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우주선 시각 19:00에 나는 발사 플랫폼으로 갔다. 발사관 입구의 승무원들이 옆으로 비켜선 가운데 좁은 계단을 내려가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과학소설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솔라리스’의 맨 첫 단락이다. 매년 이맘때면 이 책을 읽는다. 연말에 시작해 그해 마지막에 끝나던가, 연초를 넘기기도 하면서 수년 동안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습관이 되었다. 많은 책 중에서 왜 하필 이 책이며, 이 기간동안 반복적으로 읽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연말과 연초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머나 먼 미지의 행성으로 출발한다는 묘한 긴장감이 서린다.
한 해를 돌이켜보거나 새로운 계획을 구상할 시기,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행성 솔라리스로 간다는 것.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가해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풀리지 않는 사건을 끌어안고 새해를 맞는다. 연말과 연초, 마지막 날과 첫 날, 정리와 시작이며, 반성과 약속의 의미가 가득한 시기를 모호한 미지의 가상 세계 속에서 보내다 돌아오는 반복된 습관이다.
소설 속 주인공 켈빈은 솔라리스라는 외계 행성의 탐사기지로 파견된다. 켈빈이 태어나기 100년 전. 서로 마주보고 회전하는 두 개의 태양을 공전하는 독특한 행성을 발견한다. 이후 행성 탐사에 이어 행성과의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하던 인간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도 유사한 줄거리를 가진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전개와 내용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길을 걷는다. 소설은 과연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영화는 애초부터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비록 원작의 내용을 가지고 왔지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한다. 같은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데 함의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 ‘접촉’에서 시작된다. 100년 전 발견된 독특한 행성에 대한 본격적인 접촉을 시도한 이후 불가해한 상황이 펼쳐진다. 차이가 있다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영화 시작 단계에서 이미 원작에는 없는 존재론적 물음을 시작한다.
소설은 인간이 규정한 생명체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존재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사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소설 ‘솔라리스’는 인간적 사고의 한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우리는 우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죽었던 사람이 재구성되어 등장하게 되면서 겪게되는 감정의 변화를 보여준다.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졌던 죽은 사람이 물질로 완벽하게 구성되어 나타났을 때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단계의 과정이 펼쳐진다. 과학이라는 합리적이고 지극히 이성적인 영역 속에서 그것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마주했을 때, 과학은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동요한다.
절대적 진리가 무너지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의 해결책으로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깊고도 지루한 철학적 사고를 영화 ‘솔라리스’ 속에서 반복한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존재와의 ‘접촉’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미지의 존재는 우리의 어떤 기억으로 오는가’에 대한 전개로 이어진다. 이곳에서 소설과 영화는 갈래를 달리하며 우주를 대상으로 한 ‘인식론’과 ‘정체성’에 대한 각자의 길을 걷는다.
비록 존재의 실체에 대한 결말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소설과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집요하고 끌고가면서 나라면 ‘솔라리스에 남을 것인가 지구로 귀환할 것인가’라는 선택에 놓이게 만든다. 이것이 매년 소설 ‘솔라리스’를 읽고, 가끔씩 영화 ‘솔라리스’를 다시 보는 이유다. /(주)Engine42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