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새 생명을 불어넣는 개선

엄주선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가을이 되면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고 땀방울을 흘리며 추수하는 농부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는 언제부터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고 서로 가진 것을 사고팔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농경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농사기술이 발전하여 생산량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수확량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남는 곡식을 저장하고 다른 필요한 물건들을 서로 물물교환하면서 많은 저장과 이동이 동반되었고 유통(流通)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을 것이다.유통은 생산과 소비 사이에 존재하며 양자를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장소, 시간, 사람 간의 이격이 존재한다. 예컨대 식탁에 오르는 생선은 근해나 원양에서 오는 것으로 이렇게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장소적인 이격이 존재하며, 이를 연결하는 것이 ‘운송기능’이다. 또 쌀은 가을에만 수확하여 연중 소비가 발생하므로 생산과 소비 사이에 시간적 이격이 존재하며 이를 연결하는 것이 ‘보관기능’이다. 그리고 쌀을 생산한 사람은 본인이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 쌀을 사려는 사람에게 팔아 현금화하여 다른 필요한 물건을 사고 싶어 하므로 이를 연결하는 것이 ‘판매기능’인 것이다.이처럼 장소, 시간의 이격을 매워주는 것을 우리는 물적유통(物的流通) 즉 ‘물류’라고 하며, 사람 간의 이격을 매워주는 것을 상적유통(商的流通) 즉 ‘상류’라고 한다. 그 중 제조현장은 물류의 개선이 중요하며 핵심은 장소와 시간적 이격을 줄여 생산하는 물건이 낭비 없이 흐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생산현장을 보면 종종 물류의 핵심 개선 포인트를 잊어버리고 필요 이상으로 저장공간을 많이 두거나, 시간적 이격으로 인해 재공, 재고가 늘어 제품 회전이 늦은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필자가 지도한 회사 중에 1천종류 이상의 내화물을 생산하는 공정이 있었는데, 가열로에서 나온 내화물을 종류와 사이즈 별로 팔레트에 적재 후 별도의 저장공간에 하나의 통로를 통해 저장 후 다시 꺼내어 포장공정에서 포장하여 최종 제품을 공급하는 생산라인이 있었다.내화물의 종류가 많다 보니 넓은 저장공간이 필요하였고 하나의 통로를 통해 입, 출고를 하고 있어 역물류 발생과 포장할 제품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이를 제품 종류별 생산 로트(Lot) 크기를 줄여 재고량을 줄이고, 입고와 출고 통로를 별도로 구분하여 물건이 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개선하여 하루에도 수백번씩 발생하던 역물류와 시간을 줄인 예가 있다.물류는 ‘사물(物)이 흐른다(流)’를 의미한다. 즉 생산하는 제품의 행선지와 두는 곳을 정하고 시간과 수량을 정해 최적으로 흐르도록 물품에 일종의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지와 시간이 없는 것은 죽은 물건이 되는 것이다. 제조현장의 모든 생산품에 대하여 생명을 불어넣고 장소, 시간의 이격을 줄이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직원은 낭비를 발굴하는 역량이 향상되고 회사는 제품의 빠른 회전을 통해 경쟁력이 한층 더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2021-11-08

함께 한다는 것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모든 것들이 차츰 제자리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산자락 어딘가엔 열매가 익어 저절로 떨어지고 땀이 서린 들판엔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풀잎이나 잎새는 마르거나 물들어가며 조락(凋落)을 기다리고, 벌레나 짐승들은 제 나름의 몸짓으로 먹이를 모으거나 땅을 파며 동장(冬藏)을 채비하고 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 지나선지 쌀쌀해진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의 미틈달은 결실과 수확, 정리와 준비로 제자리를 채워가는 시간이다.세상만물은 모두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구름이 흘러가다가 비를 내리듯이(雲行雨施), 자연은 만물이 두루 은택을 받아 잘 생장하고 완성된다. 천변만화하는 자연의 이치 속에 온갖 생명체는 생멸을 거듭하고 만남과 헤어짐은 다반사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정체되면 발전이 없듯이, 우리는 환경과 사물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 버물리고 제자리를 찾아가며 저마다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작고 변변찮은 미물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교감과 상호작용으로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미상의 바이러스도 공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여건이 세상을 움직여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코로나19라는 희대의 바이러스와 싸우며 버텨온지 꼬박 2년이 다돼 간다. 설마설마하던 바이러스가 공포와 불안의 회오리를 일으켜 지구촌은 신음과 침체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조마조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친 엄청난 충격과 파장은 수많은 이변과 변화, 생소함과 이질적인 양상으로 나타나 혼돈과 암울의 안개를 여전히 묶어 두고 있다.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모색과 낯선 듯 익숙한 적응으로 난국을 헤쳐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단계적 일상회복’이 11월부터 전면적으로 이행되고 조금씩 삶의 제자리 찾기가 시작된 것 같다.단절과 고립을 걷어내는 포용적 방역관리로 국민들의 피로감을 감소시키고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의 손실과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새로운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적절한 시기의 조치로 여겨진다. 다만, 시민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방역을 통해 모두에게 소중한 일상으로의 회복을 추진하여 ‘더 나은 내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솔선수범과 배려와 존중, 신뢰와 공감으로 가정과 이웃을 함께 지켜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함께 한다는 것은 보듬고 감싸며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또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다독이며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은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서로가 어울려 위로하고 격려하며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뜩이나 혼미하고 흉흉해진 세상일수록 우리는 자신과 서로를 챙기고 사랑하며 더불어 함께 지켜가는 아량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피할 수 없다면 당당히 맞서서 받아들여야 한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자연과 인간은 공생해야 공존할 수 있다. 어차피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세상이라면, 희망과 행복의 바이러스를 불러들여 일상의 제자리를 되찾고 평온한 미래를 함께 열어 가길 기대해본다.

2021-11-08

대장동게이트, 특검을 해야 하는 이유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제왕적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대선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 게임의 규칙이나 심판이 불공정하면 부정선거가 된다. 대선을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발화된 ‘대장동게이트’는 인화성이 높아서 선거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 때문에 권력게임에 참가하는 선수(후보)와 심판(검찰·법원)은 물론, 이를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국민)의 관심이 뜨겁다.대장동게이트를 둘러싼 정치게임에서 후보와 국민이 모두 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립적이고 공정한 수사를 담보할 수 있는 심판, 즉 ‘특검’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장동게이트는 여당의 대선후보 이재명 전 성남시장이 최종 결재권자로서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 현재의 검찰로서는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야당과 대다수 국민의 판단이기 때문이다.검찰에 대한 불신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수사책임을 맡고 있는 검찰총장 김오수는 임명되기 전까지 성남시의 고문변호사로 일했음이 밝혀졌고, 이재명 후보의 선거법 위반 최종심을 맡았던 권순일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대장동개발 추진사업체 ‘화천대유’의 고문을 맡았으며, 구속된 유동규는 이재명 후보의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법조계와 정치계 등 다수의 전·현직 권력들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범죄의 본거지인 성남시청에 대한 압수수색은 수사 착수 22일 만에 이루어졌으니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준 것”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검찰이 졸속수사,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고 있으니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 “부끄럽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권력의 눈치를 보는데 익숙한 검찰의 편향성에다가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까지 성남시의 고문변호사로 일했으니 어떻게 공정한 수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권력 해바라기 검찰이 대선을 의식해서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야당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검찰이 이재명캠프의 서초동 지부라는 말을 듣게 생겼다.”고 강하게 비판했다.최근 여론조사들은 검찰 수사를 믿을 수 없으니 특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코리아정보리서치의 조사에 의하면 김오수 검찰의 수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67.1%)이 신뢰(13.3%)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또한 ‘이재명게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54.2%)이 ‘국힘게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33.3%)보다 훨씬 많다. 때문에 특검의 수사에 대해서는 캐이스탯리서치(찬성 73%, 반대 21%), PNR(찬성 61,3%, 반대 28.9%), 한국리서치(찬성 63.9%, 반대 26.8%) 등 모든 여론조사에서 찬성이 반대보다 2배∼3배 이상 많다.검찰을 믿을 수 없으니 특검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야당과 국민의 여론인데, 이를 무시하고 대선을 강행하면 공정성이 문제된다.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는 이재명 후보도 특검을 수용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만약 특검을 하라는 주권자의 명령을 거부하면 대선에서 국민이 직접 후보자를 심판할 수밖에 없다.

2021-11-08

영부인 가방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6월 영국 콘월 미낙극장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배우자 프로그램을 마친 후 미국 대통령 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 캐리 존슨 영국 총리 부인과 기념촬영을 할 때 들었던 스테파니백이 ‘영부인 가방’으로 화제가 됐다.한때 에르메스 백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으나 화제의 가방은 국내업체인 쿠론의 ‘스테파니 클래식 백’이었다.지난 7월 중순 출시한 ‘스테파니 클래식 31’ 카라멜 카페 색상 가방과 브라우니 케이크 색상 가방은 영부인 가방으로 화제가 되면서 날개 돋힌 듯 팔려 지난 4일 기준 판매율이 각각 95%, 94%였다. 패션업계에서는 판매율이 90% 이상을 기록한 경우 완판으로 보고 있다. 공식 온라인몰에서는 이미 품절됐으며, 오프라인 일부 매장에서만 구매 가능하다. 두 상품은 각각 500점, 50점 한정 수량으로, 가격은 각각 63만8천원, 83만8천원이다.스테파니 클래식 백은 2012년부터 쿠론을 대표하고 이끌어온 모델로 2014년까지 7천개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또 하나의 영부인 가방이 있다. 김 여사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차 이탈리아 방문 중에 선보인 한지 핸드백이다. 해당 가방은 국내 비건 가방 브랜드 ‘페리토(PERITO)’가 ‘동물의 희생 없이 아름답고 좋은 가방을 만든다’는 취지로 선보인 ‘블레드 깃털백’으로 벌써 품절상태다. 현재 예약 주문만 가능하다.영부인이 해외 출장때 국내 기업이 만든 가방을 들고 나가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을 널리 알린 것은 좋은 내조로 읽힌다. 영부인의 소소한 배려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해도 좋을 듯 싶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1-08

이유 있는 반항

사공정규​​​​​​​동국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청소년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제임스 딘’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청춘을 상징하는 불멸의 아이콘이 됐다.영화 속 주인공인 세 명의 청소년은 겉으로는 단란한 가정의 아이들 같았지만,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상태였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이 세 명의 청소년이 ‘정신병적 장애’를 가진 자가 아니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질풍노도’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라는 뜻으로 청소년기의 격동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부모의 말이라면 곧잘 듣던 우리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충동적이고 이유 없는 반항을 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그렇다고 청소년의 ‘질풍노도’를 단지 ‘철없음’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현대정신의학의 발달로 인해 청소년들이 보이는 ‘감정 반응’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입증되고 있다. 전두엽(frontal cortex)은 자기를 인식하고 감정·충동을 조절하고 행동을 계획하는 역할을 하는 이성의 중추이다.변연계(limbic system)는 감정의 중추로, 특히 편도체(amygdala)가 분노, 흥분, 공격성 등 즉각적이고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청소년 시기의 뇌는 감정을 통제하고 뇌의 관제탑 역할을 하는 전두엽은 완만한 속도로 발달하는 데 비해 감정 반응을 일으키는 변연계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달한다.따라서 청소년의 뇌는 감정 반응의 브레이크 작용을 하는 ‘차가운 뇌’인 전두엽의 힘이 감정 반응을 일으키는 ‘뜨거운 뇌’인 변연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격차가 벌어지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뇌는 성인처럼 전두엽이 성숙하기 전까지는 의사결정, 감정반응, 행동이 ‘뜨거운 뇌’인 변연계의 지배를 더 받게 된다.이런 이유로 청소년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 감정을 잘 주체하지 못하고, 충동을 잘 억제하지 못하고, 본능에 더 민감하고, 쉽게 흥분하거나 좌절하게 된다.안타깝게도 청소년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부모는 자녀의 부정적인 감정 반응에 직접적으로 맞대응하고 급기야 다그치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부모의 ‘무지’와 ‘이해 부족’이 많은 참사를 낳기도 한다.그렇다면, 부모는 청소년 자녀의 부정적 감정 반응에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첫째, 청소년 자녀의 부정적 감정 반응으로 부모가 화가 나고 좌절감을 느끼더라도 이런 감정으로 자녀를 마주해서는 안된다. 부모가 분노하면 청소년의 뇌는 더 큰 분노로 반응한다. 부모는 침착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며 부모가 ‘차가운 뇌’ 전두엽의 역할을 보여 줘야 한다.둘째, 부모의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표정조차 청소년 자녀의 뇌는 부정적으로 느끼기 쉽다. 부모는 자녀의 부정적 감정 반응에 직접 맞대응하기보다는 사랑과 공감의 눈빛으로 조용히 곁에서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의 ‘뜨거운 뇌’가 식기를 기다리는 것이다.세번째,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모의 잔소리는 청소년 자녀 뇌의 이성적 사고를 경감시키며 오히려 부정적 감정을 악화시킨다.또 잔소리는 자녀에게 반박이나 논쟁거리를 제공해 힘겨루기 양상이 되기 쉽다. 다만, “그런 말(행동)을 하면 엄마(아빠) 마음이 어떻겠니?”이라고 부모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효과적이다. 핵심은 부모의 생각이 아닌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다. 생각은 청소년 자녀의 몫으로 두는 것이 자녀의 ‘이성 뇌’인 전두엽을 발달에 도움이 된다.끝으로, 감정과 정서는 경청하고 수용해야 한다.예를 들면, “참, 힘들었겠다”, “많이 속상했겠다” 등의 표현으로 감정을 읽어주고 공감한다. 그래야, 감정을 쌓아 두지 않게 된다.다만, 공격적 행동이 동반되는 경우에는 “공격적 행동은 용납될 수 없다”는 인식을 시켜주어야 한다. 단, 화가 난 큰 목소리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 톤으로 힘 있게 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 필요한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묻고 합리적인 제재가 있어야 한다. 합리적인 제재를 가할 때도 선택권을 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너의 행동에 대해 3시간 후에 반성문을 쓸 수도 있고, 3시간 후에 의견으로 말할 수도 있다. 너는 어떤 것을 원하니?”이라고 한다.청소년기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과정이다.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신체뿐 아니라 뇌와 마음의 발달에 따른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청소년기에 성호르몬이 분비돼 ‘이차 성징’이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가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듯, 청소년기의 ‘질풍노도’는 뇌와 마음의 발달과정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면 어떨까?그렇다면, 청소년의 ‘이유 없는 반항’은 뇌와 마음의 발달 면에서는 거쳐야 할 정상적인 ‘이유 있는 반항’일 수 있다. 다만, 부모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올바른 대처를 못 한 것은 아닐까.

2021-11-07

코로나19 백신패스, 못마땅하다!

이재혁대구경북녹색연합 대표 정부는 11월부터 단계적 일상 회복 방안을 발표하면서 실내체육시설과 유흥시설, 노래연습장, 목욕탕 등 고위험 다중이용시설과 의료기관, 요양병원, 중증장애인 및 치매시설, 경로당 등 고령층 방문시설에 대해 백신 패스를 적용한다고 발표했고 해당 시설에는 백신 접종을 모두 완료한 시민들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만약 백신 접종을 마치지 않았을 경우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검사를 통한 음성확인서를 지참해야 하며, 이밖에도 만 18세 이하 아동·청소년, 완치자, 백신 임상시험에 참가했거나 항암 치료를 받는 경우, 또는 백신 1차 접종 후 부작용을 겪는 등의 의학적 사유에 의한 백신접종 예외자는 방역패스 대상에서 제외된다. 백신패스 없이 시설을 이용하게 될 경우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과태료가 부과되는데, 시설 이용자는 10만 원의 과태료, 관리자에게는 최소 150만~300만 원의 과태료와 최소 10일에서 최대 영업장 폐쇄 명령이 내려진다.백신패스는 왜 나온 것일까? 정부는 코로나19 접종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백신패스를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은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으로 불안하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백신접종을 못하고 있는 국민을 배려하지 않고 정부의 입장만을 생각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백신 확보를 못해 온갖 핑계를 대던 정부, K방역이라고 자만하다가 이물질 주사기로 체면을 구기고 유해물질로 범벅된 검사용 면봉 사건으로 할 말을 잃게 한 정부, 코로나19 사태 초기 봉쇄정책을 눈치만 보다가 때를 놓쳤고 코로나19 감염확산을 정치, 종교적 이슈도 몰아간 정부 등 언급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대처에 문제가 많았었다.백신을 접종완료 통계에만 집착하고 중요한 항체의 생성 유무는 확인하지 않고 있어 의아할 따름이다. 백신을 접종하더라도 돌파감염 사례가 빈번하고 백신마다 항체 생성률이 다른 마당에 무조건 백신 맞은 접종자만을 위한 백신패스가 바람직한 것일까?지금까지 코로나19가 심해도 허용하던 시설에 대한 출입을 제한한다는 것은 근거도 없이 정부의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간제한, 인원제한도 사실 국민들에겐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되었다. 오후 6시부터 또는 밤 10시가 되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제한이 이루어졌다는 조롱이고 유명무실한 인원제한도 마찬가지였다.물론 코로나19 방역이 필요하고 백신 접종도 필요하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내용을 상세히 알리고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 어떤 정책이든 국민들이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국민들에게 조롱받는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더 주는 정부정책을 마냥 찬성할 수만 없다.PCR검사도 시점에 따른 오차(바이러스 배출 시기 이전에 음성판정 가능)가 존재하고 특정질환으로 접종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차별이 우려스럽고 접종완료자 역시 바이러스 전파 우려가 분명히 있다. 결국 백신을 맞았다고 반드시 감염이나 전파 위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데 미접종자만 차별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고 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한 상황이다.‘위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노력중이지만 또다시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4차 유행이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일일 확진자수가 3만 명을 넘어서고 있고 독일도 확인자수가 1만 명을 넘어 선진국도 코로나19의 방역정책이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경우도 확진자수가 2천 명을 넘어 향후 수천 명이 될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특히 델타변이 바이러스의 경우 접종완료자라 해도 미접종자와 똑같은 수준의 전파력을 지닐 가능성이 있어 백신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의 호흡기 점막에 침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다고 한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를 무엇으로 세우고 있을까?‘백신 패스’는 사실상 백신 접종 의무화 정책이다. 국민들을 불안하게만 했던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백신 미접종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코로나19로 무너진 자영업자들에게 희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지에 몰아넣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코로나19는 현재 상황에서 퇴치는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제 공존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력이 약화되었고 계속되는 변이의 출현으로 상당기간 코로나19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그러므로 확진자수에 집착하기 보다는 고위험군을 집중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의료자원의 재분배를 준비하고 방역 완화시 감염자 폭증을 대비하여 병상 확충 등의 의료체계의 정비가 필요하다. 방역조치가 특정계층에게 몰리지 않도록 거리두기 및 손실보상 범위도 조정해야 한다. 국민이 불안한 이유를 정부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위드 코로나19’시대를 제대로 준비해주길 바란다. 국민은 백신패스가 못마땅하다!

2021-11-07

백스(Vax)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을 편찬하는 옥스퍼드 랭귀지가 백신의 줄임말인 백스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사전편찬 대표는 “매우 파급효과가 컸기 때문”이라고 선정 배경을 언급했다.옥스퍼드 랭귀지는 영어권 세계뉴스에서 수집한 145억개의 단어를 훑어 그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분위기를 잘 대변한 단어를 골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다. 과거에는 셀피(셀카 사진), 베이프(전자 담배를 피우다) 등이 선정된 바 있다.올 10월 말 기준 지구상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이 500만명을 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를 감안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고도 한다. 중국 우한에서 첫 사망자가 나온지 1년 10개월만의 수치다. 국가별 누적 사망자는 미국이 76만명으로 가장 많고 브라질 60만명, 인도 45만명의 순이다.팬데믹은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팬데믹에 속하는 질병은 14세기 중세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과 1918년 5천만명 이상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그리고 1968년 100만명을 희생시킨 홍콩독감 등이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설립한 이래 세 차례 팬데믹을 선언했는데, 홍콩독감과 신종플루, 코로나19다.코로나 바이러스로 500만명의 인류가 사망한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다. 미국 LA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거대한 도시 하나가 통째로 소멸한 것과 같다.그러나 코로나19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유한 나라에 더 많은 타격을 준 질병이라는 점에서 색다른 여운도 남기고 있다. 옥스퍼드 랭귀지가 선정한 짧고 강렬한 이미지의 백스는 후대에는 수많은 인류의 희생을 초래한 악명 높은 질병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07

국가부채를 가볍게 여기는 정치권력

심충택 논설위원 요즘 신문 광고란을 보면 ‘상속한정승인’ 공고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신문공고일로부터 일정기간 안에 공고인에게 채권을 신고하지 않으면 부채청산에서 제외된다는 내용이다. 부모의 빚을 상속한 자녀가 법원판결을 받아 부모 채권자들에게 빚잔치를 하겠다는 광고다. 부모의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녀가 빚잔치를 하기 위해 송사를 벌이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안타깝다. 자식에게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 빚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부모의 상속을 포기하는 절차는 까다롭기 짝이 없다. 1순위 상속인(직계비속·자녀, 손자녀)이 상속포기를 하면 2순위(직계존속·조부모), 3순위(피상속인의 형제자매), 4순위(4촌 이내 친족)에 차례대로 넘어간다. 사망한 부모의 빚 때문에 일가친척 모두가 원수처럼 지내는 집이 비일비재한 것은 이처럼 빚이 4촌 친척에게까지 대물림되기 때문이다.국가 부채도 가계 빚과 마찬가지다. 국가가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우리국민의 경우 IMF사태 때 너무나 혹독하게 겪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 감당하지 못할 빚을 차기 정부에 상속하면 그 국가는 빚잔치하는 자녀처럼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 국가신용등급 하락과 함께 원화가치가 떨어지고, 해외투자가 철회되거나 끊기면 전 국민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지난주 국회 예산정책처가 우리나라 빚이 8년 뒤에는 2천조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보다 8.4% 증액된 내년 예산안 수준의 재정 팽창 기조가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계산한 결과다. 나랏빚 500조원(2014년 533조원)이 1천조원(2022년 1천73조원) 되는 데 8년 걸렸는데, 1천조원이 2천조원(2029년 2천30조원) 되는 데는 7년밖에 안 걸린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 5년간 국가 채무가 408조원 늘어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의 증가액 351조원을 훨씬 웃돈다.현재 집권여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보다 국가 빚에 대한 경각심이 더 없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이 후보는 김부겸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재정여력이 없다”고 밝혔지만, 최하 30만~50만원의 전국민 6차 재난지원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다. 위험수위에 도달한 국가부채는 뒷전이고, 포퓰리즘으로 내년대선에서 이기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꽉 차 있는 것 같다. 이러니 야당에서 ‘자유당시대 고무신선거와 다름없다’는 비난이 나오는 것이다.이재명 후보는 지난주 열린 민주당 선거대책 위원회에서 “우리나라 국가부채비율이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도 좀 인지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나라 빚은 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수직상승하고 있다. 가계부채는 세계 최악이다. 2023년부터는 국가채무의 연간이자가 20조원을 넘어선다. 전국민 재난지원금처럼 일시적으로 국민에게 돈을 푸는 것은 서민생계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청년과 퇴직자, 실직자들이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 마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치권력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2021-11-07

동문서답

조현태​​​​​​​수필가 그저께는 잡채와 닭죽을 얻어와 이틀이나 맛나게 먹었다.빈 그릇을 돌려주기보다 뭔가를 채워 줘야지 싶었다. 여름에 수확하여 빻아놓은 고춧가루를 통에 가득 채웠다. 역시 얻어오는 고마움보다 나눠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평범한 이치를 또 한 번 느끼며.맛있게 잘 먹었노라고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적고 있는데 김씨가 도착했다. 그의 작품을 논의하기 위해서 미리 연락하고 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중에 한 아름 가져온 물건을 불쑥 내밀었다. 호박죽 한 통과 음료수 한 박스. 뭘 또 이렇게 가져오시나 하고 받으려니 도서관 이씨 심부름이나 하게 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게 김씨의 심부름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나는 속으로 ‘그래 이씨가 호박죽을 참 좋아하지’했다.심부름이야 조금 후에 해도 되니 일단 호박죽은 냉장고에 보관했다. 나는 음료수라도 하나씩 마시고 논의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방금 점심 먹었으니 끝내고 커피나 한 잔씩 마시자고 했다. 서로 바쁘게 살고 있으니 얼른 마치고 가야하나보다 생각했다. 작품은 이메일로 받았고 미리 출력해 검토했으니 일사천리로 논의를 마쳤다.약간의 환담 후에 일어서는 김씨를 전송하고는 곧바로 자전거를 준비했다. 어차피 지금은 자전거 운동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전거 코스가 남쪽이지만 오늘은 북쪽으로 가도 운동은 마찬가지 아닌가. 후다닥 냉장고에 두었던 호박죽을 자전거에 싣고 바로 페달을 밟았다.이씨를 본 지도 오래고 가을 날씨까지 무척이나 상쾌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신나게 달려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호박죽을 책상 위에 놓고는 전화를 했다. 이씨가 남편의 일터에 나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김씨가 가져온 호박죽을 전해주러 왔는데 아무도 없어 책상 위에 두고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얼굴 보면 좋으련만 아쉽다는 인사를 교환하며 돌아온 것까지는 괜찮았다.몇 시간 지난 후 이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호박죽과 음료수는 이씨가 나 먹으라고 김씨에게 들려 보낸 건데 왜 도로 가져왔느냐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김씨가 갖다 주라고 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김씨가 농담했나?또 한참 후에 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김씨는 먼저 이씨 집으로 가서 호박죽을 먹고 내게도 갖다 주라는 이씨의 부탁을 김씨가 심부름했던 것이다. 문우의 설명을 듣고 머리가 띵해졌다. 김씨가 음료수와 호박죽을 가져와 음료수는 내가 마시고 호박죽은 이씨에게 갖다 주라는 심부름으로 들었으니 말이다. 할 말이 없었다.다시 이씨에게 가서 호박죽을 가져와야 했다. 말을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니까 내가 감당해야 할 당연한 수고다.상대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거나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사람.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골라서 듣는 사람. 자신의 생각은 틀려도 옳고 상대의 생각은 옳아도 틀리다고 억지 부리는 사람.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말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 남의 말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 이미 뱉은 말에 책임지지 않으려 드는 사람….우리가 살면서 말만 정확하게 소통해도 훨씬 더 경제적이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터이다. 오랜 옛날부터 세 치 혀를 강조해오지 않았던가.

2021-11-07

선비문학의 노래, 입암28경

윤영대수필가 영남유교문화권에는 서원과 향교, 재사와 종택, 누정(樓亭) 등이 널려있는 노천박물관이 많고, 그중 포항 죽장면 입암리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의 낭만적 삶을 찾아가는 길, 자호천 따라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입암 28경은 임진왜란 때 대학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피난 왔다가 그 절경에 매료되어 머물면서 시를 쓰며 이름 지었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벗들과 시가를 읊으며 40여 년간 고고한 삶을 살다가 84세에 세상을 뜬 곳이다.조용한 서원 앞에 주차하고 돌계단을 오르니 300년 된 은행나무가 거느린 울창한 송림 속의 서원은 닫혀 있어 낮은 담장 너머로 보면 입암서원(立巖書院)이란 투박한 서각의 현판이 걸린 곳은 강당, 그 뒤뜰의 묘우(廟宇)에는 장현광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봉 권극립, 우헌 정사상, 윤암 손우남, 수암 정사진 등 사우(四友)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입암서원은 경북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고 유물들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가을바람에 끌리듯 동봉 권선생 유허비를 돌아 마을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만활당(萬活堂)을 들여다보고 가사천 개울로 내려갔다. 물가에 탕건을 쓴 듯 우람하게 서 있는 탁입암(卓立巖)과 춤추는 듯한 처마가 고운 일제당(日8E8B堂)은 서로를 바라보듯 사랑스러운 한 쌍인데, 그사이 기여암과 계구대 바위가 시샘하듯 둘러싸고 있다. 28경의 중심, 그 한적한 난간에 앉아 맞은편 구인봉을 보며 옛 선비의 ‘입암13영(詠)’을 듣고 싶다.입암 아래 돌다리 답태교는 흔적도 없고 물가에 놓인 상두석 수를 헤아려보니 7개, 그래서 북두칠성을 노래했었구나. 맨발로 건너서 깨끗한 경심대 반석에 앉아 마음을 씻으면 맑은 수어연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헤아려본 문객들의 유유자적한 풍류가 그리워진다. 개울 건너 피세대 절벽 아래는 맑은 물이 흘러들어 여름철에는 캠핑족들의 낙원이 된다. 발 씻고 그 앞의 넓은 잔디밭으로 건너가니 노계 박인로 시비가 단아하게 서서 ‘입암별곡(立巖別曲)’을 노래하고 있다. ‘무정히 선 바위 유정하게 보이나다….’목이 말라 솔안마을에 있다는 물멱정 샘을 찾으며 서원원무소를 지키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더니 만활당 뒤쪽이란다. 큰 느티나무 둥치 뿌리 사이에 솟는 작은 샘물을 한 움큼 마시고 갈증을 씻었다. 다시 차를 타고 함휘령, 산지령을 먼발치에서 보며 상암대와 욕학담으로 갔는데 홍수에 떠내려온 나무들이 걸려있어 모습을 잃었고, 허탈한 마음으로 읍내로 내려와 자호천과 가사천이 만나는 합류대(合流臺)를 찾았더니 입암교 부근은 지난여름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가 가득하다, 부근에 있었다는 향옥교와 화리대, 경운야와 야연림의 사라진 옛 흔적을 찾다 보니 해는 어느덧 서산에 기운다.옛 선비들의 ‘안빈낙도 선공후사(安貧樂道 先公後私)’의 가르침을 안고 되돌아오는 길, 마지막으로 세이담이 있는 까치소 맑은 물에 귀를 씻었다. 여러 관직에 불리었으나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여헌 선생 같은 인물이 이 시대에도 나와, 참된 말씀을 들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21-11-07

에펠탑 효과

‘에펠탑 효과’를 ‘호감도 효과’라고도 부른다. 처음에는 싫어하거나 무관심했지만 대상에 대한 반복 노출이 거듭될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는 현상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우리 말의 “자주 보면 정들고 정들면 좋아진다”는 말과 뜻이 비슷하다.에펠탑에 이런 의미가 붙여진 사연은 이렇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맞아 파리만국박람회가 열리면서 건립한 에펠탑이 당시에는 파리의 많은 예술가와 시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고풍스러운 고딕 건물로 이루어진 도시에 무게 7천t, 높이 320m나 되는 철골구조물은 천박한 인상을 준다는 생각 때문이다.당초 20년만 유지키로 했던 에펠탑은 1909년 해체 위기를 맞으나 무선전신 전화의 안테나로 이용되면서 철거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파리의 명물로 등장한다. 지금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시민의 자랑거리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반복적 노출이 만들어낸 최상의 호감도를 이끈 사례다. 잡음을 일으켜 구설수에 오르게 하는 노이즈 마케팅도 에펠탑 효과의 일종이다.호감이 간다는 말은 어떤 대상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마음인데 정치인에게는 유권자의 호감도가 매우 중요하다. 인상이나 말씨와 느낌 등으로 유권자의 표심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내년 3월 대선은 특이하게 여야 유력 후보 모두가 비호감도가 높은 인물이어서 걱정을 하는 이가 많다. 한 여론조사에서 유력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60% 선을 오갔다고 한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이를 “국민들께서 한마디로 실망스럽다고 하신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동감이 가는 말이다.4개월 정도 남은 대선까지 여야 후보의 비호감도가 에펠탑 효과처럼 호감형으로 바뀔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11-04

정권교체론의 착시현상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결과가 5일 오후 발표될 예정인 가운데 ‘정권교체론의 착시현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보통 정권교체론은 집권여당이 아닌 야당을 지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체론이 높으면 당연히 야당이 대선에서 유리하다. 그러나 이런 평면적인 분석은 착시를 일으키곤 한다. 올해 들어 여야 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뤄진 수많은 대선 여론조사에서도 정권교체론이 정권재창출론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대략 10%p 이상 정권교체 지수가 정권유지 지수보다 높았다. 국민의힘은 이 여론조사를 근거로 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예단하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과연 그럴까.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내년 대선 승부가 여야 진영대결로 번져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 이유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확연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이재명 후보가 야당 후보들과의 가상대결에서 모두 앞서거나 근소한 차이로 경합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정권교체를 원한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모두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특히 정권교체를 원하면서도 민주당 정권을 지지하는 유권자도 있다. 실제로 민주당 지지층이나 진보층의 약 10~20%가 정권교체를 희망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정권교체론이 착시를 일으키게 하는 대목이다. 여당인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응답을 하는 건 어떤 경우일까. 이는 문재인 정부의 실정엔 반대하지만 민주당 정권을 지지하는 심리가 조사에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정권교체 지수가 줄곧 10% 이상 높은데도 정당 지지도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근소하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지난 2012년 이명박 정부 시절 치른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론에 대한 착시현상이 심했다. 여당의 박근혜 후보와 야당의 문재인 후보가 맞붙었다.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둔 11월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여론이 정권유지보다 20%p 가까이 높았다. 하지만 양자대결 조사에서는 박근혜가 문재인을 앞섰다. 집권층을 지지하는 보수층 응답자의 20% 가량이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답했다. 당시 문재인 캠프는 정권교체 지수가 높다는 데 근거해 야당이 승리할 것이란 낙관 속에 선거전략을 짰다. ‘이명박근혜’프레임으로 ‘박근혜 집권은 이명박 정권 시즌2’가 된다며 정권교체를 주장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2007년 대선 경선 패배 이후 ‘여당 내 야당’으로 차별화했다. 대선에 앞선 총선에서 친이계에 대한 ‘공천학살’을 벌였다. “박근혜 당선이 곧 정권교체”라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박근혜가 승리하면서 ‘여당 내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세월이 흘러 상전벽해가 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역시 비주류·비문의 정치 역정으로 벌써부터 ‘이재명 정부 창출’을 주장하고 나섰다. 정권교체론이 높다며 방심했다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대선은 말 그대로 건곤일척 승부다. 하늘과 땅을 걸고 벌이는 한판 승부의 결말이 참으로 궁금하다.

2021-11-04

의대 열풍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너무 인상적인 의사를 만난 경험이 있다. 갓 의대를 졸업했지만 너무 총명하고 친절하여 너무 믿음직스러운 의사였다.미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의사들의 총명성은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미국도 의대생들의 학력 수준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한국에서도 의대생의 실력은 대학을 막론하고 최상위권 학생들이 가는 곳이다. 의과대학을 향한 학생들의 열기는 뜨겁다. 이제는 전국적으로 의대는 최상위권 대학의 이공계보다 그 합격선이 높다고 한다.그런데 한편 의대 광풍의 사회문제도 한번 짚어볼 만하다. 요즘 이공계 대학의 저학년에서 휴학을 하고 의대 진학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로 학교를 못가고 비대면 수업을 하는 경우가 늘면서 이러한 현상은 가중되고 있다고 한다. 이공계 학생들은 친구들의 의대 입시 공부로 친구 만나기도 꺼려한다는 소문이다.의대에 최상위권 학생이 쏠리는 현상은 받아들인다 해도 그러한 배경에는 안정된 수입에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전문의 자격증을 가지고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의대 내의 세부 전공에 지망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환자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보다는 수입이 보장되는 전공으로 몰리는 것은 장기적 의학발전 관점에서 큰 걱정이다. ‘수만 가지 의약품 중 한국이 개발한 건 하나도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의대 약대가 함께 관련된 문제이겠지만 한국의 의사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신약개발 같은 분야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미국에는 의대 출신으로 신약개발에 종사하는 ‘의사과학자’가 많다고 한다. 의사과학자는 의사이면서 과학연구를 하는 과학자이다.포스텍, 카이스트 중심으로 의과학자 양성 방안으로 공과대가 주도하는 연구중심 의대 신설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의미가 있어 보인다. 미국은 연구중심 의대를 별도로 운영한다. 이런 의대들은 공과대와 협업하거나 아예 공과대가 의대를 설치해서 신약 개발이나 바이오산업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문제가 국회에서 토의된 적이 있다. 신약을 현장에서 직접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의사이며 환자를 위해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고 의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취지이다. 의사들이 참여한 신약개발은 상용화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개진되었다.의대 열풍은 그 열풍이 단순히 개인의 수입과 영달이 모티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구한다는 사명감이 바탕이 된다면 의과학의 연구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 또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돼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신약은 엄청난 숫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의대 열풍’은 그 자체가 이공계의 다른 학문에 위협이 된다. 그러나 의과학 발전이 병행된다면 그러한 위협은 상쇄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다.

2021-11-04

검찰개혁의 민낯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검찰개혁을 대한민국의 지상과제요 역사적 사명인 것처럼 몰아가던 때가 있었다. 조국 전 민정수석 일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고부터였다. 물론 그 전에도 검찰개혁이란 말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검찰의 과도한 권력을 제한하고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검찰개혁의 원래 취지였다. 그러나 지난 정권을 적폐로 몰아 단죄하는데 일등공신인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할 때까지는 검찰개혁이 그렇게 절박한 과제가 아니었다.윤석열 검찰이 조국 일가의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화들짝 놀란 정권은 검찰개혁을 꺼내 들었다. 피의자인 조국을 검찰개혁의 적임자로 법무부 장관에 앉혀 검찰을 장악하려고 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를 이은 추미에 법무장관은 재임기간 오로지 검찰개혁(?)에 올인 했다. 추 장관의 검찰개혁 제1 목표는 윤석열 총장이 구성한 수사팀을 해체하고 눈엣가시 같은 총장을 몰아내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 정권에 관련된 수사를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여론과 검찰 내부의 반발에 부딪히는 일이기도 했다.윤석열 총장의 손발을 자르고 검찰 밖으로 내몰기 위한 추미애 법무장관은 일 년여 재임기간 두 차례나 ‘학살인사’를 단행해 법무부와 각급 검찰청의 간부들을 요직에서 밀어내고 정권 실세들 관련 사건을 수사 중인 수사팀을 해체했다. 두 번이나 윤 총장의 수사지휘권을 박탈한 것도 모자라 직무정지와 징계청구권을 발동하기도 했다.법무장관의 이런 처사에 대해 춘천지검의 한 검사는 SNS에 “법무부는 조국 전 장관에 대한 수사 이후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며 인사권, 감찰권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검찰을 압박하고, 비판적인 검사들을 검찰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인 양 몰아붙이고 있다”며 “혹시 장관님은 정부와 법무부의 방침에 순응하지 않거나 사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하지 않는 검사들을 인사로 좌천시키거나 감찰 등 갖은 이유를 들어 사직하도록 압박하는 것을 검찰개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 감히 여쭤보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윤석열 총장이 사직을 하고 나오자 검찰개혁이란 말이 사라졌다. 더이상 검찰개혁의 필요성이 없어졌거나 이제는 검찰개혁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윤 총장의 제거가 검찰개혁의 목표이고, 지금의 검찰이 바로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던 개혁을 한 검찰인 셈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위시해서 대검찰청, 중앙지검 등 법무부와 검찰의 모든 요직에 오로지 정권과 코드가 맞는 인물들만 앉혀놓았으니 이제는 두 다리 쭉 뻗고 자게 되었다는 것인가. 늑대 같은 검찰을 발바리나 푸들 같은 애완견으로 길들여 놓고 이게 바로 개혁된 검찰이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런가보다 할 따름인가.그런데 그렇게 개혁된 검찰의 민낯을 보게 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대장동 사건’이다. 여권의 대선후보가 성남시장일 때 발생한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검찰개혁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수사를 하는 척 뭉그적거리다가 결국 꼬리 자르기로 매듭지을 거라는 예측이 무성하다.

2021-11-04

종교적 여흥(sideshow)

강영식포항 하울교회담임목사 맥시코 체첸이사의 쿠쿨칸 신전근처에 후에고데펠로타(골반축구장)가 있다. 경기장 넓이는 오늘의 축구 경기장과 비슷하지만 한쪽에 10미터 높이의 벽면이 있고 그 벽면 꼭대기에 농구골대와 같은 것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골반으로 공을 차서 그 골에 넣는 경기가 고대 마야의 골반축구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경기의 승자는 그 심장을 신전제단에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 결국 골반축구의 즐거움은 제물을 뽑는 ‘여흥’에 불과하다. 이 경기의 승자는 제물이 되어 신전의 제단에서 죽어야 하는데 과연 누가 골대에 볼을 넣으려 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당시 마야 사람들은 제물로 선택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승자가 되려 했다고 한다.여흥(餘興·sideshow)이란 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어오기 위해 광장이나 길거리를 돌면서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의 공연이다. 그러므로 여흥은 본질로 이끌기 위하여 제공하는 약간의 즐거움으로 메타포이며 예수는 이를 표적(Sign)이라 했다. 골반축구의 즐거움은 제물을 뽑기 위한 여흥일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어떤 종교이든 그 본래의 목적은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함에 있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기적을 보여 준 것은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여흥일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기적을 체험한 후 즐거워하기 보다는 무서워하면서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고 말했다. 만선의 기적은 여흥이었고 여흥이 이끌고자 했던 본질은 고기잡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인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여흥만 즐기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예수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따른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했다. 요한은 이를 표적신앙이라 했다. 표적이 가리키는 본래의 것을 봐야 하는데 표적만 보고 따른다는 질책이었다. 예수에게서 유대인은 표적만을 구하고 로마인은 고상한 지식만을 얻으려 하였는데 그것은 여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지적이었다.스퐁 교수는 오늘의 기독교에는 ‘종교적 여흥’만 남아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영적인 생활까지도 변화산에서의 세 제자들처럼 여흥에 빠져 있다고 했다. 지금 내가 신앙행위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기쁨과 만족이 종교적 여흥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까지도 여흥에 빠져 영적파산에 이르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2021-11-03

립스틱

정미영 수필가 립스틱을 바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끄럽게 덧발랐더니 색감이 선명해진다. 화장의 완성은 립스틱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 자신감으로 충만해져 거리로 나선다.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립스틱 바른 입술을 드러내 보이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예뻐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립스틱은 신분이나 국적, 나이를 막론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보석을 갈아서 입술에 화장을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로 만든 붉은 색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피부 톤을 하얗게 하고 입술은 붉은 빛으로 표현하는 화장법을 유행시켰다.립스틱 효과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경기가 불황일 때, 저렴한 가격으로 여성 소비자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 나는 립스틱 효과의 수혜자였다. 취업의 벽에 가로막혀 앞길이 막막했다. 직장을 못 구해 힘들어 하고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심리적 압박과 우울한 기분이 밀려왔다.도전과 좌절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꿈을 향한 목마름으로 굳게 닫힌 취업의 문을 열려고 애를 써도 현실은 냉정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주름지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푸를 것 같던 젊음이 점점 시들해지고, 마음은 흔들다리 위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학기 중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직장을 구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혼자서 긋고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취업 고민에 어깨가 처져 있던 날은 매서운 바람이 내 옷깃 속으로만 유독 몰려드는 것 같아, 잔뜩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탓에 자주 허방을 딛고 다녔다.그 시절, 주머니가 얄팍해 다른 화장품은 못 샀어도 립스틱만은 발랐다. 마음이 팽팽하지 않고 느슨해질 때 입술 선을 따라 색을 입히면 정신적 허기가 채워졌다. 립스틱이 마치 심리적 대변자라도 된 듯, 내 가슴에 담긴 수많은 문장들이 입술 색으로 표현되었다.립스틱을 바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맨얼굴에 립스틱만 바른 채 학교 도서관으로 향할 때면,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보이지 않는 실체지만 내가 꿈꾸는 이상향을 세밀하게 소묘하기를 반복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의 흔적은 어떤 무늬로 그려질까.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다.혹독한 마음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내게도 봄이 찾아왔다. 마침 적성에 맞는 일자리에서의 까다로운 면접까지 무난히 합격했다. 다행이었다. 봄빛 머금은 발랄한 색상의 립스틱은 일터로 향하는, 생기 넘치는 발걸음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립스틱은 때때로 자국을 남긴다. 첫사랑을 심하게 앓은 남자 동창생은 상대를 떠올리면 분홍 빛깔의 입술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직도 마음이 달뜬다고 한다. 처음 소개팅 자리에서는 밋밋한 인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으면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그녀의 얼굴이 펼쳐졌다고 한다. 청순해 보이는 립스틱의 분홍 빛깔이 풍부한 사랑의 언어로 탈바꿈해 그녀의 입술 위에서 빛났을지도 모른다. 예쁜 빛으로 물들여진 사랑의 언어를 받고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 빛깔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그럴 것이다.가끔은 즐겨 바르는 색 대신에 붉은 립스틱을 발라본다. 일상의 변화를 바라는 내 시도가 익숙한 안일을 밀어내고 싶은 순간에 입술 색을 바꿔보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무언가 도전하는 일도 잘 마무리될 것 같고 용기도 생기는 것 같다. 앞으로도 내 생활에 있어 당당함의 밀도가 느슨해져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 때 나는 립스틱을 짙게 바를 것이다.나의 립스틱에 대한 관심은 멈추지 않는 진행형이다.

2021-11-03

따스하고 착한 별빛 명상

어둠이 내리면 천지가 깜깜한 시절이 있었다.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도 휘황한 네온사인도 없었다. 사람의 집 영창에 비친 은은한 불빛이 전부였다. 그래서 여름밤 개울가에 나가면 개똥벌레가 지천으로 날아다녔다.그런 날, 먼 산 너머에는 어김없이 별똥별이 긴 빗금을 그으며 떨어졌다. 별똥별이 떨어지면 흙이 되고 그 위에 금싸라기 은싸라기 별꽃이 피고 개똥벌레가 날아가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신화는 깨졌지만 밤하늘에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주렁주렁 열려있다.개밥바라기 : 해가 진 뒤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별, 금성으로 개 밥을 줄 때쯤 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늑대별 : 천랑성(天狼星)이라 불리운다. 狼은 늑대이며 큰개자리의 시리우스별이다.닻별 : 북두칠성 아래 카시오페이아 자리를 일컫으며 모양이 닻을 닮았다고 하여 닻별이다.무저울 : 혜성 꼬리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별.미리내 : 남북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별의 군집.별똥별 : 유성.붙박이별 : 북극성으로 지구의 자전축 위에 있어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살별 : 긴꼬리를 끌고 도는 혜성으로 꼬리별이라고도 한다.샛별 : 금성으로, 새벽에 뜨면 샛별, 저녁에 뜨면 개밥바라기별이다.싸라기별 : 싸라기처럼 잘게 흩어진 별. 잔별이라고도 한다.어둠별 : 어둠이 짙어진 후 서쪽 하늘에서 반짝이는 금성을 말한다.여우별 : 날씨가 궂을 때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별.짚신할아버지 : 독수리자리의 견우성이다. 모양이 짚신을 삼는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하늘의 해달별은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는 에너지를 주고 달은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고 별은 길잡이가 된다. 인간에게 해는 희망을 주고 달은 휴식을 준다. 반짝이는 별은 꿈을 준다.“어둠은 별을 낳고 별은 명상을 낳는다. 칠성별, 플레이아데스 그리고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밤마다 줄기차게 윙크를 보내는 무수한 별자리들, 별은 암흑 속에서 제 몸을 태워 존재를 증명하고, 빛은 수 억 광년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온다. 그리하여 티끌만한 내 존재에 관한 명상에 불을 댕긴다.끝을 알 수 없는 시공간, 은하계 한 모퉁이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 가운데 지구에 사는 숱한 사람 중에 한 점, 나는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길을 찾는 존재론적 질문에 종교는 천당과 지옥으로 말하고 철학은 에둘러 말할 뿐, 별에서 와서 별로 간다는 신화만큼 희망을 주는 이야기는 없었다.”(김이랑 수필 ‘별’ 부분)별을 사색한 글이다. 작가는 별을 보며 ‘반짝인다’는 단세포적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 별을 바라보며 망망한 우주에서 티끌만한 자신의 존재를 사색하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명상에 닿는다. 이처럼 별은 인간에게 숱한 영감을 준다. 그래서 인간은 밤하늘 별자리에 숱한 이야기를 걸어놓았다. 칠성신화, 견우와 직녀, 별자리마다 전설이 있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은 감수성 예민한 사람을 통해 문학이 되었다.“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굴뚝 가까이 내려오던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도종환 ‘어떤 마을’ 전문)별은 밤하늘에만 뜨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고 사람의 마을 집집마다 불을 켜면 그 또한 별 하나 뜨는 일이다. 멀리서 보면 그 별은 군집을 이루어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시인은 사람들은 착하고 별들은 따스하다고 표현한다.별을 세다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별 하나에 단짝 친구가, 별 둘에 좋아하는 사람이, 별 셋에 언젠가 별빛처럼 나를 향해 달려올 사람이, 별 넷에 작년 이맘때 하늘로 가신 어머니가, 별 다섯에 이런 사람이, 별 여섯에 저런 사람이….해와 달은 하나이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한다. 하지만 별은 무수하므로 너와 내가 다툼 없이 나누어 가진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그래서 사람들은 너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겠다고 ‘뻥’을 쳤다. 그 ‘뻥’은 지금도 마음이 착하고 따스한 사람에게는 반짝이는 진실이다. /수필가·문학평론가

2021-11-03

질병진단기술의 진화

질병 진단 기술이 크게 진화하고 있다. 이미 피 한 방울로 암을 유발하는 변이 유전자를 찾아내거나 마이크로리터의 땀으로도 스트레스 수준을 파악하는 기술이 개발돼 있다.최근 포스텍 연구진은 피 한 방울로도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나노 레터스’에 지난달 발표됐다. 암에 걸리면 혈액에서도 암을 유발하는 변이 유전자가 발견된다. 연구진은 유전자 증폭을 하지 않고 ‘원자힘현미경’을 이용해 직접 피를 관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원자힘현미경은 시료에 탐침을 대고 이동시켜 표면을 확인하는 장치로, 탐침 끝에 변이 유전자와 반응하는 단백질을 붙이면, 원자힘현미경에서 변이 유전자에만 다른 힘으로 반응하는 원리다. 실제로 췌장암 환자의 혈액에서 변이 유전자 1~3개를 찾아냈다. 이르면 3년 내에 상용화하는 게 목표란다.땀은 피보다 채취하기가 쉽기에 질병진단에 더욱 활용도가 높다. 미국 텍사스대 연구진은 적은 양의 땀에서 바이오마커(몸 안 변화를 알아내는 지표)를 감지할 수 있는 패치를 개발했다. 땀의 양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무선 전자 패치를 웨어러블 장치에 적용하면 운동 전후의 탈수 증상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측정 결과는 무선으로 스마트폰에 전송돼 건강관리에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눈물을 이용해 전극이 필요 없는 당뇨병 자가 진단 콘택트렌즈도 개발됐다. 눈물 속 포도당 농도에 따라 색이 변하고 인체에 무해한 나노 입자를 콘택트렌즈에 적용해 렌즈 색 변화로 당뇨병을 자가 진단할 수 있다. 질병진단기술의 급격한 발달은 백세시대를 앞당겨 초고령화시대에 각광받는 첨단의학으로 자리잡을 것이 확실시된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1-03

대선판에 교육이 사라졌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정국. 나라 안에 가장 중요한 결정이 아닌가. 그럼에도 보이는 것은 정치인들의 말싸움일 뿐 정작 나라와 민생에 중요한 사안들은 보이지 않는다. 후보들의 수십 차례 토론이 있었지만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말다툼과 입씨름이 아닌가. 나라의 내일을 향한 비전과 구상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국민의 어려운 살림살이는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하는가. 후보들의 면면과 입담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 하나 믿고 맡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구호로만 변화를 외치고 듣기에도 식상한 혁신이 되고 말았다. 여야의 주자들이 결정되면 그래도 나아질까 기대한다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앞으로 몇 달에도 큰 기대가 걸리지 않는다. 나라는 선진국으로 들어섰다는데, 정치는 여태껏 제자리일까.미래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긴 지평과 너른 비전을 말하지 않으면서 들먹이는 정략으로는 국민들의 갈증이 가실 길이 없다. 대통령 직함만 가지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맹랑한 주장에 넘어갈 국민은 없다. 남을 비난하기보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어야 한다. 다른 당을 폄하하기 전에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지 드러냈어야 한다.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가닥이 있다. 교육. 백년대계라는 별명은 누가 지었을까. 다음세대가 무엇을 배우는지 당신들은 아는지. 대한민국의 자녀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나라의 내일을 그나마 살려낼 길은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걸 느끼고나 있는지. 지역소멸이 문제라면서 학교를 돌아보지 않는 당신들의 착각은 인지부조화가 아닌가.나라의 균형발전을 말하려면 지역의 교육실태부터 살펴야 한다. 지역의 사활은 동네 학교에 달렸다. 학교가 살면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면 균형이 보인다. 학교가 사라지면 지역이 힘을 잃고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 교육의 힘은 개인을 일으키지만, 지역사회가 활발하게 돌아가려면 학교부터 세워야 한다. 교육이 사람을 살리고 학교가 지역을 살린다. 지역에서 학교는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한다. 문화의 중심이 되고 지역 자긍심의 심장이 된다. 동네 안팎으로 소통의 근원이 되고 지역 간 교류의 교두보가 된다. 학교가 있어 지역은 미래를 기약하고 교육으로 길러내는 다음세대가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간다. 지역의 자존심도 학교에서 솟아나고 온갖 소식의 교환도 학교에서 벌어진다.대선판에 사라진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을 말하지 못하는 나라의 지도자는 인정할 수가 없다. 학교를 걱정하지 않는 후보는 지지할 길이 없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터전이며 나누고 소통하는 통로이다. 다음세대를 무너지게 버려두는 일은 가히 범죄가 아닌가. 나라와 국민을 살리려면 교육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교육을 소홀히 하는 정치는 미래가치를 몰각한 작태가 아닌가. 대선후보들에게 묻는다. 나라의 교육을 위하여 무엇을 할 터인가. 이 땅의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11-03

생태 통로와 교육 통로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쉿, 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체험학습 사전 답사를 위해 고속도로를 가다가 본 문장이다. 출퇴근 길에도 자주 본 글이지만, 이 문장이 그날따라 유독 더 선명하고 크게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화창한 가을 날씨, 형형색색의 단풍 등 많은 것을 떠올려 보았지만, 모두 아니었다.그러다 산 전체가 없어지는 공사 현장을 지나면서 필자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어떤 공사인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분명 큰 산 하나가 없어지고 있었다. 이미 벌목 작업은 끝났고, 산을 해체하면서 나오는 흙을 운반하기 위해 늘어선 차량의 길이는 끝을 알 수 없었다.환경과 우리 삶은 한 몸이다. 굳이 우위를 가리자면 이제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우리도 좋지 않다. 반대로 우리가 좋지 않으면 우리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난다. 그래서 세계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하지만 아직 무분별한 개발은 진행 중이다. 그 결과 환경은 복원이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다.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삶의 파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지만, 사람들은 개발주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도 환경에 대한 양심은 있어 만든 것이 생태 통로이다.생태 통로를 보면서 필자는 교육 통로가 떠올랐다. 환경 파괴와 교육 파괴가 다른 것은 환경 파괴 현장에는 생태 통로라도 있지만, 파괴된 교육 현장에는 교육 통로가 부재하다는 것이다.평생을 제자 교육을 위해 헌신한 김만수 시인은 시 ‘목련꽃 목댕기’에서 말한다.“(….) 정직과 용기를 가르치며/서른여덟 해를 바다 언덕길 걸어왔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교실은 비고 아이들은 아스라이 멀어지며 선생님들이 뺨을 맞는/스승의 자존이 무너지고 숭고한 정신이 훼절되어/깊은 상처가 번지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이 시는 교육 파괴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중 스승이라는 말이 너무 아프다. 스승이라는 말은 이제 학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필자는 “그래도”라는 말을 여기서 꼭 쓰고 싶다. 비록 학교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학교는 희망 제작소다. 그 희망을 만드는 이가 교사요, 그들이 곧 스승이다. 김만수 시인은 이 나라 교사들이 스승인 이유를 같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이 땅의 스승들은 (….) 불의에 맞서는 정신과/정직과 용기의 가치를/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새로움을 열어가는 길을 가르치며/새벽을 열어갔습니다 (….)”비상구조차 보이지 않은 교육 현장에서 필자는 대선배 교사의 시에서 교육 통로를 찾았다.“(….)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설머리 붉은 해는 떠오르고/오직 한마음 곧은 정성으로/팍팍한 언덕길 다시 오르는/이 땅의 스승들 있어 희망이 있습니다 (….)”교육 대로(大路)를 재건할 사람은 교사다. 교사가 살아야 교육도 산다. 교사를 살리는 11월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1-11-03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양면적 평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노태우 전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5일간의 국가 장을 치르고 파주의 어느 사찰에 안치되었다. 광주 5·18 단체와 민주화 운동 기념단체는 그의 국가 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재임 시의 여러 공적을 내세워 국가 장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그의 국가 장 찬반 논의는 그의 대통령 재직 시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있다.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고 난후에 판단해야 한다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리고 있다.얼마 전 윤석열 대선후보의 전두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정치권을 매우 소란스럽게 하였다. 윤 후보의 단순 발언의 실수인지 강보수층을 향한 선거 전략인지는 알 수가 없다. 노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12·12 쿠데타의 공동 주역인 그의 평가와 직결된다.이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보다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아니라 그의 업적에 따라 냉정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에는 누구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노 전 대통령 재직 시의 공적부터 살펴보자. 우선 그는 군 출신 대통령이면서도 통일과 안보와 직결된 북방외교를 과감히 추진하였다. 그는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1989년 공산국가 헝가리와 수교하고, 소련·중국과도 과감히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성사시켰다. 그의 재임 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선포하여 대한민국 통일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급기야 1991년 12월에는 남북의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채택되었다. 당시 반공 보수 강경 분위기에서 북방외교의 초석을 다진 것은 그의 외교적 큰 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아직도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그의 국가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는 전두환과 함께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내란죄로 2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정권 탈취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재임 중 2천600여억 원의 사실상 뇌물인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당시 직선제 대통령이 되었지만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탄압으로 아직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불행히도 우리는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명도 갖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내란죄와 뇌물, 북방외교 성과라는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 사람의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만 되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공(功)은 과(過)를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빛은 그림자를 덮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 몇 해 전 광주를 찾아 부친의 죄과에 용서를 청한 적이 있다. 가족이 밝힌 유서에서도 ‘자신의 과오’에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은 있다. 그러나 그는 생시에 광주 5·18에 관한 진정한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 ‘보통사람’ 노태우의 명복을 빌 뿐이다.

2021-11-03

사색 한자락

오낙률시인·국악인 “다 같이 나뭇가지에 내린 물인 것을, 어느 것은 물이라 하고 어느 것은 서리라 하고, 어느 것은 눈이라 하고 또 어느 것은 이슬이라 하고, 또 어느 것은 꽃이라 하더이다. 올 한해는 서리라기보다 눈이라 불리고 싶고, 눈이라기보다 꽃이라 불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싶고, 임께서도 그러하시길 소망합니다. 올해도 저에게 꽃을 피우는 온화한 기운이 되어주실 것도 소망합니다”어느 새해 벽두에 카카오톡으로 나눈 지인과의 새해 인사에서 필자가 보낸 인사 문구인데 생각이 나서 이 글에 인용해 보았다.나이 들면서 가능하면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언어와 아름다운 눈과 아름다운 표정으로 살고 싶다. 뉜들 그게 꿈 아닐까 해도 사람 살이 하면서 그게 그리 쉬울까 해도, 이제 내 남은 생애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것이고 싶다.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가족과 아름다운 이웃하며, 가을이면 투정하듯 붉게 물드는 단풍과 그리고 때론, 내 어여쁜 아기 손주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다.흔히 꽃과 나무와 온갖 새들이 살아가는 이 지구를 낙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저 꽃과 나무와 새들의 입장에서 봐도 인간과 더불어 살아감이 낙원처럼 느껴질까?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지상에 튼실하게 뿌리를 박으며 살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이 지구의 주인이다. 지구는 온갖 식물들이 살아가는 낙원이고 인간은 지구를 탐하며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는 침입자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은 굳이 물구나무를 서지 않고서도 문어나 오징어처럼 여러 개의 발로 지구를 어루만지며, 지구에서 자라는 갖가지 식물들을 마치 소가 풀을 뜯듯 하며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라는 허공에 부유물처럼 떠있는 존재로서 지구의 표면에 최대한 달라붙어 끝없이 지구를 탐하고 있는 셈이다.인간은 밤이면 등을 지구에 대고 중력을 잃은듯 네 발을 버둥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곤 한다. 잠자는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가급적 지구로부터 멀리 이탈하지 않으려고 집이라는 건물을 짓고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몸을 의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지구를 가지려 해도 결국엔 지구의 표면을 배회하는 지구의 주변에 불과할 뿐, 가끔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묘지에 들어가서 지구에 안착하기도 한다. 요즘의 장례식 문화는 화장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탓에 그마저도 성공률이 희박한 실정이다.소나 돼지 닭, 또는 물고기…. 인간들은 날마다 혹은 자주 그들의 장례를 치르며 그들의 빈소에서 허기를 채우고 있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이 사는 지구를 탐하다 희생당한 동물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잘 손질된 야크의 사체를 등짐으로 지고 땀을 흘리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저 높은 곳의 족속, 네팔 사내들의 진지함 쯤은 되어야 내가 아는 최소한의 약식 장례식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한 접시의 고기요리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지구의 정복을 위해 인간과 연대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그들의 장례식을 너무 경박하게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2021-11-02

구룡포에서 보낸 하룻밤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내지에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다. 섬사람들이 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뭍에 사는 사람은 섬사람만큼 뭍이 그립지 않으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언제나 바다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은 타성과 습관의 나락에 떨어져 망각과 상실과 만나는 법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주장한다.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아시스를 찾는 목마른 나그네처럼 집착한다. 대상을 소유하겠다는 열망에 그는 온몸과 마음을 불사른다. 바라던 대상이 마침내 손에 들어오면, 그의 성취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의 내면에는 싫증과 권태가 슬며시 똬리를 튼다. 익숙함이 주는 진부함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이 그를 다시 찾아온다.세상과 인간을 염세한 쇼펜하우어의 놀라운 통찰이다.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 하지만 이런 명제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예외 때문이다. 주어진 관계와 물질과 인식의 범위 안에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수양과 깨우침은 아니더라도 말이다.그런 생각을 담고 마주한 구룡포의 풍경은 따사로웠다. 주말을 맞아 인파로 넘쳐나는 포구에서 오랜만에 흠뻑 마시는 갯내음과 바닷바람이 내장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간다. 오래 잊고 지냈던 시간이었군, 하는 잔상이 스치듯 지나간다. 생선회와 대게를 파는 가게의 번다함과 왁자지껄한 소음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일상에 지칠 때 항구에 펼쳐지는 어물전을 찾으면 영혼과 정신이 일신되지 않는가?!정겨운 대화와 주고받는 술잔과 활발한 저작(咀嚼)과 웃음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어느새 찾아든 저녁이 짙은 그림자로 사위를 감싼 후에야 술자리가 막을 내린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어린애들처럼 걸으며 마주한 등댓불이 눈과 마음을 대낮처럼 비춘다. 등대지기의 고단한 일상에 의지하는 고기잡이배며 여객선이며 화물선의 일꾼들이 떠오른다. 밤을 다퉈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그들은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밤하늘의 별과 선잠에서 깨어나 우짖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밤에는 과업과 관계와 일상에서 놓여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혹부리영감. 오래전 수련원 옆에 점방을 냈던 혹부리영감의 자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어렵게 공부시킨 딸의 성적표를 보여주며 이것저것 묻던 영감은 그사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 무참한 세월이여!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는 관자재보살의 논리를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얘기가 늦도록 우리 주위를 떠돈다. 장엄한 아침 해와 더불어 깊은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 하늘의 별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포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2021-11-02

‘라팍의 저주’

미국 프로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유래된 ‘염소의 저주’는 미국 시카고 컵스팀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45년 시카고 컵스가 자신의 홈구장에서 벌어진 월드시리즈 4차전 경기를 구경하려고 염소와 함께 입장하려는 팬을 저지하고 되돌려 보낸 이후 한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데서 붙여진 일종의 징크스를 이르는 표현이다.삼성라이온즈 팬들은 2016년 삼성이 홈구장을 대구시민야구장에서 대구라이온즈파크로 옮겨온 이후 우승은 커녕 내리 연속 하위권에 머물자 ‘라팍의 저주’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초가집서 기와집으로 옮겨놓고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1천60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현대식 구장을 지어놓고는 정작 가을야구를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섭섭함을 담은 표현이다.5년 연속 추락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2위에 올랐다. 삼성라이온즈는 KT위즈에게 아쉬운 패배를 해 우승은 놓쳤지만 한편으로는 라이온즈파크에서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볼 수 있는 설레임을 팬들에게 선물했다. 내친김에 한국시리즈 우승도 바라보자는 기대감도 나돌아 이래저래 가을 야구가 대구에서는 화제다.삼성은 2010년부터 5시즌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4번의 통합우승 그리고 한국시리즈 8번을 우승한 연부역강한 팀이다. 6년만에 찾아온 가을 경기를 통해 과연 막강 삼성이 야도(野都) 대구의 자존심을 살릴지, 또 라팍의 저주를 풀고 새로운 왕조시대를 열 것인지 대구시민의 관심이 벌써 9일 열릴 라팍 경기에 쏠려있다.참고로 시카코 컵스팀은 1908년 월드시리즈 이후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하다 2016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08년만에 염소의 저주를 깬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02

철조망 십자가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한 시대의 어둠을 지탱하기 위해 / 저리도 많은 십자가가 필요한 줄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 이천 년 전 한 사내를 / 못박아 세운 것만으로는 / 모자랐던 것일까”오성호 시인이 199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시집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에 들어있는 시 ‘십자가’의 첫 6연이다. 시인은 도시 곳곳에서 빛을 비추는 교회당 십자가를 보며 시대의 어둠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또 십자가가 ‘도회지의 거리마다 창부처럼 짙게 화장’을 한 채 내걸리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은총이 값싼 만병통치약처럼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노래하였다. 어디 도시뿐이랴. 도시 농어촌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 교회들은 유독 붉은 십자가를 내건 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고 있다.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목걸이로, 귀고리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일각에서는 십자가를 교회의 거룩한 상징으로 여기며 소중히 다루는 행위를 우상 숭배로 치부하며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건물에 붙이거나 장신구로 몸에 거는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형상의 물건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 담긴 예수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굳이 우상 숭배라는 붉은 줄로 동여맬 필요는 없을 듯하다.기독교는 교인 여부를 떠나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총 인구수 대비 2005년 18%, 2015년 20%를 차지했고, 가톨릭을 포함하면 2005년 29%, 2015년 28%로 21세기에 들어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 대비 30% 가까운 교세를 보였다. 요즈음 기독교가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교세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지난 5월 보고에 따르면 2021년 현재의 기독교 인구는 23%(개신교 17%, 천주교 6%)로 한국인 네 사람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인 셈이다.한국뿐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개신교가,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사회와 문화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가톨릭 수장인 교황의 영향력은 비기독교 국가를 포함한 지구촌 전체에 미치고 있다. 10월 28일부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및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참석 등을 위해 유럽을 순방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철조망 십자가’를 선물하였다. 로마 산티냐시오 성당에서는 ‘철조망, 평화가 되다’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DMZ의 녹슨 철조망을 녹여 만든 136개의 십자가가 전시되어 있다. 136이라는 숫자는 남과 북이 서로 떨어져 살아온 각각의 68년을 합친 것이다.성경 이사야서에는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철조망 십자가’가 남과 북의 전쟁과 대결을 그치게 하자는 소망의 상징을 넘어서서 열쇠가 되었으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1-11-02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의 여러 시집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 時代(시대)의 사랑’이다. 시를 잘 모르던 시절, 제목이 너무 예뻐서 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시집에 사랑에 대한 잠언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안에 든 건 그로테스크하고 무참한 인간의 슬픔이었기에 많이 놀랐던 것 같다.생각해보면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에 걸린 잠언이나 경구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랑은 대상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니까. 사랑은 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깊이만큼의 처참함을 간직한다. 그 안에는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도, 그리하여 그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이 時代의 사랑’의 한편에 아름다운 처량한 마음이 있어, 다른 한편에는 그로 인해 찢겨지고 비참해진 마음이 같은 크기로 놓여 있는 것처럼. 그처럼 ‘나’의 마음이 아름다움과 처참함으로 양분되는 건 분명 사랑의 힘일 것이다. 그뿐일까.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내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모두 사랑의 능력이다.이 모든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나 자신이 비루하고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라도, 그 시대의 사랑은 결코 다른 사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비참하게 된다 할지언정,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랑에게 나의 삶의 중심을 양보하는 것, 그게 ‘이 時代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었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그래서 내게 80년대의 사랑이란, 마치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루어지는 모험과도 같이 느껴진다. 절박하고, 비참해지기도 하는 사랑. 사랑이 이루어질 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모험 같은 사랑은 왠지 사랑이 아닌 인정투쟁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그 시대가 그만큼 사랑 외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혹은 자신의 다른 의미를 쟁취할 길이 없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랑’에게 자신의 삶의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흔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현실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에 따라 사랑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꾼다.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모순형용적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사랑 외에 다른 인정의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가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제는 사랑을 통해서조차 그와 같은 것들이 이룰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사랑은 가장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사랑이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빠져가고 있다고.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제는 조건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이 사랑의 성패를 결정한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속에서나 혹은 액정 너머로만 존재할 뿐이다. 예쁜 선남선녀가 좋은 경제적 조건 하에 어떤 고난 없이 서로를 위하는 그림 같은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더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은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최승자의 시 속 화자가 구원받지 못한 형상이 되었던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구원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사랑조차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 사랑에 무관심해져버린 것 같다고.우리는 늘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 말은, “비록 이토록 처참한 나지만 사랑해줘”라는 투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은, 사랑을 위해 더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에 부쳐서, 사랑을 위해 무리할 힘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걸지도. 그 모든 힘듦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던 사랑은 이제 과거에만 남았다.

2021-11-02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걸까. 무수한 언어가 별처럼 모여 일상을 구성하고 있다. 빈번하게 마주치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말을 꺼내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의 발화를 고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말은 혀끝에 모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우며 철근처럼 무겁다. 온종일 마음에 남아 있다가도 잠깐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게도 속성도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폭신폭신한 말도 함부로 다루게 되면 무엇보다 날카로운 흉기로 바뀌기 마련이다.거짓말에 속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온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탈함과 무력함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음을 할퀸다. 영혼에 생채기가 나면 쉽게 치유되기 어려워 한동안은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도덕적으로 매우 어긋난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금기로 존재한다.거짓말을 단순히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있다. 정치인이 내뱉는 거짓말처럼 허망한 발화도 있지만 상대를 위해서 거짓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아픈 진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 거짓말은 부정적인 언사라기보다 다정하고 슬픈 발화에 가깝다.소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짓말의 장르다. 허구로 구성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말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틀린 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표현임은 확실하다. 소설은 무엇보다 현실을 냉엄하게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찬찬히 그려나가며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이거 다 거짓말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면서 텍스트를 따라간다. 허구의 세계를 살아가는 허구의 인물을 응원하고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에 투영하기도 한다. 거짓이라는 형식을 통해 도리어 진실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과하다 느껴질 만큼 달콤하다. 거짓말처럼 나쁜 것이 좋아지고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런 순간이 온대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순간을 믿기 어려워하고 불행에 익숙한 사람처럼 매일을 살아간다. 거짓말처럼 기쁜 날을 앞에 두고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성거리기도 한다.어째서 그런 것일까. 거짓의 달콤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은 우리의 발목을 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눈을 뜨면 달콤한 거짓말의 세계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한 거짓말은 가장 강력한 찰나로 작용한다.그러한 찰나가 그저 무의미한 것은 아닐 테다. 가끔 우리는 세상에 그리고 상대에게 현명하게 속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기꺼이 속아주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진실 한 스푼을 발견하게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맛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리한 상대를 치켜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아프면서 아프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속고 속이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다. 나는 그 진부한 연극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그것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오해이며 소중한 이해다.우리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한다. 가끔은 서로의 말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말은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말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내야 할 때도 있다.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행을 숭고하게 여기고 기꺼이 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이며 세계를 이해하는 노력이 되기 때문이다.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도래하는 날을 상상한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희망찬 내일을 바란다.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낙관 또한 지난한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일 테다.

2021-11-02

노인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돌봄 ‘노인통합돌봄 사업’

류병조국민건강보험공단 대구중부지사 노인장기요양 대구중부운영센터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요양원에 가야지”라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과 변화된 세태를 한탄하듯 반영한 것이지만 이 말이 어르신들의 진심일까? 2017년 노인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어르신의 57.6%는 거동이 불편해도 살던 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왔던 이웃과 친구들, 눈에 익은 환경을 뒤로 하고 낮선 병원, 요양원으로 가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노인이 되면 필요한 의료나 요양, 일상생활 나아가 주거문제까지 한꺼번에 도움을 받으면서 내가 살던 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우리나라 고령화 속도는 OECD국가 중 가장 빨라 2020년 15.7%에 달했고 2025년에는 그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노인인구 증가에 따라 13년 전부터 실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은 노인인구의 10%가 이용하는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로 발돋움해 국민들이 가장 만족하는 사회보장제도로 발전했다.그러나 요양병원, 요양원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시설화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도움만 충분하다면 살던 집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다시피 입원하게 되면 이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가족이 져야 한다. 또한 필요한 서비스가 기관별로 제공되어 불편하고 정보부족으로 제대로 이용을 하지 못할 경우마저 생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살던 곳에서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정부는 노인통합돌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춘천과 화성시에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함께 해당 지자체,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이 모여 사례대상자 발굴부터 필요한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제공하는 노인통합돌봄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 병의원을 이용하기 어려우면 의사의 왕진서비스가 연계되고 어르신이 필요한 시간에 방문하는 수시 방문형 장기요양재가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식사부터 진료, 나아가 주택개조사업까지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인해 의료 요양비 증가, 이로 인한 가족 간 갈등 심화 등 돌봄 부담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는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서 있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면서 노후 삶의 질 향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노인통합돌봄 사업의 정착을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협력 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토대위에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2021-11-02

황룡사지 발굴조사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해 30년(569)에 경역을 마련하고 1차 가람을 완료했다. 진흥왕 35년(574)에 약 5m 이르는 장육존상을 비롯해 금동삼존상을 조성했고, 진평왕 6년(584)에는 이 불상을 모셔두기 위한 금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선덕여왕 12년(643)엔 자장스님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조성하고자 했다. 목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고, 이간 김용춘은 장인 200명을 인솔해 착공 3년만인 선덕여왕14년(645) 구층목탑을 완공했다. 구층목탑은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높이가 약 80m 정도다. 바닥의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약 22.2m로 당대 왕경 내 최고 높이의 건축물이었다. 이렇게 황룡사는 신라 4대왕(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을 거쳐 93년 걸린 대역사를 통해 국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된다.사적 제6호인 황룡사 터는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황룡사지를 비롯해 신라시대 절터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구황동(九黃洞)’ 이라는 명칭도 ‘皇(黃)’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238년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는 소실되었고, 이후 7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유허(遺墟)만 남고 그 터는 민가의 대지나 전답(田畓) 등으로 변모했다. 발굴조사 이전 황룡사 터에는 구황마을이 있었다. 조사 직전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목탑과 중문지 근처에 가가호호 들어선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제법 규모가 큰 돌담장도 눈에 들어온다.황룡사 터는 1971년 11월 수립된 ‘경주관관종합개발계획’을 일환으로 1976년 4월 발굴조사가 착수된다. 사역 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민가 100여호를 철거하고, 연차적으로 56,700여 평의 주변 토지를 매입해 최초 3차년 계획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1983년 11월까지 8차년 사업으로 발굴조사는 마무리 됐다. 8년간의 조사 기간 동안 현장 작업일수만 2,000일에 가까우며, 발굴 현장에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78,000여 명에 달한다. 발굴조사 결과 25,000여 평에 이르는 황룡사 경역의 범위와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금당, 목탑을 비롯해, 중문, 강당, 회랑, 종루, 경루 등의 사찰 내 중요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 용기류, 불상류, 금속유물 등 총 45,000여 점으로 대부분 신라와 고려시대 만든 것이다. 특히 강당지 북편에서 발굴된 치미 파편들은 모두 수습되어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약 180㎝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큰 치미로 알려져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우리나라 고대 사찰 연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황룡사지 발굴 중 드러난 유구와 출토된 유물은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먼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 학술적·역사적 중요도가 높은 유물은 국가에 귀속시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국가귀속대장은 6권이며, 여기에 수록된 국가귀속문화재는 모두 45,656점이다. 발굴조사 중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발굴되면 즉각 사진촬영을 한다. 발굴 당시는 모두 필름사진이었기 때문에 사진 한 컷이 매우 중요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황룡사지 발굴 관련 필름은 슬라이드필름, 흑백필름, 칼라필름 등 3종류. 슬라이드필름 24,934컷, 흑백필름 51,859컷, 칼라필름 1,983컷 등 모두 합해 78,776컷을 연구소에서 현재 보관 중이다. 유구나 유물을 실측한 도면은 2,845장, 그 외 발굴조사기록카드(589장), 유물분류카드(7,182장), 유물카드(2,144장), 유물조사카드(3,999장), 유물처리기록카드(4,784장)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황룡사지 발굴이 남긴 또 다른 역사이자 기록인데, 최근 연구소에서는 이 자료들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장기간 이뤄진 사업이었다. 예상치 못한 유구들이 발굴에서 확인돼 조사 자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그 넓은 경역 전체를 꾸준히 발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황룡사처럼 경역 전체를 발굴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1971년 11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정부에서 발표되고, 그 일환으로 경주지역 내 많은 유적의 정화사업이 착수된다. 이에 197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은 ‘경주미추왕릉지구발굴조사단(이하 왕릉조사단)’을 임시로 구성하고, 대릉원 내 천마총, 황남대총 등을 발굴한다. 이후 1975년 10월 경주지역 유적 발굴조사의 지속성을 위해 기존 왕릉조사단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으로 개편한다. 당시 부족한 예산과 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안압지, 황룡사지, 월성해자, 신라왕경 등의 대형발굴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주 유적 발굴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1990년 1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기관 ‘경주문화재연구소’로 정식 인가됐고, 이후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왜곡되었던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1970년대 우리의 발굴기술로 명확하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사단원들이 흘린 땀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문화재 발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시작점에 경주 황룡사지 발굴이 자리한다.

2021-11-01

1636년 남한산성의 안과 밖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다달은 청의 부대를 피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이듬해 1월 30일까지 버티다 마침내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여 인조는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린다.소설과 동명의 영화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가 걸어서 나온 47일간의 기록이다. 김훈 작가의 첫 문장처럼 인조는 떠밀리듯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마지못해 남한산성을 나오게 된다.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섬처럼 남은 남한산성 안에서 매섭고 날카로운 대결이 펼쳐지고, 그 대결과 함께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혀’ 성밖을 넘지 못한다.주화론자(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와 척화론자(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는 대의와 명분, 목숨과 백성을 들어 냉혹하고 처절한 논쟁을 벌인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의 말은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인조의 나아갈 길을 극단으로 제시한다. 치욕을 견뎌 목숨을 구할 것인가, 죽음의 길을 택해 명분을 구할 것인가의 길이다.성밖 전장에서는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펼쳐지고,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과 항전을 둘러싼 말(言)의 싸움이 지속된다. 임금 앞에 시선을 내리깔고 조아린 모습들 속에서 서슬퍼런 말의 칼날이 부딪치고, 한 겨울 삭풍보다 매섭고 날카롭게 상대를 파고든다. 왕은 또 다른 선택지를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다그치지만 그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인조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린다. 성안의 식량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인조는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 말아라”는 말로 하명한다. “얼마나 아껴야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고 답한다. 이 대사처럼 왕은 우유부단함과 모호함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무능한 신하들로 인해 안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청나라 병사들과의 싸움보다는 산성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산성을 둘러싼 청나라 병사들은 일정의 선을 넘지 않는다. 적으로써의 대상보다는 마치 목격자이며, 목표지점에 대기하고 있는 존재처럼 그리고 있다. 감독이 집중한 것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안으로부터 무너지는가의 과정이라고 하겠다.김훈은 소설 속에서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라고 표현했다. 황동혁 감독은 이것을 영상으로 옮겼다. 김훈 소설의 문장처럼 수사적 군더더기가 없고, 짧으며 단호하게 끊어낸다.칼날 위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사는 소설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영화는 소설 속 분위기를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장황한 서사를 생략하고 간결하고 상징적인 화면들로 채운다. 그래서 영화는 원작의 분위기와 인물 구도를 충실하게 구현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작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소설과 영화를 넘나든다.삶과 죽음의 길, 살고자 하는 길에는 패배와 치욕이 있으며 죽고자 하는 길에는 명예가 남는다. 두 갈래의 길을 두고서 성안의 논쟁은 치열하고 뜨거워진다. 반대로 겨울은 깊어지고, 성안의 백성들은 한겨울 혹한 속에서 냉정하게 사지로 내몰린다.위정자들에게 두 갈래의 선택이 치욕과 명예의 길이었다면, 백성들에게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하나의 길을 희망할뿐이었다. 마침내 최명길은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한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고 길입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고 말하며, 성문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밟고 삶의 길을 가라고 간청한다.그 길 위에 대장장이 서날쇠의 말처럼 “그 어느 편도 아닌”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일이 중요한 백성들의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지독한 겨울을 견뎌낸 자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47일간의 뜨겁고 격정적인 이야기를 서늘하고 냉엄하게 그린다./(주)Engine42 대표

202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