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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끼빠빠 합시다

등록일 2021-08-24 19:37 게재일 2021-08-2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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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다가 후보에서 사퇴한 음식평론가 황교익 씨. /연합뉴스

‘낄끼빠빠’라는 말은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자”라는 뜻이다. ‘낄끼빠빠’만 잘 해도 어디 가서 욕먹을 일 없다. 사회생활, 특히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게 이 ‘낄끼빠빠’의 지혜다. 학생들 술 마시러 가는 데 꼭 껴서 같이 놀려는 교수님, 친구 커플들 여행가는 데 같이 놀러가겠다는 모태솔로, 결혼식장에 신부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 하객, 주인공은 가만히 있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고 오버하는 조연 배우… ‘낄끼빠빠’는 곧 눈치가 있고 없음의 문제다. 염치의 척도이기도 하다.

물론 나라고 ‘낄끼빠빠’ 잘 하며 산 건 아니다. 학부 시절 학과에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애는 나 아닌 다른 녀석에게 이미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마음을 얻으려고 설쳐댔다. 둘이 놀고 싶지만 학과에 소문 날까봐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로 “병철아 너도 같이 놀자” 한 건데, 나는 혹시나 싶어 정말 적극적으로 열심히 놀았다.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지금 돌아봐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간강사가 돼서도 마찬가지다. 재작년 수업했던 4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겠다고 해 나도 마침 제주도에 낚시 가는 일정이 있어서, 학생들에게 숙소와 렌터카를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학비 버느라 아르바이트하며 아끼고 모아 여행 경비를 마련했을 텐데, 졸업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내 역할은 딱 거기까지여야 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 운전기사를 자청해서는 학생들의 여행 일정 내내 동행했다. 자기들끼리 찍는 기념사진에도 등장하고, 저녁마다 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셨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미안한 마음 감출 길 없다.

그렇다고 끼지 말아야 할 데 끼고, 빠져야 할 데 안 빠지기만 한 건 아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여러 군데 문예지와 문학 단체 등에서 편집위원이나 임원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 내 경력과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다. 어떤 형태든 ‘감투’라는 걸 쓰면 사람이 우스꽝스러워진다는 게 내가 가진 아름다운 편견이다. 그 편견이 나를 나로 살게 해준다. 나는 아직도 ‘글은 혼자 쓰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낄끼빠빠’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난 얼마간 시끄러웠다. 김연경 선수에게 무례한 질문과 감사 인사를 강요한 배구협회 유애자 홍보부위원장이 논란이 됐다. 여자 배구선수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받는 선수에게 “포상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를 계속 묻더니 배구연맹 총재, 배구협회 회장, 금융회사 회장 이름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러고는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하라고 강요했다. 그야말로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이다. 윗선에 잘 보여 출세의 동앗줄 잡으려는 이들의 과잉충성은 언제쯤 사라질까? 익명으로 돈만 보내고 생색은 내지 않는 성숙한 후원 의식은 언제쯤 자리 잡을까?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다가 당내 계파 간 갈등으로 번져 후보 사퇴한 음식평론가 황교익씨 소동도 ‘낄끼빠빠’ 문제다. 후보로서 자격을 갖추고 절차를 준수했다 하더라도 유력 대권후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신의 지원서 제출이 임명권자에게 일종의 ‘청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관광공사 사장으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다고 했는데, 아무리 의욕이 있고, 또 잘 해낼 능력이 있더라도 더 의욕 있고 더 잘 할 사람에게 양보했어야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9년 강릉국제영화제 구경 갔을 때의 일이다. 개막식에 앞서 레드카펫 행사가 진행됐다. 맨 처음 안성기 배우가 등장해 환호성이 컸는데, 곧이어 국회의원이 레드카펫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고요속의 워킹이 시작되었다. 호텔 사장, 부구청장, 도의회 의원들이 줄줄이 오르자 정말이지 박수는커녕 야유가 쏟아졌다. 이건 뭐 레드카펫이 아니라 수치스런 조리돌림이 되어갈 무렵, 당시 드라마 ‘스카이캐슬’로 인기 절정이던 김서형 배우가 등장해 죽어가던 레드카펫을 겨우 살렸다. 빛이 난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축제에 정치인, 기업가, 지역유지들이 왜 얼굴을 들이미는 지 모르겠다. 과잉의전은 언제쯤 사라질까? 레드카펫 행사 제안을 받더라도 내가 낄 데가 아니라며 거절할 줄 아는 눈치를 높으신 분들에게 기대해볼 수는 없는 걸까? 제발 ‘낄끼빠빠’ 좀 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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