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붉음, 그 마지막 정열을 사르다

등록일 2021-11-10 20:13 게재일 2021-11-11 17면
스크랩버튼
경북수목원 단풍나무.

겨울로 가는 길목, 수목원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찬바람이 이 골짝에서 저 골짝으로 불자 나무들이 서둘러 다른 색깔로 잎을 물들인다. 사람도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수목원을 찾는다. 이들의 왁자한 소음을 잘 버무리면 푸짐한 가을 한 상이다.

붉은 꽃등이 내준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 한 자락에 나뭇잎이 화르르 떨어진다. 단풍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푹신한 융단을 깔아 놓았다. 단풍의 해사한 빛에 이끌려 나무 아래 머문다. 나무가 뿜어내는 붉고 고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뭇잎 하나, 둘 주워 손바닥에 살포시 올린다. 군데군데 벌레가 갉아 먹고, 서로 부딪쳐 바스러진 잎이 제각각이다. 단풍잎의 크기는 비슷해도 색깔은 다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늘을 요즘에는 자주 올려다본다. 하늘이 맑아 고개를 들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신발 끈 매고 나서면 하늘이 내려 준 풍경을 오롯이 내게 들일 수 있다. 추위가 몰려오기 전에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나뭇잎을 보는 것은 황량한 겨울을 건너야 하는 인간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위안이다.

붉은 丹, 바람 楓, 은행나무 잎이나 갈색으로 변하는 나무도 단풍이라 부른다. 나무의 특성에 따라 잎을 각기 다르게 물들인다. 조금 빨리 물을 들이고 햇볕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붉은 단풍나무 아래 서자 나도 붉게 물든다. 붉음은 사람을 모이게도 했다. ‘붉은 악마’가 거리에 모여 토해내는 열정은 얼마나 붉고 뜨거웠던가.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단풍나무가 주는 화려한 것만 보았다. 나뭇잎들은 왜 떨어질까, 왜 가장 곱고 아름다울 때 잎을 떨어낼까, 뙤약볕의 여름을 잘도 견디고 비와 바람, 몇 번의 강한 태풍에도 제 가지를 잘 챙겼는데, 나뭇잎은 가장 화려할 때 사람을 불러들이고 잎을 떨어뜨리려 하는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경북수목원 단풍나무.
경북수목원 단풍나무.

찬바람이 불면 나무는 미련 없이 잎을 버린다.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이 생기니까. 버릴 때를 알았다. 그동안 광합성을 하느라 고생한 잎을 떨어뜨리기 전,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아름답게 핀다. 단풍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유는 생의 마지막에 단풍이 단풍다운 본연의 색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닐까.

그냥 서서 엄동설한을 견뎌야 하는 나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필요하다. 가지가 많아 잎이 풍성하면 넉넉한 양의 수분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으면 나무도 겨울을 견디기 힘이 든다. 긴 겨울 동안 얼어붙을 수도 있고, 가지마다 매달린 잎들이 눈보라에 마주할 일이 더 생길 수 있다. 나무는 추위가 엄습하기 전에 우리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서둘러 몸을 가볍게 한다.

내 어머니는 가난했다.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흙 묻은 옷이 마를 틈 없이 밭에서 살았다. 비 오는 날이 돼서야 어머니는 우리 차지였다. 가난해서 밀가루로 만든 먹거리뿐 이었지만, 항상 배가 불렀다.

우리는 추운 겨울,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사실은 누가 더 어머니 곁에 앉을 수 있을까 경쟁했다. 아랫목에서 피어나는 어머니의 옛이야기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랐고, 지난한 삶에도 조금씩 볕이 들었다. 들창으로 스미는 햇살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때, 어머니는 큰 병을 얻었다.

이순혜수필가
이순혜​​​​​​​수필가

어머니 곁에 자식들이 머물고 치료를 도왔다. 하지만, 부모·자식이라는 끈은 정성만으로 버틸 수 없었다. 온갖 약을 써도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지셨다. 어느 날, 이제는 안 되겠다며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깊게 파인 어머니의 주름만큼 투박하지만, 누런빛이 나는 것을 슬며시 꺼내셨다. 손을 내민 우리에게 어머니는 팔찌를 하나씩 채워주셨다. 서로 의지하고 양보하며 둥글게 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얼굴에 붉은 꽃이 벙긋했다.

어머니 얼굴에도 마지막 꽃을 피웠다. 어머니가 평생을 몸담은 곳에 기부하라고 부탁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꾸 그쪽으로 향한다며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적지만 큰 베풂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자식들의 형편을 알았지만, 평생 흙 만지며 번 돈으로 어머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달았다.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곳, 그곳을 바라보며 참 많이 기뻐하셨다. 어머니의 마지막은 단풍처럼 붉었다.

단풍나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았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버려야 할 때를 알았다. 가장 아름다울 때. 이제는 무거워진 것을 하나둘 내려놓을 때이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