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대하고 조직화된 정치문화에 압도되어 흔히 ‘나’의 능력과 존재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무력증(無力症)에 걸려 신민화(臣民化)된 시민은 주권자의 힘과 그 역할을 평가절하 한다. 권력의 오만과 독선을 내가 막을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적 팬덤(fandom)들의 광신적 행태를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시인 조동화는 “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시인은 ‘나 하나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비록 나의 희망이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이 너의 희망과 만나서 마침내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될 때 풀밭은 꽃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 하나’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나 하나’가 선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정치가·과학자들은 모두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지고 외롭고 힘든 길은 걸어온 선구자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毒杯)를 마셨고, 링컨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까지 국론분열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잘못된 우주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변혁시켰다. 오늘의 이성사회(理性社會)는 이 같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노력의 대가로 피어난 꽃이다.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영감을 얻어 고향 제주에서 ‘치유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올레길이 완성되자 도보여행자들은 열광했다.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제주올레를 벤치마킹하여 둘레길·해파랑길·누리길·갈맷길·바래길·생태문화길 등 600여개의 걷기여행길을 조성했고, 제주올레는 일본과 몽골에 수출까지 하였다. 한 사람의 새로운 발상과 노력이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에게도 얼마나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도덕적 해이’는 개인의 능력을 떨어뜨리는 이른바 ‘링겔만 효과(Ringelmann effect)’를 초래한다. 공동체에 무임승차하려는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은 소홀히 하고 자유와 권리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팬데믹(pandemic)상황에서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이 집단감염의 확산을 초래했음을 분명히 경험했다.
이처럼 ‘나 하나’의 존재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달라진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작은 하나’에서부터 비롯된다. 그 ‘작은 하나’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갈파한 석가처럼 위대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풀밭을 꽃밭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한 사람의 선구적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하나가 ‘바로 나’라면 더욱 기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