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포스터.
로맨스 영화. 쉽게 표현할 수 없지만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느낌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말이 있다. 이 속에서 수많은 로맨틱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변주에 변주를, 배우를 바꿔가면서 국적과 인종을 넘나들면서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뼈대다. 나와 사랑할 상대가 있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으며, 기쁨과 슬픔, 좌절과 환희가 뼈대에 달라붙는다. 여기에 안타까움과 절절함이 간극을 메울 때면 풍성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피어오른다.로맨스 영화의 형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핵심이라기보다는 로맨스 영화의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이곳에 집중된다는 뜻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식하고,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며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진다. 밀당이 이어지고, 한 단계 관계의 진전이 보일쯤 난관에 봉착한다.난관은 집안의 문제이거나, 갑작스러운 이유로 인한 헤어짐, 불치병과 같은 다양한 유형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재회의 과정을 거쳐 극복에 이른다. 극복 이후는 헤어짐이거나 만남의 지속이다.연애를 글로써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기에 그것을 뼈대니, 형식이니, 과정이니 하는 것들로 설명할 때 쉽게 울림이 전달되지 않는다. 여기에 애잔함과 애틋함, 슬픔과 기쁨의 요소들이 얹힐 때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의 연애를 감상하게 된다.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위의 풍성한 연애 요소들을 걷어내고 당당히 뼈대와 과정으로 이루어진 로맨스 영화를 선보인다. 천연덕스럽게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영화, 장르가 로맨스인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말랑말랑하거나 달콤하거나 촉촉하거나 구구절절 해야할 것들이 말끔히 제거되어 무심한 표정과 건조한 일상,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들로 화면을 채운다.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복잡미묘한 감정과 심리, 꼬이는 사건의 전개는 감독의 관심 밖인듯하다.생뚱맞으며 무미건조한 로맨스 영화가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리듬을 가지게 된다.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전형적인)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싱그럽고 물기 머금은 요소들을 걷어 낸 자리에 엷은 생기와 희미한 희망이 자리잡는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선들이 보이지 않을 때, 대사는 직설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간결하면서도 규칙적이지 않은 독특한 리듬이 유머와 결합되어 능청스러움을 더한다. 이처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로맨스는 다른 곳에서 울림을 끌어 온다.핀란드 헬싱키의 어느 곳. 비정규직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노동자인 안사와 홀라파. 취업과 해고를 반복하고 불안이 엄습하는 일상이지만 삶에 대한 원망이나 그렇다고 지독한 애착도 보이지 않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특별할 것 없는 만남이 그 어떠한 설레임도 없이 이어진다. 일상과 평범의 바깥. 시스템에 쉽게 안착하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억척스러움이나 도달하고픈 목적에 관심이 없다.그 흔한 ‘사랑해’라는 대사 한마디 없이, 고백의 절차도 없이 두 사람의 로맨스는 시작된다. 영화의 분위기와 다르게 이 영화는 뮤지컬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데, 배경에 깔리는 음악들은 애틋하고 말랑말랑하게 자리를 잡는다. 건조함과 외로움의 강도는 그 어느 영화 못지 않다. 밋밋하게 이어지는 이별과 재회의 과정이 심각하지 않지만 결코 시스템 밖에서 무너지지 않는 사랑을 보여 준다.로맨스 영화며 코미디 영화이며 뮤지컬 스타일의 영화. 낙엽처럼 건조하고 다른 결을 지니고 있지만 그 어떤 로맨스 영화보다도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사랑’도 있음을 알게 해준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4-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