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모 대학의 교수가 사석에서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박 교수는 차를 좀 큰 것으로 바꿔요. 교수답게”
난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다. 운전도 그렇거니와 주차도 서툴러 내게 맞는 편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인데, ‘교수니까 이 정도 되는 차는 몰고 다녀야 한다’는 그 생각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더 웃긴 것은 전세 대출 갚는다고 푸념하면서도 명품 시계를 차고 명품 가구를 물색하던 그 교수의 태도였다.
세상에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늘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분수에 넘는 사치를 하고, 그리고 뒤에서 카드값 막느라 대출금 갚느라 전전긍긍하면서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괜히 있는 척하는 이들. 남들한테 있어 보여야 무시당하지 않고 사람대접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사고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가시적인 것들이 명품이면 뭐하랴. 명품 찾는 사람이 짝퉁이면 다 부질없는 것을.
명심보감 ‘安分篇’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즐거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돈이 많고 귀해도 근심한다(知足者貧賤亦樂 不知足者富貴亦憂).’라고.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안분지족하는 삶을 평생 화두로 삼기도 했었다. 토정 이지함이, 삼베옷에다 짚신 신고 헤진 갓을 쓰고 포천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아전들이 산해진미를 갖춰 올린 상을 두 번이나 물리며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기 때문이니, 부유해지기까지는 그런 음식을 먹지 않으면 좋겠습니다.”하고는 보리밥과 시래기국으로 식사를 마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간소한 삶, 아름다운 나이듦’의 저자 소노 아야코도 ‘간소함의 철학’에 대해 설파한 바 있다. 즉 나이가 들수록 허세, 과욕, 집착 등 비대해진 욕망을 과감히 버리고 분수에 맞는 삶, 절제와 침묵의 삶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이 결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수를 모르고 욕심 많은 사람은 버리면 버릴수록 ‘상실감’을 크게 느끼지만, 분수를 아는 사람은 비우는 과정에서 ‘채움’의 공간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것들’, 무한한 진리로 채울 수 있고 그럼으로써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지혜마저 깨치고 있다. 그렇기에 분수를 아는 사람은 ‘비움’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고전 명작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도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비밀’이라며 속삭이지 않았던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라고. 이처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은 화려하게 치장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채우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있던 것들을 버리는 가운데 생기는 빈 공간을 비가시적인 진리로 채워나가는 데서 생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