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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등록일 2021-08-03 18:21 게재일 2021-08-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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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경북대 교수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소원 한두 가지는 있는 법. 도선사 명부전 오르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거기 올려진 무수한 작은 돌멩이를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간절한 소원을 담아 올려놓은 돌멩이들. 염천의 작열(炸裂)하는 태양 아래 온몸을 드러낸 채 천둥벌거숭이로 소원을 갈구하는 인간군상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자처럼 용감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연꽃처럼 깨끗했던 청춘의 날들에 내 소원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신혼여행 길에서 맞은 동해 일출을 보면서 나는 소원을 간절하게 희구했다. 한 주에 한 번꼴로 일출을 볼 수 있다던 커피 상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졌던 그 날의 기막힌 일출. 고교시절 배운 의유당의 ‘동명일기’가 절로 떠올랐던 장관(壯觀)의 일출!

새털처럼 수많았던 날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동안에도 내게는 소원이 있었다.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서 아, 역시 조폭이 멋지네, 하고 생각했다. 새파랗던 20대에 시인이 되지 못했음을 한탄하던 백면서생이 어느덧 물리적 폭력을 열망하는 30대가 된 것이다. 40대에 우연히 마주친 트럭 운전사의 고독한 얼굴에서 읽히는 자유인의 표상이 흐뭇해서 1만2천킬로미터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트럭 운전사가 돼보리라 하는 꿈도 있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 대통령 한답시고 들먹거리는 시점이 오자 소원도 모습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을 바꿔보자! 세상을 바꿀 힘은 글에 있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50대에 내가 품은 소원은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문필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은 공책을 구해서 날마다 소원을 만년필로 정성껏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간다. 아직도 내게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예전의 소원과 많이 다른 것이다.

조직 폭력배의 멋과 낭만도 아니고, 트럭 운전사의 자유분방함도 아니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바람도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며, 내게 주어진 배역은 소소한 단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 먼저 바꾸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자명한 이치도 깨달았던 때문이다. 아니,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은 채 굴러갈 것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이 허망한 노릇이리라. 그것이 사적(私的)인 소소한 것이든, 만고에 길이 빛날 장쾌한 것이든, 각자(各自)의 소원에는 고유한 빛깔과 향기가 있다. 소원은 지극히 바라는 꿈 같은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으되 죽어버린 사람은 꿈이 없다. 그래서다. 면담을 신청한 학생들에게 꿈을 묻는 까닭은 거기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바라는 직장이나 회사를 말한다. 배운 것이 ‘장래희망’이니,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이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서역정토(西域淨土)로 먼 길 떠난 모친 송별하는 길에서 만난 숱한 돌멩이에 새겨진 꿈을 보면서 기원한다. ‘부디 그대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환한 햇살 아래 능소화(凌<9704>花)와 비비추, 어여쁘게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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