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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의 하안거

등록일 2021-08-18 20:23 게재일 2021-08-1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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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남구 연일읍 감나무 농장.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준다. 그러면서 조금도 으스대지 않고 조용하다. 어느 집에서나 있는 나무라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하나 빠졌다는 허전함은 베어지거나 죽은 뒤에 문득 떠오른다. 아, 그 집 뒤란에 감나무가 있었지.

감꽃은 늦봄에 노랗게 핀다. 봄의 꽃들이 피고 지기를 할 때 감꽃은 조금 늦게 이어달리기에 참여한다. 감꽃은 나무의 커다란 잎에 묻혀 있어 잘 살펴야 초록을 품고 있는 꽃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잎에 숨어 수줍은 듯 삐죽이 고개를 내밀다가 금방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에 감꽃이 떨어지면 노란 방석을 깔아 놓은 듯하다.

금방 떨어진 감꽃을 무명실로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한 겹 두 겹의 감꽃 목걸이를 걸고 땅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 먹었다. 배고픈 시절, 먹을 게 없던 계절에 그만한 간식도 없었다.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씹으면 쌉싸래하고 떨떠름했지만 그래도 입안에서 무언가를 오물오물할 수 있어 좋았다.

감나무는 뙤약볕 아래서도 눈을 반짝인다. 가지마다 손바닥만 한 잎을 넉넉하게 달아놓고 나무의 눈처럼 이리저리 살핀다. 그러면서 동시에 폐의 역할도 한다. 잎 한 장마다 수천 개의 숨구멍이 있어 뿌리를 찾는 힘을 갖는다. 나무가 햇빛 가리개인 잎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걱정되는지 섬세한 잎맥으로 눈을 반짝이고 숨을 쉰다.

감나무가 있는 풍경 사진이 있다. 조선 초기 이암의 ‘모견도(母犬圖)’이다. 여름이 깊어 잎이 무성한 감나무 아래에서 젖을 먹이는 어미 개를 중심으로 강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더운 날씨에 감나무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그늘을 내준다. 사진 속의 주인공이 강아지가 되었다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감나무는 우리 가까이에서 넉넉한 품을 내준다.

마음 맞는 이와 조그만 밭을 일군다. 우리는 이곳을 종합백화점이라 부른다. 봄에 고랑을 만들어 상추, 오이, 가지, 고추를 심었다. 여름 내내 우리들의 식탁에는 싱싱하고 푸른 것들이 올랐다. 농사일에 서툰 우리는 밭 끄트머리에 감나무를 심었다. 봄이 몇 번 오고 가는 사이에 감나무는 키를 쑥쑥 키우더니 잎을 무성하게 매달았다.

두 해 전, 내 키만 한 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가지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축 늘어졌다. 더러는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구고, 또 다른 가지에서는 더 많은 감을 꼬옥 매달고 있었다. 여름의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익어갔다.

기다림은 타닥타닥 햇볕의 몸부림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모든 순간을 몸으로 드러내는 나무는 이제 주홍빛 감을 달아 놓고 시선을 끈다. 잘 익은 홍시는 다달한 맛을 주고, 곶감으로 만들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감나무 꼭대기에 있는 감은 까치밥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따려고 욕심내지 말고 자연의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 나누면 좋다. 한 아름의 소쿠리에 감을 담으니 또 다른 가을 풍경이 거실에 가득했다.

힘을 너무 쏟은 탓일까, 감을 다느라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작년에는 감 하나를 달지 않았다. 감나무가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해거리였다. 스스로 해를 걸러서 쉬자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한 나무의 마음을 알지 못해 노심초사했다. 감나무의 해거리는 하안거나, 동안거이다. 해거리하는 동안 에너지의 활동 속도를 늦추면서 숨 고르기를 한다. 더 달콤하고 더 풍성한 열매를 위해 쉼표를 찍는다.

쉼표가 없다면 어쩌면 영원히 마침표를 찍을지도 모른다. 매년 쉬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면 오래 가지 못해 그 맛을 잃을 것이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 나무는 삶의 마지막을 고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텃밭의 감나무는 지난해 하안거에 들었다. 더 나은 열매를 위해 나는 그 여름을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이순혜​​​​​​​수필가
이순혜수필가

지난밤, 비바람에 감나무는 안녕한지 살핀다. 다행히 이파리도 감도 제 자리에 달려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볕 사이에 한두 개의 감이 주홍빛으로 물들려고 한다. 아직은 여름의 끝자락이 멀어 보인다. 매 순간을 열심히 살다 보면 저만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올 것이다. 그러면 하안거에서 깨어난 감나무는 줄기차게 감을 달고 제 열매를 지켜 낼 것이다. 감을 달고 있느라 처진 가지를 버팀목으로 지탱해주었다.

잠시, 감나무 아래 머물다 햇볕을 피해 그늘로 도망간다. 내가 피한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감은 주홍빛으로 물들어가겠다. 늦가을이면 가지에 열린 까치밥이 추수가 끝나 황량해진 들을 노랗게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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