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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간이 무서워질 때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며칠 전 전화기가 울린다. “선생님, 열무김치 담갔는데 갖다드릴게요.” “어머나, 아니에요. 제가 가야죠.” 내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는 이 분은 사실은 열 살 정도 언니뻘 되는 분이다. 집으로 가니, 곧 태어날 손주를 위해 뜨개 인형을 100개 정도 만들었다며 보여주신다.“선생님은 아직 시간이 무서운 거 모르죠? 내 나이 되면 시간이 제일 무서워. 시간 보내느라고 뜨는 거야.” 하시지만, 사실은 봉사 활동도 하고, 공부도 꾸준히 하는 분이다. 오래 기다린 손자라서 기쁜 마음에 열심히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무섭다’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자녀들이 장성해서 분가를 하면 집이 휑해진다. 그만큼 할 일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돈을 벌거나 봉사활동 하기도 쉽지 않다. 친구와 수다 떠는 것으로 일상을 채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잘 살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절실하게 올라오기 때문이다.요즘에는 50세 이상의 중장년들을 위한 사회교육기관이 생겨서 이런 욕구를 많이 채워준다. 이런 곳에서 인생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나이듦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공부와 일상 나누기를 같이 하는 것이 좋다. 정서적 연대감 형성에는 소소한 일상 나누기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방문한 공방도 그런 곳이었다. 주인장은 출자자를 모아 사무실을 얻어 그들이 하고 싶은 강좌와 모임을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오늘 갈비를 많이 쟀어요. 나눠 가실 분!” 하고 밴드에 올리면 “저요”, “저요” 금세 마감된다. 그렇게 공부와 일상 나누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모임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의욕은 없어 보인다.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무모한 것만은 아니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아무래도 버거워진다. 체력도 받쳐주지 못하지만, 나이듦을 수용하는 일이 시급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자식만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배우자와 지혜롭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의연하게 준비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적 통찰과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 과제는 이웃과 함께 할 때 힘을 얻는다.이웃에게 손을 내밀지만 일방적 헌신은 아니다. 지나친 열정과 헌신 뒤에는 인정욕구와 보상심리가 숨어 있다는 것도 알아챈다. 나이가 들면 현실감각이 생겨서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수익과 헌신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게 된다.내게도 시간이 무서워지는 시기가 곧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해온 인문학 공부와 생협 소모임 활동을 밑거름 삼아 지속가능한 ‘공부와 일상’의 이웃공동체를 꿈꾼다. 지적 허영도 쏙 빼고, 거창한 대의도 쏙 빼고, 밀실도 잃지 않으면서 광장도 만들어가고 싶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2020-05-25

살아있는 장례식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정말 화사한 5월이다. 그러나 이런 계절에도 여지없이 죽음은 찾아온다. 떠나는 분들, 남은 가족들 모두 이별의 슬픔과 아쉬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결혼식, 돌잔치, 환갑잔치가 지나고 나면 장례식이라는 인생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이제 나도 부모님들의 부고를 받는 나이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잘 이별할 수 있을까?삶과 이별하는 책 중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1998년 번역된 후 2017년 출간 20주년 기념판이 나올 정도로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스포츠 기자였던 미치 앨봄은 우연히 대학 시절 은사였던 모리 교수를 티비에서 보게 된다. 모리 교수는 루 게릭병에 걸려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미치와 모리 교수는 다시 만나 매주 화요일 인생의 여러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미치는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노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녹음했다. 미치는 이것을 계기로 성공을 향해 달리던 자신의 삶에 큰 변화를 갖게 된다.20여 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여러 대목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던 부분은 모리 교수가 스스로 자신의 장례식을 주도한 대목이다. 모리 교수는 죽은 후에 문상 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가족들을 불러서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있는 장례식’이라고 이름 붙인다.이 책을 읽은 지 15년이 지난 5년 전, 아버지의 살아있는 장례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13년간 투병하시다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93세 고령으로 오랜 간병에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상실감에 매일 힘들어하셨다. 그래도 때마침 자치구에서 자서전 쓰기 지원 사업이 있어 자서전 쓰기를 권유했다. 처음에는 부끄럽기만 한 삶을 어떻게 기록하느냐고 망설였지만 무엇보다 그 많은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집필을 결정하셨다. 실제로 정기적으로 방문해주는 담당자와 지난날을 회고하는 시간 자체가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그러나 그마저도 탈고하시고 나자 삶의 무의미감이 밀려오셨는지 더 쇠약해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삶과의 이별을 준비하시는 것이 역력했다. 위태로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돌아가신 후 아무리 좋은 말로 애도한들 고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모리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오랜 칩거 생활로 못 만났던 분들을 모실 핑계로 출판기념회를 열어 점심을 대접했다. 오신 분들도 정말 반가워하시고 아버지도 어찌나 기뻐하셨는지. 93세 고령에 거동도 불편하셔서 오랫동안 만나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었으니 그냥 돌아가셨다면 그 한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아버지는 출판기념회 후 바로 돌아가셨다. 이렇게 출판기념회는 ‘살아있는 장례식’이 된 셈이다.우리의 보통 정서로는 장례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을 붙이든 ‘살아있는 이별’을 준비해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님이 어렵다면,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때 나 자신이라도.

2020-05-11

조삼모사 고사가 놓친 것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조삼모사는 중국 고대를 배경으로 한 교훈적인 이야기다.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화내자, 순서를 바꾸어 아침에 네 개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내용이다. 이 고사는 주인의 교묘함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보기도 하지만, 주로 원숭이를 조롱하는 이야기로 인용된다. 어차피 똑같이 일곱 개인데, 아침 저녁 순서를 바꿨다고 좋아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고사의 교훈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오다가 최근에 한 가지 일을 겪고 나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지난 4, 5년간 건강이 좋지 않아서 조심하며 살았는데, 정말 다행히도 컨디션이 나아져서 작년 11월부터 운동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스쿼트 10번으로 시작했는데, 한 달만에 60번씩 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겨 스쿼트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실내자전거를 타고 스쿼트를 해보니 잘 되어, 훌라후프를 추가했다. 훌라후프, 실내자전거, 스쿼트 순으로 운동을 했다. 그런데 스쿼트가 잘 안 된다. 몸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고 실내 자전거, 스쿼트, 훌라후프로 순서를 바꿔보았다. 그러자 스쿼트 하기도 쉽고 훌라후프를 더 많이 돌려도 거뜬했다.어떤 사람에게는 이 정도는 운동도 아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런 정도의 운동도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고,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발견까지 한다. 실내 자전거를 타고 스쿼트를 하면 스쿼트가 더 잘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흥미진진했지만, 운동 같지도 않은 훌라후프 때문에 스쿼트 하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마치 과학적 발견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자 조삼모사 고사가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훌라후프를 먼저 돌리느냐 나중에 돌리느냐에 따라 스쿼트 60번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같은 동작이라도 순서를 바꾸면 다르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원숭이 역시 똑같은 도토리 일곱 개라도 아침저녁으로 세 개 네 개 순서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도토리 효용이 다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은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같을 수도 있지만, 원숭이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넓은 생각도 덤으로 얻었다.한때 아침 식사를 안 해야 건강에 좋다는 조식 폐지 주장이 대세인 때도 있었지만, 요즘엔 아침은 황제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한 것 같다. 어쩌면 원숭이들이 일찌감치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사족 하나, 아침을 얼마나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일 1식이나 간헐적 단식을 하면서 아침을 안 먹는 사람도 있고 저녁을 안 먹는 사람도 있다. 획일적으로 어느 방식이 옳다고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20-04-27

문학과 삶의 거리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많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유는 경쟁 없는 삶,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갈망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로의 ‘월든’(1854년)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월든’은 소로가 월든 호수 북쪽 토지에 오두막을 짓고 1845년 7월 4일부터 2년 2개월 간 살았던 이야기를 쓴 책이다. 소로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소로는 ‘인생의 본질적 사실만 직면하기 위해, 인생의 정수를 살기 위해’ 오두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실재’에 입각해서 간소하고 밝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며 소로의 월든 생활을 동경한다.그러나 그의 삶을 따르고 싶다고 해도, 그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잘 따져보아야 한다. 실천에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소로는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루 세 끼의 식사도 필요하다면 한 끼로 줄이고, 백 접시는 다섯 접시로 줄여나가자고 한다. 이런 표현을 문학적 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자기 삶에 적용하려 든다면 문제가 생긴다. 극단적인 금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또 소로는 10센트밖에 없는 상태에서 할로웬 농장을 사려다 농장 주인이 취소하면서 위약금으로 10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거절한 후 이런 사색을 한다. “내가 10센트를 가진 것인지, 농장을 가진 것인지, 10달러를 가진 것인지 또는 그것들 모두를 소유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10달러도 농장도 받지 않았다. 이미 농장 경영의 꿈은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였으니까” 이 말은 궤변처럼 들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10센트로 농장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종자는 샀으니 농장 경영의 꿈을 이루었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소로는 농사짓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농사짓는 젊은이들을 토지의 노예라고 하면서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소로는 월든에서 노동을 최소화하고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이런 생활이 삶의 정수요, 자연의 섭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읽을 근거는 없다.생태계 파괴가 심각하니 자연의 섭리에 따르자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해보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농사일에 지친 이에게 밭은 어미의 자궁과 같다는 말이 무슨 위안을 줄 것이며, 하늘에 나는 새가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새처럼 살 수도 없다.‘월든’이라는 책은 자연을 묘사한 수필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크지만, 월든에서의 삶까지 엄청난 가치를 둘 일인지는 잘 따져보아야 한다. 집필을 위한 한시적 칩거 생활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섣불리 실천에 옮겼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일이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 잘 살펴보고 실행하는 것이 좋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좋아보여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04-13

디테일을 알아채면 할 수 있는 것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살다 보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특정한 관점을 가지고 접근할 때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작품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큰 사건과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어떤 입장에 서서 작품에 접근한다. 그러나 작품은 디테일에서 완성된다.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로 불릴 정도로 디테일에 신경 쓰는 이유는 디테일에서 작품의 의미가 풍부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감상의 두 입장을 소개했다. 아무리 굶어도 양심을 지켰어야 한다는 관점은 보수적 관점이고, 생계형 범죄이니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은 진보적 관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관점만으로 작품에 다가가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이 작품을 학생들과 같이 소리 내어 읽다가 하인이 여드름을 만지는 장면이 네 번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쪽짜리 짧은 단편에서 여드름이 네 번이나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이 작품을 읽으며 여드름에 주목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여러 번 읽으며 참고 문헌을 찾다가 ‘유쾌한 소설로서의 라쇼몽’이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이 어두침침한 소설이 유쾌하다니 깜짝 놀랐지만, 논문의 저자는 이 여드름을 삶의 의지로 보고 그것을 유쾌함이라고 표현한 것이었다.아쿠다카와는 이모 손에서 자랐는데,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당대 규범에 충실했던 이모의 반대로 사랑하던 여자와 헤어지고 심한 좌절에서 막 벗어나던 시기였다고 한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 속에서나마 더 이상 사회 규범에 짓눌려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는지도 모른다.메시지 전달에는 언어가 7% 차지하고 사소한 행동이나 태도, 표정 등의 비언어적 요소가 93%로 훨씬 더 많이 작용한다는 메라비언 법칙이 있다. 상대방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표정이나 사소한 행동, 태도를 참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법칙을 작품을 이해할 때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그러니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의 대사나 사건뿐 아니라 디테일한 설정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밤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만나는 시간이다. 시체가 늘비한 라쇼몽 누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할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하인은 여드름을 계속 만진다. 이런 디테일을 알아채면 하인의 심리 변화와 행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작품에서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 작가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관점이 달라도 그런 발견은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다.하인의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와 같은 토론만으로는 작가가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 상황의 디테일을 알아채고 공유하다 보면, ‘너는 어느 편이냐’고 관점을 묻는 것보다 우리는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2020-03-30

관점에 대하여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직업 상 읽기 쓰기 경험을 많이 하는데, 학생들과 텍스트를 같이 읽거나 그들이 쓴 감상문을 보다 보면, 학생들에게 관점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수련을 꿈꾸었다’는 수필을 같이 읽을 때다. 작가 김선우가 캄보디아에 갔을 때 소년이 구걸하지 않고 꽃을 파는 모습을 보고 쓴 글이다. 가난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면서 그 소년을 더러운 물에서 피는 수련에 비유하는 내용이다.이 글을 보고 어떤 학생은 작가의 감동에 감정 이입하여 캄보디아 소년의 순수함에 매료된다. 그러나 어떤 학생은 수련이 과연 얼마나 더러운 곳에서 피는지 사실을 확인하려 든다. 어떤 학생은 구걸을 금지한 캄보디아 정책 때문에 소년이 꽃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들며 감동을 거부한다. 어떤 학생은 사실과는 별개로 작가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동한다. 이렇게 같은 자료를 보아도 반응이 다른데, 그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은 오랜 가뭄으로 주인집에서 쫓겨난 하인이 라쇼몽에서 노파를 만난 후 도둑으로 변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내용이다. 이 단편을 읽고 어떤 학생은 가난을 구제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감상문을 쓰고, 어떤 학생은 하인의 부도덕함을 심판하는 글을 쓴다. 이것 역시 작품을 보는 관점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런데 학생들의 그런 관점은 평소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수련이 얼마나 더러운 물에서 피는지 궁금해 하는 학생은 사물을 볼 때 사실을 중시하는 평소 관점이 기저에 깔려 있다. 캄보디아의 구걸 금지 정책은 경험하지 않으면 관심 갖기 힘든 정보이니, 작품을 볼 때 자신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작품을 보면서 어떤 점이 눈에 띄는 것은 그 부분을 일부러 골랐다기보다는 자신의 관심과 경험에 의해서 그것들이 보인 것이다.관점은 자기가 속한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형성된다. 동양인지 서양인지, 한국인지 중국인지, 상위 10%에 속하는지 아닌지, 부모가 엄격한지 개방적인지에 따라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심지어 여러 과학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진보냐 보수냐 하는 정치적 관점의 경우 타고난 뇌 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도 한다. 그러니 관점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렵다.그렇다고 관점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관점을 바꿀거야 해서 바꿀 수는 없지만, 절박한 상황이 되면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인생의 큰 시련을 겪으면 종교를 갖게 되거나 개종을 하기도 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자녀가 있으면 부모도 진보 쪽으로 기울기도 한다.그러나 그런 경험 역시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이 자신의 관점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같이 읽기와 글쓰기가 적절한 도구다.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퇴고를 거듭하다 보면 관점에 변화가 오기도 한다.

2020-03-16

고전 읽기의 괴로움과 즐거움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어떤 사람은 글을 쓰기 전에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플라톤을 한 시간 꼭 읽는다고 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요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관찰력과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고전의 가치를 새삼 깨닫던 참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전을 선뜻 손에 잡기는 힘들다. 어렵게 손에 들었어도 한두 장 읽다가 책장을 덮는 경우도 많다. 저자의 정밀한 사유를 따라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읽고 싶은 부분만 읽고 지나가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문서를 쓴 오선민 씨도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미 아는 내용만 읽고, 낯설거나 불편한 문장은 자기도 모르게 지나쳤다고 한다.고전 읽기가 어려운 것은 나의 사유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그 고전이 나온 시대와 문화가 현재와 많이 다르다는 점도 장애 요소가 된다. 사람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전혀 접해보지 않은 문화를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많고, 아예 읽지도 않고 스쳐지나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고전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기 전에 괴로움이 먼저 들이닥친다.그럼에도 고전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어쩌다 만난 한 문장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그 괴로움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해질녘 마을 종탑이 석양에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나서 종탑 뒤에 숨은 글자를 발견한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그 문장을 처음에는 읽기 어렵지만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그 기쁨의 한 조각을 나눠 갖는 듯한 기분이 든다.이렇듯 작가가 묘사한 장면을 눈에 또렷하게 그릴 수 있게 되면 즐거워진다. 어떻게 하면 또렷하게 그릴 수 있을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읽으면 된다. 처음에는 한 문장, 한 페이지만 읽어도 좋으니 단숨에 읽으려 들지 말고 책갈피를 들어 언제든지 멈출 준비를 하자.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보기도 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해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는 것도 더욱 선명해진다.그러니 고전을 읽을 때는 한 권을 1년을 잡고 천천히 읽어보면 좋겠다. 70세에 하루 영어 한 문장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한 분이 84세에는 외국인 관광 안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뚝심으로 고전을 읽어가 보자.몇 년 전 동네 주민센터에서 이웃과 함께 논어를 1년 간 읽은 적이 있다.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삶에 적용해보는 즐거움이 쏠쏠했다.고전을 읽는 것은 괴롭지만, 이렇게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느닷없는 순간에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논어’에 손이 춤추고 발이 뛴다는 말이 있다. 고전에서 얻는 즐거움은 사람을 춤추게 한다.

202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