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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에 추억 걸렸네

등록일 2021-10-13 20:20 게재일 2021-10-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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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포스코대로 플라타너스.

하늘 높이 양떼구름이 몽글몽글하다. 산들바람이 양떼구름을 물리고 그 자리에 새털구름을 엎는다. 가을하늘이 그린 수채화 아래 플라타너스도 높다랗게 이파리를 달고 서 있다. 기억 속의 한 풍경이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타고 희미한 흑백사진 속으로 떠난다.

초등학교 때, 플라타너스는 약속장소였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플라타너스 아래 모였다. 십리 길을 혼자 가면 심심해서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나무 아래 친구의 가방이 하나둘 던져졌다. 가방 서너 개가 쌓이면 우리는 비석치기를 하고 그림자밟기 놀이를 했다.

매번 늦게 오는 친구가 있었다. 받아쓰기를 통과하지 못했거나 숙제를 하지 않았거나 준비물을 빠트린 친구이다. 우리는 반이 달랐지만,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서 뛰어놀았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노느라 다리가 뻐근해질 때쯤, 친구가 왔다. 그러면 교실에 남아서 뭐 했노? 청소했나? 숙제했나? 한 사람이 하나씩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친구의 처진 어깨를 동무하며 한 손으로 가방을 들어 올려 주었다. 교정을 빠져나갈 때쯤 플라타너스 잎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플라타너스는 넉넉하고 우람했다. 내 몸의 몇 배나 되는 나무 몸통에 기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고 있는 눈에 구름이 내려 나를 감싸고 햇살이 조물조물 생각을 빚자 상상하는 것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졌다. 큰사람, 넓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지. 저 플라타너스처럼 풍성하게 그늘을 드리워야지.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에는 낭만이 깃든다. 낙엽이 쌓여 바스락거리는 곳에 연인들이 손잡고 걷는다. 걸을 때마다 낙엽이 소곤대는 것은 연인의 마음이 움직이는 소리다. 콩닥콩닥, 쿵쾅쿵쾅, 심장이 멋대로 나대는 소리를 감추며 걷기에 좋다. 저물녘에 부는 바람 한 자락은 연인들의 맞잡은 손을 더 감싸게 한다. 커다란 나뭇잎 하나 주워 얼굴에 대고 속삭이면 한쪽 어깨가 살짝 기울어진다.

플라타너스는 성장 속도가 빨라 대기 중의 오염물질을 걸러준다. 자동차 도로에 플라타너스가 양쪽에 쭉 뻗어 있다. 나무는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무의 넓적한 잎은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리를 흡수하여 방음에 도움이 된다. 오염된 공기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은 다른 어떤 나무보다 뛰어나다. 이미 오래전 그리스에서도 플라타너스를 가로수로 심었던 이유다. 영국 런던을 비롯한 세계의 이름난 대도시의 가로수로 플라타너스는 빠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플라타너스가 사라지고 있다.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 플라타너스. 가을이 깊어지면 큰 잎이 떨어져 도로 가장자리에 수북이 쌓인다. 제때 치우지 못하면 상수도의 구멍을 막아 비가 오면 물이 넘치기도 한다. 그리고 씨에 있는 털이 날려 기관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이소프렌’을 많이 배출하여 공기 중의 오존을 증가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매연 속에서 견디느라 애쓰는 플라타너스의 몸부림일 수 있겠다.

플라타너스의 공식적인 우리 이름은 ‘버즘나무’다 처음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나무의 껍질이 얼룩덜룩해서 버짐나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옛날 사투리로 부르던 그대로 버즘나무라 한다. 가난하던 시절 영양이 부족한 까까머리 어린아이들의 마른버짐이 생각난다. 아니면 왠지 피부병이 날 것 같은 이름이다. 차라리 영어 이름 그대로 플라타너스라 쓰면 좋겠다.

이순혜​​​​​​​수필가
이순혜​​​​​​​수필가

플라타너스는 한 아름의 추억을 안고 있다. 그 나무를 보며 시인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꿈을 아느냐고,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파아란 하늘에 어느덧 젖어 있단다. 가을이면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랫말은 가을이 다 가도록 그리운 얼굴이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우리들의 약속장소 플라타너스, 그 아래 영화가 있고 시가 있고 추억이 있다.

어른이 되자 플라타너스는 그저 그런 나무였다. 나이가 들어가니 도로에 줄 서 있는 플라타너스가 다시 보였다. 나무가 품고 있는 숱한 회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제 플라타너스가 사라지면 추억을 소환하는 풍경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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