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요정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백합이 바람에 한들거리는 골짜기에서./ 그에게 왜 그렇게 자그마한가 물었지요. / 그리고 왜 키가 자라지 않느냐고요. // 꼬마 요정은 얼굴을 찡그리곤, 눈을 들어 / 나를 뚫어지게 보고 또 보는 것이었어요./ “나에겐 이 정도의 크기가 알맞아.” 그가 말했지요./ “너에겐 너 정도의 크기가 알맞듯이!” - 존 켄드릭 뱅스
‘꼬마 요정’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20년 전 큰애에게 사준 동시집 ‘동생의 비밀’에 나오는 시다. 며칠 전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을 살자는 주장을 듣다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은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를 뿐 우열은 없다고 한다. 자신의 그릇 크기에 알맞게 사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자신의 그릇 크기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서 불행이 시작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도 하고 지당하기만 한 말이라고 외면하기 쉽다. 동의한다 하더라도 내 그릇이 어떤지 잘 모르고 삶에 적용하기도 막막하다. 20년 전 내가 그랬듯이.
그러나 지금, 저 시를 대하는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내게 알맞은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알맞음이나 적정함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극대화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다. 돈이나 지위를 극대화하려는 마음은 애당초 많지 않았기에 아쉬움도 별로 없지만, 학문의 길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은 아직도 불쑥불쑥 뒷머리를 잡아당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나간 선택을 아쉬워할 것인가?
사실 알맞음이나 적정함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알맞음은 시행착오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요한 장소를 찾아 명상하는 것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자신에게 알맞음을 찾아가는 방법이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한 번에 찾아지지 않는다.
올해는 꼭 매주 공부 모임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운 좋게도 딱 맞는 인원이 모여서 몇 달째 매주 공부를 하고 있다. 첫 주제로 인지심리학 관련 책을 선택했다. 지난주에는 1년 후에 내게 다가올 새로운 경험을 상상해보고, 그 경험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이런 작업은, 현재 내게 불편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자각으로 고통을 줄여준다는 치료적 효과도 있지만, 1년 후 내 삶을 내게 알맞게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보편적 효과도 있다.
대학 재직 때는 우수 강사로 뽑히는 동료가 부럽기도 하고, 잘 팔리는 인문학 저술가를 보면 남몰래 열등감이 폭발하기도 했다. 페북에 좋아요가 몇백 개씩 달리는 인플루언서 페친도 나의 무능을 자극했다. 매주 공부를 하면서 내가 못났기 때문에 그것들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이 내게 알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모든 구성원이 서로 격려하면서 공부하고 함께 성장하는 작은 공동체적 방식이 내게 알맞은 크기인가보다 하는 발견도 덤으로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