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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중세’시대에 신청한 결투의 시작

등록일 2022-06-13 18:55 게재일 2022-06-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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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중세 유럽, 흑사병이 일어난 지 30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간지점 프랑스 북부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백년전쟁은 중세시대 마지막에 걸친 전쟁으로 중세를 지배했던 모든 것들의 기준, 즉 신앙적 기준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신앙적 기준이 정점에 달했다는 것은 완성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더 깊어지거나 강해졌다기보다는 형식적인 표현의 완고함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국가의 개념에 있어서 동양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였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기사임명식과 충성서약에 함유된 의미는 일종의 ‘계약관계’를 맺었다는 의식의 근엄한 형식이다. 중세유럽의 왕은 많은 귀족 중에 선출된 한 명으로 공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자이기도 했다. 각각의 귀족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이익이 침해될 때 함께 하겠다는 이익을 내포한 ‘계약’이었다. 중세유럽의 충성서약이 이익을 기반으로 할 때, 동양의 충성은 ‘명분의 서약’이 강했다. 동서양이 모두 순혈주의를 중시하였지만 동양의 명분이 ‘우리’를 내세울 때 유럽의 오로지 ‘가문’의 명분, 나의 이익이 중심에 있었다. 서약은 이익의 향방에 따라 번복되었고, 국가라는 대의적 명분보다는 나의 이익이라는 명분 속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중세 유럽의 전쟁 양상은 혈통과 땅의 소유주들간의 전쟁이었다. 동맹은 명분보다는 이익에 민감했고, 국가와 백성보다는 나의 영토, 나의 이익에 따라 대상을 바꾸었다. 이것이 중세에 있어서 동양보다 유럽의 전쟁 양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동양이 절대왕권이었던데 반해 유럽은 상하관계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권력으로 지배할 수 없는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왕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결하는 최고의 권력이었던 동양에 반해 유럽에서의 왕은 해결사이기보다는 중재자의 위치에 놓인 것이다. 일원화된 권력으로 최종 판단자로서의 위치에 있었던 왕과 중재자로써 종교재판과 세속재판이라는 이원화된 재판이 존재했던 것이 중세 유럽이었다.

교회의 법으로 판결을 내렸던 종교재판과 왕의 권력으로 판결을 내렸던 세속재판에서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은 다시 신의 이름으로 운명에 의한 재판을 진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사건인 ‘신명재판(결투재판)’이다.

재판의 결과에도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호소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던 것이 중세유럽의 결투재판이었다. 이해가 충돌하는 당사자들이 정의로운 신에게 심판을 맡기자는 의미로 목숨을 건 결투를 통해 ‘신은 공정하다’는 믿음이 낳은 수단이었다.

이 시대에 여자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이기 이전에 재산의 일부였다. 당연히 결혼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계약관계의 일종이었다. 영화 속에서 카루주의 부인이 자크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죄명은 ‘재산권 침해’였다. 종교재판과 세속재판에서도 사실을 밝히지 못하자 카루주는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결투재판을 신청한다. 명분에 여성의 의견과 존재는 무시되고, 그 운명마저 비이성적인 결투에 맡겨진다.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3부로 나눠서 반복한다. 각자의 관점에서 그들이 기억하고 말하고 싶은 것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카루주와 자크의 관점에 카루주의 부인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의 형식을 따른다.

차이는 끝까지 진실의 모호성을 유지했던 ‘라쇼몽’에 반해 ‘라스트 듀얼’의 마지막 3부인 마르그르티의 시점이 시작되기 전 ‘진실(The Truth)’이라는 부제목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중세시대에서조차 그 잔인함과 비이성적인 제도로써 인식되었던 결투재판은 ‘마지막 결투’를 끝으로 더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네델란드의 미술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 후기의 잔인한 사법 처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그 변태적인 메스꺼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법 집행으로부터 중세인들이 느꼈던 둔감하면서도 동물같은 만족감, 시골 장터 같은 떠들썩한 여흥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라고 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하나의 여흥과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자신의 영화는 남자들의 명예를 건 결투가 아니라 중세시대라는 세상과 여주인공인 마르그리트의 대결이라는 시대적 결투의 시작이라는 분명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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