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율곡(栗谷)의 제 3의 길

강희룡 서예가우리의 생각은 대개 흑 아니면 백, 보수 아니면 진보라는 이분법으로 결정짓는데 익숙하다. 나 아니면 남,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 그래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을 회색분자라고 하며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대부분 흑과 백을 넘어선 데에 더 나은 길이 있는 법이다. 율곡 선생의 ‘율곡전서(栗谷全書), 증유응서몽학치군설’에 ‘학문이 부족하면서 바삐 벼슬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학문이 충분하면서 벼슬하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500여 년 전 시대 역시 선비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선조 8년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조전랑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대해 동인인 김효원과 서인인 심의겸의 대립이 결국 조선의 붕당정치를 가져왔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면서 이후 망국적 행태의 당쟁으로 이어져 결국 민생은 피폐되고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관료사회는 임진왜란이라는 화를 불러들인다.혼란한 시국에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려는 사람은 학문이 충분한데도 세상을 등지고 살았고, 벼슬하기에 급급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벼슬하기에 급급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비판하고, 지조를 굽히지 않고 세상을 등진 채 사는 사람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율곡은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빠져나와 세상이 혼탁하다 하여 모두 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리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어려움을 개선할 수 있는 이른바 제 3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율곡에게는 다름 아닌 학문이었던 것이다. 논어에서 ‘관직생활에서도 틈이 나면 학문을 익혀야 하고, 학문이 넉넉하게 되었으면 관직에 나아가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학문을 충분히 쌓은 사람은 관직에 나와 자신의 학문을 현장에서 실행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 현장에서도 틈만 나면 계속 학문을 쌓아서 현장 문제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당장 눈앞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어느 정도라도 덜 수 있다. 여기서 학문이란 얄팍한 지식 몇 조각으로 잔머리 굴리며 자신의 욕심이나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 앞에 궤변이나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바탕으로 한 지식을 지혜롭게 국가를 위해 펼치는 것을 말한다. 옛사람에게 있어 뜻이란 배움이요, 배움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선(善)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욕심을 따르기는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쉬운 법’이라는 옛말처럼 뜻이 굳세지 않으면 영욕에 마음이 흔들려 뜻을 빼앗기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더구나 물질적 가치와 권력욕의 추구가 최고의 선인 것처럼 목표로 쉽게 설정되는 요즘 세태에서 옛 학문이 추구하는 목표가 새삼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현실이다. 국민 고혈로 호의호식하는 공복(公僕)들의 정신자세는 선공후사(先公後私)가 아니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의무만이 어깨에 매달려있다는 것을 새겨야 할 것이다.

2020-12-07

비탈에 서도 외롭지 않은 그대… 경주 주사암(朱砂庵)

오봉산은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의 군사들이 여근곡(女根谷)에 숨어 있다 격퇴된 곳이며, 부산성(富山城)이 있어 경주의 서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화랑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그 오봉산 정상 아래 숨어 있는 주사암을 찾아 산길을 오른다.‘53 선지식의 돌탑’,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팻말과 작은 돌탑들이 썰렁한 겨울 산길을 밝힌다. 섬세한 손길은 이내 담력시험이라도 치르듯 53굽이의 아찔한 경사길로 이어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산길을 비틀거리며 차가 오른다. 마주 오는 차와 교행할 수 있도록 중간중간 길어깨를 만들어 놓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겨울 응달에 기대선 나목들의 침묵, 그 사이로 얼어붙 듯 숨죽인 허공이 우리를 지켜본다.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거쳐 간 험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내 나약한 숨결에도 기도가 실린다. 산 위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스피커에서 마중 나온 염불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창건한 주사암은 투구모양을 한 오봉산 정상(685m)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주사암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라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절 입구 양쪽에는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며 서 있다.조심스럽게 경내로 들어선다. 작은 법당 뒤로 투구 모양의 바위가 주사암을 보듬고 앞으로는 부산성이 든든하게 막아주고 있다. 활짝 열린 법당문 안으로 겨울 햇살 홀로 부처님 진신 사리를 친견하고 나는 염불 소리에 젖어 산사의 풍경에 몸을 맡긴다.산악용 자건거를 탄 남자가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법당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평화롭던 공기는 달아나고 말았다. 잠시 인드라망의 그물이 출렁이며 파동을 일으킨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마당 바위 쪽으로 사라지는 그의 당당한 발걸음과 근육질 몸매가 안쓰럽다. 상호 배려와 겸손의 깨달음은 그토록 멀고 힘든 것인가.경내를 둘러보다 나도 마당바위로 향한다. 까마득한 절벽 위, 툭 트인 산과 허공을 배경삼아 자전거로 한껏 멋을 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근처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날렵한 동작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들의 기상이 들릴 듯 하고, 주사암 설화 속에 등장하는 좌선 중인 도인의 모습도 아른거린다.저 너른 허공의 품에 안겨 나도 참선하듯 앉아 있고 싶다. 조용한 날 다시 오리라 마음먹고 돌아오는데 어느 보살님이 국수공양을 하고 가라며 인사를 건넨다. 매주 일요일은 무료로 국수공양을 한다는 안내문이 생각났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소박한 건물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공양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 사이로 국수를 삶아 건져내느라 분주한 봉사자들이 보인다. 그저 받기가 조심스럽다. 국수에 육수를 붓고 갖가지 고명을 얹어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몸과 생각이 자유로워지는 곳. 이 공양 받으시고 하루빨리 도업 이루소서’ 걸어놓은 현수막에서 주사암의 마음을 읽는다. 귀한 음식을 앞에 놓고 고작 ‘오관게’를 읊고 있는 나, 편안함에 길들여진 마음조차 남루하다.담백한 육수와 갖가지 고명이 어울린 국수에서 정갈한 산사 맛이 난다. 주지 스님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다. 삶의 근간인 밥의 힘을 알고 사람을 제대로 섬길 줄 아는 분이리라. 산문 걸어 잠그고 참선하는 수행에도 높은 뜻이 숨어 있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은 세상을 좀 더 낮고 가깝게 만들 것이다.뒤늦게 대웅전 법당에서 백팔 배를 올린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불자들의 짧은 인사가 문턱을 넘나들고 겨울 햇살이 내 등을 어루만진다. 진정한 보살은 의지하는 것이 없어 즐거움이나 기쁨을 구하지 않으며, 선정의 결과로 색계천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긴 겨울 앞에 선 암자가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조낭희 수필가주지 스님을 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구적인 외모와 소탈한 인품의 효웅 주지스님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산문 근처에 목사님의 시를 걸어놓을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진 분, 53굽이의 산길을 손수 청소하고 불자들을 맞으며 무료공양 해 오신지가 벌써 5년째라고 한다.스님은 무료공양의 덕을 옆에 앉은 송경규 회장과 봉사자들, 소식을 듣고 다시마와 국수를 보내주시는 분들의 공으로 돌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송 회장의 맑은 눈빛과 동안의 비결을 알 것 같다. 주사암과 스님에 대한 애정이 보살행으로 이어진 것인지, 그의 보살행으로 주사암과 스님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선지식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묵묵히 선업을 닦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님은 오시리라. 이곳에서는 높고 낮음, 삶과 죽음,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보름달이 뜨면 마당 바위에 도인처럼 앉아 계실 효웅 스님을 떠올려 본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적막이 있을까?

2020-12-07

만약(If)과 아마도(Quizas)의 사랑이야기

영화의 제목이 주는 울림이 감상의 다양한 변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영연화’ 또한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을 쌓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무너짐을 기대하게 된다. 찬란함이 계속해서 유지됐다면 그것을 ‘순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영화 ‘화양연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나 사랑의 기준을 잡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과 끝, 과정의 세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영화다. 치열하거나 복잡하거나 고난과 시련이 없다. 아니 있었어도 생략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영화 속 사랑의 진행은 더디다. 완급의 조절에 있어서 모든 결정적 순간들은 한 순간 주춤한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아예 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진행의 단계들은 상세한 설명이나 대사없이 이루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다만 섬세한 디테일들이 빼곡히 그 간극을 메우며 진행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볼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젖어 감상하는 영화다.‘사랑’의 시작에 있어서 핵심은 ‘확인’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함으로써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사랑한다’는 확인의 장면이 없다. 직접적인 고백이 없기에 시작이 불분명하고 사랑의 진행률이 선명하지 않다. 이 또한 모호한 대사와 미세한 동작과 유려한 영화적 장치들로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화양연화’의 사랑은 ‘불륜’이다. 상대의 불륜에 나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개연성을 지니더라도 ‘도덕’의 기준을 들이댄다면 불편한 영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화양연화’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과연 불륜을 먼저 저지른 것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먼저 불륜을 저지른 것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었지만 그 반대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특정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정(假定)’을 한다. 이 가정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을 ‘연습’한다. 가정에 대한 연습이 어느 쪽이 사실이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륜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정’했을지도 모른다.‘화양연화’는 ‘if’에 대한 영화다. 선택과 확인의 기로에서 이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헤어지는 ‘연습’이 대표적인데, 사실과 연습이 뒤섞이면서 어느 것이 실제로 진행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고백을 했는지, 실제로 만나서 사랑을 했는지, 사랑하고 헤어진 것이 맞는지, 영화의 모든 결정들을 ‘만약(if)’으로 두어도 좋다.‘화양연화’중에서 인상에 남는 음악이 넷 킹 콜이 부른 노래 ‘Quizas, quizas, quizas’다.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사랑의 확인과 선택의 물음에 ‘아마도’라고 답한다. ‘아마도’는 확답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아마도’는 ‘만약(if)’을 선행시킨다.사랑의 결과는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밝혀진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버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시작과 헤어짐의 과정 중에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가와 이유가 중요하다.영화 마지막 남자는 앙코르와트에서 이 모든 사실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다. 추억에 대한 봉인이 아닌 선택과 이유에 대한 봉인이다. 선택과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항상 주춤하며 진행되고, 미세한 떨림이 간극을 메우기에 더 애틋한 영화가 된다.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상과 음악, 의상과 미술, 미장센까지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감정의 흐름을 흐트리지 않는 영화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화양연화’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2-07

할머니는 일학년

저녁 먹고 나니 잠이 쏟아진다. 소파에 누워 스르륵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다들 잠자리에 들었기에 나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재촉해도 눈이 말똥해졌다. 30분 뒤척이다 다시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다들 잠든 밤이니 스펙터클한 영화도 싫고, 살인이 난무하는 서스펜스는 어깨가 아파 더 싫고, 호러 영화는 무서워서 혼자서 보는 것은 무리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박한 영화를 골라야지 하며 쭈욱 둘러보다가 고른 영화가 ‘할머니는 일학년’이다. 다큐멘터리인가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가슴이 저리기 시작한다. ‘집으로’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집으로’ 영화보다 조금 무게감이 있다고 할까. 장면마다 나는 자꾸 눈물이 났다. 대사가 많거나 아주 슬퍼서라기보다는 그저 눈물이 났다.아들을 홀로 키웠던 까막눈의 할머니, 엄마를 잃고 새로 얻은 아빠까지 사고로 잃은 일곱 살 여자 아이 동이,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노름꾼 남편과 팥쥐 엄마 닮은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 이렇게 셋이 한글을 배우는 이야기이다.할머니는 아들이 사고로 죽으며 남긴 수첩을 유품으로 받았다. 거기에 적힌 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지 못하니 안타까워 초등학교에 무작정 찾아간다. 배경을 자세히 보니 시월에 수업을 다녀온 영양의 초등학교였다. 동네로 달려가는 버스가 지나친 길은 주실마을 앞 숲길이었다. 영양에서 찍었구나 싶어 자막이 올라갈 때 도와주신 분들의 이름까지 자세히 읽었다.세 사람이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지한다. 할머니는 글을 배우자 세상에 대해 문을 열고, 베트남 새댁은 남편을 집으로 들어오게 하는 쪽지를 쓰고, 동이는 가족을 얻는다. 글은 이래서 배워야 한다. 글자는 더 큰 세상으로 가는 문이 되어 주니까. 새벽까지 나는 실컷 울었다. 눈은 퉁퉁 부었지만 밤낮없이 돌아다녀 몸살이 날 것 같던 내 몸이 가뿐해졌다. /이향기(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2-07

뚝방길

자다가 떡이라더니! 집 옆으로 흐르는 동천강 상류를 정비하면서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뚝방길 산책로가 생겼다. 동천강은 외동읍 북쪽 어디에선가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 울산 태화강과 합쳐지면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뚝방길 서쪽은 강이고 동편에는 작지 않은 들판이라서 양편의 풍광이 사철 바뀌게 된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는데도 세월은 흘러간다. 찬바람과 함께 들국화가 피고 갈대 순이 펄럭일 때 들판은 노란색이 짙어지며 황금색으로 변한다. 가끔씩은 인기척에 놀란 꿩이나 고라니가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뚝방길 끝부분에는 우람한 정자나무가 네 그루가 있었다. 매년 태풍에 시달리며 모두 북쪽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었는데 올여름 모진 태풍을 맞아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세로로 절반으로 갈라지며 넘어져 버렸다. 아쉬운 일이지만 자연의 조화를 누가 말릴 수 있는가. 여기부터 백 미터 구간은 조금 비탈길이다.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부부 사이이지만 이 구간은 팔짱을 끼고 내가 끌며 올라간다. 그때, 나는 심청이고 남편은 심 봉사라며 한번 웃는다.출발하는 시간이 해뜨기 삼사십 분 전이므로 산책길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아침 해를 맞는다. 해 뜨는 방향으로 서서 눈을 감고 두 팔다리를 벌려 나무처럼 서서 아침 해를 맞는다. 햇살이 얼굴을 더듬을 때 눈꺼풀 속 눈알이 따스해지며 해 뜨기 전의 냉랭함은 햇살과 함께 온기로 바뀐다. 빛과 열과 에너지가 혼합된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이 감촉이 좋고, 이 시간이 좋다. 사람도 해가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식물에게 햇빛은 생명의 원천이다.추수가 끝난 들판은 삭막하다. 논마다 하얗게 포장된 소먹이 짚 둥치만이 널려있다. 산책길 좌우로 하얀 갈대가 서리를 머리에 이고 흔들릴 때, 모든 초목은 생명을 숨기고 새봄을 기다린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이말필(경주시 외동읍)

2020-12-07

복돼지

눈을 번쩍 떴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잠에서 깨었다. 옆자리 남편도 눈을 떴다. 동시에 일어난 셈이다.평소보다 한 삼십분 일러서 뭉그적거렸다. 옆으로 얼굴을 돌려보니 기분이 좋은 듯 남편이 혼자서 실실 웃고 있었다.꿈을 꾸었단다. 그것도 얼굴이 하얗고 토실토실한 복돼지 꿈이란다. 화들짝 놀랐다. 시집간 딸은 이미 만삭이고 여러 사람이 태몽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태몽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재물이 들어 올 꿈이 아니던가.바싹 다가들며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복권을 사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복돼지 꿈은 확실한데 옆에 누가 있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복스럽게 생긴 개였다고 했다. 나는 “에이, 개판쳤네.”라며 아쉬워했다. 해몽은 성급히 했으나 미련을 지울 수가 없었다.아침 출근시간이라 잠시 꿈 이야기를 접어두고 각자 할 일을 했다. 출근을 하면서 꿈속의 개는 생각나지 않고 통통한 복돼지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 덕분인지 콧노래를 부르며 하루가 즐겁게 지나갔다.퇴근 후 저녁밥을 지었다. 인근에 살고 있는 딸이 왔다. 쓱 지나가는 말로, 요 앞에서 직장 동료를 만났다고 했다. 이 동네로 이사를 했다는 동료는 얼마 전에 구입한 세탁기가 너무 커서 이사한 집에 맞지 않다고 했다. 구입한 가전회사에 수거 부탁을 하니 구입 가격의 10%만 보상이 가능하다고 한다며 너무 아까워했단다.나는 귀가 번쩍거렸다. “그 세탁기 내가 사꾸마.” 손가락을 브이로 보이며 두 배를 주겠다고 했다. 당장 연락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러면서 아침에 있었던 복돼지 꿈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료가 큰집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세탁기에도 복이 묻어 있을 거라며 웃었다. 어릴 적에 부잣집 농을 사면 재물복도 같이 따라 들어온다는 어른들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순식간이었다. 딸의 도움으로 세탁기가 아주 쉽게 성사되었다. 현재 사용 중인 세탁기는 딸이 초등생일 때 구입된 거라 오래 되었지만 요즘 나오는 세탁기가 워낙 비싸서 망설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신제품 세탁기를 들인다고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남편의 복돼지 꿈 덕분이다. 개판을 쳐도 이 정도인데 꿈속에 개가 없었더라면 우리 집에 무엇이 들어왔을까? 생각하다가, 가만히 있는 개를 내 멋대로 홀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복돼지랑 개, 딸이랑 동료에게 무지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최경하(경주시 현곡면)

2020-12-07

언택트 송년회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이면 송년회(送年會) 모임으로 바쁜 시즌이다. 송년회는 한해를 보내며 반성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뜻이다. 특히 송년회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망년회(忘年會)는 지난해의 온갖 수고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리자는 뜻이다. 이는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므로‘송년회’로 쓰는 것이 좋겠다.올해는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으로 전국에 비상이 걸린 상황인지라 송년회 풍속도가 언택트 송년회로 크게 바뀌고 있다. 평소 같으면 송년회로 왁자지껄하게 붐볐을 식당은 텅 비어 한산한 대신 새로운 풍속도가 생기고 있다. 바로 온라인으로 만나는 랜선 송년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는 것. 한 취업포털이 성인남녀 1천2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71%가 올해 송년회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대신 화상회의 플랫폼을 활용한 비대면 행사는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실제로 랜선 송년회를 준비하는 기업 행사 진행직원들이 노트북 앞에 소품을 비추며 온라인 송년회 리허설을 하느라 분주하다. 집과 사무실에 흩어진 직원들은 화면을 보며 한해를 보내는 소감을 말해본다.또 다른 기업 송년회 현장에서는 노트북 앞에 있는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화면 안에서 직원 30여 명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노트북 앞에 앉은 진행자가 종이를 들어 보이며“화이트 보드를 이렇게 들어주세요. 화이트 보드.”라고 주문한다. 화이트 보드에는 저마다 한해를 보내며 기업과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말들이 빼곡히 적혔다. 행사대행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11월부터 대면 행사는 아예 제로가 돼버렸고, 비대면 행사가 거의 100%를 채우고 있다. 코로나19로 피할 수 없었던 언택트 송년회는 올해가 마지막이 되길 기원해본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2-07

구팽(狗烹)의 시간

안재휘 논설위원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구천(句踐)으로 하여금 월나라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도운 범려(范8821)는 뒤늦게 구천이 의심스러워 탈출하여 제나라에 은거했다. 그는 함께 일했던 문종(文種)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狡5154死走狗烹’라는 글을 보내어 피신토록 충고했다. 그러나 문종은 주저하다가 반역자로 몰린 끝에 자결하고 만다.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에 나오는 이야기다.‘검찰개혁’이라는 용어가 아전인수를 넘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선동 구호로 악용되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단칼에 잘라내려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전격작전은 일단 실패로 돌아간 양상이다. 4일 열겠다던 징계위원회는 10일로 연기됐다. 법무차관이 징계위 개최에 반대해 돌연 사표를 내자, 청와대는 즉각 후임을 임명해 스스로 온갖 사달의 배후임을 증명했다.윤 총장의 직무배제 시점과 월성원전 경제성 평가조작 혐의 공무원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과정이 얽히면서, 추미애 장관의 무리한 행태 이유가 유추되고 있다. 정권의 ‘검찰개혁’ 구호가 ‘검찰 장악’이나 ‘검찰 무력화’의 다른 말이었음도 속속 입증되는 중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숨겨둔 흑심도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이 시점에 진정한 ‘검찰개혁’의 의미를 새로 곱씹어보게 된다. 검찰의 엄정한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무리한 수사로 애먼 국민을 잡는 일을 더는 못 하도록 과도한 권한을 분산하는 게 검찰개혁의 핵심가치다. 아무도 그런 개혁에 불만이 없다. 공수처도 정치적 중립성을 전혀 의심받지 않는 기구 운영이 핵심요건이다.윤 총장 찍어내기도 잘 안 되고,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사건 수사도 막지 못하자 민주당에서는 “그러니까 공수처가 필요하다”는 어불성설의 쩨쩨한 궤변들을 쏟아낸다. 직역하면 “검찰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드러났으니, 검찰 때려잡는 무소불위의 우리 편 핵무기 공수처가 시급하다”는, 속이 훤히 보이는 얍삽한 말 아닌가.윤석열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문재인 정권이 무참히 휘두른 ‘적폐청산’의 칼잡이였다. 이 정권은 정치보복의 칼맛 피 맛에 취하여 진정한‘제도개혁’을 실기(失期)하고 말았다. 그들은 명검(名劍)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앉히면서 이 땅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의 씨를 말리고자 했을 것 같다는 끔찍한 짐작마저 든다. 돌이켜보니 “살아 있는 권력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던 문 대통령의 말은 그냥 멋있게 보이려고 해본 췌사(贅辭)에 불과했음이 자명하다.그들은, 사냥이 모두 끝났으므로 이제 ‘사냥개를 삶을’ 시간이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그 사냥개가 한사코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죽 답답하면, 많은 국민이 그 사냥개에게서라도 희망을 찾자고 목을 빼어 기다리고 있을까. 참으로 딱한 세상이고 야릇한 나라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기어이 사냥개를 삶고 ‘공수처’를 만들어 휘두르면 상황이 끝이 날까.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고작 그 수준일까.

2020-12-06

수능 스트레스

코로나19라는 위태한 분위기 속에 치러진 올해 우리나라 수능은 세계가 주목했다. 프랑스는 200년의 역사를 가진 대입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코로나로 인해 올해는 취소했다.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도 바칼로레아 시험을 치렀던 프랑스는 한국에서의 수능 강행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지난 4월 총선에서 보여준 한국의 방역 능력에 이어 이번 수능 강행에 대해서도 세계 각국은 매우 놀랍고 진지한 모습으로 지켜볼 것 같다.‘프랑스인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 의해 자격시험을 포기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수능 강행은 수능이 우리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난 다음해 포스텍의 한 연구소가 수험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포항시내 수험생은 지진 트라우마보다 수능에 대한 부담이 더 컸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예상을 넘어선 이런 반응에 대해 연구소 측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적 구도의 위력이라 분석했다.우리나라에서 실시되는 수능은 일종의 성인이 되는 관문적 역할을 한다. 12년간의 초중고 학업 성과를 최종 평가받는 시험인데다 이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 진학의 길이 갈라진다. 또 대학과 전공의 선택에 따라 취업의 길도 달라지는 것이다.그래서 학창시절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목표다. 학생은 물론 수험생의 부모도 이런 목표에 올인한다.수능을 앞둔 수험생의 스트레스야 더이상 설명할 것도 없다. 특히 올해는 수험생이 코로나와 함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수능을 마친 수험생의 스트레스를 덜어줄 가정과 학교에서의 관심과 애정이 절실한 시기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06

역사의 현장 포항공항의 잠재력

1994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는 매년 12월 7일을 ‘국제 민간 항공의 날’로 제정하였다. 지구촌에 있는 여러 나라의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일부 여객선이나 대륙횡단 열차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여객 이동이 항공기로 이루어져 민간 항공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국제여객이 급증하면서 198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이 출범하였지만 최근 경영악화로 매각 위기에 놓였다. 대형항공사의 경영위기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국내 국제를 불문하고 최소한의 항공서비스만 제공함으로써 요금을 낮춘 저가 항공사(LLC)들이 급성장하는 가운데 코로나19와 같은 예기치 않았던 충격으로 경영악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이처럼 항공사들의 치열한 경쟁과 맞물려 공항도 함께 영향을 받고 있고 그와 더불어 각 지역 공항 주변 산업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포항공항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포항공항에서 여객이 감소하고 사정이 나빠지기 시작한 최초의 충격은 신경주역에서 KTX가 개통된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포항과 경주 일원의 주민들은 수도권으로 이동할 때 비행기보다는 KTX를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 항공사가 제공하는 비행편 시간대도 새벽 출발 저녁 도착과 같이 당일로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올 정도로 편리한 시간대가 아니었던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신경주역 개통 이후 공항 이용객과 화물 감소율은 그 직전보다 월평균 30%에서 40% 정도씩 감소 추세를 보였다. 당연히 공항 주변의 마트 등 지역 상권의 매출도 비슷한 비율로 감소하여 주변 상권에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 KTX포항 노선이 개통되었어도 포항공항의 승객감소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단지 KTX신경주역을 이용하던 포항 시민들이 KTX포항역으로 옮겨갔을 뿐이다.이처럼 포항공항이 어려워진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하지만 국내 여러 공항 가운데 포항공항만큼 대한민국에 큰 업적을 남긴 역사적 이야기를 지닌 공항은 없다. 포항공항을 굳이 ‘공항’이라는 본연의 목적으로만 보지 않고 공간지리 자체가 지닌 역사를 좀 더 알려 탑승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들이 역사관광의 현장으로 찾아오도록 하는 방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포항공항이 지닌 역사적 스토리텔링은 포항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형자산이기 때문이다.포항에 공항(비행장)이 들어선 지도 77년이 된다. 비행장 건설 논의는 1935년 10월 9일 열렸던 포항읍 발전좌담회에서도 있었지만 정작 영일군 오천면 일월동에 비행장이 건설된 것은 1943년 9월이다. 당시 포항에는 수산물 수출 무역선이 드나들던 무역항이 있었고 포항역에서는 서울, 만주까지 물류가 이동할 수 있었다. 자동차로도 만주까지 연결되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일본군이 포항에 비행장을 건설한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포항비행장 다시 말해 포항공항은 건설한 지 불과 2년 동안만 일본군의 관리하에 있었고 바로 미군으로 통제권이 넘어간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미군이 포항공항을 실제 접수한 날은 9월 8일이다. 이날 미군에 의해 일본군의 무장도 해제되었다. 미군이 비행장을 접수하였을 때 미군의 포항공항 식별부호는 케이쓰리(K-3)였고 위치도 포항동(POHANG-DONG, KOREA)으로 표기되었다. 전쟁 무렵에는 이미 포항시로 승격한 상태였지만, 미군이 일본에서 받은 군사지도가 1927년에 측도한 것이었고 게다가 일본군들이 영문이나 일본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여 미군에 넘겨줄 때 포항을 ‘포항동(pohang-dong)’이라 적었기 때문이다.6·25전쟁이 일어난 직후 김포와 수원비행장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미 제5공군이 안전하게 쓸 수 있었던 공항은 대구, 수영, 포항 세 군데뿐이었고 그마저도 제트전투기가 이용할 수 있으려면 별도 공사가 필요하였다. 마침 7월 10일 도일 제독이 기획한 한반도 최초 미군 상륙작전인 ‘포항상륙작전(Blueheart Operation)’을 맥아더 원수가 승인하게 된다. 그날 밤 즉시 미 제802 항공공병대대 A중대가 일본 오키나와에서 수륙양용함(LST)을 타고 영일만에 도착하여 장비 하역과 동시에 공사에 착수하였다. 7월 13일 4천500피트의 기존 활주로에 전투기 이착륙이 가능한 임시 활주로용 철판(PSP; Pierced Steel Plank) 포장 공사를 완료하고 7월 15일까지는 노반 정비까지 모두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7월 18일 새벽 포항상륙작전도 성공함으로써 중부 전선 방어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는 미군 전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곳은 포항공항뿐이었다.포항공항은 6·25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에서 유엔공군이 활약한 곳이 포항공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2일자 뉴욕타임즈(NYT)는 1면 기사 표제를 “미국 지원군 포항공항에 도착(U.S. AID REACHES POHANG AIR BASE)”이라 붙였다. 미 제5공군은 7월 30일 시점 제트 전투기 F-80을 626기, F-51을 264기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일본 후쿠오카나 포항공항에서 출격하였다. 근접지원 출격 비행 대수는 7월 한 달간 4천436기, 8월 7천28기, 9월 6천219기였다. 미 극동공군은 7월부터 한 달 동안 포항공항의 전투기 F-80을 최신형인 F-51로 교체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을 막기 위해 포항공항의 미 제40 전투 요격대대 소속 F-51 전투기들은 매일 30~40회 출격하며 국군 제3사단을 항공지원하였다. 물론 포항공항에는 미군 비행기만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1950년 10월 12일부터 11월 18일까지는 호주왕실공군(RAAF; Royal Australian Airforce) 소속 제77 비행대대가 포항공항에서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 작전 지원을 위한 항공지원을 맡기도 했다. 포항공항은 어느 지방공항이라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대한민국 영토수호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공항이었고, 6·25전쟁 당시 한반도 하늘을 지배한 유엔 공군의 보금자리였다. 사람이었다면 무공훈장을 수차례 받았을 영예로운 공항인 것이다.지금 포항공항 이용객이 줄어 항공사들이 취항을 꺼린다는 이야기에 간혹 포항에 공항이 굳이 필요하냐는 지적까지 나오곤 한다. 단지 민간 항공의 경제성만 따진다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항공항은 수많은 지방공항의 하나가 아니다. 설령 항공기의 이착륙이 전혀 없는 텅 빈 공항이 되더라도 포항공항 자체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한반도 전역의 하늘을 책임졌던 역사의 장소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비행기의 발착이 줄어들어 공항운영이 힘들어진다면 아예 공항 어딘가에 포항공항 역사관을 만들어 탑승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항 활성화 방안도 검토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일례로 6·25 전쟁 당시 참전하였던 호주 왕실 공군을 초청하여 그들이 포항에서 체류하면서 나라를 수호해준 것을 감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선배 조종사들이 출격하였던 7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기념 에어쇼를 매년 개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획도 포항공항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인들까지 참여하여 당시를 회상하는 역사관광을 포항-호주 간 정기교류 관광프로그램으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12-06

납작한 성(性), 입체적인 성(性)

김현욱시인‘10대 성관계’ 관련 통계를 보면 조사에 참여한 10대 청소년 중 약 5퍼센트가 다양한 성적 경험을 했고, 또 그 5퍼센트의 청소년이 성적 경험을 시작한 평균 연령은 13.1세라는 결과가 나왔다.어른들의 생각보다 우리 청소년들의 성적 경험은 빨라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예전에 비해 학교 성교육 시수와 내용은 개선되었지만, 청소년들에게 실제적인 성교육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요즘의 성교육은 피임 강조 교육이 되었다며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을 겪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임신을 계획한 게 아니라면 피임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심에스더, 최은경의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용감하게 성교육, 완벽하지 않아도 아는 것부터 솔직하게, 납작해진 성을 입체적으로, 어른도 아이도 함께 즐거운 Sex Education!’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여태 어떻게 살아왔나?’란 자괴감이 들었다. ‘배란’부터가 그렇다. 대부분의 여성은 몸속에 덜 자란 난자 약 30만 개에서 100만 개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 덜 자란 난자들은 2차 성징이 일어나는 사춘기 이전까지 얇은 주머니 안에 보관되었다가 사춘기가 되면 하나씩 차례대로 성숙해진다. 성숙한 난자가 때가 되면 난소의 벽을 뚫고 나오는 게 바로 배란이라고 한다. 배란은 양쪽 난소에서 번갈아 가며 이뤄진다. 배란 시기는 평균 28일이지만, 여성마다 다르다. 매달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한 번에 난자 2개를 배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자가 난소 옆 나팔관으로 ‘산책’을 하다가 정자를 만나 수정이 되면 ‘임신’, 포궁벽이 허물어질 때 질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면 ‘생리’라고 한다.저자는 배빗 콜의 그림책 ‘엄마가 알을 낳았대’라는 그림책을 통해 “엄마 배에 들어간 씨앗들은 달리기 시합을 해요. 일등 한 씨앗이 알을 차지해요. 그러고 나서 아주 조그만 아기가 되는 거예요.”와 같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성교육을 권장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자가 10대 청소년과 “섹스(성행위, 성관계)는 뭘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섹스일까?”라는 대화를 나눈 경험이다. 청소년들은 성기 결합 중심, 남성 중심의 대답이 많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아이들과 섹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성기 결합’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 섹스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꼭 알려주세요. 육체적인 행위뿐 아니라 섹스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자세도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고학년 담임을 주로 맡다 보니 여학생들의 생리, 생리통과 관련된 경험이 많다. 예전에는 여학생들이 생리대를 가방 깊숙이 숨겨 다녔지만, 요즘은 예쁜 꽃무늬 손가방에 넣어 다니며 남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본다. 심에스더, 최은경의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납작하게 눌린 ‘성’을, 입체적인 ‘성’으로 일으켜 세워 다각적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너무 솔직하고 용감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기도 한다. 그만큼 내 성의식도 납작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2020-12-06

잊혀져가는 국민교육헌장

윤영대수필가12월 5일, 다이어리를 넘기다가 ‘아, 오늘이 국민교육헌장 기념일이지.’하고 자세히 들여봤으나 그곳에는 무역의 날, 자원봉사자의 날이라는 표시뿐이다. 알아보니 달력에서 사라진 지 벌써 1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 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통한 국가발전 방안의 추진을 지시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전문가로 위원회를 만들고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 12월 5일 선포한 교육지표이다. 당시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기선을 빼앗겼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400여 자의 이 교육장전(敎育章典)은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의 근본 지표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세계 공영의 길로 나아가자는 각오는 7,80년대 학창시절에 외우기도 한 익숙한 문구이다. 학문과 기술을 익혀 자신을 계발하자는 것도 당시 물량적 발전에 몰두하고 있는 국민의 정신을 질서와 신의 등을 기본으로 한 협동 정신으로 뭉쳐 국민의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리라. 또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반공과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통일된 조국을 내다보며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취지이다.이제 돌아보니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된 지 50년,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발전시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 세계 10위권의 경제선진국 대열에 들었고 수출도 연간 6천억 불을 달성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국민교육헌장의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노력한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1973년 이후 20여 년간 정부주관 기념일로서 학생들에게는 암기대회도 열고 스승에 대한 공경의 행사도 하며 국민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켰으나 박정희 유신정권의 반공독재 교육의 산물이요 일제시대 교육의 잔재가 남았다는 비판도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민주화 이후 암기 강요와 이념교육강화라는 트집을 잡아 폐지론이 대두되어 헌장은 초중고 교과서에서 삭제되어 버렸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1월 기념일도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색다른 해석들도 많다. 태어날 때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지 않았는데 국가 건설에 무조건적인 충성과 노동을 강요하며 참여시킨다는 의견도 있고 강압적 주입식 교육의 지침이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헌장을 외우면서 고통을 받았다는 회고담도 있으니 이 모두가 그야말로 어이없는 생각들이다.성실한 마음과 몸으로 배우고 익혀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세계에 내놓아 남부럽지 않은 융성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봉사한다는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없이 어찌 애국애족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는가. 자꾸만 움추려드는 교육환경 속에서 잊혀져 가는 국민교육헌장을 읽으며 다시 한번 외쳐 본다.‘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2020-12-06

‘코로나 블루’ 치유하는 식도락 여행을 문경에서

고윤환문경시장문경새재는 코로나19 이전에도 매년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치유 관광의 명소였다.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자유롭지 않은 사회생활 등 각종 제약이 일상화된 지금 ‘코로나 블루’치유를 위해 문경을 찾는 관광객이 더 많아지고 있다.지난 4월 개장한 문경새재 내 문경생태 미로공원은 체험거리를 더한다. 개장 후 6개월에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입장객 5만 명이 방문해 언택트 관광지로서 면모를 실감케 했다.문경생태 미로공원은 우리나라 자생식물인 측백나무로 특색 있게 조성한 도자기 미로, 연인 미로, 생태 미로와, 문경에서 채취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 미로 등 4개의 미로로 이루어져 있다.도자기미로 출구로 나가면 유아숲체험놀이터와 인공호수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정원도 조성돼 있어, 미로공원을 찾는 가족단위 관광객들의 휴식과 놀이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올봄 개장한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도 주말 및 연휴기간에는 조기 매진되는 등 문경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단산 정상부까지 레일을 따라 운행하는 문경단산관광모노레일은 해발 260m에서 출발하여 860m까지 3.6km를 왕복하는 국내최장 산악 모노레일이다.해발865m의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절경과 함께 단산 숲속 캠핑장(16개소), 숲속 썰매장(6레일), 전망대, 산악 바이크 로드(21km) 등 다양한 체험거리가 조성돼 있으며, 길이 200m, 폭 2.5m의 무장애 데크길도 마련해 유아, 노인, 장애인 등 누구나 편안히 산 정상의 정취를 맛 볼 수 있다.모노레일 승강장에서 단산 정상까지 걷기 쉽게 조성돼 있는 1.9km의 데크로드는 사람이 가장 쾌적함을 느끼는 해발고도에 위치하여, 걷다보면 그간 쌓인 우울감과 피로가 절로 치유될 것이다.문경시는 풍부한 볼거리에 여행의 맛을 더할 먹거리 육성에도 힘쓰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면역력 유지가 중요시 되는 요즘 단산이나 새재에서 찬바람 좀 쐤다면, 따끈따끈한 문경 보약약돌한우탕 한 그릇이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녹여줄 것이다.‘문경 보약약돌한우탕’은 지난달 문경읍 소재 문경약돌한우타운에서 열린 문경 약돌축산물을 활용한 새로운 먹거리 소개 행사를 시작으로 문경 대표먹거리로의 첫 발을 내딛었다.문경 보약약돌한우탕은 약돌한우의 갈비뼈, 사태살을 푹 고아 국물을 내고, 수삼과 황귀, 흰목이버섯(은이버섯)을 곁들여 보약에 뒤지지 않는 영양 가득한 한우탕이다.문경약돌한우는 문경에서 생산되는 약돌(거정석)을 첨가한 전용사료를 먹고 자란 한우로 철저한 사양관리 프로그램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육질이 단단하고 깊은 맛이 난다.문경시는 70년대 탄광촌이 호황이었고, 당시 광부들은 목에 낀 탄가루가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와 함께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해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90년대 들어 탄광이 줄어들면서 ‘석탄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이들의 특별한 밥상은 아직도 문경의 밥상에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약돌돼지 족살찌개다.누구나 좋아하는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에 문경의 약돌을 먹여 키운 약돌 돼지의 쫄깃함이 더해져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음식이다.이러한 지역의 특색이 녹아있는 음식을 브랜드화 하고, 문경의 대표 먹거리로 개발·홍보하고자 시작한 것이 ‘문경하면 족살찌개!!’ 족살찌개 달인을 모집하여 선정하고, 선정된 맛 집에는 인증서를 달아 홍보하고 있는 사업이다.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총 3개 업소가 ‘문경하면 족살찌개 1호점, 2호점, 3호점’인증을 받아 족살찌개를 판매하고 있다.지역의 먹거리는 그 곳의 역사와 특색을 잘 머금고 있어야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문경시는 코로나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먹거리 속에서 행복을 충전하고, 얼어붙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문경 보약 약돌한우탕’과 ‘문경 약돌돼지 족살찌개’뿐만 아니라, 문경 김치 브랜드화 등 특색 있는 지역 먹거리 발굴 및 정착에 힘쓸 것이다.

2020-12-06

견문록

서늘해지며 여행을 다녔다. 하늘은 푸르고 사람이 걷기에 안성맞춤인 바람이 불어와 다니기에 더 좋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겨울바람으로 한 단계 높여도 차를 타고 다니니 어디든 나설 수 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은 못하는 터라 당일치기 국내 여행으로 일정을 잡았다. 영양을 서너 번, 경주는 옆집 드나들 듯했고, 그림 전시회와 사진전까지 마스크를 쓰고서도 잘도 다녔다. 그리고 여행기를 글로 남겼다.우리 민족이 지금에 와서야 여행을 즐긴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듣고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중 상당수는 사라졌지만, 일부는 현재까지도 전한다. 빈왕록, 표해록, 제목만 듣고 무엇에 관한 책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열하일기를 더하면 여행의 기록인지 알게 된다. 빈왕록은 고려 중기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느낀 바를 이승휴가 시로 정리한 것이고, 표해록은 고향 나주로 가려고 탐라(제주)를 출항했다가 중국으로 표류한 최부의 기록이다.견문록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인도를 여행한 선배들과는 달리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오는 새로운 인도 여행로를 개척했으며, 그 여행기 또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 유일한 기록이고, 대당서역기 등에서 누락 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고자 했다는 점 등에서 귀중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행기 중에 그나마 우리에게 알려진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도이다. 지인들에게 읽어본 여행기가 있느냐 질문했을 때 나온 대답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책이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표류기, 돈키호테,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풍자소설이니 여행기라고 하기보다 기행문 형식이라 해야 맞다.) 등속이었다.나 또한 열하일기만 읽어보았을 뿐이다.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로 ‘호질’, ‘허생전’은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도 아는 이야기이다.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도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여정의 모든 일화를 기록으로 남긴 박지원은 여행 보따리에 글을 쓰기 위한 도구가 제일 많았다고 하니 기록에 대한 그의 철저함이 엿보인다.조성원 작가는 우리나라 고전 작가의 대표 박지원을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와 비교했다. 여행과 연행이라는 형식의 비슷한 점과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있다면 열하일기의 박지원에게는 장복과 창대의 익살스러움과 의리가 잘 묘사되어 있어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표현의 자유로움과 주인공의 인간적인 매력과 더불어 ‘철학’이 있다는 유사함도 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열하일기는 우리에게조차 덜 알려진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김순희수필가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한다. 그러니 발로 뛰며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한 방법인 것이다. 나는 여행 짐을 싸면 일주일 단위로 책 한 권, 그 이상의 여정일 때 또 한 권을 더 가져간다. 소설이나 가벼운 내용보다 고전 같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챙긴다. 짐 가방이 무거운데도 책을 넣어가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의 불면증 때문이다. 여행의 피로감이 밀려올수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마다 책을 펼쳐 읽다 보면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터키에서 버스로 8시간을 이동할 때 고미숙의 열하일기를 읽어냈고, 와이파이도 제대로 열리지 않는 스페인의 밤은 돈키호테와 함께 했었다. 다음에 서서 하는 독서의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의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들고 가서 혜초와 심오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다.앞선 이들의 여행기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도종환 시인의 처음 가는 길이란 시를 읊조려 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뿐이다. (중략)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2020-12-06

유체이탈 화법

유체이탈이란 사람이 육체 바깥에서 세상을 인지하는 경험을 말하는데 심령학 등에 쓰이는 용어다. 영어로는 OBE(out of body experience)라 부른다.간혹 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는 사람도 있으나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다. 불교의 영향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조상들은 유체이탈 현상을 믿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사람이 죽으면 바로 입관하지 않는 것과 입관 전까지 상문을 받지 않는 것이 그런 경우다. 혹시 돌아가신 분이 되살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정치권의 유체이탈 화법이 자주 논란이다. 최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아파트를 빵에 비유해 당장 공급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야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했다. “누가 정부더러 아파트를 만들라 했나” “정책 실패는 인정 않고 남 탓만 한다”며 김 장관의 무책임한 발언이 곧 유체이탈 화법이라 비난한 것이다.얼마 전 국감에서 이정옥 여가부 장관이 서울 부산 선거를 두고 “성인지 집단학습의 기회”라 발언했다가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여성 문제를 직접 다루는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이 유체이탈 화법가 다를 게 없다는 야당의 비난이었다.유체이탈 화법이란 말하는 자신은 전혀 상관 없는양 얘기하는 화법으로 우리 말의 “사돈 남 말한다”는 것과 비슷한 뜻이다. 내로남불이나 이중잣대 등과 같이 주로 책임을 회피할 때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말은 곧 인격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말은 신중하고 절제돼야 한다.공자는 논어에서 “말은 둔해도 실천은 민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말 많은 세상이다. 번지르르한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눌언민행(訥言敏行)의 지혜가 필요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2-03

검찰개혁VS검찰장악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추미애-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 정치권을 뒤흔들며 클라이맥스로 달려가고 있다. 이 사태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윤석열 검찰총장은 직무에서 배제한 명령의 효력을 임시로 중단하라는 법원의 결정이 나온 직후 직무에 복귀해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대전지검에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 3명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승인했다. 여권이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해 왔던 원전 수사와 관련, 구속영장 청구라는 초강수를 두며 강제 수사에 나선 셈이다. 원전 자료를 대량 삭제한 해당 공무원들이 구속되면 백운규 전 산자부 장관을 비롯한 청와대 등 윗선으로 수사가 뻗어나갈 것이 자명해진다. 검찰이 여권 전체에 대항해 맞선 형국이며, 꼬리가 머리를 휘두르는 형세다.청와대는 윤 총장에 대한 징계위 절차에 항의하는 뜻으로 사표를 낸 고기영 법무차관의 후임을 하루 만에 임명했다. 이는 윤 총장에 대한 징계 절차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무부 징계위가 해임·면직 등 중징계를 결정하고, 문 대통령이 재가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란 관측이다.추-윤 갈등 사태에서 한발 물러서 있던 문 대통령이 직접 정국을 매듭짓겠다는 신호다. 어쨌든 추-윤 갈등의 결말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해임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추미애 법무장관, 혹은 청와대의 승리일 수 있을까. 오히려 추미애의 위기는 윤석열 사퇴 시점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평검사들이 웅성대고 연판장이 돌고 검사장들이 줄사퇴를 한다해도 추 장관은‘예상했던 저항’이라며 코웃음 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과거 검란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광장의 여론이 검찰에 호응할 수 있다. 이미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에 오를 정도의 팬덤을 가진 윤석열의 수족을 추미애가 잘라내고, 윤석열이 사표를 던지는 국면이 상당수 국민들에게는 ‘검찰 장악’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리은폐’나 ‘독재’란 야권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있다. 그럴 경우 조국사태 때보다 더 높은 강도의 반정부 집회가 들불 일 듯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추미애의 위기라기보다 청와대의 위기가 될 수 있다. 청와대는 윤 총장에 대한 징계가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이 아닌 법에 따른 조치라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검찰총장 임기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다. 윤 총장이 추가 소송전에 나서고 야당이 반발하면 더 큰 후폭풍이 몰려올 수 있다.엎친데 덮친격이랄까. 추-윤 갈등이 한창인 시점의 여론조사 결과도 정부여당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나란히 현 정부 들어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 대목에서 현 정부를 지지했던 국민들은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강제로 끌어내리려는 정부여당의 강압적인 조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검찰개혁일까, 아님 검찰장악일까.

2020-12-03

코로나 수능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입시의 추억은 추위와의 싸움이다.50여 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고교 입시장으로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대학입시 보던 날은 단체로 버스를 타고 갔지만 버스에서 내리기가 힘들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대학 1년 선배들이 격려차 버스에 올랐지만 추위에 떠는 모습이었다.입시는 왜 꼭 추운 날 치루어지는 걸까? 그건 봄 학기제와 관계가 있다. 좀 더 따뜻한 날 치를 수 없을까? 그래서 9월 학기제가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좋게 느껴진다. 한국 등 아주 소수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가 가을학기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더구나 금년엔 처음으로 1년간 기세가 꺽일 줄 모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 속에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루어졌다. 수능 지원자는 50만 명이 안되어 역대 최소 숫자라고 한다. 이중 거의 1/3 이 재수생이라고 하니 그것도 걱정이다.코로나19 확진자, 자가격리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기에 실제 시험실 장소는 전년의 1.5배로 늘었다고 한다.수험생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미리 배정된 시험장으로 가 발열 체크를 받고 일반 시험실로 입실했고 37.5℃ 이상의 열이 있거나 기침 등 의심 증상을 보이는 수험생은 2차 체크에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경우 별도 시험실에서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정부는 수능 출제 방향 브리핑에서 “학교 교육을 통해 학습된 능력 측정을 위해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춰 문제를 냈다”며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내용 중심으로 출제함으로써 고교 교육의 정상화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고 밝혔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작년과는 다른 입시제도가 발표되었다.정부는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며 “내년 4월까지 수능위주전형 40% 확대를 추진한다”고 말했다. 지난 해 교육부가 발표한 2022학년도 대입부터 서울 주요대학 16곳의 수능 위주 정시 선발 비중을 40%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한때 수시를 늘리라고 난리를 치다가 몇 년 전부터는 정시를 늘리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한국에는 농담 같은 진실이 있다.“한국에서 길을 걸어가는 사람 중 아무나 두 사람을 골라서 “대학을 들어갈 때 어떤 시험을 치르고 어떤 과정을 겪었나?”라고 물으면 똑같은 과정을 겪어 대학을 들어간 두 사람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반대로 미국에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질문하는 사람을 이상하다고 쳐다볼 지 모른다. 그들은 입시정책이 거의 바뀌지 않으며 대부분 대학 자율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입시제도나 대학 선발 방식은 자주 바꿔야 할 제도가 아니다. 이리저리 매년 뜯어고쳐봐야 끊임없이 고쳐야 할 뿐이다. 올해는 코로나로 괴로운 수험생, 학부모들에게 편한 마음을 주도록 하자. 그냥 편하게 해주자. 그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미 늦은 일이긴 해도 내년을 위해서라도….

2020-12-03

뉴노멀(New Normal)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지금 활발하게 백신을 개발 중이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머지않아 퇴치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여러 모로 변형이 된 삶이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거라는 진단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될 ‘뉴노멀’에 대한 담론들이 나오고 있다. 뉴노멀이란, 2003년 미국의 벤처투자가인 로저 맥나미가 처음 사용한 말로 2000년대 초반에 형성된 미국의 버블경제 이후 새로운 기준이 일상화된 미래를 일컫는 용어다. 당시 미국은 버블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급속도로 경기가 악화됐다. 그리고 악화된 경제 상황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의 기준을 형성했다. 그간의 경제를 좌우했던 기존의 규칙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원칙들이 정립되는 시대를 뜻하는 용어가 뉴노멀이었다.코로나19 바이러스로 팬데믹 상황인 세계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대혼란을 겪고 있다. 탈세계화의 가속화, 디지털 전환의 촉진, 소비행태의 변화, 언택트(비대면)문화의 확산 등, 지난 일 년 동안 실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앞을 다투어 팬데믹 이후의 뉴노멀에 대한 예측과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은 모두가 불확실한 상태이다. 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 사태를 인류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거였다.지금까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해왔던 삶의 기준에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삶의 의미와 가치, 행복의 추구에 생태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것은,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의 창궐은 물론 각종 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등의 자연재해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현생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것은 끝을 모르는 욕망의 과잉 때문이다. 80억에 육박하는 인구폭발에다 문명발전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자연파괴 행위는 결국 자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진단이다. 전염병 바이러스의 창궐도 생태계 훼손의 임계점을 넘어선 인류에 대한 가이아(Gaia)의 자정작업이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고.우리나라의 경우 코로나19의 방역을 위한 통제와 수칙이 그런대로 잘 준수되는 편이다.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그만큼 향상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방역을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난도 팽배해있는 게 현실이다. 정권의 비리와 횡포에 저항하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원천봉쇄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헌법도 바꿀 수 있는 국회의석을 확보하였으니, 코로나19 방역을 빌미로 국민들의 집단행동을 막고, 정권에 복종하지 않는 검찰총장까지 몰아내면 그야말로 저들만의 세상이 되어 어떤 비리나 과오도 다 덮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인 것 같다.하지만 대한민국이 그렇게 허술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현상들이 속출하고 있다. 법질서를 무시한 법무장관의 횡포에 검사들 전원이 반발을 하는가 하면 변호사협회와 법대 교수들까지 잇달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고 있으니, 사필귀정의 뉴노멀이 도래하기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2020-12-03

길이 인간을 넓히지 않고 인간이 길을 넓힌다

소백산 중에서 십수 년 만에 만난 명호 형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째서 형은 서울을 등지고 형수님과 공부 잘하는 아들딸을 속세에 남겨두고 홀로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밤하늘 별빛 아래서 형은 말했다. 세상도 나를 찾을 수 없고 나도 세상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노라고.그로부터 이십 하고도 사 년이라. 형이 산중에서 삭혀야 했던 것은 세상에 대한 원한 같은 것이었던가?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식을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세상에 대한 열정 같은 것이었나?내가 조금만 더 형에게 성실할 수 있었다면 나는 형이 수 년 전에 ‘공자의 시작에 서다’라는 책을 보내오셨을 때 서가의 한가운데 꽂아 놓지만 말고 부지런히는 말고라도 하루하루 음미는 해보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뒤늦게 읽은 서문에서 형은 공자를 가리켜 혁명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공이 그 깊은 마음을 담아 ‘논어’를 펴냈지만 편집 과정에서 그 안에는 증삼 같은 이의 ‘가짜’ 논리도 끼어든 나머지 하나의 일관된 사상만으로 이루어진 체계는 되지 못했다고도 했다. 왜 공자의 ‘시작’에 서야 하는가? 그것은 그를 잘못 읽음으로써 이 동양 세계가, 그 중요한 부분 한국이라는 사회가 잘못 이끌어져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그러니까 형은 공자를 통하여 남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 자신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 혁명을 위해 또 ‘논어’를 읽는 그 자신만의 독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즉, 형은 ‘논어’는 명문장들의 집합으로 읽으면 안 되고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치열한 대화와 행위의 장으로서, 연극 무대를 바라보듯 읽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야만 그 실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형이 그토록 자공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논어’의 그 전체적인 흐름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스승의 3년상을 치르고도 모자라 홀로 다시 3년상을 치렀다는 그의 성인(聖人)다운 면모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형은 산중에 오래 계신 분답게 오는 사람 반기고 떠나는 사람 소매 붙잡지 않는 도인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내려오실 때도 되었건만 또 형 자신도 새로운 삶이 이제는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시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었다.나 홀로 하산하여 서울로 와 형의 ‘공자의 시작에 서다’를 진지하게 편다. 거기 ‘길이 인간을 넓히지 않고 인간이 길을 넓힌다’는 말이 써 있다. 형이야말로 길을 넓히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는 그 넓혀진 길을 조금이라도 뒤따라 걸어봐야 하겠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12-02

‘테스 형’에 열광하는 사회심리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코로나 비상사태 하에서도 트로트 열풍은 종편을 강타했다. 남녀 트로트 가수 경연 이후 트로트는 여전히 방송가를 달구고 있다. 무명 가수의 가수왕 등극도 재미있었지만 나훈아의 방송 복귀는 더욱 재미있었다. 그의 신곡 ‘테스 형’은 엄청난 조회 수를 자랑하고 있다. 코로나 장기화로 지친 사람들에게 청량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나훈아는 부모님 무덤 앞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시상이 ‘테스 형’의 작곡배경임을 털어놓았다. 세상을 풍자하는 (소크라)‘테스 형’은 코로나 시대 답답한 사람들에게 흩어진 자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테스 형’은 첫 소절에서 ‘턱 빠지게 웃다가 찾아온 슬픔을 웃음 속에 묻는다’고 출발한다. 암울한 우리의 현실을 재미있게 빗대고 있다. 그는 뒤이어 ‘세상이 왜 이래’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코로나 뿐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어지럽기 때문이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 TV만 켜면 정치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싸움만 계속한다.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유례없는 격투는 점입가경이다. 국회는 열기만 하면 패싸움이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오른다. 코로나 보다 무서운 것이 불신과 혼돈이다. 세상이 왜 이래 하는 노랫말이 공감을 얻는 이유이다.노래의 둘째 소절은 아버지 산소를 찾은 이야기이다. 무덤가에 ‘거저 피는’ 제비꽃과 들국화를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꽃들마저 자주오지 못하는 아들을 꾸짖는다. 모두가 세상 살기에 바빠 무덤도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오랜만에 부모님 산소를 찾아 불효를 후회하는 모습이 노랫말에 잘 담겨있다. 어느 늦가을 묘소 앞에 술 한 잔 올리고 회한을 푸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노래는 코스모스 핀 ‘고향 역’에서부터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영영’과 ‘누가 울어’에 이어 엄마를 그리는 ‘홍시’로 연결된다. 기성세대 누구나 공감하는 유행가가 되었다.마지막 절은 저 세상에 먼저 간 테스 형에게 ‘천국이 있던가요?’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세상의 구원 문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고 있다. 일전에 어느 모임에서 신부님은 이 노래를 ‘스도 형’으로 개사해 부른다고 했다. 물론 ‘스도’는 그리스도를 줄인 말이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 그래도 종교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탈선된 종교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종교인이 정치하고 정치가 종교를 이용하는 모순이 연출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국에 대한 그의 도발적인 질문은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가수 나훈아는 그의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좋은 가수라고 평가받는다. 이번 공연에서 그도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었지만 그의 예술혼만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칭송받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형으로 등장시킨 그의 발상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비례 대표 의원직 제의도 단 칼에 잘라버렸다. 그는 가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가슴에는 민족적인 애국심과 정서가 흐르고 있다. 일본 초청 공연에서도 그는 무대에서 할 말을 다해 버렸다. 흔해 빠진 CF 출연도 그만은 하지 않는다. 나훈아에 모두가 열광하는 이유이다.

2020-12-02

류영재포항예총 회장자기정체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자신의 내면을 사실 그대로 온전히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그 까닭은 사람이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 간의 관계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것이 얼마나 복잡다단하던가. 때에 따라서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경우도 있다. 선의의 거짓말이 그렇고, 분위기를 재미있게 이끌어 갈 목적으로 상황을 과장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대개는 자신의 얘기에만 집중하여 타인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므로 굳이 바로잡을 이유도, 그럴 기회도 없을 때가 많다.그림 소재로서의 길에 대한 내 생각도 그렇다. 화가로서 나는 주로 소나무를 그린다. 소나무만 그린다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소나무 외에는 거의 그리지 않으니, 이런 나를 두고 어떤 이들은 ‘소나무 화가’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싶은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길’을 빼놓지 않고 말해왔다.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중요한 얘기도 아닐 것이며, 그다지 궁금해 하지도 않아서 뚜렷이, 힘주어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길은 언제나 내게는 중요한 예술창작의 화두였다. 길은 보통 교통수단으로서의 도로를 말하지만 의미가 확장되어 방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행위의 규범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내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길은 유년을 보낸 고향마을의 구불구불한 시골길에 대한 기억과 엄마 손잡고 외갓집 가던 길에 대한 추억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확장된 의미의 길도 늘 명심하고 있다.길은 시골길, 꽃길, 지름길처럼 앞에 관형어를 붙여서 의미를 구체화하는데, 교통기관의 발달로 개념이 확장되어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길인 물 위의 ‘뱃길’이나 비행기가 다니는 ‘하늘길’이란 말도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무슨 길이 없을까?’, ‘손쓸 길이 없다.’처럼 어떤 일에 대하여 취해야 할 수단이나 방법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길은 예로부터 우리의 일상과도 밀접해 ‘길로 가라 하니까 뫼로 간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등 속담에도 많이 등장하는 친근한 말이기도 하다.최근 언론에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꽃길이 화제가 되어 국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검찰총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서초구 대검청사 앞길에 가득하더니 이에 맞서 법무부장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장관의 집무실 출근길 복도를 가득 메웠다.‘절대 지지 않는 꽃길’이라는 리본도 달렸다 한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는데 지지 않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싸워서 지지 않고 반드시 이긴다는 의미인가. 화환과 꽃바구니는 죄가 없는데,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기는 몹시 불편하다.시인 장순하는 “어디에나 길은 있고 어디에도 길은 없나니”라고 노래했다. 함께 걸으면 길이 된다. 대화와 소통을 통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2020-12-02

배문경수필가1894년 음력 12월 2일, 이날은 갑오농민전쟁 지도자였던 전봉준이 관군에 체포된 날이다. 얼마 전 전주 동학혁명관에 들렀다. 어두운 조명 아래 동학의 역사가 사건별로 붙어있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가 부러진 그가 관원의 들것에 실려 사형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의 혁혁한 눈빛이 금방이라도 세상을 향해 포효할 기세였다.앞선 그림 속에서는 짚신을 끌며 동학농민군이 죽창을 들고 세상을 바꾸겠노라 고함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조총 앞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쌓이는 모습들은 처참했다. 많은 사람이 하늘을 향해 고통에 찬 소리로 울부짖었다.그들을 이끌던 그의 발도 밤새 부르트도록 산하를 헤매고 다니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겠노라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풀도 밟고 흙도 딛고 물길도 건너며 세상의 온갖 것을 모두 지났을 그의 발은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갔으리라.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자신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해 주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의 나이 41세에 손화중, 김덕명과 같이 효수를 당한 후 몸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지 않았고 가솔들은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겼다. 체포과정에서 동지의 배신으로 다리와 발을 다친 후 그는 걷지 못했다. 부은 발이 그의 사상을 향해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 죽음에 다다라 지그시 눈을 감고 절명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지도 내 편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수가 없구나.”그는 많은 유혹 앞에서도 자신의 결정을 보이기 위해 당당하게 무소의 뿔처럼 죽음 앞으로 향했다.그의 발 앞에서 내 발을 내려다본다.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다. 스무 살, 교대근무를 하던 내 발은 신발 안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오후 출근을 하는 삼 교대근무로 나의 발은 잠자는 시간보다 깨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자던 발은 곰팡이가 잠식하면서 자는 시간에도 가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종일 무게에 짓눌려 지상에 그 바닥을 댄 채 머슴처럼 견뎌주던 발의 저항이었다. 가려움과 물집은 약을 먹어도 쉬 낫지 않았다.쭈뼛쭈뼛하며 제자리를 지킬 때 저항에 앞장선 것도 발이었다. 발과 발이 앞과 뒤를 혹은 옆으로 대열을 갖추었을 때, 무리가 되고 하나의 큰 힘으로 뭉쳐졌다. 태극기의 모서리를 잡고 도로로 나설 때도 나의 발은 정당했다. 손과 머리가 보이는 것에 집중할 때, 나의 발은 좀 더 성숙했다. 거리의 행렬은 독재 타도를 외치고 발은 정의를 향해 그 보폭을 넓혀나갔다. 나의 스무 살은 거리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일로 보내는 날이 많았다.전봉준의 발, 그의 고뇌와 삶의 그림자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지나고 보면 악행은 악행으로 선행은 선행으로 각자의 갈림길로 나뉜다. 역사란 거대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를 만난다. 보부상처럼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녔을 그의 발은 뻗은 산맥과 깊은 계곡처럼 갈라 터졌을 것이다.죽음 앞에서조차 퉁퉁 부은 발은 그가 만들고자 했던 세상의 땅을 딛지 못했다.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그의 절규 앞으로 나아가 슬픔에 가닿는다.그의 큰 발걸음을 생각한다. 어둡고 눅눅한 세상을 개벽시키려 했던 그의 기개가 느껴진다. 두 발이 만들어냈던 좁은 영토의 큰 발자국. 아직도 끝내지 못한 숙제를 담고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일까. 그와 함께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여전히 혼란 속에서 몸부림친다.전시관 문을 열고 나서자 겨울 한풍이 매섭게 불었다. 칼바람에 맨몸으로 나섰을 그가 내 앞을 지나 저벅저벅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다시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20-12-02

출근 시간

제게도 출근 시간이 있습니다. 월급을 받는 직장이 있는 것도 내세울만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가 정한 출근 시간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남편이 출근한 뒤 집안을 후다닥 정리하면 아홉시. 보무도 당당히 컴퓨터가 있는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저만의 유쾌한 출근을 감행하는 것이지요.근무처(?)에서 해야 할 업무는 당연 글쓰기입니다. 일가를 이룬 대작가들처럼 하루에 원고지 열 장 내지 스무 장씩 정해놓고 써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직장인이 사무를 처리하듯 글쓰기도 자연스레 일의 일부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지요. 누가 강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니 의지대로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미숙한 업무처리로 질책을 앞둔 신입사원처럼 안절부절못합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지요. 대가들을 벤치마킹하겠다던 불타던 의지는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스스로 약속한 원고 매수를 지키는 날보다는 그렇지 못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책상에 앉으면 곧바로 글쓰기 목록파일을 클릭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건만 박약한 의지력은 언제나 포털 사이트부터 접속합니다. 세상사 이런저런 간접 경험이라도 해야 쓸거리가 주어진다는 변명을 진작 준비해놓은 것이지요. 움직이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저에게 ‘간접 경험’이라는 핑계는 그럴듯한 방어벽이 되어 주긴 합니다.오랜 딴 짓 끝에 겨우 목적한 원고를 완성합니다. 모든 초고는 걸레다. 헤밍웨이가 한 말입니다. 초고 완결이라는 잠깐의 자부심도 헤밍웨이의 저 일갈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객관적인 눈썰미를 보탤수록 쓴 글은 허섭스레기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 ‘걸레’가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닙니다. 퇴고를 거듭하면 얼추 쓸 만한 면 보자기로 거듭 나기도 합니다. 그걸 믿고 그냥 써나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걸레조차 만들지 않거나 만든 걸레를 방치하는 것이겠지요.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도 초고는 형편없었다지요. 하지만 절박한 궁핍, 절절한 외로움이 그녀의 초고를 천문학적인 재산으로 바꿔놓았겠지요. 이혼과 육아 설상가상으로 실업까지 겹쳐왔지만 끝내 초고의 끈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공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걸레를 기워 온전한 조각보로 변모시키려는 에너지만 있다면 글쓰기보다 정직한 노동은 없을 거예요.같이 글쓰기를 시작했어도 오라는 데 많은 재주꾼들은 절실함이 사라져 쓰는 데 전력투구하지 못합니다. 반면, 글재주가 덜한 이들은 불러주는 곳이 많지 않아 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습니다. 절치부심, 그저 쓰고 또 쓸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작가가 되어 있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우직하게 쓰는 자 앞에 장사 없습니다. 쓰다 보면 빛이 보이겠지요. 제대로 쓴다는 전제가 붙긴 하겠지만.제대로 쓴다는 건 무엇일까요. 글쓰기에 비결이 있을 리 없습니다. 쓰는 순간이 곧 비법일 뿐입니다. 잘 쓰는 이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것도, 옹골찬 자기 확신도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예민한 손끝과 묵직한 엉덩이입니다. 그 두 도구를 활용해 읽고 쓰기만 하면 됩니다.글쓰기는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재능이 덜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재능보다는 열정이지요. 지속적으로 읽고 쓰다보면 자연스레 자신만의 문체와 이야기로 연결되겠지요. 이때도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머리와 가슴이 글을 쓰게 하는 줄 압니다. 단언컨대 글을 오래 쓰게 하는 힘은 엉덩이와 손가락이 먼저입니다.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묻고 더 이상 예민해질 손끝이 없다 할 정도로 온몸으로 쓰면 됩니다.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쓰는 순간만이 글쓰기의 진정한 과정이자 비결입니다. 자판에 누른 글자가 늘어날수록 쓰는 비법을 터득하는 시간은 짧아집니다.김살로메소설가글 한 번 잘 써보기가 저의 평생 숙제입니다. 하지만 욕망한다고 어디 글이란 게 써지더란 말입니까. 답을 알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쉽게 써지지 않는 글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합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쉬 내려놓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숱하게 넘어지고 한없이 작아져도 결국 쓰는 자리에 있을 때만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기에. 돈도 많으면 좋겠고, 좋은 친구도 얻으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 모든 걸 유예하고서라도 제대로 쓸 수만 있다면 바랄 게 없습니다.끈질기게 쓰는 자는 끝내 이기고, 어영부영 자기검열에 빠진 자는 출근한 일터에서 이런 반성문이나 쓰게 됩니다. 자기 긍정과 자기 확신으로 무장된 스스로를 기대해 봅니다. 어느 작가가 말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오래 쓰는 자가 이긴다.”

2020-12-02

코로나 수능

장규열 한동대 교수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눈부신 문명을 쌓아 올리던 가운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온 세상이 얼어붙었던 한 해. 치솟는 감염자 숫자에 마음을 졸이며 삶의 가닥들이 쪼그라들었던 일 년. 사계절을 건너고도 꺾이지 않는 기세 앞에 다음 세대마저 위태로운 오늘. 코로나와 함께 수능의 아침이 밝았다.우리만큼 대학입시에 목숨을 거는 나라가 없다. 수능시험이 헤드라인 뉴스가 되는 나라. 사찰과 교회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부모. 하루의 승부에 인생을 거는 수험생 자신.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 신입생 정원보다 적다는데도,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은 잦아들지 않는 모습. 초중고 공교육이 대학입시로만 향하는 습관과 제도. 대학을 나와도 취업전선에 일자리가 사라진 사회. 누구도 정색하고 따져 묻지 않는 수능. 정부와 학교, 가정과 사회는 길들여진 나머지 문제의식마저 실종된 느낌이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교육의 모습이 몇 달째 일그러진 끝에 수능은 다가오고 말았다.일정을 연기했던 뒤라 더는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기승을 부리는 바이러스와 정면대결을 하듯 수능을 치러야 한다. 수험생에게 미안하다. 대학 간판이 그 어떤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 터에 나어린 고등학생들이 입시의 질곡을 아직도 겪는 일은 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선생님에게도 미안하다. 사람 만드는 교육을 기대하며 교사로 헌신했을 당신이 대입 성공을 기준으로 일과를 지내게 만든 일도 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학부모에게 미안하다. 당신의 ‘나 때’만큼 대학이 일생을 보장하지 못하는 걸 뻔히 함께 보면서 아직도 당신의 자녀들을 대학입시에 매달리게 하는 일도 구태가 아니면 무엇인가.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수능은 거북이처럼 제자리걸음이다. 먼저, 수능을 학생들 간에 ‘실력’을 평가하고 비교하기 위한 시험에서 해방하여 대학교육을 받기 위한 최소 기준과 소양을 확인하는 ‘인증’ 시험으로 전환해야 한다. 일 년에 단 하루 제공하는 시험에 그의 일생이 달린 듯한 분위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수능을 건강하고 교육적인 틀 안에 들어오는 인증시험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수험생도 학부모도 부적절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다음,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공하는 일정 관행도 수정해야 한다. 학생들이 편안하게 준비하여 대학을 향한 꿈과 비전이 무르익었을 적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여 유연하고 자유로운 인증시험으로 자리를 잡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런 후에, 대학 입학을 위한 최종 선발은 대학이 책임지고 자율적으로 진행하도록 바꾸어 갔으면 한다.코로나 수능. 기억에 남을 오늘 시험에서 수험생들이 각자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를 기원한다. 보고 듣는 것처럼, 나라와 사회에는 바꾸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쌓여있다. 수능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기대하며 구상하는 젊은이들을 캠퍼스에서 만나고 싶다. 코로나는 지나가겠지?

2020-12-02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중앙은행을 뜻하는‘Central Bank’와 디지털 화폐(Digital Currency)를 합친 용어로, 실물 명목화폐를 대체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를 뜻한다.CBDC는 블록체인이나 분산원장기술 등을 이용해 전자적 형태로 저장한다는 점에서 암호화폐와 유사하지만, 중앙은행이 보증한다는 점에서 비트코인 등의 민간 암호화폐보다 안정성이 높다. 또 국가가 보증하기 때문에 일반 지폐처럼 가치 변동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실시간으로 가격 변동이 큰 암호화폐와 차이가 있다. CBDC는 전자적 형태로 발행되므로 현금과 달리 거래의 익명성을 제한할 수 있으며, 정책 목적에 따라 이자 지급·보유한도 설정·이용시간 조절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2019년 페이스북의 암호화폐인 리브라가 공개되면서 위기를 느낀 각국 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질서를 재편할 목적으로 2014년부터 디지털 화폐를 연구하기 시작해 지난달 5만명의 주민에게 1인당 200위안씩 디지털위안화를 시범적으로 배포해 CBDC 개인사용을 광범위하게 실험하고 있을 정도다. 스웨덴은 2020년부터 디지털 화폐‘e-크로나’ 테스트를 본격 가동하고 있으며,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일본은행(BOJ) 등도 2020년 1월 CBDC에 대해 공동연구 그룹을 만들기로 했다. 특히 2020년부터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 사태로 현금 사용이 줄고 온라인 결제가 급증하면서, 디지털 화폐가 주목받고 있다.한국도 CBDC 기술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도록 암호기술 사업을 지원하고, 특허 확보에 노력해야 할 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2-02

문학은 우리를 위안하는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얼마 전에 정지창 선생이 ‘문학의 위안’이라는 서책을 출간했다. 조금 낯설지만 정겨운 느낌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문학작품은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완화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미학적 구조물”이라는 설명이 와 닿는다. 그는 인생은 고해라는 자명한 사실을 위로하고, 삶에 지쳐버린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미학적 구조물로 문학을 포착한다.희곡은 물론 시와 소설마저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 20세기 20년대에 문학에서 위안을 구하는 선생의 자세는 놀라운 것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문학을 벗하는 한국인이 있는지 궁금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화기에 눈과 코와 얼굴을 밀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홍수에서 느닷없이 문학과 위안이라니?! 이런 담대한 기획의 이면에는 노장의 패기와 경륜이 담겨있을 것은 정한 이치다.3부로 구성된 서책 가운데 나는 1부에 등장하는 ‘고은과 그의 시대’와 ‘백무산이 만난 최제선’을 주의 깊게 읽었다.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억압과 폭정에 저항했던 고은 시인의 편력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펜’ 하나에 의지하여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운 기개(氣槪) 높은 시인은 이제 코로나 블루 만큼이나 우울한 만년과 대면하고 있다.신화는 깨지게 되어있다지만, 이토록 허망하게 하나의 시대가 뭇매를 맞고 소멸하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일초 선생의 기행과 괴담은 익히 알려졌으나, 그것의 붕괴가 삽시간에 진행되는 바람에 우리는 거기 담긴 함의마저 제대로 읽지 못하고 눈감아버린 것은 아닌가! 시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은 시대를 만드는 법!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하는 김상헌의 시조 가락이 가슴을 저민다.1990년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로 노동시의 지평을 넓힌 백봉석. 부모가 지어준 ‘봉석’이라는 이름 대신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자신을 자리매김한 시인. 그가 찾아낸 실패와 좌절과 회한의 인물 최제우의 본명은 최제선이었다. 어리석은 민중을 구하겠다고 새로 지은 이름 제우(濟愚)처럼 봉석도 노동자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산(無産)이란 이름을 가진다.“스스로 일어나 스스로를 구하라/ 그리 일어나 스스로 구하는 자 모두 한울이라/자신의 모가지를 허공에 베어버린/선생이여/수운 선생이여/어찌 허공으로 세상을 내리쳤더란 말입니까” (‘최제선’ 부분)백성이 스스로를 구하기를 바랐던 혁명가 최제우는 모가지를 길게 드리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자신의 존재를 넘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허공을 가르는 칼을 만들었던 최제우. 하지만 빈틈없는 세상은 그를 살해한다. 최제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백무산의 비애가 바로 곁에 있다. 무너지고 스러진 시인들의 형상에서 작가는 시의 위안과 우리가 떨치고 나갈 동력을 찾는다. 문학은 언제까지 우리를 ‘위안’할 수 있을 것인가?!

2020-12-01

수능 신화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연습이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가슴 깊이 파고드는 지금이다. 출근길에 우연히 들은 가수 임재현의 ‘사랑에 연습이 있었다면’이라는 노래 제목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한때 필자도 모든 순간이 연습이길 바라던 때가 있었다. 특히 큰 시험 이후에는 그 생각이 더 간절했다. 그리고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아쉬움에서 오래 허우적거렸다. 아쉬움은 언제나 후회와 좌절, 그리고 절망으로 이어졌다.당시를 회상하면 제일 힘들었던 것은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정하면 정말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의 이면에는 늘 주변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그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과 응원은 필자에겐 큰 부담이었다. 물론 이 또한 실패에 대한 핑계라는 것을 잘 알지만, 실패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필자에겐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비겁하게도 필자는 그것을 부담감 탓으로 돌렸다.실패를 거듭할수록 탓하기는 더 심해졌다. 그 방향이 필자였다면 실패의 횟수를 훨씬 많이 줄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탓 앞에는 늘 남이 있었다. 남 탓하기는 문제를 해결책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시험 불합격 등 어떤 일이 좌절될 때마다 필자는 다른 곳에서 핑곗거리를 찾기 바빴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격언 속에서 희망 없는 위안을 얻었다.필자를 탓하기의 비겁함에서 구한 것은 책, 특히 신화, 동화, 위인전 등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읽는 이 책들은 느낌부터 달랐다. 이들 이야기에는 명확하면서도 유사한 서사구조가 있다. 그 서사구조는 우리 고전소설에 나오는 영웅의 일대기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이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늘 시련 속에 산다. 시련 대상은 사람, 사회제도, 운명 등 다양하다. 이들 주인공이 필자와 다른 점은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간혹 시련이 중복되기도 하지만, 승자는 늘 주인공이다. 시련을 겪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련은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수능을 보는 모든 이에게 수능 신화를 소개한다. 신화 속 주인공은 2021학년도 수능에 응시한 모든 수험생이다. 시련은 성적 지상주의 입시제도와 코로나19이다. 어느 해보다 2020년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이 겪는 시련은 혹독하다. 하지만 수험생 모두는 신화 속 주인공이자 현실 속 주인공이기에 그 시련을 이겨낼 힘을 충분히 가졌다. 그리고 그 힘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 그러기에 시련 따위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뜻한 것을 꼭 이룰 것이다.수험생들이 만들어낸 수능 신화는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에 큰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그 결과 코로나19도 조기 퇴치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큰일을 하는 것이 수능 신화의 주인공인 수험생이다. 이 시대의 주인공인 수험생에게 꼭 한 가지만 당부한다. 필자처럼 연습 타령과 남 탓을 하면서 궁상맞게 지내지 않기를! 주인공답게 어떤 결과든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2020-12-01

혜민 스님과 마라도나

아라파호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 들소 떼의 이동을 따라 유목생활을 했던 인디언들이 농사꾼처럼 추수가 끝난 11월의 들판을 보며 그런 은유를 떠올려내진 않았을 것이다.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잎사귀를 떨군 나무들과 초록빛을 잃어버린 풀들, 땅에 떨어진 열매들, 금방 어두워지는 하늘 등 초겨울이 자아내는 쇠락의 분위기 속에서도 무언가 희망적인 일들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보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매년 11월마다 환절기 질병이 돌아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까? 월동을 앞두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곰이 인디언 주거지역까지 침범해 인명피해가 자주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라져도 그의 영혼은 바위와 구름과 강물에 남기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정신에 각인되기에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 듯하다. 써놓고 보니 근사하다. 앞으로 이렇게 우길 작정이다.지난 11월,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뜨다’라는 말은 중의적 표현이다. 한 사람은 속세를 떠났고, 한 사람은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갔다. 속세를 떠난 이는 ‘라이언 봉석 주’라는 영어 이름을 지닌 ‘스타 승려’ 혜민이고, 이승을 떠난 이는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다. 혜민은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했고, 마라도나는 스스로 신이 되었다. 혜민을 따르는 수많은 중생들과 마라도나를 숭배하는 신흥종교 ‘마라도나교’를 떠올리면 둘 사이에 아무 접점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두 사람 다 종교적 광휘를 입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멘토이자 우상이었다.혜민은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SNS에 글을 올리면 수십만 회 공유되는 ‘셀럽’이었다. 40대의 젊은 승려가 대중들로부터 이렇게 큰 주목을 받는 일은 그동안 없었다. 미국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각각 종교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햄프셔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낸 이력이 ‘스펙’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스펙을 내려놓고 돌연 출가해 승려가 된 ‘무소유’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소개되어 사람들을 더욱 매료시켰다. 온갖 방송 출연과 대중 강연으로 친근한 이미지를 얻으면서 그는 ‘국민 멘토’로 각광받았다. 무소유, 비움, 내려놓기, 멈추기 등 욕심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설파했다.그런데 얼마 전 ‘무소유’가 ‘풀(full)소유’임이 탄로 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현각스님은 ‘기생충’, ‘도둑놈’, ‘연예인’, ‘사업가’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까지 했다. 발단은 혜민이 한 방송에 출연해 남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고급 대저택에서의 ‘럭셔리 라이프’를 소개한 것이었다. 호화주택에서 명상 어플리케이션 홍보와 유튜브 구독자 늘리기에 매진하는 일상은 참선이나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무욕의 형식으로 물욕을 추구해온 라이언 봉석 주의 민낯에 대중들은 실망과 분노를 토했다. 결국 혜민은 SNS에 참회의 글을 올리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속세를 떠난 척 세속도시의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된통 걸려 자의반 타의반 정말로 속세를 떠났다. 미련이 크게 남을 것이다.마라도나는 ‘축구의 신’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핸들링 파울을 헤딩으로 교묘히 위장해 골을 넣은 후 ‘반은 신의 손이 넣었다’고 말하면서 신화의 플롯이 짜이기 시작했다. 논란의 득점 바로 5분 뒤, 70미터를 드리블하면서 잉글랜드 수비수 6명을 제치고 넣은 추가골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회자된다.그는 혼자서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후 이탈리아 프로축구에 진출해 만년 하위팀 나폴리에게 리그 우승컵과 UEFA(지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안겼다.그렇게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나폴리에서 신이 되었다.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신으로 추앙받았다.하지만 늘 ‘악동’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찬란한 영광은 마약, 술, 금지약물, 폭력, 탈세로 얼룩졌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지도자로 처참히 실패했다. 온갖 궤변과 기행을 일삼아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죄를 짓고 패배하는 신, 마치 아즈텍인들이 숭배하던 케찰코아틀 같았다. 폭음, 폭식, 흡연 등 무절제한 생활은 병을 키워, 최근 뇌수술을 받은 후 심장마비로 쓰러져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속세를 떠난 것과 실제 죽음은 만져지는 부재의 질감이 서로 다르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두텁고 짙고 무겁다. 그러므로 둘을 나란히 두고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니다. 안 될 것도 없다. 죽은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부재하는 현존, 현존하는 부재’(김현)이기 때문이다. 잠시 종적을 감춘 것이든 영영 사라진 것이든 세상에 영향을 끼친 이들의 부재는 완전한 사라짐이 될 수 없다. 그들이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혜민이 남긴 것은 실망감과 배신감이다. 앞뒤가 다른 위선에 대중들은 분노했다. 이 분노는 결국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데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겉을 포장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짜’들은 혜민 말고도 넘쳐난다. 직접 요리하는 대신 인스턴트를 사 먹는 현대인들은 생각도 남이 대신 해주길 바라고, 마음도 남이 가꿔주길 바란다. ‘내가 의지하고 마음을 맡겼던 멘토가 사기꾼이었다니’라는 허탈감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과 마음을 다잡는 지혜를 잃어버린 대중들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혜민도 남들처럼 부와 명예를 좇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더 영악한 가짜들은 본모습을 들키지 않는다. 세속의 가치, 즉 ‘인간’을 내려놓으라고 하면서 끝내 인간을 벗지 못한 혜민은 그렇게 인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설파했던 부처의 가르침과 멘토로서 사람들에게 준 감명, 그의 선한 이미지는 모두 사라져도 곳간에 쌓은 물질적 풍요는 다 사라지지 않을 테니, 꽤 남는 장사였는지도 모른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마라도나가 남긴 것은 스포츠의 감동과 환희, 열정, 꿈 그리고 희망이다. 물론 나쁜 짓도 많이 했다. 탐욕이라면 혜민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평생 돈과 명예에 집착하며 코카인과 금지약물과 쿠바산 시가와 색욕을 즐겼으니 불가의 표현으로 ‘마귀’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 전 세계가 슬퍼하는 것은 그가 인류에 남긴 위대한 유산들이 개인 생의 과오를 덮고도 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선자가 아니었다. 인간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했다. 그러면서 인간을 초월했다. 혜민이 만인을 위하는 척 자신만을 배불린 데 비해 마라도나는 오직 자기 앞의 싸움인 축구에 육체와 영혼을 다 던져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한 사람의 쾌락적 인간으로는 타락했지만 축구 선수로는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롤모델이 되었다. 그는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다.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중남미의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자선 축구경기를 열어 수익금을 교황청에 기부하기도 했다. 마라도나의 육체는 모두 사라져도 그가 보여준 열정과 집념,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혜민과 마라도나, 두 ‘떠남’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나는 인문학 회의론자, 마음 불신자가 될 것만 같다. 마음은 교활하고 육체는 정직하다. 마음은 여러 개로 갈라질 수 있지만 육체는 오직 하나 뿐이다. 말과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마음을 속일 수 있는지, 진짜는 사라지고 가짜만 횡행하는 지식인 사회와 종교계가 좀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스포츠 세계야말로 정토(淨土)가 아닐까. 그 어떤 사상가, 대문호, 종교지도자보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 마라도나, 마이클 조던이 더 위대하다고 믿는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돈과 명예를 좇아 욕망 안에 갇히는 바보가 아니라 매 순간의 한계를 이겨내며 마침내 육체를 초월하는 운동선수들, 또 가난과 소외를 내내 견디며 지금껏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려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이지만 때로 인간을 뛰어넘는다. 그렇게 인간에서 자유롭다. 아, 혜민이 사라져도 우리에겐 흥민이 있다. 마라도나만큼 위대해질 것이다.

2020-12-01

안지랑 곱창골목

여행이 관광산업으로 발전한 것은 19세기 무렵 유럽에서다. 교통수단의 획기적 발달이 관광산업을 선도했다. 그 이전에는 돈 많은 왕족이나 귀족의 전유물 정도로 일반인에겐 관광이란 상상하기 힘든 개념이었다.여행을 뜻하는 영어의 Travel은 고통과 고난의 뜻인 Travail에서 유래됐다는 것은 여행 자체가 힘든 고난의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생활이 윤택해진 요즘은 해외여행이 보편화 되고 여행 자체가 삶의 일부이자 휴식이 되고 있다. 여행을 통해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고 내 삶도 재충전한다.먹는다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 지역 그 나라의 대표적 음식을 찾아 맛을 보며 문화와 생활방식을 이해할 때 우리는 여행의 특별한 의미를 느낀다. 미국에 가면 우리의 주먹보다 더 큰 햄버거를 먹고 프랑스에서는 달팽이 요리, 이탈리아에서는 스파게티, 체코의 족발요리 같은 것을 먹어 보면 진정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실감할 수 있다.IMF 이후 대구시 남구 앞산 안지랑 골짜기에 하나둘 생겨났던 곱창전문식당가가 합쳐져 형성된 안지랑 곱창골목이 농림축산부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외식거리로 선정됐다고 한다. 이곳은 과거 전국 5대 음식 테마거리로 뽑힌 바 있고, 한국관광 100선에도 선정되는 등 짧은 시간에 제법 유명세를 탄 먹거리 동네다.이곳에서 취급되는 막창구이는 대구 10미(味)의 하나로 전국 어디서도 구경하기 힘든 대구만의 특화 요리다. 1970년 초부터 대구에서 유행한 막창구이는 소주와 잘 어울리는 안주로 젊은이에게 인기가 높다. 특별히 제조된 된장 소스와 마늘과 쪽파를 곁들여 먹는 맛은 별미라 하겠다.전국 최고의 외식거리로 선정된 안지랑 곱창골목이 바로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