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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침산책

유복혜 전 청도전례원장·영남대 사회교육원 강사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아직도 어둡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늘 같은데, 가을도 깊어지니 해 뜨는 시간은 자꾸 늦춰진다. 한기가 훅 끼쳐 절로 손을 모아 가슴을 껴안게 된다. 신에 발을 꿰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 멀리서 차갑게 떨고있다. 달은 벌써 기울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 발 딛기가 다소 두렵긴 하다. 작년 봄 산책 중 집 앞 둠벙을 뛰다가 넘어져 크게 다쳤다. 1년 이상 온갖 신고(辛苦)를 한 탓인지 익숙한 길인데도 이젠 어둠조차 몹시 두렵다. 그래도 발길을 조심조심 옮겨본다. 걷다보면 차차 밝아 오겠지. 어둑한 길을 건너는데 흰 물체가 눈앞을 휙 스친다. 깜짝 놀라 가슴에 절로 손이 얹힌다. 종종 고라니가 나타나 껑충거리며 지나는 길이다. 걷던 발을 멈춘 채 가만히 뚫어지게 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희붐한 어둠 속에서 보니 흰 개다. 들갠가 보다. 저도 놀랐는지 날 쳐다보고 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발을 떼고 몇 걸음 걷다 뒤돌아본다. 그대로 날 쳐다본 채 서 있다. 또 몇 발자국 걷다 뒤돌아보니 세상에나…. 꼬리를 흔들고 있다. 저도 안심하였나 보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걷던 길을 재촉해본다. 내일 다시 또 만나면 반가워하려나. 어둠이 가시자 하늘의 별은 어느새 빛을 잃었는지 숨었고 대신 구름이 보인다. 코끝에 닿는 찬 공기가 맛있다. 크게 숨 쉬어 뱃속 깊이 들이마셔 본다. 입술을 내밀어 천천히 큰 숨을 내뱉으며 또 쳐다보게 되는 하늘에서 크고 흰 두루미 한 쌍이 들판으로 내려앉는다. 시선이 저절로 따라 내린다. 끼루룩 소리를 내며 열심히 뭔가를 쫀다. 내가 지나가는데도 날아가지 않고 저희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방해하지 않으려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일찍 일어난 새가 아침을 먹는구나. 논둑 사잇길로 들어섰다. 나락 향이 훅 끼친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가슴 가득 구수한 향에 취한다. 모질고 유난했던 무더위를 견뎌내더니 제법 알곡이 맺혀 누르스름한 색을 띈다.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과 낮의 뜨거운 햇살을 맞아 알은 더 여물어지고 단단해지면 이 황금빛 너른 논도 추수로 비어지겠지. 부지런한 농부는 작은 땅도 허투루 두지 않는다. 논둑 따라 좁은 길가에도 한 줄씩 뭔가가 심겨져 있다. 지난 여름 이름도 모르는 푸성귀 사이를 비집고 고개 내민 아기 주먹만 한 자그마한 애호박이 어느새 굵어져 누렇게 둥근 호박으로 뒹군다.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게 된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밴다. 이 이른 아침부터 벌써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를 만난다. 며칠째 흙을 뒤집고 부수기를 하더니 샛노란 흙이 부드러운 속살을 보인다. 양파씨를 뿌린단다. 내년 봄에 수확할 양파를 위해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수고로움을 감수하는구나. 더없이 고맙다. 그냥 고맙다. 진심을 담아 수고하신다는 말을 건넨다. 땀범벅이 된 채 집에 돌아오면 꼬리 흔들며 반겨주는 강아지 두 마리. 영감도 그새 일어났는지 이제 제법 우글거리며 자란 무와 배추밭에 엎드려 풀을 뽑고 있다. 한 시간 남짓의 아침 산책은 내 시골살이 행복의 일 순위다.

2024-11-04

투(妬)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의 일이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한 10년 넘게 공부하던 외국인 친구가, 마침내 지방 모 사립대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 잘 알기에,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진심 축하해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길, 그동안 생계 문제로 너무 힘들어 거의 연구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다들 싸늘하고 지도교수조차 외면했던 그 무렵, 내가 도움을 주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근데, 한 이틀 후, 다시 전화가 왔다. 매우 시무룩한 목소리로, 잘 돼서 이제 축하해줄 줄 알았더니, 다들 심드렁한 표정에다, 심지어 지도교수 및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화까지 냈다는 것이다. 아마 대학에 원서 낸 줄도 몰랐다가 주변에서 소식을 들은 모양인데, 예전 하루살이 인생으로 힘들게 살 때는 ‘나 몰라라 하던 이들이, 이제 버젓이 교수가 되고 나니,‘네가 잘된 게 내 덕’이니, 와서 감사함을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축하는 못해 줄 망정, 참. 일본의 예술가 기타노 다케시는, 그의 ‘생각노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타인의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 것 같다’고.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오스카 와일드도,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벗의 곤경을 동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벗의 성공을 찬양하려면 남다른 성품이 필요하다’고. 독일어에 이런 말이 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손해 및 불행을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진 말로,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실험 하나가 있다. 일본 교토대 다카하시 히데히코 박사는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가상 시나리오를 주고, 뇌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 결과, 많은 피험자들이 저보다 잘난, 시나리오 속 가상 동창생들에게 강한 질투를 느꼈고, 그럴수록 불안한 감정이나 고통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배측전방대상피질’이 반응하였다. 이는 곧, 질투의 감정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가 느끼는 불안, 내적 결핍 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내면의 결핍이나 불안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내면이 알곡처럼 단단하고, 자기의 삶에 만족한다면, 절대 남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묵묵히 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조선조 3대 가자(歌者) 중 한 명인 박인로는, 소 빌리기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렇게 읊조리지 않았던가. ‘남의 집 남의 것 전혀 부러워 말겠노라. 내 빈천(貧賤) 싫게 여겨 손 내젓는다 물러가며, 남의 부귀 부러워해 손짓한다고 나아오랴. 인간 어느 일이 명(命)밖에 더 있을까’하고. 가난해도 내면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열흘 후면 우리의 최대 명절, 추석이다. 올 추석에는, 간만에 보는 친지, 형제들 간에 누가 더 잘 났고 말고를 따지며 시기 질투로 보내는 대신, 서로의 성공을 축하해주며, 아름다운 명절,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와 같아라는 말처럼.

2024-09-05

더운 여름날, 독서를 생각하다

최선희 경운대 교수 절기상 말복이 지났지만 당분간 폭염과 열대야가 전국적으로 계속될 거라고 한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사람들은 에어컨 아래로, 바람 솔솔 부는 나무그늘 아래로 모여들어 더위를 식히거나 바다나 계곡으로 떠날 채비에 분주하다. 도심 가로수의 싱그러운 초록빛은 더욱 짙어가지만 우리는 삼복염천(三伏炎天)에 힘겨워하며 기진해간다. 연일 푹푹 찌는 찜통더위에 지친 몸을 식힐 좋은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인터넷으로 무더위 날리는 방법을 검색하다가 ‘도서관은 쿨 하다’라는 문구를 보았다. 서울도서관을 비롯하여 서울지역 180여 개의 도서관에서 시행하는 이 행사는 시원한 동네 도서관에서 더위를 피하고 냉방비를 절약하며 기후위기 극복에도 동참하자는 취지의 도서관 방문캠페인이다.경기도도 376개의 작은 도서관을 무더위 쉼터로 운영하며 더위를 피해 주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있는 공간을 마련하면서 독서문화 정착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 여름 독서캠페인은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그렇다. 더위를 이길 좋은 방법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 편안하게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급변하는 사회에서 나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나침반이 필요하다. 난무하는 정보에 휘둘리거나 타인에게 내둘리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을 바라보며 적절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하는 데 독서는 아주 유용하다.일찍이 사회학자 하워드 레인 골드(Howard Rheingold)는 로봇이 인간을 위해 남겨둔 일자리는 사고와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상상하며 생각하고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자신만의 사고로 어떤 새로움을 창조해낸다는 점이다. 기계는 인간이 프로그래밍 하여 부여해준 일만 한다. 때문에 인간은 기계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남다르게 사고하며 상상하고 협력하여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면 된다. 이런 창조성은 인간 고유의 역량이며 그 힘의 원천은 독서라고 생각한다.인문학자이며 교육가인 후지하라 가즈히로는 그의 저서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에서 “21세기에는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계층사회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독서습관을 강조하며 독서유무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은 달라질 수 있음을 역설했다.이제 독서는 우리의 취미와 선택을 넘어선 행위이며 사람이 기계에 대체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그만큼 독서는 인공지능시대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의 생존을 담보하는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경쟁력은 ‘생각’이며 이 생각을 길러줄 좋은 방법은 독서인 것이다.푹푹 찌는 날씨에 도서관에서, 시원한 계곡에서 한 박자 쉼표를 찍으며 독서에 몰입해보자. 저자의 생각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나아가 새롭게 해석하면 내 인생의 해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에는 모범 답안이 없지 않은가. 내 삶의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거늘. 더운 여름날, 책읽기에 빠져 나를 통찰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스스로의 삶을 디자인 해보자.

2024-08-18

개팔자 상팔자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차 한잔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뒷자리에서 한 30대 중반쯤 된 여성 네 명이서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들어보니, 그들 일원 중 그날 참석 못한 한 명이 개를 키웠던 모양인데, 그 개가 죽게 되어 모두에게 견(犬) 장례식 일정을 알려온 것이었다. 독신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니, 가족과 같을 테고, 멤버의 경조사니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데, 부의금 금액부터 일정 조율을 어찌할까에 대한 내용이었다.근데, 마침 그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는데, “엄마, 나 지금 대개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해, 끊어”하고는 가차 없이 확 전화를 끊고는 하던 대화를 마저 이어가는 게 아닌가! 개의 장례식 참석 및 부의금에 대한 논의가 부모의 전화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아…. 세상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우리말에,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산책하다 보면, 개가 걷기 싫다는 시늉만 하면, 바로 달랑 안고 가슴팍 안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는 풍경하며, 자칫 성가시게 짖었다는 이유로 발로 차려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동물학대죄로 고소당하는 불상사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옛날에는 섬돌까지만 오를 수 있었지, 감히 마루나 방까지 들어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음식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만 먹은 데다, 정월대보름에는 개보름쇠기라 하여 종일 굶기도 하는 등, 개는 그야말로 네 발 달린 짐승이었을 뿐이었는데.물론 최자의 ‘보한집’에는 주인이 잠든 사이에 온몸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주인의 생명을 구한 의견(義犬) ‘오수의 개’ 이야기가 전하고 있고, 관련하여 선비들 사이에선 개 전기를 짓는 풍속도 생겨날 만큼 개의 충성심을 찬양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집지킴이이자 충(忠)의 상징으로서 개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서 숭앙받고 그러지는 않았다.그러나 요즘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안아주지 않으면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쓰기도 하고, 사람보다 먼저 침대로 버젓이 가 있는 경우는 물론, 심지어 개가 힘들까봐 멀리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정이나 장거리 여행을 취소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사람 때문에 개를 못 보는 경우는 잘 없어도, 개 때문에 봐야 할 사람을 못 보거나 하는 일들이 이제 다반사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개밥 신세, 개망신, 개살구 등 안 좋은 말에 붙곤 한 ‘개’ 자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개똑똑’, ‘개쩐다’, ‘개이득’ 등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이처럼 ‘개’가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했다고 해서, 견권(犬權)이 인권(人權)보다 우선시 되어서야 하겠는가.바야흐로 신록의 계절 5월이다. 이달은 근로자의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처럼 정말 의미 깊은 날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의미깊은 달에는, 비록 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반려동물이더라도 근로자를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고, 은사님들을 떠올리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즉 사람을 우위에 두는, ‘개똑똑’한 사람이 되어 보면 어떨까 싶다.

2024-05-15

신(新)? 신(愼)!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설 명절이 지났다. 으레 즐거워야 할 음력설을 쇠고 나면 대한민국 곳곳에선 앓는 소리로 가득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 친지를 방문했다가 덕담(?) 아닌 독담(毒談)을 한 바가지 듣고 온 탓이다. 취준생에게 취업 이야기, 입시생에게 학업 이야기, 다른 형제자매와의 비교, 결혼 이야기, 난임으로 걱정인 부부에게 출산율 이야기, 여기에 더해 본인들 자랑질까지. 풀 세트로 받고 나면 그야말로 즐거워야 할 명절이 생지옥이 돼버리는 건 당연지사.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부족한 설,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는 일이 많아진, 천덕꾸러기 명절이 돼버린 것일까?설은 ‘신(新·새로운)’의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로, 한해가 시작되는 새날 곧 설익은 시간을 의미한다. 익숙했던 시간을 지나 낯선 시간으로의 첫걸음을 떼는 날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새로움 앞에서 긴장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에 떨며 초조해하기도 한다. 이런 불안함은 새해 전날 잠자면 눈썹이 센다고 믿으며, 밤새는 풍속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즉 잠을 자지 않으면 날짜가 바뀌지 않을 테고, 낯선 생경함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으리란 믿음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익숙한 것이 좋지 새로운 것은 두렵고 불편하다. 그 불편한 날, 우리는 바로 가장 편안하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설날이다. 즉,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감당하는 것,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설 차례도 지내면서 말이다. 미지의 시간이자 불안한 새해를 축하하되, 조상과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소통하는 의식의 시간인 설.그렇기에 전통 사회에서는 이렇게 뜻깊은 날을 단 하루로 마감하지 않았다. 보통은 정월대보름까지 큰 신년 의례 기간으로 보았고, 이 기간에는 일월(日月)에 예를 표하기도 했고, 왕에게 도움을 준 동물들(돼지, 쥐, 말, 까마귀)에 대해 고마움으로 12띠 동물날을 정해 기념하기도 했다. 이 중 까마귀는 띠동물은 아니지만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차려 특별히 고마움을 표했는데, 이 오기일은 다른 말로 슬퍼한다는 뜻의 ‘달도(601B悼)’라고도 불렀다. 이는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전환되는 기간의 정점인 보름까지는, 새로움에 대한 불안함으로 슬프고 걱정되니, 모든 일을 금하고 삼가 조심하며 꺼리는 ‘신(愼·삼가다)’의 기간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해서, 우리 선조들은 설날 호들갑스럽게 떠들거나 자랑 또는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닐뿐더러 스스로에게도 합당하지 않는 일이자 새해맞이 태도가 전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편안함을 나누며 조심스레 불안함을 떨쳐야 하는 중요한 날, 덕담 아닌 독담을 주고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라면?바야흐로 설은 막 지났다. 그러나 아직 보름까지는 며칠 더 남아 있다. 현재 여러 이유로 명절 증후군을 끙끙 앓는 많은 이들, 이 新의 시간을 스스로 삼가고 자숙하는 愼의 시간으로 되새기는 노력을 해 보면 어떨까. 아마 푸른 청룡의 해가 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니.

2024-02-13

이(利)와 의(義)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맘때쯤이면 곳곳에서 송년회니 망년회니 하며 연말 모임으로 분주하다. 얼마 전, 그러한 모임 중 한 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모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로 차기 회장단 선출 건. 원래는 임기 2년씩인데, 몇 년 전, 회칙을 ‘회장단 임기 1년, 단 1회 연임가능’으로 수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관례적으로 늘 2년씩 해 왔고, 향후 혹 회장이 1년 하더라도, 총무는 2년 하기로 이전 총회서 합의까지 했는데, 일 더 하기 싫었던 총무가, 규정을 들먹이며 1년 임기라 우겨댄 것이었다.게다가 말나올까 싶어 회칙도 안 가져온 채, 연임가능 단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말로만 규정이 1년이라며 우겨대다가, 한 술 더 떠서, 2년 한 이전 총무는 규정도 모르고 일 더 했단 식으로 회장, 총무가 손발 짝짜꿍이 되어 얘기를 하니, 새로 와서 모르는 이들은 그런 갑다 했지만, 아는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전 총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툴툴대니 즐거워야 할 모임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돼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일 더 하기 싫다고 굳이 교묘하게 규정 운운하며 열심히 일한 이를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까지야, 참.옛말에,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장자가 쓴 ‘산목편’에 나오는데,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는다는 뜻으로,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된 말이기도 하다. 어느 날 장자가 까치를 따라 밤 숲에 들어가니 까치는 사마귀를, 사마귀는 매미를, 매미는 시원한 그늘을 즐기고 있었는데, 각자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모른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더라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사실, 그렇다. 우리 주변에는 눈앞 이익을 위해 원칙이나 도리를 잊고, 벼룩같이 남의 피를 빨아먹고 교묘한 짓을 자행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몇 푼 이익을 더 챙기려고, 주인에게 상의도 없이 몰래 남의 땅을 침범해 보강토를 높다랗게 쌓아올린 건설업체가 글쎄, 며칠 전 쏟아진 비로 보강토가 와르르 무너져 내려 다시 보수하게 된 사건도 그렇고, 평소 수업자료도 준비 않고 학습 진도도 체크 않는 등 편하게 수업료만 따박따박 받아가던 취미반 악기 레슨 선생이, 수강생이 뭐 좀 있어 보였는지, 이제 두 번 레슨 받아 실력을 늘릴 때라며, 은근 돈 욕심을 내며 교사로서의 기본을 내팽개치던 모습도 그렇고.사실 당장은 눈앞의 이익이 주는 달콤함에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고스란히 내 인생에 부메랑으로, 업보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삶의 이치다. 굳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클로디우스가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위와 왕비를 차지하나, 결국 죽은 왕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익 앞에서 흔들린다. 그렇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 기본적인 義를 버려서야 쓰겠는가. 인간이기에 이익에 흔들릴 수 있지만, 또 인간이기에 이익에 태연하고 의로움을 지켜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올 연말, 흥청망청 술판 대신, 견리(見利)앞에서 망의(忘義)하는 사람인지 최소한의 수의(守義)는 가능한 사람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아마도 다가오는 2024년이 조금은 풍요로울 테니까.

2023-12-27

행복 연습을 습관처럼

최선희 경운대 교수 늦가을 정취를 즐기기 위해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 한 켠에는 올 여름 우리사회를 공포로 몰아놓은 묻지마 무차별 살인사건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살인예고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남아 있을 것이다. 끔찍한 흉기난동과 살인을 저지른 범인들은 오히려 본인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하며 궤변에 가까운 범행 동기를 늘어놓고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기까지 했다.일부 가해자는 타인의 행복한 모습에 분개해 살인을 했다며 사회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스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무서운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으로 사회적 고립 속에 자신을 가두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증오의 싹을 틔웠던 것이다.행복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행복에도 조건이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경제적 기반, 개인과 사회의 조화, 사색을 통한 자기발견을 행복의 요소로 본다. 경제적 기반은 의식주의 해결이 우선일 것이고 개인과 사회의 조화는 나와 타인과의 건강한 관계정립이며 자기발견은 자아실현과 같은 내적 성취와 만족과 감사를 느낄 줄 아는 건강한 의식일 것이다.행복의 조건을 자세히 천착해보면 노력으로 우리 모두 행복감을 가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이 나온다. 특히 사색을 통한 자기발견은 우리 마음에 자리한 중요한 행복요소라 할 수 있다.편안하게 자신의 모습과 마주해 스스로를 깊게 들여다보며 나를 긍정할 때 행복은 가까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가꾸어 나갈 때 찾아오는 것이다. 즉, 행복은 멀리서 갈구하고 쟁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올 3월 OECD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순위는 OECD 정회원국 38개 중에서 35위에 그쳤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며 IT같은 과학기술,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스포츠 대회 성적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는 우리나라가 행복순위 꼴찌에 가깝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국민인가. ‘행복한 국민’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이다행복도 연습하면 습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행복연습! 인위적이라며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오래전 한 유명한 국회의원 딸이 자신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급히 TV를 켜고 개그 프로를 보며 행복해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이렇게 행복은 우리의 작은 일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다움’에 감사하고 호젓한 낙엽 길을 걸으며 가을 햇살을 느껴보자. 그리고 현재의 소소한 즐거움에 집중하며 행복을 연습해보자. 습관처럼 행복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행복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작은 행복이 상대에게 전염되어 큰 행복으로 넘쳐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지나친 낙관일까.

2023-11-14

예? 아니오?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향후 모 기관 평가를 위한 주요 안건 처리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해결되지 않은 케케묵은 안건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회의 테이블에 올라왔다. 위원 중 한 명이 먼저 꽤 괜찮은 의견을 내었다. 그런데 회의를 주관하던 기관장이 그 의견을 들어보니, 말은 맞고 합당한데, 따르자니 본인 소관인 내부 부서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다 그렇잖아도 컨트롤이 잘 되지 않아 속앓이를 앓던 터라,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때, 좋은 방향을 생각하며, 나도 덧붙여 한마디 했더니, 다들 동요할 것 같았는지, 갑자기 기관장이 버럭, 그게 쉽지 않은 문제인데다 다들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같다며 서둘러 안건을 정리하려 하였다. 그 목소리 톤과 권위적인 태도에 다들 쥐 죽은 듯, 눈치만 보다가 ‘예’하고 일제히 숙이는 게 더 가관이었다. 졸속 행정, 이건 아니다 싶어, 한마디 더 하니,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못 박는 게 아닌가. 그러자 다들 아까보다 더 충성스러운 태도로, ‘예’하던 모습이란! 대책이 없는 게 아니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교묘히 싫은 것을 감추며 일을 졸속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속이 빤히 보였건만, 다들 권위에 굴복해 버리니, 참, 마음이 헛헛했다.장탄식(長歎息)을 하고 운전하고 돌아와 지인과 저녁을 먹으며 그날 일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지인의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너도 참…. 세상 순진하기는! 그게 바로 인간이야. 공부한다더니, 인간 공부 안 하고 무슨 공부했냐.”는 핀잔만 잔뜩 듣고서, 허, 참. 깊어가는 가을,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1597년 2월, 한양에서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에 대한 국형장이 한창이었다. 문무백관 200여 명이 모두 그를 죽여야 한다고 일제히 아우성칠 때, 심지어, 이순신을 크게 추천한 유성룡마저도 선뜻 못 나서던 그때, 혼자 ‘아니오’를 외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영의정 이원익. 그 결과, 이순신은 살 수 있었고 풍전등화 속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또 연산군 때, 환관 김처선은, 감히 두려워 아무도 말 못 할 때, 이토록 음탕한 임금은 보지 못했다며 직언(直言)하다 목숨을 잃었다. 화난 임금이, 그를 죽인 후에도, 그 집안을 멸족하고, 그 이름자 중 하나인 ‘처(處)’자 사용을 금지함은 물론, 동명이인들은 개명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니. 게다가 처용무의 이름도 풍두무(豊頭舞)로 바꾸고, 과거 시험에서 처(處)자를 썼다고 합격을 취소한 일까지 있었으니, 실로 ‘아니오’를 외친 댓가가 크긴 했다. 그러나 다들 ‘예’라고 할 때, 환관으로서 ‘아니오’를 외칠 수 있었던 그 마음은 대단하지 않은가.어느덧 11월이다. 모두가 ‘예’라 할 때, 아닌 것을, 아니라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용기’이다. 누군가는 이 용기가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하고, 또 누구는 그런 용기를 부리다 꺾이고 지쳐 너덜너덜해질 테니, 그냥 그대로 사는 게 좋다고도 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느 것이, 과연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길일까? 깊어가는 가을, 나는 예? 아니오? 어디에 속할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2023-11-07

연륜의 힘, 그리고 그 아름다움

최선희 경운대 교수 “늙은이 너무 불쌍해하지 마라. 늙어도 살맛은 여전하단다. 그래주고 싶어 쓴 것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게 강변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사는 것을 맛있어하면서 살기 때문에 저절로 우러난 소리 같아서 대견할 뿐 아니라 고맙기까지 하다. 물론 내가 맛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단맛만은 아니다. 쓰고 불편한 것의 맛을 아는 게 연륜이고, 나는 감추려야 감출 길 없는 내 연륜을 당당하게 긍정하고 싶다.”박완서 작가가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노년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서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어쩌면 노년을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작가의 이런 각오는 모든 노년세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나온 삶은 수많은 희로애락과 함께 켜켜이 쌓아온 경험으로 숙성된 내공을 가졌지만 현실적으로 용인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존재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현재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18.5%로 고령사회이고 2024년 내년이면 노년세대가 10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어 초 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 한다. 이런 속도로 인구 노년화가 진행되면 노인 평균연령이 100세가 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고 그에 따른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이런 인구 고령화 현상은 자칫하면 노인차별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노인차별주의란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우리가 노인을 향해 갖는 부정적인 태도와 행동을 의미한다. 실제 학생들에게 ‘노인’ 하면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라 했더니 “고지식하다, 보수적이다, 잔소리와 불평이 많다, 쇠약하다, 지루하다” 등의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했다. 이런 인식은 세대 간 갈등의 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으로 노년의 긍정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노년세대가 가진 가장 긍정적인 태도와 의식은 무엇인가. 바로 인생의 연륜이 가진 아름다운 내면세계일 것이다. 연륜은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다. 무수한 나이테를 가진 늙은 수양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며 우리에게 시원한 안식처를 제공하듯이 주름진 노년의 여유로운 표정은 우리의 힘든 삶을 보듬어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경험한 인생의 지혜가 우리들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강도는 다르지만 오랜 세월 동안 무르익은 그들의 경험은 저마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지난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었고 이 달 10월은 경로의 달이기도 하다. 매년 이맘때면 100세를 맞은 노인을 위한 청려장(장수지팡이) 전달, 노인복지 증진을 위해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표창, 영정사진 촬영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 고령사회를 앞둔 노년의 시대에 이런 일회성 행사보다 노년의 연륜을 인정하고 그 사회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 정책을 기대해본다.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게 될 노년의 삶, 그대로의 존재가 인정되어 권리와 의무가 부여될 때 그들은 연륜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보물을 풀어놓을 것이다.

2023-10-10

다산처럼 읽고 쓰자

최선희 경운대 교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處暑)가 지나면서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놀랍다.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마다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찾아오며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독서의 계절이다.9월은 독서의 달이다. 1994년 시민들의 독서문화 정착을 위해 제정된 독서의 달을 맞아 올해 2023년 슬로건 공모 이벤트가 열렸다. 총 164편의 슬로건이 접수되어 ‘펼쳐보자 책도, 꿈도’, ‘책으로 눈 맞춤, 미래로 발맞춤’, ‘책은 한 장 한 장, 꿈은 성큼성큼’ 등 20건의 슬로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이 중 눈에 띄는 구절은 ‘책은 한 장 한 장’이다. 다산 정약용의 독서법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이다.다산의 독서방법은 세밀하게 읽으며 깊이 생각하는 정독(精讀)이다. 그는 자신의 지인과 자녀에게 정독의 방법으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설명했다. 독서 전 단계인 입지(立志), 실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며 뜻과 의미를 찾는 해독(解讀), 읽은 내용을 능동적으로 고찰하고 자신의 뜻과 비교하여 취사선택하는 판단(判斷),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이나 교훈을 받은 부분을 기록하는 초서(抄書),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견해로 지식을 확장하고 창조하는 의식(意識)의 단계가 그것이다.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강조한 다섯 단계의 초서독서법을 몸소 실천하면서 18여 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유배라는 처절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의 과골삼천(8E1D骨三穿)을 겪으며 수 만권의 책을 정리하며 편집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18세기 조선의 한 지식인이 자신만의 독서법으로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을 정도로 세상의 정보를 필요에 따라, 요구에 맞게 정리해낸 것이다. 그의 고뇌어린 왕성한 지적 의욕과 실천하는 자세가 너무나 경이롭고 존경스럽다.다산의 초서지법(抄書之法)은 눈으로 빨리 읽는 일반 독서에 비해 엄청난 시간과 함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때문에 무엇이든 바삐 진행되는 요즘시대에 맞지 않는 독서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독서, 즉 책 읽기의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생각하기’가 아닌가. 남들보다 다른 생각, 어제보다 더 나은 생각으로 경험과 지혜를 쌓을 때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몸의 근육이 단련되듯이 독서를 하면 생각의 근육이 단단해져 사고력이 강화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곧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 다가온다.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것이다. 이 가을에, 천고(天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과 같이 천천히 읽고 써보자.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은 빨리 바뀌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도 그에 맞춰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2023-09-13

다름의 인정

최선희 경운대 교수 “매사 내 의견에 반응이 없는 남편 때문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법륜 스님 강의를 한 번 들어보세요.”목욕탕 찜질방에서 어떤 기혼 여성 두 분이 나눈 대화이다. 법륜 스님이 어떤 강의를 하는지 궁금해져서 유튜브 방송에서 스님의 강의를 들어보았다. 강의는 대부분 어렵고 힘든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었는데, 스님이 설파한 주요 해결방안은 “다 달라서 그래요.”였다. 그렇다. 우리는 참 많이도 상대방의 다름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그 갈등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상대방의 외모나 성격, 특성이 같지 않음은 당연한 사실인데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나의 기준과 판단으로 평가하면서 타인의 성향이나 의견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학생들에게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점을 물어보면, ‘다르다’의 반대말은 ‘같다’이고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라는 예를 들면서 두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다르다’와 ‘틀리다’의 의미는 분명한데, 우리는 특히 ‘다르다’로 표현해야 하는 경우에 ‘틀리다’를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이 문제가 단순히 습관에 불과한 것일까.혹자는 사회가 각박해져 서로 경쟁하게 되면서 자신의 의사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된소리와 거센소리의 어감을 사용한다고 진단한다. ‘다르다’를 사용해야 할 곳에 ‘ㅌ’의 거센소리가 들어간 ‘틀리다’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단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저 사람들은 우리와 피부색이 좀 틀려.”라는 표현을 자주하곤 한다. 이것은 다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둘째 아이가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큰 아이하고 너무 틀려서 속상해요.”라는 부모의 하소연은 ‘다름’에 대한 수용과 인정의 부족이다. 우리 모두 다르게 태어났는데 왜 ‘틀리다’고 생각 하는가.지금은 작고한 한 야구감독이 우수한 선수의 단 하나의 단점을 고쳐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일어난 실수를 방송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무수한 훈련과 채찍질로 자신이 지도했던 훌륭한 야구 선수의 단점을 고쳐주었더니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장점이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한 것이다. 교각살우는 소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흠이나 결점을 고치려다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마다 특성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다르기 때문에 조화로울 수 있고 각양각색의 빛깔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 덤으로 ‘다르기’ 때문에 협력하여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뿐인가. ‘다름의 인정’은 타인을 이해하게 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출발점이다. 지금 바로 표현해보자. 아내와 남편에게 “당신은 ~점에서 나와 다르게 특별해요.” 친구나 자녀에게 “~생각을, ~것을 다하다니 넌 정말 나와 달라. 그리고 특별해.”

2023-08-22

소유와 존재, 그 엄청난 간극

최선희 경운대 교수 최근 들어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건이 자주 들려온다. 헤어진 여자 친구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찾아가서 무차별 폭행하고, 신고를 하면 보복살인까지 하는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한 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한 연인에게 이런 무자비한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프로파일러는 데이트 폭력의 주요인을 소유와 집착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진단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구속하고 가두려는 소유적 집착이 문제라는 것이다.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가. 50여 년 전 사회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이 제기한 인간의 두 가지 생존양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화두를 던지며, 인간 유형을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소유적 인간’과 존재하는 것에 자신을 맡기고 능동적인 일을 추구하며 삶에 희열을 느끼는 ‘존재적 인간’으로 구별했다. 그는 이런 소유와 존재의 차이점을 학습, 권력, 사랑 등의 구체적 사례로 설명한다.프롬이 주장하는 소유적 학습은 배운 내용을 모조리 필기하고 암기하여 시험에만 대비하는 행위이고, 존재적 학습은 배울 내용을 미리 연구하여 교수자의 설명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이다. 소유하려는 권력은 자신의 권위에 굴하는 사람을 착취하고 존재하려는 권력은 인간의 인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고 한다. 그리고 소유적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취하려하고 존재적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고 설명한다.‘나는 소유적 삶을 살고 있는가, 존재적 삶을 살고 있는가?’ 학생들에게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게 했다. “수능이 끝난 후 약국 아르바이트로 20살치고 꽤 많은 돈을 갖게 되었다. 나는 소위 말하는 명품 신발과 가방을 소유하게 되었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학업을 소홀히 한 채 약국 일에만 전념하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갖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고 고백한 한 학생은 소유욕에 의한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어서 자신의 소유양식의 삶을 성찰하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보겠는 다짐도 했다. 어떤 학생은 과제를 하기 위해 구입한 ‘소유냐 존재냐’ 책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자신의 태도를 소유적 삶이라고 규정하며,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사진 찍기에 집중하는 또래 친구들의 소유적 삶을 질타하기도 했다.1970년대에 에리히 프롬이 제기한 소유적 삶의 문제들이 아직까지 사회 도처에 자리한 채 우리의 존재적 삶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소유적 사랑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사랑은 상대를 내 것으로 가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상대를 마주하고 그 존재적 가치를 아끼려는 마음이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소유적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칼린 지브란의 시 한 구절을 새겨볼 일이다.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말라.”소유는 아이 같은 욕심이고 존재는 성숙한 어른의 마음이다. ‘소유와 존재’, 그 엄청난 간극을 기억하자!

2023-08-08

‘~답게’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지인의 어린 딸아이가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애국’을 주제로 글쓰기 과제를 학교에서 받아 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해마다 쓰는 내용이 식상하기도 하고 도무지 쓸 거리도 없는데 매년 학교에서 그런 과제를 형식적으로 내니 애국은커녕 반감이 생겨 오히려 매국하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 웃픈 이야기를 듣고서,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사실 6월은 현충일을 비롯해 한국 전쟁, 제2연평해전 등이 모두 일어난 달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곳곳에서 온갖 행사가 행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지극히도 무심히 6월을 보내는 일상 풍경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이는 호국보훈의 달이라 하여 각종 행사에 형식적으로 물적, 인적 투자를 해 온 그간의 관례 탓도 있고, 또, 일반 범부(凡夫)로서는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쳐 충성하고 희생한 이들의 삶이 너무도 고결하여 감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적 거리감 때문이기도 하다.그러나 국가를 위해 무언가 큰 희생을 하는 것이 꼭 호국보훈이요, 충(忠)은 아니다. 충(忠)은, 중(中)과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중심이 바로 잡힌 마음 상태, 지극하고 진심을 다하는 마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국민의 국가를 향한 일방적인 희생, 의무를 강요하는 복종 개념이 아니라 어딘가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바로 잡고 선 상태, 하려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충(忠)을 ‘진기(盡己)’라고 표현하였다.진기(盡己)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다른 말로, ‘~답게’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모두 각자 처한 위치에서 이러한 ‘~답게’를 진정으로 잘 실천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君君臣臣 父父子子).‘~답게’가 잘 실천되는 사회, 곧 충(忠)이 제대로 실현된 사회일수록 ‘나’를 넘어 ‘너’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가 될 수 있는 법이다.나폴레옹 점령 당시 총칼 대신 독일의 민족정신을 살리고자 독일어 사전 편찬 작업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담을 수집해 책으로 엮어내 세계 문학사의 한 획을 그어 놓은 그림 형제나 풍전등화 같은 국가적 위기 속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고 왜적과 고군분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이순신 장군, 독립투쟁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대전 교도소를 나오며 이제 뭘 하겠느냐는 일본 경찰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한 도산 안창호 등은 모두 학자, 장수, 독립투사로서 주어진 자리에서 ‘~답게’를 실천하다 간 인물들이었다.이처럼 충(忠)은, 호국(護國)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답게’를 진실된 마음으로 올바르게 실천하다 보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라에 미치게 되어 마침내 충(忠)을 실현하고 애국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 6월은, 다들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정 ‘~답게’ 살며 나만의 애국을 실천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싶다.

2023-06-13

묘(卯) 이야기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여기서 ‘계’는 10개의 천간 중 마지막으로 검은색에 해당하며, ‘묘’는 12개의 지지 중 네 번째 ‘토끼’를 뜻하기에 이 둘을 합쳐 올해를 검은 토끼해라고 한다.토끼는 작고 귀여운 생김새에 놀란 듯한 표정 때문에 약하고 선한 동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하지만 동시에 밤하늘 달 속에서 방아 찧는 신비스러운 존재, 새끼를 여럿 낳는 다산과 풍요, 자라의 꾐에서 빠져나오는 지혜의 상징 등 다양한 함의를 지녀왔다.이 중 지혜의 상징으로서의 토끼는 문헌 상 삼국유사 열전 ‘김유신’조에, 고구려에 청병하러 간 김춘수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보장왕의 총신 선문해에게 청포 300포(布)를 뇌물로 바치자 선도해가 취중에 들려주었다는 ‘귀토지설(龜兎之說)’ 이야기가 꽤 유명하다.이 외에도 사기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교토삼굴(狡FA32三窟) 고사도 빼놓을 수 없다. 영리한 토끼는 앞일을 대비해 미리 세 개의 굴을 판다는 뜻으로, 이는 맹상군의 식객, 풍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우선 맹상군을 위해 그의 돈을 빌린 설 땅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어 맹상군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을 곁에 두게 했고, 둘째로 이웃 나라에 맹상군을 적극 추천한 뒤 다시 본국 제왕에게도 이를 알려 경쟁심을 부추겨 이전보다 더 후하게 맹상군을 기용토록 했으며 마지막으로 설 땅에 맹상군 선대의 종묘를 세워 민왕도 함부로 못 대하게 함으로써 맹상군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이처럼 영리한 토끼는 난세에 현명한 지략을 펼치는 법이다.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끼가 이러한 지혜로움 때문만으로 숭앙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혜는 급변하는 사회 속 혼자 살겠다고 교묘한 계책을 쓰며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들을 두고 우린 지능적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지혜롭다’고 하진 않는다. 지혜로운 현자(賢者)는, 바로 앞을 보는 혜안과 더불어 때에 따라선 자기 한 몸 희생할 줄 아는 그런 정신이 배어 있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정도(正道)를 걸어가면서 자기희생적 모습도 보여주기에, 뭇사람들의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토끼는 그런 점에서 희생정신의 대명사이기도 하다.‘금석물어집’에는 노인으로 변한 제석천이 원숭이, 여우, 토끼에게 먹을 것을 청했는데, 토끼만 아무것도 못 구해 오자 스스로 불 속에 몸을 던져 ‘나를 잡수시오’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제석천이 토끼를 어여삐 여겨 달 속에 소생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토끼의 희생정신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바야흐로 새해 벽두다. 이때쯤이면,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뒤로 하고, 누구랄 것 없이 다들 새해 소망 빌기로 한창이다.올 한해는, 허울뿐인 계획들, 소망들이 아닌, 계묘년 토끼의 지혜와 희생정신을 새긴 알찬 한 해 계획을 한번 세워보면 어떨까 싶다.

2023-01-02

다섯 손가락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모친 칠순 잔치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준비에 한창이던 후배 하나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딸은 그냥 딸인가 보다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한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어려서부터 아들 아들 하던 모친이, 이번 칠순 잔치에도 아들이 돈을 더 많이 쓸까 노심초사하고 오히려 딸에게는 은근히 더 했으면 하는 뉘앙스에 그만 맘이 상해 버렸다는 것이다.옛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식들을 모두 골고루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속담이다. 그런데 한편, 더 아픈 손가락도 있고 덜 아픈 손가락도 있다며, 부모의 자식 사랑이 모두에게 똑같진 않다고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옛날 같으면야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으면 소박맞기도 했고 또 아들은 출가외인인 딸과는 달리 제를 지내주기도 하고, 남편 사후 의지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요즘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데도, 아들 아들 하면 딸들로서는 속상할 법도 하다.그런데 사실 부모에게는 어떤 손가락이든 중요하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더 아프고 덜 아픈 손가락이라기보다는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손가락일 가능성이 크다.‘나 혹은 네가 최고’라고 하거나 반대로 아래로 내려 형편없음을 야유할 때 사용하는 엄지, 방아쇠 당기는 흉내 낼 때 혹은 남을 향해 삿대질 할 때 필요한 검지, 가장 길고 아름답게 뻗어서 손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중지, 약혼 반지를 끼울 때 꼭 필요한 약지, 그리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맹세할 때 사용되는 소지처럼 말이다.즉 상황에 따라 이 손가락 저 손가락이 생각나는 것이지, 모든 손가락이 부모에겐 다 소중한 것이다. 모든 손가락이 소중하다면, 이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문제이다.손가락이 부모에게 자식과도 같듯이, 임금에게는 신하 및 백성과도 같고, 스승에게는 제자와도 같다. 무릇 부모된 자, 임금된 자, 스승된 자들은 모든 손가락을 골고루 살피고, 그중 아픔이 있는 손가락을 특별히 더 돌보되 다른 손가락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보듬어 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소외된 손가락이 없도록, 옛 임금들은 궁궐을 빠져나와 잠행(潛行)을 하며 시정을 살폈고, 딸이라고 차별않고 아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게 한 부친 덕에 난설헌은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 될 수 있었으며, 10세에 겨우 글을 깨칠만큼 우둔한 아들이었건만 꾸준히 지지해 준 부친 덕에, 김득신은 조선조 유명 시인이자 독서광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바야흐로 설 연휴가 코앞이다. 항상 명절 때 단골로 나오는 뉴스 중 하나는 집안끼리의 불화, 싸움, 형네, 아우네 시시콜콜 재산 문제로 언성을 높이다가 즐거워야 할 명절이 아수라장이 되는 기삿거리다. 부디 이번 명절에는 다들 손가락들과 손가락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조화를 이루어,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거나 등이 가려워 긁을 때, 악수를 할 때나 손뼉을 칠 때처럼 하나된 마음의 ‘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22-01-24

메타버스, 가상의 세계로의 초대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요즘 IT분야 최대 화두 하나를 꼽으라면 ‘메타버스(Metaverse)’가 아닐까. 메타버스는 초월이라는 뜻의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현실과 같은 실감 기술의 도움으로 가상의 정보와 실재하는 공간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융합된 세계를 뜻한다. 메타버스는 1992년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이 쓴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라는 SF 소설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소설의 배경이 된 메타버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가상 세계 속 내 모습인 ‘아바타’이다. 메타버스에서는 현실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모습으로 활동한다. 주인공 히로는 현실에서는 피자를 배달하는 전직 프로그래머인데, 메타버스 속에서는 세계 제일의 검객이다. 두 번째 특징은 도시 공간의 개발 방식이다. 스노우 크래쉬 속 메타버스는 원래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검은 행성이다. 그곳에는 행성의 둘레 전체를 잇는 폭 100m, 길이 65,536(=216)㎞의 직선도로인 ‘더 스트리트’가 있으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진다. 메타버스에서 부동산 개발을 하려면, 독점적 권한을 가진 ‘규약 단체 협의회(Global Multimedia Protocol Group)’의 승인하에, 공터를 사들이고 지역 개발 승인과 각종 허가 사항을 득해야 한다. 기업들은 더 스트리트에 가상의 건물을 짓고 영업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하며, 그 돈은 신탁 기금으로 들어가 더 스트리트를 유지·확장하는 비용으로 사용된다.최근 메타버스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역할이 컸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인간의 기본 욕구인 사회적 관계와 대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현실 세계를 능가하는 사회, 문화, 경제적 활동이 가능한 메타버스 세상 속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대학의 입학식, 기업의 신입사원 교육, 인기 아티스트의 공연, 정치인의 선거유세, 지역 축제, 기업의 신제품 런칭 등 주로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던 활동들이 메타버스 공간으로 대거 이동하는 모습은, 더 늦기 전에 메타버스에 올라타라는 독촉의 소리에 힘을 보탠다.30년전, 가상공간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의 소설이지만, 스노우 크래쉬 속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메타버스는 그 후 수많은 SF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서도 닐 스티븐슨의 표현과 유사한 디스토피아적 메타버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선지적 능력을 지닌 천재들이 한 마음으로 메타버스를 디스토피아로 표현한 것은 어쩌면, 개인이나 기업은 물론, 정부와 지자체까지 합류한 지금의 메타버스 열풍 현상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아니었을까? 목적지도 모르는 메타버스 열차에 무조건 올라타기보다는, 그 실체와 본질에 집중하여 인간에게 이로운 메타버스가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2021-11-09

‘특별함’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2년 반을 사귀다 마침내 늦깎이 결혼을 한다며 준비가 한창이던 지인 하나가 갑자기 무슨 수가 틀렸는지 안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알고 본즉, 결혼할 사람이라고 또 사랑하니까 많이 퍼주고 하다가 결국 덩그러니 밑둥치 하나만 남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신세가 돼버린 것이었다. 소설 속 나무는, 그래도 노년이 돼 돌아온 소년과 짧은 시간이라도 보냈지만, 현실 속 나무들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과 마주해야 하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그런데 왜 사람들은 잘해 주는 상대를 그리 헌신짝 대하듯 할까?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상대의 ‘베풂’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거나 예전만큼 베풀지 않으면 도리어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고 심지어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애초부터 인성이 시쳇말로 ‘글러 먹어서’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평범한 이들조차 사실 그런 경우도 많은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존중/존경은, 타자와는 다른 그 사람만의 특별한 가치를 발견할 때 자연스레 생겨나는 법이다.옛말에, ‘夫婦有別’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別’은, 조선조 대학자인 한원진과 정약용이 “각자 제 남편/아내를 두고서 난잡하지 않은 것”이라 해석한 데서 보듯, 성 윤리에 대한 단서다. 즉, 남자 또는 여자로서의 성 역할에 대한 ‘구별’보다는, 상대방을 ‘각별/특별’히 인식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선조들은 내 짝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타인에 대한 마음과 같을 수 없다고 보아, 다른 아낙/남정네들과의 情事를 극도로 꺼렸으며, 설사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윤리에 어긋난다고 보아 크게 지탄하기도 했던 것이다.그런데 상대에 대한 이 ‘특별함’은, 발견하는 사람의 안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갖추기 위한 사람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 조선조 학자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이, 서너 달 다른 부임지에서 기생을 멀리함을 자랑한 남편의 편지에, ‘이를 두고 고결하다며 덕을 베푼 생색을 낸다면 당신도 분명 담담하여 사심없는 사람은 아닐 터. 마음이 깨끗해 밖으로 유혹을 끊고 안으로 삿된 생각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치사를 한 뒤에야 남들이 알아주겠습니까?’라며 일침을 가한 일화는 유명하다. 당신이 나를 아내로서 ‘특별히’ 여긴다면, 기생을 안 만남이 당연한데, 뭐 그리 자랑삼느냐는 명확한 태도에서 여성으로서의 기품과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처럼 ‘특별함’은 바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바운더리를 명확히 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데서 빛나는 법이다. 오래 전 사석에서, 모 사업가가 애인 없어 속상하다는 푸념을 하자, 다들 ‘요즘 시대에 애인 없으면 바보’라며 놀린 일이 있었다.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배우자에 대한 특별함을 망각한 시대의 한 단면이라 웃프지 않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10월, 몸도 마음도 풍성한 이 멋진 계절 가을엔, 그동안 소홀히 해 왔던 내 짝에 대한 ‘특별함’을 한번 발견해 보면 어떨까? 또 나만의 ‘특별함’을 가꾸는 노력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인간관계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2021-10-20

1인가구, 그리고 가족의 재구성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 ‘건강가정기본법’ 제15조에 5년마다 건강가정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동안 제1차 (2006∼2010)와 제2차(2011∼2015), 그리고 제3차(2016∼2020) 가족정책 성과를 기반으로 한 가족 환경변화에 따라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을 수립했다.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은 기존 ‘공동체로서의 가족 지원’에서 ‘가족과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정책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 특징이다.구체적으로 첫째, 가족의 다양성을 반영했다. 모든 가족이 차별 없이 존중받고 정책에서 배제되지 않는 여건 조성에 초점을 두었다. 가족 유형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며, 비혼 및 1인가구 증가에 따라 좀 더 유연한 돌봄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둘째, 모든 가족의 안정적 생활여건보장이다.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이나 사각지대 없이 가족에 대한 지속이 확대될 수 있도록 한다.셋째,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존중한다. ‘공동체로서의 가족 지원’에서 ‘가족과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권리를 반영한다. 이러한 정책 방향의 일환으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서 1인 가구를 가족의 한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1인가구가 30.0% 이상을 차지하고 그 비율이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1인가구 정책지원이 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무엇을 고민해야 할 것인가? 그 간 세대별 1인가구에서 제안한 정책 이슈로 20~30대는 주거지원 및 주택정책, 지역사회 안전, 결혼 진입 장벽 해소와 결혼문화 개선이었다. 40~50대는 준고령자 취업훈련 및 직업알선 연계 활성화, 지역사회 다양한 자녀돌봄 인프라의 구축 및 정보제공, 긴급 위기지원서비스 확대 및 지역사회안전망 구축, 가부장적 성 역할 및 가족문화의 전환 캠페인 확산, 다양한 가족의 삶을 수용하는 성숙한 사회문화 조성이었다. 70대 이상 노년세대는 부양의무자 기준에 대한 재검토를 통한 빈곤문제 해결, 고령 1인가구의 가족유대감 유지 강화 및 사회적 통합 제고 노력 등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1인가구 주요정책은 크게 주거지원과 (특히 여성 거주자를 위한) 생활안전을 중심으로 정책이 추진되었다. 1인가구 삶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큰 문제로 생활안전이 대두됨에 따라 여러 지방자치단체는 생활안전 관련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지금까지 1인가구를 대상으로 한 주거지원이 대부분 주택구입 등을 위한 자금지원 및 주택공급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입주민을 위한 적절한 주거환경의 유지·관리 및 이에 대한 정기적 점검 등을 다루는 주택정책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여성 안심택배서비스 등도 무인 택배함의 설치·공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택배함의 유지·관리 및 택배함 이용 등과 관련된 개선점·한계점에 관한 논의는 거의 전무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가족이 과거와 달리 질적으로 변화했지만 사회적 지원체계는 가족 기능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젠 제도적인 대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021-09-06

‘하란사’를 만나다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지난주에 수많은 화제를 낳은 ‘덕혜옹주’의 작가 권비영의 최신작 ‘하란사’(특별한서재출판)를 읽었다. ‘하란사’를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권비영 작가의 신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덕혜옹주’를 읽고 권비영 작가의 팬이 됐다.지금은 권비영 작가가 회장을 역임했던 울산소설가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소설 21세기’를 1년에 4번 받아볼 정도니 정말로 ‘찐팬’이 된 셈이다. ‘하란사’를 입수해서 하룻밤 사이에 다 읽어버렸다. 도저히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말 그대로 끝 장까지 본 것이다. 하란사에 대한 수식어는 의외로 많다. ‘이화학당 최초 기혼자 입학생(1896)’, ‘최초 미국 자비유학생(1900)’, ‘조선 여성 최초 미국 학사학위 취득(1906)’, ‘이화학당 최초 한국인 대학교수(1911)’, ‘정동제일교회에 한국 최초 파이프오르간 기증 설치’(1918), 그리고 ‘여성 운동가’이자 ‘조선 독립운동가’이다. 이러한 하란사의 화려한 이력과 함께 작품 속에는 당시 시대가 그러하듯이 파란만장한 그녀의 일생이 전개된다.하란사는 1872년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생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가정사가 없다. ‘하란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해 세례를 받고 얻은 영어 이름 ‘낸시(Nancy)’의 한자 음역으로 ‘란사(蘭史)’라 하고,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이다. 어린 나이에 상처한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신식교육도 받게 되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오게 되지만, 평범한 결혼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미국 유학 중에 그녀는 의친왕 이강(1877~1955)을 만나게 되고, 이후 이강의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의친왕 이강은 덕혜옹주(1912~1989)와는 이복 남매지간이다. ‘하란사’에는 덕혜옹주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이강을 놓고 볼 때 덕혜옹주와의 접점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란사는 고종황제의 영어 통역과 국제정세를 알리기 위해 궁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란사가 궁에서 어린 덕혜옹주와 멀리서나마 마주쳤을 가능성을 있어 보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란사 이야기 끝에서 덕혜옹주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덕혜옹주’와 ‘하란사’를 읽다 보면 권비영 작가는 그 시대를 살다온 사람처럼 당시의 생활상을 현실감 넘치게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작품 내용 중, 1919년 의친왕 이강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외우는 하란사의 모습이 가장 절정에 이른 장면이라 하겠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강과 함께 허름한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국내를 빠져나가 상하이로 가는 도중 이강은 잡혀 국내로 송환되었고, 하란사는 그곳에서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호시탐탐 그녀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계략에 결국 독립이라는 큰 뜻을 살아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하란사.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올 여름에는 권비영 작가의 최신작 ‘하란사’를 읽으면서 더위와 코로나를 한 방에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2021-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