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 감당할 만한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을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어느 시인이, 자기를 돌보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영된 티비 단막극 ‘기억의 해각’에서 배우 문근영이 맡은 주인공 오은수의 감정도 이렇게 중층적이다.
은수는 남편 정석영이 알콜 중독으로 7년을 방황하는 동안 불평 한번 없이 남편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석영이 잘못 휘두른 칼에 베이고 유산까지 한 후 자신이 알콜 중독에 빠졌다. 석영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은수를 돌보지만 지쳐가고, 은수는 바다로 들어간다. 그때 25살 청년에게 구조된다. 그의 이름은 해각. 은수는 그에게 남편을 용서할까 봐 술을 마신다고 한다. 은수가 해각과 여행을 떠난다면서 집을 나서자 석영이 뒤따라온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해각이 보이지 않는다. 석영은 곧 그 해각이 자신의 25살 모습인 것을 알아챈다. 석영은 젊은 시절 밴드를 만들어 무대를 꿈꾸다가 접고 기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은수는 기억 못하지만, 밴드 이름 해각은 은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단막극이지만 이런 은수의 심리변화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알콜 중독으로 횡포를 부리는 석영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은수의 모습은 지고지순하다. 남편이 잘못 휘두른 칼에 베이고 아기를 유산한 후에야 남편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맨정신의 은수는 사랑의 감정만 자신에게 허용하고 있다. 분노는 사랑 뒤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은수의 사랑 방식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김용태가쓴 ‘가짜 감정’에서 지금 보이는 감정 뒤에는 다른 감정이 있다고 한다. 겉에 보이는 감정을 가짜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 뒤에 있는 감정은 진짜 감정이다. 그러나 진짜 가짜가 좋다 나쁘다의 뜻은 아니다. 그래서 가짜 감정, 진짜 감정이라기보다 겉감정, 속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은수의 고통은 자신의 속감정을 잘 살피지 못한 데서 시작한다. 알콜 중독 남편을 한결같이 돌보는 겉감정은 언젠가는 한계가 온다. 분노를 꽁꽁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칼부림 있고 난 후 술의 힘을 빌려 폭발한다. 그러나 그 역시 은수 진짜 속감정은 아니다. 음악을 사랑하던 25살의 남편을 해각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것은 남편에 대한 티없는 사랑이 진짜 속감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각을 만난 후 은수는 알콜릭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렇게 속감정은 알기 어렵다. 증오 속에 사랑이 숨어 있기도 하고, 행복 속에 고통이 숨어 있기도 하다.
해각은 새 뿔이 돋아나려고 묵은 뿔이 빠진다는 뜻이다. 묵은 뿔이 빠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야 새 뿔이 난다. 속감정을 대면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묵은 뿔이 빠지지 않으면 새 뿔이 돋아날 수 없듯이 고통의 시간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 새해에는 해각을 만나게 되기를 가만히 기원해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딱 맞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