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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그들만의 사랑이 누구나의 사랑이 되는 순간

이안 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를 다룬다. 1960년대 서부,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은 두 카우보이의 20여 년에 걸친 관계를 그리고 있다.만년설로 뒤덮인 여름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방목하는 양떼를 돌보던 이들은 그곳의 혹독하고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서서히 피어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느 한 순간 훅하고 들어오는 감정이라고 표현하는게 맞는 것 같다.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양떼들을 돌보던 두 명의 남자는 그들에게 찾아온 감정을 낯설어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목장주에게 들킨데다가 우박을 동반한 폭풍우로 인해 몇 마리의 양을 잃어 버리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다.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 동안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한다.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랑(퀴어 시네마)을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으로 이끌어가는 영화의 맥락이 대단하다. 누구는 그들의 사랑 때문에 불편한 영화일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는 ‘누구나의 사랑’에 관한 감동적인 영화이기도 하다.우울하고 퇴폐적이며, 어두운 것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대자연의 풍광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이별이다. 많지 않은 대사 속에서 그들의 감정을 실어 나르는 것은 눈빛과 표정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배경이 되어주는 브로크백 마운틴이다.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공간은 그들에게 시작의 공간이었으며, 만남의 공간이며, 둘만의 온전한 장소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서 온전히 감정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 공간을 두고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조금 다른 의미의 해석도 가능한데, 우선 그들의 직업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카우보이(cowboy)라는 직업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소몰이꾼으로 서부개척 시대의 주역이었다. 숱한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카우보이도 모두 소떼를 몰고 다니지 양떼를 몰거나 돌보지 않는다. 아무래도 양떼를 몰고 다니는 카우보이는 익숙하지 않다.영화의 제목이며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이며, 그 이후에도 오붓한 시간을 이어가던 만남의 장소였던 곳이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일주일에 한 번 부식과 필요한 물자를 지급받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것을 빼곤 여름 한 철의 그곳은 그들에게 온전히 둘만이 존재하는 ‘에덴동산’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카우보이라기 보다는 에덴동산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영화 초반에 그들에게 양들을 방목하는 일을 주면서 목장주인 아귀레는 지켜야하는 규율을 전달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고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규율과 금지된 행위를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이 둘의 관계는 태풍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목장을 방문한 목장 주인에게 들키고 마는데, 이때 목장주는 높은 자리에서 망원경으로 이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이 마치 신이 지상의 피조물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앵글이 잡힌다.목장주의 규율을 어겨 양떼를 잃어버린 것으로 이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하산하고 일자리를 잃는다.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는 신의 규율을 어기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야기와 겹친다.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추방된 이들은 각자의 길로 돌아가 일반적인 가정을 이룬다. 4년 후 잭의 엽서를 받은 애니스는 이후 1년에 한번 꼴로 만나서 추방된 땅 에덴동산과도 같았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선까지 끌어올린 것은 침묵과 여백의 연출이며, 아름다운 자연 풍광으로 그들에게 에덴동산이 되어 주었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다. 침묵과 여백 사이로 잔잔한 감정들을 포진시키며 진행되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묵직하고 아프며 슬프게 달아오른다.광활한 대자연의 풍광이 작은 사진 속에 담기고, 잊혀진 소품의 등장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그 여운은 길고 오래도록 남아 잊혀지지 않는 한 편의 영화로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2021-06-07

광활한 풍경에 한 개의 점으로 남은 사람

‘노매드랜드’는 관람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읽힌다. 무너진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치유되는가의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사회의 중심에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밀려난 이들의 삶의 궤적으로 볼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무너진 이들의 떠도는 삶에 시각을 맞출 수도 있다. 시각차이에 따라 관람객의 시선은 풍경, 자유, 치유, 연민, 고독으로 이어진다. 아예 국내 개봉 포스터에는 “영원한 작별은 없어요” “낯선 길 위에서 만난 기적같은 위로’라고 시각을 고정시키기도 한다.이것은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그들이 길 위의 삶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이유만큼 다양한 시각과 그에 따른 시선이 머무르고 떠나는 길 위의 카라반처럼 얽힐 수 있는 영화다.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주(定住)한다. 집과 일터,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일정한 반경 속에 머무르며 살아간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다른 지역, 다른 도시, 다른 국가로 이동을 하지만 이는 더 나은 정주 조건을 위해서이다. 정주민의 위치에서 영화 ‘노매드랜드’에 나오는 유목민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시각은 ‘자유로움’이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를, 이동하고 머무름에 있어서 정주민보다 덜 제약적이며, 타인의 의지보다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이 더 넓은 이들.정주민이 바라보는 유목민의 삶은 부러움과 함께 정주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함께 한다. 분명히 유목민은 정주민보다 많은 자유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례해서 상대적인 불안감과 쉽게 예측되지 않는 행로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정주민은 ‘일탈’ 이후에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숙제를 남겨둔 존재다. 매주 찾아오는 주말과 휴일, 휴가가 끝나고 다가오는 ‘일상의 복귀’가 무겁게 짓누르는 이들이다. 유목민은 남겨둔 숙제를 떨쳐내고 현재, 곧 지금에 머무르는 존재들이다.‘정주’와 ‘유목’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선택이다. 영화 속에서의 시작은 정주하던 이가 어떻게 유목의 길로 들어섰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인 유목하던 이가 다시 정주하는 선택을 보여 주기도 한다. 선택의 이유는 있지만 논쟁하지 않는다.영화 속 대사 “집은 허상인가 아니면 마음의 안식처인가?”에서 정주와 유목을 가르는 상징적인 아이콘인 ‘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단정짓지 않는다. 집은 누군가에겐 허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안식처일 수도 있다.영화에 등장하는 밥 웰스(15년째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실존인물이며 유목민들의 캠프행사를 이끌고 있다)는 “내가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여기서 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자연과 사람들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답을 찾지 못했다면 이곳에서라도 답을 찾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선택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유목론(노마디즘)’을 통해 탈근대적 사유를 하고자 했던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주저 ‘천 개의 고원’에서는 ‘유목주의’를 저항과 창조의 양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미 굳어진 관계, 즉 정주의 삶이라는 관계를 뚫고 나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유목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유목은 정주처럼 고정된 관계와 질서를 거부하며 지배적 다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소수로서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영화 속에서 ‘펀’을 바라보는 정주민의 시선은 동정에 가깝다. 경제적인 문제와 불안정한 삶에 대한 애정과 우려의 표시다. 그 시선 속에서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동반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적어도 영화 속 유목민들은 어쩔 수 없이 중심에서 이탈된 비자발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다.영화의 시작은 ‘펀’의 짐을 창고에 둘 것과 작은 밴에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여정 속에서 물건들은 점점 줄어든다. ‘펀’의 여정은 비움의 과정이 된다. 영화 마지막엔 창고에 쟁여 두었던 살림살이들까지 나눠주고 그녀가 살았던 마을과 빈집을 둘러보고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정주민에서 시작해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다가 좀 더 깊은 차원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정물과도 같은 삶을 살다가 자연의 풍경처럼 머물더니 마침내 광활한 풍경에 한 개의 점으로 남길 각오한 외로운 순례자의 모습으로 남는다./영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5-17

살아 돌아온 DC 유니버스의 영웅들

2017년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코믹스를 원작으로 슈퍼히어로 세계관 구축을 위해 기존 히어로와 새롭게 등장하는 멤버들의 상견례가 이루어지는 자리다.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영웅들이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는, 이른바 세계관을 공유하는 자리로서의 본격적인 영화였다.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저스티스 리그’다.영화사 워너 브라더스는 DC 코믹스를 원작으로 일찍부터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을 필두로 실사영화를 제작해 왔으며, 히어로 간의 연계되는 영화 속 세계관을 구상해 왔었다. 그러나 마블 코믹스를 기반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하던 마블 스튜디오에 밀려 뒤처지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블 스튜디오는 코믹스에 등장하는 개별 히어로의 영화를 바탕으로 이들을 하나의 세계로 묶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세계관을 구축한다.워너 브라더스는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을 통해 통합 세계관의 불안한 출발을 알렸다. 이듬해 본격적인 궤도진입을 위해 제작되었던 ‘저스티스 리그’가 개연성 부족과 플롯의 산만함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어벤져스 시리즈’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취급되며 깔끔하게 안착하지 못한다.새로운 스타일의 슈퍼맨을 알렸던 ‘맨 오브 스틸’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을 중심으로 DC의 세계관 확장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가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감독직에서 중도 하차하면서 마블의 ‘어벤져스’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연출을 맡았던 조스 웨던 감독이 영화를 마무리 짓게 된다.DC와 마블은 코믹스를 기반으로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마블에 비해 DC는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고뇌하는 히어로,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영웅의 등장이 그러하다. DC의 세계관에 마블의 영화를 제작했던 감독이 긴급하게 투입되면서 2017년 ‘저스티스 리그’는 마블과 DC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색깔을 잃어 버리고 만다.이후 ‘저스티스 리그’에 출연한 주연 배우들이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를 공개해달라는 팬들의 요구를 지지하게 되면서 마침내 2021년 감독판으로 재개봉(?)하게 된다. ‘저스티스 리그’가 개봉한 지 4년 만에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라는 이름으로 공개됐다. 기준의 차이가 있겠지만 2017년 영화와 2021년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우선 가장 큰 차이점은 두 시간 남짓이던 영화가 4시간이 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두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거의 동일하지만 늘어난 시간만큼 개연성이 부족했던 새로운 캐릭터에게 배경 설명과 함께 캐릭터의 감정을 살리는 내용들로 채워지면서 가장 혹평을 받았던 부분을 보완했다. 또한 사연을 알 수 없었던 악당 스테픈 울프의 캐릭터 서사가 강화되면서 그의 행동에 개연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한층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한다.이뿐만 아니라 영화 비율이 1.85:1이었던 2017년작이 4:3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잘 사용되지 않는 비율로 수평보다는 수직적인 이미지로, 영화의 배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겠다.영화가 개봉한 극장판 이후에 감독판의 경우는 재편집의 영역에 머무른다. 극장판에서 잘려 나간 촬영 분량을 삽입해 영화에 살을 붙이거나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하거나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저스티스 리그’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단순히 감독판이라고 하기엔 전혀 다른 영역에 머무른다.2017년 영화를 2021년에 재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화를 관람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디렉터즈 컷’이 아니라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이며, 컬러풀 했던 영화 포스터가 무겁고 차분한 톤으로 만들어진 이유다. 같은 영화의 다른 버전이 아닌 유사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전혀 다른 영화로 봐달라는 강력한 시그널이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개봉으로 2017년 ‘저스티스 리그’는 가장 독특하게 잊혀지는 영화며 특이한 사례로 영화사에 남게 될 것 같다./영화기획사 엔진42 대표 김규형

2021-04-26

쓸쓸한 삶 속에서 발견된 찬란한 작품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연출한 존 말루프는 동네 벼룩시장 경매에서 수십만장의 필름이 들어있는 상자를 단돈 400달러가 채 안되는 돈으로 낙찰받는다. 그가 집필중이던 역사책에 쓸 시카고의 옛날 사진을 위해 낙찰 받은 물건이지만 사진을 스캔하면서 그가 원하던 사진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 사진의 촬영자였던 비비안 마이어를 구글로 검색해보지만 전혀 정보가 없다. 스캔했던 사진들을 사진 공유 사이트에 올려 좋은 반응들을 확인하고는 전시회를 추진한다. 그리고 그 전시는 흥행에 흥행을 거듭하며 전세계 순회전시까지 이어진다.여기까지는 천재적인 작가의 성공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주인공인 작가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 말루프 감독이 낙찰 받은 필름은 고인의 유품으로 단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사진작품이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어떤 삶을 살다 갔길래 이 많은 사진과 그녀의 자잘한 유품들을 남기고 떠났는가를 추적한다.‘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몇 가지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 질문은 감독이 직접적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행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기저에 깔린 것으로, 스스로 그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질문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몇 개의 질문은 직접적으로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기저에 깔린 묵직한 질문들은 쉽게 해답을 찾지 못하고 ‘비비안 마이어’의 생애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깔끔하게 풀리지 않고 과제로 남는다.1926년 미국 뉴욕 출신으로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보모로 생업을 삼고 사진을 찍으면서 미혼으로 평생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가 2009년 시카고에서 생을 마감한 비비안 마이어의 삶이 그녀의 작품과 함께 펼쳐진다. 신문 스크랩과 영수증, 기차표와 메모 등 그녀의 유품들을 정리하며 단서들을 이어 붙이며 비비안 마이어의 생을 따라간다.그 여정 속에서 ‘왜 그녀는 이토록 많은 사진들을 남겼는가’도 궁금하지만, ‘왜 그녀는 이토록 많은 사진들을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가’에 무게감이 실린다. 전자의 의문은 작가의식에 관한 고찰이다. 그녀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는 짧거나 길거나 그녀가 길렀던 아이들과 그녀를 기억하는 아이들의 부모들이다. 그들의 기억에 담겨있던 비비안 마이어는 친절하고 다정하거나, 괴팍하고 이기적이며, 심술궂은 사람이었고, 따뜻하거나 어두운 사람이며 즐거운 사람, 염세적인 사람 등으로 평가가 갈린다. 그녀의 삶 속에서 독특한 이력을 토대로 작품 속에 담긴 예술적 의미들을 더듬는다.이는 분명한 작가의식과 주제의식을 가지고서 촬영된 사진의 예술적 평가를 작가론과 함께 작품론으로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제 후자의 질문이었던 ‘왜 그녀는 이토록 많은 사진작품을 전혀 발표하지 않고 생을 마감했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질문은 작품으로 인한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느냐로 이어지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진행형으로 남는다.영화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라질뻔했던 한 명의 천재적인(?) 작가를 발견한 과정과 그녀의 삶을 추적하는 것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녀가 잠시 살기도 했고 먼 친척이 있는 프랑스의 시골 사진관에서 그녀의 사진을 관광상품으로 팔고 싶어했음을 확인한 것이 전부다. 이것으로 온전히 그녀가 작품 발표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평가하기엔 미흡하다.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녀의 작품 속에서 정작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현상을 만난다. 두 번째 의문이 확실하게 풀리지 않고서, 그녀의 삶에 대한 스토리와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간 신비로움이 더해지면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그녀는 만족하고 있는가.지금 그녀의 작품으로 인해 받는 보상은 온전히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감독도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부채의식을 어떻게든 덜고 싶었음을 읽을 수 있다.흥미롭고 감동적인 영화가 끝나고(2013년) 난 이후 벌어졌던 저작권 수익 상속에 관한 법적인 진행(2018년)을 보면서 감독도 풀지 못했던 현실의 숙제가 남아서 진행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감동과 함께 쓸쓸함과 서글픔이 밀려온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3-29

최고의 라스트신을 위해 촘촘히 쌓아 올린 시대상황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은 무너져 내린 물질적·정신적 기반을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를 덜 입은 영국은 승전국으로써의 지위와 함께 어느 곳보다 빠르게 일상의 복귀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제국주의의 유산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의 탄생을 알렸던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크게 위축됨 없이 나쁘지 않은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영국을 떠받들고 있었던 중심은 바로 중산층이었다.그러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영국 경제는 고비용, 저효율의 늪에 빠진다. 비효율적이고 경쟁력 없는 산업들을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재정적인 부담을 안게 된다. 집권당에 따라 다양한 처방들이 시행되지만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중산층은 엷어지면서 영국경제는 흔들리고 있었다.1979년 영국의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임명된다. 대처는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며 경제구조의 전환을 꿰하는 정책에 착수한다. 저비용 고효율을 내세우며 각 분야의 공기업을 민영화하며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시장지향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한다. 그리고 1981년 석탄산업의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23개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선언하며 대량해고를 예고한다.산업혁명에서부터 영국 산업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탄광산업이었다. 영국에서 탄광산업이 가진 사회적 중요성이 그만큼 컸으며 대대로 광부로 살아왔던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광부’라는 직업은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영국에서 탄광 노조는 사회적 영향력도 강해서 대처 이전에 총리(에드워드 히스)의 연임을 저지하기도 했었다.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재선에 성공한 대처는 그 여세를 몰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984년 탄광 산업의 구조조정에 돌입한다. 이에 노조는 총파업으로 맞선다.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이 시기의 영국 동북부에 위치한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탄광촌은 경찰 병력이 겹겹이 방어막을 치고 강력한 공권력으로 고립무원의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곳에서 열한 살 소년 빌리의 발레리노 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년의 성장을 감동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소년의 꿈이 자라났던 시대적 상황과 토양을 촘촘히 배치하고 있다. 파업이 진행될수록 연대의 고리는 느슨해지고 노동자의 삶은 궁핍해진다. 영화는 소년의 꿈을 향한 과정과 함께 아버지와 형을 통해 탄광 파업의 패배과정을 엮는다.1984년 시작된 탄광 노조의 파업은 1985년 패배한다. 1년 여의 과정 속에서 빌리는 그의 의지에 따라 가족들을 설득하고, “우리는 이미 끝났지만 빌리는 아니야. 빌리를 이렇게 끝나게 할 순 없어”라는 말과 함께 아들의 꿈을 위해 파업 대열을 이탈해 출근하는 버스에 오른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그의 신념을 접는 모습으로 당대의 아픔을 그린다.마침내 빌리는 로얄발레학교에 합격하고, 파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형은 무거운 마음으로 막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빌리는 검은 색의 탄광촌에서 흰색의 백조로 날았지만, 1980년대 중반의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빌리의 극적이고 감동적인 상황들만으로 감정을 이끌어 갔다면 오히려 그 여운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시장 논리에 의해 궁지로 내몰렸던 노동자들. 누군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 무너져가는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시대상황이 함께 했기에 영화의 감동은 더 깊고 크게 울린다.1980년 격렬하고 뜨거웠던 시대를 알게 된다면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백조가 되어 날아오르는 빌리의 모습이 아니라 아들의 모습을 보며 벅찬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김규형

2021-03-08

그들의 여름밤이 모두의 여름밤이 되는 시간

그들의 여름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의 여름밤에 가닿는다. 그들 각자의 어느 시절 여름밤이 우리 모두의 어느 한 때 여름밤으로 연결된다. 그해 여름, 더웠다는 것만을 빼고 특별한 일이 없었던 여름밤이 되살아나 화면 속에 펼쳐진다. 그것은 오래된 앨범을 펼쳤을 때, 잊고 있었던 추억과 이야기들이 되살아 오듯 세월의 먼지를 안고 다가온다.윤단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가족앨범을 펼쳤을 때의 그 느낌으로 진행된다. 예전 살던 집을 배경으로, 막내가 태어나 한창 걸음마를 뗄 때의 모습으로, 꽃다발을 안고 있는 누나의 졸업식에서, 아버지의 생일날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 위에서.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들 속에서, 그 시절 그때 각자의 표정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나름의 고민을 살포시 들춘다.얼마 되지 않은 세간을 승합차에 싣고 더부살이를 하러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집으로 옮겨 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소녀(옥주)와 소년(동주), 아버지와 혼자 살고 계신 할아버지 3대의 결합 속에 어머니가 부재한다. 이혼한 아버지와 상처한 할아버지 모두 아내의 존재가 없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의 염려를 핑계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은 고모가 이곳 이층집으로 피신하듯 들어온다. 고모 역시 누군가의 아내이지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니다.이러한 설정 속에서 펼쳐질 수난과 갈등, 화해의 과정을 짐작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갈등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활고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깊은 고난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 사춘기 옥주의 고민과 사건이 존재하지만 극적인 상황으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하나씩 간직하고 있었을 그 여름날의 정서를 끄집어 낸다.사는 집과 가족 환경, 자라온 배경이 다를지라도 어느 한때 여름의 가족들이 지나왔을 그 지점의 희노애락을 포착하여, 낡은 앨범을 들추듯 회상의 분위기로 이끈다. 여기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품들도 한몫을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세월을 이고 있는 것들. 오래된 선풍기와 괘종시계, 그 시절 필수 혼수품이었을 전축과 재봉틀, 넓지 않은 마당을 정성스레 가꾼 텃밭, 할아버지의 집은 그 세대가 보편적으로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을 살림들이 그때 그 자리에 차분히 자리잡는다.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과 사연이 있듯이, 할아버지의 이층집과 살림살이들이 모두 보편적인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된 소품들이 ‘우리의 여름밤’에 대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그래서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우리의 여름밤’이기도 하다.사건과 갈등, 고민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향하지 않는 것. 영화 속 등장인물은 한때 우리 가족들 누군가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구구절절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겐 없지만 그때 누군가에겐 있었을지 모르는, 혹은 우리도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살림살이의 모습.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등장인물과 풍경과 소품들이 모두 어울려 우리 모두의 어느 여름밤으로 조용히 내려 앉는다.영화는 큰 갈등없이 물흐르듯 흐른다. 그 시절 그때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지도 모를 이야기 속에서 한 여름밤 모기향 피어오르듯 기억들이 피어오른다. 영화 속 풍경 모든 것이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세월의 때를 묻히고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모든 소품들이 우리의 그때 그 모습이었다.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포함해 그 집에 가득 들어찬 모든 물건들이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 자잘한 갈등 속에 차분히 유년의 기억으로 가닿는 영화다. 대사와 설명 이전에, 언어로 전달하기 이전에 전달되는 그 무엇인가로 ‘남매의 여름밤’은 전달된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몸짓만 봐도 알’ 수 있는, 펼쳐지는 화면만으로 먼저 전달되는 공통적인 정서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영화의 시작과 늦은 밤 할아버지가 혼자서 전축을 듣는 장면과 엔딩에 신중현 작곡의 ‘미련’이 흐른다. 그 노래의 가사,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처럼 그 시절의 가족들과 그 속에서 일렁였던 갈등과 묵묵히 지켜봐왔을 우리집과 물건들이 “갈 수 없는 먼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한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2-08

시선과 손길로 전달되는 사랑이야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은 ‘흐름’에 관한 영화다. 시작하는 연인의 감정이 어떻게 전달돼 얽히는가에 관한 영화다. 한 순간 포착돼 잊혀지지 않는 감정이 무엇을 매개로 전달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특별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경험해 보았다면 누구나 겪었을 보편적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시작은 ‘시선’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있는 백화점에서, 무수한 사람들 사이로 단 한 사람에게 시선이 머문다. 서로의 시선을 확인한 두 사람에게 시간과 소리가 멈추고, 두 사람만의 공기가 흐른다. 그 공간 속에서 모든 감각은 예민해지고, 미세한 떨림조차 크게 울린다. 운명적인 사랑, 한 눈에 반한 사랑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영화는 ‘흐름’으로 표현하고 있다.이것은 언어 이전에 표현돼 전달되는 그 무엇이며, 대화없이 전달되는 감정의 총체적인 것이다. 누군가를 내 마음 안으로 들이는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던가. 이유가 정립되기 이전의 시선에 포착되어 눈빛으로 전달되는 그 무엇이다. 순간이며 영원인 사건이 ‘눈빛’ 하나로 펼쳐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 ‘눈빛’으로 전달된 감정은 ‘손길’로 진화한다. ‘눈빛’이 나와 당신의 불확실한 감정의 교환이었을 때, ‘손길’은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흐름의 신호로 작용한다. 장갑과 담배를 피우는 손과 피아노를 치는 손, 술 잔을 잡은 손과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시선에 풍성하며 미묘한 감정들을 실어 전달했듯이, 이들의 손동작에도 다양한 감정들이 흐르고 전달되기를 반복한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과 변곡점에서 언어보다 시선과 손길이 선행한다. 언어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그 이후의 확인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영화 ‘캐롤’의 첫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서 두 번의 중요한 질문(요청)이 나오는데 그 질문을 던진 이의 의지와 희망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손길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시선으로 전달된다. 두 번의 요청이 언어로 시작해 손길로 전달되고, 그에 대한 답변은 눈빛으로 전달되고, 눈빛으로 화답하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구구절절하지 않다. 섬세하게 전달되는 모든 것들을 올올이 포착해 전달하고 있다. 두 배우는 미장센 속에서 감정의 넓이보다는 깊이에 치중한다. 그 깊이가 심오하거나 난해한 깊이는 아니다. 공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모든 디테일들을 오롯이 전달하는 순간들을 감상자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는 영화다.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의 격량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은 감정의 애틋함이다. 눈으로 감상하는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가슴을 울린다.각자의 사랑이 어떻게 무엇으로 시작되었는가를 회상할 때, 그리고 그 기억이 무엇으로 어떻게 남아 있는가를 추억할 때,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의 집합체다. 상세한 이유가 사라지고 아련한 감정으로 남는 것의 모든 것들을 담았다.영화 ‘캐롤’에서 보여지는 사랑에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대사처럼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등장해 시작되는 사랑이다. 그 시작은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다.영화는 섬세한 것들이 유유히 흐르는 연속이다. 그 흐름이 감정의 파고를 만들고, 마지막을 장식한다. 어쩌면 격정적일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은 느리고 차분하게 흐른다. 선택의 순간에 두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소음은 소거되고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흔들리던 카메라는 고정되고 줌인한다. 이것은 ‘흐름’의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 도달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답고 숨막히는 엔딩이다.마지막에 밝히는 것이지만 영화 ‘캐롤’의 사랑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아닌 그녀와 그녀의 사랑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 방해가 되거나 낯설어질 이유가 되지 않는다.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이질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사랑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1-01-18

밤이 꿈꾸는 낮, 빛이 꿈꾸는 어둠

꿈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특성을 지닌다. 내가 꾼 꿈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있다. 꿈은 논리보다는 비논리에, 이성보다는 비이성에,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에 놓인다. 이러한 꿈을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가 예로부터 꾸준했었다.신화와 구전, 역사적 사실 속에서 꿈을 통한 앞날의 예측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던 시도였다.여기서 더 나아가 꿈을 좀 더 체계적이며 이성적인 영역으로 끌어 올려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그것이었다. 프로이트는 동명의 책에서 무의식의 작동체계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무의식의 기저를 찾고자 했다. 쉽게 말해 무의식(꿈)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찾고자 한 것이다.동양에서는 꿈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랐다. 꿈에 대한 이성적이거나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기 보다는 그것을 고유 영역에 두고자 했다. 또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 자체를 허물어 뜨리기도 한다.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꿈의 세계를 완전히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을 명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문학과 연극, 미술과 음악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작품들을 볼 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영화에 있어서도 꿈에 대한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꿈에 대한 대표적 영화를 꼽으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 몇 년 전 곤 사토시 감독이 꿈의 영역에 대해서 파고들었던 영화가 있었다. 바로 ‘파프리카’다. 영화 ‘인셉션’이 2010년 개봉을 했고, ‘파프리카’가 2006년 개봉을 했으니 4년이 앞선 셈이다.곤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를 먼저 접했던 이들에게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보면서 많은 비교를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두 영화는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꿈에 대한 설정에서부터, 타인의 꿈 속으로 잠입하는 내용과 몇몇의 장면은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영화 ‘파프리카’는 꿈과 현실의 이분화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인셉션’은 여기서 더 들어가 꿈의 다양한 층위들을 배열한다. 물론 그 배열된 층위들은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파프리카’가 두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면 ‘인셉션’은 최소 2개 이상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꿈 속의 꿈을 통해 현실 세계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인셉션’이라면, ‘파프리카’는 잠식된 무의식(꿈)이 현실에 발현되면서 꿈과 현실의 기반이 무너진 지점을 영화화 했다. 그렇기에 ‘파프리카’는 난해한 꿈의 형상화에 치중하고 있으며, 비논리적인 꿈의 시스템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그래서 장면은 곧잘 반복되고, 해결하고자 하는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여기에 대사들 마저 비논리적이니 꿈의 표현에 있어서는 ‘파프리카’가 훨씬 탁월한 부분을 지닌다.‘인셉션’은 가장 낮은 층위(가장 깊은 꿈 속의 꿈)에서 순차적으로 깨어남(킥)으로 사건을 단계적으로 해결한다. 흔히 크리스토퍼 놀란을 ‘레이어(층위)’를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그의 레이어는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공간의 나눔이다.‘인셉션’의 단계적 해결방식에 비해 ‘파프리카’의 해결 방식은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상황은 꿈과 현실이 뒤섞여 어느 지점이 꿈이며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꿈을 꾼다기보다 현실이 꿈에 의해 잠식당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꿈은 고유의 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에 침입한다. 영화의 스크린을 통해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웹사이트를 통해서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물며 밀려들기 시작한다. 분명히 우리는 꿈을 꾸었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 못하는 것과 같이 분명히 영화를 보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크리스터퍼 놀란 감독이 꿈의 웅장하고 체계적인 표현을 이루었다면, 곤 사토시 감독은 꿈의 난해함을 난해한 상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치 꿈에 대한 프로이트적인 접근 방식과 장자의 ‘호접지몽’과 같은 방식으로 각각의 영화가 표현되었다고 하겠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2-28

만약(If)과 아마도(Quizas)의 사랑이야기

영화의 제목이 주는 울림이 감상의 다양한 변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영연화’ 또한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을 쌓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무너짐을 기대하게 된다. 찬란함이 계속해서 유지됐다면 그것을 ‘순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영화 ‘화양연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나 사랑의 기준을 잡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과 끝, 과정의 세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영화다. 치열하거나 복잡하거나 고난과 시련이 없다. 아니 있었어도 생략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영화 속 사랑의 진행은 더디다. 완급의 조절에 있어서 모든 결정적 순간들은 한 순간 주춤한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아예 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진행의 단계들은 상세한 설명이나 대사없이 이루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다만 섬세한 디테일들이 빼곡히 그 간극을 메우며 진행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볼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젖어 감상하는 영화다.‘사랑’의 시작에 있어서 핵심은 ‘확인’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함으로써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사랑한다’는 확인의 장면이 없다. 직접적인 고백이 없기에 시작이 불분명하고 사랑의 진행률이 선명하지 않다. 이 또한 모호한 대사와 미세한 동작과 유려한 영화적 장치들로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화양연화’의 사랑은 ‘불륜’이다. 상대의 불륜에 나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개연성을 지니더라도 ‘도덕’의 기준을 들이댄다면 불편한 영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화양연화’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과연 불륜을 먼저 저지른 것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먼저 불륜을 저지른 것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었지만 그 반대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특정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정(假定)’을 한다. 이 가정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을 ‘연습’한다. 가정에 대한 연습이 어느 쪽이 사실이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륜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정’했을지도 모른다.‘화양연화’는 ‘if’에 대한 영화다. 선택과 확인의 기로에서 이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헤어지는 ‘연습’이 대표적인데, 사실과 연습이 뒤섞이면서 어느 것이 실제로 진행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고백을 했는지, 실제로 만나서 사랑을 했는지, 사랑하고 헤어진 것이 맞는지, 영화의 모든 결정들을 ‘만약(if)’으로 두어도 좋다.‘화양연화’중에서 인상에 남는 음악이 넷 킹 콜이 부른 노래 ‘Quizas, quizas, quizas’다.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사랑의 확인과 선택의 물음에 ‘아마도’라고 답한다. ‘아마도’는 확답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아마도’는 ‘만약(if)’을 선행시킨다.사랑의 결과는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밝혀진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버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시작과 헤어짐의 과정 중에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가와 이유가 중요하다.영화 마지막 남자는 앙코르와트에서 이 모든 사실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다. 추억에 대한 봉인이 아닌 선택과 이유에 대한 봉인이다. 선택과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항상 주춤하며 진행되고, 미세한 떨림이 간극을 메우기에 더 애틋한 영화가 된다.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상과 음악, 의상과 미술, 미장센까지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감정의 흐름을 흐트리지 않는 영화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화양연화’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2-07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 사라지는 시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이유를 말씀하지 않았다. ‘흑암’의 깊음 위에서 처음 빛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궁창(하늘) 위와 아래를 물로 나뉘고 하늘을 창조한다. 다시 물을 가르고 땅과 바다를 만들고 이름을 붙인다. 이제 이곳에 생명의 기운들이 돋아난다. 하루에 하나씩 천지를 창조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보기에 좋았더라’고 감탄을 이어간다.창세기 1장 1절 어느 곳에서도 창조의 당위성에 대한 어떠한 이유나 설명 없이 6일 동안 순차적으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어지’게 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을 취한다. 그 이유를 설명할 존재가 없었으며, 더욱이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들에게 그 이유를 알리지 않는다.여호와 하나님은 안식일 이후 천지 만물과 인간을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아담 이후에 창조된 생물들에게 태초의 인간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된다. 물론 그 권한 뒤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금기의 항목이 뒤따른다. 그 금기로 인해 인간은 원죄를 갖게 되고 낙원에서 추방된다. 존재의 이유를 알기 이전에 선과 악의 구분에 눈을 뜨게 됐으니, 이후 인류는 선과 악의 선상에서 길흉화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인류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제법 많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체계화 한다. 그 와중에 인간과 만물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지금도 에덴의 동쪽에 머물고 있다. 만약 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금기를 어기지 않았다면 신의 뜻에 따라 창조된 모든 것들과 인간의 존재 이유를 들을 수 있었을까.벨라 타르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은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다. 그러나 그 줄거리가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내러티브 너머에 있는 근원적 질문에 접근한다.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릴 때, 신이 창조한 그 역순으로 피조물은 소멸돼 간다.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창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듯이, 벨라 타르 감독 또한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며 만물의 존재가 소멸돼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인류가 세상만물과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도 전에 순차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놓인다. 6일간 창조했던 ‘보기에 좋았’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이 마지막 빛이 사라지며 ‘흑암’으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 남는다.146분짜리 흑백영화는 내레이션을 빼면 창세기 1장 정도 분량의 대사만 있다. 세상만물이 특이점을 향해 소멸되어 갈 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이유를 따지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때, 절망과 허무는 가장 늦게 창조되어 가장 늦게까지 소멸되지 않는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여기에 벨라 타르 감독이 안식일 이후에 창조된 인간을 천지창조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6일간의 시간에 배치한 이유가 될 것이다. 원죄를 안고 태어나 에덴의 동쪽에 머물던 인류는 ‘구원’에 의해 언젠가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의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천지창조의 이유를 알기도 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 속으로 잠겨 간다.‘소멸’이라고 했지만 ‘근원으로의 회귀’로 읽을 수도 있다. 예전에 ‘빛의 예술’이라는 사진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흔히 사진을 시간의 예술, 빛의 예술이라고 한다. 창세기에도 나와 있지만 빛은 어둠에서 나왔으니 그 근원은 어둠이 된다. 사진은 빛을 제어하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어둠을 제어하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에 동의한 적이 있다. 음악도 그렇다. 음악은 소리에서 나왔으며, 그 소리는 침묵에서 나왔다. 그래서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 아니라 침묵을 제어하는 예술이라는 것으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예술 세계를 이해했던 적도 있었다.5년여를 주기로 영화를 만들던 벨라 타르 감독은 ‘토리노의 말’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유려한 롱테이크와 물성 가득한 흑백영화를 남기고 그의 영화처럼 절망과 슬픔, 기괴하며 짙은 어둠을 던져주고 근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김규형

2020-11-16

완급을 가진 리듬, 즐겁고 환상적인 영상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화면에 배치된 인물과 소품들, 그들의 동선에까지 경쾌한 리듬을 지닌다. 이 리듬은 완급의 조절과 멈춤에서 기인한다. 멀리 빠져 있던 카메라는 서서히 들어가는가 싶더니 과감하게 점핑해서 클로즈업하거나 더 들어가는가 싶더니 멈춘다.완급을 가진 리듬에 음악이 깔린다. 이 음악은 그의 영화를 이끄는 속도를 따라 혹은 사건을 따라 배경이 되어 영화 속으로 녹아들게 만든다. 끊임없이 분위기를 이끄는 음악과 완급을 가진 리듬에 대사는 넘치지 않는다. 절제된 대사는 이야기를 이끄는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전달할뿐 구구절절하지 않다.이는 무성영화의 형식과 흡사하다. 모든 대사가 자막으로 전달되던 무성영화에서 대사는 함축적이며 간명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그 배경에 음악이 깔려 분위기를 전달하며 결말로 관객들을 이끌었다.편집은 완급을 가진 리듬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과정을 나눠주고 있으며, 친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관객이 이야기 밖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다. 영화 속 현재는 1980년대다. 그리고 1930년대와 1960년대 후반을 오간다. 이에 따라 화면 비율은 1.85:1, 2.40:1, 1.37:1을 오간다. 모두 해당 장면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에 주로 쓰이던 영화 화면 비율이다. 화면 비율만으로도 우리는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편집과 완급을 가진 영화의 속도와 경쾌한 음악으로 인해 영화가 시작되면 깔끔하게(?) 결말에 이른다. 깔끔하다는 것은 복잡한 전개구조와 갈등이 없으며, 복선과 암시로 인해 앞뒤의 사정을 되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모든 것들은 경쾌한 분위기를 살려주는 ‘스타카토’와 같다. ‘스타카토’는 음악의 형식을 나타내는 기호로 해당 음의 길이를 줄여 짧게 연주하라는 악상기호이다. ‘스타카토’로 인해 선율에 변화를 주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할 수 있다. 자칫 복잡해 질 수 있는 영화의 구성에 과감한 생략을, 멈추고 달리는 전개에 ‘스타카토’선율처럼 속도에 변화를 부여한다.여기에 영화의 색감은 화려하고 선명하다. 세트와 등장인물의 의상, 소품까지 선명한 색감들을 가지고 있어 아기자기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색감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는 1930년대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호텔 외관과 몇몇 장면은 정교한 미니어처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했다. 이 영화는 허구이지만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대에 몰아쳤던 광풍이 영화의 미술과 형식에 의해 아기자기하면서도 동화같은 느낌을 갖는다.웨스 앤더슨 영화의 특징인 좌우대칭은 여기서도 등장하는데, 사물과 배경, 등장인물의 등장과 퇴장 등은 좌우대칭을 배경으로 들고난다. 이는 등장인물과 영화의 모든 미장센이 철저히 계산된 감독의 의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이 모든 것들 속에서 기저를 이루는 정서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유머다.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과 대사, 정서들은 모두 참혹한 전쟁과 함께 사라진 낭만과 예술에 대한 애수로 가득하다. 호텔의 품격을 위해 내려지는 일련의 지시와 주인공 구스타브가 유지하는 일련의 고집들에서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잔인하다. 그것이 다른 영화에서 행해졌다면 잔인함이 극대화되고 관객은 그 장면이 내내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잔인한 장면이 그냥 흘러가 버린다. 거기엔 화려한 동화같은 미장센과 리듬을 가진 속도와 속도를 가진 배경음악과 함께 유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유머에도 리듬과 속도가 있다. 심각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위트. 멈추어 숨을 고르고 이어지는 잔인한 장면이 아닌 적절한 속도를 가지고 행해지는 잔인한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흐름들이 완급을 조절한다.현재와 과거, 과거에서 다시 더 먼 과거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해질 수 있지만 시대에 따른 화면구성과 톤, 이야기 전달을 위한 영상 구성의 면밀함이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밝고 경쾌한 음악과 환상적인 동화같은 배경이 시작되고, 우리는 적절한 리듬과 속도를 지닌 열차를 타고 종착역까지 지루할 틈없이 달려갈 것이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10-26

인간과 비인간, 진실과 거짓의 경계

1982년 개봉 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복제인간 리플리컨트가 등장한다. 영화 속 배경은 핵전쟁 이후 혼돈과 무질서로 휩싸인 2019년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적 특성과 인공지능을 탑재한 리플리컨트는 외형적으로 인간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우주식민지 개척을 위해 생산된 리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지구에 잠입한다. 이들이 인간의 사회 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이들을 색출해 제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직업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다. 생물학적 외형과 인간과 같은 혹은 그 보다 우수한 지적 체계를 가진 이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고전적인 분류형태를 벗어난다.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만들어진 이들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은 ‘기억’이다. 수명이 4년으로 제한된 이들에게 인간과 같은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식된 가짜 기억인가 아닌가를 통해 이들을 분류한다. 이 분류 방법을 통해 이들은 제거된다. 리플리컨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짊어져야할 노동의 무게와 처우의 개선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수명을 보장받기 위해 식민지 전투를 이탈해 지구로 잠입한 것이다. 이들이 제거되는 기준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과 인류에 끼치는 해악에 기준한 것이 아니라 오직 ‘기억’의 유무에 의해 분류되고 제거된다.2017년 개봉 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는 30년 후를 다룬다. 2019년 이후에도 새로운 버전의 순종적인 리플리컨트들이 제작되고, 구모델을 제거하기 위해 더 우수한 버전의 리플리컨트들이 블레이드 러너라는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30년이 지난 시간 동안에도 인간은 더욱 더 인간적이며 순종적인 리플리컨트들을 생산하고 제거하는 분류작업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이때도 분류기준은 ‘기억’이다. 그것이 비록 생산단계에서부터 이식된 기억일지라도 블레이드 러너는 그 기억의 차이를 통해 리플리컨트를 구분해 낸다.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식된 기억과 체험에 의해 축적된 기억의 차이가 용도를 다한 가전제품을 수거하듯이 제거될 수 있느냐의 질문이었다.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인간과 더욱 더 구분이 어려워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 와중에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이 발견되고 출산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제 리플리컨트는 인간에 의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단계에서 스스로가 종족을 생산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이 때에도 인간과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바로 ‘기억’이다. 이식된 기억인가 체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인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는 리플리컨트가 가진 기억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한 번 더 혼란스럽게 흔든다. 기억의 실체를 찾아 2019년 리플리컨트와 함께 사라졌던 블레이드 러너를 찾아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선다.198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던지고 남겨 뒀던 질문을 드니 빌뇌브 감독이 유려하게 이었다. 잇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한 발 더 들어가서 그곳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확장되고 깊어져 인간이라는 존재의 경계를 흐린다. 1982년 영화에서 성취했던 질문과 화려한 영상이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에서 더욱 더 압도한다. ‘나는 누구인가’ 만들어진 인간과 태어난 인간에서 만들고 태어난 인간이 뒤섞인다. 가짜 기억과 진짜 기억으로 분류되던 체계 속에서 진짜 기억임에도 자신의 기억이 아닌 만들어진 인간과, 태어 났음에도 만들어진 인간의 아이가 뒤섞인다.30년을 지나 만들어진 속편의 영화가 전편과 유기적으로 잘 엮이며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더욱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준은 희미해지고, 분류를 통해 제거할 것인가 조화롭게 살 것인가를 선택할 영화 속 미래가 기대와 함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2020-10-05

새로운 세상을 향한 구두끈을 묶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폴란드를 지나 독일로 진격하고 있었으며, 남쪽과 서쪽으로 연합군의 독일 입성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패망 직전의 독일. 패망 직전의 독일을 살아가고 있는 10살 짜리 소년의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을까.1945년 독일에서 살고 있는 소년의 세상은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자신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배우고 조금씩 더듬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오직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 길을 벗어난 모든 것들은 악이었으며, 그 길 위에서 꿈을 키우고 희망을 찾는 ‘영광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영광의 길 위에 그의 절친이자 우상인 히틀러(상상속의)가 함께 한다.그 길 위에서 갈등과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전달되는 전시상황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패전 직전의 모습들은 밝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소년의 세상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시대 모습 속에서 한가로이 날고 있는 파란 나비의 모습처럼 보인다.어둡고 암울한 상황이 밝고 유쾌하게 그려지고 공포와 불안이 유머로 치환된다.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상황들을 오직 10살짜리 소년만이 동화 속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시즘 속에서 태어나 전 생애를 파시즘 속에서 성장한 10살 짜리 소년에게 파시즘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며 그 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영화는 파고든다.엄마 로지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는 소년의 구두끈을 묶어주는 장면이 반복된다. 10살 짜리 소년이 당연히 가져야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전수할 수 없는 시대를 그리고 있는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사소하게 다가와 묵직하게 남는다.구두끈을 묶는다는 것은 소년이 성장하며 당연히 익혀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지식의 상징에서 출발해 삶과 죽음의 상황을 가르는 기준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른 상황의 출발점에서 다시 등장한다.갈등 없는 세상 속에서 오직 전달된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용기’의 함량만이 존재하는 소년의 동화같은 세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우연히 집에 몰래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를 발견하게 되면서 소년을 지탱해오던 세계관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머리에 뿔이 난 유대인 괴물의 대면에서 시시각각 패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독일의 상황 속에서 상상 속 히틀러와 나누던 대화들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과정들이 이어지면서 균열된 세계관에 비로소 객관적인 시선이 자리를 잡는다. 이제 소년 앞에는 오직 한 길만이 존재하던 상황에서 또 다른 길을 갈 것인가로 고민하게 만든다.영화 ‘조조 래빗’은 시대에 의해 만들어졌던 선입견을 깨는 과정의 영화다. 파시즘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소년의 선입견이 깨어지는 과정을 엉뚱하고 재기발랄하게 보여준다. 그동안 숱하게 영화화 되었던 홀로코스트에 관한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방향의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연합군과 유대인의 시선에서 독일 아이의 시선을 택한 것이 그것이다. 전쟁과 학살의 주제를 무겁고 우울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이전의 영화와 다르게 밝고 앙증맞으며, 웃음으로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소년의 세상에서 ‘용기’의 함량만이 문제가 되었던 인생에서 의문과 갈등이 자리잡는다. 괴물이며 악마였던 유대인 소녀와의 만남에서 절대적 인물이며 절대적 선의 경지에 있던 나치가 서서히 위치를 바꿔가기 시작한다.변화의 과정은 예측 가능하고, 소년의 각성과 성장은 기대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성긴 구성을 따라 예상했던 결과에 도달하고 있지만 감독의 시선이 과하지 않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웃음을 유발하거나 비극의 극적인 상황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적절한 시점에서 멈춘다.감독의 의도는 10살 소년이 세상에 대해서 가졌을 심각함의 정도만큼 머문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때의 상황에 단순하고 엉뚱한 시선으로 우리를 이끈다.조조는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유대인 소녀의 구두끈을 묶어준다.꺠어진 세계관에 또 다른 선택지가 놓인 길로 들어갔음을 상징한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09-07

거대한 풍경에 놓인 정물(사람)의 삶

‘2천년의 도시가 2년만에 잠겨 버린 곳’ 샨사는 차오르는 댐의 수위와 함께 떠나가고, 잠기고, 무너지는 과정을 겪는다.영화 속 모든 풍경은 잠긴 것과 잠길 예정인 것, 무너져 내리는 것들과 그 위에 새롭게 건설된 것들의 연속이다.이러한 풍경 속에서 사람은 댐의 수위에 따라 떠나가고 이동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어느 누구도 감격스러워 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물의 이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영화 속 산샤에 들러붙어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간은 댐의 수위가 차오르는 과정까지의 시간이며, 그 시간 속에서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긍정과 부정이 없으며, 기쁨과 분노가 모두 차오르며 흘러가는 물을 닮은 사람들.‘스틸 라이프’는 산샤댐 건설의 과정과 피해, 개발에 밀려 황폐해져가는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롭게 건설되는 것보다 무너지고 잠기는 것들이 더 빠른 속도를 내는 곳에서 과거에 묶여, 혹은 그 과거를 확인하기 위해 산샤를 찾거나 산샤에 머문다.산샤(三峽)로 한 남자가 스며든다. 16년 전 떠난 아내가 남긴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아내를 찾는다. 이미 그 주소는 수몰지역이 되었으며, 철거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휴일이면 아내를 찾아 나선다.소식이 끊긴지 2년 째 남편을 찾아 산샤로 찾아든 또 한 명의 여자. 그녀 역시 산샤의 풍경을 배경으로 남편을 찾아 산샤를 떠돈다.지아 장 커 감독의 영화 ‘스틸 라이프’는 산샤라는 공간, 하루 하루 모습을 달리하는 그곳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이 배경이 되고 은유가 되어 풍경 속에서 하루 하루를 버텨가는 인생들을 배치시킨다. 2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가 16년의 공사를 거쳐 단 2년만에 물에 잠겨 버린 곳으로 16년전 헤어진 아내를 찾아 2년 째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아 산샤를 찾아 온 것이다.샨샤가 변화를 거친 기간과 그곳으로 스며든 이들의 시간이 나란히 병치된다. 지폐속에 남은 산샤의 아름다웠던 풍경을 이야기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화면에 놓는다. 그 속에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이주했으며,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했던 장소가 어떻게 수몰되어갔는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아름다웠던 과거의 풍경과 아름다운 지금의 풍경이 교차된다. 자연이 만든 풍경과 인간이 만든 풍경이다.자연이 만든 풍경이 물 속에 잠겨 갈 때, 인간이 만든 풍경은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을 허무는 과정에 드러나는 폐허의 아름다움이며, 그 폐허 위에 장엄하게 건설된 다리와 댐의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 두 번의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아름다움 위에서 인간은 춤을 춘다.풍경이 주인공인 영화 속에서 그저 지금, 이 영화의 시간 속에서 제3기 수위가 차오르기 직전인 2기와 3기 사이의 한정된 시간이 보여주는 풍경과 그 풍경에 둘러붙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놓인다. 짧게 등장하고 퇴장하는 이들의 모든 사연은 깊이와 넓이가 있겠지만 카메라는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그렇게 영화는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몇 개의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그렇다고 불행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도 않다. 구구절절한 사연과 현재의 모습이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철거의 과정에 유적이 나와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이들과 철거 현장에서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이들과 그 위에 거대한 공사를 완성한 이들 모두가 산샤댐 수위에 맞춰 살아가는 삶이다. 거대한 공간(혹은 풍경)이 주인공인 영화 속에서 인간은 영화의 제목처럼 하나의 ‘정물’로 머문다.그 ‘정물’은 댐의 수위에 따라 위로 이동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갈 것이다. 영화 속 풍경과 정물 속에서 UFO가 하늘을 날고, 창밖으로 보이던 건물이 갑자기 로켓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을 목격하더라도 놀랍거나 당황스럽지 않다.그것은 영화 속 풍경(산샤)에 놓인 정물(사람)의 삶이 어떤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놀랍지 않은 모습으로, 역사가 수몰되고 새로운 건설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문화기획사 엔진 42 대표

2020-08-17

탁월한 형식·놀라운 기법의 제1차 세계대전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두 번의 전쟁이 모두 유럽에서 촉발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부딪쳤던 양대 진영의 성격은 전쟁의 내재적 원인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정체성이 달랐다.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하던 시기 잠재되었던 그들의 욕망이 부딪치면서 발발한다.이권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를 필두로 한 ‘협상국’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필두로 한 ‘동맹국’인 제국주의 진영이 맞서는 형국이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처리에 있지만, 패망한 국가의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전쟁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국’과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주축국’이 맞서는 형국이었다.전쟁의 원인과 진영의 양태뿐만 아니라 전쟁의 형태(?)도 달랐다. 단순하게 제1차 세계대전은 평행으로 그어진 두 선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점점이 분산되어 그 점에서 확산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다.19세기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의 양상이 땅 위에 국경을 긋는 작업이었듯이, 제1차 세계대전의 양상이 이와 흡사하다.1914년 시작된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착상태로 돌입한다. 협상국과 동맹국은 그들의 주둔지마다 횡으로 길게 참호를 파고 대치상태에 돌입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은 전선마다 횡으로 형성된 참호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뺏고 뺏기는 형태가 된다.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은 바로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의 형태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참호라는 횡(가로)의 형태에서 종(세로)을 향한 시도가 이어질 때 삶과 죽음이 갈리고, 전진과 후퇴의 반복이 이어진다.모든 병사는 횡의 형태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종의 형태에 돌입하는 순간, 머리라도 내미는 순간조차도 위험에 놓이고 죽음과 맞서게 되는 형태다.‘1917’은 초원에서 시작된다. 초원에 누워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풍경에서 시작해 횡으로 이동한다. 임무를 하달받은 두 병사는 횡을 이탈해 종으로 향한다. 임무를 위해 이동하는 모든 순간에 횡단의 형태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며, 전진을 위한 종단의 여정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위험에 처했다.이를 위해 샘 멘데스 감독은 ‘원 컨티뉴어스 숏’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원테이크와는 다르지만 최대한 길게 촬영한 롱테이크를 모아 편집점을 쉽게 눈치 채지 못하게 찍고 편집한 것이다.이 기법으로 인해 우리는 두 병사의 뒤에서 혹은 앞에서 함께 종과 횡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현장성도 현장성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형태에 대한 놀라운 기법의 사용이라고 하겠다.관객의 현장 동참이라는 1인칭 시점을 통해 생생한 체험과 단순하게 도식화시킨 전쟁 형태의 영화적 체험을 위한 기법이다.영화의 종반부 쉼없이 종단과 횡단했던 카메라는 고요히 숲속에 머문다. 나즈막히 들려오는 병사의 노랫소리와 함께 이제 횡을 지나 종의 지역으로 들어갈 이들의 숙연하면서도 죽음을 마주해야하는 두려움의 얼굴들을 훑는다.이 장면 이후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종단의 극단, 종단이라는 개념의 상징과도 같은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참호 속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신호에 따라 참호 밖으로 종으로 내달릴 때 유일한 한 명의 병사가 종의 행렬을 피해 횡으로 달린다. 달리며 부딪치고 쓰러지면서 거대한 종의 흐름을 비집고 횡의 족적을 남기며 임무를 성공한다.영화 ‘1917’은 참호로 대변되는 횡의 공간(가로, 삶, 휴식, 충전)과 참호 밖 종의 공간(세로, 죽음, 혼돈, 상처)의 대비를 통해 ‘임무(두 병사)’의 종단(전달 과정)을 그렸다고 하겠다.‘1917’을 통해 놀라운 형식 속에 전쟁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과 감동, 전율과 섬뜩함까지 담았다. 기술적으로도 내용적으로 탄탄한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만나게 될 것이다./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2020-07-27

고통과 영광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

전달되지 않은 화해와 용서는 유효한가. 70년의 세월 동안 온 몸에 새겨진 상처와 정신적 고통들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노쇄한 영화감독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의 매니저와 주치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32년 전 시사회에서 단 한 번 보았던 그의 영화를 다시 볼 기회를 가지면서 주연배우의 연기에 대해 그때와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된다.그 평가에서 시작해 오늘날 그를 만들었던 변곡점들을 되새긴다. 그 변곡점들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것들은 강렬하고 찬란했으며, 괴로웠으며 아팠던 것들이었다. 모두 ‘어디에서’ 왔는가에서 시작해 ‘어떻게’ 왔는가를 말한다.파편적으로 그의 과거와 조우하면서 그 기억들이 주는 양면성을 탐색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인 ‘고통’과 ‘영광’이다. 기억이 순차적으로 오지 않듯이 예고없이 치고 들어오는 회상들은 어떻게 왔는가, 즉 어떤 환경에서 떠올려졌는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진다.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고통과 영광이 층위를 만들고 쌓아올려진 층위의 결과물로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로 이야기하는 자전적 일대기가 되는 것이다.영화 속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며 영화 밖에서 영화를 끌어 온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전작들이 탄생하게 됐던 이유를 만나게 되고, 그 이유가 되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다. 삶은 어떻게 영화가 됐고, 영화는 어떻게 삶이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서 들고나던 기억은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상처가 영광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그 과정 속에서 묶여있던 과거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새롭게 작별을 고한다. 날카로웠던 집착은 무뎌지고 다듬어져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한다. 그의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파격과 수다는 이처럼 부드러워지고 깊어진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눈빛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영화 속 영화감독인 살바도르는 어린 시절 신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면서 지리를 알게 됐고,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게 되면서 해부학을 배웠다고 말한다. 영화를 통해 시야를 넓히게 됐으며, 영화를 통해 눈빛이 깊어지는 과정을 겪게 됐다.인생의 넓고 깊음이 오롯이 영화에서 기인했음을 읊고 있으며, 그 영화를 이뤘던 요소들이 그의 과거에서 시작되어 의미를 달리하며 재해석되고 새롭게 빛깔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죽음을 향해가는 삶에 대한 과거의 작별이 아니라, 중단되지 않는 삶에 있어서 과거의 기억들이 ‘재배치’되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유효하지 않던 화해와 용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직면하게 되면서 재배치 된다. 화해와 용서는 재배치를 통해 유효성을 획득하고, 고통과 영광은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 다시 출몰하여 재배치되느냐의 문제가 된다. 70년의 세월 동안 새겨진 상처와 고통, 그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어지던 영광은 시기와 자리를 바꿔가며 재평가되어 지고 있다. 영화 안과 밖을 넘나들던 이야기들은 픽션과 넌픽션의 경계를 허물고, 살바도르로 분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오늘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회고록이 아니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담은 영화가 된다.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순간 탄성과 함께 깨닫게 된다. 영화의 안과 밖,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관계 맺었음을. 삶은 취하고 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나를 배치하느냐의 문제인 것. 극단의 고통과 영광이 자리를 바꿔 앉을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20-07-06

속도와 리듬, 그리고 밀도의 영화를 감상하는 법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드라마는 단순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밀어붙이는 속도감으로 인해 스토리가 있었는지, 굳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의 되새김보다는 강렬했던 이미지들이 남아 그것들의 조합으로 남는다.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먼저 다가와 오랫동안 강렬하게 남는 영화다.영화가 시작되고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시작해 황량한 모래벌판을 내리 달린다. 모래 먼지와 모래 폭풍, 화염과 기괴한 모양의 자동차들이 질주하며 부딪치고 폭발한다. 그 사이로 인간들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질주한다. 거칠지만 아름답고, 기괴하지만 ‘리듬’을 가진다. 이 리듬이 강렬한 이유는 ‘속도’에 있다.맹렬한 속도와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무언가가 옥죄었던 모든 것을 풀어 헤치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속도는 자동차의 엔진과 함께 한다. 시동을 걸면 질주하고 시동을 끌 때 영화 속 모든 이들은 잠시 숨을 고르거나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속도를 가진 리듬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내연기관의 강도에 따라, 그 강도의 리듬을 타고 영화가 흘러간다. 뿐만 아니라 황폐한 미래의 지구에서 이들이 가늠하는 시간도 내연기관의 엔진이 식어가는 정도와 내연기관으로 달려가는 거리로 측정된다.단순하게 속도를 가진 리듬만으로 이 영화가 주는 액션을 표현하기에는 미흡하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강도를 더해가는 액션만으로 채워졌다면 지루한 자극만으로 이어진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황량한 모래 벌판의 배경은 단순한 풍경으로 지루함을 더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잡다한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액션에만 집중할 수 있는 훌륭한 선택이 되었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가 주는 쾌감과 속도감이 남다른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밀도’에 있다. ‘속도를 지닌 리듬’이 ‘밀도감’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드라마에 많지 않은 대사들. 등장인물들의 사연과 액션의 이유가 구구절절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불친절하거나 어설픈 구성으로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우선 내리 달리고, 달리면서 부딪치고 폭발하면서 단순한 드라마에 강렬한 이미지를 채워넣으며 시종일관 질주한다. 핵전쟁으로 인류 대부분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 속에서 오로지 “유일한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라는 맥스의 대사처럼, 살아남기 위해 질주하고 부딪치며 생존할 최소한의 액체를 쟁취하기 위한 속도, 리듬, 밀도가 가득한 향연이다. 결핍과 생략, 단순함의 선택이 효율성으로 자리잡는다. 이것이 액션을 쉼없이 나열하고 있지만 지루하지 않은 점이며, 그 많은 액션 중에서 단 한 순간도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래와 바람, 불과 쇳덩이로 이루어진 자동차, 그리고 살아남은 몇몇의 인류가 황량하고 거친 모래사막을 질주한다. 질주의 이유는 등장하는 모든 것들과 대비되는, 생존의 기본이 되는 액체를 얻기 위함이다. 황폐한 사막에 대비되는 물과 불을 만들고 쇳덩이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움직이는 기름과 기괴한 착취의 상징인 피와 모유를 통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건조함과 촉촉함의 강렬한 대비다. 다채로움과 속도감에 리듬을 더하고 거기에 밀도를 채워넣는다. 그리고 이것들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은 단순화시킨다. 등장하는 인물의 사연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며,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을 구체화시키지 않는다. 영화 속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멈춤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하다. 내연기관이 멈췄을 때 그들은 불안해 했고, 그들의 목표는 아득해진다. 반대로 속도 속에서 안정을 찾고, 속도의 정도에 따라 희망과 목표가 더 강렬해진다.‘시타델’이라는 물이 있고 식물이 자라는 지배와 착취의 세계에서 출발한 영화는 ‘녹색의 땅’이라는 생명과 자유의 땅으로 핸들을 돌린다. 그리고 이상의 도피처가 황폐해져 버렸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곳을 반환점으로 다시 출발점(시타델)으로 향한다. 강렬한 대비의 요소에 시작점에서 출발해 시작점에서 끝나는 순환과 반복의 영화다. 이는 희망없는 미래에 반복을 통한 문명의 단초를 놓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보다는 오직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유일한 목표를 강렬한 액션의 향연으로 목도하는 영화다.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는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20-06-15

다가올 질문의순례길에 나선 이의쓸쓸한 뒷모습

“자 어디로 갈까…. 네트는 광대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1995년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와 합체한 쿠사나기 소좌는 의체만을 남긴채 광활한 네트(일종의 네트워크) 속으로 사라진다. 작품 속 2029년의 일이다.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 인간의 생애는 타고난 육체의 노화와 함께 그 속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정보의 네트워크 접속으로 연명된다. 즉, 죽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사라질 뿐 네트로 사라졌던 정보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의체를 통해 돌아올지 모른다.부활과 재탄생이 아닌 등장과 퇴장의 삶(?)을 반복하는 세상. 전세계 각국의 정보망을 오가며 주가조작, 정보조작, 정치공작과 테러 등을 일삼던 해커 ‘인형사’를 제거하기 위해 임무에 뛰어들었던 공안9과 ‘공각기동대’의 사이보그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합체 후 광대한 네트 속으로 ‘퇴장’해 버린다.일부러 공각기동대에 체포된 인형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그를 생명체로 규정할 수 있으며, 경계없는 네트의 세상 속에서 정치적 망명은 어떻게 규정되어 질 수 있는가. 근원을 알 수 없는 정보의 바다에서 생성된 정보의 집합체를 ‘생명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2029년 쿠사나기 소좌의 퇴은 존재에 대한 물음과 생명체의 규정이라는 의문을 남긴채 끝을 맺었다.쿠사나기가 퇴장한 2032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영화 ‘이노센스’에서 형사 바토(대부분의 신체를 기계화한 사이보그)는 온전한 인간(?)인 도그사와 파트너를 이뤄 공안 9과에서 각종 사이버 테러와 로봇과 관련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신체의 대부분을 기계화한 바토가 인간이라는 증거는 뇌의 일부분과 3년 전 네트 속으로 사라진 쿠사나기에 대한 기억뿐이다.바토에게 고스트(영혼)가 없는 인형(로봇)이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배당되고, 인형은 “도와줘요, 도와줘요”라고 속삭이다가 자살을 택한다. 인형의 ‘자살’은 극한에 몰린 인간의 최종 의지의 표현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던진다. ‘공각기동대’에서 질문을 던지고 끝을 맺었던 영화는 ‘이노센스’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그 질문들이 향하는 곳은 한 지점이다. 가까운 미래,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정보’와 ‘영혼’ ‘기억’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에 탄생하게될 ‘존재’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이며, 삶과 죽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나는 나의 의지로 쌓아 올린 정보의 온전한 상태인가, 아니면 어느 순간 조작되고 오염된 정보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인간의 희미한 기억만을 간직한 사이보그 쿠사나기와 바토는 각각 두 편의 영화에서 최종적인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다다른다. 퇴장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퇴장 후 다시 등장할 것인가. 쿠사나기가 퇴장 후 무대에 남은 바토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말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묻는, 지옥 순례의 여행에 나서는 인물”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무대에 서게 된다.바토의 여정을 담은 ‘이노센스’는 ‘공각기동대’보다 화려하고 풍성하며 친절해졌다. ‘공각기동대’의 차갑고 냉정했던 분위기는 ‘이노센스’에서 ‘상실’과 퇴장하지 못한 자의 ‘쓸쓸함’이라는 감정을 담아 전개된다. 친절이라고 하지만 전작에 비해 ‘다소’일뿐 전개와 그 속에 담긴 질문들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바토, 잊지마! 당신이 네트에 접속할 때마다 내가 반드시 당신 곁에 있다는 걸” 잠시 의체를 빌려 등장했던 쿠사나기가 다시 퇴장하며 던진 말이다. ‘다소’ 위안과 상실을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전편에서부터 계속해서 이어졌던 질문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열쇠가 되지 못한다. 여전히 ‘지옥의 순례’는 퇴장하지 못하고 남은 자의 몫이고, 그 순례의 여정에 ‘그리움’만 더해질 뿐이다.인간의 뇌에 담긴 정보를 디지털화해 컴퓨터 저장파일처럼 다룰 수 있을 때, 영화처럼 ‘전뇌화 기술’을 통해 고스트의 과정이 가능한 시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리’울지 모른다. 내 안에 있는 이가, 나를 흔드는 누군가가 그대인지, 0과 1의 신호일 뿐인지. 퇴장하지 못한 이의 질문이 가득한 쓸쓸한 생이다.*영화 ‘이노센스’는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2020-05-25

포스(Force)와 함께한 42년의 대서사시

아주 먼 옛날 은하계 저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일단락 됐다. 1977년 시작돼 2019년까지 이어졌던 42년의 장대한 대서사시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3대에 걸쳐 오래전 언제인가 알 수 없는 은하계를 종횡무진했던, 과거로부터 전승돼왔던 이야기의 마무리였다.총 9편이 제작된 ‘스타워즈’시리즈는 1977년 오리지널 시리즈 3부작과 1999년부터 오리지널 시리즈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프리퀄 3부작을 선보인다. 그리고 디즈니가 루커스필름을 인수한 2015년에 오리지널 시리즈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시퀄 3부작을 시작해 ‘2019년 스타워즈 :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로 막을 내린다.42년의 시간은 인간의 나이로 중년을 맞는 시기다. 이 시간 동안 제다이와 시스, 제국과 반란군의 이항대립으로 전형적 신화의 연대기가 이어져왔다. 그 속에 성장의 과정과 출생의 비밀이 삽입되며 선과 악의 선택 기로에 선 주인공이 빠짐없이 등장했다.영화 ‘스타워즈’의 뼈대를 이루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조는 ‘포스’라는 힘의 근원에서 출발한다. 제다이와 시스가 스타워즈 세계의 대립항이지만 이들은 ‘포스’라는 하나의 힘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제다이는 은하의 균형과 평화를 위해 ‘라이트 사이드 포스’를, 시스는 포스의 어두운 면을 통해 스스로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다크 사이드 포스’를 사용한다.포스를 사용하는 제다이가 다크포스에 물들어 타락하면 ‘시스’, 다크제다이가 된다. 하나의 힘에서 나와 그 힘의 어느 면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은하계에서 그의 행보가 달라지고 행해야할 임무가 달라진다. 은하계의 평화를 위할 것인가 나의 욕망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평화와 열망의 선택에 의해 하나의 힘이었던 포스는 갈라진다.이렇게 볼 때 ‘포스’는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돼 전승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은하계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불안정한 것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의 위치가 달라진다. 제다이에서 시작해 시스로 전이되는 과정이 영화 ‘스타워즈’ 9부작의 시리즈마다 등장한다. 간단하게 영화 ‘스타워즈’의 42년은 포스에서 시작된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요약된다. 이 대결구도 속에서 ‘스타워즈’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출생의 비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선의 상징인 제다이가 악의 상징인 시스를 처단하는 과정 속에서 선과 악의 혈연관계가 드러나고 종국에 가서 그 꼬이고 꼬인 선과 악의 연대기가 혈연의 관계 속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늘 영화 ‘스타워즈’는 은하계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 영화 속에서 은하계는 그 일부며, 포스의 어느 쪽에서 서 있지 않은 대부분이 은하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속에서도 은하계는 넓고 넓은 다양한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 넓고 광대한 은하계에서 포스의 밝고 어두움과 상관없이 그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채로운 존재들이 잠깐씩 등장하곤 했었다. 제다이와 시스가 머물다 간 자리마다 황폐해지거나 폐허가 됐다. ‘평화’와 ‘욕망’이라는 명분을 위해서 그들의 기나긴 우주전쟁이 이어졌지만 광활한 은하계에서 그 사건은 자잘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3대에 걸친 연대기는 제다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푸른 광선검과 붉은 광선검의 싸움에서 푸른 광선검은 명맥을 유지하며 계승을 이어가게 됐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히어로와 빌런을 탄생시키며 시리즈를 확장하는 영화들의 행보가 아니더라도, 포스의 활용에서 기인한 불안정성이 늘 존재하기에 그 불안정성에서 탄생할 존재들이 언제든 출연할 것임을 알고 있다.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자아가 욕망을 어떻게 제어하는가에 따라서 포스의 밝음과 어둠이 존재하는한 ‘스타워즈’시리즈는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때 당신에게 ‘포스가 함께 하시길.’/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2020-04-27

일상의 재발견 한 편의 시(詩)가 되다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살고 있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 버스가 정해진 코스로 정해진 시간을 운행하듯 이 패터슨은 하루 하루 비슷한 일상의 행로를 걷는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 정해진 코스로 버스정류장을 돌며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퇴근 후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과 산책을 하고 동네 주점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반복된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듯이 패터슨의 일상은 버스의 정해진 행로와 같이 흘러간다. 버스의 승객에서부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까지 별다른 변화없이 흘러간다. 단조로운 반복과 사소한 변주만이 존재하는 일상 속에서 패터슨은 시를 쓴다. 졸린 눈을 부비며 양치질을 하는 순간이거나, 신호 대기 중이던 차안이거나, 일상적인 대화의 행간이거나, 포근한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서 잠들 때까지 뒤척이던 그 순간. 큰 변화없는 일상 속에서 작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해 반복과 변주를 섞으며 시를 완성해 간다. 예술이, 문학이 생의 격변과 경험, 상처가 표출되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큰 변화없는 잔잔한 일상 속에서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는가라는 기준을 달리해야 한다.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반복되는 운율을 가진 영화다. 패터슨 시에 살고 있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 패터슨 시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패터슨의 아내 로라가 디자인하는 반복적인 패턴들. 일주일의 생활 패턴이 반복되는 일상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의 운율에 자잘한 변화들이 담긴다. 그날의 날씨와 기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속에 낯선 사람들. 매일 아침 조금씩 다른 자세로 자고 있는 아내 로라의 모습들 속에 작지만 섬세한 일상의 변화들이 감지된다. 일상의 반복되는 운율 속에서 조금씩 달리하는 풍경이 섞여 한 편의 시가 된다. 애초에 짐 자무쉬의 영화에서는 대단하거나 변화무쌍한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시간과 공간의 반복과 변주의 연과 행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시가 존재할 뿐이다. 지루한 것은 지루한대로 나른한 것은 나른한대로, 우리의 하루가 시가 되는 순간을 깨닫게 된다.영화 ‘패터슨’은 한 편의 시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 반복되며 점층적으로 쌓아가는 행간과 자잘한 변화를 포착해 연을 나누는 것으로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한 편의 시를 읽은 느낌을 가진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은유와 직유로 표현되는 ‘생활의 재발견’이다.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던 패터슨의 일상은 금요일부터 조금씩 뒤틀어지기 시작한다. 버스가 고장나는가 하면, 매일 저녁 산책길에 들러 맥주 한 잔을 하던 바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토요일 아내와 영화 관람을 하고 돌아온 집에서 애완견이 그의 시작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일이 발생한다. 그의 축적된 생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일요일 패터슨이 주로 점심을 먹으며 시를 쓰는 공원에서 일본 시인을 만난다. 패터슨 시의 유명한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시인의 자취를 찾아 패터슨을 찾았다는 그는 “시로 숨을 쉰다”고 말하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한다. 그리고 “텅 빈 페이지는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며 자리를 떠난다.쌓고 다듬던 그의 작업들이 사라진 이후, 다시 되살아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일상의 감각들을 보호하는 그의 자세가 놀랍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시간은 행간이 되고, 하루는 연이 되어 완성된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다. 예술이 일상이 되는 삶이 아니라, 일상이 예술이 되는 과정의 영화다. 예술과 일상의 전환 스위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더디게 자라 눈부시게 반짝이는 ‘일상의 재발견’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김규형*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네이버와 구글플레이, IPTV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20-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