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한파(寒波)가 이어지고 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를 더 매섭게 만드는 것은 칼바람이다. 바람에 칼날이 달렸다는 뜻을 가진 복합어 ‘칼바람’은 요즘 같은 추위를 잘 드러내는 어휘다. 지난 1월 20일이 대한(大寒)이었고, 지금 계속되는 한파는 대한의 끝자락이라 할 것이다. 하되, 2월 4일이면 봄을 알리는 입춘이다. 어쩌랴, 시작과 끝은 만나기 마련인 것을!
복층 베란다에서 창밖을 보면 여러 감회가 오간다. 서북풍이 휘휘, 소리 내며 지나가면 감나무 앙상한 줄기가 세찬 바람에 흔들린다. ‘세한도’의 소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하지만, 전신을 떨며 고적(孤寂)하게 서 있다. 지나치게 자라나 이웃집 지붕을 관통한 장미는 전지(剪枝)된 채 갈색 이파리만 우줄 우줄 흔들린다. 가로등 전선도 어쩔 줄 모르고 바람에 자못 위태롭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보면 청도와 창녕을 잇는 20번 국도에 트럭과 승용차 무리가 가도(街道)를 질주한다. 스치듯 오가는 차량 행렬 기사들은 언제 다시 재회할지 알 도리 없다. 주말 아침부터 그들을 차가운 거리로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필시 그것은 생존 욕망을 채워줄 필수적인 경제활동일 터다. 삶의 기반은 오래 살아남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보존된 안쪽 공간에서 밖으로 나가면 상황이 일변(一變)한다. 찬바람이 어느새 목덜미를 휘감고 살갗을 매섭게 찔러온다. 부신 햇빛 아래 웅크린 채 사위(四圍) 돌아본다.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새어 나온 물이 밤새 얼어붙어 굵은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붉은 남천 이파리들은 허수아비처럼 몸을 비틀며 바람의 기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다.
잠시 숨 고르며 생각한다. 온실 효과로 포근한 베란다 안쪽의 공간과 차가운 대기에 노출된 외부의 차이를 숙고한다.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안과 밖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폭력적인 자연에 저항하여 인간은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그들만의 영역을 건설한다. 이름하여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공격에 무방비로 방치되지 않는 문명 공동체!
하지만 계급과 종교와 국가가 생겨나면서 문명 공동체의 허울은 쉽게 벗겨져 나간다. 문자 지식과 창칼의 무력과 우월한 경제 권력을 앞세운 소수의 인간 무리가 다수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문화가 뿌리 깊게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30만 년 사피엔스 역사에서 불과 1만 년 전에 형성된 계급과 지배-피지배 관계는 21세기 20년대에도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맹추위 속에 누군가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혹자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한파와 맞서야 하는 엄혹한 시절. 여기서 떠오르는 장편소설의 놀라운 문장. “부자는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의 짧지만,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나는 자유보다 평등을, 평등보다 형제애를 주장해왔다. 부자들이 내세우는 자유, 가난뱅이들이 외치는 평등이 아니라, 양자 모두 인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전제에 동의하는 ‘형제애’야말로 우리의 미래 아닐까. 안과 밖의 거리가 최대한 좁혀지기를 고대하는 차가운 아침이 지나간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