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일상과 단란한 가족의 생활상에 보이는 것은 푸르고 밝으며 때로는 눈부심이 가득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과 온갖 꽃들과 수영장, 온실로 이어지는 정원의 모습이 이어지면서 평범하다 못해 무료한 일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층위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과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불안감이 얹힌다. 그것은 보여지는 화면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으로 시시때때로 공간을 넘나들며 미지의 불안과 공포를 유발한다.
영화의 전개는 단순하다. 회사와 가정에 충실한 가장과 단란한 가족, 어느 날 가장은 전근을 통보받게 되고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업적을 인정 받아 승진하고 다시 원래의 직장으로 복귀한다. 보여지는 화면과 단순한 전개, 이것이 커다란 진동과 함께 불편함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힘은 ‘소리’다.
영화 속에서 사운드(음악을 포함한 모든 소리)는 내용을 극대화하거나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하지만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사운드는 끊임없이 파열음을 내는 이질적인 것으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내용을 합쳐 놓은 것처럼 또 다른 감정을 유도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화면과 사운드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1940년대 초,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담장 밖이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갈리는 풍경 속에서 사운드는 끊임없이 몰입을 방해하고 어느 곳,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간간히 담장 너머 굴뚝으로 끊임없이 피어오른 검은 연기처럼, 그 연기의 존재를 알고 있을 때 오는 흔들리는 감정을 내려놓지 못한 채 부유하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목이 사라지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검은 화면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전달되는 것은 오로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이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영화는 화면보다는 소리에 집중해야한다는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영화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과 그 일상의 전반에 깔리는 이질적인 사운드로 나뉜다. 그리고 화면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철저히 담장 이쪽의 밝은 풍경을 담아낸다. 관객은 이미 담장 저쪽에서 펼쳐지고 있을 풍경과 사건에 익숙하다. 수많은 영화와 책들, 전해들은 이야기 속에서, 담장 건너편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사건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철저히 담장 건너편으로 카메라를 옮기지 않으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철저히 건너편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철저한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담장의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들의 일상 속에서 철저히 차단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독일군 장교 루돌프 회스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단란한 이층집의 모든 창문들에는 낮이고 밤이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과 담장,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담장 너머의 사건에 궁금해하지 않는 단련된 무관심의 힘. 이러한 가족들의 힘에 저항하여 담장 너머로부터 소리는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만 무관심의 힘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상부에서 전달된 학살의 효율성을 극대화 하고, 가족들과의 일상과 거주하는 집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집중된다. 무관심한 것과 관심이 집중된 것,
아름다운 일상의 소리와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담장 너머의 소리가 겹쳐지면서 영화 속 공간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이러한 비현실적인 공간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공존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과 소리가 그 시대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넘나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담장 너머로 카메라를 돌리지 않은 이 영화가 주는 독창성이며 울림이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