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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바깥에 존재했던 기억

등록일 2023-05-15 18:54 게재일 2023-05-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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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
‘애프터썬’ 포스터

20년이 지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31살의 아빠와 11살의 딸이 함께했던 튀르키예 여행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가. 그날의 온도와 날씨, 대화와 음식, 사건과 풍경들은 잊혀진 것인가 감춰진 것인가.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은 다시 회상하는 기억(추억)의 의미를 더듬는다.

다시 회상하는 기억의 동기가 되며, 기억의 보조 장치로 등장하는 캠코더. 11살의 여름, 아빠와 함께했던 며칠 간의 여행은 딸의 시선과 아빠의 시선으로 파편적으로 캠코더에 담겨있다. 흐릿한 기억과 파편적으로 담겨 있는 기록. 기억과 기록의 행간을 오가며 20년전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그리고 되살아난 기억은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이해와 감정을 몰고 온다.

캠코더에 기록된 사실은 캠코더 밖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기억의 이해를 돕는다. 영화는 아빠와 딸의 시선 속에 머물며 풍경의 모든 것은 그 둘을 위해 존재한다. 지금 이 이야기를 되살리고 있는 것은 누구의 기억이며 기록이냐가 모호하다. 물론 영화의 시작과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성장한 딸의 순간적인 모습 속에서 딸의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아빠가 소환되고 있다는 것은 유추해 볼 수 있다.

표현이 다소 복잡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아빠와 함께 했던 여행의 며칠간이 특정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없이 이어진다. 기억과 기록이 뒤섞이고 재편집된다. 시간은 휴가지에서 보내는 날들과 같이 순차적으로 흘러가고, 몇 개의 선명했던 일상이 펼쳐질 뿐이다. 그 틈 사이로 불안한 기운들이 스며든다. 시간순으로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서 몇 개의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은 던져지지만 궁금증을 해소해주진 않는다. ‘왜?’라는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운과 불확실한 기억, 분명하지만 단편적인 기록이 영화를 이끌어 간다.

기억은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재해석되고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로 남는다. 이제 거대한 덩어리가 해체되어 나열되고 이야기로 편집되어진다. 흐렸던 기억은 분명한 캠코더의 기록에 의해 그 당시를 감싸고 있었던 감정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캠코더의 기록보다 강력한 기록인 사진과 아빠의 엽서가 등장하고 아름다운 ‘노란색(영화의 중간중간 노란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노란색 카메라, 노란 잠수복, 노란 자유이용권, 노란색방)’으로 자리잡는다.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확인할 길이 없는(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버지는 딸을 떠나보내고 난 이후 혼자 남은 튀르키예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감정과 추측을 어떻게 구현하여 영화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라고 하겠다. 단순한 내용은 독창적인 형식으로 사실과 추측 사이를 오간다. 봤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거나 봤어도 무심코 넘겨버린 것들이 20년이 지난 딸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영화는 플래시백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31살이 된 딸의 기억이며, 새롭게 깨닫게 되는 아빠와 나의 추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보면서도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불안함과 아득함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 혹은 영화를 보고 난 그 이후 밀려오는 감정은 묵직하다.

그 힘은 영화의 이야기보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이것을 어떻게 영화로 표현할까를 고민했던 감독의 영화적 형식에서 기인한다.

무언가 아버지를 휘감고 있었던 고민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열거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오직 20년 전의 기억에 기대어 추측만 해볼 뿐이다. 기억의 모호함과 기록의 정확함이 낳은 결과다. 기록이 있기까지, 혹은 기록이 되지 않은 기록 바깥에 대한 이해와 추측이 영화를 이끈다. 과거에 대한 영화지만 좀처럼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았던 영화, 사실 영화 전체가 하나의 플래시백이었던 기막힌 형식의 영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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