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차 한잔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뒷자리에서 한 30대 중반쯤 된 여성 네 명이서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들어보니, 그들 일원 중 그날 참석 못한 한 명이 개를 키웠던 모양인데, 그 개가 죽게 되어 모두에게 견(犬) 장례식 일정을 알려온 것이었다. 독신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니, 가족과 같을 테고, 멤버의 경조사니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데, 부의금 금액부터 일정 조율을 어찌할까에 대한 내용이었다.
근데, 마침 그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는데, “엄마, 나 지금 대개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해, 끊어”하고는 가차 없이 확 전화를 끊고는 하던 대화를 마저 이어가는 게 아닌가! 개의 장례식 참석 및 부의금에 대한 논의가 부모의 전화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아…. 세상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우리말에,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산책하다 보면, 개가 걷기 싫다는 시늉만 하면, 바로 달랑 안고 가슴팍 안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는 풍경하며, 자칫 성가시게 짖었다는 이유로 발로 차려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동물학대죄로 고소당하는 불상사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옛날에는 섬돌까지만 오를 수 있었지, 감히 마루나 방까지 들어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음식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만 먹은 데다, 정월대보름에는 개보름쇠기라 하여 종일 굶기도 하는 등, 개는 그야말로 네 발 달린 짐승이었을 뿐이었는데.
물론 최자의 ‘보한집’에는 주인이 잠든 사이에 온몸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주인의 생명을 구한 의견(義犬) ‘오수의 개’ 이야기가 전하고 있고, 관련하여 선비들 사이에선 개 전기를 짓는 풍속도 생겨날 만큼 개의 충성심을 찬양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집지킴이이자 충(忠)의 상징으로서 개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서 숭앙받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안아주지 않으면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쓰기도 하고, 사람보다 먼저 침대로 버젓이 가 있는 경우는 물론, 심지어 개가 힘들까봐 멀리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정이나 장거리 여행을 취소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사람 때문에 개를 못 보는 경우는 잘 없어도, 개 때문에 봐야 할 사람을 못 보거나 하는 일들이 이제 다반사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개밥 신세, 개망신, 개살구 등 안 좋은 말에 붙곤 한 ‘개’ 자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개똑똑’, ‘개쩐다’, ‘개이득’ 등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이처럼 ‘개’가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했다고 해서, 견권(犬權)이 인권(人權)보다 우선시 되어서야 하겠는가.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 5월이다. 이달은 근로자의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처럼 정말 의미 깊은 날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의미깊은 달에는, 비록 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반려동물이더라도 근로자를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고, 은사님들을 떠올리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즉 사람을 우위에 두는, ‘개똑똑’한 사람이 되어 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