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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해에는 해각을 만나기를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 감당할 만한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을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어느 시인이, 자기를 돌보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영된 티비 단막극 ‘기억의 해각’에서 배우 문근영이 맡은 주인공 오은수의 감정도 이렇게 중층적이다.은수는 남편 정석영이 알콜 중독으로 7년을 방황하는 동안 불평 한번 없이 남편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석영이 잘못 휘두른 칼에 베이고 유산까지 한 후 자신이 알콜 중독에 빠졌다. 석영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은수를 돌보지만 지쳐가고, 은수는 바다로 들어간다. 그때 25살 청년에게 구조된다. 그의 이름은 해각. 은수는 그에게 남편을 용서할까 봐 술을 마신다고 한다. 은수가 해각과 여행을 떠난다면서 집을 나서자 석영이 뒤따라온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해각이 보이지 않는다. 석영은 곧 그 해각이 자신의 25살 모습인 것을 알아챈다. 석영은 젊은 시절 밴드를 만들어 무대를 꿈꾸다가 접고 기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은수는 기억 못하지만, 밴드 이름 해각은 은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단막극이지만 이런 은수의 심리변화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알콜 중독으로 횡포를 부리는 석영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은수의 모습은 지고지순하다. 남편이 잘못 휘두른 칼에 베이고 아기를 유산한 후에야 남편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맨정신의 은수는 사랑의 감정만 자신에게 허용하고 있다. 분노는 사랑 뒤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은수의 사랑 방식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김용태가쓴 ‘가짜 감정’에서 지금 보이는 감정 뒤에는 다른 감정이 있다고 한다. 겉에 보이는 감정을 가짜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있는 감정은 진짜 감정이다. 그러나 진짜 가짜가 좋다 나쁘다의 뜻은 아니다. 그래서 가짜 감정, 진짜 감정이라기보다 겉감정, 속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은수의 고통은 자신의 속감정을 잘 살피지 못한 데서 시작한다. 알콜 중독 남편을 한결같이 돌보는 겉감정은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 분노를 꽁꽁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칼부림 있고 난 후 술의 힘을 빌려 폭발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은수 진짜 속감정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던 25살의 남편을 해각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것은 남편에 대한 티없는 사랑이 진짜 속감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각을 만난 후 은수는 알콜릭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렇게 속감정은 알기 어렵다. 증오 속에 사랑이 숨어 있기도 하고, 행복 속에 고통이 숨어 있기도 하다.해각은 새 뿔이 돋아나려고 묵은 뿔이 빠진다는 뜻이다. 묵은 뿔이 빠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새 뿔이 난다. 속감정을 대면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묵은 뿔이 빠지지 않으면 새 뿔이 돋아날 수 없듯이 고통의 시간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 새해에는 해각을 만나게 되기를 가만히 기원해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딱 맞는 드라마다.

2021-12-27

우리, 국어 사전 읽으실래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오늘 사전을 세 권 샀습니다. ‘국어 어원 사전’, ‘우리말 어감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입니다. 갑자기 웬 사전이냐고요? 고백하자면, 몇 달 전 책을 정리하면서 크고 두꺼운 국어사전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이 사전은 작지만 풀이가 아주 길고 예문까지 있어서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전이라고 하면 딱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개성 있는 사전도 있습니다.‘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사전에 미친 두 남자를 취재한 NHK 다큐멘터리에 추가 자료를 덧붙인 책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사전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의 야마다 다다오와 표제어가 145만 개나 되는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겐보 히데토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도쿄대학 동기인 데다 ‘메이카이 국어사전’을 같이 편찬했지만, 그 후 교류를 끊고 각자 개성 넘치는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제가 특히 눈이 가는 사전은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입니다. ‘연애’를 예로 들면,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또는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이 풀이를 보니, 영화 ‘행복한 사전’이 생각납니다.영화 ‘행복한 사전’의 주인공 마지메는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하는데, 하숙집 주인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를 짝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지메에게 사전 편집부 직원들은 ‘사랑’ 풀이를 맡깁니다. 드디어 마지메는 가구야에게 고백하면서 사랑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깨나 그 사람의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자기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딱 맞는 단어를 찾은 것이지요. 영화의 원작 소설 ‘배를 엮다’를 쓴 미우라 시온은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이제 김무림의 ‘국어 어원 사전’을 펼쳐서 ‘사랑’을 찾아봅니다.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풀이 아래 어원이 나와 있습니다. 중세 국어의 ‘ㅅ·랑(ㅎ·다)’의 기본 의미는 ‘생각(하다)’였다고 합니다. ‘우리말 어감 사전’을 보니, 애인과 연인을 구분해줍니다. 애인은 구어체에, 연인은 문어체에 쓰고, 애인은 한 사람을 가리키지만 연인은 한 쌍을 가리킬 때도 많다는 것을 예문을 들어 설명해줍니다.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에도 의미가 비슷한 단어들을 꾸러미로 묶어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줍니다.영화 ‘행복한 사전’에 ‘사전이란 말의 바다를 건너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말을 찾아주는 기적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렇게 개성 있는 사전을 읽으며 기적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삶도 기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2021-11-15

개나리가 피기까지는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겨울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봄꽃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성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달간 매일 500자를 쓰고 나니 문득 이른 봄에 피는 개나리가 생각난다. 개나리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눈을 준비하고 겨울을 지내고 꽃을 피운다. 개나리뿐 아니라 잎 없이 꽃 먼저 피는 봄꽃은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한다.이렇게 긴 겨울을 지내고 꽃이 피는 것을 춘화 현상이라고 한다. 겨울이 가고 일정한 온도가 되면 꽃이 피는데, 온실에서 일찍 그 온도를 맞추어주어도 피지 않는다. 반드시 한두 달을 추위에서 견뎌야 꽃이 핀다.눈치 빠른 독자는 개나리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벌써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500자 쓰기를 겨울 추위에 비유하려고 한다는 것을. 실제로 춘화 현상을 검색하니 고구마 줄기 당기면 고구마가 줄줄이 따라나오는 것처럼 인내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가르침이 줄을 잇는다.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해서 인간의 가치를 설명하는 일은 별 감흥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래전 무어나 흄 같은 철학자는 자연의 속성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진작에 비판했다. 겨울을 나야 꽃을 피우는 일부 꽃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춘화 현상은 이른 봄에 피는 꽃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춘화 원리를 밝힌 라이센코가 무엇을 했는지 알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지 깨닫게 된다. 라이센코는 구 소련의 식물생리학자인데, 식물의 춘화 처리 원리를 확장하여 모든 생명 현상이 적절한 환경 조건에 의해 개량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도 이상적 인간형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그러나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겨울 추위 같은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김연아 선수도 어려서부터 눈에 띄게 재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올림픽 금메달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왼쪽 팔을 다 절단한 김나윤은 척추를 붙이는 2년간의 재활치료와 피나는 노력 끝에 일반부 피트니스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이렇게까지 유명하고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더도 뭐라도 성과를 내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음카카오의 브런치에서 작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정기적으로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이 작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주 1회라도 꾸준히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니 이런 훈련과 인내 후에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을 춘화 현상에 비유하는 것을 식상하다고 손사레를 칠 일은 아니다. 이른 봄에 피는 귀여운 개나리도, 정겨운 진달래도, 아름다운 목련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지난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하고 긴 겨울을 난 것처럼 우리의 삶도 꾸준한 단련이 있어야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 달간 매일 500자 쓰기는 겨울 추위처럼 5000자를 쓰기 위한 단련이 될 것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도 고단한 추위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그 추위만큼은 자꾸 피하고 싶다.

2021-11-01

미안하다고는 안 할 게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고1 때다. 어쩌다가 응원 밴드에 들게 되어 큰북과 심벌즈를 담당했다. 음악 선생님이 몇 번 쳐보라고 하더니 두 악기를 내게 맡겼다. 피아노를 잘 쳤던 친구는 어코디언을 맡았는데, 바로 연주를 잘했다.시내 공설운동장에서 학교 대항 응원이 끝나고 그 친구가 내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를 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때는 피아노 잘 치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 부러운 마음만큼 큰북이나 심벌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잘 치는 애가 나를 칭찬하니까 열등감이 폭발한 것이다.그 날의 일이 가끔 생각난다. 이렇게 아무 때나 갑자기 생각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에는 신경이 예민해지는 정도, 때때로 일어나는 걱정이나 생각, 불안해질 때 하는 행동, 그것들이 일어나는 빈도,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느낌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참거나 조절하려고 하는 것은 성공하기 힘들다.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나 자책 역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후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전념 치료’에서 말하는 대로 그런 감정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그때의 나라면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후회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그때 내가 너한테 한 말, 미안하다고는 안 할게. 그런데 이제는 너 원망 안 해. 그때 나는 남편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었어.’ 요즘 인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15회에서 나온 대사다. 5년 전 친하게 지내던 형이 주인공 대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자 누나(형의 아내)가 주인공 홍두식에게 ‘네가 죽었어야지, 왜 형이 죽어.’라고 했던 말에 대해 사과 아닌 사과를 이렇게 한 것이다.드라마 작가가 ‘수용’의 의미를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그랬어’라는 누나의 말은 그 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태도다. 이제 누나는 홍두식이 죄책감 느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아이에게 홍두식을 삼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모두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허지원 교수 역시 ebs2의 ‘무덤덤한 심리학’ 강의에서 ‘그때는 내가 취약했지’라고 받아들이고, 지금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나 스스로 나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내가 지금 알아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그렇다고 이런 수용이 대오각성하듯이 단번에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할 수 있다. 그럴 때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때 왜 그랬는지 분명하게 알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 나가면 된다.

2021-10-18

일그러진 우리들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내게는 나름으로 내세울 만한 게 몇 있었다. 첫째로 공부, 나는 그 별난 서울의 일류학교에서도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다. 또 나는 그림 솜씨는 서울시 규모의 대회에서 몇 번의 특선은 따낼 만했다. 내 아버지는 그 작은 읍으로 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직급 높은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담임과 급우들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한병태랬지? 이리 와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나는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다. 그만큼 그의 눈빛은 이상한 힘으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엄석대의 힘에 저항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그에게 다가갔다. 엄석대는 내가 물어봐주기를 바랐던 서울 학교의 성적, 아버지의 직업 등을 물었다.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시작 일부분을 조금 요약한 것이다. 1959년으로 추정되는 시기, 한병태는 5학년으로 올라가며 시골로 전학 와서 자기의 서울 성적과 집안에 대한 우월감을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엄석대를 중심으로 학급의 분위기가 힘의 논리로 운영되는 데 대해서는 불합리와 폭력이라며 끔찍해하며 저항한다.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시골 학교를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기에 엄석대의 권력에 더욱 저항했을 것이다.엄석대에게 무너지고 2인자의 자리가 확보되자 병태는 그 누구보다 엄석대에 기생하며 권력의 달콤함을 누린다. 그렇다고 1인자가 되려는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2인자가 된 후에도 엄석대가 시험답안지를 바꿔치기해서 전교 1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담임에게 알리려고 한다. 이런 한병태는 분명히 반 아이들과 구별된다. 반 아이들은 석대에게 바로 복종하거나 석대 무리에 끼기 위해 애쓰는 반면, 한병태는 자유와 합리라는 이름으로 저항했다. 권력에 한없이 무기력한 반 아이들이 소시민이라면, 자유와 합리를 추구하며 저항했던 한병태는 시민에 가깝다. 그런데 한병태의 시민 정신의 뒤에는 자신이 1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2인자가 된 후에도 엄석대의 몰락을 꿈꾸기 때문이다.26년이 지나 사업 실패로 실업자가 되었을 때는 가혹한 왕국에 내던져졌다고 세상을 탓하며 병태는 석대의 질서를 그리워한다. 6학년 담임이 엄석대의 비리를 캐물을 때 모른다고 회피하고 오히려 석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이들이라며 탓하기까지 했던 병태였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승용차였던 그라나다를 엄석대가 타고 다니자 고향 아이들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을 때도 병태는 석대가 그 이상의 영웅이 되어주기를 바란다.자기가 잘 나갈 때는 자유와 합리를 주장하면서 형편이 어려워지면 영웅을 기다리는 병태의 굴절된 의식은 엄석대 체포 후 극에 도달한다. 석대의 몰락은 영웅을 기대하던 병태에게 분명히 새로운 비관이었을 텐데도 세상에 대한 안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이 작품이 나온 1987년에서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여기저기에 ‘한병태들’이 있을 가능성이다. 조금이라도 자유와 합리를 추구한다면 ‘한병태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21-10-04

너를 찾아가는 길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J는 중학생이다. 진로에 고민이 많다. 지금 원하는 일, 신나는 일이 있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그 일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나서기 어려울 것이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어느 정도 되어야 시도할 수 있을 텐데, 불확실한 시대라 더 불안할 것이다. J의 고민을 듣다 보니 책 두 권이 생각난다.E.B.화이트의 동화 ‘스튜어트 리틀’은, 그의 대표작 ‘샬롯의 거미줄’보다 마음이 더 가는 작품이다. 주인공 스튜어트 리틀은 마음씨 좋은 스튜어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생쥐다. 인간이 쥐를 낳았다니, 이런 설정에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튜어트 부부는 생쥐 아들을 아무 편견 없이 아들로 받아들인다. 그 덕분에 생쥐 아들은 큰 불편 없이 밝게 자란다. 부부가 키우는 고양이 때문에 마음을 여러 번 졸이지만, 큰 문제는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집에 들어온 새에게 반하지만, 새는 계절도 바뀐 데다 이웃집 고양이의 습격 계획을 알게 되자 북쪽으로 떠난다.여기서 끝나면 그래도 평범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스튜어트 리틀은 새를 만나러 떠난다. 생쥐가 도중에 만나 생쥐 여인을 마다하고,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새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면서도 오묘한 감동을 준다.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는 더 해피엔딩이다. 이 책은 ‘스튜어트 리틀’과 비슷하면서도 결말이 다르다. 북쪽에 사는 곰은, 한 계절 같이 지낸 새가 따듯한 남쪽으로 떠나자 새를 찾아 남쪽으로 온다. 그러나 새는 이미 다시 북쪽으로 떠난 후다. 곰이 보낸 편지도 하나도 못 읽었다. 곰은 실망하지만 다른 새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북쪽으로 오고, 드디어 새를 만난다.곰이 새를 찾아 남쪽으로 떠난다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고, 가만히 있었어도 다시 새를 만났으리라는 어김없는 사실은 곰의 여행이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새를 찾아 떠난 곰과 가만히 앉아 새를 기다리는 곰이 같은 곰은 아니다.디즈니 버전 ‘스튜어트 리틀’이 뻔한 가족주의로 끝나서 실망했는데, 원작은 전혀 다르다. 사람 부부 사이에서 생쥐가 태어난다는 설정도 너무 이상하고, 그 생쥐가 새를 사랑해서 먼 길을 떠나는 결말은 더 낯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남는다. ‘세상 끝에 너에게’에 나오는 곰 역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림도 정말 좋다.문학에서 느끼는 감흥이 금방 힘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싸움이다. 삶 자체의 조건에 쫓기는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꿈꿀 수 있다”고 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사람은 문학을 통해 꿈꿀 힘을 얻는다.‘스튜어트 리틀’이 새를 만나러 내딛는 발걸음이 행복한 것처럼, 지금 내가 원하는 길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다 보면, 곰이 만난 새들처럼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이 말을 J에게 건네고 싶다.

2021-09-13

사과하지 마세요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내릴 때 앞에 사람이 가로막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죄송하지만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다고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에게 딱히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내 길을 막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부러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니 시비를 따질 일은 아니다. 그저 ‘나가겠습니다. 비켜 주세요.’ 하면 될 일이지 굳이 ‘죄송합니다’를 붙일 일은 없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죄송하다는 말은 그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말일 뿐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리 아빠의 생각은 다르다. 그런 사과는 하지 말라고 한다.찰리 아빠는 ‘아빠, 찰리가 그러는데요’라는 책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 책은 20여 년 전 독일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대본 모음집인데, 작가 우르줄라 하우케의 촌철살인 풍자가 사이다처럼 시원해서 생각날 때마다 들춰보게 된다. 여기에 찰리나 찰리 아빠가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다. 찰리 친구인 아들과 그 아빠 둘의 대화만 나온다. 찰리는 아들의 친구이다. 아들은 찰리 아빠의 이야기를 자기 아빠에게 전하는 방식이다. 추가하자면, 찰리 아빠는 노동자 계층이고, 제목에 나오는 아들의 아빠는 화이트칼라 중산층이다.찰리 아빠는 일부러 한 것이 아닌 일이나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갑자기 손님이 왔을 때 옷차림이 엉성하다고 사과할 필요도 없는데, 연락 없이 방문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묻는다든지 라이터를 빌리는 일처럼 별 일 아닌 일에도 너무 쉽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습관에도 반대한다. 찰리 아빠는 사람들이 쉽게 붙이는 ‘죄송합니다’에 들어있는 진정성 없음과 위선을 들춰낸다. 그러나 아들의 아빠는 그런 사과가 교양 있는 문화인의 태도라며 옹호하지만, 아들은 고의로 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 준 일도 아닌 일에 습관적으로 죄송하다고 해왔다면서 찰리 아빠의 생각에 동의한다.이렇게 건성으로 하는 사과는 잘하면서 정작 사과해야 할 일에는 사과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아빠는 손님 접대할 음식이 적다고 손님에게는 미안해하고 음식 준비한 아내를 비난한 것에 대해서는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놀린 아이에게는 사과하라고 훈육하지 않으면서 장애인을 놀린 아이를 때린 아이에게만 사과하라고 하는 교장 선생님도 문제다.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이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고의로 공약을 지키지 않은 정치인은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고, 왕따 가해자 연예인은 피해자가 아니라 대중에게 사과한다. 부하 직원에게 갑질한 고위 관료도 피해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사과한다.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점에 사과한다. 정말 사과해야 할 대상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의 책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수 있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기 어렵다면, 건성으로 사과하는 습관부터 버리는 건 어떨까?

2021-08-30

플레이 플레이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무관중으로 진행한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극적인 경기로 배구를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잘 아는 운동도 없지만, 배구만은 깊은 인연이 있어서 조금 볼 줄 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로지 키가 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구선수로 발탁이 돼서 1년 정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큰 경기에는 치어리더나 응원단이 있어서 보기 어렵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작은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다. ‘플레이 플레이 한동구’, 현재 공을 잡고 있는 선수를 응원하는 소리다. 여기서 한동구는 ‘플레이 볼’이라는 이현의 장편 동화의 주인공이다.동화 작가 이현이 쓴 ‘플레이 볼’은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들 이야기다. 이현은 스토리텔러로 꽤나 단단한 내공을 가진 작가인 듯하다. 야구를 하나도 모르지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한동구는 3학년에 야구를 시작해서 이제 6학년이 되었고 중학교 야구부에 스카웃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영민이 전학 오기 전까지는 가장 잘한다고 인정받아 4번을 달고 있다. 그러나 5학년 때 전학 와서 뒤늦게 시작한 이영민한테 4번을 뺏기고 만다. 이영민은 야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천재적으로 잘한다.동구 아빠는 숫자를 들이대며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초등학교 야구 선수가 5,000명, 고등학교 야수 선수는 700에서 800명, 프로 야구에서 뛰는 선수는 100명도 안 되고, 그중 1군 선수는 훨씬 더 적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동구는 실의에 빠진다.재능이 없다는 건 좀 슬픈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재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좋아하고 열심히 해도 재능 있는 사람만큼 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를 샘낸 살리에르의 불행은, 비록 그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살리에르에게 저절로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플레이 볼’에는 푸른이라는 동구 친구 이야기도 있다. 푸른이 역시 야구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동구보다도 더 재능이 없다.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야구부에서 나와 보습학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하지만 동네 아마추어 야구단에 들어가서 야구를 즐긴다. 프로 선수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동호회 실력으로는 최고였다.동구는 중학교 선발에 중요한 시합에서 제대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도 야구를 놓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메이저리그 구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투수 호아킨 안두하르가 남긴, ‘(앞일은) 알 수 없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다. 이 말 한마디가 동구에게 계속 야구를 하게 하는 힘이다.참, 초등학교 때 배구 선수 생활은 벤치를 지키는 것으로 마감했다. 키만 컸지 재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8년 전 동네 주부 배구단에 들어가서 센터를 맡아 구 대회에도 출전하여 맹활약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배구 팀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 출신이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 플레이’할 뿐이다.

2021-08-16

내 안의 루시를 찾아서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루시’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날까? 2014년 뤽베송 감독의 ‘루시’가 생각날 수도 있고, 1967년 나온 비틀즈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1974년에 발견된, 350만 년 전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 ‘루시’가 떠오를 수도 있다. 루시는 105센티미터에 30kg 정도였으며 20세 전후에 나무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이후 새로운 발견으로 현재 최초의 인류는 600만 년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직도 루시는 최초 인류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비틀즈 멤버 존 레논은 그의 아들 줄리언이 유치원 다닐 때 그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노래를 만들었는데, 루시 화석을 발견한 조핸슨은 자축 파티 중에 이 노래가 들려 화석의 인물을 루시라고 지었다. 이렇게 유치원생의 그림에서 비롯된 루시라는 이름은 최초 인류의 이름이 되고, 이후 문화 예술에도 많은 영감을 준다. 영화 ‘루시’의 주인공 스칼렛 요한슨의 이름도 루시이고, 그녀가 자기 뇌 능력의 100%를 사용하여 과거로 돌아가서 만난 인물도 최초의 인류 ‘루시’이다.‘루시의 발자국’은, 이 최초의 인류 ‘루시’를 빌미로 인간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미야스와 아르수아가, 두 사람이 쓴 책이다. 작가 후안 호세 미야스는 스페인의 선사시대 유적지를 다녀와서 엄청난 감동에 휩싸인다. 그는 자기 안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뭔가 표현하고 싶지만 막막해하던 중 고생물학자인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에게 제안하여 이 책을 완성한다. 고생물학자의 현장 강의를 소설가가 맛깔나게 버무려서 독자에게 내놓은 셈이다.아르수아가는 미야스에게 서너 살짜리 아이 발자국을 관찰하라는 숙제를 내준다. 미야스는 그 발자국 과제를 수행하면서 루시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녀의 발자국이 고딕 성당보다 더 복잡한 것을 보고 감탄하며 현대 인류의 자아가 루시보다 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생물학자 아루수아가는 루시의 발자국과 아이들의 발자국과 정확히 똑같다는 것을 아주 상세히 묘사해주면서 두 사람의 동작이 모두 생체역학적으로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소설가와 고생물학자는 350만 년 전의 인물과 현대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데 일치한 셈이다.그런데 현대로 올수록 인간은 성숙해졌을까? 아루수아가의 논리에 의하면, 현대인의 뇌 크기는 2만 년 전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크로마뇽인보다 작아졌고, 현대인이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졌다는 것을 근거로 성숙해졌다고 보지 않는다.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성숙의 또 다른 척도다. 늑대가 수캐보다 냄새도 잘 맡고 청각도 발달해서 더 성숙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늑대가 가축화하여 길들여지면서 다양한 변종이 만들어지고 특이한 신체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비록 약의 힘을 빌린 것이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뇌 능력을 100% 활용하여 만난 사람이 루시라는 영화 ‘루시’의 설정은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제 내 안의 루시를 회복할 일만 남은 것일까?

2021-08-02

수학도 필요한 시간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인문학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교양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연과학은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이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성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연과학 소양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 어느 독서 모임의 교재 ‘자발적 진화’ 때문이었다.저자 브루스 립튼의 약력도 의심쩍었지만, 무엇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을 진화라고 하는 것부터 당황스러웠다. 인문학적 소양을 장착한 그 독서 모임 구성원들이 그런 용어 사용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연스레 거대 담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말았다.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던 중 만난 책이 ‘수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10여 년 전 화제작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여러 철학 고전에 담긴 심오한 인생 철학을 해설해주고 있지만, ‘수학이 필요한 시간’은 심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할 정도로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총 10명이 살해되었는데, 이것은 큰일일까, 아닐까? ‘수학이 필요한 시간’의 저자 김민형은 수치로 판단해보자고 한다. 이런 제안은 고전윤리학의 관점에서는 질문 자체가 비윤리적일 수 있음을 저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전년도 사망자 수가 20명이었다면 10명이라는 숫자는 희망적일 수도 있고, 사망자 수를 0명으로 줄이기 위해 들어가는 사회적 자원을 확보하려다가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자율 주행 자동차에 들어갈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결정 게임’의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어느 것도 최선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멈출 수는 없고 방향만 바꿀 수 있는 상황일 때 5명이 탄 차가 방향을 바꾸면 차에 탄 사람이 다 죽고 직진하면 앞에 있는 3명이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 여러 사례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결정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은 고전 윤리의 문제를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알고리즘으로 변환시키고 있다.대표를 선출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도 있다. 후보들의 여러 정책 중 무엇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에 따라 선호도 순서가 바뀐다. 공자가 주장한 어진 인격자를 찾으려다가는 낭패한다. 어질다는 것은 너무나도 추상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절대적 가치라도 상황의 제약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수학은 말해주고 있다. 평생을 인문학 공부로 살아왔지만 인문학이 홀로 있을 때는 공허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나이 든 사람이 인문학을 이야기하다가는 꼰대 되기 딱 좋다는 생각도 엄습해온다.과학책 읽기 동아리를 운영하다가 내친김에 지난 6월 한국과학창의재단의 과학저술가 양성과정에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했다. 합격자 중 보기 드문 문과 출신에다가 최고령 합격자다. 서류와 면접이라는 약간은 빡센 시험을 통과한 것이라 얼떨떨하다. 수학도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2021-07-19

혼주의 변신은 무죄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며칠 전 둘째딸 결혼식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안경을 쓰기 시작한 후로 육십갑자 한 바퀴를 돌 때까지 안경을 쓰지 않고 사진을 찍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안경 안 쓴 처음 사진은 당연히 30여 년 전 결혼식 때다. 그런데 이번이 더 특별한 것은 속눈썹까지 붙였다는 점이다.큰딸 때는 스몰웨딩이라 평소처럼 니트에 바지를 입고 안경도 당연히 썼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연핑크 치마에 아이보리 저고리를 입고 속눈썹까지 붙인 풀메이크업, 거기에 짧은 머리를 올림머리처럼 부풀린 모습은 도대체가 다른 사람 같다. 아마 이 사진작가를 알지 못했다면, 이런저런 하객의 칭찬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다.신디 셔면, 그녀는 화가로 시작했으나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아티스트다. 신디 셔먼의 모델은 자기 자신뿐이다. 자기만 찍는다. 그런데 찍는 방식이 독특하다. 미리 설명을 듣지 않으면 한 사람이라고 알 수 없을 만큼 분장이 강하다. ‘버스 라이더스’라는 작품은 버스에 탄 여러 여성 승객을 찍었는데, 사실은 다 신디 셔먼이 분장한 것이다. ‘무제 - 영화 스틸’ 연작은 실제 배우와 똑같이 분장했기 때문에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착각할 정도지만 그 역시 모두 신디 셔먼이다.그러나 그 많은 인물 중에서 신디 셔먼은 누구인가 묻는 것은 어리석을 것이다. 모든 작품 속에 신디 셔먼이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신디 셔먼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의 작품을 평론가들의 해석은 분분한데, 그런 해석과는 상관없이 내게는 섣불리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모든 작품의 제목이 ‘무제’이다.이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니 지금까지 화장하기를 한사코 부끄러워하고 안경 벗을 시도를 해본 적도 없으며 다양한 모양의 신발을 신어볼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 왔다는 생각이 든다.언젠가 감명 깊게 읽은 헤닝 멘켈의 소설 ‘이탈리아 구두’에는 주인공 외과 의사 벨린이 신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딱 맞는 이탈리아 구두를 신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춘기 때부터 끊이지 않았던,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정체성 확인이라는 절대불변의 ‘딱 맞음’을 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렇게 딱 맞는 정체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신디 셔먼 같은 시도 한번 하지 않은 채 결정한 ‘딱 맞음’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 나에 대해 고정관념을 만들고 그에 갇혀 살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정체성인 양 생각하고 그것이 내게 딱 맞음이라고 착각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신디 셔먼의 분장은 딱 맞음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80세가 되었을 때 더 편안하고 멋진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피해왔던 화장도 해보고 다양한 옷도 입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힘은 강하다. 한복에 풀메이크업한 내 모습이 나 같지 않다는 생각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으니.

2021-07-05

자원봉사가 짜증난다구요?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늦은 저녁, 동네 산책길에서 지인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외로운 건 인문학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있어요?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 말고 좋은 대안 좀 연구해봐요. 자원봉사 같은 건 권하지 말구요, 짜증나.”그 지인과는 이상하게 길거리에서 가끔 만나는 인연이 있다. 언젠가도 길에 서서 외로움을 어떻게 하냐고 하소연하기에 걸어보라고 했더니 걷는 것도 하루이틀이지요 하기에 그것도 그렇네요, 하면서 깔깔거린 적이 있다. 그런 지가 한참 전인데 산책길에서 또 만난 것이다.그런데 이번에는 자원봉사는 짜증난다고 손사레를 친다. 긴 말을 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듯하다. 자원봉사가 필요한 곳은 대부분 상황이 어려운 곳이다. 그런 곳에 가서 ‘그래, 저렇게 힘든 사람도 있는데’하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도 편하지 않고, 봉사 대상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자원봉사의 끝은 어디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데 이런 무거운 의문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짜증이 나는 것이다.자원봉사뿐 아니라 무료로 하는 활동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이 많이 든다. 큰애가 4살이던 1994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쉬지 않고 동네에서 무료 독서모임을 했다. 처음 독서 모임을 시작하던 1990년대에는 전공을 살려 동네 주민센터에서 1년간 무료로 논어 강의도 했다. 요즘에는 도서관의 문화 강좌가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별로 없었다.그러다가 얼마 전,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현타’란 현자타임의 줄임말이다. 무언가에 몰두하여 열심히 하다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성찰을 하게 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무료 독서모임을 하는 나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불씨를 지핀 책이 있다. 노구치 마사코의 ‘프랑스 여자는 80세에도 사랑을 한다’는 책에는 빨간 코트를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하이힐을 신는 80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갑자기 만날 수도 있을 사랑을 위해 언제나 화려한 속옷도 잊지 않는다. 그 프랑스 여자가 자신의 욕망을 알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 쉽고 간결해서 신선했다. 이 80세 프랑스 여자가 느닷없이 다가온 것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행동에 숨김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에 비해 자원봉사 같은 일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숨어 있어서 의도와 결과가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당초 대상을 위하는 선한 마음이 아니라 열등감을 감추고 싶어서 시작할 가능성도 있고, 선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초심을 잃기도 한다. 봉사한다면서 모인 사람들끼리 자리와 명예를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아는 것은 정말 긴급하다. 다행히도 그것을 알았다면 괜히 에둘러 갈 필요도 없다. 자신의 욕망에 당당하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 그것은 80세가 되어도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과제가 아닐까?

2021-06-21

알맞은 삶을 위하여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꼬마 요정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백합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골짜기에서./ 그에게 왜 그렇게 자그마한가 물었지요. / 그리고 왜 키가 자라지 않느냐고요. // 꼬마 요정은 얼굴을 찡그리곤, 눈을 들어 / 나를 뚫어지게 보고 또 보는 것이었어요./ “나에겐 이 정도의 크기가 알맞아.” 그가 말했지요./ “너에겐 너 정도의 크기가 알맞듯이!” - 존 켄드릭 뱅스‘꼬마 요정’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20년 전 큰애에게 사준 동시집 ‘동생의 비밀’에 나오는 시다. 며칠 전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을 살자는 주장을 듣다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은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를 뿐 우열은 없다고 한다. 자신의 그릇 크기에 알맞게 사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자신의 그릇 크기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서 불행이 시작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도 하고 지당하기만 한 말이라고 외면하기 쉽다. 동의한다 하더라도 내 그릇이 어떤지 잘 모르고 삶에 적용하기도 막막하다. 20년 전 내가 그랬듯이.그러나 지금, 저 시를 대하는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내게 알맞은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알맞음이나 적정함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극대화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다. 돈이나 지위를 극대화하려는 마음은 애당초 많지 않았기에 아쉬움도 별로 없지만, 학문의 길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은 아직도 불쑥불쑥 뒷머리를 잡아당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나간 선택을 아쉬워할 것인가?사실 알맞음이나 적정함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알맞음은 시행착오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요한 장소를 찾아 명상하는 것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자신에게 알맞음을 찾아가는 방법이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한 번에 찾아지지 않는다.올해는 꼭 매주 공부 모임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운 좋게도 딱 맞는 인원이 모여서 몇 달째 매주 공부를 하고 있다. 첫 주제로 인지심리학 관련 책을 선택했다. 지난주에는 1년 후에 내게 다가올 새로운 경험을 상상해보고, 그 경험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이런 작업은, 현재 내게 불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자각으로 고통을 줄여준다는 치료적 효과도 있지만, 1년 후 내 삶을 내게 알맞게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보편적 효과도 있다.대학 재직 때는 우수 강사로 뽑히는 동료가 부럽기도 하고, 잘 팔리는 인문학 저술가를 보면 남몰래 열등감이 폭발하기도 했다. 페북에 좋아요가 몇백 개씩 달리는 인플루언서 페친도 나의 무능을 자극했다. 매주 공부를 하면서 내가 못났기 때문에 그것들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이 내게 알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모든 구성원이 서로 격려하면서 공부하고 함께 성장하는 작은 공동체적 방식이 내게 알맞은 크기인가보다 하는 발견도 덤으로 얻는다.

2021-06-07

인생 그림책에서 배운다면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평균 수명이 늘고 있다. 2011년 남자 76.8세, 여자 83.6세이던 것이 202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4세라고 한다. 주위에 90 넘은 어르신들도 눈에 많이 띈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위기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위기는 자기 삶에 대한 불만족감이 커지는 데서 온다. 경제적 문제나 건강 문제도 삶에 대한 만족감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족감이 크면 경제나 건강 문제도 극복하기 쉬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힘 기르기가 중요해지는 이유다.바로 며칠 전은 우연이 겹친 날이다. 도서관에서 ‘100 인생 그림책’을 빌린 날, 몇 달 전 가입한 북클럽에서 굿즈로 ‘인생 노트’를 보내주었으니 말이다. ‘100 인생 그림책’은 100살까지의 삶을 나이마다 한 장면으로 표현한 책이다. 저자 하이케 팔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초등학생부터 아흔 살 할머니, 여러 국적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명망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시리아 난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 나이에 당신이 배운 것은 무엇이냐고. 노후의 삶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60세 이후의 장면에 눈길이 더 간다.68세에 어쩌면 너만의 정원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 70세에도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으며, 생전 처음 해본 일이 마음에 든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발견은 나이듦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준다. 이런 장면들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크게 공감이 된다.‘인생 노트’는 시기별로 자신의 감정, 행동, 기호 등을 기록하도록 질문으로 구성된 책이다. 책이라지만 내가 칸을 채워야 하기에 노트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다. 스스로 만드는 인생 그림책이라고나 할까? 그때 나는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등을 채우다 보면, 그때가 또렷이 기억나면서 내가 배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100만 번 산 고양이’의 작가 사노 요코는 암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대신 병원비로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잉글리시 그린의 재규어를 샀다고 한다. ‘아,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 하면서. 그녀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서 마음에 드는 재규어를 살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등의 에세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성찰과 기록을 꾸준히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평소 기록하는 힘을 놓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93세에 쓰신 자서전 제목도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공룡 발자국 같은 기억들’이다. 그것을 통해 아버지는 인생의 시기마다 무엇을 배웠는지 발견하셨고, 그 발견을 통해 또 많은 것을 배우셨다.나이가 들수록 행복한 삶을 위해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더 중요해진다. 지난 시간 배운 것을 떠올려보자. 이런 발견은 동료와 같이 하면 더 좋다. 뜻이 맞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자. 인생 그림책을 같이 읽자고. 인생 노트도 채운다면 금상첨화다.

2021-05-24

삶은 계속 이어진다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어린 시절 동화는 왕자와 공주가 만나 고난을 겪고 결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고 왕자와 공주의 결혼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런 결말이 완결된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엘윈 브룩스 화이트의 대표작 ‘우정의 거미줄’ 역시 그런 완결된 결말을 보여준다. 샬롯이라는 거미는 돼지 윌버의 친구가 되어주고 도살의 위험에서 구해준다. 돼지 품평회장에서 샬롯이 알을 낳고 삶을 마치자 윌버는 그 알을 지켜준다. 윌버가 샬롯에게 은혜를 갚는 것처럼 보여서 완결된 느낌을 준다.그러나 화이트의 다른 작품 ‘스튜어트 리틀’은 좀 다르다. 이 작품은 5센티미터 생쥐 크기로 태어난 스튜어트가 자기 집에 날아들어온 마갈로라는 새를 사랑하는 이야기다. 어느날 갑자기 마갈로가 떠나자 북쪽으로 가는 것이 맞다는 확신만 가진 채 북쪽으로 가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가 기대하듯이 마갈로를 만났다는 결말은 없다.어떤 독자들은 이런 결말에 불편해한다.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긴장과 갈등까지 갖추어지면 완벽하다.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인 더 하우스’에 나오는 제르망 국어 선생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제르망은 작가를 꿈꿨으나 실패하고 학생들의 시시한 작문을 채점하며 투덜거린다. 어느 날 클로드의 작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글쓰기 지도를 시작한다. 클로드의 작문은 주말에 친구 라파의 집에 놀러 가서 가족을 관찰한 글인데 친구의 엄마에 대한 묘사가 많다.그런데 이 영화에는 사실주의 작가 플로베르가 배경과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다니는 학교 이름도 플로베르 고등학교이고, 플로베르의 작품 ‘단순한 영혼’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단순한 영혼’은 기존의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고 충직한 하녀 펠리시테의 삶을 밋밋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클로드 역시 발단 전개 등의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 내용을 묘사했다. 플로베르처럼 냉정하게 보라는 제르망의 조언을 따라 3분 경과, 5분 경과 등 시간의 경과에 따라 라파 가족의 대화와 행동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르망은 클로드에게 주제가 무엇이냐, 독자를 정해야 한다, 남의 가족을 떠벌이는 느낌이다, 갈등이 없다, 독자에게 궁금증을 던져라, 긴장을 만들어라 등의 비평을 하면서 지도한다. 급기야 제르망은 클로드의 글을 계속 보고 싶어서 클로드가 라파의 집에 계속 가서 수학을 가르쳐주게 하려고 수학 시험지까지 빼주어 라파의 성적을 올려준다.결국 이 일로 제르망은 해고되고, 부인에게 이혼 통보까지 받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드는 공원 의자에 앉아 제르망에게 계속하자고 한다. 이런 결말을 통해 오종 감독은 진짜 결말, 분명한 결말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왕자와 공주는 행복한 결혼 이후에도, 샬롯의 알들도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스튜어트가 마갈로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스튜어트의 삶은 이어진다. 어느 이야기에도 완결된 결말은 없다.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2021-05-10

문학적 독서의 힘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아버지가 미워요! 절대로 우릴 못 가게 했어야죠!’ 조엘이 울부짖는다. 그러나 조엘은 곧 자신 때문에 토니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토니가 수영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모래톱까지 수영 시합을 하자고 했어요.’ ‘조엘, 너랑 아버지랑 토니는 제각각 선택을 했어. 다만 토니만이 스스로 선택하고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야.’ 조엘은 자신의 고통을 없애지도, 없애 줄 수도 없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엘은 울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가 안도한 듯 탄식했다. …. 조엘의 숨소리가 헐떡거릴 때에도 아버지는 조엘을 꼭 안고 있었다. 곧이어 조엘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아버지의 고동소리에 맞춰 숨을 쉬기 시작했다.위 장면은 마리온 데인 바우어의 ‘잃어버린 자전거’의 끝부분을 조금 줄여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36쪽의 얇은 청소년 소설이지만, 읽은 지 1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생생하다. 열네 살의 두 소년 조엘과 토니는 아기 때부터 같이 자랐다. 조엘은 토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토니의 무리한 요구를 잘 받아준다. 그날도 조엘은 12㎞나 떨어져 있는 위험한 절벽에 가기 싫었지만 토니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나선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중간에 토니가 수영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다른 곳에는 가지 말라던 아버지의 당부를 어기는 줄 알면서도 조엘은 금방 받아들인다. 그러나 토니는 익사한다.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예상하기 쉬운 부모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다른 곳에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듣지 않았느냐고 조엘을 나무랐을까?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할까? 조엘이 자기 몸에서 나는 강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며 냄새를 없애 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그 냄새를 없애 줄 수 없다고 한다. 토니가 자기 탓이라며 울부짖을 때 아버지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전개는 예상을 완전히 넘는다. 이렇게 예상을 뒤엎는 소설의 전개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최근 번역된 ‘신경미학’은 미학적 경험을 신경학적으로 분석한 여러 학자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데이비드 마이얼의 논문 ‘문학적 독서의 신경미학’에서는 문학을 읽을 때 독자의 경험에 대해 설명해준다.저자에 따르면,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의 상황에 참여할 때 문학적 독서가 일어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가 ‘이화’이다. 이화라는 것은 독자의 예상을 넘는 전개를 만났을 때 생기는 낯선 느낌이다. 이 낯섦은 독자에게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도록 촉발한다. 각자 자신이 선택했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설명은 단순히 네 책임이 아니야 하는 보통의 위로를 넘어 앞으로 조엘이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다.이런 아버지의 대응은 독자에게 낯선 느낌을 주면서 ‘지나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지 않고 슬픔을 이겨내는 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준다. 이화를 통해 독자는 직접경험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활성화된다. 문학적 독서는 힘이 세다.

2021-04-26

미지의 영역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사람은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조 해리의 창이라는 심리 이론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네 가지 정보 영역이 있다. 나에 대한 정보를 나도 알고 남도 아는 공개 영역,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맹목 영역,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숨긴 영역, 그리고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미지 영역이다.영화 ‘퍼스트 리폼드’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보면 미지의 영역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메리의 남편인 환경 운동가 마이클은 메리에게 50년후 최악의 지구 상태를 예견하며 낙태를 종용한다. 메리는 하필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목사 톨러에게 찾아와 마이클을 설득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이클은 자살하고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장례식을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톨러 역시 마이클처럼 환경을 오염시키는 악덕 자본가를 응징하려다가 자살로 생을 마친다. 메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남들 눈에도 아기를 출산하고 싶은 순수한 여인일 뿐인데, 메리가 만난 남자들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으면 의문이 풀릴까?‘프로이트 이후’는 현대정신분석학의 발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여기서 영국의 대상관계 정신분석 이론가인 페어베언은, 초기에 내적 대상으로 형성된 대상과의 관계 양식은 이후에도 반복되어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메리가 이렇게 비슷한 유형의 남자와 만난 것은 초기에 형성된 내적 대상의 영향으로 비슷한 유형의 두 남자를 선택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쁜 남자에게 고통 받은 여자가 다시 선택한 남자 역시 이전 남자와 비슷한 유형인 경우가 많다.게다가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간과하거나 뜬금없다고 여기는 ‘마법의 시간 여행’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여행은 메리의 무의식이 두 남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이클이 죽은 후 메리는 무서운 꿈을 꿨다며 한밤중에 목사를 찾아와 이 여행을 제안한다. 메리는 목사를 바닥에 눕게 하고 자기는 목사 위에 엎드려 온몸을 밀착시킨 다음 목사에게 자신의 호흡과 눈움직임, 손움직임을 따라하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들이 처음 간 곳은 숲이다. 그러나 곧 자동차로 가득한 도시의 넓은 도로가 나오고 뒤이어 폐타이어가 화면을 채운다. 그 시간여행을 마친 후 톨러 목사는, 풍요로운 삶 교회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악덕 자본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해 자살폭탄 테러를 준비한다. 메리는 구원자가 아니다.자기 자신과 남에게 알려져 있는 공개적 영역이 아무리 순수해보인다고 해도 미지의 영역에 드리운 어두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커서 공개적 영역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반복을 끊기 위해서는 미지의 영역을 공개 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미지의 영역이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노력이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2021-04-12

모욕감에 대처하는 법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모욕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모욕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쑤퉁의 ‘쌀’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우룽의 이야기는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모욕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고향에 홍수가 나서 먹을 것이 없어 우룽은 석탄 수송 기차를 타고 도시로 오지만 도착하자마자 부두 깡패에게서 심한 모욕을 받는다. 대홍기 쌀집에 가서 하인으로 써달라고 사정하지만 펑 사장과 그의 두 딸 쯔윈, 치윈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다. 우룽은 증오의 화신이 되어 대홍기 쌀집을 차지하고 와장가의 두목이 되어 잔인하게 복수하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윌리엄 어빈의 ‘알게 모르게, 모욕감’이라는 책에서는 모욕이라고 느끼는 여러 상황을 소개하면서 자존감이 낮거나 자아상이 취약할 때 모욕을 참기 어렵다고 한다. 그는 모욕 평화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덕을 쌓아 안정적인 자아상을 확립하면 남이 나를 모욕할 수 없으니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한다.그러나 이런 처방을 우룽에게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덕을 쌓겠다는 의지가 먼저 있어야 가능하고 그런 의지를 발동하기 위해서는 덕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우룽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굶어 죽었고 동냥으로 연명해온 처지라 덕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설사 어느 정도 덕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받은 모욕은 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나 심각한 물리적인 가해를 동반했다.우룽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 아큐의 대응은 좀 다르다. 루쉰의 ‘아큐정전’에 나오는 이 사람은 모욕을 당해도 마음속으로 자기가 이긴 것이라며 정신승리법을 사용하여 모욕을 견딘다. 그 역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함부로 모욕한다.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우룽과 아큐는 사회적 지위가 무척 낮다는 것이다. 주먹이든, 재화든, 지식이든, 권력이든 한쪽이 극단적으로 많으면 그렇지 못한 상대방을 모욕할 가능성이 많다. 아큐가 정신승리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우룽보다 형편이 나아서 움막같은 집이나마 돌아가서 몸을 뉘일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룽이 아큐보다 모욕감을 더 크게 느낄 가능성이 많다.윌리엄 어빈도 사회적 지위 차이가 클수록 약자가 모욕을 느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언행이라도 안정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모욕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는데,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심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면서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모욕 금지법 같은 물리적 방법은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하면서 내면의 덕 쌓기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그러나 무엇보다 모욕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욕할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 권력 관계가 평등해질수록 모욕하기 어려워진다. 내면의 덕 쌓기도 물론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좁혀야 한다. 이런 사회 환경이 만들어지면 모욕의 힘은 약해지고 내면의 덕 쌓기도 수월해진다.

202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