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막강한 권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든다.
이 시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본거지로 에도 막부를 설립하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다.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고, 지방의 영주격인 다이묘와의 적대와 친화 속에서 최고 권력자인 쇼군에 오르게 되면서 마침내 에도 막부는 안정을 취하게 된다. 이후 1603년부터 1868년까지 약 250여 년 동안 평화와 안정의 시기를 거친다. 해외 무역 장려와 함께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고, 상업을 장려하면서 세계적인 경제 수준을 보이며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나라는 부강했지만 평민들의 생활수준은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열악한 수준이었다. 에도시대 말기에 이르면 그간 축적되었던 내부의 갈등과 구체제에 대한 도전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근대화의 바람을 타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하는 의지의 기운이 밖으로부터, 위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충돌을 예고하는 에도 막부 말기의 1858년, ‘서장 : 에도의 똥은 어디로?’라는 소제목으로 영화 ‘오키쿠의 세계’는 시작된다. 영화는 똥 얘기로 가득 차 있다. 에도를 돌며 똥을 퍼와 채소밭 농부에게 거름으로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두 청년 야스케와 츄지,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와의 이야기다. 비천하고 비루한 직업의 두 청년과 오키쿠는 똥으로 엮이게 되고 똥 같은 상황과 똥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
절간의 화장실에서 똥을 푸는 모습에서 시작해 영화는 시종일관 공동주택의 변소와 똥을 퍼다 나르는 모습과 그것을 밭에다 뿌리는 일과 그것을 손으로 만지고 뒤집어 쓰는 장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불쾌할 수도 있는 장면에서 활력과 싱그러움이 일어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냄새와 파리가 들끓는 그곳, 한 평의 변소라는 협소한 세계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세 청년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세계에 가닿는다.
“세계라는 말을 아나. 이 하늘 끝이 어딘지 아나. 끝 같은 건 없어. 그게 세계지.” 결전을 앞둔 사무라이 오키쿠의 아버지가 공동변소에서 볼 일을 보며 똥을 푸러 온 츄지한테 하는 말이다. 똥과 엮인 세계는 가난과 차별, 폭력과 죽음이 만연한 19세기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순수하고 소박한 감정들이 일어난다. “요새 나라가 어수선한 건 그걸 이제 알아서야.” 혼란한 세상 속에서, 곧이어 닥칠 격동의 시대, 광활한 세계 속에서 어김없이 똥을 거름으로 삼아 피어나는 채소들처럼 청춘의 마음들이 싹튼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말해줘. 그보다 더 좋은 말은 없어. 그게 제일 좋은 말이야.” 하나의 세계가 닫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시기. 19세기는 내가 알던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물리적으로 존재함을 알게 되는 시기며, 나를 둘러싼 세계관이 파열음을 일으키며 새로운 세계관이 밀려드는 시기다. 경계지점에서 변화의 시기에도 흔들림없이 이어지는 것들의 자잘한 요소들이 영화의 행간을 메워 나간다. 말을 할 수 없는 여자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남자의 사랑 고백이 위와 같을 때 그 표현은 처절하다. 그리고 때마침 눈이 내리고 온통 하얗게 쌓일 때까지 고백은 이어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858년부터 1861년까지다.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세계의 오키쿠’에 이어 ‘오키쿠와 세계’로 끝을 맺는다. 그 속에서 똥에 대한 리얼한 시각과 생생한 청각까지 더해져 그곳에서 한바탕 뒹굴다 나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부터 그러한 감정은 뒤로 밀려나고 영화를 관람하는 우리들까지 평온하고 담백한 감정에 빠져든다.
시종일관 심각한 냄새로부터 시작해 맑고 상큼한 청춘의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세계의 밑바닥 가장 더러운 곳에서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퍼올린다. 다행히 영화는 흑백이지만 그 흑백의 질감 속에서 자잘하게 반짝이는 색감들이 빛을 발한다. 9개의 장이 끝나는 지점에 짧게 컬러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깊게 여운을 남긴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