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날까? 2014년 뤽베송 감독의 ‘루시’가 생각날 수도 있고, 1967년 나온 비틀즈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1974년에 발견된,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 ‘루시’가 떠오를 수도 있다. 루시는 105센티미터에 30kg 정도였으며 20세 전후에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이후 새로운 발견으로 현재 최초의 인류는 600만 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직도 루시는 최초 인류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은 그의 아들 줄리언이 유치원 다닐 때 그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노래를 만들었는데, 루시 화석을 발견한 조핸슨은 자축 파티 중에 이 노래가 들려 화석의 인물을 루시라고 지었다. 이렇게 유치원생의 그림에서 비롯된 루시라는 이름은 최초 인류의 이름이 되고, 이후 문화 예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영화 ‘루시’의 주인공 스칼렛 요한슨의 이름도 루시이고, 그녀가 자기 뇌 능력의 100%를 사용하여 과거로 돌아가서 만난 인물도 최초의 인류 ‘루시’이다.
‘루시의 발자국’은, 이 최초의 인류 ‘루시’를 빌미로 인간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미야스와 아르수아가, 두 사람이 쓴 책이다. 작가 후안 호세 미야스는 스페인의 선사시대 유적지를 다녀와서 엄청난 감동에 휩싸인다. 그는 자기 안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뭔가 표현하고 싶지만 막막해하던 중 고생물학자인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에게 제안하여 이 책을 완성한다. 고생물학자의 현장 강의를 소설가가 맛깔나게 버무려서 독자에게 내놓은 셈이다.
아르수아가는 미야스에게 서너 살짜리 아이 발자국을 관찰하라는 숙제를 내준다. 미야스는 그 발자국 과제를 수행하면서 루시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녀의 발자국이 고딕 성당보다 더 복잡한 것을 보고 감탄하며 현대 인류의 자아가 루시보다 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생물학자 아루수아가는 루시의 발자국과 아이들의 발자국과 정확히 똑같다는 것을 아주 상세히 묘사해주면서 두 사람의 동작이 모두 생체역학적으로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소설가와 고생물학자는 350만 년 전의 인물과 현대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데 일치한 셈이다.
그런데 현대로 올수록 인간은 성숙해졌을까? 아루수아가의 논리에 의하면, 현대인의 뇌 크기는 2만 년 전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크로마뇽인보다 작아졌고, 현대인이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졌다는 것을 근거로 성숙해졌다고 보지 않는다.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성숙의 또 다른 척도다. 늑대가 수캐보다 냄새도 잘 맡고 청각도 발달해서 더 성숙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늑대가 가축화하여 길들여지면서 다양한 변종이 만들어지고 특이한 신체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비록 약의 힘을 빌린 것이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뇌 능력을 100% 활용하여 만난 사람이 루시라는 영화 ‘루시’의 설정은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제 내 안의 루시를 회복할 일만 남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