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길 한적한 곳에 무인계산대가 있다. 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보았다. 거기에는 서너 봉지의 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봉지에 만원입니다.’라는 명찰을 달고. 밤이 든 봉지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하다 그냥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현금이 없다. 무인계산대가 있는 뒷산에는 골짜기마다 밤나무가 있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작은 배낭에 얼음물 하나 챙기고 뒷산에 올랐다. 밤나무 아래는 입을 벌린 밤송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나무에는 가시 달린 밤송이가 알밤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입 벌렸고, 아직은 아니라고 가지에 매달려 바람 그네를 타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 밤나무 몸통을 세차게 발로 찬다. 후드득, 후드득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땅에 흩어진 밤송이를 모아놓고, 양쪽 신발 사이에 밤송이를 놓는다. 다음에는 나무꼬챙이로 살살 밤송이의 입을 벌린다. 몇 번을 쿡쿡 찌르면 반들반들한 알밤이 보인다. 알밤을 덥석 잡아, 매번 가시에 찔리기도 했다.
밤송이를 까는 일은 손이 많이 간다. 밤송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말라고 안팎으로 두 번이나 싸매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뾰족한 가시를 최전방에 보초를 세워놓고 알밤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도 가시를 헤집다 손에 가시가 박혀도 알밤을 꺼내면 골대를 지키는 골키퍼를 피해 골을 넣은 듯 신났다.
이 골짜기가 분명하다. 무인계산대에서 산을 훑어보았다. 그래, 이번 추석 차례상에 내가 주운 밤을 올리자. 오래된 기억이지만, 이 골짜기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지 싶다. 어린 날 발자국을 찍은 골짜기가 분명하다. 두어 걸음 떼자, 갈색빛의 늙은 밤송이가 군데군데 보였다. 두 눈 크게 뜨면 숨어 있는 알밤을 찾을 수 있겠지. 그래 여기서 한 주먹만 줍자.
밤나무를 뜻하는 한자는 栗(율)이다. 나무 위에 밤송이가 달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밤나무는 땅속에 밤톨이 씨밤 인 채로 썩지 않고 있다가 밤이 열리고 난 후에 썩는다. 밤나무는 자신이 태어난 삶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근본을 잊지 말라 한다. 근본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거나 이면에 잠재되어 있다. 근본을 둘러싼 꾸밈의 포장이나 가식을 걷어내면 볼 수 있다.
그렇게 다 걷어내고 흠 없고 정결한 밤, 조상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을 담아 차례상에 올린다. 밤은 조상과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제사상에 올리는 대표적인 과일인 ‘조율이시(棗栗梨<67F9>)’에도 ‘栗’은 두 번째 서열이다.
너도밤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스님이 지나가다 어린아이를 보고 호랑이로 인해 죽을 운명이라 말했다. 아이 아버지가 깜짝 놀라 대책을 묻자, 스님은 밤나무 백 그루를 심으면 괜찮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 호랑이가 아이를 잡으러 왔다. 아버지는 밤나무 백 그루를 심었으니 당장 물러가라 했지만, 호랑이는 꿈쩍도 안 했다. 으르렁거리며 호랑이는 한 그루가 말라 죽었다며 당장 아이를 잡아가려 했다. 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데, 옆에 있던 나무가 “나도밤나무다.”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또록또록했는지 호랑이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뒷걸음질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나무에 “그래, 너도밤나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열매가 조금 다르다. 그런데도 나도밤나무라고 우기는 것이 재미있다.
이이의 호 ‘율곡(栗谷)’도 밤나무에서 따온 것이다.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관직에 있을 때 앞으로 상서로운 일이 닥칠 것을 대비하여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덕분에 율곡은 실제로 어려운 일을 면하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밤나무가 심어졌던 동네 이름도 율곡리(栗谷理)라 지었다.
밤나무 그늘이 빽빽하고 넉넉해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큰 나무 아래서 두 눈 크게 떴는데 밤이 보이지 않다니. 몇 번을 둘러봐도 오래전에 떨어져 색이 바랜 밤송이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푸석한 가시를 달고 땅에 박힌 채로. 혹시 알밤이 떨어져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허탕이다.
발길을 돌리는데, 도토리나무가 보인다. 도토리나무들이 나도밤나무라고 선창하면 뒤에서 나도밤나무라고 가지를 흔들고 합창하면 좋으련만. 밤나무와 도토리나무는 서로 4촌이나 육촌쯤 되지 않을까. 조금은 비슷해 보이는 도토리가 반들반들한 얼굴을 내밀고 수풀에 떨어져 있다. 얼른 몸을 굽혀 밤 대신 도토리를 줍는다. 이쪽저쪽 주머니에 도토리가 불룩하다.
아무렴 어떤가. 밤이든 도토리든 줍는 재미 아닌가. 너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