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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리, 국어 사전 읽으실래요?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오늘 사전을 세 권 샀습니다. ‘국어 어원 사전’, ‘우리말 어감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입니다. 갑자기 웬 사전이냐고요? 고백하자면, 몇 달 전 책을 정리하면서 크고 두꺼운 국어사전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 있습니다. 이 사전은 작지만 풀이가 아주 길고 예문까지 있어서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전이라고 하면 딱딱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개성 있는 사전도 있습니다.‘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사전에 미친 두 남자를 취재한 NHK 다큐멘터리에 추가 자료를 덧붙인 책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사전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의 야마다 다다오와 표제어가 145만 개나 되는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겐보 히데토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도쿄대학 동기인 데다 ‘메이카이 국어사전’을 같이 편찬했지만, 그 후 교류를 끊고 각자 개성 넘치는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제가 특히 눈이 가는 사전은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입니다. ‘연애’를 예로 들면,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또는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이 풀이를 보니, 영화 ‘행복한 사전’이 생각납니다.영화 ‘행복한 사전’의 주인공 마지메는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하는데, 하숙집 주인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를 짝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지메에게 사전 편집부 직원들은 ‘사랑’ 풀이를 맡깁니다. 드디어 마지메는 가구야에게 고백하면서 사랑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깨나 그 사람의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자기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딱 맞는 단어를 찾은 것이지요. 영화의 원작 소설 ‘배를 엮다’를 쓴 미우라 시온은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이제 김무림의 ‘국어 어원 사전’을 펼쳐서 ‘사랑’을 찾아봅니다. ‘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라는 풀이 아래 어원이 나와 있습니다. 중세 국어의 ‘ㅅ·랑(ㅎ·다)’의 기본 의미는 ‘생각(하다)’였다고 합니다. ‘우리말 어감 사전’을 보니, 애인과 연인을 구분해줍니다. 애인은 구어체에, 연인은 문어체에 쓰고, 애인은 한 사람을 가리키지만 연인은 한 쌍을 가리킬 때도 많다는 것을 예문을 들어 설명해줍니다.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에도 의미가 비슷한 단어들을 꾸러미로 묶어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줍니다.영화 ‘행복한 사전’에 ‘사전이란 말의 바다를 건너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말을 찾아주는 기적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렇게 개성 있는 사전을 읽으며 기적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삶도 기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2021-11-15

음악저작권 투자

음악저작권 투자란 국내 대표적인 음악 저작권 거래 플랫폼 뮤직카우를 통해 주식처럼 ‘음악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을 사고 파는 행위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기법이다. 뮤직테크 플랫폼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방법은 음악 저작권 평가액 매수·매도를 통한 시세차익과 매달 배당처럼 나오는 저작권료 등 크게 2가지다.예를 들어 지난 6월 악동뮤지션의 ‘I Love You’ 저작권을 매수했다면 매달 저작권료가 뮤직카우 내 지갑에 쌓인다. 해당 플랫폼에서는 ‘캐쉬’란 단위로 음악 저작권을 구매할 수 있다. 캐쉬는 현금과 단위가 같다. 즉 1캐쉬가 1원이다. 국내계좌로 출금 시 출금 금액이 1만원 이하인 경우 500원의 수수료가 발생하고, 월 2회는 무료다. 이 거래의 누적 거래액은 지난 10월말 기준 2천500억원을 훌쩍 넘긴 것으로 집계됐다.음악 저작권 구매방식은 주식과 비슷하다. 이용자가 매매가를 적어 구매주문을 걸어 놓으면, 해당 가격에 매도하겠다는 매도자와 거래가 자동으로 체결된다. 음악 저작권료의 현재가는 가장 최근 체결된 매매가다. 거래가 체결되는 금액으로 시세가 정해지기 때문에, 언제든지 곡의 흥행성, 곡 자체의 특수성에 따라 시세가 변동될 수 있다.다만 뮤직카우에서 거래되는 것은 저작권의 지분이 아니라, ‘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이다. 저작권료참여청구권은 해당 음악의 저작권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구매한 지분 비율로 지급받을 수 있는 권리다. 즉 특정한 곡의 저작권은 법적으로 이 저작권플랫폼이 보유하고 있고 투자자들은 이 플랫폼과 저작권료를 나누는 계약을 맺는 것이다.음악저작권 투자는 자산을 불리는 데 유력한 또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1-15

지역 축제 메타버스 옷을 입다

백선기​​​​​​​​​​​​​​칠곡군수 코로나19가 확산세가 1년 반을 넘어서면서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인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백신접종과 함께 감소하길 기대했으나, 감소는 커녕 전파력이 더 빠른 델타변이 바이러스로 변종되면서 포스트 코로나가 슬며시 위드 코로나로 바뀌고 있다.정부도 ‘종식’보다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오더라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갖추는 것에 정책 목표를 두고 있다.이렇듯 코로나19로 비대면 방식이 확산되면서 가상 세계와 현재의 세계가 무경계화 되는 메타버스시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메타버스(Metaverse)란 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상에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뜻한다.온라인 속 3차원 입체 가상세계에서 아바타의 모습으로 구현된 개인들이 서로 소통하고, 놀이하고, 소비하고, 일하고, 돈을 버는 등 현실의 활동을 그대로 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메타버스에서의 영역은 단순 교류를 넘어 정치, 경제, 노동, 의료, 교육, 쇼핑, 공연 등으로 까지 활동범위가 크게 넓어지고 있다. 세계 메타버스 시장은 올해 35조원으로 추정되며, 2025년에는 34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글로벌 통계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다국적 기업들도 메타버스 분야에 사활을 걸고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칠곡군은 코로나19로 중단된 주민들의 공연에 대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고 지역 대표 축제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인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에 메타버스를 도입했다.자치단체에서는 축제에 메타버스의 옷을 입힌 것은 최초의 시도라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메타버스에서 제대로 된 축제가 열릴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백신 패스’가 없어도, 안전사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칠곡군은 코로나19에 맞서 기간과 공간을 확장하고 온라인으로 관람객을 유도했다.또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온·오프라인으로 행사 비중을 탄력적으로 조절하고 마을로 찾아가는 소규모 공연으로 코로나 확산을 예방했다.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은 9월 1일부터 10월 14일까지 44일간의 사전 축전에 이어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 본 축전이 이어졌다.메타버스 축전장은 포스터, 대축전 공식홈페이지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입장하고 게임 캐릭터를 만들 듯 아바타를 꾸미고, 별명을 설정한 뒤 행사장 곳곳을 누빌 수 있었다. 관람객들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만나 편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소통하기도 했다.축전장에는 △평화라디오 △전국민퀴즈쇼 △최태성 역사 토크쇼 △칠곡 커머스 경매쇼 △평화반디 백일장 △칠곡 메타버스 오십오게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농특산물 홍보관, 산업홍보관, 네이버 쇼핑을 이용한 라이브 커머스 등도 마련했다.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이 위드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축제 콘텐츠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칠곡군에서 불기 시작한 메타버스 축제 훈풍은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대구의 대표적 도심 축제 중 하나인 ‘동성로축제’와 경상남도를 대표하는 축제인 ‘남해 독일마을 맥주축제’도 메타버스를 도입해 신개념의 문화 축제로 펼쳐졌다.강원도는 메타버스를 커피 축제에 도입해 200만 접속이라는 대박을 쳤고, 대한민국 국군장병들과 60년을 함께 해온 국내 최장수 버라이어티쇼 ‘위문열차’도 메타버스 공간에서 열렸다.이러한 자치단체가 주관하는 메타버스 축제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와 함께 아직까지 대기업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져 아바타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콘텐츠가 단순하거나 흥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기술력과 콘텐츠를 보완하고 인문학적 스토리와 상상력을 총동원해 새로운 트렌드에 발맞춰 나가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축제와 메타버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기 때문이다.

2021-11-14

길이 달콤하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걷기에 참 좋다. 여름부터 포항 여기저기를 찾아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가을이 깊도록 이어졌다. 철길숲의 맨 끝 지점인 효자교회에서 유강까지 가는 코스를 걸었다. 가장 최근에 꾸미기 시작한 길이라 미완성이다. 유강에 이르러서는 흙길이라 걷기엔 폭삭해서 좋은데 비 오는 날엔 질척거려 신발에 진흙이 다 달라붙었다. 가로수는 덜 자라 햇볕을 다 가리지 못한다.그래도 새길을 걷는 맛이 있다. 지나는 이도 다른 길에 비해 적어 소란스럽지 않아 가을 아침 공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기찻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남은 가을을 붙잡고 흔들고 여름꽃인 미국수국이 갈바람이 시린지 남은 꽃잎 끝을 말리고 있다. 나무에 내걸린 풍경이 바람에 스치운다. 새벽부터 출근한 새소리가 덧입혀져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그때, 함께 걷던 진아씨가 묻는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시골 출신이라 도시녀에 비해 꽃과 나무 이름 몇개 더 알고 있다고 무엇이든 자꾸 물어온다. 푸힛, 사실은 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다. 잎 모양이 지난해 청하중학교 교정에서 본 나무였다. 함께 간 순옥언니가 아들과 함께 심었다는 그 나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입속에서만 가물거렸다.스마트폰이 나설 때다. 가까이 가서 꽃과 잎이 자세히 나오게 사진을 찍어 검색란에 올리자 비슷한 무리의 꽃나무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중에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은목서’, 처음 들었을 때 나무 이름보다 역사책 언저리에 써진 선비 이름 같다고 느꼈던 그 이름 맞았다. ‘은’은 하얀 꽃이 펴서 붙여진 것일 테고, 목은 나무, 그럼 서(犀)는 무슨 뜻일까, 한자를 찾아보니 무소 서였다. 수피가 코뿔소의 피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가니 향이향이, 끝내줬다.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도 뚫고 들어와 내 몸을 달달하게 만들었다. 꽃 이름을 물은 진아씨에게 얼른 향기를 맡아보라고 했다. 원래 냄새를 잘 못 느낀다며 마스크를 벗고 나무 가까이 코를 들이밀었다. 앗 따거, 뾰족한 잎에 찔려 화들짝 놀란다. 달콤한 향기와 달리 가시를 세운 잎 모양이 독특하다. 나도 조심조심 가지 마디에 피어난 꽃잎에 코를 파묻고 향을 흠뻑 받아들였다.한껏 향에 취한 뒤 나무 전체를 찍으려고 뒤로 물러서니 그 옆에 가로수들이 은목서였다. 대부분의 나무가 떨켜를 만드는 서늘한 늦가을에 이제서야 하얗게 꽃문을 여는 나무를 만나서인지 신기하고 반가웠다. 아기 손톱 같은 몽오리들이 오종종하니 피었는데도 향기는 길을 가득 채웠다.향에 취해 한번은 아쉬워 그 길을 두어 번 오갔다. 내일 또 오자하고 돌아섰다.나무 사전에는 팔월에서 시월에 핀다고 하는데 지금은 십일월이다. 사전의 내용을 고쳐 써야겠다. 열매는 다음 해 이월 삼월에 맺힌다고 하는데 진아씨는 4월쯤에 몇 개 주우러 오겠다고 한다. 나는 종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꽃집을 하는 친구에게 은목서 한 그루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고양이를 입양한 후 그 좋아하던 꽃을 포기했었다. 고양이 호흡기에 꽃이 독이 된다 해서 꽃병이 여러 날 휴업상태였다. 그런 이유를 곱씹어봐도 은목서는 탐이 났다. 고양이 보리가 관심을 기울이면 시댁 마당에 심기로 하고 질러 버렸다. 며칠 후면 은목서는 우리 식구 이름이 될 것이다.“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아무 하안나무 토끼 한 마리.” 노래에 나오는 계수나무가 목서라고 한다. 주황색의 꽃이 피면 금목서 하얀색이 피면 은목서이다. 향이 좋아서 샤넬넘버.5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니 효자교회 근처 철길숲은 지금 고급 향수의 바다다.신기한 건 하나 더 있다. 뾰족하던 잎이 나무가 성숙할수록 둥그스름해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모가 난 내 마음도 나이가 들면 조금씩 무뎌질 거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은목서를 가까이 두고 마음지침서로 들춰봐야 가능한 일이다. /김순희(수필가)

2021-11-14

소리조경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꽃구경 할 일도 많지 않은 늦가을인데 기청산식물원에 가고 싶어진다. 아주 천천히 잎을 피워서 키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잘 받아서 무럭무럭 크도록 한다는 나무. 듬성듬성 잎을 피우지만 잎을 피운 자리는 잔가지가 많아 매의 날카로운 눈도 피할 수 있어 새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나무.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아 ‘조경의 마지막은 소리조경이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나무. 그 ‘외롭고 높고 쓸쓸한’ 느릅나무가 보고 싶어서다.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만하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만 들으려는 사람이 늘어나서일까? ‘소리조경’은 고사하고 참 소란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듣는 이의 정서나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빠르고 큰 소리로 눌러버리려고만 하지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휴대폰을 끼고 살다보니 혼자서도 시끄러운 시대가 돼버렸다. 소리도 처방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버렸다.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3배 빠르게 재생하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나고 8배 빨리하면 귀뚜라미소리가 난다고 한다. 또 3옥타브 내리면 돌고래 소리와 닮았고 8옥타브를 내리면 파도의 밀물, 썰물소리와 닮았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예언한 대로 지구의 생물들 간의 소리는 조화로운 비율의 원리가 반영되어있다. 소리와 음악은 이처럼 신비롭다. 우리는 왜 그 조화로움을 잃어버린 것일까?신선도를 수련하는 중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물이 도와 같다는데 어떤 연유입니까?”“네 옷이 더러우니 우선 빨래부터 하고 오너라.”제자가 빨래를 해서 가져가니 스승이 물었다.“그래, 옷이 어떠냐?” “예, 깨끗해졌습니다.”“네 더러움을 누가 가져갔느냐?” “물입니다.”“그럼, 너는 물한테 무엇을 줄래?”이런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대화가 그립다. 흐르는 물소리에 맞서는 음악은 없다. 물소리는 사람은 물론 만물이 그 생명을 유지하는 움직임의 소리이므로 가장 깊은 소리이며, 근원적인 힘을 가진 소리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을 이렇게 얘기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고루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그리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나니, 그런 까닭에 거의 물은 도에 가깝다.” 속은 올곧고 굳세어 쉬지 않고 아래로 흐르지만 겉으로는 유약한 듯 부드러우니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융통성 있게 에둘러가며 주변의 땅 생김새를 따른다. 바로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전형적인 군자의 덕이요 모습이니, 도덕을 잃지 않으며 또한 현실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니 물소리는 세상의 가장 큰 음악이고 소리조경인지도 모른다.정화수 한 그릇을 받으러 가는 길에 행여 길바닥에 나와 밤잠 자는 벌레들을 죽일까봐 대나무가지로 길을 쓸며가는 빗질소리도 그립다. 새벽 1시 동네의 우물에 맨 처음 고이는 맑은 물을 한 그릇 떠놓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하늘의 별과 나무와 바위에 빌던 우리 옛 분들의 마음은 이미 그 물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풍물놀이에서 쇠가락을 물 흐르듯이 치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마음호흡을 물과 같이 하라는 말과 같다. 대교무교(大巧無巧), 기교의 단순 복잡을 넘어 서는 기운 생동함을 깨치자는 말이다. 범패, 특히 쌍계사 진감국사의 어산(魚山)은 해 떠오를 무렵 섬진강 물고기들의 비약에서 발원 되었다고 한다. 꽹과리소리에 생명의 약동과 비약을 안아 들인 것이다. 쇠를 물 흐르듯이 치라는 말은 그 물속에서 흐름을 타고 노는 물고기처럼 가라앉고 뛰어오르는 것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솟는듯하다 잠기고 잠겼다 다시 솟아오르는 싱싱한 물고기장단을 치라는 말이다. 꽹과리도 물의 덕성을 알아야 세상 사람이 듣기 좋은 신명난 소리를 낸다니 세상의 으뜸소리는 물소리인 듯하다.가을이 깊었다. 깊은 산사라도 찾아가 이른 새벽에 바위 하나를 찾아 가만히 앉아보라. 삭. 삭.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면 나는 비로소 고요해진 것이다. 세상의 많은 소리들이 어지러울 때 신라의 최치원은 계곡물로 벽을 쳐 세상소리를 못 들어오게 했다니 참 멋진 ‘소리조경’이지 않은가! 우리를 생기 돌게 하는 가을의 소리들을 챙겨듣자.사람이 내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입은 하나고 귀가 두 개인 것처럼 말을 줄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자. 그렇게 많이들은 사람들의 말이라야 세상을 위로할 수 있다. 따뜻한 위로의 말, 고개를 끄떡이며 ‘그래 맞아’하는 공감의 말은 좋은 관계의 추임새다. 느릅나무에 찾아와 노래하는 꾀꼬리만큼은 아니지만 ‘귀로 먹는 약’은 될 수 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하는 말은 소음일까 소통일까? 이래저래 ‘소리조경’이 필요한 시대다.

2021-11-14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은 다시 오는데

박문하전 포항시의회 의장 우리는 5년마다 반복하여 축제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대통령 선거의 계절만 다가오면 동서고금의 성공했거나 실패한 지도자들의 면면을 떠올리면서 나름대로 선택의 기준과 원칙을 정해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인물에게 투표를 한다. 이번에 선택한 인물이 역사와 국민 앞에 자랑스러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결정하지만 지나간 대통령들은 대부분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건국 이후 19대에 걸쳐 총 12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한국대통령들의 잔혹사는 우리 정치가 이보다 더 후진적이고 비극적일 수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같아 참으로 착잡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현명한 군주를 찾았지만 유능한 리더의 덕목과 기준은 너무도 엄격하여 시공을 다 뒤져봐도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모두가 인정하는 지도자를 찾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는 것 같다.해마다 연말이 되면 교수 1천명의 조사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고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지난해(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이지만 원래 존재하는 고사성어는 아니다. ‘내로남불’을 한자어로 바꾼 신조어로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똑같은 상황에 부딪쳐도 남은 비난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럽다는 이 말은 특권과 반칙, 거짓과 위선이 팽배한 현 시대상을 그대로 표현한 단어여서 씁씁함을 감출 길 없다.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전회 모두 매진된 세익스피어의 연극 ‘리어왕’의 주연을 맡은 87세의 원로배우는 다가오는 대선의 계절에 대통령 후보들에게 바라는 3가지 만큼은 꼭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면서 어려운 말문을 열었다.우선 국민 통합이 중요하며 나를 반대한 사람도 국민임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과거로 후퇴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미래를 향한 비전은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도덕적으로 청렴해야 한다. 대통령자리는 돈 먹는 자리가 아니다. 법위에 군림하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국민의 엄중한 명령을 받들어 국가를 잘 보존하고 형편이 나아지게 해야 한다. 리어왕 분장을 한 노배우는 덧붙인다. 늙을수록 칭찬을 좋아하는데 리어왕도 그러다 속아 넘어가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정치도 매한가지다. 칭찬이나 아첨에 휩쓸리지 말고 아프지만 정직한 충고를 새겨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어둡고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특권과 반칙, 공정과 상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은 당시 지배계층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고 의심을 한다.우리에겐 다소 낯선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모범복지국인 스웨덴에는 ‘타게 엘란데르’ 라는 정치인이 있다. 재임 시절 모든 특권을 버리고 오직 국민의 삶속으로 들어와 친구처럼 이웃처럼 보낸 엘란데르 총리가 외투 한 벌, 구두 한 컬례로 23년 총리직을 수행하고 은퇴 후 낙향했을 때 오히려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지지자들 보다 더 많았다고 하니 그의 대화와 타협, 특권 없는 삶 그리고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에 대해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가 어느 정도일까 짐작이 된다. 정계를 은퇴하면 천덕꾸러기가 되어 하루아침에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우리의 정치풍토와 사뭇 대조적이다.타임머신을 타고 600여년전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제4대 군주인 세종대왕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역사상 세종시대 만큼 흙수저의 전성시대가 없었고 부정부패라는 단어를 잊을 만큼 청백리 문무백관들이 넘쳐나는 시기도 없었다. 인재등용에 있어 저울처럼 공평했으며 모든 공은 백성과 신하의 몫으로 떠 넘긴 세종의 리더십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가뭄과 흉년이면 3가지 이상 반찬을 얹지 못하게 했고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날마다 수확량이 많은 벼 품종을 개발하라며 집현전 학자들을 닦달했던 임금의 모습은 오늘을 가는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다시 대통령 선거의 계절은 다가오고 있다. 우리도 미국처럼 전 현직 대통령이 정파를 초월한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국민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정말이지 이 시점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지지층과 비지지층을 분열시켜 전선을 확대시키고 반사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세력이다.역사에는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역사는 거짓도 기록은 하되 진실만을 기억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역사만큼 두려운 단어는 없다. 대통령 선거는 역사의 일부분이다.아직은 누구인지 어느 진영인지 희미하게 보이지만 통합과 공정을 앞 세워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분열과 차별을 선택하여 과거로 후퇴할 것인지는 오로지 국민들의 몫이 될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향해 가고 있다.

2021-11-14

자율재능 드림 콘서트

윤영대수필가 지난 8일 경북교육청문화원 대공연장에서 중학생들로 이루어진 윈드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열렸다. 개교 70주년을 맞은 청하중학교의 제6회 정기연주회였다. 청하중학교는 경상북도교육청이 추진하는 예비미래학교에 지원하여 자율재능학교로 선발되어 각종 특기교육을 실시해온 결과 올해 미래학교로 지정되어 앞으로도 오케스트라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재능을 키워 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자율재능학교는 2015년 시작되어 학생이 편중된 학교와 유휴교실이 있는 인근 학교 간의 win-win사업으로 재능신장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육과정 선도학교를 의미하며, 학생활동 중심의 수업(스포츠), 창의적 체험 활동(승마, 골프),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국악, 음악) 등으로 꿈과 끼를 키우고 학교 교육의 만족도를 향상시킨다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참여 학교들은 이러한 교육 활동으로 학생들의 우정이 돈독해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고 반기고 있다.시골 학교의 학생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고 폐교위기에 처한 초·중등 학교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청하중학교도 지방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옛날 수백 명이던 전교생 수가 올해 100여 명을 조금 넘고 한 학년에 30명도 채우기 힘들어한다. 다행히 자유 학구제와 여러 특별교육 프로그램에 힘입어 ‘아름다운 전원학교, 함께 꿈꾸는 행복학교’라는 슬로건 아래 농어촌 학생들의 적성계발과 문화적 감수성 향상을 목표로 한 ‘1인 1악기’ 프로그램 등으로 올바른 인성 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학교 송림의 이름을 딴 ‘관송 윈드오케스라’를 2014년에 창단하여 포항시향과 대구 음악인들의 헌신적인 지도를 받아 매주 월·화·토 그리고 방학 중에도 연습을 거듭하여 오늘의 알찬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전교생 109명 중 66명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바이올린, 첼로 등 현악기뿐만 아니라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 호른 등 성인에게도 어려운 관악기까지 다루고, 여기에 적성이 맞지 않은 학생은 모듬북반, 사물놀이반, 기타반, 우쿨렐레반, 밴드반 등 음악동아리를 만들어 각자의 특기를 뽐내고 있었다.그날 프로그램을 보니 대단하다. 사물놀이 의상을 입고 북을 신나게 두드리고, 기타 치며 노래하고, 가벼운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모습은 2시간 내내 가슴 뿌듯하게 박수 치게하고 시골 학교 재능꾼들의 벅찬 꿈이 무대 가득 넘쳤다.프로필을 보니 현악4중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학생은 비엔나 음악콩쿠르 대상을 받았고 또 한 명은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각종 콩쿠르에 입상하고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음대 재학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단원들의 노력으로 2016년 제41회, 2019년 제44회 두 번이나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였고 각종 페스티벌 공연과 재능기부 등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농어촌 전원학교에서 자율 재능교육을 받고 계속 그 꿈을 키워 나가는 학생들을 볼 때 지금의 주입식 위주 교육방식도 많이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청하중학교의 꿈 ‘자율재능 드림 콘서트’가 매년 연주되기를 바란다.

2021-11-14

경쟁의 이점

조현태 ​​​​​​​수필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생물은 어떤 형태로든 경쟁을 하면서 산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경쟁으로 인하여 서열도 정해지고 더 큰 이익을 챙기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여 경쟁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경쟁을 부추길 것도 아니다. 어쩌다가 식물도 경쟁한다는 것을 듣고 좀 놀랐다. 고정된 장소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하는 식물이 경쟁할 수가 있을까. 더구나 생각이나 감정도 없이 주어진 토대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을 식물이 있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식물도 경쟁한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예컨대 어떤 산에 다른 수종은 없이 한 종류의 나무만 있다고 하자. 빽빽하게 잘 자라는 듯해도 그 숲은 많이 약한 나무 군락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가 섞여 자란다면 서로가 경쟁하듯 건강한 숲을 이룬다고 한다. 왜냐면 수종마다 영양이라든가 수분의 정도, 혹은 일조량과 해충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필요를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뿌리와 가지, 잎, 줄기는 물론이요 키까지 유리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땅 속에는 뿌리가 다양한 활동을 할 것이요 가지나 줄기는 일조량이 충분하도록 생장해야 하리라. 잎이나 고유한 향기는 해충 또는 유익충에 대처하지 않겠는가.그러나 같은 종류의 나무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필요가 같다면 같은 조건을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다. 공기, 수분, 햇빛, 바람, 온도 등등을 있는 그대로 갈라 먹어야 한다. 그러는 중에 약하거나 자리를 불리하게 잡은 나무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터이다. 나아가서 해충이나 유익충도 같은 영향을 줄 것이 자명하므로 훨씬 단순한 생장을 할 것이다.양식한 물고기보다 자연산을 더 좋게 여긴다거나 밭에서 재배한 인삼보다 자연에서 자란 산삼을 선호하는 까닭이 뭔지를 생각하게 한다.만약에 고양이만 많으면 쥐도 많아야 하지만 고양이와 쥐가 섞여 있으면 굳이 많지 않아도 서로 약삭빠르게 잘 살 궁리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궁리를 하는 측면과 그렇지 않은 상황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터이다.이것이 동물의 세계에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식물도 그러한데 사람에게는 오죽하랴. 문명이 있고 지배력이 있고 지능과 언어까지 있으니 경쟁으로 치면 가장 처절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겠다.안타까운 것은 같은 항목에서 경쟁이 심하다는 데 있다.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지위나 명예 때문에,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같은 목표를 두고 경쟁하면 나눠먹기 밖에 더 되겠는가. 경쟁하는 효과가 떨어지니 결과도 늘 부족할 뿐이다. 돈과 권력을 따로 경쟁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해당 분야의 전문인이 차지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돈에 승리한 사람은 돈만 있고 권력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다. 돈으로 경쟁하여 이긴 사람은 돈이 많고 권력이 적을 뿐이다.식물도 동물도 선한 경쟁을 하건만 유독 인간만 다투어 갈라먹기를 고집하고 있다. 사람이 경쟁을 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제 살 상하게 하는 경쟁보다는 다양한 경쟁을 하면 좋겠다. 이겨서 제 일인자가 되는 경쟁 말이다.

2021-11-14

청년세대를 위해 대선후보가 할 일

심충택 논설위원 어떤 선거든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는 지역이나 사람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지난해 총선에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국책사업으로 성사시킨 PK(부산·경남) 지역이 대표적이다. 내년 대선에서는 아직 대부분 부동층으로 남아 있는 2030세대가 선거 결과를 좌우할 캐스팅보트로 부상하고 있다.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민주화를 거치면서 진보성향이 강한 40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보수성향이 강한 60대이상 고령층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특정 이념에 정착하지 않는 20대와 30대 표심은 두 후보가 모두 놓치고 있다.전체 유권자 중에서 약 3분의1을 차지하는 이들 청년세대는 이념과 지역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선거 당시의 정치 상황과 이슈에 따라 투표하는 ‘스윙보터’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기 이익 중심으로 정치 현안을 판단하기 때문에 정권에 의한 피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충성도가 낮다. 실제 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 당장 현실에 필요한 변화를 제시하는 것에 관심도가 높다.청년세대의 이러한 성향을 인식하고 여야후보들은 최근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부동산과 일자리 공약을 집중적으로 내놓고 있다. 민주당은 선대위에 후보 직속 기구인 ‘청년 플랫폼’을 신설해 당내 청년들을 전면 배치했다. 외부 인사 영입도 준비 중이다. 경선 과정에서 ‘398 후보(20대의 3%, 30대의 9%, 40대의 8% 지지율)’라는 조롱을 들은 윤석열 후보는 첫 공식 일정부터 이준석 대표를 만나 청년세대의 취약한 지지세를 확장할 아이디어를 들었다. 특히 윤 후보는 경선 후 홍준표 의원을 지지했던 청년당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당장 홍 의원의 선거대책위원회 참여는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홍 의원이 젊은 층에 어필했던 장점을 적극 벤치마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다만, 여야후보들이 청년세대들을 향해 경쟁하듯이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는 모습은 걱정스럽다. 대부분 공약이 돈 퍼주기다. 이재명 후보는 청년 기본 대출 1천만원과 연 200만원의 청년 기본 소득을 약속했다. 기본 주택 100만호 중 일부는 청년들에게 우선 배정하겠다고 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세계 여행비 1천만원을 지원해주면 어떠냐는 말까지 했다. 윤석열 후보도 마찬가지다. “저소득층 청년에게 월 50만원의 청년 도약 보장금을 최장 8개월간 지급하겠다”고 했다. 청년 재산 형성 보조도 언급했다.홍준표 의원이 청년세대에게 강한 지지를 받은 것은 국회의원 정원축소와 로스쿨 폐지, 대입 수시 폐지 같은 정책공약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준석 대표 취임 이후 국민의힘 신규당원이 급증한 것도 새로운 정치와 정책 등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회성의 선심경쟁으로는 젊은층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의 미래에 부담을 지우는 포퓰리즘일 뿐이다. 대선후보들은 청년층의 절절한 고민과 기대를 경청하면서 이들의 삶의 질이 실질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 정책공약을 개발하고, 서로 치열하게 공약검증을 하길 바란다.

2021-11-14

인플레이션 공포

미국 블롬버그 통신은 지난달 “밥값과 이발비를 내기 위해 금조각을 떼어내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내용은 베네수엘라에서는 1세기전 금을 교환수단으로 사용하던 시절로 되돌아갔으며 월급도 금으로 주고 호텔 숙박비도 금으로 주고받는다고 했다.베네수엘라는 수년전부터 공식 물가상승률 발표를 하지 않는다. 한때 물가상승률이 수백만%까지 치솟았고, 지금도 수천% 뛰고 있다. 법정화폐의 가치가 떨어져 이 나라와 인접한 콜롬비아 국경지대에서는 베네수엘라 화폐로 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상인도 등장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는 인플레 폐해는 거의 구제불능 상태다.인플레이션은 통화량 증가로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오르는 현상이다. 물가가 오르니 돈 가치가 떨어져 수출이 잘 안된다. 경제 악순환이 이어진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수백%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1980년대 남미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일이다. 표퓰리즘의 근원지 남미 국가들은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하는 바람에 아직도 경제난에 허덕이는 곳이 많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대 산유국이지만 체베스 대통령의 포퓰리즘으로 현재는 하루 소득 2달러가 안되는 극빈층이 70%를 넘는다.미국, 중국의 소비자 물가가 수십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과 남미, 아시아국가도 비슷한 양상이라 한다. 해외 언론은 “물가 폭등으로 올 겨울 굶어 죽는 사람이 급등할 것”이란 소식을 전한다. 국내 소비자 물가상승세도 심상찮다. 일각에선 인플레까지 염려한다. 이런 참에 정치권에서는 표심을 잡겠다고 돈 풀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한심한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14

승자의 저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경제용어에 ‘승자의 저주’란 말이 있다.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승리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치른 것이 본질적인 경쟁력 자체를 약화시켜 정작 시장에서는 승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경쟁에서 이긴 승자에게 무슨 저주가 생긴다는 말일까. 가격을 헤아리기 힘든 고가품을 놓고 경매를 벌인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점점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원래 생각했던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불러 결국 물건을 차지했다. 하지만 실제 물건의 가치가 당신이 지불한 금액보다 낮은 것으로 드러나면, 당신은 경쟁에서 이기고도 손해를 보게된다. 이것이 승자의 저주다.보통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과학고나 외국어고 같은 특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이것이 나중에 대학 진학하는 데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 비해 현저히 높은 아이들의 성적 수준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내신을 획득하지 못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치권에서도 승자의 저주는 자주 나타난다.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면 당 차원에서는 다수당이 되기 위해 국민들이 원하는 공약들을 무차별적으로 내놓는다. 결국 그 선거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너무 무리한 공약들을 내놨을 경우 이행할 수 없게 돼 국민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 다음 선거에서 표심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에 대한 국회 본회의 투표도 마찬가지였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의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탄핵을 주도했던 국회의원들은 이겼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승자의 저주가 찾아왔다. 국회 의석수만을 믿고 힘을 과시했지만, 결국 민심을 거스르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민심은 등을 돌렸고, 탄핵 주도 세력들은 2004년 18대 총선에서 참패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이 아닌 힘의 우위를 앞세운 밀어붙이기 전략은 결국 승자의 저주를 불렀다.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윤석열 후보 역시 선대위 구성을 둘러싸고 ‘승자의 저주’에 맞닥뜨린 모양새다. 윤 후보는 민심에서 10% 남짓 홍준표 후보에게 뒤졌지만 당심에서 크게 앞서 어렵사리 후보가 됐다. 그가 경선 승리를 위해 치러야 했던 비용은 얼마나 될까. 이번 경선에서 보수세력이 정권교체를 위해 반문재인 정서를 묶어내는 구심점으로 선택한 인물이 윤석열이라는 건 최종 확인됐다. 하지만 경선 과정에서 ‘보수 혁신’의 분위기가 사라졌고, 2030세대가 바라는 공정과 정의 등 정치 전반에 대한 개혁 의지가 퇴색된 것은 뼈아픈 대목이다.특히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공정과 정의를 지지하는 2030세대로부터 윤 후보가 지지를 받지못한 것은 윤 후보가 가장 시급히 풀어야 할 지상최대 과제다. 윤 후보가 ‘승자의 저주’를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나갈 지가 향후 대선승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될듯 싶다.

2021-11-11

김장김치

우리의 선조들은 24절기 중 입동(立冬)을 기준으로 해마다 김장을 담근다. 지금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김치 담는 시기가 많이 뒤로 미뤄졌으나 겨울로 들어서는 입동 때가 김장하기 제철이다. 특히 김장재료인 배추와 무 등이 이 시기가 지나면 얼어 싱싱하지 않기 때문이다.김장은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문화다. 엄동설한 3∼4개월 동안 먹을 채소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김장은 저장방법 또한 독특하다. 저장기간 생긴 발효작용으로 김치의 영양을 높이고 풍부한 맛도 내게 된다.김장김치는 배추와 무를 주재료로 하고 미나리, 갓, 마늘, 파, 생강 등을 부재료로 한다. 소금과 젓갈, 고춧가루로 간을 맞추어 겨우내 보관한다. 지역에 따라 특성이 있는데 이는 주로 기온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북쪽지방은 기온이 낮으므로 김장의 간을 싱겁게 하고, 양념도 담백하게 하며 신선미를 살린다. 그러나 남쪽지방은 대개 짜게하고 소금만 쳐서는 맛이 없으므로 젓국을 많이 사용한다. 김치는 동김치, 보쌈김치, 백김치 등 200여 종에 이른다. 우리의 선조는 겨울철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C를 김치를 통해 섭취했다.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김장문화를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세대에서 세대로 기술이 전승되고 김장 담그기를 통해 이웃간 나눔을 실천하고, 공동체적 연대감 형성 문화에 주목한 것이다. 또 다른 나라 문화유산과는 달리 한국 김치의 전수자는 전국민이라는 특징이 있어 흥미롭게 보았다.김장철이다. 우리가 먹는 김장김치는 우리 민족 전통과 맛과 영양소 어느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는 것이 없다. 세계가 인정한 김장김치의 힘이라 하겠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11

포스텍, 어게인 2010!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1968년 미국 하버드 대학의 로젠탈 교수는 상당히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지능측정 검사(IQ)를 실시한 후 결과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뽑은 몇 명의 학생들에게 검사결과가 최상이라고 통지하고 선생님이 이들을 칭찬하게 하였다.그 결과는 놀라웠다. 1년 후 이 학생들의 학습효과는 현저히 증가하였고 성적은 물론 IQ도 향상되는 기적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이것이 그 유명한 로젠탈 효과이다. 남이 알아주고 칭찬해 주면 개인의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논리이다.포스텍은 지난 10일 발표된 중앙일보 대학 평가에서 이공계 분야 국내 1위를 카이스트에 내주고 2위로 내려왔다.국내 대학만 200개가 되는데 이공계 분야 2위란 대단한 것이고 여전히 포스텍은 최일류 대학이라고 부르는데 손색은 없을 것이다.그리고 1994년 처음 중앙일보 랭킹이 발표된 시절 포스텍은 첫해 1위를 한 후 카이스트와 1위 자리를 주고 받아 왔기에 카이스트에 1위를 내준 것이 큰 문제일 수는 없다.그런데 문제는 포스텍의 랭킹이 최근 전반적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대학평가에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두 개의 기관(QS, THE) 랭킹에서 포스텍은 크게 고전하고 있다.물론 이러한 대학평가들이 정확히 대학간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평가기준에 따라 대학의 랭킹들은 들쭉날쭉하여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이유가 어쨌든, 포스텍이 과거 QS 국내 3위, THE는 국내 1위를 하며 세계랭킹 28위까지 갔던 (2010년)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포스텍의 연구력이나 세계적 위상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해외의 경쟁 대학들, 국내의 경쟁대학들의 노력이 포스텍의 노력에 비하여 속도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대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훌륭한 졸업생을 사회에 배출하여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은 우수한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대학이 되어야 한다.87년 개교한 포스텍의 기세는 세계와 경쟁한다는 기개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포스텍은 국내 1위라는 자부심이 확고했었다.포스텍은 10여 년 전 국제화 위원회와 경쟁력 위원회를 발족하면서 2010년 역사적인 영어공용화 캠퍼스 선언을 했다. 포스텍은 포스텍의 경쟁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기개로 전진했고, 세계 28위, 국내 1위라는 국내 어느 대학도 깨지 못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이후 평가기준 등이 바뀐 탓도 있지만, 경쟁 대학들의 연구력과 평판도가 상승 하면서 포스텍은 국내 1위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최근 포스텍은 “어게인 2010”을 외치면서 국제 평가에서 반드시 과거의 명성을 찾아 국내 1위 대학으로 다시 도약하겠다는 결의를 확고히 하고 있다.로젠탈 효과와 비슷하게 “형식이 내용을 좋게 한다”는 논리가 있다.포스텍은 내용이 갖추어진 대학이다. 이제 형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한국대학이 세계 랭킹에서 이룬 최고 랭킹은 여전히 포스텍이 보유하고 있다.포스텍의 “어게인 2010”을 기대해 본다.

2021-11-11

가을 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추수를 마친 들판이 벼들의 키만큼 낮아졌다. 낟알을 떨어낸 볏짚이 줄지어 누워 가을볕에 말라간다. 이는 물론 저절로 된 가을 풍경이 아니다. 땅을 갈아 벼를 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에 자연과 인위(人爲)가 뒤섞였다. 그 인위에는 사람의 육신보다는 기계문명이 더 큰 역할을 했다. 바둑판같은 구획정리,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 곧게 흐르는 수로, 곳곳에 설치된 관정까지 들판도 이제는 상당히 문명화 된 모습이다. 비료와 살충제, 제초제 같은 농약이 없어도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들판의 가을 풍경에는 이런 내막이 있다.갈색으로 보호색을 바꾼 메뚜기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란 속담이 있듯이 철지난 메뚜기다. 꼬투리 터진 콩알처럼 튀어 달아나던 한창 때의 모습이 아니다. 이번 가을에 새삼 발견한 것은 메뚜기들이 작아졌다는 사실이다. 제초제와 살충제 때문에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알겠는데, 메뚜기들의 몸집이 절반가량이나 작아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비와 잠자리도 이따금 눈앞을 스친다. 아직은 쑥부쟁이 같은 늦게 핀 꽃들이 있으니 나비의 역할도 남았으리라. 늦가을 들판에는 바야흐로 억새가 제철을 맞는다. 억새는 노후가 유난히 길고 젊은 시절보다 더 환한 모습이다.들판을 휘돌아 흐르는 냇바닥에 우거진 풀들은 제멋대로다. 일 년에 한두 차례 큰물이 져서 휩쓸리기도 하지만 저절로 난 풀과 나무들이 길길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억새와 갈대가 주종이지만 군데군데 버드나무도 있고 그 틈새를 비집고 온갖 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무질서하고 혼잡한 자연의 숲이다. 그 속에서 새들은 둥지를 틀고 고라니가 몸을 숨기기도 한다. 사실 냇바닥의 생태계는 오래된 자연의 모습은 아니다. 골재를 채취하거나 준설을 하면서 파낸 냇바닥을 자연이 급조한 생태계인 셈이다. 그런 혼잡에도 불구하고 봄철에는 신록으로 여름에는 녹음으로 지금은 가을빛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가을 길에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가을 빛이 있고 그것이 또 정서의 강을 이루기도 한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열정을 지나 가을에는 차분해지고 완숙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다 놓아버리고 허허로워지는 계절이다. 자연의 가을이 그렇고 인생의 가을도 그렇다. 가을에는 가을 길을 갈 일이다. 가을의 산천초목이 내어주는 길, 높푸른 하늘 흰 구름이 써늘해진 바람이 가리키는 길이 있다. 아무튼 한 두 마디 시적인 문장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태의 모습들이 가을 들길이다.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도 한다. 사람에 따라 그 길은 다양하고 우여곡절이 많기도 할 것이다. 탄탄대로거나 꽃길이거나 난마처럼 뒤엉킨 길이거나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같은 길이다. 그러나 산천초목이 일사불란 계절을 따라가듯이 인생에도 어디든 희망의 이정표가 없지는 않은 게 섭리다. 다만 욕심이나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할 뿐이다. 생명의 이정표, 대자연의 이정표를 수시로 확인하는 삶이라야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2021-11-11

의존의 병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심리학자 가토 다이조는 의존심리가 강한 사회는 공포와 적대감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든다고 했다. 의존심리는 자주, 자존, 자립심의 결여로 인한 나약함과 그에 따른 불안, 공포,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힘 있는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존심리가 보편화 되면 힘 있는 것에 의존하고 기생하는 ‘의존병의 사회’가 되어 병든 세상이 되어 버린다. 이반 일리치는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병도 병원에만 의존하는 지나친 의존심을 ‘의원병(醫原病)’이라고 했고 이 병이 보편화가 되는 ‘의원병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한 자율권을 잃어버리고 병원과 의사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속사회가 된다 했다. 의존병은 마음의 지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 해 줄 수 있는 것을 외부 세계에서 찾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일원이 되거나 극단적인 정치사상 집단에 들어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은 의존에만 빠지는 신앙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외세 의존적 독립과 전쟁을 치른 우리는 지금도 자율권의 침해와 그 영향을 지금도 받고 있다.예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라는 거대한 지배체제가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부패한 성전신앙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지배체제에 의존하지 않으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로마와 성전기득권자에 의존하여 살고자 하는 의존의 병에 걸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인 마음의 지주와 자율성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의존병에 든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사건이다. 베데스다 못은 간헐 온천으로 물이 끓어오를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쳤다. 여기에 예수가 방문 하였고 38년이 되어도 병을 고치지 못한 병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들어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나를 들어 못에 넣어주길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그의 진짜 병은 의존의 병이었다. 예수는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성전기득권자의 지배체제에 의존하며 살고자 했던 의존병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자유의지를 되찾아 자주하고 자존하는 건강한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구티에레즈는 “나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고 했다. 남의 우물물에 의존하지 말고 내 우물에서 살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의존기립과 의존보행을 극복하고 자발기행, 자발보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의존병의 사회를 구원함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고쳐야 할 병이 아닐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2021-11-10

말로는 부족한

양태순 수필가 마음에서 말이 되기까지 순간일 적이 있다. 멋진 풍경을 볼 때, 늘 보던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여쁜 돌,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 떼, 서늘한 바람에 묵묵히 버티는 억새, 가을날 선물꾸러미를 터뜨리듯 툭 터지는 석류, 한겨울 몰래 피운 야생화들. 그것들을 마주하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다. 예쁘다와 좋다.울주군 간월재에 갔다. 억새가 일품이라고 너도나도 인증샷을 올려놓아서 가보고 싶어서다. 모처럼 나선 산길을 걷자니 눈이 시원해진다. 산 능선을 따라 오색 물결이 넘실거렸다. 골짜기와 골짜기가 겹쳐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풍경은 명화 부럽지 않았다. 가을은 고개 위에서 떡갈나무와 단풍나무 사이로 내려오고 있었다. 잎들을 개구쟁이 붓질하듯 휙휙 물들이며 오고 있었다.억새평원은 장관이었다. 좋다는 감탄사를 남기고 부리나케 간월재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밀려드는 사람이 많아서다. 그다음 주변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되었다. 동서남북 두루 둘러볼 수 있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고 억새는 그 위를 덮을 듯 무성했다. 바위와 억새가 만들어내는 가파른 길은 아득하였으나 색색의 옷들이 무늬를 더해 절경이었다. 다른쪽은 억새 뒤로 산 능선이 그윽하게 둘러쳐져 포토존으로 사람들이 복작였다. 은빚억새 위로 사람꽃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나는 억새 사이로 난 산책길을 걸으면서 냄새를 맡고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고 가을 안으로 들어간 듯하였다.산을 오르며 연신 좋다는 감탄사를 뱉었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굽이진 길을 오르내리며 다가왔다 멀어지는 풍경 앞에서, 스스로 잎을 떨구는 나무 아래서 보라색으로 존재를 알리는 꽃향유를 보며, 가족끼리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에, 좋다를 고명처럼 얹었다. 그리고 저 홀로 익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잎들과 잎들이 만들어내는 가을잔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밖으로 나온 말은 좋다는 한마디였으나 속에서 일어난 감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감정은 섬세하게 분화한다. 좋다는 두루뭉술한 덩어리에서 여러 결로 나뉘어진다. 내 처지나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파동이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똑같은 감정이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밖으로 나온 말이 같아도 다르게 읽히는 순간이 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믿음이 있을 때는 따로 해석이 필요치 않고 저절로 필터를 거쳐 들어온다. 좋다는 말에 숨어있는 뉘앙스랄지 미묘한 차이를 캐치할 수 있다.좋다는 말을 열 번 한다고 같은 뜻이 아니다. 얼키설키 감겨오는 감정의 결에는 차이가 있다. 특별한 것이어서, 설레고 기뻐서, 영원할 것 같아서,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동행한 사람과의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다시는 못 볼 아름다움을 숭배하기 위해, 수없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시집의 구절 등이 모두가 좋다는 말에 포함되는 다른 무엇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는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얼렁뚱땅 좋다는 말속에 밀어넣고 만다.간월재 억새평원을 걸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말들이 어째서 꼭 필요한 순간에는 숨어있는가. 그동안 읽은 책 속의 명문장들을 복기한 것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가. 나는 자연이 보여주는 풍경 앞에서 기껏 좋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내가 느낀 감동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어서 머릿속이 쑥대밭이었다.시의 행간에 숨은 뜻을 읽어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몇 번을 읽고 나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 감정을 말로써 조곤조곤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생각을 끄집어내려 해도 마음 안에 뭔가가 있는데 건져지지 않을 때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느껴봤을 순간이다.마음의 눈이란 말이 있다. 사물을 볼 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뒷면을 보는 것이다.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어서 바람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유를 알아야 풍경 속의 풍경을 풀어낼 수 있으리라. 아직도 나의 글은 누군가의 마음에 닿지 못하고 닫힌 문 앞에서 소멸하고 만다. 가을산에 촤르르 펼쳐진 멋진 문장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깝고 안타깝다.솜씨를 부린 글이 아니라 질그릇에 담아내는 정(情) 같은 글을 쓰고자 뾰족하게 날을 세우는 가을이다.

2021-11-10

붉음, 그 마지막 정열을 사르다

겨울로 가는 길목, 수목원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찬바람이 이 골짝에서 저 골짝으로 불자 나무들이 서둘러 다른 색깔로 잎을 물들인다. 사람도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수목원을 찾는다. 이들의 왁자한 소음을 잘 버무리면 푸짐한 가을 한 상이다.붉은 꽃등이 내준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 한 자락에 나뭇잎이 화르르 떨어진다. 단풍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푹신한 융단을 깔아 놓았다. 단풍의 해사한 빛에 이끌려 나무 아래 머문다. 나무가 뿜어내는 붉고 고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뭇잎 하나, 둘 주워 손바닥에 살포시 올린다. 군데군데 벌레가 갉아 먹고, 서로 부딪쳐 바스러진 잎이 제각각이다. 단풍잎의 크기는 비슷해도 색깔은 다르다.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늘을 요즘에는 자주 올려다본다. 하늘이 맑아 고개를 들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신발 끈 매고 나서면 하늘이 내려 준 풍경을 오롯이 내게 들일 수 있다. 추위가 몰려오기 전에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나뭇잎을 보는 것은 황량한 겨울을 건너야 하는 인간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위안이다.붉은 丹, 바람 楓, 은행나무 잎이나 갈색으로 변하는 나무도 단풍이라 부른다. 나무의 특성에 따라 잎을 각기 다르게 물들인다. 조금 빨리 물을 들이고 햇볕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붉은 단풍나무 아래 서자 나도 붉게 물든다. 붉음은 사람을 모이게도 했다. ‘붉은 악마’가 거리에 모여 토해내는 열정은 얼마나 붉고 뜨거웠던가.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단풍나무가 주는 화려한 것만 보았다. 나뭇잎들은 왜 떨어질까, 왜 가장 곱고 아름다울 때 잎을 떨어낼까, 뙤약볕의 여름을 잘도 견디고 비와 바람, 몇 번의 강한 태풍에도 제 가지를 잘 챙겼는데, 나뭇잎은 가장 화려할 때 사람을 불러들이고 잎을 떨어뜨리려 하는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찬바람이 불면 나무는 미련 없이 잎을 버린다.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이 생기니까. 버릴 때를 알았다. 그동안 광합성을 하느라 고생한 잎을 떨어뜨리기 전,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아름답게 핀다. 단풍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유는 생의 마지막에 단풍이 단풍다운 본연의 색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닐까.그냥 서서 엄동설한을 견뎌야 하는 나무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필요하다. 가지가 많아 잎이 풍성하면 넉넉한 양의 수분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으면 나무도 겨울을 견디기 힘이 든다. 긴 겨울 동안 얼어붙을 수도 있고, 가지마다 매달린 잎들이 눈보라에 마주할 일이 더 생길 수 있다. 나무는 추위가 엄습하기 전에 우리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물하고, 서둘러 몸을 가볍게 한다.내 어머니는 가난했다.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흙 묻은 옷이 마를 틈 없이 밭에서 살았다. 비 오는 날이 돼서야 어머니는 우리 차지였다. 가난해서 밀가루로 만든 먹거리뿐 이었지만, 항상 배가 불렀다.우리는 추운 겨울,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사실은 누가 더 어머니 곁에 앉을 수 있을까 경쟁했다. 아랫목에서 피어나는 어머니의 옛이야기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랐고, 지난한 삶에도 조금씩 볕이 들었다. 들창으로 스미는 햇살이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때, 어머니는 큰 병을 얻었다. 이순혜​​​​​​​수필가 어머니 곁에 자식들이 머물고 치료를 도왔다. 하지만, 부모·자식이라는 끈은 정성만으로 버틸 수 없었다. 온갖 약을 써도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지셨다. 어느 날, 이제는 안 되겠다며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깊게 파인 어머니의 주름만큼 투박하지만, 누런빛이 나는 것을 슬며시 꺼내셨다. 손을 내민 우리에게 어머니는 팔찌를 하나씩 채워주셨다. 서로 의지하고 양보하며 둥글게 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얼굴에 붉은 꽃이 벙긋했다.어머니 얼굴에도 마지막 꽃을 피웠다. 어머니가 평생을 몸담은 곳에 기부하라고 부탁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꾸 그쪽으로 향한다며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적지만 큰 베풂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자식들의 형편을 알았지만, 평생 흙 만지며 번 돈으로 어머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달았다. 어머니의 마음이 가는 곳, 그곳을 바라보며 참 많이 기뻐하셨다. 어머니의 마지막은 단풍처럼 붉었다.단풍나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았다.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버려야 할 때를 알았다. 가장 아름다울 때. 이제는 무거워진 것을 하나둘 내려놓을 때이다.

2021-11-10

내일 생각은 누가 하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 자본주의가 가진 최대 약점은 무엇일까? 자본이 중심이 되어 세상만사가 돌아간다. 지상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돈. 돈 많은 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일들을 드물지 않게 목격하는 유전무죄와 돈이 없으면 감수해야 한다는 무전유죄. 돈이 힘이 되는 세상이 아닌가. 약육강식과 약자도태도 금력의 정도 차이로 나타난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망하면 죽는다’는 적자생존 인식을 공포스럽게 그리고 있다. 돈의 힘은 과연 세다. 하지만, 이 모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머니게임’의 뒷 자리에는 보다 더 싸늘한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누구도 ‘내일’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좋은 이웃’이 되고자 하는 이는 뉴스거리가 된다. 거의 비정상이다. 둘러보아도 진지하게 ‘다음세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말이 좋아 백년대계라는 교육을 누가 진정으로 걱정하는가. 인류최대의 난관이라는 기후위기를 고민하기는커녕 속속들이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은가. 자본주의의 강고한 ‘쩐의 논리’는 내 주머니만 고민하게 하고 내 가족만 추스르게 한다. 공연히 남을 생각하는 이는 바보가 되고, 혼자서 선의을 떠올리는 자 공상가가 된다.내일을 걱정하고 남들을 돌아보다가는 오늘을 놓치고 기회는 흘러간다. 착한 생각과 미래 걱정에 돈이 함께 할 턱이 없다. 오늘 눈 앞에 펼쳐진 기회에 집중해야 하고, 돈 앞에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은 못 본 척 해야 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는 잊어야 한다. 단기에 집중해야 하고 이익에 충실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모두의 눈을 멀게 한다. 적절하게 눈을 감아야 성공하고, 철저하게 매정해야 겨우 이긴다.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내일 생각’을 잊게 하는 데 있다. 돈을 사랑하게 하여 남 생각을 못하게 하는 데 있다.정치는 달랐으면 하는 게 소박한 국민들의 생각이다. 우리 정치가 나라의 미래를 꿈꾸게 하고 다음 세대를 걱정했으면 한다.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미래와 선의를 끊임없이 망각하게 하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당신들은 달랐으면 한다. 당장 20대와 30대가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을 진심으로 보듬고 함께 내일을 기획해야 한다. 누구도 우리 교육의 내일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길고 긴 미래를 확보하려면, 교육의 틀부터 바꾸어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미래와 다음 세대를 회복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약점을 극복하고, 내일을 향한 비전을 찾아야 하고 남들을 향한 배려에 나서야 한다.자본주의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공감 능력을 낮추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점을 간파하여 지혜롭게 이겨내야 한다. 내일을 향해 생각을 열어야 한다. 멀리 바라보아야 나라가 산다. 함께 살아야 하는 이웃에 살피는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이웃이 웃어야 모두가 행복하다. 자본주의의 약한 부분을 이겨내야, 나라가 살고 국민이 편해진다.

2021-11-10

대선 테마주의 허상

대선 테마주가 증권시장을 뜨겁게 달구곤 한다. 대선 테마주는 여야의 대선 후보와 관련있다는 기대심리 확산으로 주가가 오르는 주식을 가리킨다.그러나 전문가들은 공약에 따른 정책 수혜 기대감이 아니라 대표의 인맥 등 별다른 근거없는 대선 테마주 투자는 위험하다고 조언한다.대표적인 것이 바로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의 대표적 테마주로 꼽힌 경남스틸과 삼일이다. 이 종목의 지난 9일 종가는 4천170원으로 5일부터 9일까지 3거래일 간 77.45% 추락했다. 올초 경남스틸의 주가는 주당 1천875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홍 의원이 대선 출마 선언일(17일) 이후 5천원대로 치솟았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홍 의원이 유리한 결과가 나오면 주가는 더욱 뛰었다. 최고 1만1천950원(9월28일)까지 올라서기도 했다. 이렇게 올랐던 주가는 홍 의원의 경선 패배와 함께 고스란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삼일 주가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7월말 2천800원에 불과하던 주가가 홍 후보와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한달여 만에 최고 9천300원(9월13일)까지 3배 이상 폭등했다가 홍 의원의 경선 패배와 함께 2천700원선으로 내려앉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테마주로 꼽힌 서연, 서연탑메탈, NE능률, 크라운제과, 깨끗한나라, 덕성 등도 대표이사, 최대주주, 사외이사 등이 윤 후보와 같은 파평 윤씨라거나 동문이라는 이유로 테마주로 묶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테마주도 대표가 경기도 성남 출신이라거나 이 후보와 동문이라는 이유로 테마주로 분류됐다.별다른 근거없이 대표 인맥에 따라 분류된 대선 테마주의 주가 널뛰기는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1-10

11월 나뭇잎 표정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세상 모습이 변하고 있다. 매년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맘때 보는 자연의 변화는 경이로운 마법 그 자체다. 자연의 마법은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에겐 효과가 탁월한 처방전이다. 그 처방전을 받기 위해 전국 산하에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은 거대한 파도 같다.11월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바람이다. 굳이 큰 바람까지 필요 없다. 작은 바람이면 된다. 나무에게 있어 작은 바람은 위로다. 작은 바람 한 번이면 나무는 지난 계절 동안 지켜온 시간을 흔쾌히 놓는다. 그 모습에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다.자유로운 것이 무엇인지,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 가까이에 그 방법이 있다. 무조건 부정부터 하는 억지 마음을 내려놓고 도로의 배경으로 묵묵히 서 있는 가로수를 보라. 그러면 나무가 내는 길과 저마다의 춤사위로 자유의 춤을 추며 기꺼이 길을 나서는 나뭇잎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마음의 눈을 크게 뜨면 신명에 겨운 나뭇잎의 표정과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겸허한 마음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다.나뭇잎의 표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알지 못함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애써 찾자면 “초월(超越)”이 아닐까! 가지를 떠난 다음의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뭇잎이 나뭇가지와의 시간을 놓을 수 있는 것은 떠난다는 사실조차 넘어섰기 때문이 아닐까!그 마음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안다면 세상은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학교에서 이런 것을 학생들에게 찾도록 하는 교육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시험 문제로 낸다면 어떨까? 정말 이런 교육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교육일까?자연이 한결같은 이유는 인정(認定)함을 알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부정(否定)이 없다. 상황이 변하더라도 자연은 그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결과를 겸허히 기다린다. 결과를 바꾸기 위한 편법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자연에는 실패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순리요, 자연의 섭리이다.11월은 학교 교육에 있어 가장 큰 결실이 있는 달이다. 입시(入試)! 학생 수가 줄어 곧 문 닫을 학교(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들이 속출할 거라고 하지만 이 나라에는 지옥 같은 입시판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입시판에서 죽을 힘을 다하는 학생에게 나뭇잎 표정을 운운하는 것이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인지도 모른다.그래도 필자는 나무들이 나뭇잎을 다 털고 동안거에 들기 전에 꼭 학생과 선생님이 교실과 교과서의 사각 틀에서 벗어나 나이테를 키우는 나무 앞에 서기를 바란다. 그래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이야기를 듣고,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한 나뭇잎의 표정을 꼭 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 표정을 닮으려는 마음을 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필자가 이토록 강하게 원하는 이유는 만약 코로나 이후에도 이 나라 교육이 지금과 같다면 이 나라 교육에는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2021-11-10

‘오징어 게임’식 한국 선거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오징어 게임’이라는 영화가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영화 ‘오징어 게임’은 어린 시절 즐겼던 6개의 추억의 게임을 통해 456억 원의 상금의 주인을 가리는 극한 경쟁을 그린 작품이다. 대형 상금이 걸려 있는 오징어 게임은 처절한 경쟁 속에서 승리하려는 인간 욕망을 잘 표출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약육강식과 정글의 법칙만이 통하는 경쟁구도에서 승리하기 위한 몸부림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미국의 NYT는 ‘오징어 게임’ 자체를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인들의 이야기로 평가했다.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욕망을 담아낸 이 영화가 우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한국 사회의 각종 선거 역시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다. 지방의원,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기 위한 각종 선거도 결국은 승자를 가리기 위한 치열한 게임이다. 이 처절한 게임의 최종 승자는 처음부터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데 매력이 있다. 선거 초반에는 단연 일등을 유지하다 갑자기 추락하는 후보가 있고 후발주자가 앞서가 성공한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 정치도 ‘오징어 게임’과 같이 무수한 실패자가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 비정한 게임에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도박에 목숨을 걸 듯이 뛰어 들고 있다.한국의 정치판에도 ‘오징어 게임’처럼 비정한 규칙은 존립한다. 지지층을 중심으로 진영으로 갈라 줄다리기 놀이까지 등장한다. 선거법이라는 그럴듯한 규칙이 존재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변칙이 다반사로 발생한다. 법망만 피한 상대에 대한 비난과 흠집, 마타도어와 흑색선전인 네거티브가 자행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가 동원될 수밖에 없다. 최종 승자가 456억을 독점하는 ‘오징어 게임’처럼 대선의 승자는 온갖 특권을 누린다. 사실 선거라는 제도는 대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민주주의 편의적 방식이다. 선거의 결과는 다수결의 결과일 뿐 결코 분배 정의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역대 대선에서 노무현이나 박근혜 대통령 당선처럼 2∼3%의 차이로 운명이 달라진 경우도 많다. 이번 대선도 5%내외로 당락이 결정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번 선거도 결국 승자가 독식하는 네거티브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선거의 승자는 정의가 되고 패자는 ‘오징어 게임’의 탈락자처럼 비참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선거를 폐하고 과거처럼 권력의 세습이나 체육관 선거로 돌아갈 수 없다.이번 대선에도 초장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오징어 게임’처럼 참가들이 엄청 많았다. 누가 정치를 단기 투자로 가장 장기적 재미를 보는 비즈니스라고 했다. 그러므로 4∼5년마다 재개되는 게임은 흥행될 수밖에 없다. 이 정치판에도 오징어 게임이 불가피하다면 게임의 규칙부터 바로 잡고 참가자들이 철저히 지켜야 한다. 신자유적 경쟁은 피할 수 없고 치열한 경쟁은 능률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선거가 적자생존의 오징어 게임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살고 너는 죽는 처절한 경쟁만이 능사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공생의 정치는 언제쯤 가능할까.

2021-11-10

타인의 눈으로 본 포항

류영재​​​​​​​포항예총 회장 포항시가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어 국비지원의 문화도시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동안 철강생산 중심의 산업도시로 문화의 불모지라 인식되어 온 포항이 국가에서 법으로 인정하는 문화도시가 되었으니 격세지감이다. 시행 1기에, 더구나 최우수 문화도시로 선정됐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기 지정을 앞두고 있는 올해에 그 문턱을 넘기 위해 진력(盡力)하고 있는 도시들의 면면을 보면 경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생태문화도시 순천과 도시 자체가 예술인 통영 등 16개 시군이 총력을 기울여 경합중이며 그 중에서 6개의 도시가 지정된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지 짐작 가능한 일이다.포항문화재단이 주최하는 문화도시 사업의 중 예총이 주관하는 것으로 ‘포항에서 한 달 살기-받아쓰기? 바다쓰기!’라는 프로젝트가 지난 주말 마지막 평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 사업은 타 지역 예술가들이 한 달간 포항에 머물면서 지역문화를 체험하며 지역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본인들의 작품 제작을 위한 영감을 얻기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지역과 타지역의 예술 활동이 연결되도록 하는 네트워크 프로그램이다. 과연 타인의 눈으로 보는 포항의 느낌은 어떤지, 포항의 예술적 자산은 무엇이며 문화도시로 정착 발전 가능성은 어떠한지를 진단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예술가를 환대하는 도시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고, 타 지역 예술가들의 눈과 입과 영감을 통하여 포항의 문화적 가치를 진단하고 예술가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데 활용하려는 전략이다.초대된 작가들은 구미에서 온 동화작가와 시각디자이너, 대구에서 온 패션그래픽 작가, 그리고 내년도 문화도시 예비지정을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고흥에서 영호남의 경계를 넘어 참가한 화가 등이다. 그들은 구룡포의 ‘아라예술촌’과 송라의 전원주택 작업실 등에 거주하면서 한 달 동안 오감을 활짝 열고 포항의 곳곳을 누볐다. 해양문화에 관한 워크숍을 열었고, 바다가 전해주는 말을 받아 적기도 하였고, 내연산 등 명소를 탐방하였고, 축제, 공연, 전시 등 문화행사를 체험하며 포항을 느끼고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초대 작가들의 공통적인 감동 포인트는 바다와 산, 그리고 도시가 잘 어우러져 예술적 아우라가 풍부한 고장이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포항의 색깔에 반했고 이를 본인들의 작품에 표현해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들은 완성작품을 제출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하였다. 바다 테마의 동화를 쓸 것이라 했고, 바다 이미지를 패턴화한 굿즈 제작, 해양 일러스트, 포항 인상의 회화작품과 시화 등으로 전시회를 열자하였다.고흥에서 초대된 화가는 필자의 대학동기생이다. 그는 포항을 다른 친구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며 대학동기 4명을 구룡포 ‘아라예술촌’으로 불렀다. 40년 세월을 넘어 초로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만난 그들은 ‘포항으로의 일탈’이라며 유쾌하게 웃었고, 곳곳을 돌아보며 매력적인 도시 포항에 탄복하여 1970년대 윤정희 주연의 영화 ‘화려한 외출’을 소환하였다. 밖에서 본 포항은 불황의 도시도 삭막함도 아닌 문화가 넘치는 도시였다.

2021-11-09

메타버스, 가상의 세계로의 초대

곽지영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요즘 IT분야 최대 화두 하나를 꼽으라면 ‘메타버스(Metaverse)’가 아닐까. 메타버스는 초월이라는 뜻의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현실과 같은 실감 기술의 도움으로 가상의 정보와 실재하는 공간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융합된 세계를 뜻한다. 메타버스는 1992년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이 쓴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라는 SF 소설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소설의 배경이 된 메타버스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가상 세계 속 내 모습인 ‘아바타’이다. 메타버스에서는 현실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모습으로 활동한다. 주인공 히로는 현실에서는 피자를 배달하는 전직 프로그래머인데, 메타버스 속에서는 세계 제일의 검객이다. 두 번째 특징은 도시 공간의 개발 방식이다. 스노우 크래쉬 속 메타버스는 원래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검은 행성이다. 그곳에는 행성의 둘레 전체를 잇는 폭 100m, 길이 65,536(=216)㎞의 직선도로인 ‘더 스트리트’가 있으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도시가 만들어진다. 메타버스에서 부동산 개발을 하려면, 독점적 권한을 가진 ‘규약 단체 협의회(Global Multimedia Protocol Group)’의 승인하에, 공터를 사들이고 지역 개발 승인과 각종 허가 사항을 득해야 한다. 기업들은 더 스트리트에 가상의 건물을 짓고 영업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하며, 그 돈은 신탁 기금으로 들어가 더 스트리트를 유지·확장하는 비용으로 사용된다.최근 메타버스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역할이 컸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2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인간의 기본 욕구인 사회적 관계와 대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현실 세계를 능가하는 사회, 문화, 경제적 활동이 가능한 메타버스 세상 속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대학의 입학식, 기업의 신입사원 교육, 인기 아티스트의 공연, 정치인의 선거유세, 지역 축제, 기업의 신제품 런칭 등 주로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던 활동들이 메타버스 공간으로 대거 이동하는 모습은, 더 늦기 전에 메타버스에 올라타라는 독촉의 소리에 힘을 보탠다.30년전, 가상공간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의 소설이지만, 스노우 크래쉬 속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메타버스는 그 후 수많은 SF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서도 닐 스티븐슨의 표현과 유사한 디스토피아적 메타버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선지적 능력을 지닌 천재들이 한 마음으로 메타버스를 디스토피아로 표현한 것은 어쩌면, 개인이나 기업은 물론, 정부와 지자체까지 합류한 지금의 메타버스 열풍 현상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아니었을까? 목적지도 모르는 메타버스 열차에 무조건 올라타기보다는, 그 실체와 본질에 집중하여 인간에게 이로운 메타버스가 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2021-11-09

첫눈

김규종 경북대 교수 9월의 궂은 나날이 가고, 10월의 화려한 가을날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축복처럼 보태진 11월의 며칠 동안 화사하고 기막힌 가을의 끝이 신속하게 사라진다. 입동(立冬)이 지나고 불어오는 찬 바람 속에서 첫눈의 기억이 아련하게 찾아든다. 첫눈은 언제나 무한한 설렘과 기대와 함께 찾아온다. 어느 날 홀연히 첫눈은 갑작스레 환한 얼굴로 지상으로 하강한다.아주 어렸을 때 첫눈이 오면 마구 뛰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동네방네 뛰어다니곤 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어느 깊은 곳에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는 어떤 힘이 있었을 터였다. 그런 시절이 아스라히 사라진 지금도 그 시절은 언제나 그리워진다.얼마 전에 폴란드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를 보면서 기억에서 떠나보냈던 첫눈이 새삼스레 떠오는 것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소재로 만든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 영화는 우리를 낭만과 기대로 가득한 환희의 시공간이 아니라,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의 과거과 현재를 돌이키도록 한다.1945년 8월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앞으로도 이런 가공할 재앙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 영화의 끝은 아주 아름답고 풍성하다. 하얀 폭설로 작은 도시 하나가 완전히 뒤덮여가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가득하다.첫눈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요, 하는 물음에 예기치 않음, 기다림, 설렘이라 답하는 사람에게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를 들려줬다. 사실 이 노래를 들은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노래를 듣지 않고 지나간 세월이 제법 길다. 엔진 오일 교환하러 들른 정비공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시디에 실려있던 노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아, 이런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노랫말도 곡도 대단한 노래를 여태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집으로 오는 길에 자꾸만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절창(絶唱). 4년 전이라는 노래의 생성연대를 돌이키노라니, 세월이 참 무상하게 흘러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떠온다.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떠나가거나 찾아오는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는데, 이번 노래에서는 노래하는 여성이 연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21세기 변해버린 세상과 인연과 관계를 잠시 떠올린다. 남성에게 의지하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 담대하게 나아가는 신여성의 모습이 듣기에도 좋았다.그래서 올해 첫눈이 언제 내릴 것인지, 내기를 걸었다. 학부 다닐 때 무려 3년 연속 첫눈 오는 날을 맞췄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술 한잔 내기로 했다. 첫눈이 내리는 그날이 오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하얀 보도를 오래도록 걷고 싶다. 첫눈이 오면!

2021-11-09

희망퇴직

1997년 11월 21일은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키로 공식 결정한 날이다. 그해 12월 3일 우리나라는 IMF와 공식협약을 맺었다. 20여 년 전 있었던 외환위기는 기업의 줄 도산과 실업자 양산 등 서민들의 삶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우리나라 역사의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특히 직장인들에게는 IMF를 이유로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고, 정년이 보장되는 고용시장은 살얼음판 걷듯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희망퇴직은 근로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직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퇴직 의사를 사전에 묻는 절차가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일반 퇴직과는 성격이 다르다. 희망퇴직은 퇴직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사퇴하는 경우도 포함되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경영난 극복을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지만 직원은 일생일대 중대 고비점이 된다.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금융계와 유통계 등 국내 산업계 전반으로 희망퇴직 바람이 불고 있다. 금융계서만 40∼50대 직장인 4천여 명이 연말까지 희망퇴직으로 직장을 떠난다는 소식이다. 일부에서는 IMF 초기의 분위기를 느낀다는 말도 나온다. 직종에 따라 희망퇴직금의 차이는 있으나 희망퇴직을 하는 사람들은 수억원의 퇴직금을 들고 또다시 새로운 인생 출발점에 서야 한다.가족의 생계를 거머진 가장으로서는 출발 자체가 두렵고 걱정도 앞선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오래가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희망퇴직 역시 비대면 문화 확산 등 코로나 영향이 적지 않다. 희망퇴직에 나선 이들이 과연 말 그대로 희망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09

산림, 또 다른 한류 그리고 일자리의 새로운 寶庫(보고)

조병철 남부지방산림청장 우리나라 추억 놀이 이름에서 나온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의 흥행이 예사롭지 않다. 세상에 공개된 지 불과 한달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시청자가 1억명을 가볍게 넘어섰고, 250억원에 불과한 투자액은, 1조원이 훌쩍 넘는 수익이 되어 돌아왔다.‘오징어 게임’에서 절정을 보이는 한류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아시아에 한정되어 유행했던 것과는 달리,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에 유행이 시작되더니, 어느새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으로 이어져 세계 문화를 선도할 정도에 이르렀고, 김구 선생님이 갈망했던 것과 같이 드디어 우리나라의 문화적 자존감을 높여주고, 동시에 큰 경제효과를 보여주고 있다.△또 다른 한류… 우리 나무, 우리 숲, 그리고 일자리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거리에는 겨울 분위기를 한껏 로맨틱하게 만들어주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한다. 바로 이 크리스마스트리로 쓰이는 나무가 우리나라 토종 나무인 ‘구상나무(학명: Abies Koreana, 통상 외국에서는 korean fir로 불리며 직역하면 한국 전나무)’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1920년대 하버드 식물분류학자인 어니스트 윌슨이라는 학자가 제주도에서 이 나무를 발견하곤, 새로운 수종으로 등록하고 트리 용도에 맞게 개량해 현재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나무가 되었다고 하니, 구상나무도 어쩌면 한류의 시작 중 하나 일지도 모른다.이와 함께 우리나라는 UN이 인정한 전후(戰後) 황폐했던 산림을 복원한 세계적으로 유일한 국가로 뛰어난 산림복원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기술은 또 다른 한류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높은 산림분야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지구 차원의 기후 생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일례로 매년 봄이면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가 고통 받는 황사의 원인 중 하나인 사막화를 막기 위해 우리나라의 자금과 기술로 2008년에 조성된 몽골의 룬솜 지역의 숲이 어느덧 10m가 넘을 만큼 자라나 사막이 확대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한다.국내에서도 그동안 가꿔온 숲은 이제 다양한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목재로써의 가치는 물론이며, 숲이 가진 아름다운 경관은 또 다른 한류 콘텐츠로 활용될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2019년 숲길을 조성하기 시작한 영양자작나무숲은 지금까지 약 8km가 조성됐으며, 기반 시설은 2023년까지 조성 중으로 아직 정식 개장 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오징어게임’, ‘구상나무’에서 보듯 우리나라 대중문화, 산림환경은 한류로써 무궁무진한 잠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한 경제적 가치도 물론이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숲을 적절히 보호하고 활용하는 보전과 이용의 균형을 달성 할 수 있는 현명함을 견지하고, 숲을 바라본다면 숲은 우리에게 높은 경제적 가치와 함께 다양한 새로운 일자리을 제공하는 새로운 보고(寶庫)가 될 것이다.

2021-11-09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새로운 씬

지난 여름부터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 푹 빠져있다.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는 국내를 대표하는 여자 댄서들이 참가하여 댄스 경연을 펼치는 배틀 프로그램이다.첫 화부터 뜨거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매 회가 거듭할수록 대단한 파급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예능 부분에서 4주 연속 콘텐츠 기능력 1위를 차지했으며 비드라마 화제성 부분에선 5위의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2021년 최고의 화제 프로그램이라는 수식어와 걸맞게 SNS에만 접속해도 스우파의 인기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그들이 만들어낸 유행어가 밈이 되어 돌아다니고, 팀별로 펼치는 댄스 경연 장면은 하이라이트 편집본으로 제작되어 조회수 2억 회에 달하고 있을 정도다.게다가 라이브 무대로 열리는 콘서트 또한 1분도 안 되어 서울 포함 총 5곳 지역의 표가 전부 매진될 정도라니, 아이돌 못지않은 거대 팬덤을 지니게 된데다 화보촬영과 인기 예능 출연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사실 그간 여러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대부분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비슷한 플랫폼과 서사를 지녔음에도 이와 반대로 스우파가 뜨거운 화제성을 낳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그동안의 경연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냈으며 단순 스토리와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흥미만을 이끌어내는 것에 그쳤다.하지만 이러한 전형적인 폼에 질린 시청자들은 스우파에서도 어김없이 진행됐던 악마의 스토리에 속지 않았다.오히려 시청자들이 잘못된 편집점을 찾았을 정도였고 전 출연진이 여성인만큼 강렬하고도 능동적인 우먼 파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화려한 춤과 노래를 뽐냈던 아이돌 발굴 경연 프로그램과는 달리 정제되어 있지 않은 말투와 리액션을 보여주어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는 호평이 크다.그들은 춤을 통해 자신만이 품고 있는 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해내며 정형화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롭고도 힘 있는 결을 보여줬다는 것이다.경연이기에 라이벌 구도가 선명히 드러나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 초반에는 있었지만 가질 수밖에 없던 오해를 풀면서 그들은 서로의 열정을 위로하고 공감하며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 분출로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시선을 잡아끄는 퍼포먼스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머뭇거림보다는 직진에 가까운 열정과 충실함에는 숨을 멈추고 멍하니 장면을 보게 한다.음악이 시작되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신체의 일부분을 높게 들거나 뻗으며 상대를 제압하거나 표정으로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가벼운 손짓과 눈빛엔 정확한 감정과 의도를 담아 스테이지를 장악한다.춤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댄서들은 인상 깊은 씬을 여럿 보여주었다.파이널 무대로 선 ‘훅’팀은 ‘엄마가 아이에게’라는 곡으로 그간 보여주었던 파워풀하고 재기발랄한 춤에서 벗어나 수화를 통해 모성애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춤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많은 언어를 전달하여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 사실을 알았다.‘프라우드먼’팀에서 보여준 무대 또한 잊지 못할 것 같다.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보여준 무대에선 남성과 여성이라는 고착화된 관념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은 의견과 리듬 그리고 가치관을 통해 이루어져 있으며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여성 또는 남성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사실 경쟁 무대인만큼 가장 화려하고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어야 눈에 잘 띄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잘 만들어진 무대나 익숙함을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것을 무대 위로 이끌어 보여주었다는 것에 감명 깊었다.댄서란 무대 위의 가수 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 오는 걸로만 생각했었다.하지만 한 명의 가수와 무대를 빛내게 하는 것은 여러 댄서들의 퍼포먼스와 열정 덕분이라는 걸. 한 분야에 있어 진심을 다하는 이들의 행보는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던 가쁜 경험이었다.비단 댄서만이 아닌 이 스트리트 위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도 해당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눈에 띄지 않지만 묵묵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2021-11-09

밥섬 식도의 위대한 밥상

동해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서해만이 가진 ‘쓸쓸한 아름다움’이 사무치기도 한다.고요하고 내밀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서해의 작은 섬 식도로 간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60세대 2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적 0.86㎢의 작은 섬이다.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여객선 안에는 격포에 장을 보러 갔다가 섬으로 돌아오는 어르신 몇이 전부였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객선이 접안하자 어르신들은 손수레와 보따리를 양손에 짊어지고 다시 섬을 밟았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낚시가방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식도에 올 때면 늘 찾는 한 민박으로 향했다. 서해의 작은 섬들이 보통 그렇듯 식도에도 변변한 식당은 없고, 그나마 민박과 밥을 겸하는 서너 곳이 다.그런데 섬에 상수도 공사가 벌어져 공사 노동자들이 지내느라 빈 방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식도리 이장님이 근처를 지나다가 자기네 집에서 묵으라고 하신다. 이장님 집도 민박과 식사를 겸하는데, 공사 인부들이 묵긴 하지만 남는 방이 있다고 했다.이장님 차에 사모님과 함께 셋이 끼어 타고는 마을 몇 군데를 다니며 멸치를 내려다 줬다. 집에 도착하니 이장님께서 안방을 내어주며 편하게 쓰라고 하신다. 너그러운 인심이 따뜻한 물살을 퍼뜨렸다.가방을 풀고, 낚시 준비를 해서는 방파제 석축에 섰다. 혼자 고요함을 찾아 온 섬, 마음에서 수런거리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우럭을 먹을 만큼만 잡고 낚시를 접었다.욕심을 버리는 순간 그동안 내 안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석축에 부딪치는 파도가 뭐라고 말을 한다. 할 말을 오래 참아 붉어진 입술처럼, 저녁노을이 나를 보며 옴짝달싹한다. 일찍 떠오른 낮달이 허밍으로 노래한다. 먼 산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단풍잎이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외부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와 풍경과 내가, 세계와 내가 경계 없이 몸을 섞을 때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 깊은 곳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우럭 몇 마리 챙겨 이장님 집에 오니 인부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방마다 고단한 몸을 누였고, 이장님 가족은 거실에 앉아 화투 놀이하느라 정신없다. 사모님이 식당에 있는 반찬과 찌개를 마음껏 꺼내 먹으라 하신다.우럭 회 한 접시 뜨고, 반찬통을 열었다가 그만 황홀해지고 말았다.꽃게장, 어묵볶음, 장조림, 오이소박이, 방풍나물, 멸치볶음, 버섯볶음, 파김치, 알타리김치, 물김치 등 온갖 맛깔스런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릇 하나에다 반찬 두세 가지씩 함께 담았다. 냄비에는 묵은지와 비계 숭덩숭덩한 촌돼지 고기가 가득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한 그릇 떠서 상에 올리니, 마음부터 배부른 위대한 밥상이 완성되었다.식도(食島)가 왜 ‘밥섬’인지 이제야 알겠다. 예로부터 어장이 풍부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는 섬, 먹거리보다 인심이 더 풍요롭다.“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이재무, ‘위대한 식사’)라는 시가 절로 떠오르는 밥상 앞에서 뭉클해졌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을 밥 한 덩이와 함께 목구멍으로 쑥 넘기고, 차가운 소주로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는 동안 저녁은 깊고, 저쪽 거실에서는 찰싹찰싹, 화투패 달라붙는 소리가 풀벌레 울음처럼 정다웠다.아침놀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6시 50분. 기상 악화로 7시 20분 첫 배 이후엔 배가 안 뜬다는 방송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서려는데, 사모님이 아침 먹고 가라 하신다. 공사 인부들과 함께 앉아 또 한 번 뜨거운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인부들과 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비록 짧은 몇 분이지만, 나는 낯선 식구들과 말없이 정든 밥상을 떠나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나는 ‘밥섬’ 식도에서 그 밥 한 끼를 먹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생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2021-11-09

메타버스와 바로크 미술의 귀환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metaverse)는 4차 산업혁명이 일으킨 첫 번째 거대 파도이다. 메타버스는 IT기술을 통해 사람과 세계가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이다.‘미술과 기술’이라는 대명제 아래 선보이고 있는 뉴미디어 미술창작물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디지털 환경에서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에 특정 알고리즘을 부여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유형이다. 다음으로는 특수 감지센서 등을 이용해 어떠한 변화에 반응하고 이를 경험하게 해 주는 작품이 있다. 세 번째로는 딥러닝이나 머신러닝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작품이 있고, 넷째로 증강현실을 이용해 현실공간에 가상을 작품을 구현하거나, 다섯째로 가상공간에 가상의 작품을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소리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거나 연출하는 작품이 있다.자연이나 대상 등을 가상세계에 모방하고 감상자는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그것을 경험한다. 가상의 공간에 모방된 현실은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인식과 경험을 가능케 해 준다. 하지만 문제는 모방된 가상세계와 그 가상세계에서의 경험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떠한 가치를 지니느냐는 것이다. 단지 현실을 기술적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도래할 미래의 미술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방과 가상의 창조는 서양미술사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2D를 3D로 바꾸는 혁신적인 기술이었고, 17세기 바로크 미술에서는 어떠한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 오로지 미술기법으로 실제 건축공간에 가상현실을 구현했다.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양식이다. 가톨릭교회로부터 멀어진 신자들을 시각적으로 압도해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출현한 바로크 미술에서는 건축, 조각, 회화의 경계가 사라졌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고전미술을 모범으로 삼았다면 바로크 미술은 이성적 판단과 인지능력을 무력화 시킨 초감각적 가상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자연의 빛이 창을 통과하는 순간 강하게 응축돼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은 금색 장식물들에 부딪혀 찬란한 광채를 뿜어낸다. 건축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그림 속 인물이 조각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더니 어느새 다시 그림이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바로크를 수용한 프랑스 절대왕정의 결정체 베르사이유 궁전 곳곳에도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있다. 절대왕정의 이념을 상징하는듯 기하학적이고 대칭적 형태로 가꾸어진 정원 곳곳에는 신화를 그리고 있는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회화가 그렇듯 조각 역시나 과거를 현재로, 가상을 현실로 불러내는 그들의 방법이었다. 거대한 정원 사이사이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연극이 펼쳐졌다. 연극이야 말로 가장 오래된 메타버스의 원형 중 하나이다. 왕의 집무실과 침실에 접한 ‘거울의 방’에서도 여러 의미에서 현실과 가상이 교차한다.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거울은 현실을 비춰주지만 사실은 가상을 불러내는 장치이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 호수와 정원 그리고 운하가 시선을 압도한다.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과 가상이 관계한다. 창밖 풍경은 사실이자 현실이지만 규모와 조성 방식이 너무나 인공적으로 완벽해 오히려 가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분수가 춤을 추면 베르사이유의 가상현실은 현실의 공간에서 완성된다. 메타버스에서 논의되는 가상현실, 현실과 가상의 융합, 현실의 확장이 이미 17세기에 일어났던 것이다.서양미술사는 오랫동안 현실을 과장하고 왜곡해 스펙터클을 연출한 바로크를 퇴폐, 타락, 악취미로 여겼다. 여기서 유래해 서구에서는 규범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바로크적’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은 백년 남짓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다가 로코코라는 과도기를 거쳐 신고전주의에 완전히 자리를 내줬다. 고전적 미학을 재부활시킨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어준 이후 바로크의 미술사적 의의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메타버스와 미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바로크의 잔향이 감지된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1-11-08

경주 남산, 수행의 공간

경주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 따 금오산, 고위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불교문화재의 보고’,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 신앙의 산’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계곡 곳곳에 산재한 다수의 불적(불상·석탑 등)은 남산이 이러한 별칭을 얻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경외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실재를 알아가고 증명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남산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일까? 남산은 신라 당대 사람에게 어떤 장소였고,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불적이 조성되었을까?남산 불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왕경 가까이에 위치한 단일 산록에 다수의 불적이 밀집·분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계곡에 다수의 불적이 짧은 거리를 두고 각각 위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어떤 불적의 경우는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운 장소에 입지한 예도 있다. 실제 발굴로 확인된 삼릉계나 열암곡 불적은 많은 사람이 장기간 머물면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환경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산의 불적은 왜 평지가 아닌 험한 산지를 선택했고, 왜 하필 남산에 그 많은 탑상을 조성했던 것일까?남산의 불적은 개개의 사찰로 이해하더라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험한 산지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규모 사역을 형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남산의 불적은 매우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또한 속세와는 분리된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산의 불적이 단순히 예불목적으로만 조성했다면, 한 계곡에 많은 불적이 입지할 필요는 없다. 즉 불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탑상(塔像)에 예불을 드리면 되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새로운 탑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남산의 수많은 불적은 끊임없이 탑상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에 의해 생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룡사, 사천왕사, 분황사와 같은 왕경의 사찰을 발굴하면, 흙으로 만든 작은 탑(小塔)이 종종 출토된다. 발굴된 소탑 중에는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탑도 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한 탑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소탑은 그 조형성이나 예술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거 같다. 즉 공덕을 쌓기 위한 조탑 행위 자체가 핵심이므로, 그 모양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탑 신앙은 680년경에 한역된 ‘조탑공덕경’이나 704년에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리경’의 영향을 받아 실제 왕경 내 많은 탑을 조성하게 한다.한편 ‘삼국유사’ 의해 ‘양지사석’조 말미에는 향가 ‘풍요(風謠)’가 전해진다. ‘풍요’는 영묘사의 장육상을 조성할 때 성 안의 성인남녀가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던 노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장육상을 만들기 위해 그 불사에 참여하는 것을 공덕을 닦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산의 수많은 탑상을 수행의 과정·결과로 생각한다면, 산지나 계곡의 험한 환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의 종교적 염원이나 깊은 불심은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해도 그 장소에 탑상을 조성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다.남산은 ‘돌산’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수행자가 저비용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매우 적합한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즉 조탑(造塔), 조상(造像)을 위한 재료가 산천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적 염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더불어 산은 속세와 분리되어 있어 수행의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조건이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남산에 형성된 수많은 탑상 중 상당수는 수행자가 공덕을 쌓기 위한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하​​​​​​​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최근 일본학계에서는 수행과 법회를 위해 산속에 지은 불당, 사원을 ‘산림사원’이라 부른다. 이 산림사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하는데, 첫 번째는 불교적 수행이고, 두 번째는 평지가람과의 유기적인 관계이다. 즉 평지가람에서는 수학(修學)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산림사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 불교적 수행이 행해졌다. 평지가람에서의 수학과 산림사원에서의 수행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돼 있다. 일본의 산림사원은 기본적으로 당탑을 가지고 있으며 회랑을 갖춘 사찰이 많다. 하지만 카스가 산중(春日山中)의 호산 이존석불, 지옥곡의 성인굴마애불, 나라시대 일부 산악의 석불이나 마애불과 같은 유적 등은 그 입지나 주변 환경이 경주 남산의 불적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러한 불상 역시 산림수행과 관련한 존상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경주 남산의 불적도 일본의 산림사원과 같은 승려의 수행과 관련한 장소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9년(587) 기사 속에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에 대한 세속의 외면과 그들의 깨달음에 대한 염원 등이 감지된다. 대세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친구를 구하다가 처음 담수(淡水)를 만났지만 끝까지 같이하지 못했고, 이후 그와 같은 뜻을 품은 구칠(仇柒)을 만나 바다로 향해 함께 떠났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두 사람이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남산의 절(南山之寺)’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 품은 뜻을 서로 확인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 수행의 직접적인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를 비춰볼 때 이야기 속 ‘남산의 절’은 배움과 관련한 수학(修學)의 장소라기보다는 깨달음과 관련한 수행의 장소에 더 무게를 둘 수 있다.

2021-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