있자니 속만 아프다. 우리도 무슨 수라도 내어야만 한다. 싫든 좋든 이제 11월 11일은 세계적인 이벤트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중국의 ‘독신자의 날’을 적극 비즈니스로 끌어들이고 있다. 일본 야후쇼핑에서는 11월 11일에 ‘좋은 쇼핑의 날 캠페인’을 하고 있고 라쿠텐에서는 아예 ‘독신의 날’로 한정시킨 대규모 판매촉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어떠한 것도 지나치는 법이 없다. 조금이라도 특이하거나 내세울 만한 것은 모두 비즈니스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11월 11일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 11월 11일은 공식 기념일로는 ‘보행자의 날’, ‘농업인의 날’이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거나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빼빼로 데이’라는 말도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독신자의 날’을 탄생시킨 아이디어를 생각해보면 포항에서도 이날을 새로운 ‘날’로 삼을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꽁치든 청어든 반을 갈라 내장을 훑어내고 깔끔하게 나란히 늘어트려 덕장에서 기름이 빠질 때까지 얼렸다 녹이면 쫀득하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건강식품인 ‘과메기’로 탄생한다. 11월 11일이라는 숫자에서 과메기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고 우길 수 있지 않겠는가. 포항에서는 다소 무리가 따를지는 모르겠지만 11월 11일을 ‘과메기의 날’로 정하였으면 한다. 앞으로 매년 11월 11일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빼빼로’를 직접 만들거나 사서 선물하면서 즐거운 ‘빼빼로 데이’를 즐기더라도, 소비자들은 ‘과메기’를 대대적으로 판매하는 포항만의 ‘과메기의 날’로 활성화하였으면 좋겠다. 이와 같은 숫자를 이용한 판매촉진은 과메기 외에도 있을 수 있다. 포항이 자랑하는 돌문어도 날짜를 잡을 수 있다. 문어의 다리는 8개다. 8월 8일이라면 ‘팔팔한 문어’를 먹는 ‘문어의 날’로 삼기 좋다. 오징어의 다리는 10개다. 중국의 쌍십절(10월 10일)은 다소 정치색이 있지만 우리는 ‘울릉도 오징어의 날’로 삼아도 좋다./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11-22

초병렬 독서법

김현욱 시인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책 여러 권을 쌓아두고 손닿는 대로 읽는 버릇이 생겼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문학과 비문학이 절묘하게 섞여있다.이장근 시인의 시집 ‘당신은 마술을 보여 달라고 한다’와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고전 ‘시경’을 같이 읽는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은 옳다’와 손훈영 작가의 ‘그 여자의 자서전’을 번갈아 읽는다. 이화정의 ‘북 코디네이터’와 메리 파이퍼의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를 함께 읽는다. 책 대 여섯 권을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함께 읽어나간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책 읽는 속도가 느리다. 어떤 책은 잘 읽히고 많이 읽히는데, 또 어떤 책은 몇 줄 읽다가 보기 싫은 사람처럼 덮기도 한다. 아무렴 어떠랴. 누구 보라고 책 읽는 게 아니다. 내가 좋으면 그뿐. 서로 다른 장르의 책을 여러 권 번갈아 읽다보니 평소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물과 현상들이 서로 ‘융합’되는 기이한 경험을 종종 한다.‘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저자 나루케 마코토는 “한 권씩 감질나게 읽지 말고, 대범하게 동시에 열권을 읽어라. 읽되, 지혜롭게 읽어라. 가급적 서로 연결고리가 거의 없는 극단적으로 다른 책들을 골라 최대한 몰입해서, 읽어야 할 곳과 읽지 말아야 할 곳을 선택해 가며 신속하게 읽어라.”고 주장한다. 일명 ‘초병렬 독서법’이라고 하는데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쌓아두고 다양한 책을 동시에 섭렵하는 방식을 말한다. 화장실, 거실, 침대, 식탁 곳곳에 여러 권을 책을 놓아두고 동시에 읽는 것이다. 장르가 다른 책을 읽으면 뇌의 다양한 부위가 활성화되고 의욕과 긴장감이 살아나 예기치 않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때론 혁신적인 생각이 떠오를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한다.손훈영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자주 밑줄을 그었다. 이를테면, “글을 쓰면서 살아가겠다는 것은 결국 재능의 문제가 아니고 의지의 문제.”, “진실로 ‘문학’을 하고 싶지, ‘문학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행복에는 강렬함이나 활활 타오름이라는 요소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행복이 아니라 강렬하게 집중된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내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행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몰입과 집중이 모자라서다. 집중된 시간을 뚫고 흘러나오는 다이아몬드의 광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빛나는 문장에 마음을 벼리고, ‘시경’을 펼쳤을 때 지루하기만 하던 ‘시경’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채로 다가왔다. 거기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나 ‘코스모스’같은 책을 펼치면 광활한 우주에 시와 에세이의 무늬가 어른거린다. 인문학과 과학이 어떤 독특한 접점을 이루는 것을 목격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시구가 떠올라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시한 책은 읽다가 얼른 덮고 다른 책을 찾을 수도 있다.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선동적이지만, 핵심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자유롭게 오가며 색다른 경험을 해보라는 것이다.

2020-11-22

호미반도 둘레길을 걷다

윤영대수필가지난 일요일 산행을 하려다 산불경계령으로 입산금지됐다는 귀띔에 발길을 돌려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을 갔더니 마침 포항시 랜선 걷기축제가 진행되고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2코스를 같이했다.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2017년 개통된 25km 해안길로 네 코스로 나뉜다. 이 둘레길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도록 바다 위로 데크로드가 만들어져 있고 자연경관을 훼손치 않고 그곳 지형지물인 백사장과 몽돌밭, 갯바위 등을 이용해 다양하다. 임곡, 입암, 마산, 흥환, 발산, 대동배를 지나며 작은 포구의 삶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1코스의 임곡리에 들어서니 낮은 방파제와 담벽에 그려진 연오랑세오녀의 전설이 길게 이어져 이야기를 보여 준다. 작은 항구를 지나 청룡회관을 올려다보며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으로 올라갔다. 포항시 마스코트 ‘연오와 세오’가 반갑게 맞이하기에 같이 사진 한 장 찍고 축제 기분을 냈다.2코스 ‘선바우길’ 시작점인 일월대 앞에서 ‘360도 회전 영상촬영’도 체험하고 조릿대 군락지를 지나 입암항에 내려서니 멸치 말리는 냄새가 코끝에 살랑댄다. 마을 끝에 우뚝 선 선바우 앞에서 둘레길이 본격 시작된다. 네 코스 중 데크가 가장 길게 놓여있는 길이며, 조용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물 위를 걷듯 걸으면 연보라색 해국이 피어있는 형형색색 바위들이 신기한 해안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근바위, 폭포바위, 여왕바위, 소원바위는 자연의 조각품이고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도 새겨 놓았다. 킹콩바위는 갯가에 앉았다. 하얀 바위벽 힌디기를 지나 하선대에 서면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파란 바다가 멀리 포항제철의 영일만 신화를 들려주듯 찰랑인다. 몇 번 걸어 봤지만 그때마다 감탄하는 둘레길이다. 몽돌 길을 걸어 먹바위를 지나 마산리 쉼터에서 막걸리도 한잔했다. 작은 항구엔 엄마아빠를 따라온 아이들도 낚시를 드리우고 건너 방파제엔 텐트도 즐비하다. 비문바위 지나 예쁜 아치형 데크 위에서 미인바위를 보고 전망대도 올라보고 흥환리 해수욕장에 들어서니 캠핑을 하는 부부와 연인들이 행복해 보인다.3코스는 ‘구룡소길’. 발산리와 대동배를 지나는 이 산책로에는 데크는 별로 없으나 바닷물에 발 적시듯 호젓이 걷는 맛이 좋다. 장기목장성비를 보고 바닷가를 한참 따라가다 보면 장군바위가 위엄있게 서 있다. 다시 발산리 항을 지나 자갈길을 가다가 계단을 올라가면 봄에는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를 볼 수 있는 숲길로 이어진다. 좁은 산길이 끝나는 전망대에서 비밀에 싸인듯한 구룡소를 내려다보고 대동배까지 걷는다. 이따금 국도로도 걸어야 된다.다음날 늦게 4코스 ‘호미길’을 돌았다. 까꾸리개 언덕 길에는 서상문 시비와 호미숲 해맞이터 기념비가 있고 독수리바위는 일본실습선 조난비를 염려하듯 날아오를 듯하다. 바다새들의 배설물이 하얗게 덮인 대보항 방파제 따라 갈매기 떼 울음소리 요란한 해변 길 돌며 호미곶등대 소나무숲 속 이육사 청포도 시비와 영일노래비를 읽노라면 어느덧 ‘상생의 손’이 반긴다.해안둘레길이 끝나는 호미곶해맞이광장에 서서 새천년기념관 뒤로 붉게 물든 해넘이를 향해 두 손 모아 나라의 안녕을 빌어 보았다.

2020-11-22

코로나 음모론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코로나19가 빨리 잡혀야 할텐데….”하루에도 몇번씩 중얼거리는 혼잣말이다. 코로나 확진자가 300명으로 넘어가고, 수도권과 강원도는 1.5단계로 사회적거리두기 단계가 강화됐다. 이대로라면 또 다시 2단계로 강화될 듯 싶다. 2단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실시되면 식당이나 커피숍, 스크린골프장, 노래방, 당구장 등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니 그들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많은 고통을 받아온 영세소상공인들의 한숨과 고통이 더 깊어지면 그들이 무슨 희망으로 버티어낼까.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가 언제까지 우리의 삶과 생활을 옥죄도록 용인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정부여당은 K방역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세계가 한국의 방역체계를 배워가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다른 나라의 코로나 확산상황과 대처방향 등을 짚어보니 어느 정도 사실과 부합하는 듯하다. 하루에 1만5천 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쏟아지는 독일만 해도 올해초 1차 셧다운에 이어 최근 확진자가 급속히 늘면서 11월초부터 11월말까지 2주간 2차 락다운이 선언됐다. 락다운 기간에는 관광목적의 호텔 숙박이 금지되고, 바, 클럽, 술집, 디스코텍 등과 레스토랑은 문을 닫으며, 테이크아웃과 배달운영만 가능하고, 극장, 오페라, 콘서트 하우스 등 여가시설은 모두 문을 닫는다. 피트니스, 개인스포츠시설, 수영장, 물놀이시설, 영화관, 박람회, 놀이공원도 닫고, 학교와 유치원은 방역조치와 함께 조심스럽게 운영한다. 상점은 입장객 조정과 방역용품, 대기줄을 조정하면서 제한적으로 운영토록 한다. 물론 실내공간에서는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고, 이를 어겼을 때는 벌금 5천유로(한화 658만원)를 물린다. 한국의 코로나 대처방법과 비슷하고, 마스크 미착용시 벌금은 더욱 무겁게 물린다. 이런데도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에 비해 훨씬 경미한(?) 수준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지나치게 국민들을 겁박하며,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 아니냐며 코로나 음모론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정부가 있지도 않은 코로나 환자를 긴장감 조성을 위해 늘렸다 줄였다하며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 등을 제기하는 것이다. 사실 코로나 음모론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의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에 기반을 둔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일부란 설에서부터 미국 CIA가 만든 생물학무기라는 설까지 여러가지다. 그러나 이같은 음모론은 낭설로 드러났다. 한때 안면마스크가 코로나 예방의 효과가 없다는 가짜뉴스 역시 전세계에서 코로나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으니 얼추 사라졌다.정부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감행할 이유가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코로나 음모론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이다. 하지만 음모론은 언제나 사람들의 의심병에 들러붙어 순식간에 세를 불린다. 그러니 정부는 하루빨리 코로나치료제와 코로나 백신 접종을 준비해 코로나 공포에서 국민을 해방시켜주길 바란다.

2020-11-19

김장문화

김치는 그 유래가 고구려나 백제의 생활문화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된 우리 민족 고유의 음식이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 등장한다. 순무김치는 여름철에 먹기가 좋고 소금에 절인 김치는 겨울 내내 반찬이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김장김치는 ‘겨울의 반 양식’이라 할 정도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장기간 보존이 힘든 채소를 김장이라는 방식을 통해 겨울부터 봄까지 3-4개월간 먹을거리로 보관해 놓는 방식이다.배추와 무를 주재료하고 미나리, 갓, 마늘, 파, 생강과 같은 부재료를 사용해 간을 맞춘다. 이때 사용된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발효되어 김치의 맛을 풍부하게 할 뿐 아니라 영양식으로 건강에도 좋다.추운 북쪽지방에는 김장의 간을 싱겁게 하고 양념도 담백하게 해 채소의 신선감을 살린다. 남쪽지방에서는 기후관계로 짜게 담는다. 젓국을 많이 쓰고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등을 많이 넣는다. 젓국은 김치가 지나치게 삭는 것을 막아 준다.2013년 한국의 김장문화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위원회에 등재됐다. 강강술래, 판소리, 종묘제례 등과 함께 당당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세계에 알렸다.유네스코는 매년 겨울철만 되면 온 가족과 이웃이 모여 김장을 매개로 한 공동체 연대감과 사회공동체가 문화전승의 담당자라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의 90%가 아직까지 직접 김장김치를 담그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한다.김장은 대체적으로 입동을 전후해 가정에서 시작한다. 지금이 김장하기 꼭 알맞은 시기다. 그러나 젊은 세대 중심으로 사먹는 김치가 크게 성행하면서 김장담그기 문화가 예전만 못한 것은 아쉬움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1-19

낙엽을 밟으며….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늘 걸어다니던 캠퍼스 길이 사라졌다. 수북히 쌓인 낙엽으로 사라진 길 사이로 빨강색, 노랑색으로 물들은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느려진 발걸음 속도는 낙엽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린색의 녹음을 놓으면서 변한 낙엽의 색깔은 여전히 멋있다. 마무리가 한창인 나무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자연도 사람도 마무리가 좋아야 한다.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바이든이 승리한 가운데 트럼프 현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지만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미국이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결정될 정도로 타락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오바마 전 대통령의 언론 인터뷰가 주목을 끈다. 그 언론 인터뷰는 트럼프에게 오바마가 개표 다음 날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어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4년 전 전체 투표에서는 지고도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인 주별 선거인단 선거에서 어렵게 이긴 그리고 그러한 주별 선거인단 선거도 주요 주에서 불과 1% 마진으로 이겨 선거인단을 가져간 트럼프에게 흔쾌히 축하 전화를 했다는 내용이다. 오바마는 그 인터뷰에서 “President is a temporary occupant and public servant”( 대통령은 임시직이며 공직 봉사자 일뿐이다) 라고 말한다. 시간이 되면 직을 물려주는 게 당연하며 그것을 자기 것이라는 욕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사실 한국 정치의 불행한 역사는 이 오바마의 대통령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지키지 않은데서 시작 되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지금 정치는 큰 위기에 처해있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온라인 상의 잘못된 정보 확산이 국민의 분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이런 정치적 분열로 국민의 분열이 심각할 정도이다.‘진실의 쇠퇴’(Truth decay) 라는 책도 나왔지만, 진실의 쇠퇴가 한국이나 미국의 분열을 극대화한 원인이라고 봤다. “사실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조롱거리로 여기는 ‘진실의 쇠퇴’가 분열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면서 그러면서 분열을 치료하기 위해선 ‘사실’부터 바로세워야 한다. 사실과 의견 사이의 경계가 흔들려 의견을 믿게 하려고 사실을 조작하고, 사실의 출처에 대하여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출처만 믿으려고 하는 그런 현상이 만연되고 있다.오바마의 부인 미셸 오바마는 4년 전 트럼프의 모함에 엄청 억울했으나, 미국 민주주의 상징인 평화적인 정권 이양 작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밝히면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누구의 자존심보다도 훨씬 크다”고 했다. 바로 “민주주의가 개인의 이기심과 자존심 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린 깨달아야 한다.‘낙화(落花)’라는 시에서 작가 이형기는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점을 우리는 이 시에서 배워야 한다.

2020-11-19

불확실성시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작년 말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신종폐렴이 일 년이 다 되도록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3월 코로나19에 대한 ‘팬데믹’ 선언을 했다. 팬데믹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 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로, WHO가 나눈 전염병 경보 6단계 중 마지막 등급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세계 191개국에서 5천400여 만 명의 환자가 발생해서 130여 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 된 이번 팬데믹 상황은 앞으로 얼마를 더 지속할지 불확실한 상태다.불확실성(不確實性)이란 미래에 전개될 상황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거나 어떤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명확히 측정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엔트로피증가법칙처럼 세상이 복잡다단해질수록 불확실성도 따라서 증가한다. 표준화된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화시대에는 미국이 국제정치, 국제금융, 국제무역에서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의 예측 가능성을 어느 정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였다. 그런데 세계화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진행되고 ICT 혁명이 기술적으로 가세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했다. 그것은 동시에 불확실성도 가중시켜 미국 버클리대 아이캔그린 교수는 “세계가 초불확실성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할 지경에 이르렀다.농경사회에서는 주로 자연현상의 불확실성이 가장 큰 불안의 요소였다. 화산이나 지진 같은 직접적인 재해는 물론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면 생계가 어려워지므로 어떻게든 기후변화를 예측해 보려는 노력을 했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은 하늘의 뜻으로 알고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과 정성으로 불안을 덜고자 했다.‘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뿐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은 지금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 기업을 죽이고 빚과 세금만 늘리는 포퓰리즘 경제정책의 향방도 오리무중이고, ‘내로남불’의 이중 잣대로 법치를 파괴하는 망나니 춤의 전망도 예측을 불허한다. 억지와 거짓말, 적반하장, 후안무치가 정의와 상식을 대신하는 천박한 사회가 가는 곳은 어디인지, 핵폭탄을 머리에 이고 김정은의 눈치 살피기에만 급급한 거짓 평화쇼의 끝은 어디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소위 ‘대깨문’으로 불리는 극렬 친문세력 등 국내 정치에 번진 팬덤문화는 불확실성을 넘어 헤어날 수 없는 늪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가 아니라 무엇보다 상식이 통해야 한다. 잘못이 들통 나면 부끄러운 척이라도 해야 하고, 억지나 파렴치도 정도껏 해야 한다. 철면피 후안무치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무법천지가 되어서는 확실성을 보장할 데가 어디에도 없어진다. 합리와 불합리, 정상과 비정상이 구별되지 않는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겠는가. 역사는, 극도의 분열과 혼란을 조장하여 나라를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몰고 간 것을 이 정권이 국민들에게 끼친 가장 큰 해악으로 기록할 것이다.

2020-11-19

교회와 절에는 무엇하러 가는데?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람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살아가는 나날이 버겁고 힘들어 숨구멍이라도 찾는 마음이 아닌가. 힘들게 하는 세상에 눌리고 지쳐 피난하듯 찾는 게 아니었을까. 일상에 쫓기며 살다가 그래도 그 한순간 하늘이 내게 찾아오는 기쁨을 맛보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이 쫓는 욕심을 벗어야 하고 세상이 재촉하는 경쟁도 그만 두어야 한다. 사찰과 교회는 모두의 피난처여야 하고 평화와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터여야 한다.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늘을 향해야 하고 이 땅의 버거움을 이기고도 남아야 한다. 무소유를 다짐하고 날마다 내려놓아도 이웃을 생각하며 넉넉한 심정이어야 한다.한동안 서점가를 풍미하였던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을 쓴 미국 목사가 있었다. 열심히 믿으면 당신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번영신학’은 교계의 대표저술이 되어 성전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어느 스님이 세상의 평균을 넘는 안락한 처소를 자랑하며 미디어에 등장하였다. 푸른 눈의 다른 스님이 그 모습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이내 생각을 돌이켰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찰과 교회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어느 자락에서 세상과 다른 선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덕이 되고 복을 끼칠 다짐은 어디서 해야 하는 것인지. 세상을 딛고 일어서 성공에 이를 욕심을 종교에서 배운다면, 어려운 이웃과 세상은 어디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찾을 것인지.종교는 달라야 한다. 세상과는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가 있어야 하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지고도 이길 힘이 생겨야 하며 이웃을 바라보는 배려와 공감을 배워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거두는 성공을 겨누기보다 어려워도 함께 누리는 평화에 길들여져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꼭 그리 살지 않아도 풍성한 천국과 극락을 경험하는 기쁨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내려놓고 나누며 살아도 집착하고 경쟁하며 사는 일보다 풍성한 날들이 가능함을 배워야 한다. 불가는 ‘오욕락(五欲樂)’, 즉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여 누리는 즐거움을 경계하였다. 어차피 시시각각 변하여 정신을 병들게 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는 게 아닌가. 기독교가 돈을 ‘일만악(一萬惡)의 뿌리’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번영신학과 기복불교는 종교의 본질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이웃과 함께 애쓰고 노력하는 가운데 선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깨우치고 싶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에도 미움과 시기는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피어오르는 여정이 찾아왔으면 한다. 개인의 성공만 바라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상생을 흡족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한 사람 영웅의 성공 서사를 기다리기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마을이 돌아와야 한다. 본질을 회복한 종교가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아주기를 고대한다.

2020-11-18

구독경제 플랫폼

구독경제는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는 것처럼 일정액을 내면 사용자가 원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공급자가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신개념 유통서비스를 말한다.국내에는 2010년대를 전후해 도입되기 시작, 초반에는 화장품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점 생활용품, 홈쇼핑, 식음료, 명품의류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매달 일정금액을 지불하면 정해진 몇몇 차량 중 원하는 차량을 골라 바꿔가면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도 생겼다. 소비자 입장에선 전문지식을 갖춘 구매담당이 소비자 대신 우수한 제품을 선정해 전해주기 때문에 상품을 고르기 위해 쓰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공급자 입장에서도 사용자의 요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공유경제의 뒤를 잇는 경제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더구나 포털업체인 카카오가 카카오톡 채널을 기반으로 상품구독 서비스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구독경제 플랫폼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해 화제다. 공유 경제에 이어 구독경제로 변화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에 발맞춘 행보다.카카오톡에서는 렌탈, 정기배송 등의 방법으로 상품을 구독하는 방식으로 구현되며, 제품 설명·방문 예약·구매 결정·계약서 작성 등 기존 오프라인 기반으로 운영되던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들이 카카오톡에서 빠르고 편리하게 간소화된다. 이용자는 관심있는 브랜드의 카카오톡 채널에서 상품 정보를 얻고 회원가입부터 신용조회, 전자서명 및 계약, 결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몇번의 클릭으로 처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치냉장고 렌탈을 시작으로 연내 바디프랜드, 아모레퍼시픽, 위닉스, 한샘 등의 렌탈·정기배송 상품을 구입하거나 렌탈할 수 있다. 구독경제 플랫폼은 이미 우리 삶에 깊이 들어와 있는 듯하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1-18

정치적 올바름에 관하여

요즘 젊은 사람들 비평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고들 한다.그러니까 이 사조는 1980년대 미국에서 먼저 쓰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 말은 말의 표현, 용어 사용 같은 언어적 문제에 먼저 적용되어 사용된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 또는 비평계에서 이 말은 그런 시작 단계의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져’ “전통적 관념을 교정하기 위해 새로운 규범을 따르는 태도”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또 그러면서 다문화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 같이 첨예한 문제를 둘러싼 비평적 경향을 ‘반드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다소 ‘강제적인’ 가치관념을 가진 입장들을 두루 사용하는 말로도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최근에 프랑스에서 이슬람교, 알라, 마호메트를 풍자하는 수업 활동을 열었다가 난데없이 ‘광신’에 가까운 18세 청년에 의해 교사가 참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만 사태가 끝나지 않고 또 바다를 건너와 여러 사람의 인명을 살상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여기에 다시 말레이시아의 오래된 지도자 마하티르 모하맛은 얼핏 보편적 휴머니즘에 어긋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고 있기도 하다.그런가 하면 태평양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지금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벌어져 트럼프와 바이든이 ‘생사를 건’ 경쟁을 벌이다 마침내 바이든이 어렵게 승리를 거두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상대방이 미국사의 재앙이라도 되는 듯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나 자신의 정치적 선호와는 별도로 과연 어느 쪽이 옳은가를 지금 간단히 판별할 수만은 없다고도 생각한다.서로 대립하는 두 세력이 커다란 힘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또 그들 모두가 역사의 진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해서, 그들 중 어느 한 쪽은 반드시 ‘정치적 올바름’을 담보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더 나아가 나는 이 ‘정치적 올바름’의 지나친 요구가 한편으로는 사회적 교류와 교섭, 타협을 어렵게 하고 유머라는 점이지대를 소멸시키며 시민들을 모범답안 내기 쪽으로 몰아붙일 위험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들만의 군림, 그들에 의한 통치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 않은 것이다.사회는 확실히 더 나아져야 하고 우리가 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를 위해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관대해지는 것, 적대하지 않는 것,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체적 유대감일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11-18

흥정

정미영수필가이사를 가기 위해 살던 집을 내놓았다. 마땅한 임자가 나서기를 바라며 아파트 게시판에 올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왔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집을 보러 왔다.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다는 아주머니였다. 맞벌이 하는 딸의 양육을 돕고 싶어, 본인 집 가까이에 딸네가 살 집을 구한다고 했다. 꼼꼼히 둘러보면서 집이 마음에 든다고 매매 가격을 조금 더 깎자고 말했다. 하지만 곤란했다. 집을 빨리 팔기 위해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기 때문이다.아주머니는 흥정에 능숙했다. 조금 더 받겠다고 기다리다가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며, 내 손을 잡고 자분자분 말했다. 두 달 남은 이삿날도 딸네 전세 기한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니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나를 설득했다.슬슬 조바심이 났다. 아주머니 말대로 지금 기회를 놓치면 늦도록 임자가 나서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결국 상대방이 원하는 가격에 집을 팔았다. 아주머니와 이야기하면서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딸자식을 친정 가까이 살게 하려는 아주머니의 마음이 결정적이었다. 집을 팔았다고 했더니 너무 싸게 팔았다며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아쉬워했다. 손해를 보긴 했어도 집이 안 팔렸을 때 생기는 마음고생은 면하지 않았는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내가 아는 사람 중에 흥정을 잘하는 이가 있다. 그에게 흥정은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라고 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값을 깎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기도 한단다.언젠가 포항에 놀러온 그를 데리고 죽도시장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떠밀리듯 오가며 어시장을 둘러보니 그날따라 물 좋은 생선이 많았다. 횟감을 뜨려고 함지박에 담긴 생선을 구경했다. 돔 한 마리에 만팔천 원 한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흥정에 들어갔다.“아지매, 보소, 내가 이태 전까지 배 타던 사람 아이가. 만 오천 원에 주소.”“그라믄 더 잘 알 텐데 값을 깎노. 주위를 둘러봐도 이 정도 좋은 놈은 없다.”돔을 건져 보이며 아주머니는 목청껏 말했다.하지만 나는 옆에서 말 한 마디 거들지 못했다. 정작 값을 깎는 당사자는 태연한데 내가 왜 그리도 미안한 마음이 들던지. 귀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눈은 벌름거리는 생선의 아가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사래 치는 아주머니에게 그는 기어이 값을 깎았다. 내가 너무 했다는 듯 쳐다보자 씨익 웃을 뿐이었다. 횟감 봉지를 손에 든 그의 발걸음이 비거스렁이에 나들이하는 것처럼 가벼웠다.그는 흥정을 위해 아주 천연덕스럽게 말을 지어냈다. 옷을 사러 가면 예전에 옷가게 사장이었다고 하고, 가구점에 가면 가구 공장을 한다고 했다. 그 순간 너무나 진지해서 나조차도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꼭 그랬을 것만 같다. 가게 주인들은 믿는 척 속아주는 척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결국은 가자미처럼 눈을 흘기면서도 값은 깎아 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다.오늘 모처럼 가을 준치가 생각나 죽도시장에 들렀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먼저 달려와 반기더니, 곧바로 비릿한 생선 냄새가 온몸을 덮쳤다. 싱싱한 준치와 큼직한 전복 등을 실컷 구경하고도 건어물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며 신명나게 구경했다. 그랬더니 요 며칠 지쳐있던 내 몸에 시장의 활기찬 역동성이 재빠르게 스며들며 기운이 솟았다.집에 돌아오려고 다시 어시장에 들러 준치를 사려고 했다. 젊은 상인들을 제쳐두고 한쪽 귀퉁이에서 준치를 팔고 있는 할머니께 다가갔다. 사면서 값을 깎으려니 주인은 지청구를 늘어놓았다.“젊은 사람이 늙은이 고생한 걸 생각해야지….”얼른 셈을 치르고 왔지만 뒤통수가 따가웠다. 나는 아직도 흥정에 익숙하지 않나 보다.

2020-11-18

저마다의 답

시골뜨기인 저는 오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습니다. 이층집도 수세식 화장실도 한 번 본 적 없는 깡촌 아이 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도회의 파노라마는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어린나이에 결코 원한 적 없던 묵언수행을 감행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웃지 못 할 시절이었지요. 제 생애에 우울기가 있었다면 그때가 시초였을 거예요.크고 작은 여러 체험을 겪었습니다. 그 중 의아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으’와 ‘어’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것이에요. ‘이층으로 올라간다’라고 하면 될 것을 ‘이청으로 올라간다’라고 하거나 음악 시간이라고 하면 될 것을 ‘엄악’ 시간이라고 발음하는 것이었지요. 멀쩡하고 예쁜 이름인 이은진도 ‘이언진’이라고 바꿔 불렀습니다. 심지어 ‘언진(은진)이가, 언진이가?’하면서 제가 듣기에는 똑같아 뵈는 발음으로 그들 식의 ‘으, 어’ 발음을 구별하기까지 했습니다. 생경하고도 기이한 일이었습니다.시골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두 음절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철이 들고 난 뒤 그것이 단순한 언어습관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투리가 그렇듯 윗세대가 그렇게 발음하니 아랫세대도 별 뜻 없이 그렇게 배운 것뿐이었지요. 원래 인간은 자기 울타리 안에서 자기 식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존재니까요.오랜만에 전국구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무슨 말 끝에 ‘thanks to’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생스투’라고 제가 발음하자 나머지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습니다. 왜 웃는지 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다시 그 발음을 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좀 전보다 더 넘어갔습니다. ‘땡스투’로 말해야지 ‘생스투’라는 말은 너무 어색하답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하는 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에 적이 당황했습니다. 어차피 영어 발음으로 할 것도 아닌데 생스투나 땡스투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하며 저는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소심한 저는 ‘thanks to’를 우리말 식으로 어떻게 발음하는 것인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검색 상으로는 ‘땡스투’나 ‘생스투’나 그게 그거였습니다. 비슷한 비율로 검색되는 걸로 보아 그 말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땡스투냐 생스투냐의 차이가 아니라, 제 발성법에 문제가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경상도식 사투리 발성에서 오는 특이함 때문에 친구들이 웃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마치 어릴 적 ‘으’ 와 ‘어’를 구분하지 않고 -그들 나름으로는 구분을 했겠지만- 발음하던 도회지 아이들을 보면서 제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처럼 친구들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저로선 이상했듯이,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제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역시 그들에겐 이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지요.북 토크 진행을 한 뒤, 제 음성이 녹음된 파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염 섞인 어색한 음색에다 사투리 높낮이가 선명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꺼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더 충격적인 면을 발견했습니다. 저 역시 미세하게 으, 어 발음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경상도식 특유의 발성법이 굳어져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히 ‘으, 어’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지요. 그제야 왜 친구들이 제가 ‘생스투’라고 내뱉었을 때 웃었는지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발성 자체에 사투리 버전이 녹아있으니 표준어를 구사하는 입장에서는 어색하게 들릴 수밖에요.김살로메소설가어떤 이의 말과 행동은 스스로 한 것이되 스스로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발설하는 순간부터는 그것은 상대자의 것, 즉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당사자는 궁궐을 지어도 상대는 초가를 볼 수 있습니다. 전하는 자는 열매를 전해도 받는 자는 씨앗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자의 말은 해석하는 자의 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내 의도와 상대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어떤 배우의 무대 인사가 생각납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 되어도 괜찮다.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습니다.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입니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하는 것, 이것이 세상 이치니까요.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릅니다. 오해가 풀리기 전까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습니다.오늘의 교훈,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도 타자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202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