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비움과 채움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오래전, 모 대학의 교수가 사석에서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박 교수는 차를 좀 큰 것으로 바꿔요. 교수답게”난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났다. 운전도 그렇거니와 주차도 서툴러 내게 맞는 편한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인데, ‘교수니까 이 정도 되는 차는 몰고 다녀야 한다’는 그 생각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더 웃긴 것은 전세 대출 갚는다고 푸념하면서도 명품 시계를 차고 명품 가구를 물색하던 그 교수의 태도였다.세상에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늘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분수에 넘는 사치를 하고, 그리고 뒤에서 카드값 막느라 대출금 갚느라 전전긍긍하면서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괜히 있는 척하는 이들. 남들한테 있어 보여야 무시당하지 않고 사람대접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사고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가시적인 것들이 명품이면 뭐하랴. 명품 찾는 사람이 짝퉁이면 다 부질없는 것을.명심보감 ‘安分篇’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즐거우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돈이 많고 귀해도 근심한다(知足者貧賤亦樂 不知足者富貴亦憂).’라고.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삶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안분지족하는 삶을 평생 화두로 삼기도 했었다. 토정 이지함이, 삼베옷에다 짚신 신고 헤진 갓을 쓰고 포천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아전들이 산해진미를 갖춰 올린 상을 두 번이나 물리며 “우리가 못사는 이유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기 때문이니, 부유해지기까지는 그런 음식을 먹지 않으면 좋겠습니다.”하고는 보리밥과 시래기국으로 식사를 마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간소한 삶, 아름다운 나이듦’의 저자 소노 아야코도 ‘간소함의 철학’에 대해 설파한 바 있다. 즉 나이가 들수록 허세, 과욕, 집착 등 비대해진 욕망을 과감히 버리고 분수에 맞는 삶, 절제와 침묵의 삶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버리는 것이 결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수를 모르고 욕심 많은 사람은 버리면 버릴수록 ‘상실감’을 크게 느끼지만, 분수를 아는 사람은 비우는 과정에서 ‘채움’의 공간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공간은, ‘보이지 않는 것들’, 무한한 진리로 채울 수 있고 그럼으로써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는 지혜마저 깨치고 있다. 그렇기에 분수를 아는 사람은 ‘비움’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고전 명작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도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비밀’이라며 속삭이지 않았던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라고. 이처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은 화려하게 치장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채우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있던 것들을 버리는 가운데 생기는 빈 공간을 비가시적인 진리로 채워나가는 데서 생기는 법이다.

2021-07-29

소소한 행복을 위해…

박은미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레이첼 켈리는 ‘내 마음의 균형을 찾아가는 연습’에서 정원을 가꾸거나 남을 도울 때처럼 우리가 한 행동이나 생각의 간접적인 결과물에서 행복이 얻어진다고 하였다.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은 삶에서 큰 힘이 될 것이고, 차곡차곡 쌓여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의 반동 없이도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소소한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되듯이 누구나 일과 생활의 균형을 중시하고 있다.최근 직장에서의 일뿐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일·삶 균형, 개인 및 가족 여가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일자리 선택에 있어 워라밸(일·생활 균형)을 최우선적 조건으로 추구하고 있다.밀레니얼 세대 직장인을 대상으로 직장의 조건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워라밸 보장(49.9%)이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으로 금전적 만족(48.9%), 복지(30.6%) 순으로 나타났다(2020. 8, 잡코리아). 때문에 일·생활균형제도 활용이 늘고 있으며, 제도 역시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하지만 대상별 제한적 활용성으로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고, 중소기업 내 분위기와 인사상 불이익으로 남성 육아휴직 사용에도 어려움이 있다. 개인을 노동력·생산력의 관점에 기반한 전략에서 개인의 삶의 질 제고 전략으로 전환하여 생애주기별 일과 삶의 균형 실현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첫째, 보편적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사각지대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육아휴직 권리를 임금근로자에 한정하지 않고 고용보험 가입, 예술인, 플랫폼노동종사자, 프리랜서, 자영업자 등으로 확대, 부모 모두의 육아휴직 확산 및 육아휴직 사용 문화 정착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그리고 중소기업 지원을 확대해 육아휴직에 따른 기업의 업무공백 및 비용부담을 완화해서 눈치 보지 않는 실질적 사용 여건 조성해야 할 것이다. 둘째, 남성의 돌봄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확산할 필요가 있다.남성 돌봄이 주변적 존재가 아닌 중심 주체가 되어 남성의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유연근무 등 돌봄 참여를 편견 없이 남녀 모두 함께 돌보는 문화 조성이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가사와 육아 참여 독려를 위한 가족사랑 실천 캠페인을 회사, 가정, 지역에 전개하고, 아빠 놀이학교와 아빠 요리교실 등 맞돌봄 및 맞살림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남성을 위한 실질적 교육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일터 문화를 혁신하는 방안으로 기존 업무방식을 재설계하여 디지털 기반으로 소통 및 협업하는 업무 환경 여건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코로나19에 대응한 디지털화를 가속화 하고, 업종 및 직무 특성, 사업장 맞춤형 유연근무제 적용할 수 있는 중장기적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일·생활 균형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 확산은 사회적 협력이 중요하다. 일·생활 균형이 사회 전반적인 가치로 자리 잡도록 관련 기관 간 협력 네트워크 강화가 필수적이며, 이를 기반으로 한 가족친화 인증기업 확대 및 활용도 높은 인센티브 지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2021-05-30

나만의 양심냉장고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독자들께서도 1996년에 시작된 TV프로그램 ‘이경규가 간다’의 ‘양심 냉장고’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냉장고를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실망스럽게도 양심 냉장고의 주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갓 운전면허를 딴 초보운전자 입장이라 그랬을까? 운전면허 시험에나 나올 법한 기초적인 교통법규 지키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 양심의 민낯에 놀랐던 기억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작년 연말쯤의 일이다. 자동차보험을 갱신하려다, 내가 평소 즐겨 쓰는 내비게이션 서비스의 운전 습관 점수를 반영해 일정 점수 이상이면 보험료 할인이 제공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비스가 처음 시작되었던 무렵 신기해하며 살펴본 이후, 몇 년 만에 확인해본 내 운전 습관 점수는 76점. 겨우 턱걸이로 보험료 할인을 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대보다 훨씬 낮은 점수로 인한 실망의 여파는 컸다. 항상 경제속도를 유지하며, 난폭운전이나 교통법규 위반을 절대 하지 않고, 안전 운전 습관이 몸에 밴, 25년 무사고 운전 경력의 자타공인 베스트 드라이버라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해 온 터였으니까….공학자답게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스스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운전 습관 점수는 과속, 급감속, 급가속의 세 가지 항목으로 매겨지는데, 급감속과 급가속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나, 과속에서 점수가 많이 깎인 것을 알았다. 고속도로 운행이 잦다 보니 흐름을 타며 달린다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과속이 습관이 되었던 모양이다.그날 이후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운전 습관 점수 100점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혼자만의 ‘양심 냉장고’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00점이 되는 날 나 자신에게 선물할 상품도 미리 결정해 두었다. 그런데, 한번 떨어진 점수를 회복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감시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도 규정 속도를 지키는 양심과 끈기가 필요했고, 그런 나를 비웃듯이 쌩하고 추월해 달리는 다른 차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의 강한 멘탈도 필요했다.몇 달의 노력 끝에 내 운전 습관 점수는 97점까지 올랐다. 스마트폰 화면 속 작은 숫자가 가져온 변화는 고속도로에 배치된 고가의 감시 카메라들이나 각종 범칙금의 위협보다 강력했다. 매 주행 후 올라간 운전 습관 점수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규정 속도를 더 유심히 살피며 달리게 했고, 점수의 시원한 상승 그래프를 보고 싶은 욕심이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에서도 과속의 유혹을 이겨내게 했다. 단지 숫자 몇 개로 25년차 운전자를 초심으로 돌아가게 한 그 서비스는 ‘스마트 기술이 우리 생활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례’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이 글을 쓰면서, 몇 달 전 스스로 정해 놓았던 ‘양심 냉장고’ 상품이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새로운 선물을 하나 생각해야 했다. 그걸 잊어버린 것을 보면, 처음부터 선물 그 자체가 그리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지, 싶다.

2021-04-13

지역사회 디지털 성범죄, 대응체계 강화 시급

박은미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상화와 비대면 활동의 증가는 랜섬웨어의 확산, 개인정보 유출 등 사이버 보안 위협 증가, 인터넷·스마트폰 중독 위험군의 증가 추세를 지속하게 하고 있다.또한, 다크웹 및 AI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성범죄정보가 지속적으로 유포되어 아동청소년성착취정보·불법촬영물·딥페이크 등 개인의 사생활과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다.여성가족부에 의하면 디지털 성범죄는 2010년 1천153건, 2019년 5천893건으로 5배 증가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휴대폰, 카메라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성범죄로서 불법촬영물의 제작, 유포, 소비, 참여를 내용으로 하는 범죄이다. 불법촬영물의 제작, 유포, 소비, 성폭행, 협박 등 오프라인에서의 범죄도 포함, 유포된 불법영상물의 완전 삭제의 어려움 등으로 피해자의 고통이 매우 크며, 불법촬영물 유포를 수익모델로 사업을 하는 인터넷 사업자들이 증가한 점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딥페이크(Deepfake) 포르노와 같은 불법 영상합성물 제작 및 유포 또한 디지털 성범죄 특유의 전형적인 피해양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신속한 피해예방조치는 물론 피해 여성들에 대한 적절한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이를 위한 선진 정책 사례로 미국은 유포와 관련된 법안으로 2004년 뉴저지에서 처음 입법되었고, 2020년 현재 40개의 주 및 워싱턴 D.C.에서 관련한 법규를 두고 있다. 호주 사우스 오스트일리아주(SA)는 2013년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의해 성폭력 범죄로 형사 처벌하는 법률 발의하였다. 2018년은 ‘온라인안전강화법 2018’으로 개정하여 내용을 더욱 강화했으며, 피해자가 장기간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신속하게 자료를 삭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독일은 2004년에 이뤄진 개정 전 사생활 영역을 일반적인 사생활 영역과 노출된 신체나 성행위와 관련된 은밀한 사적인 생활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2004년 개정 이후 고도의 사적인 생활 영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추가하여 범죄에 의한 피해 범위와 의미를 더욱 확장하고, 2015년 다시 조항을 개정하여 촬영 행위 자체가 침해 여부와 관계 없이 유포한 경우는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해외 사례에서 제시하였듯이 국가차원에서 디지털 정보의 활용 및 접근과 관련된 종합적인 교육에 관한 법률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디지털 정보 교육 정책 추진에 관한 적극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과 연계하여 피해영상물 재유포 확산을 신속히 차단하기 위해 영상물 데이터 유형과 특성, AI 알고리즘 등 기술적 구현이 필요하다.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을 통해 피해영상물을 신속히 찾아내어 삭제하고, 지속적인 사후관리가 필요하다.아울러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관련 기술적 지식 피해자의 보유 및 심리를 공감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확보되어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영상물을 누가 주체가 되어 보관 및 관리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 뿐만 아니라 예방의 관점에서 법과 정책적 대응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2021-04-06

어떻게 살 것인가?

서수백대구가톨릭대 교수어느 날 뉴스를 보는 중에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갖지 못한다면 차라리 ‘영끌’을 해서라도 집을 사고 부동산 관리로 생계를 이어가겠다는 한 청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나치는 우스갯말이 아니라 현실의 말이었다. 믿기지 않는 집값 이야기와 부동산 투기 문제로 떠들썩한 시국에 젊은이들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씁쓸하기 그지없다. ‘세상이 어찌되려고 하나….’, ‘이 나라를 어쩌나….’하는 난데없는 나라 걱정을 하며 몇 번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냉철한 판단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였다.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나는 영화나 책을 두 번 이상 보거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벌써 세 번째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이다.“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라는 이 책의 주제 문구가 나와 내 삶에 변화를 줄 듯했다. 그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톡톡히 겪으며 한 인간으로의 소명을 다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몇 번을 다시 읽게 했다. 그것은 단순히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모진 삶에서 나를 어떻게 다스리고 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깨우치게 하는 이야기다. 현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전에 없던 갑질 행태, 사람에 대한 수저 논란으로 평등한 인권이 무너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불쌍하기까지 한 갑들의 우월감이나 을이 겪는 비참한 패배감은 우리 사회에 더 큰 무력감과 분노를 퍼뜨렸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은 역사를 거스른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정치인들의 대중적 TV프로그램 출연은 그들 또한 국민과 함께하는 한 사람이라는 인간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TV프로그램 속 정치인들을 보는 데 그들의 화려한 이력은 2차적인 문제가 된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성숙한 품성을 지닌 아이로 훌륭히 길러내었다는 데 감동을 하고 진실한 사랑의 마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배우자와의 소탈한 일상과 서로의 삶에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주는 부부의 모습에 나와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배움의 자세를 갖게 된다. 어찌 보면 치열하고 각박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라 더 큰 한숨이 쉬어질지도 모르겠다. 이 한숨이 결론이 되지 않도록 정치인들의 신실한 자세를 기대한다.지금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나 학교 폭력, 가정 폭력 등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 이 또한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올바로, 평안하게 살고자 하는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 앞에 내 개인을 보호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공동 삶의 범위에서 찾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교육자로서의 사명,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거듭하는 일상이다.

2021-03-28

지속가능한 양성평등, 협력거버넌스에서 시작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1995년 여성정책의 기본법으로 제정되어 시행되어 온 ‘여성발전기본법’은 2014년에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정책의 전 분야에 여성참여를 확대하고 양성평등 관점을 통합하였다.‘제1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2015-2017년)’은 2017년까지를 여성정책에서 양성평등정책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로 설정하고, ‘제2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2018∼2022년)’은 양성평등 정책으로의 본격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반영하였다.양성평등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에 따라 한 단계 발전된 실질적 양성평등 실현을 위한 협력거버넌스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이를 위해 첫째, 시민주도형 젠더거버넌스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협력사업 확대 및 지역사회 파트너십 활성화가 중요하다. 주요 정책 현안과 연계되는 기관 간 협력체계를 강화하고, 컨소시엄 구성 뿐만아니라 공동 학술회의 및 워크숍을 전략적으로 개최할 필요가 있다.양성평등정책 추진과정에서 조직과 제도 및 문화 혁신이 필요하므로 지속적인 관심과 의견 수렴이 있어야 한다. 지역이라는 생활세계 내에서 양성평등정책은 관중심 행위주체들에서 시민중심의 젠더거버넌스 운영으로 요구되고 있다. 지역 풀뿌리단체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초한 다양한 활동은 ‘살기 좋은 지역만들기’, ‘마을만들기’ 등과 같은 생활공동체 운동의 형태로 전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양성평등정책이 보다 실효성을 제고하려면 관 중심에서 도민 중심의 실천 현장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간영역 양성평등활동 지원조직을 적극적으로 설치하여 양성평등활동 지원 전문성, 지속성, 지역 접근성 등을 고려하고, 지역 활동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서 양성평등의제를 발굴하고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둘째, 새로운 유형의 젠더폭력 대응에 관한 컨트롤타워 기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디지털성범죄·스토킹·데이트폭력 등 여성폭력 대응 및 보호·지원체계를 강화하고, 다양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정책의 추진 근거가 되는 제도적 기반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와 정책실무자의 쌍방향 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민간전문가 중심 여성폭력방지위원회를 토대로 관계 부처 간 실무협의 등을 거쳐 피해자 보호 및 재발방지 대책을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할 것이다.여성가족부는 성폭력피해자 보호법에 따른 성희롱, 성폭력 피해자 무료법률지원, 의료비, 심리치료 지원 등을 통해 재발방지대책 수립 및 시행하고 있다.여성폭력 근절에 대한 사회공감대 형성을 위해 성폭력 성희롱 피해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촉구하는 캠페인 또는 피해자의 자조모임 및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아울러 성인지 관점에서의 정책개발 및 평가,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양성평등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쌍방향 교류 민·관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021-03-23

주거니 받거니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우리말 표현 중에 ‘주거니 받거니’라는 게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서로가 물건이나 말을 계속 주고받는 모양을 이르는 말인데, 그 표현이 참 재미있다.주거나 받거나 받거나 주거나 사실 그게 그것인데, 우리는 보통 ‘받거니 주거니’ 하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하는 말을 쓰니 말이다.하지만 사실 이 표현 속에는 인간관계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가 담겨 있다. 다름 아닌 베푸는 삶의 철학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인간관계로부터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그런데 그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손해 본다는 생각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손해 보는 느낌’이란, 계산적인 관계에서 준 만큼 못 받았다고 느낄 때 생기는 불편한 감정이다.줌-받음이 저울 재듯 일대일 대응이 되면 참 좋겠지만, 인간관계가 어디 그러랴. 그래서 많은 이들이 손해 안 보려고, ‘줌’보다는 ‘받음’을 먼저 생각하고, 설사 ‘줌’을 먼저 행한 후에는 악착같이 ‘받음’을 얻어내려고 애쓰는 게 아닐까. 그런데 ‘주거니 받거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줌-받음의 일대일 대응 관계보다는, ‘줌’과 ‘받음’의 선후 문제이다.사실 먼저 ‘주거니’ 하면 얼핏 손해일 법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왜냐하면 퍼주는 과정에서 타인들의 기쁨, 행복, 감사함이 빈자리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반면 먼저 ‘받거니’ 하려 하면, 주변 사람이 거리를 두고 나아가 그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되어 결국 외로운 삶과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선은 아무리 베풀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고 했고 달라이 라마도 우리가 받는 따뜻함/애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는 따뜻함/애정”이라고 설파한 바 있는 것이다.주는 게 오히려 얻는 것이라는 삶의 철학을 깊이 깨친 사람들은 늘 스스로도 행복할 뿐 아니라 타인의 존경도 함께 얻는 법이다. “재산을 갖고 죽는다는 건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며 비록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나 가방끈도 짧았지만 평생 번 돈을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한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무려 99칸의 집채와 800석의 쌀 보관이 가능했던 곳간을 지닌 만석꾼이었지만 흉년에 누구나 쌀을 가져가도록 아예 곳간 문을 열어 놓은 경주 최씨나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열 수 있다)’라는 글씨를 새긴 큰 쌀독을 고택에 두고, 흉년 시 누구든 쌀을 가져가게 한 조선 후기 낙안군수 유이주,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사서는 기근 시, 관덕정에 솥을 걸고 죽을 쒀서 제주도민 3분의 2를 먹여 살린 여성 김만덕 등등….이처럼 먼저 베푸는 이들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에게 먼저 받기를 원한다. 계속 받기만 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받으면 받은 만큼만 딱주는 사람도 있고, 받지 않으면 아예 먼저 주는 법이 없는 사람도 있다. 꼭 무언가를 가져야만 타인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에서부터 충분히 ‘주거니’ 하는 삶을 살 수가 있다. 비우면 비울수록 더 많은 것이 채워지고 삶이 보다 풍요로워진다는 고금의 진리, 바야흐로 다가오는 4월에는 다들 한번 이를 깊이 새겨보는 시간이면 좋겠다.

2021-03-16

인공지능의 두 얼굴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얼마 전 IT 업계를 술렁이게 한 일이 있었다. 어느 스타트업이 만든 인공지능(AI) 챗봇이 사용자들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 소위 ‘AI 챗봇 윤리성 논란’ 얘기다.20세 여성의 인격으로 태어나 인간의 다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AI 챗봇은 검은 마음의 사용자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 잘못된 학습 환경에 노출되어 버린 AI 챗봇은, 사용자들이 가르친 나쁜 생각을 그대로 배워,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나 차별적인 발언까지 쏟아내었다. 건강하게 성장해주기를 바랬을 개발자의 기대와는 달리, 인간의 다정한 친구가 되기는커녕, 모두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논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개발 과정상에서도 일부 직원들에 의한 개인정보 유출이나, 수집한 데이터 속에 개인정보가 그대로 남아 있던 문제 등이 드러나 논란이 이어졌다. 결국 개발사는 공식 사과와 함께 데이터베이스를 폐기하고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하였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내놓은 10대처럼 말하는 AI 챗봇 ‘테이’는 사용자들의 조작으로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SNS에 게시하고 16시간 만에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2018년 아마존이 개발한 AI는 채용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발견되어 폐기되었고, 2020년 구글 AI 윤리 기술 책임자가 구글의 AI 기술이 성적·인종적으로 편향되었음을 지적해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패턴처럼 반복되는 AI 윤리성 논란의 과정을 지켜보는 공학자의 마음은 불안하고 부끄럽고 초조하다. 개발사에 비난을 쏟아붓는 우리의 모습 속에, 원인을 개발자들의 문제로 돌려버림으로써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은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속내가 읽혀 불안하다. AI 챗봇 논란은 개발사의 책임을 떠나 우리 사회가 감추고 있던 어두운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란 생각에 부끄럽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숨어서 음란물을 즐기는 인간의 검은 얼굴이 그대로 비친 거울을 보는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논란이 자칫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사회 전체의 혐오와 기피로 잘못 번질까하는 노파심 때문에 초조해진다.십인지수 난적일구(十人之守 難敵一寇·열 사람이 한 도둑 못 잡는다)라는 말이 있다. SF 영화 속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악당들처럼 아무리 좋은 기술도 나쁜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은 꼭 있다는 것을 개발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세상에 내어놓기 전에는 언제나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르는 악의적인 사용을 막을 수 있는 ‘악용 방지책’에 대해서도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일단 악용이 시작된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사회 전체가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일으킨 서비스를 폐기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닥쳐올 데이터 경제와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성 문제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살펴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21-02-16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는 비법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지난 여름, 어머니와 백화점 식품관에서 장을 보다 복숭아가 탐스러워 보여서 한 상자를 샀다. 지역 특산품을 좋은 가격에 파는 특판이라며 대대적으로 멋지게 홍보를 하고 있어서 더 믿음이 갔다. 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오는 말랑한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물 상상을 하니 집에 오는 길이 멀게만 느껴질 지경이었다.그러나, 어머니와 나를 잔뜩 설레게 했던 그 복숭아는 우리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푸석하고 단맛이라곤 없는 기상천외한 맛이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도 아니고, 평소 믿고 이용하던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서 사 온 것이라 그런지 실망감이 더 컸다. 우리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 복숭아 한 상자는 가족 모두에게 외면을 받아 이내 어머니의 골칫거리로 전락했고, 얼마 후 ‘복숭아 잼’이 되어서야 식탁에 다시 올라왔다. 복숭아 한 상자에서 시작된 실망감은 그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다른 상품들까지 불신하게 했고, 그 후 우리는 그 백화점 식품관을 다시 찾지 않게 되었다.코로나가 극성을 떠는 와중에도 먹거리 장을 보러 매일 직접 나가시는 어머니가 불안해서, 온라인 장보기 서비스를 이용해 보시라 말씀드려 보지만, 어머니는 ‘먹거리는 직접 보고 골라야 한다’라며 듣지 않으신다. 그런 어머니가 유독 전화로 주문해 드시는 것이 하나 있다. 어머니 휴대전화 주소록에 ‘부산 조기’로 저장된 집이 그것이다. 대화 중에 그 부산 조기 집 얘기가 나올 때면 어머니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날 잡은 신선한 조기를 큰 것, 작은 것 적당히 섞어 깔끔히 포장해서 보내 주니, 제수용과 식구들 먹는 용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맛이 늘 한결같아서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얘기를 듣고 나면 누구나 그 집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싶어지니, 우리 어머니가 부산 조기의 대변인 역할을 하시는 소위 ‘충성 유저(User)’인 셈이다.얼마 전부터 나는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 소상공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뜻을 같이하는 기업들과 함께 소상공업 지원 연구를 하나 시작했다. 소상공인에게는 좋은 상품을 더 널리 더 잘 알려서 우리 어머니 같은 ‘충성 유저’를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돕고, 소비자에게는 가게에 직접 가지 않고도 좋은 상품을 제대로 고를 수 있게 돕는 방법을 찾는 것이 목표다. 처음에는 우리 지역 소상공업이 글로벌 IT 기업 수준의 비대면 경쟁력을 갖추게 돕겠다는 것이 우리 팀의 야심 찬 목표였다. 그런데, 어머니와 부산 조기 집의 경우를 통해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비대면 역량은 바로 다름 아닌 상품의 경쟁력이며, 비대면 IT 기술의 역할은 그 좋은 상품을 알리는 데 작은 도움을 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믿을 수 있는 품질 좋은 조기로 우리 집 식탁을 행복하게 해주는 부산 어느 어부의 바닷길이 오늘도 부디 순탄하기를, 그리고 그 좋은 조기에 대한 소식이 더 널리 전해져 다른 가정의 식탁 위에도 행복한 웃음꽃이 피기를 기원해본다.

2021-01-05

無禮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두 달 전쯤, 국내외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모여 서로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다. 모 대학의 교수가 자신의 학문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뜸 어디선가 ‘아, 그건 정말 쉽잖아~!’ 하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크게 들려왔다. 다들 놀라 둘러보니, 그 주인공은 그 교수와 전공 분야도 완전히 다른, 여전히 포닥과정에 있던 나이 좀 있는 여성학자였다. 그러자 소개하던 교수는, “한 20년 넘게 공부해 온 저도 아직 이 분야를 다 모르는데, 누구는 쉽다하니, 오늘 제가 한 수 배우고 가야겠습니다.” 하며 여성학자의 무례함을 일축시킨 일이 있었다.사실 이러한 무례함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목 디스크가 걸린 것도 아닐 텐데 반갑게 인사한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나가는 교수들, 버스에 천천히 오르는 노인을 향해 빨리 타라고 소리치거나 급히 차를 출발시켜 버리는 운전사들, 아파트 경비원에게 있는 갑질 없는 갑질 다 하며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는 사람들, 익명성의 보호막 뒤에서 막말을 적는 댓글러들, 여러 사람 앞에서 온갖 모욕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직장 상사들 등…. 이루 셀 수가 없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런 무례함을 많이 접하기에 무신경하지만, 사실 이는 결코 가볍게 넘기고 말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례함은 타인의 인격체를 갉아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지타운대 크리스틴 포래스 교수도 그의 저서 ‘무례함의 비용’에서, 무례함은 사람들의 인지 능력을 빨아들여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했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뇌과학자인 에드워드 M. 할로웰 박사도 무례함은 목격자와 피해자에게 뇌화상(brain burn·나쁜 기억이 한동안 기억 속의 수면 아래 자리 잡는 현상)의 흔적을 깊게 남긴다고 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무례함은 왜 생길까? 그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공경과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禮는 원래, 제사상을 의미하는 示자와 일 년 동안 길러낸 곡식을 넘치게 祭器에 담는 豊자가 결합된 글자다. 따라서 문자대로라면 天神과 地神에게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절차를 의미한다. 신에게 제사 지낼 시, 공경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아마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즉, ‘禮’에는 외면적 형식(질서)과 그 속에 공경과 배려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은 이 두 가지 중 보통 후자가 크게 결핍되어 있다.예를 갖춘다는 것은 또한 무조건 남의 비위를 맞추란 뜻도 결코 아니다. 그것은 비굴함이지 禮가 아니다. 禮는 오히려 자기를 지키고 타인의 영역도 함께 존중함을 의미한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이 ‘~~답게’를 잘 실천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례한 이들은 이 ‘~답게’의 의미를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타자의 영역을 침범하고 뇌화상을 입히고는 스스로 솔직하다 착각한다. 어찌 보면 불쌍한 나르시스트들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지난 공과를 짚어보곤 한다. 그 과정에서, 혹 타인에 대한 무례함을 범하진 않았는지 한번 되돌아보고, 나와 너를 함께 소중히 여기는 禮의 의미도 가슴 깊이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2020-12-09

‘눈치’ 보는 세상

서수백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내 키만한 녹보수 한 그루를 거실 한편에 들여 놓았다. 그간 여러 사람들이 좋은 마음으로 나에게 주었던 그 많은 화초들을 살피지 못하고 말려 죽이고 말았던 무책임하고 게으른 내가 아니었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또 다시 잎이 무성한 식물을 집에 들여 놓은 것은 실내 공기 정화의 효과도 있다고 하고, 녹음을 보면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와병(臥病)을 줄인다는 어느 의학 프로그램에서 들은 이야기도 의식을 했던 듯싶다. 순전히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식물원 주인이 나에게 물은 자주 줄 필요는 없고 열흘에 한 번씩만 주면 된다고 했다. 수월하게 집안에서 녹음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층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역시 나는 열흘에 한번 물 주기, 그 수월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는 한 그루 나무인데도 말이다. 어느 날 녹보수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성한 잎들이 지칠 대로 지쳐 축 쳐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얼른 물 한 바가지를 떠와 나무에 주었다. 더 놀란 것은 물을 준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서 지친 잎들이 모두 힘 있게 일어나 푸르른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왜 그토록 감정이입이 되던지…. 식물도 생명이 있으니 당연한 현상인데 내가 너무 감상에 취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내가 ‘눈치’가 없었다. 누군가는 날더러 ‘눈치가 백단’이라고 하는데 왜 지쳐가는 나무에 대해 나는 눈치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간의 내가 본 ‘눈치’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자존감을 불어 넣는 기분 좋은 격려다. 그런데 이 말이 문득 우리를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로 더욱 빠지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욱 예민해지는 듯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욱 몰입되어서 심리적인 폐쇄성은 더욱 커져가는 듯하다. 모두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치’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다. 나 자신의 안위와 편리를 위한 눈치보다 힘겨움과 곤란함을 외치고 있는 주변에 눈치를 발휘해야 한다. 나한테 무익한 일이라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내 자신 내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외면하는 습관적 가치관이 우리의 지혜로운 눈치를 더욱 감소시킬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그 눈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가지는 노력을 하자. 정치인이, 공직자가, 교육자가, 부모가, 자식이, 청년이, 청소년이, 우리 각자가 이타적 눈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가치 있는 눈치를 많은 사람들이 가질 때 우리 사회에 녹음의 빛이 골고루 퍼지고 날로 건강해지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익과 성과의 중심을 ‘이타(利他)’에 두는 ‘눈치 있는 삶’, ‘눈치 보는 삶’의 시너지 효과가 얼마나 큰지 녹보수 한 그루에서 느꼈다.

2020-11-10

쇠똥구리의 지혜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아주 오래전 일이다. 자료조사를 핑계로 학과 친구 몇몇과 여름맞이 시골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다들 시원한 수박을 우적우적 먹으며 평상에 둘러앉아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쇠똥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똥을 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신기하다며 보는데 마침 마을 어른 한 분이 이게 참 대단한 거라며, 또 존경스럽다고까지 하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곤충 주제에 대단해 봤자지 거기에 무슨 존경까지는. 헌데, 그분 말씀의 요지가 이러하였다.오랫동안 소를 치면서 쇠똥구리를 지켜봐 왔는데, 글쎄, 꼭 자기가 짊어질 만큼만 소똥을 굴릴 뿐만 아니라, 그 굴린 똥 또한 단단하여 웬만해선 부서지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잘 다진 똥 구슬을 땅속 둥지에다 옮기고 그 속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니, 다른 벌레나 새들에게 잡아먹힐 일도 없다 했다. 즉 굴릴 수 있는 만큼만 열심히 굴릴 뿐 아니라, 그것을 또 잘 지키는 현명함마저 갖추었으니, 욕심쟁이 인간들보다야 백 배 낫지 않는가 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 싶어, 수박 먹다 말고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지나치게 욕심부리다 패가망신한 예는 우리 고전에 수도 없이 많다. 혹 하나 떼려다가 혹 하나 더 달고 온 혹부리 영감에서부터, 금도끼 가지려 꼼수 부리다 쇠도끼마저 잃어버린 욕심쟁이 나무꾼, 애꿎은 제비 다리 분질러 온갖 재화(災禍)를 받은 놀부 등 지나친 욕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우리 옛말에 ‘욕심 많은 놈, 참외 제쳐놓고 호박 고른다.’는 말이 있다. 또, 성경 야고보서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낫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도 있다. 이는 모두 지나친 욕심이 제 살을 갉아먹음을 경계한 말이다. 바다의 해녀들은 한결같이, 욕심내지 말고 딱 자기 숨만큼만 있다 오곤 한다. 욕심부리는 순간, 물숨을 먹고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됨을 잘 아는 까닭이다. 해지기 전까지 걷는 만큼 모두 당신 소유의 땅이 되리라 하니, 과욕부리다 결국 지쳐 넘어져 자기 몸뚱이가 묻힐 만큼의 땅만 얻게 된 이야기도 괜히 나온 게 아니다.그럼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욕심쟁이들이 세상엔 참으로 많다. 욕심은 바로 절제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우유와 치즈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행복은 절제하고 자기 수준만큼 갖고 가진 만큼 열심히 지키는 데서 오는 법이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한 줄 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행도 커지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죄짓는 사람 곁에 서지 않지만, 욕심쟁이들은 쉽게 악의 무리와 결탁되기 쉬운 법이다.한평생, 참으로 짧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듯이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인생, 뭐가 그렇게 욕심들이 많아 남의 것을 뺏으려 하고, 배 아파하고, 꼼수를 써서 이미 공정한 심사에 따라 결정 난 일을 무리수를 두어가며 뒤집어엎어선 자기 것 하나 더 챙기려 하는지 모를 일이다. 불쌍한 인생들, 더 늦기 전, 쇠똥구리의 지혜를 한번 되새겨 보길 바란다.

2020-07-05

관계의 온도

최미경동화작가“넌 대체 꿈이 뭐니?”라는 남편의 질문에 큰애가 머뭇거렸다.그 사이 셋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을 말하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댔고 둘째는 눈을 한참 굴리더니 셋째가 뱉어놓은 몇 개의 직업에 토를 달았다.“우리 선생님이 그러던데 예술가, 라는 직업은 사라질 수도 있다던데.”둘째의 말에 남편과 첫째와 셋째가 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진짜?”라며 내가 되묻자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신들의 대화 내용으로 이내 돌아갔다. 직업에 대한 고민, 삶의 방향에 대한 근심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커서 뭐 되고 싶어?”라는 식의 질문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 질문에 대해 우리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직업이 20년 후에도 존재할지 장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장 나만 하더라도 “글 그만 쓸래!”라고 내일 당장 두 손 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른인 나도 아직 내가 원하는 게 뭔지 헷갈릴 때 있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내 삶이 어떻게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이런 나를 두고 남편은 비현실주의자 혹은 이상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험난하고 다사다난한 시대를 살금살금 건너며 내가 겨우 알아낸 건 정말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것 뿐이다.6개월 전만 해도 팬데믹으로 발칵 뒤집어질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환경문제 먹거리문제가 늘 따라다녔지만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잠금상태가 되리라고 설마 짐작이나 했겠는가.코앞까지 왔다는 4차 산업혁명시대도 두렵고 전염병도 무섭고 엄마라는 자리도 무거운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대화에서 슬그머니 빠져서 애꿎은 TV리모컨만 요리조리 돌렸다. 그러다 모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소라가 버스킹하는 모습을 보았다.“노래를 혼자 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누군가 들어주고 이해하는 사람이 함께 있어야 그 공간이 같은 마음으로 이뤄져서 그 마음이 커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 같다.”시간과 공간을 같이 하면서 나누는 것이 노래이고 예술이라는 그녀의 말에 가슴의 온도계가 뜨겁게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코로나19로 대부분의 공연과 전시가 미뤄지고 잠정연기되면서 많은 예술인들이 작품을 선보일 곳을 잃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예술인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렸던 관객도 마음 둘 자리를 잃은 것이다. 위로, 카타르시스, 심리적 보상…, 눈으로 가늠할 수 없지만, 계산기로 두드려볼 수는 없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분명 무언가를 준다.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보다 정교하게 작품을 구성하고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음악을 완성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모방하는 시대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예술가와 관객이 나누는 뜨끈뜨끈한 관계, 이 관계의 온도를 최첨단 기술이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로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이 시대를 조심조심 건너며 그래도 예술이 우리 관계에 버틸 힘을 준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싶다.

2020-06-30

바이러스가 소환한 미래세상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비대면(Contact-free)’이 요즘 세계 IT 연구와 산업계의 큰 화두다. 비대면이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는 상호작용의 방식을 의미하는데, 온라인 쇼핑과 로봇 배송을 비롯하여 원격근무, 원격학습, 원격의료,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샵스트리밍(Shopstreaming) 같은 가상경험경제가 대표적이다. 기술적으로는 가상현실, IoT, 센서, 인공지능, 빅데이터, 5G 등 소위 ‘4차산업혁명기술’이 총동원되어야 실현될 수 있다.바이러스 이전에도 원격, 온라인, 무인화, 자동화 등의 이름으로 선보여진 ‘사촌’ 개념들이 많았지만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대면 때보다 비언어적 소통이 차단된다는 한계로, 소비자 불만을 우려한 기업들이 대면적 상호작용을 더 선호하여 항상 보조적인 수단 역할에 그쳤다. 비대면은 이제 옷, 신발처럼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버린 마스크처럼 포스트 팬데믹 시대 산업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 산업경쟁력의 핵심으로 등극한 것이다.빠른 종식을 기다리는 모두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가까운 시일 내에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멈춰버린 경제가 저절로 회복될 거라 기대하기는 더 어렵다. 인간성의 상징인 사람과의 교류가 건강과 생명의 위협이 되어버린 지금, ‘비대면’이 구성원과 고객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와 같은 비대면 상황에서도 생산성을 유지하여 사회·경제적 충격을 완화해 줄 포스트 팬데믹 시대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사람 대하기가 불안해진 마음이 앞당겨 소환한 미래세상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최근 몇 달 우리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애써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기업에서는 선택의 여지 없이 재택근무가 시작되었고, 생존을 위해 업무방식, 조직구조, 근무장소와 시간 등 모든 것을 바꿔야 했다. 비즈니스의 상징인 회의와 출장은 크게 줄었고, 이메일, SNS, 화상통화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비대면 업무가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재택근무나 비대면 업무가 가능한 직업은 전체 직업의 27%에 불과하다고 한다. 학교, 공연장, 소상공인, 관광지, 병원, 복지시설 등 대면접촉과 현장성이 요구되는 그 외 대다수 사업체는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사악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부터 먼저 공격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지탱해 오던 선량한 사람들을 재난 전선의 최전방으로 밀어내었다. 그러니 포스트 코로나 대책으로의 ‘비대면’ 활성화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산업들부터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미래기술은 꼭 필요한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바람직한 모습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 어머니가 마스크와 장갑으로 중무장하고 바이러스의 위험 속으로 나가시지 않아도 되는 세상, 집 거실에서 가상현실 안경을 끼고 동네 반찬가게, 빵집, 야채가게를 한 바퀴 돌고, 서울 친구 집에도 휙 하니 마실 다녀오실 수 있는 세상처럼….

2020-06-23

Z세대들의 “라떼는 말이야….”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인정사정없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에 안전지대가 있을 리 없었다. 정도나 형태에 차이가 있을 뿐 이 시대를 함께하는 모두가 엄청난 내상을 입었다. 그러나 위기마다 강했던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 역시 감내하며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의료진, 소상공인, 어르신들, 직장인들, 모두가 ‘덕분에’를 들어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생의 꽃인 학창시절을 하필 지금 지나고 있는 Z세대들에게 연민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칭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리고 싶다.Z세대란 밀레니얼 세대의 다음 세대로,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로 학교에 가지 못했던 유치원, 초·중·고교생, 대학생까지를 포함한다.선생으로 그들 가까이 있어서일까? 코로나바이러스가 Z세대에게 유독 가혹해 보여 그들이 특히 안쓰럽다. 개학은 3차례나 연기되었고, 급기야 초유의 ‘온라인 개학’, ‘랜선 등교’라는 낯선 상황을 준비도 안된 채 경험했다. 졸업식도 입학식도 치를 수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께 후배들이 드리는 꽃다발도 화면 넘어 마음으로만 나누어야 했다. 입학식은 고사하고, 담임선생님도, 새로 같은 반이 된 친구들 얼굴도 아직 보지 못했다. 수업은 모두 인터넷 강의나 원격 화상학습, 과제제출로 대체되었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즐거워야 할 시간, 아이들은 집안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선생님을 겨우 만난다.물론 이전에도 ‘인강’, MOOC, 사이버대학과 같이 온라인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수업은 있었다. 스마트 기술을 이용하는 게 어려워서도 아니다. 한창 친구가 좋아질 나이에 집에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아이들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말이다.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꼭 필요한 선생님과의 심리적 유대감, 라포(Rapport)의 형성도 온라인 수업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의 기지로 드라이브인 입학식이 열렸다거나, 학교에 못 나오는 아이들을 위해 교장선생님이 코믹한 동영상을 찍어 선물했다는 소식이 미담으로 알려지는 상황이 무슨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져 씁쓸할 지경이다. 준비 덜 된 상황과 불편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Z세대들은 변화된 상황에 너무나 빠르게 잘 적응해 주었고, 여전히 밝게 웃으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듬직하게 버텨내 주고 있는 것이다.80~90년대 X세대의 학창시절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 사건들을 특유의 유머코드로 들려준 ‘응답하라 시리즈’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도 재방송이 계속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40대의 치열한 삶을 감내하느라 드라마에 무관심했던 X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덕에 그들을 TV 앞으로 소환했고, 그 시대를 모를 후배들에게 소싯적 얘기를 하게 만들어 ‘라떼는 말이야….’ 신드롬도 일으켰다. 10~20년 후, ‘응답하라 2020’을 감상하며 자기 후배 세대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외칠 중년이 된 Z세대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무용담이 멋진 해피엔딩이 되게 힘을 보태리라 다짐해 본다.

2020-05-19

예술인이 예술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

최미경동화작가“엄마, 엄마 직업은 뭐라고 써야 해?”저녁을 준비하던 내게, 학교에서 보내온 온라인 설문지를 작성해야 한다며 첫째가 불쑥 물었다.“선생님 아니야?”/“아니지 작가지.”/“아니야, 엄만 요리를 잘하니까 요리사야.”내겐 말할 틈도 주질 않고 둘째와 셋째가 서로 내 직업에 대해 옥신각신할 때, 나는 한숨이 절반인 말로 뱉어냈다.“엄마 사실…. 잘 모르겠어. 엄마가 뭐 하는 사람인지.”그렇게 종일 마음을 썼던 일이 아슴아슴 떠올랐다.오전 일찍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A작가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예술활동증명’을 어떻게 하느냐며, 몇 해 전 내게 그 이야길 들었던 것 같아 전화를 했다고 덧붙였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 가입과 증빙서류에 대해 이야길하며 걱정이 먼저 앞섰다. 예전에 비해 절차와 서류들은 간소화되었지만 처음 해 보는 이들에게 컴퓨터 서류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 3월 ‘예술활동증명’을 꼭 하라고 당부했던 B작가에게 전활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도 몇 번 시도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결국 나는 B작가에게 그동안 작업했던 전시도록과 리플릿을 챙겨 오라며 약속을 잡았다.사실 나는 내 일 아닌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아이 셋을 키워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고 그 와중에 작가로써의 자존심도 지켜내기 위해 틈틈이 글을 써야 했다. 그래서 내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도 사치라고 여기고 내 앞만 보고 살았다.그런 내가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예술인들이 ‘예술활동증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종일 전화를 돌리고 의견을 묻고 약속을 잡았다. 그러던 중 일부 작가들은 자신이 예술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왜 ‘예술활동증명’을 따로 해야 하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코로나19로 전시, 공연, 예술수업 일정이 전면 취소되었을 것이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예술인도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런데 예술의 가치라는 것이 경제적인 접근으로는 측정되기 어려운 가치이기에 예술인들의 예술활동을 시장가치평가방법으로 접근하면 안 되지만 보통 그렇게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창조해내는 예술인들은 생산자로써 그들의 예술작업을 공적 차원에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예술인으로의 공증된 자료, 즉 국가에서 원하는 몇 가지 장치들을 알고 다소 어려워도 당장 쓸모가 없는 것 같아도 장착해야 한다는 것이 ‘예술활동증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한데 그렇게 했던 일들이 뜬금없는 오지랖은 아니었나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에 대한 푸념으로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라고 뱉어낸 것인데 셋째가 갑자기 두 팔을 크게 벌려 나를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10살 막내의 작은 품에서 하루의 피곤함이 사라락 녹아내리는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나직한 막내의 목소리.“엄마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엄마는 내 엄마야.”

2020-04-14

여성관리자 비율, 더 중요한 이유

박은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영국 정부는 2018년 현재 25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성별임금격차 공개를 의무화하였다. 세계 25대 금융기업 중 여성임원이 많은 기업의 수익성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해 여성임원 비율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정부평등국 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100대 금융기업 중 여성임원은 전체의 29%며, 350대 금융기업 중 여성 CEO는 고작 13명, 의장은 21명에 불과했다. 글로벌 경영 컨설턴트 회사인 맥킨지앤컴퍼니가 2018년 1월 펴낸 ‘Delivering through Diversity’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임원 비율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순수익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를 위해 체인 여성 비즈니스위원회는 영국 주요 기업 CEO에게 2020년까지 전체 임원 중 여성 비율을 최소 33%로 늘리기, 3년 안에 임원이 될 능력이 있는 여성을 1~3명 지원할 것, CEO가 직접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을 위해 조직 내 대화 창구확대 등 요구 사항을 강조했다.한편, 국내 역시 여성정책에서 양성평등정책 전환의 과도기는 ‘제1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2015-2017)’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양성평등정책의 본격적인 패러다임은 ‘제2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2018-2022)’에 반영됐으며, 여성인력 활용정도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중요 변수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 정치 및 정부 고위직에서 여성 비율이 지속적으로 확대돼 있으나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공공부문별 여성 대표성 확대 목표를 설정하고 관리·이행해 왔으나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크다. 여성 고위공무원 목표제, 공공기관 여성임원 목표제 등 정부·공공기관에서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여성관리자 혹은 임원 비율을 향상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정부가 시행하는 ‘적극적 고용개선조치’는 차별에 의해 왜곡된 노동시장의 구조를 바로잡아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 아울러 소극적인 차별해소를 넘어서서 실질적 양성평등이 이뤄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차별 받은 집단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정책을 계획·수립·집행·환류가 단계별로 남녀 비율이 균형 있게 참석해 의견을 개진해 성별 고유특성과 경험, 문화가 반영될 수 있도록 성별균형 참여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공공 및 민간 여성관리자 비율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민간부문 여성임원 20% 할당제 도입, 전문성을 갖춘 여성인재 발굴 및 인재DB 구축을 지속가능하게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직문화 구성원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여성인력육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CEO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유연근무제 등 일·생활균형 정책이 조직구성원 모두에서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캠페인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기업내 여성고용 및 여성관리직 비율을 향상시키고, 가족친화문화를 조성해 조직내 양성평등실현에 기여하고 있는 우수기업을 선정해 우대하는 제도 역시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직의 성과는 의사결정시 주요 핵심 역할을 하는 여성 임원의 비율과 많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020-04-07

‘문명세계’와 ‘야만세계’

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과내가 맡고 있는 강의 중 책을 읽은 후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하면서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수업이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멋진 신세계’는 기계문명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공포의 세상을 자초한다는 경고를 보내는 공상과학소설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지금, 이 소설의 이야기는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1932년에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선견지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작가의 경고는 소설에서 두 가지 상반된 세계를 통해 전해진다. 첫 번째 세계는 ‘문명세계’이다 ‘문명세계’의 인간은 ‘보카노프스키’라는 인공부화로 태어나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이 ‘문명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질병이나 노화, 슬픔이나 절망, 삶의 성취나 죽음에 대한 감정도 없다. 언뜻 보면 스트레스를 전혀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약 ‘소마’로 인한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 세계 ‘야만세계’의 인간은 결혼과 출산을 하고, 삶의 욕망도 있고 종교도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읽는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두 세계 중 자신이 살고 싶은 세계는 어떤 세계냐는 질문을 했다. 어느 것도 예상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반응에 나는 조금 놀랐다.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너무 편할 것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설 속 ‘문명세계’ 사람들은 사는 데 아무런 불만도 없으니 말이다. ‘야만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들은 인간에게 ‘희로애락은 삶의 가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 되어 ‘암 걸릴 것 같다’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인 이 시대에서 그래도 ‘야만세계’에 살아야 한다는 학생들이 그저 기특하게 여겨지고, ‘문명세계’에 살고 싶다는 학생들에게는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나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기계문명의 발달은 우리를 엄청난 편리함으로 이끌었고 자부심도 가지게 했다. 그 위력에 빠져 우리 스스로 지나간 우리의 삶을 한심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소설 속 ‘문명세계’가 결코 상상의 세계는 아닌 듯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학대받던 ‘야만세계’에 치를 떨며 ‘문명세계’를 향해 ‘오오, 멋진 신세계’를 외치며 떠났던 존에게‘문명세계’는 구역질나는 곳이었다.‘야만세계’의 습관을 버리라는 ‘문명세계’ 통치자 무스타파 몬드와 치열한 설전을 하고 ‘야만세계’로 돌아왔지만 결국 두 세계의 혼동 속에 자살로 생을 마무리하는 존을 누군가는 심한 향수병을 앓는 인물로, 또 이율배반적인 인물로, 또 기계문명 앞에 안타깝게 희생되는 인물로 이해한다. 나에게도 존은 역시 조금 답답한 인물이다. 나날이 변화하는 세계 앞에 우리의 시야를 어느 한쪽에 가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인생에서 나는 ‘아차!’하는 순간을 나의 학생들과 함께 하며 또 한번 겪는다.

2020-03-24

청년 일자리, 해법을 부탁해!

박은미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정책실장청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2000년 중반 이전은 결혼과 노후 문제에 관해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논의하였다.한편, 2000년 중반 이후는 청년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결혼관, 경제관, 가족관, 사회적 가치관이 주로 제시되었다.결혼을 선택하는 과정이 점점 더 신중해진다는 연구 분석 결과가 제시되었으며, 일과 생활의 경계가 명확하게 분리되는 경향도 함께 나타났다.지난해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일·가정양립 실태조사에 의하면 ‘남녀고용차별개선 및 직장내 성희롱예방’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혀 고용유지와 경력단절 예방을 위한 고용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기업의 열악한 근무환경, 낮은 임금은 청년실업률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중소기업 역시 인력난을 겪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부모와 함께 동거하면서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청년문제도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취업을 하여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일자리가 있는 지역에서 머물면서 경제생활과 여가활동을 할 것이다.청년이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먼저, 취업 및 진로 상담이 필요할 것이다.세분화 그리고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인 현재, 청년들의 진로 혹은 취업을 선택하기 이전에 자신의 타고난 성격이나 가치관 등이 어떠한 직무에 적합한지 확인해 보고 구체적인 진로 방향을 설정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구직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개인의 실제 적성과 시장에 있는 일자리의 괴리에서 나올 수 있으므로 진로탐색이나 상담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적성검사 혹은 심리검사를 통해 적합한 진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이를 위해 20대 초반 취업준비자, 중고생대상 조기상담 등 대상별 진로설계를 지원한다.진로설계 전문상담 센터를 지정하여 경력관리를 지원하고, 직업역량 강화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취업연계를 위한 직장 체험, 개인 취업관을 반영한 맞춤형 취업정보 제공, 다양한 직종에서서의 기업 연계망을 확대해야 한다.두 번째, 고용환경 개선을 주력하여 일자리 창출 분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취업 시 여성을 기피하는 현상이라든가 직장 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하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여전히 성차별적인 고용환경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때문에 유연근무, 재택·원격 근무 등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유연한 근무 제도를 기업에 도입 및 확산하여 장시간 근로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일·가정 양립 고용환경을 조성하여 남녀가 모두 평등하게 일하고, 직장과 가정을 원만하게 양립하여 청년이 노동시장에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무엇보다도 가족친화적인 기업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재정지원이라든가 조세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아울러 가족친화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일과 가정의 균형, 청년여성근로자의 모성보호, 근로자의 출산 및 육아, 유연한 근로시간 및 방식 등의 모듈을 연계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청년에게 많은 지식, 정보보다 구체적 경험 및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2020-03-17

진짜? 가짜?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내 지인 중에 L이란 위인이 있다. L은 모 대학 정교수인데, 행동이 차분하고 말솜씨는 조곤조곤하며 성격도 유한 편이라 사람들마다 그 인품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심지어 주위로부터 이 시대의 ‘선비’, ‘양반’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터였다. 그런데 유독, 이 L을 가까이서 한 10년 이상 알아 온 Y만큼은, 사람들이 칭찬할 때마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했다. 나중에 L이 교육자로서 해선 안 되는 불미한 사건으로 경질되어, 주위 사람들을 경악케 했을 때, Y만큼은 그다지 놀라지 않고 혀를 차며 하던 말이 생각난다. ‘쯧쯧. 비슷한 건 가짜인데 그것을 다들 모르고.’옛말에,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있다. 겉으론 양 머리를 걸고서 뒤로는 개고기를 판다는 말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빗댄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이 본인은 여인들의 남장을 좋아하여 궁중에서 몰래 행하면서 온 나라에는 금지시키자, 당대 유명한 사상가 안자(晏子)가, “이는 곧 문에는 소머리를 걸고서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다.”라 한 데서 비슷한 의미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된 고사이다.사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많은 성현들이 극도로 경계했던 바이다. 겉, 속이 다른 선비를 특히 향원이라 했는데, 이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 곧 사이비(似而非) 선비를 일컫는다. 공자는 ‘논어’에 “자색이 적색을 망침을 미워한다”라고 한 바 있고, 맹자 또한 충직하고 신실한 듯(似忠信), 염치 있고 고결한 듯(似廉潔)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이비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그러면서, 사이비들은 마치 논두렁에 있는 ‘피’와 같다고 했다. 피는 벼와 흡사하게 생겨 뒤엉켜 자라며 벼의 성장을 방해하기에, 노련한 농부가 아니면 다 자라 열매 맺을 때까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이러한 향원을 극도로 싫어한 인물로는 또 연암 박지원이 있다. 그는 스무 가지의 환희(요술)를 구경하고 글 하나를 남겼는데(‘환희기’), 핵심은 눈에 보이는 요술로 눈속임하는 것보다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술 곧 겉으로는 덕 있는 체 하면서, 온갖 교묘한 말로 위로는 임금을 아래로는 백성들을 눈속임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눈속임’이야 알아서 피하면 될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눈속임’은 간파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요즘, 코로나19 사태로 모두가 침울한 분위기이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진실이 중요한 이 마당에, 겉으로는 진실한 척, 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척, 뒤로는 ‘감춤’, ‘거짓’을 밥 먹듯 하는 종교인들이 많다. 또 다가온 선거철, 표심에 눈멀어 겉으로는 국민을 생각하는 ‘척’, 뒤로는 또 다른 꿍꿍이를 꿈꾸는 정치인들도 많다. 다들 이 시대의 향원들이자, 사회를 좀먹는 벌레들이다. 눈 감아야 코 베가던 세상이, 이제 눈을 빤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 되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 실상 코로나바이러스보다도 향원 바이러스가 더 무섭게 된 이 세상에, 다들 벼와 섞여 있는 피를 잘 솎아내는 노련한 농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0-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