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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웅 홍범도 장군의 재평가

등록일 2021-08-25 19:56 게재일 2021-08-2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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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광복 76주년 홍범도(1868∼1943) 장군이 먼 이국땅에서 귀환하였다. 그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라다를 떠나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셨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국땅에서 고생하다 돌아가시고 사후 78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만주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는 영웅적인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그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는데 정작 고국은 그를 외면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고 영면에 들었다.

평양 출신 홍범도 장군은 머슴살이하는 부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산 후유증으로 모친은 사망하고 부친마저 그가 9살 때 돌아가셨다. 그도 머슴살이를 하다 190㎝의 장대한 기골로 조선군 나팔수로 선발되었다. 그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 비구니스님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2007년 필자도 금강산 신계사를 다녀왔지만 그가 거쳐 간 사찰임은 전혀 몰랐다. 10년간 포수 생활로 그는 총 솜씨가 뛰어나고 산을 잘 타 ‘나르는 홍범도’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 후 그는 의병 전쟁에 참전하여 주재소 습격 등 많은 전공을 세운다.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부인에게 귀환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순절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대한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75사단의 월강 추월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175명을 사살하게 된다. 물론 이 전투는 홍범도 장군 단독 전투가 아닌 합세한 독립군 연합의 승리이다.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아군 장교 1명과 사병 3명만 희생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이 전과에 관해 일본은 인정치 않는다. 이 전투의 승리는 그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승리로 직결되고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 주었다.

일제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에서 대대적인 독립 운동가 색출 작전을 벌인다. 그는 인근 연해주로 긴급 피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은 그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권총 한 정과 군복을 선사했다. 러시아는 그에게 작은 국영농장 콜호즈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고려인 약 18만만 명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항일 영웅 홍범도 역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디아스포라 신세가 된다. 그는 고려인의 도움으로 극장 수위 생활을 하다 해방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장군이 고국에 안장되고 최고 훈장이 추서된 것은 늦으나마 무척 다행한 일이다. 북한이 뒤 늦게 홍범도 장군을 평양에 모시려 하였으나 카자흐스탄 당국과 현지 고려인들이 거부하였다. 북한 당국이 항일 혁명의 역사는 온통 김일성 항일 투쟁역사로만 국한했던 편협한 결과이다. 일부에서 홍범도의 공산당 입당 경력과 ‘자유시 사변’시의 행적을 비판하지만 그의 봉오동 전투 공적까지 폄하해선 안 된다. 이는 철 지난 이념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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