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서사시의 운율을 가진 매혹적인 영화

등록일 2022-07-11 17:10 게재일 2022-07-12 17면
스크랩버튼
‘그린 나이트’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질문이 많다. 하나의 질문이 풀리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어떤 질문은 반복되기도 한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모든 상황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나의 선택이 낳은 결과로 인해 다음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선택이 주어진다. 선택의 과정,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택의 과정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무 형상을 한 녹색 기사가 연회장에 나타나 자신의 목을 치는 가장 용맹한 자에게 명예와 재물을 주고 1년 후 똑같이 자신의 도끼날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아서왕의 조카인 가웨인이 도전에 응하고, 1년 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를 찾아 나선다. 숱한 무용담을 가진 원탁의 기사들과 달리 젊은 가웨인은 방탕한 생활 속에서 기사로서의 품위나 명예, 무용담 하나 없는 풋내기일 뿐이다.

죽음을 건 게임에 응하게 되면서 가웨인은 기사들의 중심,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지만 1년 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죽음의 여정에 나선다. 녹색 기사를 만나기 위한 여정은 순조롭지 못하다. 유혹과 금기, 고난과 역경의 과정, 수수께끼같은 사건에 휩쓸리면서 성장해가는 한 청년의 성장기처럼 보인다.

1년이라는 한시적인 기간 동안 명예와 재물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은 게임의 규칙인 나의 목을 내놔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다. 이 조건에 충실히 임했을 때 기사도의 중요한 덕목인 명예와 무용담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거래’의 균형이다. 주고 받는 거래의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였을 때, 그것이 기사의 명예와 도덕, 충성심으로 치환된다.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으로 녹색 기사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들은 ‘거래’를 기반으로 하고 있 다. 내가 받은 호의, 잠자리와 음식, 사냥감과 안식처 등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함으로해서 고난을 겪고, 곤경에 처하며 여정을 이탈해 다른 길로 빠져든다. 적절한 대가는 등가의 법칙에 따른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나의 만족이 아니라 상대의 만족이 동반될 때 거래는 성립되고, 다음 단계로 원만하게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이것의 어긋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반복한다. 누적된 불공정(?) 거래와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중첩될 때, 요행으로 비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아서왕의 여동생이며 가웨인의 어머니인 마법사 모건은 아들의 여정에 앞서 녹색 허리띠를 건넨다. 이 녹색 허리띠를 착용하면 어떠한 칼날과 도끼도 막아낼 수 있는 것으로 가웨인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소품이기도 하지만 약탈과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녹색 예배당에 도착한 가웨인은 녹색 허리띠를 착용하고 녹색 기사와 마주한다. 순순히 그의 목을 내어줄 것인가, 뒤돌아 나가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녹색 허리띠를 풀고 순순히 도끼날을 받을 것인가.

영화는 14세기 영국의 작자 미상의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원작으로 한다. 서사시가 그러하듯 풍성한 은유와 상징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거기에 주고 받는 거래와 비겁함과 용맹함, 자연과 문명, 종교와 이교, 삶과 죽음의 이항대립들이 촘촘히 놓여 있다.

극적인 플롯보다는 상징과 은유, 모호함이 가득한 영화다. 질문을 던지고 답하지 않는다. 한 예로 녹색 기사를 소환한 것은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이었다. 어머니가 왜 아들의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작했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시적인 흐름을 갖는다. 질문이 주어지지만 그 해답은 행간의 의미에서 찾아야하는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의 전개는 촘촘히 배치된 상징과 은유는 운율을 갖는다. 영화를 보고나면 가득했던 녹색의 이미지 사이에 펼쳐졌던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장면들이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김규형의 영화 읽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