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아침산책

등록일 2024-11-04 19:54 게재일 2024-11-05 18면
스크랩버튼
유복혜 전 청도전례원장·영남대 사회교육원 강사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아직도 어둡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은 늘 같은데, 가을도 깊어지니 해 뜨는 시간은 자꾸 늦춰진다. 한기가 훅 끼쳐 절로 손을 모아 가슴을 껴안게 된다. 신에 발을 꿰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 멀리서 차갑게 떨고있다. 달은 벌써 기울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 발 딛기가 다소 두렵긴 하다. 작년 봄 산책 중 집 앞 둠벙을 뛰다가 넘어져 크게 다쳤다. 1년 이상 온갖 신고(辛苦)를 한 탓인지 익숙한 길인데도 이젠 어둠조차 몹시 두렵다. 그래도 발길을 조심조심 옮겨본다. 걷다보면 차차 밝아 오겠지.

어둑한 길을 건너는데 흰 물체가 눈앞을 휙 스친다. 깜짝 놀라 가슴에 절로 손이 얹힌다. 종종 고라니가 나타나 껑충거리며 지나는 길이다. 걷던 발을 멈춘 채 가만히 뚫어지게 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희붐한 어둠 속에서 보니 흰 개다. 들갠가 보다. 저도 놀랐는지 날 쳐다보고 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발을 떼고 몇 걸음 걷다 뒤돌아본다. 그대로 날 쳐다본 채 서 있다. 또 몇 발자국 걷다 뒤돌아보니 세상에나…. 꼬리를 흔들고 있다. 저도 안심하였나 보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걷던 길을 재촉해본다. 내일 다시 또 만나면 반가워하려나.

어둠이 가시자 하늘의 별은 어느새 빛을 잃었는지 숨었고 대신 구름이 보인다. 코끝에 닿는 찬 공기가 맛있다. 크게 숨 쉬어 뱃속 깊이 들이마셔 본다. 입술을 내밀어 천천히 큰 숨을 내뱉으며 또 쳐다보게 되는 하늘에서 크고 흰 두루미 한 쌍이 들판으로 내려앉는다. 시선이 저절로 따라 내린다. 끼루룩 소리를 내며 열심히 뭔가를 쫀다. 내가 지나가는데도 날아가지 않고 저희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방해하지 않으려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일찍 일어난 새가 아침을 먹는구나.

논둑 사잇길로 들어섰다. 나락 향이 훅 끼친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가슴 가득 구수한 향에 취한다. 모질고 유난했던 무더위를 견뎌내더니 제법 알곡이 맺혀 누르스름한 색을 띈다.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과 낮의 뜨거운 햇살을 맞아 알은 더 여물어지고 단단해지면 이 황금빛 너른 논도 추수로 비어지겠지.

부지런한 농부는 작은 땅도 허투루 두지 않는다. 논둑 따라 좁은 길가에도 한 줄씩 뭔가가 심겨져 있다. 지난 여름 이름도 모르는 푸성귀 사이를 비집고 고개 내민 아기 주먹만 한 자그마한 애호박이 어느새 굵어져 누렇게 둥근 호박으로 뒹군다.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게 된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밴다.

이 이른 아침부터 벌써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를 만난다. 며칠째 흙을 뒤집고 부수기를 하더니 샛노란 흙이 부드러운 속살을 보인다. 양파씨를 뿌린단다. 내년 봄에 수확할 양파를 위해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수고로움을 감수하는구나. 더없이 고맙다. 그냥 고맙다. 진심을 담아 수고하신다는 말을 건넨다. 땀범벅이 된 채 집에 돌아오면 꼬리 흔들며 반겨주는 강아지 두 마리. 영감도 그새 일어났는지 이제 제법 우글거리며 자란 무와 배추밭에 엎드려 풀을 뽑고 있다. 한 시간 남짓의 아침 산책은 내 시골살이 행복의 일 순위다.

여성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