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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면성'에 대하여

‘내면성’은 독일어로는 ‘인너리히카이트(Innerlichkeit)’, 이를 영어로 옮기면, ‘인테이어리티(interiority)’, 한자로 ‘內面性’이다. 문학의 ‘내면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날들이다. 어찌 되었든 번역어처럼 느껴지건만, 그럼에도 나는 이 말에 어떤 밀착감을 느낀다. 요즘처럼 이 문제가 심각하게 생각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근대문학, 곧 현대문학은 내면성의 문학이다. 이 내면성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에서 그 의미가 잘 개진되어 있다. 거기서 이 말은 단순히 심리의 안쪽 측면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말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주체의 존재 방식, 주관적 진리, 정신적 고뇌”와 같은 의미를 띤다. 그는 말한다. 옛날, 저 그리스적 고대에 있어 사람들은 서로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 그네들의 삶은 일종의 ‘원환성(Rundheit, roundness)’을 뗬다. 원환적이라는 것은 둥그렇다는 것, 비유적으로 서로 공동체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어감을 선사한다. 완결되어 있고,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뜻을 갖는 ‘게쉴로센하이트(Geschlossenheit)’는 그 개념적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루카치는 말하는데, 공동의, 공통의 가치를 나누어 갖지 않는다. 특히 ‘문제적 개인(das problematische individiuum, problematic individual)’은 공동의 가치라 믿어지는 것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은 자다. 현대사회에서 이 공동의 가치란 한갓 환상이거나 거짓된 믿음, 속물적·속류적 믿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쉬운 공동의 가치를 믿지 않는 자는 이 ‘공동 환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질문, 일제강점기에 작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을, 최근 들어 더 빈번하게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참 많이도 힘들었을 것이다.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일본은 전쟁에서 늘 승리하고, 그러니 조선이 해방될 날은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권력의 힘에 떠받쳐진 잘못된 논리, ‘거짓된 진리’가 ‘백주대낮’을 지배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쓸 수도 없다. 직접적인 정치적 폭력이 일차적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대중의 압력이다. 방향성 없는, 잃은 대중의 심리는 요원한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다른 말을 하는 자를 믿지 않는다. 미쳤다고 한다. 이름하여 채만식 소설 ‘소망(少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젊은데도 벌써 미쳐 버렸다. 그는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광화문 한복판에 나가 서서 너무 춥다고 한다. 오늘날 문학의 내면성은 이 춥다는 외침조차도 잃어버린 단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숱한 말들을 쏟아내지만 진짜 내면성의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어쩌면 지독하게 내면적인 작가들은 차라리 발표할 말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감추고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아니, 이런 내면성은 차라리 축조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침묵에 가까운, 진정한 말을 생각한다. 꿈꾼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덜 외로웠던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30

잘 달릴수록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힘이 세질수록 책임도 커진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거인의 힘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무심코 흔든 팔에 크게 다칠 수도 있다. 학교 총기 사고가 잦은 미국에서 10대 청소년의 총기 소지 허용 여부가 논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책임을 크게 진 좋은 사례다. 1년에 1만 섬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자손들에게 남겼다.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만 입게 했다. 며느리에게도 가훈을 몸으로 받아들일 시간을 준 것이다. 집안 어른이 잔소리를 한마디 하면, 그것이 전달될 때는 두 마디, 세 마디로 늘어난다. 시장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주무관에게는 엄청난 압력이 될 수 있다. 시장이 의논하려고 한마디 하면 그것을 결정 사항으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자리가 높을수록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하물며 대통령이 하는 말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이 무겁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의견이 64%였다. 잘못하고 있다는 의견은 21%에 불과했다. 덩달아 정당 지지도도 민주당이 43%, 국민의힘은 23%로 절반에 불과했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에서만 국민의힘(41%)이 민주당(27%)을 앞섰을 뿐, 나머지 모든 시·도에서는 모두 민주당에 밀렸다. 부산·경남도 민주당이 우위였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홈페이지 참조) 내년 지방선거 결과가 눈에 보인다. 그러나 ‘부자 몸조심’이란 말이 있다. ‘잘 나갈 때’, ‘가진 게 많을 때’ 절제해야 한다. 민주당의 기세는 국민의힘 덕분이다. 민주당이 잘했다기보다 국민의힘이 잘못한 탓이다.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걸 알아서인지, 이 대통령은 내년 선거에 전력을 다한다. 그는 부산에 해양수산부를 연내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부산 시장 출마가 유력한 전재수 의원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추경으로 전국민 소비쿠폰을 뿌린다. 그렇지만 정권을 장악했다는 자만심을 감추지 못한다. 언행이 거칠다. 민주당은 지난주 국회의 핵심 상임위원장을 일방적으로 선출했다. 국회 상임위원장은 야당과 협의해 온 전례를 무시했다. 국회의장과 나누어 맡던 법사위원장도 일방적으로 차지했다. 예결위원장, 문체위원장, 운영위원장도 선출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증인·참고인을 한 명도 부르지 않고 끝냈다. 야당이야 뭐라건 이번 주에 임명할 태세다. 상법·양곡관리법·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을 포함해 40개 법안을 모두 밀어붙일 예정이다.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다. 대통령도 같은 당이다. 거칠 것이 없다. 이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를 대통령실에 초청한 자리에서 국민의힘 김용태 비대위원장에게 “젊은 비대위원장을 털면 안 나올 것 같냐”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철회 요청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리 젊어도 국민의힘의 대표 자격이다. 대통령 말은 야당 의원이 하는 말과 다르다. ‘제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막강한 권력자다. “너도 한번 당해 볼래”라는 위협으로 들 릴 수밖에 없다. 김민석 후보자는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을 장관으로 추천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국민 검증 받으실 좋은 기회 얻으시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과 비슷한 뉘앙스다. ‘너도 털릴 각오 해라’라고 주 의원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친다. 주 의원도 그렇게 항의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27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부동산 대출 규제 방안을 “대통령실 대책이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실과 금융위가 별개의 정부인가. 취임하는 순간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는 모두 이 대통령의 책임이다. 역대 대통령의 지지도를 보면 모두 취임 이후 내리막이다. 취임 직후가 가장 인기를 누렸다. 내리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추락 정도를 얼마나 늦추느냐가 관건이다. 원인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었다. 실언과 실책으로 점수를 잃었다. 경계할 것은 야당이 아니다. 자신의 오만과 무절제가 적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6-29

훌륭한 노인 되기

조금 불쾌한 일이 있었다. 프로듀싱 하고 있는 음원이 있어서 처음 가 보는 스튜디오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스튜디오 사장님께 주차를 문의드렸고, 사장님은 건물 앞에 공간이 비어있다면 주차를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건물 앞에는 내 차가 겨우 들어갈 만 한 협소한 공간이 있었고 나는 여러 번 차를 왔다 갔다 하며 힘겹게 주차를 마쳤다. 그런데 내 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따가운 시선을 보내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차에서 내리려고 안전벨트를 풀자마자 노인은 다가와 짜증스럽게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왜 여기다가 차를 대, 차 빼(요).” 내가 ‘요’라는 글자를 괄호 안에 넣은 이유는 그 ‘요’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반말과 존댓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퉁명스러운 말에 나도 기분이 상했다. 스튜디오 사장님이 여기 대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거기는 세입자고, 내가 건물주요. 빨리 차 빼(요).” 건물주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짜증났고 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명령조의 말도 짜증났는데 거기에 노인은 다시 왔다 갔다 하며 차를 빼고 있는 내게 혼잣말을 가장한 훈계와 재촉을 뱉어대고 있었다. 차를 다른 곳에 주차하고 돌아와 여전히 거기서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인에게 선생님께서 건물주건 하느님이건 내가 반말과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으니 예의를 갖추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을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내 뒤통수를 향해 노인은 뭐라 뭐라 소리를 질러 댔는데 굳이 귀기울여 듣지는 않았고,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아마 그 노인은 내가 스튜디오를 떠난 뒤 스튜디오 사장님을 찾아가 내 이야기를 하며 버르장머리니 싹수니 하는 말을 꺼내며 욕을 해댔을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장유유서’라는 말이 존재하고 연장자에 대한 공경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많은 연장자들이 공경을 복종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공경이라 함은 존경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공손한 태도일 것이다. 연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존경하기 힘든 언행 앞에서마저 깍듯이 대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공경이라는 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좀 더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면 상대의 무례마저 너그러이 품어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정도의 인간은 되지 못한다. 내가 갖고 있는 아량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 것들을 아끼고 아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중요한 사람들을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처지이다. 하필 그런 내가 예의 없는 노인을 만났고, 노인 입장에서는 하필 간장종지 정도의 그릇을 가진 나를 만나는 바람에 서로가 그 날의 상당부분을 불쾌한 마음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여러모로 못난 구석이 많은 나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먼저 와서 나보다 먼저 삶을 일구고 산 사람들을 공경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들이 일군 세상이 비록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어쨌거나 그곳에서 내가 자랐고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 속에서 가르침을 얻으며 부족하게나마 성장하여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를 차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가급적이면 앞선 세대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그런 마음들이 가치 있는 것이라 가르치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존경하는 마음과 공경하는 태도를 받아내기가 비교적 쉬운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이 되어야 하고 산업역군이 되어야 하며 거기다 고매한 인품과 현재의 훌륭한 사회적 지위까지 갖추어야 받아낼 수 있는 것들을 이 나라에서는 아주 약간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 아니 그저 무례하지 않게 대하는 것 정도로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만 배웠지, 어른이 된 다음에도 훌륭한 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은 배워본 적이 없었다.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말은 있는데 착하고 건강하게 잘 늙으라는 말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노인을 규정하는 연령대를 상향시키는 논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쨌거나 사회는 급격하게 고령화되고 평균수명은 늘어나 노인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아마 인생의 순간순간 좋은 인간인 상태를 유지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나이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지 않을까. /강백수(시인)

2025-06-29

좋은 사람들

당신은 당신을 기꺼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흔한 수사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은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 더 적극적인 선의는 대체 무엇일까? 이렇듯 막상 좋은 사람의 기준을 정하려면 막막해진다. ‘좋음’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해 보려는 순간, 자신을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쁜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신은 머리에 뿔이 돋았거나 사악한 웃음을 짓는 만화 속 악당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혹은 등 뒤로 욕망을 감춘 음흉한 얼굴, 삐딱하게 구부러진 자세 같은 것들을 조합하며 어디서 본 듯한 악인의 상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 매일 마주치는 동료 모습 속에서 그 단서를 발견하는 날이 생긴다. 점심 메뉴를 독단적으로 정하는 직장 상사에게서 ‘사실은 이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는 순간도 찾아온다. 재밌는 것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일도 꽤 어렵다는 점이다. 타인을 선악의 기준에 두는 것보다 나 자신을 그 안에 놓는 것이 훨씬 더 껄끄럽다. 선과 악의 경계는 언제나 흐릿하고 상황과 입장에 따라 흔들리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서사와 당위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므로, 나 자신을 정의하는 일은 언제나 유보되고 만다. 미국 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는 이러한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 ‘로드’는 문명이 붕괴한 세계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남쪽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을 그린다. 실제로 매카시에게는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이 있었다. 아들이 아홉 살이던 해 그는 아들과 여행을 떠났다. 호텔 방에서 아이는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가 본 세계는 폐허였다. 치솟는 불길에 모든 것이 전소된 세상과 자신의 옆에서 잠든 아들. 소설 ‘로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소설 내부에서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불’이다. 그들이 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설정을 넘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지점으로 작동한다. 추위와 어둠 속을 걷는 이들에게 불은 실제로도 생존의 수단이다. 동시에 이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는 남자의 말은 단순한 생존 의지를 넘어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어떠한 신념에 가깝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고 약탈하며 인간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을 마주할 때면 남자는 망설이지 않는다. “내 일은 널 지키는 거야. 하나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 너한테 손을 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죽일 거야.” 그러자 소년은 묻는다.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러한 질문에 남자는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소년에게 남자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말은 실제로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보증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소년은 계속 질문한다. 이유는 하나다. 그 말이 진실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다. 선함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어야만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끔찍한 소식이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선언은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 냉소하는 편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먹구름에 가려져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건 각자의 마음속에 남은 작은 불이다. 그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야. 그것은 불을 최초로 발견한 인간이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을지도 모를, 인류가 끝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최후의 주문인지도 모른다. 분노와 단죄가 팽팽하게 맞서며 서로를 잠식하는 시대에 그 말은 더 이상 증명되지 않는 가치이며 동시에 증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제 당신은 기꺼이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그 머뭇거림이야말로 당신을 선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으로 만든다. 어렵지만 간절히 바라는 일이지 않은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다(안희연, ‘불이 있었다’)”라는 시인의 문장처럼. /문은강(소설가)

2025-06-29

“그런 건 없는 줄 알지만”

하필 거기서 발을 접질릴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매일 걸어서 다니던 길이었다고 아는 길이었다고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언제 다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수없이 내치던 당신의 등이 떠올랐다 어디로 쏟아져야 하는 걸까 나는 결정을 미루는 사이 발목은 사라지고 택시를 불렀다 누구도 생각나지 않아서 마음을 놓아도 되는 사람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런 건 없는 줄 알지만 네가 좋아하는 섬세한 각도 15도 경사가 나는 공포라 했다 -주향숙,‘경사로’전문 (‘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야구공을 좋아하는 걸까’, 2025. 시인동네) 어떤 고통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접질린 상처는 처방전이 없는 것일까. 화자는 사람의 관계에 있어 안전에 대한 침해가 어떤 상처로 남는지 보여 준다. 특히 심리적 안전이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은 무엇보다 화자가 필요로 했던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화자의 존엄에 가해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한 부정적 힘이‘하필’이라는 경사를 인식하게 한다. 사람마다 어김없이 접질리는 각도가 있다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섬세한 각도’는 “아는 길이었다고 /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사실에 있다. 화자의 하필을 읽으며‘나의 하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접질리는 일’ 자체가 공포라기보다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떤 경사지에 위험이라는 팻말을 붙여 두고 경계의 선을 그어야 한다면 그곳은 마음의 전쟁터가 될 것이기에. 트라우마는 사후적이다. 이를테면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언제 다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 수없이 내치던 당신의 등이 떠올랐다”는 언술처럼 당시엔 알아차리지 못했다가 시간을 거슬러보았을 때 사고로, 폭력으로 인지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어디로 쏟아져야 하는 걸까/ 결정을 미루”게 된다는 언술은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느먼의‘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의 빠른 판단과 느린 판단 사이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그것이 왜 생기고 어떻게 작용을 하고,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칸트가 말한 존엄이다. 건강한 상호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 공동체 전체의 사회적 친밀감과 연대감을 낳는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좋은 상호성은 오로지 가족이나 부부같이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만 행해지곤 한다. 대칭적 상호성이‘적당한 신뢰감과 적당한 거리감’에 있다면 화자가 추체험한 합법적 경사 15도의 각도는 대칭성을 갖기 어려운 하필의 경사가 되는 것이다. 지진으로 무너진 자리, 폐허를 딛고 시립도서관이 개관했다. 주향숙 시인의 인용되지 않은‘풍장’이라는 시편에서 “심장은 도려내어/ 까슬까슬 바람에 내어 말려야겠다”는 기표를 읊조리며 “택시를 불렀다 / 누구도 생각나지 않아서”때마침‘트라우마센터’가 도서관과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마음을 놓아도 되는 사람을 갖고 싶다고” /이희정 시인

2025-06-29

‘상상 더 이상의 경산’을 꿈꾸며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고향은 누구에게나 매우 특별하다. 남천에서 멱감고 금호강 변 과수원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 추억이 하나하나 묻어나는 내 고향 경산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시장이 된 지금 날마다 ‘상상 더 이상의 경산’을 꿈꾼다. 경산은 자타가 공인하는 살기 좋은 도시로 지하철과 광역철도가 연결된 사통팔달의 도시, 300만 평의 산업단지에 입주한 4천여 기업체가 일자리를 제공하고 명문고와 10개의 대학이 자리해 자녀 교육 걱정이 없고 도심은 공원녹지와 조화로 정주 환경이 쾌적하다. 편의성·심미성·문화성이라는 도시 발전 단계로 보더라도 경산은 기반 시설과 생활의 편리함을 잘 갖추어 이제 아름다운 도시, 문화·예술로 시민이 행복한 문화도시로 도약하고 있지만, 위기 요인도 공존하고 있다. 노령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의 소멸, 청년들이 머물 일자리 부족 등은 비록 우리 경산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반드시 대비해야 할 위기 요인이 분명하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아름답고 행복한 경산을 만드는 것이 ‘상상 더 이상의 경산’으로 △ICT 남방한계선 돌파로 청년 일자리 창출 △인재들이 모이는 정주 환경 구축 △시민의 일상이 즐거운 문화도시 경산 만들기 등 세 가지 전략으로 이 원대한 꿈을 하나하나 성취하고 있다. 판교가 ICT 남방한계선으로 경제적 집적 효과와 강남문화가 결합하며 청년들은 원하는 고임금 일자리를 만들 수 없는 현실에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고 첨단기술 기업은 인재를 찾아 수도권으로 이전하고 있어 경산은 역발상으로 ICT 남방한계선을 타계하고 있다. “차라리 창업의 씨앗을 뿌리자”는 생각으로 에콜42 이노베이션 아카데미를 서울이 아닌 지방 유일의 유치에 성공해 ‘경산42’로 AI·빅데이터 인재 양성을 시작했다. 또 AI와 ICT 산업을 일으킬 초거대 AI 클라우드 팜(인공지능 서비스 플랫폼)과 ICT 융복합 어린이 재활 기기 실증센터, 자동차 전자제어 장치(ECU) 실험실 등을 유치해 영남 최대의 창업 플랫폼이 될 디지털 기술 스타트업 벤처클러스터인 ‘임당 유니콘파크’를 조성 중이다. AI와 ICT 남방한계선을 뛰어넘은 경산은 머지않아 청년들이 선호하는 고임금의 ICT, AI 업종 창업 봇물이 터지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AI 혁신지, ICT 허브로 성장할 것이다. 우수한 기업을 유치하려면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전통적 지원보다 인재를 유치하는 전략이 효과적으로 이들은 쾌적한 정주환경과 문화 핫플레이스를 선호해 인재가 모이고 첨단기업이 오도록 쾌적한 정주 환경을 만들고 있다. 지역의 풍부한 녹지와 많은 호수를 아름다운 경관자원으로 디자인해 도심 어디서나 걸어서 10분 안에 걷기 좋은 숲길을 만나는 주거환경 등 도시미관을 꾸준하게 개선하고 있다. 아울러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도시’를 목표로 어린이 병원, 보듬 병원을 위시한 소아병원, 지역아동센터, 장난감도서관 등 육아 지원시설도 하나하나 설립하고 있다. 떠나가는 청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청년 행복주택과 안심주택 보급, 청년 지식 놀이터와 웹툰 창작소 건립, 글로컬 대학 지정 등 청년들이 공부하고 놀며 꿈을 키우기 좋은 환경도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이제는 문화가 있는 삶으로 개개인의 행복 수준을 높이고 건강한 사회를 완성해야 한다. 문화예술로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경산 관광을 진흥하기 위해 지난해 말 설립한 ‘경산문화관광재단’으로 생활 문화와 예술생태계를 확대하고, 시민 생활에 문화예술이 스며들도록 하겠다. 특히 유치에 성공한 현대 프리미엄 아울렛의 연인원 600만 명 쇼핑객이 경산 관광을 즐기도록 로컬관광 콘텐츠를 개발하고 기반 시설도 확충해 무엇보다 시민들이 ‘K-컬쳐 발상지 경산’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문화예술을 체험하고 향유 할 기회를 많이 만들겠다. 주말마다 다양한 공연·전시가 있고 시민들은 이를 여유롭게 즐기며 즐거운 일상을 누리는 꿈도, ‘My universe Gyeongsan’, ‘상상 더 이상의 경산’도 이뤄질 것이다. 그 꿈을 위해 오늘도 담대하게 희망을 품고 용기를 내 신발 끈을 조여 맨다.

2025-06-29

‘IMF외환위기’의 문화사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래, 한국의 경제 상황을 ‘제2의 IMF’로 수식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 같다. 국정기획위 경제1분과 첫 업무보고에서도 현재의 심각성을 ‘제2의 IMF’로 여겨달라는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IMF외환위기(1997~2001)는 국가 부도에 처한 한국이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외환유동성 위기를 뜻한다. 당시에는 ‘IMF사태’나, ‘IMF구제금융요청’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세계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지칭되기도 했다. IMF외환위기는 체제 논쟁을 야기할 정도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의 전환을 추동한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IMF외환위기는 이른바 ‘97년 체제’를 논의케 한 기점이 된 것이다. ‘87년 체제’가 직선제로 대표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라는 정치체제의 전환을 의미한다면 ‘97년 체제’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발전국가를 완전히 해체하고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전면화한,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것이다. ‘97년 체제’는 정치학과 경제학, 사회학 등에 두루 걸친 학자들에 의해 한때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면 IMF외환위기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은 물론, 한국문학과 예술 전반이나 개인의 구체적 삶의 양태에 끼친 효과에 대해서는 잘 논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는 IMF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변화한 대중의 감정·감성 구조와 일상성, 정치적 주체성과 그 양식, 윤리와 미학에 관해서 학술적으로 전혀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지만 IMF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상식’과 ‘정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시민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했고, ‘절약’과 ‘근면’이라는 덕목을 재소환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동참하도록 요청받았다. 이 내면화된 윤리는 곧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과 접속하며, 개개인의 실패를 ‘노력 부족’으로 환원시키는 새로운 규율 체계로 기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업, 빈곤, 사회적 배제와 같은 구조적 위기는 개인의 무능과 열등감으로 전유되었고, 좌절과 자책은 점차 정신질환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전면적으로 서사화한 장르는 단연 문학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다수의 한국소설들은 IMF 위기 이후 등장한 새로운 주체 형상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다양한 서사 형식으로 재현해왔다. 이 시기 문학은 리얼리즘이나 노동자-민중 서사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고립과 분열, 우울과 강박, 자폐적 존재감각을 중심으로 한 내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내면이란 단순히 문학의 관심이 민족이나 민중에서 개인의 문제로 이행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상과 마음 그 자체가 정치의 장소가 되고 있는 시대 전환의 감각이 소설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IMF 외환위기는 정치경제적 함의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개인의 일상과 감정·감각 등의 전환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IMF 외환위기의 문화사는 더 고찰될 필요가 있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29

시, 인생, 정치

‘인생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보면 불가해한 암호 같지만 이해해보리란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지요. 나와 상월이를 한 단어로 담아보려 평생 애썼지만 모두 어딘지 넘치거나 모자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부디 이 외롭고 다정한 아이를 시를 읽는 마음으로 바라봐주세요.’ 요즘 시청률 고공행진하고 있는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김로사가 현상월을 위해 남긴 편지에 있는 글이다. 고아원 친구 김로사와 현상월, 두 사람은 너무나 불행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끼는 사이였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김로사를 현상월이 구하고 김로사는 죽기 전 현상월에게 자기 자식을 맡기며 자기 이름으로 살기를 부탁했다. 김로사와 현상월의 애닲은 사연을 여기에 옮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인생과 사람은 시와 닮아서 멀리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하려고 하면 의미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시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저 말을 이해할 것이다. 멀리서 보고 지레짐작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조차 이해하려들지 않으면 암호처럼 느껴진다. 정치인들을 대할 때는 더 심하다. 차라리 암호라고 생각하면 다행인데, 자기 관점에서 비난하며 지지자들까지 서로 반목한다. 며칠 전 글벗 세 명이 밥을 먹었다가 어쩌다가 대통령 선거 이야기로 주제가 흘렀는데 알고 보니 투표한 사람이 다 달랐다. 경직된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칫 불꽃이 튈 수도 있었지만, 글벗답게 각자 투표한 이유를 말하다 보니 정치인 한 사람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그러더니 A가 어려운 시라도 소리 내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더라며 시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요즘 읽고 있는 김혜순의 시를 소개했다. 오래전 그의 ‘불쌍한 사랑 기계’를 읽고 너무 어려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두 달 전부터 김혜순 시집 전작 읽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끌어 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빡이는 하늘이 다가든 것만 같다.’ (김혜순 ‘눈물 한 방울’ 일부) “해 떠오르면 머리를 감는 여자 / 허벅지가 없는 그 여자가 / 머리칼 위로 모래를 한 바가지 퍼 들이붓고는 / 첨벙 모래 구덩이에 머리를 담그는구나 / 발도 없는 여자가 / 모래강 위에서 머리를 절레절레 헹구고 있구나···."(김혜순, ‘타클라마칸’ 앞부분) 그냥 보면 무슨 말이야 하고 지나치기 좋은 암호 같은 문장들이다. 이렇게 이상한 시가 이해하려고 다가가서 소리 내어 읽으니 신기하게도 시적 화자의 슬픔과 허무가 느껴진다. 시를 읽듯이 상월이를 봐달라는 김로사의 말처럼, 어쩌면 암호보다 더 이상해보이는 정치인이라도 한번쯤은 시 읽듯이 바라보자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29

여름더위 예고하는 열돔현상

도시지역의 온도가 주변지역보다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열섬현상이라 한다. 도심을 오가는 수많은 차량과 열을 잘 흡수하는 콘크리트 건물, 아스팔트 등과 같은 도시 구조물이 원인이 돼 도시온도가 올라가는 현상이다. 열돔현상은 고기압이 뚜껑처럼 대기층을 덮어 뜨거운 공기가 하늘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지표면에 머무는 현상이다. 열섬현상과 열돔현상이 지구촌의 기후에 악영향을 미치고 특히 여름철에는 폭염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열돔현상에 갇힌 지역은 대기 자체가 뜨거운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이상고온과 폭염에 시달리고 밤이 돼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아 열대야가 연속된다. 뉴욕시 등 미국 동부지역이 6월 폭염으로 시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외신이다. 미 기상청은 지난 27일 미국 동부지역 주요 도시들의 낮기온이 37도를 넘어섰다고 밝히고 일부 지역에선 40도에 육박하는 기록을 보였다고 발표했 다. 6월 폭염으로 미 동부지역에서는 온열질환자가 속출하는 등 인명피해도 잇따른다고 전했다. 미국 기상청은 미국 중서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열돔이 동부로 이동하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며 당분간 무더위가 지속될 것 같다는 예측을 했다. 과학자들은 열돔현상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으로 지구촌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꼽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면 갈수록 열돔현상은 빈도가 더 잦아진다는 설명이다. 지난 주 대구와 경북 대부분 지역에서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말이 폭염주의보지 올 여름 무더위를 예고하는 소식이라 반갑지가 않다. 올 여름 폭염과 열대야에 모두 단단한 각오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29

의사와 판검사

책을 읽노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때가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인생의 심오한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 지은이와 만날 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무리 나이 먹고 공부 많이 했다는 이유로 고개를 빳빳하게 하고 다니는 짓은 최대한 피할 일이다. 오래 살았다거나 남달리 긴 가방끈이 무슨 대단한 훈장은 전연 아니기 때문이다. 도이칠란트의 작가 크리스티네 브뤼크너(1921~1996)의 서책 ‘데스데모나, 당신이 말을 했다라면!···.’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거려진 일이 있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서도이칠란트 펜(PEN)클럽 부회장을 지낸 브뤼크너는 생의 원숙기인 60대에 ‘데스데모나’를 집필한다. 서양의 실존-가상 여성 11인이 남기고 싶은 마지막 말을 엮은 책이 ‘데스데모나’다. 그녀가 3장에 등장시키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일갈은 특히 인상적이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틴 루터의 아내였던 카타리나가 식탁 담화 형식으로 남편을 질책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녀는 끼니마다 3~40명의 식객을 앞에 두고 ‘엄근진’으로 일관하며 거룩한 설교를 퍼붓는 철부지 루터를 참교육한다. 올바르다 못해 신랄하기까지 한 카타리나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면을 채우면서 먹고살아요. 구두 뒤축이 닳아 없어지니까 구두 수선공이 먹고살고, 옷을 수선해야 하니까 재단사도 먹고사는 거잖아요···. 의사는 우리 질병 덕을 보고, 무덤 파는 사람은 우리 죽음 덕에 살지요.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는 사람들이 죄를 짓기에 먹고사는 거예요.” ('데스데모나', 69쪽) 인간이 타자의 결함(缺陷)에 의지해 먹고산다는 논지는 매우 통렬하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면, 루터 같은 목사는 오갈 데가 없으며, 사람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의사는 꼼짝없이 굶어 죽을 판이다. 한국 사회가 그토록 숭상하는 판검사 무리도 우리가 저지르는 크고 작은 범죄 덕분에 자기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그런데 우리 사회 면면은 어떤가?! 서울대 의대에 학생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이 서울 공대라는 우스개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이공계 기피 현상과 의대 과열 풍조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육마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몰아 넣었다. 더욱이 소수 극렬한 정치 검사들의 행악질이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의 한국 사회는 치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평생을 씨름해야 하는 의사가 사회의 각광(脚光)을 받고, 범죄자들을 반려(伴侶) 삼아 인생을 함께하는 판검사가 드높은 사회적 지위에 자리한다는 병리적인 현상!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지식인과 용기 있는 기업가 유형의 인물을 존중하는 사회풍토가 선결되어야 우리는 21세기 4차 산업혁명 사회와 조화롭게 만날 수 있을 터다. 때마침 터져 나오는 정치검찰의 부패와 타락, 무도한 권력욕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참혹한 나락으로 몰고 가는지 일목요연하게 입증한다. 새로운 정부 출범과 더불어 우리 교육과 바람직한 인간상 정립을 위한 기성세대의 통절한 자기반성과 자정(自淨)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6-29

“장관이 뭐길래”

장관과 국회의원 중 어느 쪽이 더 좋으냐는 질문이 시중에는 자주 회자된다. 대체로 “국회의원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는 대답이 주류다. 그 말은 국회의원은 국정감사 등의 권한이 있고, 법적으로 부여된 수많은 권한과 특혜가 있으니 일리 있는 대답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관은 행정부 최고 수반인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가의 중요 정책들을 논의한다. 이보다 막중한 자리가 있을 수 없다. 국회가 만든 법에 따라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성공시켜가는 과정이 개인적으로 명예스럽고 보람도 있다. 두 자리는 각자의 역할은 다르지만 국정 운영에 상호보완적 관계를 가진다. 두 자리가 조화롭게 운영이 될 때 나라의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자리냐 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송미령 농림부 장관이 이재명 정부에서 유임이 되자 정치권에서 적잖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민주당이 추진한 양곡관리법 등을 농망법으로 반대했던 인물이 유임된 것에 대해 민주당 내 내부 반발은 물론 농민단체의 사퇴 요구도 거세다. 대통령실은 보수, 진보 구분 없이 기회를 부여하고 성과와 실력으로 뽑은 인선이라 설명했으나 정치 철학이 맞지 않으면 사퇴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송 장관의 유임은 기회주의"라고 말하고 개인 철학이나 소신을 바꾸는 모습을 보고 “장관 오래하려면 송 장관처럼 하라”는 비아냥의 글도 올렸다. 여야 정치권 틈바구니서 장관직을 고수하려는 송 장관의 모습을 국민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6-26

억울한 법에 대한 보수

필자는 5년째 경북도청 행정심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경북도청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행정심판위원회에선 보통 20건에서 30건 정도의 사건이 처리되는데, 매번 빠지지 않고 여러 건이 올라오는 사건 유형이 있다. 바로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해 행정처분을 받게 된 사건들이다. 하지만 불법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이 청소년들이 신분증을 변조하거나 도용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증명사진도 보정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신분증상의 사진으로 실물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청소년들이 악용하곤 했다. 길에서 주운 신분증을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사용하고, 언니나 형의 신분증을 도용하거나, 심한 경우엔 신분증의 사진 부분을 변조하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이런 경우에도 일단 청소년임을 알지 못한 채 주류를 판매한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 보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사업주들이 더욱 철저히 미성년자 연령 확인을 할 것이라는 입법 목적이었겠지만 실제로는 억울한 사업주들이 생겨났다. 청소년에게 주류를 판매한 것이 단속에 적발되면, 경위를 묻지 않고 일단 행정처분이 부과되었고, 사후적으로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고발된 형사 사건에서 무죄나 선고유예 판결이 나와야 행정처분 취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주들은 이를 모른 채 몇십만 원 수준의 벌금형은 일단 받아들이고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에 대해서만 불복을 시도했기 때문에, 행정심판까지 왔을 땐 벌금형의 형사처벌이 확정된 경우가 많았다. 설사 형사처벌 확정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대부분이 소상공인인 사업주들에겐 변호사 비용을 들여 형사재판에 대응하고 무죄 혹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몰라서 안하고 돈이 없어 못했다. 결국 형사처벌이 확정되면 법률상 행정처분도 취소될 수 없는 악순환이었다. 변조·도용한 신분증을 들이민 청소년에게 속은 사업주들이 1개월 이상의 영업정지 또는 그 영업정지 기간 매출에 상응하는 과태료 처분을 맞고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필자 역시 행정심판 주심으로 심판할 때 이런 사건은 너무 억울해 보여 최대한 구제해주고 싶었지만, 법률이 명문으로 행정처분을 못 박아 놓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억울한 자영업자들에 대한 구제책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드디어 작년 관련된 법이 개정되었다. 판매자가 청소년의 신분증 위·변조, 도용으로 청소년인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폭행 또는 협박으로 신분증 확인을 하지 못한 경우엔 행정처분을 면제할 수 있도록 식품위생법 등이 개정된 것이다. 이제라도 법 개정이 이루어져 다행이지만, 선량한 자영업자들의 생계를 옭아매는 억울한 법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자영업자 폐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자영업자 대출 연체율도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민생 회복을 위해선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화폐를 통한 내수 진작도 필요하겠지만, 자영업자들의 억울한 피해를 발생시키는 이런 법률들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일도 내수 진작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2025-06-26

기북시장 장터식당

어느 날은 손님보다 상인이 많아 보이는 기북시장 거기에 세상의 가장 훌륭한 뷔페를 파는 장터시장이 있다 한 접시에 많은 것을 담을 필요가 없다 그저 깻잎장아찌 몇 점 계란말이 두 점 대접에 밥을 푸고 무생채를 적당히 넣고 주인이 귀찮다고 입구에 놓아둔 항아리에서 고추장을 퍼와 비비면 된다 진하고 뻑뻑한 들기름을 슬쩍 뿌려준다 투박하나 저 섬섬옥수, 툭 던지는 배려 고추장은 무얼 그리 좋은 걸 많이 넣었는지 마치 조청의 점도(粘度)에 뒤지지 않는다 맵기도 하지만 달기도 하고 고소하다 비비다보면 들기름 냄새가 기북 동네를 덮는다 곁들이는 꽁치추어탕이 깊고 우아하다 부족하다 싶으면 국수 한 그릇을 더 먹어도 좋다 장터식당의 음식은 맛은 물론 아름다운 음식이다 기본기가 확실한 만찬이다 식당을 나와 잡놈처럼 이쑤시개를 씹으며 장터를 한바퀴 둘러보면 앙증맞은 기북장터는 소꿉놀이 같다 고복격양(鼓腹擊壤)이라 했나 한끼면 충분한 것을, 멀리 앙증스런 비학산(飛鶴山)을 본다. ….. 화려한 밥상이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될까? 그냥 먹어도 좋을 것을 온갖 재주를 부려 꾸미고 가꾼다. 차라리 그 시간에 간단히 먹고 산책이나 하라 한다. 어머니 말이다. 먹는 정보가 차고 넘친다. 식충이가 되라 한다. 제발, 제철 음식 소박하게 먹어라, 어머니 말이다. 내 말이 절대 아니다. 내 말에 어머니가 책임을 져야 한다. 감옥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프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비학산 아래 기북마을이 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6-25

백경(白景)에 빠지다

누구의 손으로 빚어진 작품일까. 책장을 세운 듯 깎아지른 벼랑을 품고 여기저기 돌들이 꽃을 피웠다. 유월의 산은 더욱 짙어져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이 청량하다. 푸른 솔과 땅이 청송을 이루고 골짜기와 꽃돌이 만난 신성계곡, 지질공원으로 들어서는 길목부터 수려한 풍광이 펼쳐진다. 개울 건너 벼랑 위에 정자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선 후기에 세운 방호정이다. 정치싸움에 염증을 느낀 선비들이 은거하며 백석탄 팔경(白石灘 八景)을 노래한 곳이다. 여덟 폭의 문을 열고 마루 끝에 서자 발아래가 절경이다. 계곡으로 내려간다. 빨래를 끝낸 하얀 천을 툭툭 털어 펼쳐놓았는지 개울 섶이 온통 하얗게 빛난다. 모래 알갱이 중에서도 풍화와 침식에 강하고 색깔이 흰 석영 입자로 생성된 사암이다. 바위가 물들게 했는가, 물이 바위를 채색했는가. 백석탄에서는 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조차 희게 보인다. 천상의 조각가들이 죄다 내려와 솜씨를 부렸는지 그 경치가 신묘하다. 조각가들은 굽이굽이 능선을 오래토록 깎아 완만하게 만들고 봉긋봉긋한 산꼭대기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흰 색으로 빛나는 돌들을 옹기종기 모아 크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에 하늘을 그대로 내려 앉히고 그 위에 수초를 띄웠다. 바위 위에 망치와 정으로 재주를 부려 동그라미, 가오리, 뾰족한 물고기 모양의 돌개구멍도 팠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이끼꽃을 그려 넣고 넓은 면에는 금을 그어 조화를 맞추었다. 앞에 돌이 놓이면 뒤의 돌은 병풍이 된다. 뒤의 돌이 옆의 돌과 이어져 맥을 잇는다. 산맥은 달리다가 잠시 한숨을 고르며 너른 들판을 만들고 다시 봉우리로 치솟는다. 아래로 미끄러진 능선은 주름 같은 골짜기를 이루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내린다. 햇빛, 바람과 물에 돌은 갈리고 닦이고 다듬어진다. 골짜기마다 돌꽃들이 만개한다. 희디흰 돌에서 천지가 창조된다. 지상의 하얀 산들이 모여 경연을 펼친다. 알프스의 몽블랑이 자태를 뽐내는가 하면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가 백 년 설을 이고 있다.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와 아메리카 로키산맥이 설산의 자웅을 겨룬다. 이에 빠질세라 백두산이 천지를 머리에 인 채 대륙을 내려다보고 겨울 설악산과 개골산이 장엄하게 내려앉아 근육을 드러낸다. 산과 산 사이에는 눈 덮인 시베리아처럼 하얀 평원이 펼쳐진다. 천하의 명산들을 배경으로 여인이 요염한 자세로 누웠다. 도도한 자태와 백옥 같은 눈부심으로 보아 동양의 비너스로 불릴 만하다. 저쪽에서 불끈 치솟은 남근석이 늠름한 모습으로 비너스를 바라본다. 혹시, 이 계곡 어딘가에 생산의 여신과 창조의 남신이 사는 것은 아닐까. 돌조차 음과 양의 운행에 맞추어 빚어낸 관능미 앞에 숨이 막힌다. 절경에 빠진 사이. 세상을 천연색으로 밝히던 해가 서녘으로 기운다. 낮 동안 입은 옷을 툴툴 턴 바위가 태양빛에 타다만 피부를 재생시키려는지 이내를 몸에 감는다. 척척 바위를 감아 돌던 푸른빛은 그림자로 서로를 덮는다. 찬 기운 에도는 물결과 골짜기를 휘돌아온 서늘한 공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몸을 내놓는다. 물소리가 자욱해지면서 서로의 그림자가 포개지고, 이윽고 하얀 천지는 시나브로 검게 물들어간다. 빛이 사라지는 자리에 안개가 스며든다. 남은 빛과 안개에 싸여 흰 빛은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옥색으로 치장한다. 속까지 색깔이 배일까만, 백석탄이 푸른빛으로 채색된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합쳐져 낮에는 보지 못한 형상들이 꿈틀거린다. 잔금들이 살아온 날들의 지문처럼 남은 백석. 점점 사위가 컴컴해지더니 나를 감싸고 있던 흰 돌들의 그림자가 낮에는 볼 수 없던 풍광을 연출한다. 어둠은 한 부분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명암으로 말하는 흑백사진처럼 빛과 어둠의 하모니가 드라마틱하다. 이제부터는 음의 시간이다. 세상이 잠들면 물소리는 더욱 커지고, 달뜨면 달빛 받아 백색 천지는 더욱 하얗게 빛날 것이다. 천지창조의 비화(秘話)를 두고 한 폭의 환상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아득한 옛날로 시간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몽롱하다. /배문경 수필가

2025-06-25

수를 놓으며

엄마가 손수 수놓았다는 베갯모를 여러 개 뜯었다. 낡고 헤져 흰 솜이 삐져나오기도 해서 더 두면 아예 자수조차 삭아 없어질 것 같았다. 간직하여야겠다. 싶었다. 새로 나온 신식 베개를 사 주겠다고 했더니 버려도 좋다고 했다. 조심히 뜯으며 가져간다고 했더니 엄마는 무슨 쓸모 있냐며 의아해했다. 표구사에 맡겨 자그마한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우리집 복도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액자가 좋아 보였던지 올케들 주겠다며 두 개씩을 도로 가져갔다. 엄마의 손때 묻고, 그리운 우리 가족 땀내도 배어 있는 베개이니 삼 남매가 사이좋게 나누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드렸다. 그러나 오빠네나 동생네 집에 그 액자가 걸려 있는 걸 본 기억은 없다. 30년도 더 전이었다. 네모난 구봉침은 제법 큰 베개다. 붉은 비단 바탕에 오색 아(亞)자 테두리가 새겨져 있었다. 아홉 마리 봉황이 있어 구봉침이라는데, 자세히 보면 머리를 맞댄 두 마리 봉황 발 아래 일곱 마리 병아리가 놀고 있다. 자식 많이 두라는 의미의 신혼부부용 베개라고 했다. 작고 딱딱한 목침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이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여자용 둥근 베개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거나. 꽃 가운데에 부귀(富貴), 다남(多男) 한자가 새겨진 것이었다. 베갯모 말고도 방안 한쪽 벽엔 홈스위트홈 십자수 횃대보도 있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예전 혼기 다 찬 집안 처녀들은 저녁마다 한 집에 모여 호롱불 아래에서 늘 수를 놓았다. 김서령의 유고집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는 동네 여성들이 함께 모여 수놓고 바느질하는 풍경을 정답고 감칠맛 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놓은 수예품을 혼수로 가져와 시집에선 솜씨 평판을 받기도 했겠지. 중학교 가정 시간에 자수를 배웠고, 그걸 엄마에게 보이면 엄마는 힐끗 보며 말하곤 했다. “골물시럽게 그런 건 와 배우노.” 최민경 회장님 댁에 있는 이런저런 자수 소품들이 정겨워 보였다. 달력, 컵받침, 그릇받침, 의자 덮개에 새겨진 한 송이 꽃에 정감이 갔다. 자수가 하고 싶어졌고 곧바로 실행했다. 가까운 문화센터에 생활자수 강좌 등록, 수강한 지 넉 달째다. 몇 년이나 수강한 선배들이 있는 강좌에 초짜 티를 팍팍 내면서도 결강 하지 않고 열심히 다니는 것은 재미나기 때문이다. 수놓으면서 듣는 수강생들의 두런두런 세상 얘기가 재밌다. 꽃 자수 하나하나를 가리켜 ‘얘’라고 의인화해 말하는 선생님의 세상 막힘없고 수월한 자수 지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긴 그 수많은 자수 기법은 동서를 막론하고 수 백 년 여성들의 지혜의 집합이요, 솜씨의 농축 아니겠는가. 자수 도안은 대부분 꽃이다. 컵 받침에는 소담스레 꽃 핀 화병이 앉고, 노란 바늘꽂이에는 탐스럽고 수북한 꽃바구니가 얹혔다. 파란 주머니엔 한 다발 라벤더꽃이 피었다. 카네이션 브로치를 어설프게 만들어 고마운 분에게 선물도 했다. 어린이날 연휴에 온 손주들에게 자수 장미꽃을 보여주었다. 넷이 모두 가르쳐달라며 달려들길래 천을 잘라 나누어 스파이더웹로즈 스티치로 장미 한 송이씩을 새겨가게 했다. 큰 손녀 윤이는 지레짐작으로 아는 체를 한다. 할머니 치매 예방하려고 배우시는 거죠? 글쎄, 수놓기에 그런 이점도 있으려나···. 미니멀 인테리어를 꿈꾸던 내가 마음을 바꿔 머잖아 온 집안 곳곳을 시들지 않는 꽃장식으로 뒤덮을 것 같은 예상은 한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6-25

여름철 배앓이와 설사

장마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설사와 복통이다. 갑작스레 배를 싸매며 화장실을 찾게 되는 날들이 늘어나고 식사는 잘했는데도 금세 더부룩하거나 설사로 이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장이 약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라고 생각하지만, 한의학에서는 이 시기 반복되는 복부 이상을 단순한 장기 문제가 아니라 자연환경의 습기와 인체 내부의 수습(水濕)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본다. 특히 장마철처럼 공기 중 습도가 높고 체표 양기가 약해지기 쉬운 환경에서는 몸속 수습의 흐름이 정체되며 장 기능이 무너지기 쉽다. 현대 의학적으로도 장마철은 급성 장염 발생률이 높아지는 시기다.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해 음식물이 상하기 쉬우며 식중독균이나 바이러스가 급격히 증식하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복통, 발열, 설사, 구토를 동반하는 장염 환자가 늘어나고 특히 아이들은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장염에 더 취약하다. 실제로 장마철 소아 장염 환자 중 상당수가 설사와 함께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며 밤새 울거나 보채는 경우가 흔하다. 아이들은 복부에 찬 기운이 쉽게 침투되기 때문에 평소에도 잘 때는 배를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이 중요하고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찜질이나 합곡 같은 손부위 마사지를 활용하면 통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의학에서는 장마철 복부 이상을 ‘습(濕)’이라는 병리적 요인으로 설명한다. 습은 물처럼 무겁고 끈적이며 흐름을 막는다. 이것이 장 안에 머물면 음식물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고 수분 재흡수가 이뤄지지 않아 설사로 이어진다. 여기에 냉방과 찬 음식 섭취가 겹치면 비위 기능이 약해지면서 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 대해 한의학은 습을 제거하고 비위를 도와주는 방식으로 치료한다. 대표적인 처방으로는 오령산, 향사평위산, 반하사심탕 등이 있다. 사람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 후박, 진피, 의이인, 복령, 백출 같은 약재들을 가감해서 처방을 구성할 수 있다. 아이들은 체질과 연령을 고려해 순한 약재 위주로 쓰고, 뜸이나 복부 찜질 등 순한 처치도 병행한다. 이 시기에는 생활습관 관리도 무척 중요하다. 음식은 반드시 끓여 먹고, 조리 후 오래 방치된 음식은 섭취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찬 음료나 얼음 아이스크림처럼 몸을 차게 만드는 음식은 장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가급적 삼가고 평소 따뜻한 차나 소화를 도와주는 음식(매실차, 생강차, 미음 등)을 섭취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냉방기기 사용 시 직접 몸에 찬 바람이 닿지 않도록 하고 아침 기온이 낮은 날엔 복부를 가볍게 덮는 습관도 체온 유지에 효과적이다. 결국 장마철의 복통과 설사는 단순히 장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 환경 변화에 따른 인체 수습 균형이 맞지 않아 장이 약해진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특히 아이들은 면역력과 장 기능이 미숙하기 때문에 배앓이를 자주 하기에 복부를 따뜻하게 해주고 음식 위생에 신경 쓰는 것이 중요하다. 한방적 접근으로 습을 제거하고 비위를 돕는 치료를 병행하면서 생활습관을 조금만 조절하면 장마철도 건강하게 지나갈 수 있다. 내 몸 안의 습기를 다스리는 것 그것이 여름철 장 건강의 시작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6-25

유튜브, 지역 언론의 딜레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역 밀착형 취재거리를 찾고, 꼼꼼하게 기획해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면 뭐 합니까. 정작 많이 보는 건 영화제 레드카펫 위 여배우 드레스의 등이 얼마나 파여 있는지 보여주는 영상인데요.” “우리 신문사 역시 디지털시대에 발맞춰 유튜브 강화를 진행하고 있지만, 콘텐츠의 질이 방문자 수 증가를 담보해주지는 않더군요. 최근에도 방문자들은 역사강사 전한길씨가 출연한 유튜브 영상을 가장 많이 봤어요.” 비단 지역에 위치한 신문·방송사만이 아니었다. 구독자 수가 65만 명이 넘는 서울 언론사도 고심이 깊어 보였다. “기자 3명과 PD 2명이 유튜브 제작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꽤 긴 시간 투자만 했을 뿐이지 5명의 인건비도 건지지 못했어요. 2년 이상 꾸준히 제작하고 적지 않은 콘텐츠가 쌓이고 나서야 제작 인원의 인건비를 약간 상회하는 수익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지난 주말. 지방 언론사 기자 40여 명이 제주도를 찾았다. ‘지역 언론의 미래와 기자의 역할’이란 주제로 열린 세미나 참석을 위해서였다. 위의 내용은 그날 세미나에서 오간 이야기를 복기한 것. 젊은 세대는 물론 80대 노인도 유튜브를 보는 세상이 도래했으니, 어느 지역 언론 할 것 없이 유튜브 콘텐츠 강화, AI 적극 활용 등의 언론 환경 변화에 신경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관련 인력과 디지털부문 강화에 투자할 수 있는 자본 모두에서 서울 언론에 밀리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그렇다고 눈앞으로 닥친 유튜브시대, AI시대를 마냥 외면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지역 언론의 딜레마(dilemma)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6-25

주체가 되지 못하면 도구가 된다

한국은 인구 4000만 명 이상 국가 중 0~14세 인구 비율이 가장 낮다. 유엔 세계 인구추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유소년 인구는 전체의 10.6%. 초고령화로 이름난 일본보다도 낮은 수치다. OECD는 한국 인구가 60년 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 경고했고, 세계 최저수준 출산율 0.72의 원인은 높은 사교육비, 집값 상승, 장시간 노동,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등을 지목했다. 한국사회는 절망적 통계 앞에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프랑스는 달랐다. 최근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에는 두 개의 질문이 등장했다. ‘우리의 미래는 기술에 달려 있는가?’, ‘진실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는가?’ 정답이 없는 질문이 프랑스 학생들에게 생각하고 토론할 것을 요구한다. 기술 만능과 정보과잉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인간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시험문제를 넘어 오늘날 인류가 품어야 할 통찰과제다. 프랑스의 교육은 지식만 주입하지 않는다. 생각의 습관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둔다. 한국은 어떤가. 시험은 여전히 정답을 찾는 데 혈안이고 교사는 논술답안을 기계적으로 채점한다. 사고의 깊이를 가늠하기보다 틀리지 않는 답안지에 점수를 주고 학생은 점수로 줄을 세운다. 고교생의 글쓰기조차 ‘AI 요약 서비스’나 챗GPT에 떠맡기고, 대학입시를 통과한 뒤에도 입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펙 경쟁에 몰두한다. 프랑스 교사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면 도구가 된다’고 외칠 때, 우리는 학생들을 그저 쓸만한 도구로만 만들어 낸다. 정반대가 아닌가. MIT 미디어랩의 실험은 AI가 인간의 자율적 문제해결 능력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AI의 도움없이 스스로 글을 쓴 학생들이 뇌신경 활동이 더 활발했고 학습의 몰입도도 높았다고 한다. 한국사회는 AI기술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정답’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부작용에 눈을 감는다. 교육현장은 사라진 질문, 사라진 사고 주체, 사라진 교육철학에 침묵한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단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미래를 바라볼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설계할 능력을 주기보다 현재를 버티는 기술만 요구하고 가르친다. 결혼과 출산은 ‘불가능한 선택’이 되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마저 들지 않게 만든다. 사교육은 치열해지고 교육격차는 깊어지며, 부모 세대는 아이를 투자 대상으로만 여긴다.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면 아이 낳을 이유도 사라진다. 필요한 것은 껍데기를 슬쩍 손질하는 개혁이 아니다. ‘생각과 상상의 주체를 키우는 교육의 대전환’이다. 점수 매기는 교육에서 질문 던지는 교육으로, 정답 찾는 교육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아이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미래가 없는 나라를 만나게 될 터이다. 한국사회가 진정 아이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 변화는 학교에서, 교사에게서, 그리고 교육철학에서 태동할 것이다. 미래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지 고문

2025-06-25

플라시보 효과

몇 달 전부터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었다. 이따금 땀이 훅 끼치고 밤이면 이유 없이 잠이 달아났다. 그렇게 자꾸만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밤이 늘어나며 이러다 탈 나겠다 싶어 가끔씩 수면제를 찾게 되었다. 다행히 약의 도움으로 서너 시간은 단잠에 들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잠을 못 자는 날이 이어지자 낮에 운동을 시작했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면 밤에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처음엔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며칠 만에 땀도 나고 숨이 차오르자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덕분에 최근 며칠은 약 없이도 비교적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뭔가를 했다는 만족감, ‘오늘은 잘 수 있을거야’라는 기대감이 오히려 수면제보다 나은 약이 되어준 듯했다. 며칠 동안 잠이 잘 들어 이제는 약이 없어도 괜찮겠다 싶었던 밤에 다음 날 중요한 약속이 있어 빨리 잠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뒤척이기만 몇 시간이었다. 서랍을 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 머리를 감으려는 찰나 약 봉투를 보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수면제가 아니었다. 그 약은 혈압약이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으로 부작용을 검색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탈 없이 푹 잔 내 몸이 그저 멀쩡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걸 수면제라고 믿었으니 잔 거였네?” 이내 웃음이 났다. 아찔하면서도 신기했다. 진짜가 아니어도 진짜라고 믿었기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플라시보 효과’였다. 알약이 아니라 믿음이 효과를 만든 것이다. 의학적 효능이 없어도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가끔 쓰이는 이 원리를 나는 내 일상 속에서 실감한 셈이다. 그날 밤 내가 잠든 것은 약 때문이 아니라 ‘이제 잠이 들 거야’라는 믿음. 그것 하나가 나를 편안하게 눕혔고 나도 모르게 몸은 그 믿음을 따라갔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순간이 그런 믿음 하나로 바뀌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도 이런 ‘심리의 약’이 참 많다. 내 친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고 했다. ‘이것도 지나간다. 다 괜찮아진다.’ 처음엔 허무맹랑해 보였지만 어느새 그 말이 친구의 삶을 붙드는 버팀목이 되었다. 믿고 바라보는 쪽으로 삶은 나아가게 되어 있다. 진짜 변화는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삶에서 플라시보 효과는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진실로 믿느냐’에 따라 삶의 질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증거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설명되지 않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견디는 존재다. 그러니 어떤 말, 어떤 행동, 어떤 믿음이 실제로 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해 ‘살아낼 힘’을 얻는 것이다. 치유란 병의 완치가 아니라 그 병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적 수긍일 수 있다. 플라시보는 그 수긍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때로 거짓말 같은 희망을 붙들고서도 그 믿음 하나로 현실을 견디고 넘어간다.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생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이후 내 서랍 속 빈 약 봉투를 가끔 들여다본다. 약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재웠다는 사실이 어딘가 뿌듯하다.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믿음일지도.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갱년기와 수면 장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들 앞에서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날 밤을 떠올린다. 혈압약을 수면제로 믿고 스르르 잠든 어설픈 나의 착각이 되레 나를 위로한 밤. 삶은 때때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이 된다. 플라시보 효과는 그저 의학적 현상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나를 믿는 마음 하나가 삶을 조금 더 부드럽고 단단하게 만든다. ‘괜찮아 잘 해낼 거야’라고 믿는 마음이 이미 반쯤은 이룬 셈이니 오늘도 내 마음에게 말을 걸어본다. /작가 김경아

2025-06-24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 갈래 길

2025년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2025년 5월 31일 도쿄 치요다구의 도시센터호텔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행사의 취지는 일한문화교류기금 이사장의 인사말에 잘 드러나 있었는데요. 가토리 이사장은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로 세계의 긴장이 높아지는 지금, 수백년 동안 조일(朝日)간의 무탈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의 교훈을 배우자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심포지엄의 주제도 ‘조선통신사라는 지혜‘였는데요.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요시다 마쓰오(도쿄대 명예교수), 다시로 가즈이(게이오대 명예교수), 이시다 토오루(시마네현립대 교수), 기무라 타쿠(주오대 교수)가 순서대로 ’조선왕조 정치시스템과 통신사‘, ’조선통신사와 쓰시마번의 역할‘, ’조선통신사와 訳官使‘,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를 발표했습니다. 통신사의 시작은 왜구의 금입(禁入)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1375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12회(1607년-1811년)에 걸쳐 일본에 파견됐던 사절단을 말합니다. 3회까지 사절단의 공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고, 4회부터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요.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은 쇼군의 국서에 ‘회답(回答)’한다는 의미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온다(刷還使)’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통신사가 200년 넘게 유지된 이유는, 막부의 위상을 높이려는 일본의 요구와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문화를 전파하려는 조선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양에서 에도에 이르는 약 1800킬로미터의 여정은 실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국가적 이벤트였습니다. 바다를 건너느라고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통신사행에 참여한 인원만 5백여명에 이르렀으며, 사행 기간도 10개월에서 1년이 걸렸습니다. 더군다나 잔인한 전쟁까지 겪은 후이기에,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요.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이들이 남긴 사행록(현재 40여종이 남아 있음)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향한 교토의 절에서 연회를 받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나 쓰시마번의 번주에게 절을 하라는 요구에 분연히 맞서는 모습 등이 나오기도 합니다. 일본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은 외교에 대한 기본 의식조차 달랐다고 하는데요. 실용적인 관점에서 외교를 생각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외교를 도덕적 규범인 예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통신사’의 의미조차 달랐다고 하는데요. 일본에서 통신사의 ‘신(信)’이 기본적으로 국서(國書)를 의미했다면, 조선에서 ‘신(信)’은 예의와 직결된 ‘신의(信義)’를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선과 일본은 교류를 이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특히 조선과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쓰시마번(대마도)의 역할에 주목한 논의가 많았습니다. 쓰시마번은 문서를 위조할 정도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통해 당시 일본에서는 일종의 조선붐이 일었다고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 인삼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1709년 한 해 동안 에도에 992kg의 인삼이 수입되었으며, 하루 매출액이 현재 시가로 수천만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시로 가즈이 교수에 의하면, 이처럼 조선 인삼이 유행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삼의 약효를 높이 평가한 허균의 ‘동의보감’이 널리 읽힌 결과라고 합니다. 이 날 3시간 넘게 진행된 심포지엄에서 말한 ‘지혜’의 핵심은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지극한 마음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열린 마음만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핵심단어(通信使)의 의미조차 다른 상황에서도 수백 년이 넘는 교류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한 방청객이 오늘날 쓰시마번의 역할을 누가 해야겠냐고 질문했는데요. 이에 대해 발표자는 이제 ‘일본인 전부’가 쓰시마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한국인인 저로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한일간의 건설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행사가 열린 도시센터호텔 맞은편에는 튜더 양식의 아름다운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가 있었는데요. 조선통신사가 한반도와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한다면,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는 일본의 강압적인 한반도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이은(1897~1970년)이 1930년부터 해방이 될 때가지 살던 곳인데요. 1907년 11세의 나이로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에 간 이은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합니다. 육군 중앙유년학교에서 공부한 후 일본군이 되었으며, 결혼도 일본 황족 여성인 마사코와 해야 했으니까요. 그럴듯한 어떤 명목을 갖다 붙인다 해도 이은은 일제의 볼모이자 인질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스페인풍이 가미된 이 아름다운 영국식 건물을 “관청처럼 감시받는 듯해 숨막히는 곳”이었다고 증언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심포지엄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도시센터호텔과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 사이로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는 듯한 환영 속에서 오랫동안 서성여야만 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6-24

국가가 먼저 저버린 약속, 이제 우리가 묻는다

국가가 스스로 수립한 계획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포항의 미래를 열어갈 핵심 인프라 사업이자, 동해안권과 국가 균형발전의 결정적 축인 ‘영일만대교’ 건설사업의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이 결정은 단순히 한 도시의 예산을 줄인 것이 아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져 온 포항 시민의 꿈을 짓밟은 것이며, 정부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흔드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정부는 ‘불용 가능성’을 삭감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이 명분은 현장의 현실과 시민의 바람, 정부 스스로 수립한 정책 기조와도 어긋난다. ‘영일만대교’는 이미 지난 2019년 제5차 국토종합계획에 포함되었고, 이후 국가도로망 계획과 고속도로 건설계획에도 반영된 바 있는 명백한 국책사업이다. 현재 국토부 역시 노선 최적화를 위한 부처 간 협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연내 착공도 가능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 2025년도 제2차 추가경정예산안에서 영일만대교 구간 공사비 1821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이는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스스로 설정한 계획을 스스로 뒤엎은 것이며, 국민과의 신뢰를 저버린 결정이기도 하다. 포항은 오늘,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정부에 묻고자 한다. 왜 수도권과 특정 지역의 대형 국책사업들은 흔들림 없이 예산이 확보되는 반면, 영일만대교는 ‘불용 가능성’이라는 모호한 이유로 삭감됐는가? 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여러 차례 공언한 지역 공약은, 임기 초부터 무시되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국가의 행정이 얼마나 일관성 있고 정의롭게 작동하는지를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포항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포항은 더 이상 정부 정책의 후 순위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지역 균형발전은 구호가 아닌 국가의 책무이며, 대한민국 전체가 함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영일만대교’는 단지 하나의 교량이 아니다. 그것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대한민국 미래의 가교이며, 국가 인프라망의 핵심 고리이다. 더욱이,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영일만 횡단 대교 적극 추진’이라는 공약은 아직도 시민들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대통령의 말은 국가정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국민의 신뢰는 곧 정부의 자산이다. 그 약속을 저버린다면, 정부는 국민 앞에 당당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요구한다. 정권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약속이다. 계획보다 앞서야 할 것은 국민이다. 포항 시민들은 단지 지역의 이익을 위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민이 가진 신뢰를 지키고, 정부가 지켜야 할 책임과 공공성에 대한 요구이다.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정부의 긍정적인 결단을 강력히 촉구한다. 지금이 바로 정부가 답할 시간이다.

2025-06-24

TOP 진단으로 경영을 세우다

중소기업의 경영자를 보면, 전문 경영인보다 창업주를 많이 만난다. 기업 창업주는 특징이 있다. 6·25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일군 창업주들은 자사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그 애착심은 집착이 되어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집착이 깊으면 열린 조직보다 경직된 조직 문화로 가는 경향이 있고, 좋은 기업으로 가는 데 장애가 된다. 회사 규모가 작을 때는 가족 경영이 되지만, 100명 이상의 규모가 커지면 효율적인 조직 운영체계를 갖추고 장기적으로 기업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작은 기업의 조직과 문화를 바꾸는 데는 CEO의 변화가 지름길이다. 경영 리더십의 변화로 건강한 조직을 만들고, 기업 성과를 창출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TOP 진단이 있다. CEO가 생산 현장의 TOP 진단을 하려면 3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전 직원 참여다. 현장에 문제와 답이 있다. 전원 참여를 통해 모든 현장의 낭비를 찾고 개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생산 현장뿐만 아니라 사무 행정 직원들도 개선 활동에 참여한다. 둘째, 활동판을 만들어야 한다. 개선 내용을 자랑할 수 있는 틀인 것이다. 팀을 구성하고 계획 및 실행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활동판 운영이 필요하다. 셋째, TOP의 현장 진단 운영체계다. 최고 경영자의 관심과 개선을 통한 현장과 직접 소통으로 현장 문화를 바꾼다. TOP 진단은 ‘대화의 장, 격려의 장, 코칭의 장’으로 운영한다. 대부분의 CEO들이 이것을 잘 못한다. CEO 교육을 통해 TOP 진단의 목적과 방법, 활동 판에서 개선 활동 내용을 듣고 잔소리 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고 교육을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한다. 작은 개선 활동이라도 끝까지 경청하고,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3가지를 칭찬했으면 1가지 코칭을 하고, 코칭 방법은 지시형이 아닌 질문 방식으로 부하 직원들이 주인공이 되게 하는 흐름이다.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공구 보관함을 만드는 M사를 컨설팅 할 때 일이다. 보관함 제작, 조립 등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고, 부품, 완성품의 위치 설정과 수량 관리가 가치 창출로 이어진다. 직원들의 긍정 에너지와 생각이 성과로 연결되는 일의 속성이다. TOP 진단을 앞두고 CEO에게 진단 요령을 설명했다. 막상 현장 가는 길에 흐트러진 물건을 보고 잔소리가 시작된다. 활동판 앞에서는 경청하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 교육 같은 코칭을 한다. TOP 진단은 역효과가 나고, 개선 문화는 멈추게 된다. 이것을 정상화 하는 데 3개월 정도 소요되었다. 사람의 오랜 경험과 지식, 습관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M사는 사장부터 임원, 직책 간부까지 한 구역을 정해서 빗자루를 들고 꾸준히 솔선하게 했다. TOP 진단 시 현장과 공감 형성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다. 또한, 정기 회의체를 통하여 현업의 의견을 반영하고 이슈 사항은 즉시 풀어가고, 직책자와 일반 직원들까지 마인드 변화관리를 지속했다. TOP 진단이 6개월 될 무렵, 현장은 변화가 일어났다. TOP 진단이 직원 생각이 열리고, 긍정 조직 기반이 형성되며 개선 활동이 지속되는 기업 문화로 변모하는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6-24

포은선생의 학덕 묵향으로 피우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태어난 곳이든 성장기 배경이 된 곳이든 누구나가 어느 한 곳이나 본가 또는 외가 등지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출생과 성장에 관한 당시의 기록이나 문헌자료가 불분명한 위대한 인물일수록, 현재에 이르기까지 배경지의 논쟁이 되고 지자체의 대립과 반목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출생지와 성장지에 둘러싸여진 포항과 영천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장과 논점일 것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의 절의(節義)의 충신이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로 추숭되는 큰 인물이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등 모든 면에서 특출난 고려 최후의 보루이자 문무를 겸비한 역사에 길이 남은 인물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포은은 영일현 문충리에서 탄생, 인근 오천 구정리에 옮겨 살다가 유년 시절인 9~10세 경에 영천 우항리 외가댁에 잠시 머물렀고 가족들이 그곳에 터를 잡은 후에는 영천으로 완전히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영천에서는 포은 선생에 대한 기록이나 사료, 자취 등을 근거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출생했다고 하여 생가터와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성역화하는 등 영천이 ‘포은의 고향’임을 굳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 포은선생의 고향이 어디인가는 후학들의 관점에서의 문제이며, 포은선생에게 있어서는 포항이던 영천이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포은선생의 충절과 위업·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지역문화의 정체성으로 제고시키는 노력과 지역민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의미 있는 전승활동과 추모사업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천읍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2008년부터 매년 포은문화축제를 성대하게 개최해 왔고, 민간에서는 포은추모사업회를 발족하여 포은선생의 시문(詩文)과 예술을 고양시키는 사업 등이 이어지고 있어서 참으로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포은 정몽주 선생 탄생 688주년을 기념하여 최근 1주일 간(6월 16~22일)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포은국제서예교류전’은 한·미·중·일 등 20여 개 국가의 저명작가들이 출품한 200여 점의 필묵작품들이 포은선생의 학예와 덕행을 만방에 드러내서 주목받았다. 포은선생의 업적과 사상을 서예라는 예술을 통해 되새기는 국제 교류전은 각국의 귀한 작품들을 함께 전시·감상하는 특별한 시간이 단순한 문화교류를 넘어, 예술적 공감과 우정을 나누는 뜻깊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포은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예술적인 삶을 재조명하여 충효사상과 외교활동을 널리 알리고 창조적인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는 포은서예국제대회 공모전·포은선생추모백일장 등의 다양한 문화적인 프로그램도 가을에 예정돼 있어서 사뭇 기대와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문화예술의 향기와 진흥은 지속가능한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시민의 정서적인 풍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지방시대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문화도시 포항에 포은선생의 얼과 자취를 보듬어 고유한 정체성으로 확립, 발전시키고, 예술과 문화적인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굴, 진작시켜 문화와 예술이 꽃피는 ‘시민 모두가 행복한 포항’으로 나아가도록 각계각층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6-24

자살률 낮추기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취임 후 처음 가진 국무회의에서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느닷없이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라고 질문을 던져 주목을 받았다. 의사단체와 집단 갈등을 빚는 현안 문제에 대한 질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복지부 주변에서는 자살률을 화두로 삼은 대통령의 의도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다고 한다. 정치권 등에서는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자살률을 언급한 것은 한국사회의 만성적 문제로 자리잡은 자살률에 대한 해법을 강구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OECD 국가 중 줄곧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다. 2024년 기준 자살률은 인구 10만명 당 28.3명으로 OECD 평균 11.1명의 두배 이상이다. 연령별로 보면 최근 12년 사이 10대에서만 유일하게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1일 부산에서는 고교생 3명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된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결과, 범죄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친구 사이인 이들은 유서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유서에는 학업 스트레스와 진로에 대한 부담이 컸다는 내용이 담겨 동반 자살로 추정된다고 했다. 매우 충격적 사건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에 대해 복합적으로 해설한다. 실업난 등 경제적 이유, 개인주의 발달로 인한 가정 해체, 대화 부족, 그리고 성공 지향적 사회 분위기 등을 꼽는다. 특히 지나친 경쟁사회가 빚는 부작용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새 대통령이 던진 화두인 자살률이 높은 이유에 대해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24

여권과의 소통채널 절실해진 TK

경북매일신문은 지난 6·3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대구·경북(TK)과 새 정부를 잇는 채널의 필요성을 특집으로 다뤘었다. 여야가 뒤바뀐 정치지형 속에서 새 정권과의 소통창구 부재로 TK지역의 각종 국책사업 추진과 국비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와 TK지역의 가교역할을 할 메신저로는 주로 이 지역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리스트에 올랐다. 지난 대선에서 중앙선대위 총괄 위원장을 맡은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경북도의원을 지낸 영주 출신 임미애 국회의원(비례대표),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영입한 안동출신 권오을 전 국회의원, 민주당 대구선대위 총괄위원장을 맡은 허소 대구시당 위원장, 홍의락·최연숙 전 국회의원, 이영수 경북선대위 상임위원장(경북도당위원장) 등의 이름이 거론됐었다. 이들 중 권오을 전 의원은 지난 23일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로 발탁됐고, 이영수 위원장은 농림축산비서관으로 임명됐다. TK지역민에겐 의외의 인물이긴 하지만 서영교 의원(4선)과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수석최고위원)도 이 지역 주요 메신저로 꼽혔다. 이번 대선과정에서 둘 다 TK지역에 대해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상주출신인 서 의원은 대선이 시작되자마자 밤낮 가리지 않고 경북지역 골목골목을 누비며 이재명 후보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다. 김민석 수석최고위원도 대선 당시 TK지역을 전담해 선거운동을 했으며, 최근 대구를 찾아 “대구경북에 책임감과 관심을 갖고 교류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지역 기업인들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재명 정부 5년 청사진을 그릴 국정기획위원회가 현재 가동 중이다. 지난 16일 출범한 이 위원회는 8월 중순까지 두 달간 운영되며, 새 정부 100대 국정과제를 선정한다. TK신공항과 영일만 횡단대교 건설을 비롯한 이 지역 주요 현안이 만약 100대 과제에 포함되지 못하면, 자칫 좌초될 위험이 있다. 지금이 골든타임인 셈이다. 국정기획위가 7개 분과위원회와는 별도로 지역 현안과 지방분권 이슈를 전담할 ‘분권균형발전 특위’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니, 대구시와 경북도는 새 정부 정책기조에 맞는 선제적 정책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지금 TK지역은 광역단체장 리더십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이재명 정부와 중앙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광역단체장의 부재는 이 지역으로선 엄청난 위기다. 현재 대구시와 경북도 모두 부 단체장이 중심이 돼 주요 현안이 100대 과제에 포함될 수 있도록 총력전을 펴고 있지만, 단체장이 직접 발로 뛰는 타 시·도에 비해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구·경북 전 공직자들은 지금을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민주당 대구경북 시·도당을 비롯한 여권 네트워크와 긴밀히 접촉해서 이 지역 현안이 반드시 국정 과제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현안에 대한 시급성과 당위성, 타당성을 담은 자료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여당으로서도 1년여 남은 지방선거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TK민심을 세심하게 챙길 필요가 있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6-24

초여름 숲에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꽤 높고 골이 깊은 산이 있다. 인적이 없는 평일에 가끔 그 산에 들어가 한나절을 보낸다.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많지만, 산이 사람을 좋아 할 것 같지는 않다. 너른 품으로 너그러이 받아주는 지는 몰라도 반길 것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이름 난 산일수록 몰려드는 사람들의 발길에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등산객들을 위한 여러 가지 편의시설들도 사람들은 편리하겠지만 산에게는 상처고 훼손일 터이니. 산행이라면 흔히들 등산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산을 만나러 산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등산이란 말보다는 입산이란 말이 좋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도 입산이라 하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산속 깊숙이 들어가서 우거진 숲속에서 한동안 지내는 걸 좋아한다.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산속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하다. 인가의 소음이 끊긴 대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마음을 청량하게 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뻐꾸기가 울기 시작해서 숲이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에 싸인다. 짝을 부르는 소리라 하니, 숲의 모두가 그 구애의 이벤트에 참여한 셈이다. 현대인들은 각종 스트레스로 마음이 지쳐있는 경우가 많다. 온갖 소음과 정보의 홍수, 관계의 피로, 끝없는 성취에 대한 강박 등으로 몸과 마음에 과부하가 걸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명상센터나 템플 스테이 같은 곳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상을 통해서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현재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불안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과 집중력 향상, 인지 능력 개선 등의 효과를 본다고 한다. 사찰에서 숙박을 하는 템플 스테이도 불교문화와 자연체험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과 내면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내게는 산속의 숲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만의 명상인 셈이다. 일부러 마음을 비우려고도 잡념을 끊으려고도 하지는 않는다. 오관을 활짝 열어놓고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다. 마음도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한참을 따라가 본다. 햇빛을 반짝이며 바람에 팔랑거리는 나뭇잎도 한동안 바라보고 수줍게 피어있는 산유화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물아일체로 자연과 내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나는 어느새 세상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근심걱정도 스트레스도 사라진 상태가 된다. 초여름의 숲은 참으로 많은 것은 가지고 있다. 우거진 녹음은 광합성으로 탄수화물을 생성해낸다는 과학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생명의 원천이라 하겠지만, 그 품에 온갖 생명을 키우는 모성을 가졌다. 그래서 숲에 들면 포근하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으로 불릴 만큼 도처에 무성한 숲은 가졌다.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햇빛 찬란하고 녹음 무성한 초여름에도 외롭고 서럽고 고달프고 지친 마음이면 누구든 숲으로 와서 위로와 안식을 얻고 새로운 기운을 충전하기 바란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6-23

왜 부자에게 투표하는가

평생 가난에 찌들어도 매번 부자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그들은 쉽게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애국심의 원천이 분노인 사람이 있다. 사실을 무시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냉철한 이성이 아닌 도덕적 잣대로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하지만 진보가 아니라 외치는 사람이 있다. 부자보다, 똑똑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경오염으로 건강을 잃고서도 오히려 환경규제를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세금 부담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대기업 감세를 외치는 정당의 깃발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항해의 목적은 대부분은 편안함과 즐거움! 배가 도착할 최종 목적지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다. 그저 바람 부는 데로 흘러갈 뿐. 이들이 행사하는 한 표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신이 되고 싶은 계급? 실패한 부자? 지식인에 대한 혐오? 믿고 싶은 이야기? 자신을 노예로 만든 사람들의 신화? 가난의 이데올로기? 이해 아닌 소속감? 이들이 정치를 이야기할 때, 분노는 설득보다 빠르며, 자신의 고통보다 남의 특혜에 더 분노한다. 이들에게는 적이 필요하다. 적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라도 공격한다. 그냥 적이면 된다. 그 적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누군가 만들어 준 적에 대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칼을 휘두른다. 그 칼부림으로 이들은 더욱 피폐해진다. 혹시 내가 이들에 속하지 않은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정치적 감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작동한다. 이때의 다수는 이성적 다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다수가 감정적 다수라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성적 다수는 감정적 다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견해가 분노로부터 출발하였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견해를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들의 정치적 견해란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설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힘 있는 자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들의 분노를 제공받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더 큰 분노를 요구한다. 애국심에 불타는 이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목을 조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표를 던진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적인 가장들임에도 자기 아이들이 대학 교육이나 적절한 의료혜택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에 조심스레 동조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몰락한 공업 도시로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릴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자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갈채를 보낸다. 이곳이 어디인가? 분노는 애국심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상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이들에게 정말로 정치의 적이 있다면 그 진짜 적은,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평범한 그들(이웃)이 아니라, 이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설계한 힘 있는 자들(권력자, 정치인, 재벌, 언론사, 엘리트)일 가능성이 많다. /공봉학 변호사

2025-06-23

국민의힘, 혁신 없이 미래 없다

보수정치의 미래가 암울하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가짜보수는 민심을 모른다. 대선에 패배하고도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생각하니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혁신의지도 없다. 오죽하면 보수진영 내에서도 “망해야 정신 차린다.”, “당을 해체하라”는 등의 격앙된 반응이 나오겠는가. 보수의 참패는 자업자득이요 인과응보다. 중병에 걸린 환자가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패배의 원인을 알려면 진정한 반성이 필요하고, 그 반성을 토대로 환골탈태할 때 비로소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개혁 성향의 젊은 비대위원장 김용태가 “대선 패배에 대한 오답노트를 제대로 작성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인식이다. 보수가 자기비판에 인색하거나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 재기는 불가능하다. 무엇을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을 외면하고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던 부끄러운 정치행태다. 이른바 ‘윤핵관’과 ‘친윤’으로 지칭되는 권력 해바라기들이 정당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당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양남(영남+강남)지역’ 의원들로서 권력에 줄 서는 선수들이다. 비상계엄은 잘못이라면서도 탄핵에는 반대하고, 정상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후보 김문수를 한덕수로 교체하려고 한밤중에 쿠데타를 벌인 것도 이들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당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진정한 반성과 혁신이 될 리가 없다.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제안한 ‘5대 개혁안’은 보수의 재기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에도 친윤들은 반발했고, ‘윤핵관 권성동’은 의원총회 40분 전에 비대위원장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회의를 취소했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낡은 보수가 개혁 보수의 당연한 요구를 거부했으니 민심 이반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최근 국민의힘 지지율(21%)이 민주당(46%)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한국갤럽, 6월 13일). 게다가 신임 원내대표는 친윤과 TK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송언석(3선·김천)의원이 당선되었다. 김 비대위원장의 개혁안에 반대했던 송 대표가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당을 쇄신하겠다니 개혁도 ‘내로남불’이 아닌가. 둘 중 누가 더 개혁적인가는 삼척동자도 안다. 민심의 엄중한 명령을 받들어 ‘당 해체 수준의 혁신’을 추진해야 함에도 위기모면용으로 개혁하는 척 흉내만 내거나, 자신을 밀어준 친윤·TK의 정서에 신경을 쓰면 떠난 민심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혁명은 단칼에 반대 세력을 제거할 수 있지만,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안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개혁의 대의를 망각하고 사익에 혈안이 된 ‘낡고 늙은 보수’와 결별해야 민심이 돌아온다. 더 이상 국민이 외면하면 재기하기 어렵다. 국민의힘은 뼈저린 반성과 혁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지 않으면 미래가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6-23

미국이 폭격한 이스파한은…

지난 21일. 미국은 핵 관련 시설이 있다고 의심되는 이란의 세 도시를 폭격했다. 땅 속 깊숙이 들어가 모든 걸 파괴하는 이른바 ‘벙커 버스터’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지닌 토마호크 미사일이 이란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이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를 괴롭히던 핵 위협을 제거했다”고 큰소리쳤지만, 과장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란의 핵 시설 대부분은 아직 무사하다고 한다. 지구 위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고성능 미사일을 쏟아 붓고도 목적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 외에도 다른 문제가 더 있다. 미군이 폭격한 도시 가운데 한 곳이 이스파한이다. 이란의 고농축 우라늄 절반 이상이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기에 표적으로 지목됐을 터. 이스파한은 수백 년간 부침을 지속한 사파비 왕조의 수도다. 이맘광장 주위로 화려하게 솟은 자메 모스크와 알리 카푸 궁전은 이슬람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앞으로도 보존돼야 마땅할. 그건 미국 것도 아니고, 이란 사람들만의 것도 아니다. 또한, 이스파한엔 ‘사람이 살고 있다’. 이스파한 주민의 절대다수는 난마(亂麻)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란-미국, 이란-이스라엘 전쟁과 무관한 양민들. 제아무리 최첨단 미사일이라도 오폭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는 전쟁과는 무관한 여성과 아이들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2011년 초여름. 오렌지색 불빛이 예쁜 이스파한 카주 다리 아래서 이란의 한 사내에게 구운 닭고기와 토마토를 얻어먹었다. 기자 앞에서 커다란 눈망울을 빛내며 착하게 웃던 그의 딸과 아들이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비는 오늘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6-23

‘가재는 게편’인 구미시의회

여러 시민들이 지켜보는 공공장소에서 시의회 사무국 직원의 뺨을 때리고 폭언을 하는 등 공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구미시의회 안주찬의원에 대한 징계가 23일 본회의 안건심의에서 30일 출석정지로 당초예상보다 한단계 낮게 결정됐다. 안의원에 대한 제명과 처벌을 요구하며 잇따라 규탄집회를 열어왔던 구미시공무원노동조합은 물론 일부 시의원까지 당혹감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곽병주 구미시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이날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며 “퇴출되어야할 동료의원을 감싸고 도는 지방의원들의 행위는 스스로를 범죄집단임을 자인하는 꼴”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향후 경북공무원노조연맹과 시민단체 등과 연대한 규탄집회를 열어나갈 것"이라며 반발을 예고했다. 지난 9일 안 의원을 제명하기로 의결하고 본회의에 징계안건을 회부한 시의회 윤리특별위 허민근 위원장도 이날 징계처분 결과에 대해 “좋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해 죄송스럽다”며 “향후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박교상 구미시의장 역시 “의장 개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시의원 개개인들도 표결 결과에 따른 시민들의 질책과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 아니겠냐”며 유감을 표명했다. 이날 징계 수위가 최종 결정되자 당사자격인 구미시의회 사무국 직원들은 더욱 격앙했다. 폭력피해 당사자는 이 사안에 대해 묵묵부답하고 있지만 주변 동료 직원들은 “가해자인 안의원께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반성과 사과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며 “ 참회하지 않는 폭력가해자에게 방패가 되어주고 징계수위를 낮추어주는 동료 의원들의 태도를 보면서 역시 ‘가재는 게편’ 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비난했다. 사실 이날 제명 징계처분이 부결된 것은 의외의 결과였다는 후문이다. 많은 의원들이 시민들의 공개적 비난과 언론의 거센 비판에 고개를 숙이며 ‘제명처분이 불가피하다’ 는 분위기가 당초 예상이었다. 예상됐던 징계수위가 갑자기 뒤틀린 과정을 놓고 확인되지 않은 여러 루머까지 나돌고 있는 지경이다. 과정이 어찌됐든 이날 징계수위 변경으로 징계대상자인 안의원은 제명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 대신 나머지 24명 시의원들은 ‘여론 비난의 짐’을 모두 함께 떠안게 됐다. 동료의원의 허물을 덜어주고 감싸주려는 얄팍한 호의와 동정심이 ‘가재는 게편’이라는 비판의 굴레에서 구미시의원들은 과연 자유롭고 떳떳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류승완기자 ryusw@kbmaeil.com

2025-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