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다. 어쩌다가 응원 밴드에 들게 되어 큰북과 심벌즈를 담당했다. 음악 선생님이 몇 번 쳐보라고 하더니 두 악기를 내게 맡겼다. 피아노를 잘 쳤던 친구는 어코디언을 맡았는데, 바로 연주를 잘했다.
시내 공설운동장에서 학교 대항 응원이 끝나고 그 친구가 내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화를 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때는 피아노 잘 치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고, 그 부러운 마음만큼 큰북이나 심벌즈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 잘 치는 애가 나를 칭찬하니까 열등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 날의 일이 가끔 생각난다. 이렇게 아무 때나 갑자기 생각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선영의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에는 신경이 예민해지는 정도, 때때로 일어나는 걱정이나 생각, 불안해질 때 하는 행동, 그것들이 일어나는 빈도,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느낌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참거나 조절하려고 하는 것은 성공하기 힘들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나 자책 역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후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용-전념 치료’에서 말하는 대로 그런 감정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그때의 나라면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후회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때 내가 너한테 한 말, 미안하다고는 안 할게. 그런데 이제는 너 원망 안 해. 그때 나는 남편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었어.’ 요즘 인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15회에서 나온 대사다. 5년 전 친하게 지내던 형이 주인공 대신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자 누나(형의 아내)가 주인공 홍두식에게 ‘네가 죽었어야지, 왜 형이 죽어.’라고 했던 말에 대해 사과 아닌 사과를 이렇게 한 것이다.
드라마 작가가 ‘수용’의 의미를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는 그랬어’라는 누나의 말은 그 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태도다. 이제 누나는 홍두식이 죄책감 느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아이에게 홍두식을 삼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모두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허지원 교수 역시 ebs2의 ‘무덤덤한 심리학’ 강의에서 ‘그때는 내가 취약했지’라고 받아들이고, 지금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나 스스로 나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내가 지금 알아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삶이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런 수용이 대오각성하듯이 단번에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할 수 있다. 그럴 때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때 왜 그랬는지 분명하게 알 것, 그리고 지금 내가,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 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