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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만들었던 나의 모든 ‘감정’들에 대해서

전편에서 다섯 개의 감정을 캐릭터화했던 ‘인사이드 아웃’은 영화 속 2년의 시간이 흘러 ‘인사이드 아웃2’에서 네 개의 새로운 감정이 등장한다. 정확히 12살까지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라는 다섯 개의 감정으로도 아이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아니 성장과정을 그려나가는데 있어서 크게 무리가 없었다. 특정한 감정이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감정들이 뒤섞이며 조율되는 과정 속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의 관계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아이에게 세상의 중심은 ‘가족’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감정으로 상대에게 가닿아야하는지, 스스로를 어떻게 드러내야하는지에 대한 감정의 작용을 보여주었다. ‘인사이드 아웃2’는 이제 막 13살이 된 라일리의 감정에 불안이, 당황, 따분, 부럽이라는 네 가지의 새로운 감정이 추가로 등장한다. 이전의 감정들과는 색깔과 결이 다르고 감정의 표현은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늘어난만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속적이지 않으며, 일관되지 않으며 출렁임과 가라앉음을 반복한다. 바로 사춘기로 접어든 것이다. 학교를 다니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시작해 조금씩 바깥 세상과의 접촉을 늘려가면서 아이의 세계는 확정해 간다. 확장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고, 그 관계 속에서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가족애와는 다른 사회화 과정이 시작된다. 영화는 이를 자신의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신념의 섬’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서 ‘자아’라는 나무가 자라난다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험의 축적에 의해 거대한 저수지같은 심연의 신념에서 자라나는 자아는 영화 초반부에 푸른빛의 나무 뿌리처럼 하나의 균질한 색깔들로 묘사된다. 새로운 감정의 등장과 함께 ‘불안’이라는 감정이 지배하는 사춘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 중반부부터는 주황색의 또 다른 색깔의 신념들이 자라나면서 자아는 그 색깔을 바꾸어 간다. 사춘기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 어디쯤이다. 성숙되기 이전, 현재의 내가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경우의 수들이 지배하는 심리. 그 심리의 기저에 깔린 불안이라는 감정이 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감정의 의인화를 통해서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독창적이면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처리하는 작동원리를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들 속에서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들, 혹은 잊어버렸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어지고 다시 되살아 나는가에 대한 재미난 의인화를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불안정한 상태. 나날이 몸의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가지만 그 속도보다 느리게 경험과 지식은 쌓여가면서 그 간격을 ‘불안’이 장악하는 시기. 확장되어지는 세계 속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안간힘과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발칙하면서도 무모한 시도가 곧잘 실수로 이어지던 시기를 영화는 그리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1’의 주인공이며 중심 감정은 기쁨이고 2편의 중심 감정은 불안이다. 이것은 살아 온 날들보다 살아가야할 날들이 많은 라일리의 입장에서는 이전까지 키워왔던 자아로는 감당하지 못할 그 무엇의 압박으로 작용하고 신념의 섬에서 과거의 자아를 부정하며 피어올리는 또 다른 자아가 자라나는 시기,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를 다룬다. 결말은 역시 전편과 같이 모든 감정들은 라일리의 삶을 만들어가는데 꼭 필요한 감정들이라는 것이다. 실수하는 나와 완벽하지 않은 나와 관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그 모든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주)Engine42 대표

2024-12-10

커튼 밖, 담장 너머

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단란한 가족의 생활상에 보이는 것은 푸르고 밝으며 때로는 눈부심이 가득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과 온갖 꽃들과 수영장, 온실로 이어지는 정원의 모습이 이어지면서 평범하다 못해 무료한 일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층위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불안감이 얹힌다. 그것은 보여지는 화면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으로 시시때때로 공간을 넘나들며 미지의 불안과 공포를 유발한다. 영화의 전개는 단순하다. 회사와 가정에 충실한 가장과 단란한 가족, 어느 날 가장은 전근을 통보받게 되고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인정 받아 승진하고 다시 원래의 직장으로 복귀한다. 보여지는 화면과 단순한 전개, 이것이 커다란 진동과 함께 불편함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힘은 ‘소리’다. 영화 속에서 사운드(음악을 포함한 모든 소리)는 내용을 극대화하거나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사운드는 끊임없이 파열음을 내는 이질적인 것으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내용을 합쳐 놓은 것처럼 또 다른 감정을 유도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화면과 사운드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1940년대 초,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담장 밖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갈리는 풍경 속에서 사운드는 끊임없이 몰입을 방해하고 어느 곳,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간간히 담장 너머 굴뚝으로 끊임없이 피어오른 검은 연기처럼, 그 연기의 존재를 알고 있을 때 오는 흔들리는 감정을 내려놓지 못한 채 부유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목이 사라지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검은 화면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전달되는 것은 오로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이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영화는 화면보다는 소리에 집중해야한다는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영화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과 그 일상의 전반에 깔리는 이질적인 사운드로 나뉜다. 그리고 화면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철저히 담장 이쪽의 밝은 풍경을 담아낸다. 관객은 이미 담장 저쪽에서 펼쳐지고 있을 풍경과 사건에 익숙하다. 수많은 영화와 책들, 전해들은 이야기 속에서, 담장 건너편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사건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철저히 담장 건너편으로 카메라를 옮기지 않으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건너편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철저한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담장의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들의 일상 속에서 철저히 차단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독일군 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단란한 이층집의 모든 창문들에는 낮이고 밤이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과 담장,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담장 너머의 사건에 궁금해하지 않는 단련된 무관심의 힘. 이러한 가족들의 힘에 저항하여 담장 너머로부터 소리는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만 무관심의 힘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상부에서 전달된 학살의 효율성을 극대화 하고, 가족들과의 일상과 거주하는 집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집중된다. 무관심한 것과 관심이 집중된 것, 아름다운 일상의 소리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담장 너머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영화 속 공간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이러한 비현실적인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공존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과 소리가 그 시대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넘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담장 너머로 카메라를 돌리지 않은 이 영화가 주는 독창성이며 울림이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4-09-03

독특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포스터. 로맨스 영화. 쉽게 표현할 수 없지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느낌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말이 있다. 이 속에서 수많은 로맨틱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변주에 변주를, 배우를 바꿔가면서 국적과 인종을 넘나들면서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뼈대다. 나와 사랑할 상대가 있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으며, 기쁨과 슬픔, 좌절과 환희가 뼈대에 달라붙는다. 여기에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간극을 메울 때면 풍성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피어오른다.로맨스 영화의 형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핵심이라기보다는 로맨스 영화의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이곳에 집중된다는 뜻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고,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며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진다. 밀당이 이어지고, 한 단계 관계의 진전이 보일쯤 난관에 봉착한다.난관은 집안의 문제이거나, 갑작스러운 이유로 인한 헤어짐, 불치병과 같은 다양한 유형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재회의 과정을 거쳐 극복에 이른다. 극복 이후는 헤어짐이거나 만남의 지속이다.연애를 글로써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그것을 뼈대니, 형식이니, 과정이니 하는 것들로 설명할 때 쉽게 울림이 전달되지 않는다. 여기에 애잔함과 애틋함, 슬픔과 기쁨의 요소들이 얹힐 때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연애를 감상하게 된다.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위의 풍성한 연애 요소들을 걷어내고 당당히 뼈대와 과정으로 이루어진 로맨스 영화를 선보인다. 천연덕스럽게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영화, 장르가 로맨스인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말랑말랑하거나 달콤하거나 촉촉하거나 구구절절 해야할 것들이 말끔히 제거되어 무심한 표정과 건조한 일상,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들로 화면을 채운다.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복잡미묘한 감정과 심리, 꼬이는 사건의 전개는 감독의 관심 밖인듯하다.생뚱맞으며 무미건조한 로맨스 영화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리듬을 가지게 된다.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전형적인)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싱그럽고 물기 머금은 요소들을 걷어 낸 자리에 엷은 생기와 희미한 희망이 자리잡는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선들이 보이지 않을 때, 대사는 직설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간결하면서도 규칙적이지 않은 독특한 리듬이 유머와 결합되어 능청스러움을 더한다. 이처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로맨스는 다른 곳에서 울림을 끌어 온다.핀란드 헬싱키의 어느 곳. 비정규직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노동자인 안사와 홀라파. 취업과 해고를 반복하고 불안이 엄습하는 일상이지만 삶에 대한 원망이나 그렇다고 지독한 애착도 보이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특별할 것 없는 만남이 그 어떠한 설레임도 없이 이어진다. 일상과 평범의 바깥. 시스템에 쉽게 안착하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억척스러움이나 도달하고픈 목적에 관심이 없다.그 흔한 ‘사랑해’라는 대사 한마디 없이, 고백의 절차도 없이 두 사람의 로맨스는 시작된다. 영화의 분위기와 다르게 이 영화는 뮤지컬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배경에 깔리는 음악들은 애틋하고 말랑말랑하게 자리를 잡는다. 건조함과 외로움의 강도는 그 어느 영화 못지 않다. 밋밋하게 이어지는 이별과 재회의 과정이 심각하지 않지만 결코 시스템 밖에서 무너지지 않는 사랑을 보여 준다.로맨스 영화며 코미디 영화이며 뮤지컬 스타일의 영화. 낙엽처럼 건조하고 다른 결을 지니고 있지만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사랑’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4-08-06

세계라는 말의 의미

‘오키쿠와 세계’ 포스터.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막강한 권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든다.이 시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본거지로 에도 막부를 설립하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다.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고, 지방의 영주격인 다이묘와의 적대와 친화 속에서 최고 권력자인 쇼군에 오르게 되면서 마침내 에도 막부는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후 1603년부터 1868년까지 약 250여 년 동안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거친다. 해외 무역 장려와 함께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고, 상업을 장려하면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나라는 부강했지만 평민들의 생활수준은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열악한 수준이었다. 에도시대 말기에 이르면 그간 축적되었던 내부의 갈등과 구체제에 대한 도전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하는 의지의 기운이 밖으로부터, 위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충돌을 예고하는 에도 막부 말기의 1858년, ‘서장 : 에도의 똥은 어디로?’라는 소제목으로 영화 ‘오키쿠의 세계’는 시작된다. 영화는 똥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에도를 돌며 똥을 퍼와 채소밭 농부에게 거름으로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두 청년 야스케와 츄지,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와의 이야기다. 비천하고 비루한 직업의 두 청년과 오키쿠는 똥으로 엮이게 되고 똥 같은 상황과 똥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절간의 화장실에서 똥을 푸는 모습에서 시작해 영화는 시종일관 공동주택의 변소와 똥을 퍼다 나르는 모습과 그것을 밭에다 뿌리는 일과 그것을 손으로 만지고 뒤집어 쓰는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불쾌할 수도 있는 장면에서 활력과 싱그러움이 일어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냄새와 파리가 들끓는 그곳, 한 평의 변소라는 협소한 세계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세 청년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세계에 가닿는다.“세계라는 말을 아나. 이 하늘 끝이 어딘지 아나. 끝 같은 건 없어. 그게 세계지.” 결전을 앞둔 사무라이 오키쿠의 아버지가 공동변소에서 볼 일을 보며 똥을 푸러 온 츄지한테 하는 말이다. 똥과 엮인 세계는 가난과 차별, 폭력과 죽음이 만연한 19세기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순수하고 소박한 감정들이 일어난다. “요새 나라가 어수선한 건 그걸 이제 알아서야.” 혼란한 세상 속에서, 곧이어 닥칠 격동의 시대, 광활한 세계 속에서 어김없이 똥을 거름으로 삼아 피어나는 채소들처럼 청춘의 마음들이 싹튼다.“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말해줘. 그보다 더 좋은 말은 없어. 그게 제일 좋은 말이야.”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시기. 19세기는 내가 알던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물리적으로 존재함을 알게 되는 시기며, 나를 둘러싼 세계관이 파열음을 일으키며 새로운 세계관이 밀려드는 시기다. 경계지점에서 변화의 시기에도 흔들림없이 이어지는 것들의 자잘한 요소들이 영화의 행간을 메워 나간다. 말을 할 수 없는 여자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남자의 사랑 고백이 위와 같을 때 그 표현은 처절하다. 그리고 때마침 눈이 내리고 온통 하얗게 쌓일 때까지 고백은 이어진다.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858년부터 1861년까지다.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세계의 오키쿠’에 이어 ‘오키쿠와 세계’로 끝을 맺는다. 그 속에서 똥에 대한 리얼한 시각과 생생한 청각까지 더해져 그곳에서 한바탕 뒹굴다 나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부터 그러한 감정은 뒤로 밀려나고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들까지 평온하고 담백한 감정에 빠져든다.시종일관 심각한 냄새로부터 시작해 맑고 상큼한 청춘의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세계의 밑바닥 가장 더러운 곳에서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퍼올린다. 다행히 영화는 흑백이지만 그 흑백의 질감 속에서 자잘하게 반짝이는 색감들이 빛을 발한다. 9개의 장이 끝나는 지점에 짧게 컬러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깊게 여운을 남긴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4-06-11

분열과 융합의 사건에 대해서

불을 사용하던 인간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불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인간들은 문명의 씨앗과도 같은 불을 빼앗기고서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애처롭게 지켜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을 계기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의 바위산 정상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되고, 제우스에 의해 질병과 재앙의 고통이 인간들에게 내려진다.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얻음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앙과 고통을 받게 된다.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서 거대한 화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45년 7월 16일 앨라모고도의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읊조린다.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전쟁인 세계2차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개발된 무기는 비록 전쟁의 불을 꺼뜨렸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을 인지하게 되면서 커다란 근심을 떠안게 된다. 물과 불, 죽음과 파괴, 전쟁과 평화, 신으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이 직면하게 된 재앙이 충돌한다.불을 처음 발견한 인간에게 있어서 불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후 불을 다루게 된 인간은 빠르게 번식했으며 지구 곳곳으로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이를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숱한 멸망과 재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디뎠던 오펜하이머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종식을 막기 위해 헌신한다. 이런 면에서 오펜하이머는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그 간극이 극과 극을 달린다.영화 속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겪는 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했던 닐스 보어는 영화 속에서 케임브리지의 한 강연장에서 “아인슈타인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받아들이기 힘든 에너지와 역설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세계의 최전선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이라는 “우주의 본질적인 힘을 이용”해 폭탄을 만든다. 바로 핵폭탄이다.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 참여한 원자폭탄 개발이 진행된다. 1946년까지 극비리에 진행된 계획은 약 13만명의 고용인원과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인 약 2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위해 모든 인력과 역량들을 융합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중 한명이 헝가리 태생의 에드워드 텔러였는데, 그는 핵융합의 프로젝트 안에서 끊임없이 핵분열의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한다.영화는 ‘분열’과 ‘융합’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컬러와 흑백으로 이어지는 화면 전환은 현재진행과 과거로 나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표적인 영화구조인 레이어가 쌓여간다. 그의 전작인 ‘덩케르크’ ‘인셉션’에서 레이어가 플롯의 깊이와 풍성함에서 사용되었다면, ‘오펜하이머’에서는 플롯의 모순과 역설, 대립과 충돌의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성공적으로 투하된 이후 오펜하이머는 핵통제주의자이자 반(反) 수소폭탄의 아버지가 된다. 모순과 역설, 분열과 융합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가 오펜하이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핵무기는 7만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도 개발된다. 전쟁의 종식을 위해 인간의 손에 쥐어진 핵폭탄은 인류 전멸이라는 재앙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핵폭탄의 개발은 과학자의 일이었고, 그것의 사용은 정치인의 몫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과학과 정치의 역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4-01-23

우리 삶의 영화같은 순간들

우리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화같은 순간을 만났던가. 우리의 삶은 그 영화같은 순간들이 편집된 기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기쁨과 슬픔, 감동과 후회,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이 이어져 있다. 오랜 세월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은 그의 삶에 있었던 영화같은 순간들을 모티프로 작품들을 만든다. 물론 선택된 기억만을 보여주고 필름 위에서 윤색되어 관객을 만난다.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작품을 몇 편쯤은 보았을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놀라움, 슬픔과 감탄을 연발해 왔다. 우리는 영화감독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전달하고자하는 이미지를 따라가며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 속에 식인 상어가 있었고, 재탄생된 공룡 시대가 있었고, 모험을 떠나는 소년과 외계인 친구가 있었다. 때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실이 펼쳐지기도 했다.이제 감독은 그가 우리들에게 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저했었고,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를 ‘영화 같은 순간’을 편집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다.6살의 어린 새미는 생애 처음 영화관에 간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장면들에 매료된다. 이렇게 새미는 영화라는 매체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인 만큼 당연히 그가 어떻게 영화와 사랑에 빠졌으며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같았던 순간은 기쁨과 환희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쓰리고 아픈,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까지 드러내야하는 순간이 온다.잘라 낼 것인가 이어붙일 것인가. 가족의 캠핑 장면을 찍은 필름을 편집하던 중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된다. 그 장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감당해야할 것인가의 충격에 휩싸인다. 이 장면을 해소하는 방식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촬영에서부터 편집을 거쳐 완성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선택이 반복된다. 그것이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었다면 감독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문제다. 하지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면 잘라 낸다고 해서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77세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전적 영화인 ‘파벨만스’에서 감추어 두었던 기억, 혹은 잘라 내었던 필름과도 같은 기억을 편집해 넣는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던 영화에 대한 사랑의 과정을 담는다. 역사적 사실과 환상과 상상의 외부 세계를 만들어왔던 감독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던 은밀했던 과정을 담담히 이야기한다.‘파벨만스’를 통해 스필버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가 어떻게 개인적인 삶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10대 시절에 겪었던 부모의 이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들이 그가 만들어 왔던 영화 속의 상황들을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든다.인생의 영화같은 순간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영화다. 잘라 내 감추어두었던 필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감추어 두었던 필름을 이어붙여 보았을 때, 우리는 그가 만들었던 수많은 영화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목격한다. 처음 시작은 영화 만들기의 즐거움이었지만 이내 필름이 포착한 진실과 그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과 용기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되어 만들어진 작품일 때, 관객은 그의 의도에 따라 감정의 리듬을 갖는다. 일흔 중반이 넘은 감독이 인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낼 때 잊히지 않는 아픔이 어떻게 “잊히지 않는 꿈”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상처마저 영사기의 아름다운 빛으로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을 맛보는 영화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12-04

기억과 치유의 문을 열고 닫으며

죽음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떠나 보내고 남은 자리엔 ‘정리’와 ‘상실’의 과제가 남는다. 뜻하지 않은 죽음은 ‘만약(if)’이라는 후회와 회한의 절차를 반복한다. 그 반복적인 절차 속에서 상실은 옅어지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 무엇도 온전히 상실의 빈공간을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무뎌지고 잊혀지면서 상실의 아픔은 아물어간다.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이러한 ‘정리’와 ‘상실’에 관한 영화다.‘너의 이름은’에서도 그렇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에서 시작된다. 반복되는 꿈, 그 속에서 미지의 궁금증은 증폭되어 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꿈은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다. 꿈은 조금씩 조금씩 반복되며 진행된다.꿈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그 죽음을 있게 한 원인과 연결된다. 원인은 재난이고 그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상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채워갈 것인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2020년 1월 일본에 있었다. 포항문화재단의 재난을 문화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해외교류 프로젝트의 담당자로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후쿠시마 이와키시를 방문했다.2017년 11월 15일 포항 흥해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문화적으로 극복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일환으로 일본에서 활동중인 단체와 교류를 추진하게 된다.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지만 그날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지진해일로 인해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이와키시는 여전히 피해 복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원전 피해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당시의 흔적은 짙게 남아 있었다.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하루 아침에 사랑하던 이들을 잃었고, 살던 집과 동네가 쓸려 내려가는 모습이 각자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의 복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가 가상의 재난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실제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피하거나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 심연의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기억을 직접적으로 끄집어 낸다.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보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지점에서 택한 방법은 과거의 상처를 직시하는 것이다. 물리적 피해복구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은 치유는 그 속도를 달리한다. 2020년 후쿠시마 이와키시의 방문에서도 피해복구와 다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은 여전했었다.영화는 애도와 치유의 방법으로 실제 일어났던 재난을 끌어온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해답이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묻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살핀다. 잊으려해도 잊혀지지 않던 그날의 기억은 온전히 되살아나 눈앞에 펼쳐진다. 외면한 기억을 뒤돌아 마주했을 때,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을 때 황량했던 내면에 순풍이 풀고 꽃이 피어난다. 이유없는 재난 앞에서 스즈메의 이유를 찾기 위한 문단속은 계속되지만 사라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영화는 장면 장면마다 재난을 경험했을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요소들을 배치해 두었다. ‘만약(if)’의 문을 열고 닫으며 초월적인 존재의 능력을 갈구하지만 이미 발생한 재난은 돌이킬 수 없다. 각인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영화는 손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타인의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날의 기억을 직시하고 인정했을 때, 그곳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말한다.직간접적으로 재난을 경험했을 모든 이들에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닫음으로써 비로소 이후의 삶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이와키의 해변가에서 보았던 높은 방벽이 나왔을 때 울컥했던 마음과 함께 감정의 울림이 크게 여닫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잊어서 치유되는 것이 아닌 기억해서 아물어가는 상처의 치료 과정을 보게 된다./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3-11-06

연대와 위로의 시공간 ‘무코리타’에서

무더운 여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수산물 가공공장으로 청년 야마다가 들어선다. 오징어 배를 따고, 말끔히 손질을 하는 작업이 반복된다. 그에게 사장은 “누구든 다시 시작할 기회는 있는 법이야”라는 말을 건네며 무코리타 연립주택을 소개하고 평화로우며 무료한 이곳 마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살다보면 쌓여가는 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또 다른 짐을 만들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된다.잊고 싶었던 그곳의 인연이 다시 이곳으로 소환되고, 이곳에서 맺어진 인연들과의 사연이 연립주택의 현관문을 넘나든다. 어느 날 오랫동안 인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는 한줌의 유골로 무코리타 연립주택으로 오게된다. 유골의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시간, 잊는다는건 단호하게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정리하여 그곳으로 돌려 보내는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당연히 그것에는 절차가 따르고 그 절차에 따른 남아 있는 이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보여준다.수산물 가공공장 사장은 야마다에게 1년, 5년, 10년을 살다보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고 비워나가는 과정의 반복이다. 영화의 무대가 되고 있는 무코리타 연립주택의 입주민들에겐 무엇인가를 채우는 삶보다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듯한 결핍의 삶을 살고 있다. 저마다의 사연이 펼쳐질 때면, 결핍이 아니라 집착이며, 쉽게 떠나 보내지 못하는 감정을 담아 둔 유골함 같은 삶이 무코리타 연립주택의 방마다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불교의 시간 개념에 찰나(刹那)와 겁(劫)이 있다. 찰나는 극히 짧은 시간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이뤄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75분의 1초, 0.013초의 상상하기 힘든 짧은 시간이다. 겁은 한 세계가 만들어져 존속하다 파괴돼 무(無)로 돌아가는 한 주기를 말한다. 찰나와 겁은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지극히 짧은 순간과 인간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다. 무코리타(牟呼栗多)는 이러한 찰나와 겁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시간이다. 30분의 1일, 48분이라는 길이를 가지며, 낮이 밤으로 바뀌는 시간,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그 어디쯤의 시간.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간, 바로 ‘강변의 무코리타’의 배경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하루 하루 성실히 일하다 보면 또 다음 달이 오고 그러다 내년이 오고 순식간에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지”라고 야마다가 일하는 수산물 가공공장 사장은 말한다. 수없이 많은 찰나의 순간으로 채워지는 무코리타의 시간. 10년쯤이면 잊혀질 것은 잊혀진데로 비울 것은 비우고 또 다시 새로운 무엇인가로 채워지는 순환의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묻는 야마다의 질문에 “하지만 그 의미는 10년을 경험해보지 않곤 알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이라고 대답한다.무코리타 연립주택엔 모두 죽음이라는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빛과 어둠이 함께하는 시간, 즉 삶과 죽음이 서로 교차하는 그 시간의 어디쯤 물리적 공간으로 무코리타 연립주택이 존재한다. 결핍의 공간에 결핍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여 서로의 결핍을 채워나간다.야마다는 첫 월급으로 밥을 짓고, 공장에서 얻어 온 오징어 젓갈로 밥을 먹는다. 혼자 시작된 밥상엔 이웃의 침범(?)으로 젓가락이 놓이고 그가 싸들고 온 반찬으로 조촐한 식탁은 정서적 풍성함이 쌓여간다. 채우고 비우는 식사의 과정처럼 각자의 상처와 상실의 감정들이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치유되어 간다.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중심에 두고서 살아가야하는 의미를 말한다. 특별할 것없는 일상과 단촐한 밥상, 반복되는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 속에서 찰나는 채워지고 1년, 5년, 10년의 무코리타가 흘러갈 것이다. 무코리타 연립주택에서 무코리타의 시간은 흘러가고, 이별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절망은 어떻게 극복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간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강변의 무코리타’에서./김규형 (주)Engine42대표

2023-10-16

구원의 도착지점

‘더 웨일’ 포스터.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十誡命)’은 행해야 할 두 개의 명령과 하지 말아야할 여덟 개의 금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으로써 신의 세계로 향하는 엄혹한 규칙이며, 행동과 함께 마음까지 살펴야하는 규범이다. 불교에서는 승려와 신자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계율로 오계(五戒)가 있다. 모두 ‘아니 불(不)’로 시작하는 부정어로 시작한다. 해야할 것보다 하지말아야할 것을 강조한다.하지만 인간은 쉽게 계명과 계율에서 이탈한다. 그리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계명과 계율의 궤도로 귀환한다. 인간은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들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희열을 느끼고, 경건하거나 기쁨을 느끼거나, 맑거나 어지러운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간다. 계율과 계명이 아니어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사회적 ‘규범’이 존재한다. 이 규범 또한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을 정하고 칭찬과 형벌이 주어진다. 계율과 계명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규범은 순수하게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차이는 있지만 계율과 규범은 항상 ‘후회’가 깔려 있다. 후회가 쌓이고 깊어지면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후회의 강도가 강해질 때 죄책감이 남는다.종교에서 죄책감은 반성과 회개, 기도를 통한 ‘죄사함’으로 해소된다. 규범의 죄책감은 결과의 강도에 따른 ‘형벌’에 의해 해소된다. 죄사함은 구원을, 형벌은 교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의 존재 여부와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들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했었다.‘후회’는 인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 마주하는 선택의 결과다.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 때 ‘후회’가 뒤따른다.‘후회’를 돌이켜 원상태로 되돌릴 것인가, 후회를 낳은 선택을 다른 선택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인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충돌한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상반된 신념을 가진 이들과 충돌하고 화해하며 서로를 끌어 안는다.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은 과거에 내린 선택의 결과로 빚어진 지금, 후회를 두고 벌어지는 상반된 믿음을 가진 이들이 낡은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등장하고 퇴장하면서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다. 제목처럼 고래만큼 비대한 초고도 비만자 찰리는 보행 보조기가 없으면 혼자 몸을 일으킬 수도 없고,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다.그가 머무는 한정된 공간 속으로 종교적 구원의 깃발을 든 이와 찰리를 돌보는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 리즈, 찰리의 딸, 그의 전처가 순차적이거나 반복적으로 아파트를 출입한다.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후회’라는 공통적 감정을 숨기고 타인을 통해 그의 후회가 해소되길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 찰리에게 집중된다. 선택은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고 후회로 남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누군가에게는 미안함으로,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증오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 그렇다고 명쾌하게 나눠지지도 않는다.죽음을 직감한 찰리는 이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와 죄책감의 시간을 벗어나 적극적인 화해를 청하고자 한다. 화해에 대한 의지는 그의 동작만큼 굼뜨지만 그의 몸무게 만큼 무겁고 강력하다.“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이라는 찰리의 대사처럼 그 하나를 위해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선택이 후회로 남으면서 고통이 동반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결국 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구원받는다.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그의 집안에 갇혀 가쁜 숨을 내쉬며 묵직하게 쌓아가는 화해의 과정을 지켜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비로소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거대한 한 마리의 고래를 목격하게 된다. 화해했는가, 구원받았는가, 진정성이 얼마나 상투적인가라는 생각이 뒤엉킬 때, 벅차 오름과 함께 눈물이 흘러 내린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9-11

‘그루트어’가 들릴 때 “너희 모두 사랑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3’포스터. 쉽지 않았던 만남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만남도 쉽지 않지만 헤어짐도 만만치 않다. 시작은 내 모든 것을 내놓으며 어필하지만 헤어질 때는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이 상영된 것이 10년 전이니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서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 동안의 추억을 뒤로 하고 아름답게 헤어져야만 한다.10년 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1’편(2014년), 우주의 어딘가에서 하나 둘씩 모였던 이들은 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에 이르러 각자의 소망을 담아 흩어진다. 각자가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 가거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간다.1편에서 불편한 동맹을 맺고 일명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결성하는 5명의 이력은 불안전한 가족관계에서 출발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우주로 납치되는 스타로드(퀼)와 암살자로 길러지는 가모라, 아내와 딸을 잃고 복수심 하나로 살아가는 드랙스, 현상금 사냥꾼으로 말하는 너구리 로켓과 그의 동료 나무인간 그루트. 어설프고 불안전한 이들의 합체가 이루어진다. 파괴된 가족관계가 불안전한 가족관계를 이루는 과정이 유사 가족의 탄생을 다룬다. 이들은 여타의 히어로들처럼 탁월함이나 월등함으로 가공할 악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불안한 어느 지점에서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면서 활극을 펼친다. 마음 한 구석에는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지만 부조화와 능청, 진지한 상황 속에서 어긋나는 말과 행동의 ‘삑사리’를 통해 유머로 영화를 이끈다.어설프고 불안전한 성정의 5명이 모여 우주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이야기의 1편이 유사 가족의 탄생을 다루었다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2017년)는 멤버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었던 근원적 슬픔과 고통인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족의 의미를 다룬다. 스타로드의 생물학적 아버지며 우주의 신적인 존재인 에고의 등장으로 탄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하지만 에고의 음모에 맞서 그를 구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스타로드를 키워왔던 욘두의 희생이다.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에고는 악당이 되어 파멸되고, 자신을 길러주었던 해적 욘두는 스타로드를 구하고 이들의 가슴 속에 남는다. 혈연이라는 생물학적 의미의 가족보다는 ‘희생’과 ‘동료애’라는 함께하는 가치에 가족의 의미를 두고 있다.이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3부작으로 막을 내렸다. 3편에서는 그간 과거가 드러나지 않았던 말하는 너구리 로켓의 과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새로운 과거의 탄생과 가족의 의미를 물었던 전작에서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가지고 뭉쳤던 유사 가족의 여정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어떻게 헤어질 것인가를 보여준다. 바로 자신이 떠나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그곳에서 그간 숨겨왔으며 피해왔던, 동료들에게도 공유할 수 없었던, 오롯이 개인이 마주해야했던 진실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서 새로운 팀(유사 가족)을 이룬다. 그들이 쌓아왔던 견고한 세계 속에서 이별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남겨야하는지 깨알같은 솜씨로 보여주고 있다. 우주의 어느 곳에서 만났던 오합지졸들은 동료가 되어 어떻게든 악당을 물리치고 은하계를 지키는 영웅으로 성장해 가지만 이들이 지킨 것은 세상이 아닌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다.3편에서는 무모하고 어설프며 뭔가 부족한 결핍의 존재들이 완벽을 추구하는 악당과 마주한다. 완벽함과 부족함, 진지함과 어설픔이 충돌하면서 유머와 감동이 빚어진다. 지난 10여 년의 여정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래 전 뜻하지 않게 집을 떠나 온 이가 우주적 차원의 별종들과 어울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오합지졸들의 사연을 하나 하나 어루만지며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뭉클하다. 대사하나 표정 하나까지 알뜰하게 챙긴다. /(주)Engine42 대표

2023-08-07

표류하며 뒤집히는 삼각형

패션모델계에서 시작한 영화는 호화 유람선으로 무대를 옮긴다. 잠잠했던 유람선은 바다의 기상에 따라 흔들리고, 해적의 습격을 받아 침몰한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에서 탈출한 8명의 사람들은 섬에 표류된다. 장소에 따라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셩된 영화는 1부 ‘칼과 야야’, 2부 ‘요트’, 3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3개의 구성을 관통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축으로 계급과 인종, 성차별과 권력의 관계를 담는다. 숱한 상징과 은유가 있지만 깊거나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표면적이고 직접적이다. 1부인 ‘칼과 야야’에서는 패션모델계에서 남녀 모델의 차별을 다룬다. 모든 신체적 조건까지 세분화되어 평가되며 표정조차도 대중 브랜드와 명품 브랜드에 따라 바뀐다. 차별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등급에 따라 위치가 달라진다. 패션쇼 무대 정면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낙관주의를 가장한 냉소주의’라는 제목이 있지만 맥락도 없고, 의미도 와닿지 않는다.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장치. 화려하게 드러나는 것들의 치장을 지적한다. ‘평등’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지만 무대 밖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돈에 의해 자행되는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칼과 야야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후 누가 돈을 내느냐의 문제로 다투는 장면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2부인 ‘요트’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거의 모든 것들이 집중되어 있다. 호화 요트는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이자 첨예한 계급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다. 부유한 탑승객과 이들을 시중드는 승무원, 노동자라는 3개의 계급만이 존재하고, 그들이 속한 계급 내에서도 역할에 따라 지위가 나뉜다.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은 계급에 따라 역할이 다르고 그들의 활동공간이 철저히 나뉘는 장소로 작용한다.이곳에서도 ‘평등’은 재등장한다. 1부 패션쇼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타이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문장이 단순히 있어 보이기 위한 보편적인 평등을 장식적으로 사용했다면, 2부에서는 보편적인 평등이 주는 위선과 조롱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평등을 말하고 그 평등함은 보편적인 혜택과 지위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계급에 따라 ‘평등’이 주는 무게감이 다르며, 상황에 따라 폭력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한정된 공간, 단순한 장소는 돈을 향한 욕망과 계급을 달리하는 ‘평등’이라는 표면적인 언어가 주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견고했던 계급의 삼각형은 서서히 닥쳐오는 폭풍우와 함께 흔들린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폭풍우와 함께 조금씩 흔들리던 요트 위에서 배멀리로 인한 구토의 대향연(?)이 펼쳐지면서 우아함과 존엄을 잃고 무너지고 뒤집어 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그려진다.폭풍이 지나간 후 해적의 습격으로 배는 침몰하고 섬에 표류한 8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3부가 시작된다. 견고했던 계급의 삼각형이 흔들리고 뒤집어 지면서 요트라는 기존의 세계가 붕괴되고 섬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다다른다. 이제 이곳에서의 8명의 생존자들이 기존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계급이 전복되어 또 다른 계급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섬에서 필요한 생존에 관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는 사람은 청소부 에비게일이다. 이를 통해서 에비게일은 무리의 중심에 서게 되고 사람들에게 역할을 나눠주면서 새로운 위계질서를 만든다. 이전에 각자가 몸담고 가지고 있던 부와 명예, 사회적 지위는 무용지물이 되고 오직 생존과 연결된 것들만이 가치를 지니면서 새로운 계급이 만들어진다.흔들리고 전복된 삼각형은 사람만 바뀌었을 뿐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다만 부와 명예에 따라 나눠졌던 계층이 오직 생존을 위한 기술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흔들고 굴려보고 뒤집어 보아도 삼각형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 모든 것들은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조롱과 함께 발칙하게 그려진다.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라는 광고문구는 이해되지 않는다. 단 한차례도 웃질 못했다.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7-10

작은 섬에서 펼쳐진 관계의 비유와 상징

아일랜드의 가상의 섬 이니셰린에서 막역했던 두 사람이 갈등을 빚는다. 절교를 선언한 사람과 느닷없이 절교를 당한 사람. 농담이거나, 알지 못하는 말실수이거나, 기분 탓이려니 이유를 찾아 보지만 알 수 없고 그 사실이 와닿지 않는다. 이제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이 펼쳐진다. 추측이 난무하고 어정쩡한 주변의 조언이 이어지지만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갈등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는 첨예한 가치관의 세계로 퍼져나간다. “이유는 없어. 그냥 자네가 싫어진 것뿐이야”라고 시작했던 절교. 남은 삶을 사색하고, 작곡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절교를 당한 사람에게 와닿지 않는다. 지루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절교를 당한 상대는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왔던 사이에 그러한 결심이 무슨 의미를 지니며 왜 그러해야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절교를 당한 쪽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문제없었던 ‘현재’를 이야기하고, 절교를 선언한 쪽은 지금까지 변화없었던 삶이 싫다며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 ‘미래’를 이야기 한다.‘현재와 미래’라는 갈등에 “다정함은 역사적으로 기억되지 않지만 예술(음악)은 오랫동안 역사에 기록된다”는 ‘다정함과 예술’이라는 전선이 펼쳐진다. 아일랜드 본토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섬 이니셰린에서 발생한 두 사람의 갈등은 일상을 흔들고 물러설 수 없는 각오와 결기로 치닫는다.영화 속 이 사건이 시작된 것은 1923년 4월 1일이다. 800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여러 차례에 걸친 독립운동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좌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16년 4월 부활절을 맞아 봉기한 아일랜드의 독립전쟁은 1921년까지 이어졌고, 그해 12월 영국 런던에서 ‘대영 제국의 지배하에서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하는 휴전조약이 체결되게 된다.이 조약으로 아일랜드는 남북으로 갈리게 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굳어지게 된다. 영국이라는 공통된 적과 싸웠던 아일랜드는 조약을 찬성하는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려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이것이 1922년 6월부터 시작해 1923년 5월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내전’이다.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아일랜드 내전이 끝나갈 무렵으로 본토와 가까웠던 이니셰린에서는 간간히 전쟁의 포성이 들려온다. ‘다정함’을 무기로 친했던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가 ‘예술’과 ‘미래(남은 여생)’의 방향성을 달리하면서 본토에서 일어나는 내전과 이니셰린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간의 가치관의 전쟁이 점점 수위를 더해간다.우리는 절교의 이유가 궁금하지만 영화는 절교의 이유를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서운함과 분노, 거부와 결기가 팽팽하게 맞부딪치며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그를 쫓는 자와의 일상이 강도를 더해간다. ‘다정함’과 ‘예술’이 각자의 신념이 되고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전쟁의 양태와 닮았으며, 역사적 사실이며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아일랜드 내전의 은유가 된다.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졌던 친구가 이해를 달리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하며 한쪽을 파멸로 몰고가는 내전에 이르러서는 서로에게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 갔듯이, 절교를 선언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소중한 것들을 잃고 다시는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신념은 상대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해와 양보를 구하지 않으며 결기로 대처한다. 결기는 비극을 부르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같은 신탁이 내려진다. 모호한 신탁은 갈등이 강도를 더해가면서 구체화되고, 역사적 은유와 흥미로운 상징들이 작고 아름다운 섬에 가득 펼쳐진다. 1923년 4월 1일. 이 모든 것들이 만우절 농담처럼 시작된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6-12

기록 바깥에 존재했던 기억

20년이 지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31살의 아빠와 11살의 딸이 함께했던 튀르키예 여행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가. 그날의 온도와 날씨, 대화와 음식, 사건과 풍경들은 잊혀진 것인가 감춰진 것인가.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은 다시 회상하는 기억(추억)의 의미를 더듬는다.다시 회상하는 기억의 동기가 되며, 기억의 보조 장치로 등장하는 캠코더. 11살의 여름, 아빠와 함께했던 며칠 간의 여행은 딸의 시선과 아빠의 시선으로 파편적으로 캠코더에 담겨있다. 흐릿한 기억과 파편적으로 담겨 있는 기록. 기억과 기록의 행간을 오가며 20년전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그리고 되살아난 기억은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이해와 감정을 몰고 온다.캠코더에 기록된 사실은 캠코더 밖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기억의 이해를 돕는다. 영화는 아빠와 딸의 시선 속에 머물며 풍경의 모든 것은 그 둘을 위해 존재한다. 지금 이 이야기를 되살리고 있는 것은 누구의 기억이며 기록이냐가 모호하다. 물론 영화의 시작과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성장한 딸의 순간적인 모습 속에서 딸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아빠가 소환되고 있다는 것은 유추해 볼 수 있다.표현이 다소 복잡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아빠와 함께 했던 여행의 며칠간이 특정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없이 이어진다. 기억과 기록이 뒤섞이고 재편집된다. 시간은 휴가지에서 보내는 날들과 같이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몇 개의 선명했던 일상이 펼쳐질 뿐이다. 그 틈 사이로 불안한 기운들이 스며든다. 시간순으로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서 몇 개의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은 던져지지만 궁금증을 해소해주진 않는다. ‘왜?’라는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운과 불확실한 기억, 분명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기억은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재해석되고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로 남는다. 이제 거대한 덩어리가 해체되어 나열되고 이야기로 편집되어진다. 흐렸던 기억은 분명한 캠코더의 기록에 의해 그 당시를 감싸고 있었던 감정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캠코더의 기록보다 강력한 기록인 사진과 아빠의 엽서가 등장하고 아름다운 ‘노란색(영화의 중간중간 노란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노란색 카메라, 노란 잠수복, 노란 자유이용권, 노란색방)’으로 자리잡는다.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확인할 길이 없는(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는 딸을 떠나보내고 난 이후 혼자 남은 튀르키예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감정과 추측을 어떻게 구현하여 영화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라고 하겠다. 단순한 내용은 독창적인 형식으로 사실과 추측 사이를 오간다. 봤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거나 봤어도 무심코 넘겨버린 것들이 20년이 지난 딸에게 무겁게 다가온다.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영화는 플래시백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31살이 된 딸의 기억이며, 새롭게 깨닫게 되는 아빠와 나의 추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보면서도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불안함과 아득함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 혹은 영화를 보고 난 그 이후 밀려오는 감정은 묵직하다.그 힘은 영화의 이야기보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이것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할까를 고민했던 감독의 영화적 형식에서 기인한다.무언가 아버지를 휘감고 있었던 고민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열거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오직 20년 전의 기억에 기대어 추측만 해볼 뿐이다. 기억의 모호함과 기록의 정확함이 낳은 결과다. 기록이 있기까지, 혹은 기록이 되지 않은 기록 바깥에 대한 이해와 추측이 영화를 이끈다. 과거에 대한 영화지만 좀처럼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았던 영화, 사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플래시백이었던 기막힌 형식의 영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3-05-15

시간의 음악과 움직임의 음악

정점을 향한 여정에 이제 한 발짝만을 남긴 인물이 있다. 물론 그 정점 너머 또 다른 목표지점이 나타나겠지만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지점의 초입에 다다른 사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며, 8개의 말러 교향곡 실황 녹음에 마지막 5번 교향곡 실황녹음을 앞두고 있는 ‘리디아 타르’. 물론 가상인물이다. 베를린 필은 한번도 여성 지휘자를 선임한 적이 없다.영화는 초반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타르’가 쌓아 올린 음악에 대한 업적과 생각, 일관된(절대 다양하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견해를 듣는다. 이 모든 것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고난과 극복의 과정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될 앞으로의 계획과 견해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구구절절하지 않고, 단순하며 예리하게 반짝이는 어떤 존재의 강연을 듣는 느낌이다.대개의 경우 성공담이라고 하면 응당 뒤따르는 고난과 극복,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의 단어들이 보이지 않는다.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 길,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길이 아닌 밝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이는 길이지만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의 마지막 지점에 가장 근접해 있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이다. 확고하고 의지에 차 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이미 성취된 것과 같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렇듯 완고하고 완벽한(?) 정체가 도달한 예술(음악)의 빈틈없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토크쇼가 진행되면서 “요즘 시대에 다양하다는 건 좋은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인종과 성별, 모든 것을 망라한 최고점의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의미로 읽힌다. 여성성을 대변하는 ‘마에스트라’라는 단어의 필요성 보다는 남성성을 대변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마에스트로’로 불리우길 원한다. 그래서 타르의 관점은 일관되었으면서 절대 다양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제 정점의 초입에서 빛나던 존재의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직접적이지 않고, 격정적이지 않다.우회적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며 균열을 일으키는 내리막길을 보게 된다. 타르가 했던 말들과 행동, 생각들이 스스로를 향하면서부터 붕괴된다. 그 와중에도 기존의 권위와 명성을 높여가며 범접할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해간다.영화 ‘TAR(타르)’는 외연적으로는 차갑지만 그 내부는 뜨겁게 끓어 오른다. 성공의 여정이 아닌 무너지는 지점으로 향하는 과정이 차분하고 냉정하게, 우아하면서 아름다운 악보를 흝는 것과 같은 속도로 진행된다. ‘타르’는 “음악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속도다. 정해진 음표 속에서 속도를 조절해가면서 지휘자의 해석으로 연주된다. 그 속도 속에서 강약이 더해진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높고낮음을 조절하면서 음악은 진행된다. 타르의 음악에 대한 관점과도 같이 진행되며 사건은 차갑고 우아하며 단조롭게 시작되어 한순간에 그녀의 모든 것들을 무너뜨린다.하지만 견고했던 것을 무너뜨리는 쾌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극적이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만 쉽게 그것을 예측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내부적으로 흔들리고 외부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며 임계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다.추락한 그녀는 고향 집으로 돌아와 오래 전에 보았던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레너드 번스타인의 “모든건 음악은 움직임에 있으며,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흐르며, 그 움직임은 백만 단어보다 더 많은 걸 말한다”라는 회고담을 들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실존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은 가상인물 ‘타르’와는 다른 결의 마에스트로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실제 존재했던 20세기 위대한 지휘자처럼 베를린 필하모닉의 ‘황제’ 카랴얀처럼 시작한 타르는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의 친구’ 번스타인의 길을 보게된다. 바닥에서 다시 일어날 것인가는 마지막 장면의 해석으로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4-17

부유하는 이들의 쓸쓸하고 매혹적인 이야기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시시각각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군하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마르세이유로 몰려 든다. 이제 마르세이유는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며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장소가 된다.1940년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독일과의 협상에 의해 프랑스 북쪽은 독일이, 남쪽은 괴리정부인 비시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프랑스를 떠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은 니스와 마르세이유 단 두 곳뿐이었다.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할 경유지 영화 제목인 ‘트랜짓(Transit)’이 바로 마르세유다.영화의 무대가 되는 마르세유는 각자의 최종 목적지인 ‘그곳’으로 가기 위한 중간지점으로, 다른 곳, 희망하는 그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떠나기 위해 경유지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거대한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마르세이유는 실낱같은 희망과 이제 더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망과 두려움이 뒤섞여 절실함으로 채워진 도시가 된다.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증서로 ‘출국비자’가 필요하다. 그 출국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경유지가 어디고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는 통과비자를 각 나라에서 받아야만 한다.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체류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체류비자는 체류하고자 하는 나라에 다시 체류할 수 있는 증명을 해야한다. 이 과정 속에서 모순이 발생한다.위의 처음 문장에 썼듯이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며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증명’을 해야만 비자가 발급된다. 출국비자를 받기 위해 그 전에 발급받아야 하는 증명서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하게 흘러가면서 불안감은 증폭되고 떠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도착했던 경유지 마르세유는 종착지가 된다. 부조리한 과정 속에서 불안은 증폭되고 희망은 줄어들며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만 남는다.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진행되자 파리는 봉쇄되고, 도망자 신분인 게오르그는 자살한 바이델이라는 작가의 유품을 들고 마르세유로 향하는데 유품에는 작가의 원고와 아내에게서 온 편지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가 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가 호텔을 예약할 때 경유지의 삶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다. 호텔 주인은 체류 허가증이 없기 때문에 게오르그에게 1주일치 선불을 요구한다. “여기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한다. “여기에 머물기 위해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하란 예기”가 된다.유품을 전달하고 사례비나 챙기려던 게오르그는 이제 멕시코 영사관 직원의 착오로 자살한 바이델로 오인받게 되면서 호텔 예약의 부조리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각자의 사연과 목적을 갖고 ‘그곳’으로 가기 위한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 속에 합류하게 된다.영화는 1940년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현재의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한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과거가 문제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1940년대는 유럽을 탈출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는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불법 이민자들이 공존하는 공간, ‘그곳’으로 가기 위한 욕망이 시대를 뛰어넘어 이어지고 있는 장소로써 마르세이유가 된다. 다른 세계로 열린 공간인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르세유는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닫힌 지옥의 공간이 된다.“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곳’과 ‘그곳’, 희망과 절망 사이에 깊은 쓸쓸함이 담긴다. 게오르그가 불법 이민 가족 소년의 라디오를 고쳐주면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몰고기도 집에 가고, 코끼리도 쿵쿵대며 집에 가고, 개미도 서둘러 집에 가고, 등불이 켜지고 날이 저무네”의 가사가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쓸쓸함을 표현한다.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관통하고 있는 경유지에 남은 사람들의 마음처럼./(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3-27

아름답고 처연하게, 두껍고 무겁게 소멸하는 이야기

영화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유령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태연하게 펼쳐 놓는다. 특히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노골적이다. 눈구멍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그가 살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C는 유령이 되어 그가 살던 집에 남은 사랑하는 M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M의 슬퍼하는 모습과 극복의 과정을 목격한다.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죽은 자의 몫으로 그린다.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죽은 자의 시선, 곧 유령의 시선을 따른다. 직선적인 세계관을 살다가 순환하고 종횡무진하는 세계로 들어온 유령의 시선으로 시간은 흐르거나 역전되고, 늘어지거나 축약된다. 표현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집이라는 공간을 떠돈다.우스꽝스럽게 시작한 유령의 모습은 이내 처연하게 다가온다. 눈구멍 두 개만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의 변화없는 표정 속에서 무겁게 내려앉는 상실의 얼굴이 읽힌다. 홀로 남은 집, 집은 거대한 쓸쓸함이 되어 슬픔과 함께 뭉쳐져 집안을 떠다닌다. 그 시간 속에서 집은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하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유령 C와 남는다. 귀엽고 소탈하게 등장한 유령은 이제 세상 그 어느 곳, 누구 보다도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어 집에 남는다. M이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모습과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마침내 극복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나간 이후에도 유령은 그 집에 머문다.모든 시선은 유령의 시선과 또 다른 유령과도 같은 관객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 오간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남겨진 자(혹은 그 무엇의 존재)가 되어 관객도 함께 빈집에 머문다. C가 그렇듯 우리는 그저 가늠되지 않는 시간을 지켜볼 뿐이다.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공허와 상실, 쓸쓸함과 외로움과 애틋함, 아름다우면서도 텅 빈 감정들이 뒤섞인다. 유령 C가 머무는 집과 함께 무언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채워진 집의 어느 곳에서 추억을 더듬는다. 이제 ‘유령 이야기’는 C가 머물며 추억하고 목격한 ‘집’의 시간, ‘집의 이야기’가 된다.그래서 화면은 일상의 공간, 일상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작은 집 어딘가에 카메라를 놓고서 복도를 비추거나 빈벽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 정물처럼 남은 유령 C가 놓이기도 한다. 빈집이 헐리고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질 때 유령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처음 정착했던 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C와 M이 함께 살던 때까지 목격자로 관객과 함께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먼지가 쌓이듯 기억의 공간은 두껍고 무겁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메운다.언제까지건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존재(유령)가 사라지는 순간은 허무하다. 건너편 집의 또 다른 유령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에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던 유령도 “안 올건가봐요”라고 체념하는 순간 무너져 내린다.영화는 짧지만 흐름은 느리고 길게 흘러간다. C와 M의 시간, 유령의 시간, 유령이 머물던 집의 시간, 그 집이 들어서기 이전의 시간이 한편의 시처럼 함께 흐른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의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에서 시작해 사랑과 연민, 쓸쓸함과 공허함, 기억까지 소멸시켜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까지 놓아 버리게 만든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아름답고 처연한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영화가 끝난다. 그 무게만큼 여운이 오래 남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2023-03-06

다정함이 우주를 구하다

우리의 삶은 숱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맘에 드는 물건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고, 약속을 할 것인가, 전화를 할 것인가 등등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시작해 무수한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내가 있고 내 삶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물론 그 선택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졌을까.선택은 의심과 후회로 이어진다.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러울수록 과거의 선택은 후회와 회한으로 남는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다른 전공을 선택했더라면, ‘만약’ 내가 다른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과거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만약’을 동반한다. A와 B라는 선택의 순간 A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나와 B라는 세계를 살아가는 내가 각각의 우주 속에서 펼쳐진다. 다중우주(multiverse)다. 무수한 선택의 순간마다 분화되어 ‘만약’의 선택을 했던 내가 무한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주. 우리의 우주에서 한 여자가(에블린)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뒤로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택시를 탄다. 그리고 미국에서 세탁소를 개업하고 딸을 낳고 때론 행복하게 때론 슬프게 살고 있었다. 이제는 중년 여성이 되어 노쇠한 아버지를 돌봐야하고,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과의 관계도, 커밍아웃한 딸(조이)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고,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세탁소를 압류당할지도 모른다. 대혼돈의 일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에블린. 그녀에게 다중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며 등장한 악당 ‘조부 투바키’로부터 다중우주를 구할 히어로로 낙점되다.에블린이 다중우주를 구할 영웅으로 선택된 이유는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에블린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이기에 버스 점프(verse jump)를 통해 다중우주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능력을 빌려올 성장의 가능성이 가장 큰 존재이기 떄문이다. 이에 반해 조부 투바키는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그녀의 존재를 체험하고 능력을 흡수한 존재로 더이상 살아갈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블랙홀 ‘베이글’ 안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엄마 에블린을 끌어들인다. 히어로에 다중우주까지. 익숙한 소재다. 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 지구, 전 우주를 파멸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멸하고자 하는 허무주의에 빠진 악당이 등장한다. 그리고 가장 능력이 뛰어난 영웅이 아닌 숱한 선택에서 후회의 선택을 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평범한 중년 여성이 위기에 맞선다.허무주의와 현실주의의 대결이다.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삶을 경험했으며 어마어마한 능력을 소유한, 더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는 악당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의 딸 조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히어로 영화의 기저에 가족의 이야기가 얹힌다. 조화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기존의 다중우주 히어로물에서 구조를 가지고 왔지만 그것들을 풀어내는 방법은 독창적이다.시끄럽고 복잡하고 다양하게 펼쳐지던 것들은 구조(장르) 속에서 재해석되고 색다르게 재현되어 말끔하게 정리된다. 익숙한 것들을 비틀며 정신없이 펼쳐 놓았던 야단법석의 상황은 기상천외하게 진행되면서 뭉클하게 마무리된다. 무질서하게 펼쳐졌던 것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껴졌던 가치와 행위로 완결된다.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것(Everything)과 모든 곳(Everywhere)에서 모든 순간(All at once)이 정신없이 펼쳐졌다가 놀랍도록 새롭게 자리잡는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때”라는 남편 웨이먼드의 대사처럼 마침내 ‘다정함’이 우주를 구한다. 이 영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정신없이 펼쳐진 것들을 어떻게 주워담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정함’을 무기로 감동적으로 허무함의 블랙홀을 무너뜨린다. /(주)Engine42 대표

2023-02-06

사랑하다의 다른 표현 ‘붕괴되다’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한 남자가 산에서 떨어져 죽는다. 형사(해준)는 살인인가 자살인가의 의문에서 출발해 증거를 수집한다. 죽은 남자의 부인인 서래는 용의자와 피의자 사이를 오가며 의심과 신문(訊問)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나간다. 형사와 용의자는 신문(訊問)과 증명(알리바이)을 주고 받으며 혐의를 입증할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의 추리 수사물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진다.남여가 만난다. 호감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대화하고 관찰하고 모든 행동과 대화를 되새기면서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조심스럽게 타진해 나간다. 사소한 행동, 사소한 말 한마디조차 의미를 부여하며 내 마음을 들키지 않고서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분주히, 그 과정이 애틋하다. 로맨스 영화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진다.서로 다를 것 같은 장르가 한 편의 영화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어우러지고 있다. 저 사람은 ‘범인인가 아닌가’가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같은 선상에 놓인다. 수사는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고, 신문의 과정은 타인과 나를 동일한 감정 선상에 놓이게 한다. 혐의를 입증해야하는 과정은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수사가 끊임없는 의심과 증명의 과정을 밟을 때, 사랑은 관심과 마음의 표현이라는 과정을 따른다. 그래서 ‘저사람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인가?’는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범죄와 사랑의 증명을 위해 증거(관심)를 수집하고 확인해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수사극으로 시작한 영화는 멜로영화가 되고, 멜로가 시작될 때 다시 수사극으로 중첩되어 전환된다.수사가 유죄와 무죄의 두 가지 결말에 따라 자유와 구속을 길을 걸을 때, 멜로가 만남과 이별이라는 결이 다른 자유와 구속(?)의 길을 걷는다. 등치되고 상반된다. 설렘과 의심 사이 ‘자부심’과 ‘붕괴’가 교차된다. 범인인가 아닌가와 사랑했는가 아닌가가 교차되며 오간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는 서래의 대사처럼 용의자와 형사로 만난 두 사람은 모호함을 오간다.산에서 시작된 영화는 바다에서 끝난다.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듯이 용의자와 피의자의 관계가 시소를 탄다. 명확해지던 정황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자부심’과 ‘붕괴’를 오간다. 안개 속 같은 모호함 속에서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영화 제목인 ‘헤어질 결심’이 누구와 헤어질 것이며,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다. 헤어진다는 것, 이별을 한다는 것은 대상과 지향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산에서 시작된 영화 전반부의 ‘헤어질 결심’이 형사 해준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결심이었을 때 바다에서 이어지는 후반부는 의심하는 사랑에 대한 단호한 응징과도 같은 확신을 보여준다. 이것이 서래의 ‘헤어질 결심’이다. 반면에 해준은 ‘자부심’과 ‘붕괴’ 사이에서 의심과 그것을 증명할 무엇인가를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존재로 남는다.의심하고, 미행하고, 감시하고, 구속하는 것의 구조는 수사와 사랑이 유사하다. 그러나 미결된 사건처럼 확인되지 않고 결말에 다다르지 못한 사랑은 역설적이게도 영원히 사랑으로 남는 것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붕괴’를 막고 ‘자부심’을 지켜주기 위한 최선의 방법,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최선의 선택이 희생이라는 역설에 있다.“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해준의 말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과 똑같다. 사랑과 붕괴가 동의어가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사랑이 되고, 평생 잊혀지지 않을 미결사건이 되어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는다.엔딩에 이르러 ‘붕괴’된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한 여자가 ‘마침내’ 사랑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순간.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여운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번져옴을 느낀다. 오래 갈 것 같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3-01-09

세 개의 동사로 이루어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포스터 불현듯 삶이 공허해진다. 안정적인 직장에 원만한 결혼생활, 경제적인 안정까지 꾸준히 쌓아 올렸던 일상,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일상에 의문이 든다. 진정 내가 원했던 삶은 무엇인가. 누구나 살아오면서 한번쯤 던졌을 질문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인생의 행로를 수정하며 살고 있는가. 쉽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순간 의문 가득한 불안한 일상 속에 머문다.물론 누군가는 과감히 떨치고 반복되는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여건(경제적이거나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속에서 환기의 차원에서 잠시나마 다른 궤적을 그리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혹은 상상에 그친다.선택은 크고 작은 희생과 용기를 동반한다. 한쪽을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한쪽을 희생해야 한다. 그 가치에 따라 끊임없이 저울질 한 끝에 택하게 되는 것. 하지만 그 선택이 늘 더 큰 이익과 삶의 가치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저하게 되고 후회하게 되며, 머뭇거린다.다시 반복된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의 삶이 불현듯 공허해지고 이것은 아니라는 의문이 든다. 떠나야할 이유와 떠나지 못하는 이유 사이에서 발목을 잡는 것들의 총량을 가늠해보지만 전자는 구체적이지 않은데 반해 후자는 구체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이다. 떠나야할 이유가 불분명한 하나라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면서도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용기가 필요한 당신을 위한 기적같은 여행’이라고 시작한다. ‘머무는 것보다 힘든 건 떠나는 거’라는 선택의 어려움을 전제에 깔고 있다. 이 영화는 홍보 문구처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가볍게(?) 해소했을 때 찾아오게 되는 이상적인 여행의 전형을 그린다. 그리고 맹렬히 먹고 기도하며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무언가, 공허함의 원인을 찾아 다닌다.안정적인 직장에 결혼을 했으며 뉴욕에 집까지 마련한 저널러스트인 리즈는 “아침에 눈 뜨면 어떤지 알아? 열정, 희망, 감정, 아무 것도 안 느껴져. 제일 힘든 순간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계속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잔인해”라고 하며 갑자기 찾아온 삶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발리의 어느 한 점쟁이에게 들은 점괘처럼 결혼생활과 일상을 정리하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크고 작은 희생과 용기를 동반하는 자아와 행복 찾기에 있어서 분명 이 영화는 일반적이지 않으며 판타지에 가깝다.아픔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탈리아의 폐허로 변해버린 유적지에서 리즈는 이곳이 온통 무너져 내린 처참한 자신의 삶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론 무너져도 괜찮아.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잖아”라며 “두렵지만 한 번은 무너져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인다.인도의 수도원에서 기도를 마친 리즈는 “내 안에 있는 신을 발견하는 거다. 신은 완벽한 인간을 기대하지 않는다. 신은 내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존재한다”고 인도에서의 여정을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발리를 찾아가 “때론 사랑하다가 균형을 잃지만 그래야 더 큰 균형을 찾아가는 거야”라며 또 다른 사랑을 만난다. “비행기 표 세 장이 복권”이라며 떠나 온 자아찾기의 결과다.영화의 제목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모두 동사(動詞)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게하라는 권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명령인지도 모른다.버리고 비우면서 채워지는게 여행이라고 할 때, 이 영화는 간명하고 단순한 버림 뒤에 발견하고 찾아지는 것, 획득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일상의 끈에서 상상만으로 그칠 때, 이 영화는 세 개의 동사처럼 즉각적으로 행동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권유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남는 것은 “내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좀 더 솔직히 “내가 그럴 수 있는 경제적인 형편이 될까?”라는 의문이다./(주)Engine42 대표

2022-12-19

일상의 공포, 치유의 또 다른 방식

‘큐어’ 포스터.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대사가 있다면 그것은 “왜?”라는 질문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왜”는 살인의 동기를 묻는 질문이고, “당신은 누구야”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이에게 되받아 치는 질문이다. 이 두개의 질문은 반복된다. 답을 요하는 질문에 서로가 질문으로 맞서니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세 번째 살인. 세기말의 도쿄에서 유사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범인은 다르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모방범죄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 동기의 유사성이 아닐까 추측한다. 평범했던 이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왜?”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살인을 저질렀던 범인들이 하나같이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살해동기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포인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개의 범죄 스릴러 영화들이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던가 무슨 이유로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를 파고들면서 긴장을 유지하지만 ‘큐어’는 그렇지 않다.범행장면에서부터 범인을 노출시키고 쉽게 체포된다.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이 아니라 유사점도 없는 살인자의 동일한 형태의 살인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살인과 다섯 번째의 살인이 이어지면서 살인범들의 동선에 모두 한 남자를 만났다는 공통점이 드러난다.이제 “왜”라는 질문은 모든 범죄의 연결고리인 남자 마미야에게 주어진다. “왜”라는 질문에 “당신은 누구야”라는 질문과 “그러니까 누구라고 넌?”이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반복된 질문이 이어지면서 영화는 새로운 긴장을 형성한다.도입부 등장부터 텅빈 공간과도 같은 바닷가에서 출현한 마미야는 어디서 왔으며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 반복되는 질문을 던지고 쓰러진다. 이후 마미야를 만났던 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행한다. 늘 그래왔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잔인한 살인은 갑작스러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펼쳐진다.일련의 살인사건은 마미야에 의해 정신적으로 교사되고 있으며, 마미야를 검거하게 되면서 마미야의 선문답과도 같은 “당신은 누구야?”라는 질문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노이로제와 불안감, 신경증과 정신적 문제들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심연의 본질을 마주하라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다.빛과 어둠, 인간의 선한 마음과 악마성, 이것들은 상호보완적이거나 화합되지 않는다. 하나를 억누르거나 두 가지의 모습을 지닌채 마음은 무거우며 끊임없는 억제와 선택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라는 주문이며, 선택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사건을 수사하는 다카베 형사는 형사로서의 모습과 남편으로서의 모습 속에서 삶의 짐과 고통, 불안과 분노의 경계를 넘나든다. 불안과 분노는 도처에 등장하는 일상의 소음으로 나타난다. 낮게 깔리며 장면마다 반복되면서 증폭된다. 선과 악의 심리와 선택은 빛과 어둠의 명징한 대비로 등장인물의 현재 위치와 심리적 상태를 나타낸다.영화 후반부 “기분 좋게 텅 비워 버리고 나처럼 새로 태어나라”라고 마미야는 다카베 형사에게 말한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선택의 의미다. 물론 그 선택의 방향은 마미야의 선택을 권유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그 선택에 의해 그의 방식으로 본질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것이다.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큐어(cure·치유)’며, 그 전에 영화의 제목으로 하려고 했던 ‘전도사’인 이유다. 영화는 직접적 행동보다 심연의 어둠을 드러내며 진행된다. 드러나지 않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은 또 다른 공포를 유발한다. 낮게 깔리며 증폭되는 영화 속 배경 음향과도 같이 밀려오고 그 속에 빨려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주)Engine42 대표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