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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등록일 2021-08-22 19:15 게재일 2021-08-2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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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께 시집에 사인을 받았다.

자두가 맛있는 계절이다. 물렁한 것보다 단단한 식감이 취향이라 과일가게에 가면 주먹만 한 자두를 골라 바알간 부분 한 입 깨물어보고 산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번진다.

어릴 적 내 고향 안동에서는 자두를 자두라 부르지 않았다. 우리 집 담장에도 이웃집 미정이네 마당에도 한 그루씩 있던 추리나무, 누구보다 봄을 부지런히 준비해 잎보다 먼저 하얀 꽃을 피웠다. 후루룩 봄바람 따라 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꽃잎 대신 초록색의 열매를 내민다. 새끼손톱만 하던 초록색이 하루하루 옅어지다 연두색이 될 즈음 우린 나무를 흔들어 추리를 따먹었다. 한꺼번에 나무를 터는 게 아니라 올려다보고 젤 굵은 것을 골라 하루에 몇 개씩 골라 먹었다. 빨갛게 다 익을 즈음엔 몇 개 달려 있지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만으로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우리 동네에서는 추리였던 과일이 자두라는 걸 포항으로 전학을 오며 알았다. 포항이 고향인 남편은 자두를 애추라 불렀다. 애추를 따먹다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가물탔다고 했다. 가물타다, 진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한쪽 발에 반깁스를 하고 출근했다. 발을 잘 못 디뎌 접질렸다며 한동안 절룩거려야 한다니 여름에 고생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출근 전에 남편이 ‘가물탔다’라고 해서 웃었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발목 접질렸다는 말이라고 해도 듣느니 처음이라고 포항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 모른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 단톡방에 물어도 안 쓰는 말이라니 나만 아는 말이었나?

저녁에 남편에게 가물탔다라는 말을 아무도 모르더라고 하니, 핸드폰을 펴서 한참을 찾더니 글 한 편을 보여주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모아 명사, 동사, 형용사로 나눠 뜻풀이를 자세히 해 놓았다. 한쪽 발로 뛰기는 깨금뛰기, 그저께는 아~레, 인지 가 온나는 지금 가져오라는 뜻이다. 도련님은 대렴, 빻은 가루는 채가 아니라 얼기미로 곱게 치고, 방문에 구멍이 나면 한지 대신 문조오를 발라야 한다. 많은 사투리 사이에 가물탔다도 껴 있다.

옆에서 큰아이가 혼자 하기 제일 힘든 일이 갈비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는 일이라니 누구든 ‘비우만 넙적하면 된다’고 남편이 답한다. 아들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고 하니, 문맥상 얼굴에 철판 깔면 된다는 뜻 같은데 비우가 무엇인지 넓적하면 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단다. 그렇지, 뜻만 통하면 되지 정확한 의미까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여름 방학 특강 마지막 날, 안도현 시인의 시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 안동 옆 동네인 예천에서 태어난 시인도 자두를 추리라고 불렀다고 썼다. 포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문제로 내었더니 처음 듣는 말이라 전혀 떠올리지 못해 ㅊ, ㄹ 초성까지 힌트로 주어도 온갖 모음을 다 갖다 붙이고 나서야 정답을 맞혔다. 자두가 추리라니 신기하고 재밌단다.

수업을 끝내고 핸드폰을 켜자 울릉도에 살러 간 친구의 문자가 당도해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신간을 읽다가 ‘안동’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내 생각이 났다며 시 전문을 꾹꾹 눌러 적어 보냈다. 시 속에 시인의 어머니는 매화로 피고, 누이에 대한 시를 적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지만, 집 나간 아버지가 30년 넘게 돌아오지 않아 누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그래서 누이에 대한 시는 한 줄도 시인에게 오지 못 한 채 안동시 태화동 어머니 아파트로 저녁은 절룩거리며 오고 있다고 읊조렸다.

문자를 읽으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포항에 어느 교실에서 내가 안도현의 시를 아이들 입에 떠먹이는 순간에 친구는 바다 건너 울릉도 학교 관사에 엎드려 같은 시인의 시를 읽다니, 그것도 많은 시 중에 안동을 읽다니. 혹시 우리 교실에 CCTV 달아 놓고 지켜본 것이냐고 농담을 건네니 친구도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고향 떠나와 포항에 산 지 40년이다. 안동에 살았던 시간은 겨우 14년, 그 안동이 이런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 내게 보내준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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