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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기까지

‘애프터 양’은 근원적인 슬픔을 내포한 영화다. 이 슬픔은 두 가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삶의 주기가 다름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함께 살고 있는 시기를 알 수 없는 미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일정한 성장과 성숙의 속도를 가진 인간에 비해 안드로이드의 탄생(생산)과 죽음(폐기)은 필요성에 의해 그 시기가 결정되며 인간과의 그것과는 다른 양태를 띤다.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과 생산되어 폐기되기까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안드로이드. 서로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일정한 삶의 주기를 살다가는 인간의 변화하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안드로이드는 성능에 따른 삶의 주기를 변화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아니 작동한다고 해야할까.시간의 상대성은 ‘필요에 의해 설정된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관계는 역전된다. 인간의 가족관계는 세월이라는 서열의 관계지만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성장과 쇠퇴의 주기를 가진 인간과 지속적인 성장의 능력을 가진 안드로이드와의 차이 속에서 내재된 불균형의 슬픔이 담겨 있다.제이크와 카이라 부부는 중국인 아이 미카를 입양한다. 미카를 위해 중국인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중국에서 생산된, 중국인의 정체성을 이식한 안드로이드 ‘양’을 집안에 들인다. 그리고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바로, 대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다. 집안의 가전제품이 작동을 멈출 때 그것을 수리하거나 새로운 제품으로 대체한다. 안도로이드 ‘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구매한 제품으로 시작해 대체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의 영역으로 들어선다.가전제품을 대체할 때 기준은 기능과 성능이다. 안드로이드의 경우 기능과 성능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난감함과 함께 결이 다른 슬픔이 다가온다. 양이 작동을 멈췄을 때 불편함과 함께 당혹스러웠던 감정(소멸된 기능)이 다른 방향으로 번져간다.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정식 경로로 구매하지 않았던 양의 수리를 위해 여러 업체를 전전하면서 제이크는 양의 중심에 감춰진 기억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시각화된 양의 기억 장치 속에 기록된 시간은 제이크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양이 거쳐왔던 관계들의 사소하면서 파편화된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저장된 기억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인식되었던 ‘기억을 통한 사유’의 과정이 안드로이드 양의 메모리에 자리잡고 있다. 제이크와 양의 대화 중에서 양은 “장소에 관해, 시간에 관해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두서없이 기록된 것과 같은 양의 기억은 ‘진짜 기억”에 대한 자유의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추억에 대한 자유의지와 중국인의 정체성이 이식된 프로그램의 발현일지도 모르지만 나비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안드로이드. 모두 주체성을 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그 의지는 인간이 그렇듯이 기억 속에 자리잡은 타인과의 관계, 인연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양은 이식된 프로그램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갖는 존재로 진화하며 인간다움의 질문을 던진다.인간인 제이크의 기억과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이 함께 놓인다. 제이크도 몰랐던 양의 기억 속에서 대체할 수 없는,제품이 아닌 이제는 떠나보내야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인간의 관계처럼 이제 추억을 떠올리며 슬픔을 비로소 슬픔을 감내해야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온전히 슬픔이 남은 자의 몫일 때, 안드로이드 양도 “그래서 슬픈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주)Engine42 대표

2022-10-24

그 시절, 그 감정, 그 공간으로 이끄는 영화

1789년 프랑스는 구체제인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그러나 절대왕정이 무너진 자리를 대체했던 정치체제는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고, 세 차례의 입헌 군주정과 짧은 두 번의 공화정, 두 번의 제정 등 80년 간 여러 정치체제를 겪는다.프랑스 혁명 이후 부침이 심했던 프랑스는 1870년에 들어와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후 1940년까지 약 70년간 안정적인 공화정 체제를 구축한다. 이 시기 프랑스 혁명 때 사용됐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가 국가이념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는다.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 제3공화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후 북유럽이 나치 독일에 차례로 함락 당하면서 전황은 시시각각 프랑스에 불리하게 전개되더니 마침내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속수무책으로 밀리게 된다. 1940년 6월 13일 수도 파리가 함락되자 당시 부총리였던 전쟁영웅 필리프 페탱이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게 된다. 패탱은 독일에 정전을 호소하며 프랑스 전체 국토의 절반 이상인 북프랑스가 나치에게 넘어가게 되고 절반이 되지 않는 나머지 남프랑스 지역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협상 끝에 굴욕적인 조건으로 정전협정을 맺는다. 페탱의 직속 부하였던 샤를 드골은 이에 반발해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라는 망명정부를 세운다.1940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의 국가이념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는 폐지되고, 새롭게 탄생한 ‘비시 정부’에 의해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한다.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페탱이 구상하던 새로운 프랑스 건설의 기운이 나치가 일으킨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일어난다. 분명한 것은 ‘비시 정부’는 프랑스 의회에 의해서 탄생한 합법적인 정부였다는 것이다. 비록 그 행보가 독일 나치에 협력하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당시 미국과 소련 등으로부터 프랑스의 합법 정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전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독일도 이를 용인하고 있었다.이 시기 카사블랑카는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최대 도시로 대서양에 면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전란을 피해 미국으로 가기 직전 마지막 기착지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항지였다. 비시 정부의 식민지 카사블랑카는 비시 정부의 경찰들과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와 이탈리아 경찰들과 반나치 활동가와 망명가, 밀수꾼과 스파이, 예술인, 지식인, 과학자들이 어우러져 탈출과 탄압, 자유와 억압, 희망과 좌절이 혼재된 곳이었다.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리스본으로 향하는 비자를 얻어 그곳을 떠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세월을 탕진하며 비자를 얻기 위해 그곳에 머물게 된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배경인 1941년 겨울의 카사블랑카가 그러했으며, 영화 속 주인공 릭이 운영하는 ‘릭의 카페 아메리카’ 같은 곳에서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밀담을 나누며 전황을 살피며 도시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다양한 사연과 목적, 거대한 전란 속에서 현실을 도피할 다양한 욕망이 존재하는 복합적인 감정의 공간이었으며, 거대한 이념과 세력이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채 마주하고 있는 경계지점이었을 카사블랑카. 드러낼 수 있는 것보다 감춰야하는 것들이, 기억해야할 것들보다 다가올 것들을 걱정하고 집중해야하는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해야하는 그 시대 실재했던 공간. 그 속에서 영화 ‘카사블랑카’는 과거를 선택한다.잊혀졌던 사랑과 재회하게 되고, 잊고자 했던 기억 속에서 회한과 아쉬움, 서로의 선택 속에 남아 있던 감정을 확인한다. 과거에 머물렀던 기억과 감정은 다시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우연히 릭의 손에 들어오게된 비자에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이며, 누가 남고 누가 떠날 것인가의 줄다리기가 펼쳐진다.멋진 대사의 향연과 잊을 수 없는 노래와 풍경, 그 풍경들을 집어삼키던 안개가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복합적인 감정의 공간이었던 카사블랑카로 이끈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9-26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것은 한 도시에 관한 영화다. 수 천년의 찬란한 유산과 숱한 이야기들을 쌓아 올린 거대하고 아름다운 도시 로마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로마의 역사와 유적, 그 속에 담긴 어떠한 이야기도 끄집어 내지 않는다. 지금 현재 로마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지중해를 중심으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로마는 통치를 위한 각종 제도를 만들고, 제국의 이름에 걸맞는 부를 형성하고 그 기반 위에 유적과 유물, 풍습을 만들어 나갔다. 어느 것은 거대했으며, 어느 것은 치밀했으며, 어느 것은 독창적이었으며, 어느 것은 복합적인 정서가 함유되었으며, 도덕적이며 문란했으며, 현학적이기도하고 심오하기도 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었다.영화 ‘그레이트 뷰티’는 기원 전부터 형성된 문명, 수 세기를 쌓아 온 모든 것들이 유산과 유적으로 남아 있는 로마를 무대로 당대와 고전, 성과 속, 예술과 속임수, 삶과 죽음 같은 이질적인 것들의 대비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기원 전 로마에서부터 제국을 건설한 시대를 거쳐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해 무너지고 남은 것들, 다시 복원된 것들의 도시 로마를 살았었고 살아가는 이들 모두에게 던져졌던 질문일지도 모른다.26살의 나이로 로마로와 65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젭의 생일 파티에는 로마 상위 1%의 셀러브리티로 가득하다. 40년 전 한 권의 소설로 화려하게 데뷔해 “소위 상류사회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르게 휩쓸려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왕이 되고 싶었던 젭은 그 꿈을 이루게 된다. 40년 전 마지막 책을 쓴 소설가에게 더 이상 소설을 써야할 이유보다 소유하고 누려야할 1%의 삶이 그곳에 있었다.아름답고 웅장하며 우아한 유적지의 로마. 그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던져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해 40년 간 글을 쓸 수 없었다는 젭의 인생은 욕망의 끝에서 만나는 권태와 허무에 가 닿는다. 그 지점에서 젭은 첫사랑의 부고 소식을 들은 후 스스로의 인생을 반추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가운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저 너머, 기억의 저 너머에 있었던 이의 부고로 인해 젭은 자신 앞에 바짝 다가와버린 죽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통해 삶을, 화려하고 극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일상 속에서 놓쳐버린 아름다움을 찾아간다.영화 초반 “삶은 모두 소설과 같은 허구이며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단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죽음은 삶의 이면이다”라는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소설 ‘밤 끝으로의 여행’을 인용한다. 권태로 찌들어가던 삶, 아니 죽음을 향해가던 인생에서 이면을 보게되는 과정,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깨달음. 이 깨달음은 젭의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하는 도구가 된다.수 천년을 쌓아 온 유적지와 그곳에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화려했거나 초라했으며, 권태로웠거나 치열했을 것이며, 허무했거나 환희에 찬 삶을 살다 갔을 것이다. 그중에 누군가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며, 그 질문에 따라 답을 찾는 여정에 나섰을 것이다.그리고 기록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글로써 누군가는 그림으로써, 누군가는 음악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했을 것이다.그것이 그때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진실’이었으며, 어떤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쌓아 올렸을 거대한 유산, 거대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도시 로마에서 젭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한 산책에 나선다.“저 너머엔 저 너머의 것이 있다. 나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다루지 않겠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시작된다. 결국 다 속임수다. 모든 게 속임수다”라는 젭의 대사처럼 삶과 죽음의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8-29

아홉살 시선으로 도시·골목·가족 추억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이다. 영국의 서쪽에 위치한 아일랜드 섬. 그 섬의 북쪽 영국령에 속하는 지역이 북아일랜드다.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아일랜드 공화국이다.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핸리 8세에 의해 아일랜드가 점령당하게 되면서 원주민과 이주민,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시작된다.가톨릭을 믿던 아이리쉬(아일랜드인)와 잉글랜드인에 의해 전파된 개신교 간의 갈등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다툼과 맞물려 오랫동안 아일랜드에 갈등을 일으키고 피바람을 불게 했다. 중세부터 시작된 잉글랜드의 지배는 수백년간 이어졌고,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봉기라 일컫는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이 시도되지만 봉기 주모자들은 영국군에 의해 진압된다. 이후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18년 12월에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인들은 중도 좌파연합인 신페인당에 압도적 승리를 몰아주었다.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지도부들은 대거 신페인당에 입당해 당선되었다. 아일랜드의 다수당이 된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한다.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 정부에 대항해 군대를 조직하고 영국에 맞선다. 1919년 1월 21일부터 시작된 전쟁은 1921년 7월 11일 휴전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남부 26개주를 자유국으로 인정한다는 앵글로-아이리쉬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그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아일랜드 공화국 북아일랜드 통합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아일랜드의 분단은 고착회된 상태로 남게된다.영연방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평화롭고 화려한 도시를 비추던 카메라는 담장을 넘으며 1969년의 벨파스트를 비춘다. 그곳에서 버디는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며 골목길을 누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행인들의 발자욱 소리, 아버지를 기다리던 공간이며,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던 일상의 공간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1969년 8월 15일 벨파스트에 사는 천주교도들이 참정권과 사회적 차별대우 등의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다.이 시위는 개신교도와 천주교도가 충돌하면서 유혈폭동으로 번져가게 된다. 영화 ‘벨파스트’는 그 시작점이 된 공간이며, 9살 주인공 버즈와 가족들, 친구들이 있던 일상의 공간이 변해가는 모습 속에서 펼쳐진다. 흑백의 영화는 소년과 그 소년을 둘러싼 공간들 속에서 펼쳐지는 불안한 상황을 철저하게 아홉살의 시선으로 담는다. 파괴된 일상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폭력의 기운들이 소년을 둘러싼 집과 골목, 도시로 번져간다. 하지만 그 불안의 무게는 어른들의 몫일뿐 버디의 일상은 달리진 풍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아홉살 소년에게 벨파스트의 골목은 그가 인식할 수 있었던 세계의 전부였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일상의 공유 공간이었다. 달라진 풍경의 무게를 알 수 없었던 버즈는 그의 세계가 흔들리며 균열이 가고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해야한다는 것에 저항한다. 그것은 딱 아홉살 소년이 이해할 수 있었고, 견뎌야했으며 기억하는 만큼의 몸부림이었다.아홉살 때 벨파스트를 떠났던 케네스 브래너 감독. 그의 기억이 남았던 그때의 감각이 그 시절의 소년이 되어 펼쳐진다. 감독의 감각 속에서 1969년의 벨파스트는‘무채색의 도시’였으며‘색깔로 기억되어지는 건 영화’였다고 한다.그래서 ‘벨파스트’는 흑백영화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몇몇 장면들은 컬러로 표현되는 순간들이 있다.영화 ‘벨파스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 어떻게 보편적인 추억으로 남는가를 보여준다. 한 공간의 추억이 한 도시의 추억이 되는, 역사 속에서 뜨거웠고 아팠던 도시의 추억을 회상하는 방식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고 하겠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8-08

서사시의 운율을 가진 매혹적인 영화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질문이 많다. 하나의 질문이 풀리기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어떤 질문은 반복되기도 한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이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모든 상황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나의 선택이 낳은 결과로 인해 다음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선택이 주어진다. 선택의 과정, 죽음에 이르는 여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택의 과정이기도 하다.크리스마스 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무 형상을 한 녹색 기사가 연회장에 나타나 자신의 목을 치는 가장 용맹한 자에게 명예와 재물을 주고 1년 후 똑같이 자신의 도끼날을 받을 것을 제안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아서왕의 조카인 가웨인이 도전에 응하고, 1년 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색 기사를 찾아 나선다. 숱한 무용담을 가진 원탁의 기사들과 달리 젊은 가웨인은 방탕한 생활 속에서 기사로서의 품위나 명예, 무용담 하나 없는 풋내기일 뿐이다.죽음을 건 게임에 응하게 되면서 가웨인은 기사들의 중심,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지만 1년 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죽음의 여정에 나선다. 녹색 기사를 만나기 위한 여정은 순조롭지 못하다. 유혹과 금기, 고난과 역경의 과정, 수수께끼같은 사건에 휩쓸리면서 성장해가는 한 청년의 성장기처럼 보인다.1년이라는 한시적인 기간 동안 명예와 재물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온전히 완성하는 것은 게임의 규칙인 나의 목을 내놔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다. 이 조건에 충실히 임했을 때 기사도의 중요한 덕목인 명예와 무용담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거래’의 균형이다. 주고 받는 거래의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였을 때, 그것이 기사의 명예와 도덕, 충성심으로 치환된다.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으로 녹색 기사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들은 ‘거래’를 기반으로 하고 있 다. 내가 받은 호의, 잠자리와 음식, 사냥감과 안식처 등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함으로해서 고난을 겪고, 곤경에 처하며 여정을 이탈해 다른 길로 빠져든다. 적절한 대가는 등가의 법칙에 따른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나의 만족이 아니라 상대의 만족이 동반될 때 거래는 성립되고, 다음 단계로 원만하게 나아갈 수 있다.영화는 이것의 어긋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반복한다. 누적된 불공정(?) 거래와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중첩될 때, 요행으로 비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아서왕의 여동생이며 가웨인의 어머니인 마법사 모건은 아들의 여정에 앞서 녹색 허리띠를 건넨다. 이 녹색 허리띠를 착용하면 어떠한 칼날과 도끼도 막아낼 수 있는 것으로 가웨인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소품이기도 하지만 약탈과 거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우여곡절 끝에 녹색 예배당에 도착한 가웨인은 녹색 허리띠를 착용하고 녹색 기사와 마주한다. 순순히 그의 목을 내어줄 것인가, 뒤돌아 나가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녹색 허리띠를 풀고 순순히 도끼날을 받을 것인가.영화는 14세기 영국의 작자 미상의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원작으로 한다. 서사시가 그러하듯 풍성한 은유와 상징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거기에 주고 받는 거래와 비겁함과 용맹함, 자연과 문명, 종교와 이교, 삶과 죽음의 이항대립들이 촘촘히 놓여 있다.극적인 플롯보다는 상징과 은유, 모호함이 가득한 영화다. 질문을 던지고 답하지 않는다. 한 예로 녹색 기사를 소환한 것은 가웨인의 어머니 모건이었다. 어머니가 왜 아들의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작했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시적인 흐름을 갖는다. 질문이 주어지지만 그 해답은 행간의 의미에서 찾아야하는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의 전개는 촘촘히 배치된 상징과 은유는 운율을 갖는다. 영화를 보고나면 가득했던 녹색의 이미지 사이에 펼쳐졌던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장면들이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7-11

한 여성이 ‘중세’시대에 신청한 결투의 시작

영화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중세 유럽, 흑사병이 일어난 지 30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간지점 프랑스 북부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백년전쟁은 중세시대 마지막에 걸친 전쟁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모든 것들의 기준, 즉 신앙적 기준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신앙적 기준이 정점에 달했다는 것은 완성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더 깊어지거나 강해졌다기보다는 형식적인 표현의 완고함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국가의 개념에 있어서 동양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였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기사임명식과 충성서약에 함유된 의미는 일종의 ‘계약관계’를 맺었다는 의식의 근엄한 형식이다. 중세유럽의 왕은 많은 귀족 중에 선출된 한 명으로 공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기도 했다. 각각의 귀족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이익이 침해될 때 함께 하겠다는 이익을 내포한 ‘계약’이었다. 중세유럽의 충성서약이 이익을 기반으로 할 때, 동양의 충성은 ‘명분의 서약’이 강했다. 동서양이 모두 순혈주의를 중시하였지만 동양의 명분이 ‘우리’를 내세울 때 유럽의 오로지 ‘가문’의 명분, 나의 이익이 중심에 있었다. 서약은 이익의 향방에 따라 번복되었고, 국가라는 대의적 명분보다는 나의 이익이라는 명분 속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중세 유럽의 전쟁 양상은 혈통과 땅의 소유주들간의 전쟁이었다. 동맹은 명분보다는 이익에 민감했고, 국가와 백성보다는 나의 영토, 나의 이익에 따라 대상을 바꾸었다. 이것이 중세에 있어서 동양보다 유럽의 전쟁 양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동양이 절대왕권이었던데 반해 유럽은 상하관계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으로 지배할 수 없는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왕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최고의 권력이었던 동양에 반해 유럽에서의 왕은 해결사이기보다는 중재자의 위치에 놓인 것이다. 일원화된 권력으로 최종 판단자로서의 위치에 있었던 왕과 중재자로써 종교재판과 세속재판이라는 이원화된 재판이 존재했던 것이 중세 유럽이었다.교회의 법으로 판결을 내렸던 종교재판과 왕의 권력으로 판결을 내렸던 세속재판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은 다시 신의 이름으로 운명에 의한 재판을 진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사건인 ‘신명재판(결투재판)’이다.재판의 결과에도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던 것이 중세유럽의 결투재판이었다. 이해가 충돌하는 당사자들이 정의로운 신에게 심판을 맡기자는 의미로 목숨을 건 결투를 통해 ‘신은 공정하다’는 믿음이 낳은 수단이었다.이 시대에 여자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이기 이전에 재산의 일부였다. 당연히 결혼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계약관계의 일종이었다. 영화 속에서 카루주의 부인이 자크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죄명은 ‘재산권 침해’였다. 종교재판과 세속재판에서도 사실을 밝히지 못하자 카루주는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결투재판을 신청한다. 명분에 여성의 의견과 존재는 무시되고, 그 운명마저 비이성적인 결투에 맡겨진다.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3부로 나눠서 반복한다. 각자의 관점에서 그들이 기억하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카루주와 자크의 관점에 카루주의 부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의 형식을 따른다.차이는 끝까지 진실의 모호성을 유지했던 ‘라쇼몽’에 반해 ‘라스트 듀얼’의 마지막 3부인 마르그르티의 시점이 시작되기 전 ‘진실(The Truth)’이라는 부제목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중세시대에서조차 그 잔인함과 비이성적인 제도로써 인식되었던 결투재판은 ‘마지막 결투’를 끝으로 더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네델란드의 미술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 후기의 잔인한 사법 처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그 변태적인 메스꺼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법 집행으로부터 중세인들이 느꼈던 둔감하면서도 동물같은 만족감, 시골 장터 같은 떠들썩한 여흥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라고 했다.리들리 스콧 감독은 ‘하나의 여흥과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자신의 영화는 남자들의 명예를 건 결투가 아니라 중세시대라는 세상과 여주인공인 마르그리트의 대결이라는 시대적 결투의 시작이라는 분명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6-13

사적인 복수에서 공적인 정의에 이르는 과정

영화 초반 배트맨의 첫 대사는 “나는 복수다”로 시작한다. 부모님이 피살된 뒤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의 악을 응징하는 동력으로 ‘복수’를 선택한다. 피살된 부모님을 눈앞에서 목격했던 소년은 훗날 본노에 가득찬 자경단이 되어 고담시의 밤거리를 누비며 어둠 속에서 나타나 악을 응징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사회정의구현보다는 ‘사적인 복수’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갈등한다. 일면 단순할 것 같았던 그의 행동들이 파고들수록 복잡하게 꼬인다. 고담시를 둘러싼 하나의 사건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해답은 멀어지고 모호한 지점으로 이어진다.배트맨이라는 이름의 자경단으로 활동한지 2년차. 영화 ‘더 배트맨’은 그간 다루지 않았던 배트맨의 초창기 활동을 다룬다. 첨단 무기를 장착하고 세련되고 날렵한 액션을 구사하던 배트맨이 아니라 투박하고 무겁다. 여기에 더해 분노와 두려움의 경계지점에서 주저하는 모습의 완성되지 않은 고독한 영웅을 만난다.브루스 웨인의 자경단 활동(배트맨)은 결과적으로는 정의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폭력적인 복수에 가깝다.반대로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했던 악당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배트맨과 대척점에 서있지만 출발점이 비슷하거나 목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른 히어로물보다 ‘배트맨’ 시리즈는 캐릭터에 집중하는 영화다. 캐릭터의 능력보다는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등장하는 악당의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영화다. 소외되거나 사회적 약자에 가까웠던 인물이 어떻게 선과 악의 경계지점을 넘나드는가를 보여준다.영화에 등장하는 악당 리들러의 추종자를 붙잡아 가면을 벗기며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나는 복수다”라고 대답한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정의와 복수가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에서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그간 ‘배트맨’시리즈는 배트맨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악당들이 더 선명했었다. 그러나 이번 ‘더 배트맨’에서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사건보다는 캐릭터에 집중하고 흔들리고 갈등하는 갈림길에서 어느 곳으로 향하는가에 방점이 놓여있다. 정체성과 내면의 문제, 완성형보다는 진행형의 시작점에 ‘더 배트맨’이 자리한다. 배트맨을 돕고 있는 고든 경위가 아직 청장이 되지 않았을 때이며, ‘배트맨’시리즈의 유명한 악당인 ‘펭귄’이 오스왈드로 불리던 시절이며, 셀리나가 캣우먼으로 불리기 이전의 시기. 각자의 시그니처 복장이 완성되기 이전의 영화다.그간 ‘배트맨’시리즈가 브루스 웨인의 유년기에서 본격적인 활약의 시기를 그렸다면 ‘더 배트맨’은 그 보다 훨씬 전인 아버지 토마스 웨인의 행적까지 들어간다. 현재의 고담시가 있기 이전, 현재의 악당이 등장하기 이전 이들의 출발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을 향하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규정지을지 모색한다. 전능함보다는 인간적인 고통과 갈등, 밝음 보다는 어둠의 영역에서 어설프고 나약한 인간으로서 밤거리의 그림자로 남은 한 사내의 성장기다. 동시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악당의 탄생기이기도 하다.3시간 가까운 영화는 이처럼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밑밥을 잔뜩 깔아 놓으며, 무겁고 어두우며 깊은 배트맨의 내면을 훑는다. “나는 복수다”라는 대사처럼 지극히 사적인 복수에서 출발해 어떻게 공적인 정의를 실현할 존재로 나아가느냐의 맥락을 이야기한다.그래서 영화는 제목에 ‘더(The)’가 붙었으며, 정의란 무엇이며, 영웅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액션은 통쾌하지 않고, 속도가 필요한 순간 멈칫한다. 기존에 ‘배트맨’시리즈가 보여주었던 액션의 전개와 다르다. 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도 연관되는데 배트맨의 대사 중에서 “공포는 도구일 뿐이다”처럼 속도와 타격감의 액션보다는 악을 응징하기 직전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으며 서서히 등장하는 그 순간의 공포를 도구로 액션의 기재가 작동한다.누군가에겐 실망스러운 배트맨이 될 것이며, 누군가에겐 모처럼 고유한 분위기의 ‘배트맨’의 탄생에 다음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주)Engine42 대표

2022-05-16

聖(성), 俗(속), 권력의 긴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영화 ‘베네데타’는 세 가지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성스러운 종교의 층위로 신의 증명에 대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17세기 중세의 속, 욕망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층위를 둘러싼 권력에 대한 것이다.주인공 베네데타는 이탈리아 벨라노 출신으로 8세 무렵에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페샤의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당시 수녀가 되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며, 상당한 금액의 지참금을 지불해야 수녀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거래가 시작된다. 가장 성스러운 길로 들어서는 초입에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 흥정이 오간다. “과일과 포도주를 25년간 수녀원에 전하도록 하겠다”는 말에 “지참금은 얼마나 내겠냐”는 수녀원장의 질문이 이어진다. 금액이 제시되고 적어도 얼마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정해진다. ‘매년 주님을 따르려는 소녀들’은 넘쳐나고 그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성스러운 영역이 아닌 지극히 세속적인 금전적 가치로 결정된다.신에게로 향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고, 그 지불금액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심이 결정되던 시기.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대자보를 내건지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공고했던 신의 세상, 신의 관념으로 살고자 했던 세상에 균열이 일어나며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이다.오랫동안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삶에 지침이 되었던 종교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중심으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고, 신성이라는 장막 속에서 성적 일탈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시기. 14세기 시작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던 시기에 영화가 위치한다.성스러움과 세속의 욕망, 권력의 세 가지 층위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 세 가지의 경계지점을 아슬아슬하게 오고가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성령의 증거와 증명, 세속의 욕망이 어떻게 종교적으로 해석되고 판단되는가. 성령으로 주어지는 권력의 달콤하고 위험한 줄타기를 주인공 베네데타를 통해 보여준다. 베네데타는 이 세 가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며, 성과 욕망과 권력의 일체를 오간다.종교가 타락해갈수록 반대급부로 종교는 형식적 엄숙을 더해가면서 높고 견고한 장벽을 구축한다. 엄격하고 잔인한 잣대로 가짜 성인을 가려내는데 힘을 기울였던 시대에 베네데타를 둘러싼 실체는 쉽게 판단되지 않는다. ‘어쩌면’이라는 반문 속에서 성녀인지 악녀인지는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두 시간이 넘는 동안 진위는 숨바꼭질을 한다.베네데타의 실체에 대한 암시는 기저에 깔고 있지만 영화는 그것의 중요성보다는 그것을 통한 한 시대의 논란이 되었던 사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다른 지점에 있음을 말한다. 성녀인가 사기꾼인가. 이 문제를 통해 한 시대를 지배했던 문제점들을 드러내며 그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새로이 돋아나는 기운에 대해서 말한다.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베네데타를 통해 성과 욕망, 권력의 자리를 오가며 실체에 대한 판단 근거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고 있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모호한 지점으로 이끌고 간다.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두 시간 동안 이 영화를 끌고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지만 어느 쪽을 결정짓고 영화를 보더라도 결말에 이르러 남게되는 감정은 동일할 것이다.수백년 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과 종교적 타락의 끝지점에서 견고했던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것들의 원인이 대한 진단과 사례를 종교재판을 통해 보여준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종교재판은 낱낱의 것들을 기록하고 상세하게 묘사해 기록에 남겼다.그 기록을 바탕으로 영화는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수치심이란 없다”라는 당당함으로 나아간다. 신의 믿음을 빙자한 부조리가 만연하던 시대에 신의 이름으로 육체적 관계를 통해 ‘사랑’을 알게됐다는 베네데타의 대사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인가. 17세기 페샤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실화를 기록한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4-25

자신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이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 절망을 극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실’의 깊이에 대해서 탐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상실’은 거의 모든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중심이다. 부재에서 오는 혹은 결핍에서 오는 상실은 고독을 동반한다. 고독하게 상실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방황하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또는 고독과 상실을 잊기 위해서 특정한 것에 몰입한다. 몰입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도 같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영화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같은 지점에서 같은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과정과 결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하루키의 소설이 현상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데 반해 류스케 감독은 질문에 이어 해소된 결과로 향한다. 소설 속 행간의 의미를 되살리고 이유를 유추하며 질문을 반복한다.‘상실’의 근원으로 들어가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여기까지라면 류스케의 영화는 그 이유를 개인의 태도에서 답을 찾는다. 20년 전 4살된 딸을 폐렴으로 잃었던 연극 연출가이며 배우인 가후쿠는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되는 영화는 프롤로그에 40여 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40여 분의 프롤로그는 상실과 죄책감, 두려움의 과거다. 이후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며 2년 후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떠나왔다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애써 외면해 온 과거의 진실이 다시 되살아 온다. 그냥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해결될 줄 알았던 날카로운 진실이 마음을 핥퀸다.프롤로그에서 남았던 후회의 원인은 상처가 된다.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직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가후쿠는 또 다른 상실이 두려워 현상유지를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했던 그의 ‘태도’에 대한 반성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준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연극무대로 영화 속 연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시작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로 끝난다.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 가후쿠가 ‘바냐 아저씨’를 위해 배우들 오디션을 보고 완성해서 무대에 올리는 과정이다. 연극 무대에서 시작된 영화는 연극 무대에서 끝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심 공간은 영화의 제목처럼 자동차 내부다. 연극 무대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해가는 열린 공간이라면 자동차 안은 온전히 자신과 마주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히로시마 예술문화극장에서 기획한 연극제의 연출직을 제안받은 가후쿠는 상주 예술가는 반드시 운전기사를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내키지 않았지만 주최 측이 추천한 운전사 미사키에게 운전대를 넘긴다. 가후쿠의 사적인 공간에 동승하게 된 미사키. 이후 영화는 연극 무대와 자동차 내부를 오간다. 연극 무대에 누가 어느 배역으로 오르는가의 문제와 가후쿠의 자동차에 어느 좌석에 누가 동승하게 되는가에 따라 ‘상실’의 두려움을 회피했던 개인의 태도라는 문제에 접근해 간다.연습이 거듭되면서 배우는 맡은 배역의 대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 너머의 있는 의미들을 좇는다. 자동차 안에서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이어진 사건의 진실과 마주해야하는 고통의 시간이 흐른다. 그 고통은 서서히 자동차 좌석의 자리를 옮겨 다니며 다가와서 깊고 아프게 마주해야할 용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고통을 직시할 때 상처는 아물고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대사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줄 알았던 것들에게 ‘제대로’ 안부를 묻고 스스로의 내면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세세한 장면들로 전달하고 있다. 아픔을 딛고, 봉인된 상처 뒤에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가야하고,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견뎌야 하는 삶이 연속될 것이라 말한다.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할지라도 ‘제대로’ 마주해야하는 태도를 통해 삶은 이어지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주)Engine42 대표

2022-04-04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로 남는 영화

어느 시점부터인가 ‘한 편의 영화’ 안에서 갖춰야 할 이야기의 완결을 거부하는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길어지더니 급기야 드라마처럼 시리즈가 이어지고, 회차를 이어가며 상영되는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개별 영화들이 공동의 세계관을 형성하더니 그 속에서 연관성을 가지고 간섭하면서 동일 세계관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전작의 영화들을 다시 봐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영화의 제작방식과 더불어 관람이라는 소비 방식에 있어서도 변화가 이어지면서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영화관람은 영화관’에서라는 등식에 균열이 가고 있다.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over-the-top·인터넷을 통해 방송 프로그램, 영화 등의 각종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서비스가 활발해지면서 제작에 있어서 전통적인 영화 제작사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각종 플랫폼을 통해 영화관과 동시개봉을 시작하면서 영화를 소비함에 있어서 장소와 시간에 더이상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제한된 상영시간과 영화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한 편의 영화를 제공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가 존재할 여지가 적었다. 그래서 영화의 흥행은 얼마나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는가가 중요해지고, 그 속에서 치열한 계산이 이루어지곤 했다. 단관극장에서 멀티플렉스관이 등장하면서 더욱 더 촉발된다.하지만 지금은, 가장 작게는 휴대폰에서부터 책상 위 컴퓨터, 거실의 TV까지 다양한 단말기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시대 속에서 기존의 방식과 새로운 소비형태가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물론 대형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영화의 감동은 그에 걸맞는 시스템에서 관람할 때 온전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정의 TV는 점차적으로 대형화되고, 그에 따른 음향과 각종 기기들도 다 함께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제 한 편의 영화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어떤 환경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의 선택지가 추가된 것이다.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은 위의 다층적인 변화를 복합적으로 드러내며 상영된 영화다. ‘듄’은 촬영부터 아이맥스(IMAX) 상영을 위해 아이맥스 인증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했다. 감독의 창작 의도를 고스란히 느끼기 위해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관람해야하는 이유다.“‘듄’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은 마치 욕조에서 스피드 보트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나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 영화는 대형 스크린의 경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영국의 영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영화관에 대한 우려보다는 다양한 관람방식에 대한 분명한 선택지를 던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프랭크 허버트의 SF 대하소설 ‘듄’은 전 세계적으로 2천만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영화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마침내 1984년에 데이빗 린치 감독의 ‘사구, Dune’이라는 제목으로 우여곡절 끝에 영화화 되었지만 감독조차 잊고 싶어하는 처참한 실패로 남는다.소설 ‘듄’은 방대하고도 낯선 개념들이 가득하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의 경우 총 6권으로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은 1권의 절반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의 전반부가 그러하듯 영화는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세계관을 구축하고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한 편의 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완결된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듄’은 파트1로 다음 이야기를 펼치기 위한 기초를 다지는데 중점을 둔다. 방대한 내용을 느린 속도로 쌓아 올린다. 그 속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원작을 어떻게 그려나갈 것이라는 단호하고 분명한 이미지에 몰입한다.감독은 빛과 어둠, 색감과 사운드와 풍경 속 질감을 섬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빠른 속도를 담보하는 통쾌함과 박진감보다 장엄하고 우아하며 느슨한 속도를 취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될 즈음 영화는 끝난다. 그래서 영화 ‘듄’은 관람 후 뚜렷한 이야기가 남기 보다는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가 남는다. 이제 ‘듄’ 파트2에서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라는 기초에 본격적으로 쏟아 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것을 알고 있는지 영화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대사로 끝을 맺는다./(주)Engine42 대표

2022-03-07

풍경과 소리, 오감 밀도 가득한 서부극

영화 장르 중에서 특정 지역과 시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서부극’이다. 공간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특정 시대가 주류를 이루며 형성된 장르다. 전초가 있고, 그 전초를 기반으로 유사한 패턴의 이야기와 구조가 반복되면서 전형이 만들어진다. 패턴과 전형은 무수한 작품들을 쏟아내면서 장르로 굳어진다. 이후 서부극이 시들해지면서 공간과 시대를 이탈한 변주된 작품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스타일과 내용을 함유한 ‘서부극’이 만들어진다. 장르는 변용을 통해 진화하며 명맥을 잇는다.서부극은 그리 길지 않은 미국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이다. 특정한 국가의 시대적·공간적 이야기가 세계적인 장르로 형성된 것이다. 그간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던 서부극의 시대적 배경은 1850년대 골드러시와 미 대륙 횡단 철도 개통, 1860년대 벌어진 남북전쟁 전후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악당과 보안관, 인디언, 역마차, 총격씬, 황량한 사막을 질주하며 말을 타고 달리는 추격씬, 현상금과 금을 찾는 이들이 클리셰(Cliche·전형적, 의례적 의미)로 각인되었다. 이 속에 정의와 복수, 대결의 다양한 내용들이 자리잡는다.서부극은 공간적 장르다. 그 시대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사실에 기반하거나 상상을 동원하여 엮는다. 공간적 해석 속에서 그 공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전형이 형성되었으며, 액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강도’의 수위를 조절하여 왔다.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공간을 약간 비껴서 ‘강도’를 낮춰버린 서부극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운다. 서부극이면서도 서부극의 전형이 등장하지 않는다. 먼저, ‘퍼스트 카우’의 공간은 다르다. 18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간의 서부극이 다루었던 시대적 배경 이전이며, 오리건주라는 북서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직은 공격적인 서부 개척이 일어나기 이전이며, 백인들의 숫자보다 인디언의 숫자가 많은 곳. 모뉴먼트 밸리가 등장하는 황량한 서부가 아니라 춥고 습한 울창한 숲이 배경이 되며, 끼니를 걱정하는 초라한 행색의 유랑노동자가 등장한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비껴선 공간에서 기존 서부극에서 다루지 않았던 다른 것으로 공간을 채운다. 식량을 얻기 위해 버섯을 따는 모습과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낙엽을 밟는 소리와 새들과 풀벌레 소리 등 미세한 소리와 장면으로 채운다.‘퍼스트 카우’의 공간은 익히 보아왔던 서부극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미세한 소리와 풍경에 집중한다. 대사는 절제되었으며 톤을 높이지 않는다. 정의와 복수, 의리의 내용을 제거하고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우정과 연대가 있다. 절제된 대사는 날카롭지 않고 따뜻하다. 궁핍한 삶에 끼니를 걱정할지라도 사소한 대화의 와중에서도 진솔한 눈빛이 오간다.느슨할 것 같지만 긴장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긴장은 기존의 서부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긴장은 차분하게 상승되었다가 조용히 내려 앉는다. 결을 달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의 프롤로그에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다.영화가 시작되면 현재의 오리건주 컬럼비아 강을 타고 들어오는 화물선을 천천히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러다가 개와 산책을 하던 한 여성이 강변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두 구의 해골을 발견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앞에 있는 나무를 쳐다보니 새들이 지저귀고 여성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우며 200년 전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해골을 발견한 여성의 상상일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시작된 장면과 내용은 영화의 결말과 내용이 맞닿아 있지만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기존의 공간을 멀리 벗어나 있는 이 영화에 감독은 그때 그 시절 당연히 존재했었을 것들의 일상으로 채운다. 바느질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성껏 빵을 굽는 궁색한 일상의 모습. 작은 장면들, 미세한 소리와 잔잔한 전개 속에서 펼쳐지는 긴장감이 서정시와도 같은 서부영화로 등장했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2-02-14

남을 것인가, 귀환할 것인가

“우주선 시각 19:00에 나는 발사 플랫폼으로 갔다. 발사관 입구의 승무원들이 옆으로 비켜선 가운데 좁은 계단을 내려가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과학소설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솔라리스’의 맨 첫 단락이다. 매년 이맘때면 이 책을 읽는다. 연말에 시작해 그해 마지막에 끝나던가, 연초를 넘기기도 하면서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습관이 되었다. 많은 책 중에서 왜 하필 이 책이며, 이 기간동안 반복적으로 읽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연말과 연초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머나 먼 미지의 행성으로 출발한다는 묘한 긴장감이 서린다.한 해를 돌이켜보거나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 시기,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행성 솔라리스로 간다는 것.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가해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풀리지 않는 사건을 끌어안고 새해를 맞는다. 연말과 연초, 마지막 날과 첫 날, 정리와 시작이며, 반성과 약속의 의미가 가득한 시기를 모호한 미지의 가상 세계 속에서 보내다 돌아오는 반복된 습관이다.소설 속 주인공 켈빈은 솔라리스라는 외계 행성의 탐사기지로 파견된다. 켈빈이 태어나기 100년 전. 서로 마주보고 회전하는 두 개의 태양을 공전하는 독특한 행성을 발견한다. 이후 행성 탐사에 이어 행성과의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하던 인간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다.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도 유사한 줄거리를 가진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전개와 내용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길을 걷는다. 소설은 과연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영화는 애초부터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비록 원작의 내용을 가지고 왔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같은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데 함의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소설과 영화 모두 ‘접촉’에서 시작된다. 100년 전 발견된 독특한 행성에 대한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한 이후 불가해한 상황이 펼쳐진다. 차이가 있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영화 시작 단계에서 이미 원작에는 없는 존재론적 물음을 시작한다.소설은 인간이 규정한 생명체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존재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사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소설 ‘솔라리스’는 인간적 사고의 한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우리는 우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죽었던 사람이 재구성되어 등장하게 되면서 겪게되는 감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졌던 죽은 사람이 물질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나타났을 때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단계의 과정이 펼쳐진다. 과학이라는 합리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인 영역 속에서 그것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마주했을 때, 과학은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동요한다.절대적 진리가 무너지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의 해결책으로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깊고도 지루한 철학적 사고를 영화 ‘솔라리스’ 속에서 반복한다.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존재와의 ‘접촉’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미지의 존재는 우리의 어떤 기억으로 오는가’에 대한 전개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소설과 영화는 갈래를 달리하며 우주를 대상으로 한 ‘인식론’과 ‘정체성’에 대한 각자의 길을 걷는다.비록 존재의 실체에 대한 결말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소설과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집요하고 끌고가면서 나라면 ‘솔라리스에 남을 것인가 지구로 귀환할 것인가’라는 선택에 놓이게 만든다. 이것이 매년 소설 ‘솔라리스’를 읽고, 가끔씩 영화 ‘솔라리스’를 다시 보는 이유다. /(주)Engine42 대표

2022-01-10

19세기, 피아노가 있던 풍경

영화 ‘피아노’의 전개는 섬세하다. 그 섬세함은 순전히 배우들의 연기력에서 기인한다. 배경은 생경하고 아름다우며, 진행은 겉잡을 수 없이 전개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빼곡히 화면을 채우고 있다. 여기에 시대적 배경과 장소, 피아노라는 사물과 주인공 ‘에이다’의 인물 설정들이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영화는 하나의 층위로 보아도 무방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다양한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쉽게 짐작된 층위가 만만찮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우선,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뉴질랜드라는 장소부터 시작해야 한다. 18세기 초 영국은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한다. 연이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아 먹는다. 당연히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백인들의 충돌이 일어나고, 19세기 말에 들어서 인종분쟁이 끝나고 마오리족의 공식적인 영국화가 시작된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원주민 사이 문명간의 충돌이 첨예했던 식민주의 뉴질랜드다.이러한 배경에 여섯 살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에이다’는 미혼모로 아홉 살 난 사생아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머나 먼 곳 뉴질랜드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다. 그녀의 짐이 뉴질랜드 해안가에 부려질 때, 피아노도 함께였다.‘에이다’와 딸 ‘플로라’가 뉴질랜드에 도착하면서 남편 ‘스튜어트’와 근처에 살고 있는 ‘베인스’가 등장한다. ‘스튜어트’와 ‘베인스’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온 백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현지에서의 생활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뉴질랜드로 옮겨 진 피아노는 이들 사이에서 단순한 악기 그 이상의 배치에 놓이며, 다양한 층위의 상징과 은유로 역할을 맡는다.피아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장소를 이동한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말처럼 “아주 무겁고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운 악기”가 바다를 건너 해변가에 머물기도 하고, 진흙탕길의 밀림을 거쳐 ‘베인스’의 집으로 다시 ‘스튜어트’의 집으로 옮겨 다닌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깊은 바다 속으로 잠긴다. 피아노가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모종의 거래가 일어난다. 땅과 육체, 감정의 거래조건으로 피아노가 놓인다.식민주의는 쟁탈의 역사였다. 원주민의 관념에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을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들이 빼앗고 거래하며 ‘탐욕’과 ‘욕망’을 채워 나가던 시기다. 원주민의 역사에서 땅을 비롯한 자연은 주인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공동으로 잠시 이용할 뿐이었다. 쟁탈의 세계관과 원주민의 세계관이 충돌하여 피로 물들던 시대다. 이러한 식민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호기심’과 ‘에로티즘’이라는 요소를 더한다.말을 하지 않는 ‘에이다’는 손가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우선 수화(手話)가 그러하며, 간단한 의사전달을 위해 연필을 잡은 손가락이 그러하다.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피아노,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이다.주인공 ‘에이다’가 ‘왜 말하기를 그만두었는가’와 ‘왜 그토록 피아노에 집착하는가’의 직접적인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피아노가 놓인 곳 마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따라다니며 연주한다. 뉴질랜드의 해변에서 ‘베인스’의 집에서 손가락을 이용해 피아노를 치고 대화를 나눈다.다양한 층위의 은유와 상징으로써 피아노는 여러 방식으로 거래된다. 물론 피아노를 둘러싼 거래품목들, 주고 받는 것들이 일반적이지 않다. 여기에 최종적으로 거래를 끊어내는 방식이 충격적이며 명쾌하다.피아노의 이동과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거래 내역 속에서 식민주의와 여성성과 에로티즘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섬세하게 보기보다는 거칠게 보아야한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저에 놓인, 그 다양함이 어느 선상에서 출발하느냐의 문제다. 혈연과 결혼, 가족 단위에서 국가적 단위로까지 이어지는 바탕에 깔린 ‘탐욕’과 ‘욕망’ ‘호기심’ ‘에로티즘’과 ‘사랑’의 단어들이 부정과 긍정,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넘나든다. 19세기 뉴질랜드가 그러하다.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생경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정확하게 나눠지지 않는 복잡한 감정들과 풍성한 의미를 담은 피아노 선율과 함께하는 영화다./(주)Engine42 대표

2021-12-20

감정의 질감, 시선이라는 오브제

사진이 발명되기 전인 18세기 말, ‘정혼자에게 보낼 딸의 초상화를 그릴 것’ 귀족 부인의 지시는 정략 결혼을 거부한 딸의 초상화를 몰래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산책친구로 위장한 화가 마리안느는 프랑스 어느 작은 섬으로 향하고 대저택에 머물면서 귀족 부인의 딸 엘로이즈를 만나게 된다. 마리안느는 산책시간 동안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기억을 더듬어 초상화를 완성해 간다.사실성을 중시하던 고전미술은 초상화에 있어서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돋보이게 해야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상화는 법칙이 만들어지고, 법칙 속에서 의뢰자의 만족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그것을 위해 화가는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했다. 대상을 고정화시켜 놓은 상태의 작업이 아니라 한정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초상화 작업은 고도의 집중과 기억의 형상화가 필요한 것이다.정상적인 초상화 작업이 모델과 화가의 마주보는 시선이라면, 마리안느의 초상화 작업은 일방적이다. 산책의 시간 동안 눈치채지 못하게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해야하는 마리안느의 일방적인 시선과 풍경을 담으며, 아득한 어느 곳으로 생각과 시선이 머무는 엘로이즈의 자유로운 시선이 산책길을 걷는다.두 여인의 만남과 시선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저택과 외딴 섬의 풍경 속에 놓인 사람들. 그들 주변을 감싸고 도는 소리와 풍광들이 낮과 밤을 반복하는 사이 의뢰받은 초상화는 완성에 이른다. 관찰이라는 목적성을 가진 시선과 그 시선 속에 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상자. 이 둘 사이는 완성된 초상화를 엘로이즈가 혹평하면서부터 두 가지 본연의 세계로 들어선다.마리안느가 완성한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그리고 있지만 그녀를 위한 초상화가 아니다. 그 그림을 통해 신부감을 확인하고 감상할 밀라노에 있는 이름 모를 예비 신랑의 평가를 고려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당대의 규칙과 관습에 따라 제작된 그림 속에서 엘로이즈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라며 ‘생기’와 존재감’이 없다고 말한다. 화가인 마리안느 조차도 자신의 시선 속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을 감춘 채 대상을 일반화해서 작업을 완성했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라는 엘로이즈의 평가 속에 함유된 의미는 감정의 교감과 진실을 말한다. 생기와 존재감이 없는 초상화 앞에서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마리안느의 대답에 엘로이즈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다고 응수한다.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진실되게 자신의 감정을 담은 작품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의미다.초상화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떠나려는 마리안느에게 그동안 화가 앞에서 포즈 취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가 기꺼이 마리안느의 모델을 자처한다. 이 순간 화가는 ‘생기’와 ‘존재감’이 담긴 작품을 담아야한다는 작가정신의 각성이라는 첫 번째 본연의 세계로 들어선다.존재감을 위해 진실된 순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연에 들어선다. 이제 일방적이었던 시선은 마주보는 시선으로 교차된다. 화가와 모델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사회적 관습과 위계질서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떠나 ‘협력자’이며, 연인으로 동등한 시선을 주고 받는다.영화의 중심에 남성은 없다. 모든 전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부재와 밀라노에 존재하는 정혼자와 임신을 하게 된 하녀 소피의 상대가 누구인지 조차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체적인 여성과 평등, 귀족과 화가, 하녀라는 신분까지 같은 높이의 시선과 동일한 공간 속에서 한시적이나마 평등하게 놓인다. 그리고 이들이 자유로우며 평등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화덕을 배경으로 수평으로 놓인 탁자 앞에서 세 사람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자리잡는다.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람과 파도 소리, 미세한 일상의 소리들로 채워 나간 영화는 딱 세 번 화면 속에 음악을 담는다. 절제된 음악 사용은 감정의 분기점마다 놀라운 효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아 슬프며 장엄하게 폭발시킨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1-11-22

1636년 남한산성의 안과 밖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다달은 청의 부대를 피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이듬해 1월 30일까지 버티다 마침내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여 인조는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린다.소설과 동명의 영화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가 걸어서 나온 47일간의 기록이다. 김훈 작가의 첫 문장처럼 인조는 떠밀리듯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마지못해 남한산성을 나오게 된다.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섬처럼 남은 남한산성 안에서 매섭고 날카로운 대결이 펼쳐지고, 그 대결과 함께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혀’ 성밖을 넘지 못한다.주화론자(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와 척화론자(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는 대의와 명분, 목숨과 백성을 들어 냉혹하고 처절한 논쟁을 벌인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의 말은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인조의 나아갈 길을 극단으로 제시한다. 치욕을 견뎌 목숨을 구할 것인가, 죽음의 길을 택해 명분을 구할 것인가의 길이다.성밖 전장에서는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펼쳐지고,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과 항전을 둘러싼 말(言)의 싸움이 지속된다. 임금 앞에 시선을 내리깔고 조아린 모습들 속에서 서슬퍼런 말의 칼날이 부딪치고, 한 겨울 삭풍보다 매섭고 날카롭게 상대를 파고든다. 왕은 또 다른 선택지를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다그치지만 그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인조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린다. 성안의 식량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인조는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 말아라”는 말로 하명한다. “얼마나 아껴야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고 답한다. 이 대사처럼 왕은 우유부단함과 모호함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무능한 신하들로 인해 안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청나라 병사들과의 싸움보다는 산성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산성을 둘러싼 청나라 병사들은 일정의 선을 넘지 않는다. 적으로써의 대상보다는 마치 목격자이며, 목표지점에 대기하고 있는 존재처럼 그리고 있다. 감독이 집중한 것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안으로부터 무너지는가의 과정이라고 하겠다.김훈은 소설 속에서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라고 표현했다. 황동혁 감독은 이것을 영상으로 옮겼다. 김훈 소설의 문장처럼 수사적 군더더기가 없고, 짧으며 단호하게 끊어낸다.칼날 위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사는 소설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영화는 소설 속 분위기를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장황한 서사를 생략하고 간결하고 상징적인 화면들로 채운다. 그래서 영화는 원작의 분위기와 인물 구도를 충실하게 구현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작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소설과 영화를 넘나든다.삶과 죽음의 길, 살고자 하는 길에는 패배와 치욕이 있으며 죽고자 하는 길에는 명예가 남는다. 두 갈래의 길을 두고서 성안의 논쟁은 치열하고 뜨거워진다. 반대로 겨울은 깊어지고, 성안의 백성들은 한겨울 혹한 속에서 냉정하게 사지로 내몰린다.위정자들에게 두 갈래의 선택이 치욕과 명예의 길이었다면, 백성들에게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하나의 길을 희망할뿐이었다. 마침내 최명길은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한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고 길입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고 말하며, 성문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밟고 삶의 길을 가라고 간청한다.그 길 위에 대장장이 서날쇠의 말처럼 “그 어느 편도 아닌”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일이 중요한 백성들의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지독한 겨울을 견뎌낸 자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47일간의 뜨겁고 격정적인 이야기를 서늘하고 냉엄하게 그린다./(주)Engine42 대표

2021-11-01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렛미인’ 포스터. 북유럽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뱀파이어 영화다. 낮보다 밤이 길고,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쌓이는 풍경 속에서 주변의 소음들이 소거된다. 소리없이 진행되는 영화다. 하얀 눈과 붉은 피, 강렬하게 대비되는 시각적 이미지로 남는다.내용에 있어서도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암시적인 표현으로 지나가고, 적막함 속에서 탄식과 안타까움이 단계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탄식과 안타까움은 아름다움과 애틋함을 동반한다. 그래서 애틋하면서 아프고, 시리도록 아름다우며, 단순하지만 선명함으로 남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12살 8개월 9일’을 살았다고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소년 오스칼의 옆집에 ‘12살쯤’이라고 살아 온 시간을 얼버무리는 소녀 이엘리가 이사를 온다. 이엘리는 오래 전 어느 날 12살의 나이로 뱀파이어가 되었다. 12살을 지나고 있는 소년과 수 백년의 시간을 12살의 외모로 살아가는 소녀가 적막하고 어두운 놀이터에서 만난다.‘탄식’은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 ‘애틋함’은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이 진행되면서 예측될 수 있는 운명의 과정 속에서 나온다. 위의 감정들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뱀파이어의 ‘시간의 상대성’에서 기인한다.12살의 모습으로 수 백년을 살아 온 이엘리와 함께 했었을 수많은 유한한 존재들. 오스칼의 미래를 이엘리와 같이 사는 늙은 남자에게서 보게 된다. 영화 ‘렛미인’은 늙지 않는 영생의 삶을 살아가며, 보통 인간과 비교도 안될 괴력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의 뱀파이어에 집중하지 않는다. 12살의 외로운 소년과 수 백년의 12살을 살아가고 있는 소녀의 외로운 성장기를 다룬다.뱀파이어 영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강렬함과 액션, 잔인함과 공포가 스웨덴의 시리고 적막한 겨울 속에 묻힌다. 영화는 어둠과 흰색이 지배하는 풍경에 뿌려지는 선혈 속에서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와도 같은 흐름을 따른다. 기존 뱀파이어 영화에 등장할 법한 것들을 빼고 감독에 의해 선택된 것들만이 남아 반짝이며 빛난다.‘왕자는 공주를 구출하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아름다운 궁전에서 행복하게 살았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와 무한에 가까운 존재의 ‘시간의 상대성’으로 인해 다가올 미래는 어긋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특수성으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관계에 놓인다. 이렇게 기울어진 관계를 예측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동화’같은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은 소설 원작(스웨던 작가 욘 린퀴비스트의 동명 소설)에서 다채로웠던 이야기들을 살뜰히 발라내고 펼쳐낸 영화의 리듬에 있다고 하겠다.사람의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와 그 희생자인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는 전개는 더욱 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금기를 깬다. 정해진 결말을 향해, 소년은 끝을 알면서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의 여정을 떠난다.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영역에 들어갈 때 꼭 그 영역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고통에 빠진다. 영화 제목인 ‘렛미인(Let Me In)’은 너의 영역으로 나를 들여보내 달라는 허락의 의미다. 영화의 제목처럼 서로가 좁혀질 수 없는 물리적 간극이 존재하고 있지만 소년과 소녀에게 그것은 장벽이 되지 못한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라는 이엘리의 메모 속에서 뱀파이어를 호러의 대상이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2008년 개봉 되었던 이 영화는 2010년 맷 리브스 감독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다. 같은 원작으로 영화화 되었지만 스웨덴 버전보다 현실적이며 그들 간의 사랑은 직접적이다. 스웨덴 버전이 한편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분위기라면 미국판은 뱀파이어 영화의 스릴러와 액션 등의 장르에 충실하고자 했던 점이 보이며 슬픔의 감정을 끌어 올린다.다소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어느 것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취향이 갈릴듯하다. 굳이 추천하자면 스웨덴판 ‘렛미인’을 먼저 볼 것을 권한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1-10-04

흑백의 명암으로 그려진 두 갈래 길(道)이 만나는 곳

1800년 영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에 나서고, 정조 재위 시기 성장한 남인 시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명분을 구축한다. 순조 즉위 1년인 1801년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라는 하교를 통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난다.성리학의 해석과 실천에 있어서 이견을 달리하며 펼쳐졌던 조선시대 당쟁사에서 조선 건국의 근본 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아닌 다른 이념이 당쟁사에 등장한 것이다. 서양의 학문으로 유입되었던 서학(西學)은 자발적인 천주교 신자를 양산하게 되면서 인륜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자들이 믿는 사학(邪學)으로 낙인 찍히며 정쟁세력을 제거하는 명분이 된다.“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하교에 따라 배교(背6559·믿었던 종교를 배신하는 행위)를 약속하고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정약전의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죄의 경중(?)에 따라 형제지간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천혜의 고도 흑산도와 땅끝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시작된다.“이 영화는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의 서문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물입니다”라는 자막이 영화 첫 장면에 나온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인 정약전과 장창대의 인연을 ‘자산어보’ 서문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기반으로 감독의 생각을 녹여내며 영화를 만들어간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고, 자잘한 사건들을 동원하며 행간을 채운다. 그 중심엔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대사처럼 ‘자산어보’의 편찬과정에서 함께했던 정약전과 장창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정약용이 유배생활 중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수백권의 저서를 남길 동안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포함해 딱 세 권의 책 밖에 남기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창대로 인해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목민심서’는 조선 후기 지배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은 책으로 유교적 정치 질서 속에서 청렴과 애민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담고 있다. 흑산도 주변의 해양 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산어보’는 실사구시의 탐구적 서적으로 그 결을 달리하고 있다.정약전은 서학을 철학적이면서 실사구시의 과학적 영역으로 인식한 반면, 정약용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영역으로 수용하고 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정약전이 성리학과 서학의 중간에 위치할 때, 정약용은 성리학을 중심에 두고서 서학을 취한다.창대는 정약전과 정약용, ‘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를 오간다. 성리학의 질서 속에서 ‘사람 노릇’을 위해 입신을 갈망하던 창대는 정약전의 유배로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사이에 놓인다. 스승과의 인연으로 학문은 깊어지고,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며 성리학의 이념을 세상에 구현해 보고자 하는 포부는 무르익는다.‘자산어보’와 ‘목민심서’ 사이 이상과 현실, 관념과 실사가 충돌한다. 조선시대를 지탱해 왔던 이념이 새로운 시대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다시 성리학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길을 찾는 이와 성리학 바깥에서 또 다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 펼쳐진다.‘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며 옛 책을 매우 좋아(‘자산어보’ 서문에서 인용)’했던 실존인물 창대는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두 갈래의 길(‘자선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 속으로 던져진다. 흑산도와 강진을 오가던 창대는 마침내 나주로 나가고, 선택했던 길 속에서 다시 흑산도로 돌아 온다.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창대’다. 다산(茶山·정약용의 호)의 길(道)과 손암(巽庵·정약전 호)의 길(道)을 오가는 창대의 여정을 그린, 여백과 흑백의 명암이 수묵화처럼 그려지는 로드무비다./(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1-08-30

사라져 가는 추억의 조각들에 대하여

어머니 엘렌의 75세 생일, 각지에 흩어졌던 가족이 파리 근교의 어머니 집에 모인다. 숲속 호숫가 집은 세 남매가 나서 자란 곳이며 추억과 함께 집안 대대로 타고난 예술적 안목으로 모아 온 미술품과 고가구가 있는 곳이다.엘렌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처리할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고스란히 유지하고 보관해 왔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만 세 남매는 큰 관심이 없다. 집안에 있는 명화와 스케치,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들과 꽃병 등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고, 어울려 살았던 터라 세 남매에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오랜 시간 동안 공간을 꾸미고 구축해 놓았을 어머니의 자산 속에서 ‘일상이었던 기억’들은 자식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사적인 생활공간에서 일상적인 소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들. 세월의 때를 뒤집어 쓴 ‘기억’의 가치는 늘 그 자리에 있어왔기에 별다른 빛을 발하지 않는다.어머니의 생일에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들이 정원 식탁에 둘러앉은 모습 속에서 일상의 소품이거나 배경이 되어 예술작품들은 늘 그래왔듯이 자리잡는다. 그날의 날씨와 공기, 나누었던 대화와 시선들과 함께 어머니의 자산은 사회적인 의미 이전에 가족들의 기억이 서려있는 일상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 가족들은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모인다. 여기서 세 남매는 ‘일상적 의미’를 지녔던 것들의 ‘사회적인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유품의 금전적 가치에서부터 상속할 시에 지불해야할 막대한 세금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서 자잘한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미술관 기증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공간에 놓이게 되면서 잃어버리는 것들과 얻게 되는 것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한다.개인의 추억이 담긴 물품도 사회·문화적인 가치를 지니면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적절한 조명에 가치있는 위치를 점하고 전시되는 사물(미술품, 유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이 애초에 놓였을 위치와 환경, 주고 받았던 추억들은 어찌할 것인가. 쓰다듬고 바라보았을, 바람과 공기와 냄새가 함께했던 추억을 만들었던 무형의 것들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미술관이라는 공적인 공간에 자리잡는 유품들. 보존과 전달, 교육의 측면은 성취했지만 그 속에 누락된 한 가족의 추억은 전달되지 않는다. 사적인 시간을 보내왔던 것들이 공적인, 어쩌면 영원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이동해 버린 것이다. 일상의 용도에서 공적인 용도로 가치를 획득한 것들의 변화를 통해 장남은 “그래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사람들도 잘 보고 있지 않느냐”고 위로한다.일상을 함께 보냈던 것들의 빛이 사라지고 찬란한 역사의 빛을 획득하는 순간에 대한 은유다. 사라진 빛 속에서 기억들, 비밀들, 이젠 아무도 재미있어 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함께 사라진다.지금 미술관에서 감상하고 있는 작품이 어떻게 어떤 경로로 이곳에 전시되고 있느냐의 과정에 대한 영화다. 그 과정 속에서 그 작품과 함께 했을 사람들의 추억과 숨결이 어떻게 전달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해질 때 작품은 깊이를 더하고 또 다른 아우라를 품는다.이 영화를 사라지는 것에 대한, 혹은 추억에 대한 세대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좁혀서 본다면 아까운 영화가 되어 버린다. 유형을 형성한 세월의 무형의 것들에 대한 전달 방식에 대해서 환기하는 독특한 지점을 점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그것은 작품과 유물에 대한 텍스트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주며 큐레이팅이 어떻게 되어야하는가를 드라마로 짚어주고 있다. 사물의 가치에 텍스트(스토리, 과정)가 더해질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들어감을 알 수 있게 해준다.2008년 개봉한 이 영화는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20주년 기념작으로 기획되었다. 미술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제작된 이 영화에는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림, 조각, 가구 등 다양한 실제 작품들을 활용하여 촬영이 진행되었다.영화 속에서 오르세 미술관의 진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덤이다./(주)Engine42 대표

2021-08-09

마술쇼가 시작되기까지

라스베이거스 인근.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은 ‘바그다드 카페’에서 두 여인이 만난다. 한 여인은 머나 먼 곳 독일의 로젠하임에서 미국으로 와서 남편과의 다툼 후 홀로 이곳에 도착했고, 또 다른 한 명의 여인은 카페 주인으로 방금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쫓아낸 직후다.무거운 가방을 끌고 모하비 사막의 도로를 걸어와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한 ‘야스민’과 카페와 모텔, 주유소를 운영하는 ‘브렌다’는 서 있는 자세와 앉아 있는 자세로 만난다. 그리고 각자의 손수건으로 한 여인은 땀을 닦고, 한 여인은 눈물을 닦는다.손님이라곤 사막을 지나는 트럭 운전수 밖에 없는 카페에 이국적인 복장의 여인이 무거운 가방을 끌고서 차도 없이 걸어서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낡고 지저분한 카페의 모습에서 두 사람의 ‘편견’은 시작된다. 거칠고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의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깨지고 소통하며 조화를 이뤄가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독일인과 흑인, 인디언과 히스패닉까지 다양한 인종들이 큰 변화없는 사막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그 중심엔 ‘야스민’이 있는데, 가장 이질적인 존재에 의해 스산했던 사막의 풍경처럼 존재했던 바그다드 카페는 모하비 사막의 오아시스로 변모해 간다.이 영화엔 결정적인 사건이 없다. 낡고 오래된 카페와 주변의 풍경처럼 하루 하루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늘 그래왔듯이 구질구질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 반복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반경을 넓혀가며 자신의 색깔을 입히는 존재가 바로 ‘야스민’이다. 야스민은 조금씩 브렌다의 영역을 침범한다. 바그다드 카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일부러 그곳을 찾는 사람들까지 그녀의 색깔에 이끌려 바그다드 카페를 찾는다.영화 초반 야스민이 사막 한 가운데에서 남편과 다투고 바그다드 카페로 향하는 장면은 사선의 구도로 잡힌다. 그리고 카페 주인 브렌다와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수평으로 구도를 잡는다. 불안했던 구도는 평온의 구도를 잡고 황량했던 카페의 색깔은 야스민이 카페를 청소할 때 원색으로 잡힌다. 이것을 시작으로 카페는 본연의 색깔을 갖는다. 황량했던 사막의 하늘은 선명한 풍경으로 되돌아오고, 그곳에 붉고 아름다운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스토리를 포함한 모든 변화들은 급박하지 않다. 느리고 조용하게 서로의 공간으로 타자를 들이고 감정의 들고남을 허락한다. ‘편견’은 ‘호기심’으로 바뀌고, ‘호기심’은 ‘호감’으로 바뀌는 과정이 영화 속 야스민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처럼 자연스럽고 은유적이다.황량하고 거칠던 사막의 풍경이 아름답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마술’처럼 그린다. ‘스며든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청소를 통해 낡았던 카페의 색깔들을 찾아주었던 야스민은 바그다드 카페에 거주하는 이들의 색깔과 아름다움을 발견해줌으로써 그들의 삶 속에 스며든다.영화 중반부 이곳에 세들어 사는 타투업자 여자가 읽던 책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다. 19세기 말 휴양 도시 베니스에서 한 중년남성이 아름다운 소년에게 첫 눈에 반해 자신의 늙음에 대해 다시 고찰하며 절대미를 찬미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콜레라가 창궐해 시민들이 떼죽음 당하고 결국 주인공도 허무하게 죽는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살아왔던 삶의 의미들이 뒤집히고 부정되면서 결국엔 죽음에 이른다는 이 소설의 내용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문학적 인용이라고 하겠다.변화없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낡아가는 바그다드 카페에 야스민의 등장으로 소설과는 다른 결과가 펼쳐진다. 영화 후반부 야스민이 비자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바그다드 카페로 돌아왔을 때, 타투이스트는 “Too much harmony(너무 조화로워서)”라고 하면서 그곳을 떠난다. 모두가 ‘마술’과도 같은 변화를 통해 우정과 화합, 이해와 연민의 드라마가 펼쳐질 때 ‘베니스의 죽음’은 그곳을 떠난다.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주제가 제베타 스틸(Jevetta Steele)의 노래 ‘Calling You’가 마지막 엔딩크레딧과 함께 다시 나온다.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고, 아이는 울고, 나는 잠이 오질 않지만, 우리 모두는 변화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어’라는 가사처럼 편견에서 시작해 호기심으로, 호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마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주)Engine42 대표

2021-07-19

허구와 현실의 소멸하는 경계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 그 자체의 내적인 요소에 집중할 때도 있지만 그 영화의 바깥쪽이 궁금한 영화가 있다. 전자가 영화 속 내용과 상황에 몰입하고 감정 이입을 통해 감상하는 영화라면, 후자는 그 영화가 만들어지던 현장 상황이 궁금한 영화라고 하겠다.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보다는 그 영화가 촬영되었을 때 카메라의 뒤편이 궁금한 것으로,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 해석을 하기보다는 제작 현장을 통해 완성된 내용을 바라보고 싶은 영화다.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거나 인공세트를 쓰지 않고 현장에서 촬영하는 방식과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만으로 촬영하는 방식을 통해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란 영화 스타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위의 제작방식으로 구축해 놓은 것이다.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87년)를 시작으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91년), ‘올리브 나무 사이로’(94년)는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과 영화 현장, 촬영 방식 등에서 다양하게 얽히고 엮이며 ‘코케 3부작(영화가 촬영되었던 지명 이름)’ 또는 ‘지그재그 3부작(영화 속 등장하는 마을의 구불구불한 길들에서 차용)’으로 불린다.가장 먼저 제작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코케에 사는 어린 주인공이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기 위해 옆 마을로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이후 1990년 이란 북부에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해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참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 지진으로 인해 영화 촬영지 였던 코케 또한 지진 피해를 크게 입게 되는데, 감독은 아들과 함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두 소년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코케로 향하는 대부분의 길들은 사라져버렸고,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들은 차들로 꽉막혀 있다. 길을 찾아 인근 마을을 돌면서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이 사라지고, 미로처럼 얽혀 있던 골목과 길들이 사라졌으며, 가족들이 죽었어도 다시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영화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이다.3부작 마지막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스타일로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는 영화제작을 위해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배우를 캐스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제작 현장이 어떠했다는 것을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영화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인지 모호해진다. 영화 속에서 어떤 내용의 영화를 만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 편의 영화는 각각의 분명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 속에서 동일한 기억을 지닌 이들이 등장하고, 각각의 영화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촬영장 역시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 되었다. 영화는 분명히 허구의 드라마를 다루고 있지만 그들은 그 허구의 현장에 실제로 영화의 내용처럼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의 영화는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허물고 카메라 앞과 뒤의 상황들이 혼재되고 뒤섞이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이 묘하게 몰입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지그재그의 길을 오가며 영화는 배우들의 계속되는 실수를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마지막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나간다. 바로 세 편의 영화 기저에 깔렸던 반복되는 것 같지만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전진하며 진보하는 삶의 긍정성이다. 사라져가는 경계에 놓인 카메라는 개입하지 않는다. 분명히 감독의 계산된 연출에 의해 촬영됐을 영화겠지만 영화 속에서 감독은 자신의 흔적들까지 지워 나간다. 이를 위해 카메라는 그들 앞에 등장한 낯선 물건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놓여 있었던 소품처럼 자리잡는다.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반복과 변주를 통해 완성된 영화다. 기존의 영화였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가 반복된다. 완전하고 확실한 허구의 구조를 가진 영화보다는 자유롭게 넘나드는 실재 상황들을 끌어 들이며 영화는 가장 독특한 사랑 고백과 재미를 선사하는 마지막 장면을 게으른(?) 카메라를 통해 확인할 것이다. 우스우면서도 묵직한 장면이 두고 두고 오래 남는다. /(주)Engine42 대표

202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