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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주의 깊이, 내면의 깊이

1977년 8월 20일 보이저 2호는 미국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기지를 이륙해 지구를 떠난다. 돌아올 수 없는 편도행 티켓이다. 목성과 토성, 천왕성을 지나 해왕성을 끝으로 2018년 11월 5일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우주로 진입했다.기약없는 42년의 여정에 이어 인류가 만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이다.지구로부터 182억km. 빛의 속도로 하루가 걸리는 거리의 어디쯤에서 목적지 없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다.만약 보이저 2호가 감정을 지닌 유정물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42년의 여정에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떠한 감정으로 주어진 임무에 임했을까. 깊어지는 우주의 깊이만큼 그의 고독한 내면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으며 어떻게 바라보았을 것인가.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애드 아스트라’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주의 지적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실종된 아버지를 영웅이라 믿으며 우주비행사의 꿈을 키운 미 육군 소령 ‘로이 맥브라이드’가 아버지의 생존을 접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찾아 태양계의 끝자락 해왕성으로 향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위험한 실험이 인류를 위협할 사태를 유발하면서 그를 막아야 하는 임무를 맡게된다.불의의 사고로 동료들이 모두 죽고 로이는 혼자서 기나긴 여정에 돌입한다. 그 여정 속에서 우주의 빈 공간만큼 넓고 깊은 내면의 고독과 마주한다. 그는 그 깊고 넓은 공허 속에서 자신이 지구에 두고 온 것을 되새기고 지나온 모든 삶을 반추한다. 이와 함께 어떠한 결말에 도달할지 모르는 아득한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들을 느낀다.구조적으로 ‘애드 아스트라’는 프란시스 포드 코풀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떠올리게 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미 특수부대 윌라드 대위는 밀림에서 복귀하지 않는 커츠 대령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고 메콩강을 따라 캄보디아의 길고 깊은 밀림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지옥의 묵시록’의 윌라드 대위는 여정을 따라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직면한다. 그의 내면에 가득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여정의 끝자락에 당도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소령 또한 두려움과 함께 내면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공허의 공포 속에서 여정의 끝자락에 당도한다.두 영화의 구조는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저서 ‘황금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절대자가 있고, 그 절대자를 무너뜨리고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구조다. ‘지옥의 묵시록’에서 커츠 대령은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온 윌라드 대위에게 “공포와 친구가 돼야 한다. 적이 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커츠 대령 역시 밀림의 여정에서 느꼈던 공포를 어떻게 다스렸는가를 피력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네가 날 죽일 권리는 있지. 허나 날 심판할 권리는 없네”라고 말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여기까지 두 영화의 구조는 유사하지만 결말은 다르다.“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앞에 있는 건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며 ‘애드 아스트라’는 절대자였던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의 이면을 본다. ‘아름답고 장엄하며, 경이롭고 신비’롭지만 그 내면이 텅 비어버린 “사랑과 믿음도 빛도 어둠도 없는” 공허의 공간을 목격한 것이다.‘獨樂堂(독락당) 對月樓(대월루)는 /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조정권 시인의 시 ‘獨樂堂(독락당)’ 전문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절대 고독의 경지에 머무를 때, ‘애드 아스트라’는 “이제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라고 먼 길에서 돌아와 일상에 안착하는 결말에 이른다.깊고 먼 우주로 들어서는 용기. 우주의 심연으로 들어가면서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용기. 외부의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자신을 고독의 심연으로 밀어넣었을 때 찾아오는 ‘사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애드 아스트라’는 결말이 다른 ‘지옥의 묵시록’의 SF버전이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영화 ‘애드 아스트라’는 IPTV와 네이버 구글에서 감상할 수 있다.

2020-03-09

올바른 내용이 구축한 형식의 아름다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 ‘두 교황’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이미 영화 속 결과를 알고 있고, 결과의 진행형 속에 살고 있다. 이 영화는 그 결과를 만들어 낸 과정과 교회가 오랜 세월 속에서 구축한 내용을 담는 그릇(형식)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로 전 세계의 추기경이 바티칸으로 소환된다. ‘콘클라베’를 통해 라칭거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로 교황에 즉위하고 종신직에 임한다. 하지만 그가 즉위한 뒤 교회는 보수화되고 가톨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각종 추문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시대에 엄숙하고 경직된 교리의 해석은 뒤쳐지고, 과거에 발목을 잡혀 진행되는 느린 행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바티칸의 깊고 높은 곳으로 전달되고 있었다.2013년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다시 ‘콘클라베’를 통해 남미의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된다. 영화의 시작을 전임 교황의 서거와 선출의 과정인 ‘콘클라베’로 시작해 교황의 사직과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로 끝을 맺는다.‘콘클라베’는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템이다. 라틴어에서 온 단어로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방’을 의미한다. 일체 외부의 간섭을 방지하고 선출되는 과정과 풍경을 사전에 차단해 비밀을 유지하는 엄격하고 장엄한 행사이기도 하다.영화에서 두 번의 ‘콘클라베’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선출된 2005년의 교황과 2013년의 교황, 두 교황의 대중을 향한 첫 발걸음을 준비하는 장면이 뒤따르고 같은듯 다른 모습이 흘러간다. 내용을 담는 형식이 달라진 것이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가 구축해 온 의식(형식)은 오랜 세월을 거쳐 진화되고 다듬어진 것으로 정통을 당대의 요구에 맞게 유지하고 변형시켜 온 결과물이다. 시대의 요구가 바뀔 때 종교는 어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가. 오랜 세월동안 쌓아왔던 찬란한 형식, 그 속에 담겼을 종교의 숭고했던 정신과 시대정신이 충돌하여 또 다른 해답을 요구할 때 지도자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영화 ‘두 교황’은 보여준다.교회에 실망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베르고글리오(현 프란치스코 교황) 추기경은 수차례 바티칸에 사직서를 보내지만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한다. 바티칸이 각종 문제로 당대요구를 원만히 수용하지 못하던 시점,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고글리오를 바티칸으로 호출하고 며칠을 함께 보낸다. 스스로가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퇴임을 마음먹은 베네딕토 교황과 현 바티칸의 행보에 사직서를 준비한 추기경의 며칠은 부드럽고 날카롭게 다가와 아름답고 유쾌하게 전개된다. ‘내용’과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팽팽하게 당겨졌다 풀어지는 긴장과 이완의 과정이 바티칸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대화로 진행된다.올바른 내용이 구축한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랜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형식에 대한 논쟁은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을 들고 상대의 급소를 향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세상이 변화된 내용을 요구할 때, 형식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절대적 존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앞서 무릎꿇고 고해하는 스스로의 과오는 얼마나 숭고한가.‘신’은 이미 교황의 팔목에 채워진 만보계를 통해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나아가라’고 계시를 내리지만 인간은 다른 곳에서 ‘신’의 응답을 찾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변화된 내용이 담겨질 새로운 형식을 찾아 만보를 지나 이만보 십만보.…. 끊임없이 행하라고 하셨으니, 스스로가 쌓은 형식을 허무러뜨리고 다시 짓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아름다운 일인가./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영화 ‘두 교황’은 서울과 부산 일부 극장과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20-02-10

객관화 돼가는 주관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은 상대의 장점을 나의 목소리를 통해 보여준다. 알고 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의 괴리는 그 독백이 끝나는 시점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함께 살아가야할 수백 가지의 장점들. 그 속으로 함께 살아가지 못할 하나의 단점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분명한 장점들 속에서 흐릿한 단점이 점점 명징해지는 시간을 그린다. 그리고 하나였던 것이 분화되고 세분화되면서 모든 장점들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이혼’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의 영화다.처음 시작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했으며 그 결과로 무엇을 남겼는가 아름답게(?) 헤어지는 것으로 약속한다. 하지만 현실은 누가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로 끝나지 않고, 누가 누구를 더 미워하느냐의 싸움으로 진입한다. 법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혼의 과정을 준비하던 부부 사이에 변호사를 선임하면서 이혼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와 서로를 괴롭힌다. 아름다운 이별이 치열한 ‘승리’의 문제로 바뀌고, 감추어야할 것과 드러내야할 것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함께 살아왔던 지난날은 어지럽고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누가 더 사랑했었던가’는 이제 누가 더 상대의 치부를 까발릴 용기, 더 솔직한 용기를 가졌는가의 척도가 된다. 사랑의 깊이는 그대로 누가 더 상대방에게 좀 더 큰 상처를 안겨주느냐의 문제가 된다.뉴욕에서 시작된 영화는 LA로 옮겨간다. 결혼이 시작된 뉴욕에서 결혼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는 장소 LA가 된다. 미국의 동부와 서부, 양극단의 물리적 거리만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 이는 영화 속에서 아들 헨리의 양육권을 다투게 되면서 법적 주거지인 뉴욕과 현실의 실거주지인 LA가, 과거의 삶과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규정되어지는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우리’의 집이, ‘누구’의 집이 되는 과정이며, ‘너’의 집과 ‘나’의 집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통해 잔잔한 감정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부부는 ‘소송’이라는 사법제도를 활용함으로써 감성적이었던 관계가 냉정한 이성적인 관계로 돌아서고, 주관적이었던 것들은 모든 객관적인 것들로 치환된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기 위해 개인의 섬세한 감정을 쓰다듬기 보다는 거두절미하고 냉정하리만큼 물리적인 객관성을 유지할려고 한다. 법의 특성에 의해 상대의 감정에 이입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나의 현실적인 이익에 충실하도록 강요한다.개인적인 선택이겠지만 그래서 후련하고 만족하느냐의 깔끔한 결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 찰리가 아들 헨리와 장난을 치고 하던 작은 칼. 그 칼이 한 번의 실수로 어떤 상처를 남기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은 ‘결혼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소한 사실들은 변호사의 변론을 통해 날카로운 날을 가진 무기가 된다. ‘우리’였을 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너’와 ‘나’가 됐을 때 상처가 되어 두고두고 남는다.‘이혼’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영화제목을 ‘결혼 이야기’라고 한 것은 반전이나 역설의 의미보다는 두고두고 다스리고 지니고 가야할 상처, 시작보다 중요한 마무리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 이혼과정에 사랑, 양육, 과거와 미래, 성취와 돈의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등장하고 얽힌다. 그렇다고 치졸하거나 막장으로 치닫지 않는다. 어느 부분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섬세하며, 자연스럽다. 다양한 요인들이 등장하지만 복잡하지 않고, 날카로움이 오고가지만 불쾌하지 않다. 슬프지만 애처롭지 않으며, 끓어 오르지만 태우지 않고 은은하다. 탄탄하게 짜여진 내용 속에 예술영화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아담 드라이버와 폭넓은 연기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현실성, 그 현실성을 더해주는 주연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누구나 공감할 ‘이혼’을 다루는 ‘결혼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김규형*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서울·부산 일부 극장과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20-01-13

추방된 자들의 탈출하지 못하는 여정

“우리 이제 어디로 가지?”쫓기는 남자들. 갈림길에서 갈 곳을 잃는다. 딱히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세웠던 계획들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른다.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에 서게되는 남자들은 우정과 의리를 내세워 목숨을 건다.선택의 순간에 늘 동전을 던지는 이들은 근엄한 표정으로 결정된 길을 따라 이동하고, 머물며 권총을 뽑는다. 몰리고 몰리며 그들이 다다른 곳은 바다다. 홍콩을 가로질러 마카오로 건너가는 부둣가에서 남자들은 마지막 동전을 던진다.두기봉 감독의 영화 ‘익사일’에서 현실적이거나 스토리의 치밀한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시종일관 ‘폼’을 잡는다. 담배와 권총, 금괴탈취에서부터 하모니카가 등장하는 순간은 서부극의 전형이다. 황량한 사막에서 복잡한 현대의 홍콩거리로, 말 대신 자동차가 등장할 뿐 서부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 많은 오브제들을 서부영화에서 대놓고 차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부영화가 그러하듯 어디서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첫 등장부터 인물들에게 촘촘히 짜여진 사연은 없다. 그들의 인과관계는 느슨하고 사건의 기로에서 적이 됐다가 다시 아군이 된다. 오로지 상황과 그 상황 속의 액션에 집중한 영화다.그래서 영화 ‘익사일’은 호불호가 갈린다. 시종일관 ‘폼’만 잔뜩잡은채 끝을 맺고 있는 영화의 허망함에 실망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호쾌하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들이 주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적어도 그 액션 시퀀스들은 세련되고 창조적이며 화려하다. 영화를 위해 그 장면이 필요했다기보다는 그 장면을 위해 영화의 나머지들이 필요했다는 느낌이 든다. ‘익사일’에는 자그마치 다섯 개의 주요한 액션 시퀀스가 있으니, 그 기대감을 따라 108분의 러닝 타임이 빠르게 지나간다.두기봉 영화의 특징이다. 그의 영화에서 탄탄한 스토리가 각인되었던 영화는 ‘흑사회’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성긴 스토리와 어설픈 전개 사이로 반짝이고 재치있는 장면들이 알알이 들어가 박힌 영화가 바로 두기봉 스타일이다. 분명히 두기봉 감독은 그의 스타일을 살리는 장면을 위해 영화의 나머지 모든 것들은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 지는 ‘스패로우’ ‘대사건’ ‘매드 디텍티브’등의 영화들이 분명한 두기봉의 인장을 남기고 있다.오래된 사진 속에 남은 추억의 한자락처럼, 화려했던 홍콩 느와르의 재림을 위해 영화 ‘익사일’ 속의 주인공들은 현란한 춤과도 같은 액션장면을 연기한다. 서부영화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넘나들 때 ‘익사일’의 무대는 광활한 대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홍콩의 끝자락 한적한 부둣가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뒤로하고 좁고 어두운 홍콩의 뒷골목으로 들어선다. 서부영화가 어디로든 막힘없이 탈주하는 공간이라면, 영화 ‘익사일’은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지를 고르는 여정을 이어간다.추방(exiled)된 자들의 탈출하지 못한 여정에 놓인 다섯 개의 총격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하다. 유치하고 쓸데없이 근엄하고 ‘폼’잡지만 그 속에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액션 시퀀스가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다시 보게하는 이유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두기봉 감독의 ‘익사일’은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11-18

사람들 사이의 섬… 영화 ‘김씨 표류기’

섬이다.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안으로 문을 걸어 잠군 사람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또 다른 섬에 다다른 또 한 사람. 천혜의 고도가 아니라, 서울 한강변 아파트 숲 속 작은 방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여자 김씨. 그리고 63빌딩이 지척인 한강의 밤섬에 갇힌 남자 김씨.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여자 김씨에게는 언제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아니 열지 않는다. 유람선이 지나가고 인근 아파트와 빌딩의 낮과 밤 풍경을 손에 잡힐듯 지척에 두고서 다가가지 못하는 맥주병 남자 김씨. 아파트의 작은 방에 스스로가 만든 섬에 고립된 여자와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밤섬에 고립된 남자의 표류기다.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표류될 수 없는 곳에 표류된 두 사람의 고립된 표류기가 시작된다.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쾌속의 속도를 자랑하는 첨단의 디지털 세상에서 무엇보다 느리고 불확실한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두 명의 김씨는 열렬히 섬 밖의 세상을 갈구하지만 두려우면서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내레이션은 남자 김씨의 이야기에서 여자 김씨의 이야기로 옮겨 간다.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의 내레이션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의 섬으로 다가가고 동화되어 간다. 밤섬으로 떠내려온 쓰레기를 모아 무인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남자와 일상의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여자. 옥수수에서부터 자장면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연결고리의 에피소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인 해후를 이룬다.외로운 섬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며, 열렬히 갈망하는 한 없이 느린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화는 그들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되고, 고립된 섬에서 타인의 섬으로 도약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무거운 내용을 무겁지 않게, 자잘한 소품 하나까지 세심히 살려 영화 속에서 의미를 부여 한다. 쪽지가 담긴 빈 와인병, 오리배, 옥수수, 빈 깡통, 우산과 민방위 훈련까지 재치있는 소품들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이끈다. 이러한 소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는 자장면이다. 빈 짜파게티 봉투에 담긴 수프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에피소드는 세상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짜장면으로 완성된다. 야생(?)의 무인도에서 각고의 노력과 인고의 세월을 거쳐 완성되어가는 자장면 만들기는 희망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가를 보여준다.남자 김씨의 자장면은 잊고 있었던 삶의 또 다른 살아갈 이유가 되고, 이 과정을 지켜보는 여자 김씨에게 자장면은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유와 희망이 된다.일상의 속도에서 이탈한 두 사람.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아둥바둥했던 이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이탈한 이들의 세상에 가 닿는다. 세상 모든 속도가 일순간에 정지되는 민방위 훈련 에피소드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속도이며, 이들의 간절한 희망의 순간이 된다.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이탈하고 싶은 사람과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외로움과 무너지는 자존감이 엄습해 오는 순간, ‘내 삶에도 민방위 훈련의 싸이렌이 울렸으면’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 무엇보다 자장면이 너무 먹기 싫어질 때나 자장면이 너무 먹고 싶을 때, 이 모든 순간과 이 모든 이들을 위해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를 권한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는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10-07

‘커다란 도약’ 있게 한 ‘작은 발걸음’에 대해

인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어떤 성공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성공을 있게 한 고난과 역경의 과정은 가물가물하고 성공의 첫 발자국과 감회의 한마디만 깊게 각인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969년 7월 16일 지구를 떠나 7월 21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른 도약이다”라는 말과 함께 흑백 영상과 몇 장의 사진으로 길이 남는다. 그가 어떻게 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는지, 뚜렷한 기억과 별다른 호기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 놀라움이,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던 그 감동적인 순간이 너무나 강렬하여 당연히 준비된 선물처럼 그 성공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퍼스트맨’은 성공을 있게한 첫번째 실패에서 시작한다. 성공을 위해 몇 번의 실패가 있었으며, 거대한 프로젝트 속에서 한 인간이 느꼈을 감정은 어떠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바로 ‘커다란 도약’보다는 ‘작은 발걸음’에 집중한 영화다.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하기까지 아폴로 1호부터 10호가 있었으며, 그 이전에 제미니 1호부터 12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미항공우주국의 초음속 실험용 비행기 X15에 탑승해 시험비행을 하는 닐 암스트롱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된다.1957년 소련이 쏘아 올린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는 냉전시대 미소의 우주를 향한 경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후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최초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하게 되자 우주 경쟁에서 계속 뒤쳐지던 미국은 “1960년대 안에 인류를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바로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 된다.이를 위해 선결해야할 과제는 엄청난 무게를 지구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막강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을 개발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 본선과 탐사선의 랑데뷰, 도킹, 분리 등의 우주 비행기술을 발전시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시행된 것이 제미니 계획이었다.영화는 닐 암스트롱과 연관된 우주 계획의 과정을 보여준다. ‘커다란 도약’을 있게했던 동료의 사망과 개인의 두려움, 과정의 어려움이 제미니1호에서부터 12호, 아폴로 1호에서부터 11호까지 우주선의 이름과 함께 점증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좁은 우주선에 몸을 구겨넣은 모습. 커다란 진동과 거대한 소음 속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모습. 죽을 수도 있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는 여정을 앞두고 차마 어린 두 아들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모습 속에서 ‘커다란 도약’을 있게 했던 한 명의 인간이 내딛었던 ‘작은 발걸음’의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우리는 50년 전에 있었던 아폴로11호의 성공을 알고 있다. 익숙한 이야기에 가려졌던 한 인간의 고독한 여정 앞에서 달에 착륙해 첫발을 내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환희의 기쁨, 성공의 안도보다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가슴 먹먹함이 앞선다.영화 ‘퍼스트맨’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영화다. 우리가 인류의 달 착륙 과정을 지켜보던 위치에서 함께 달에 착륙시키는 영화다. 그는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퍼스트맨’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견뎌야했던 엄청난 무게의 고통을 안고 지구로 귀환한 ‘퍼스트맨’이었음을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영화‘퍼스트맨’은 네이버영화, 구글플레이,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19-09-09

석양에 돌아온 무법자, 황혼에 지다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때 황야를 어슬렁거리며 숱한 서부의 악인들을 쓰러뜨린 사나이. 그가 출연한 영화는 아니었어도 당대 서부를 피로 물들이든 숱한 위인들이 존재했던 시대. 지금 그 위인들의 한때는 기억하지만 그들이 생존해 살아갔을 뒷모습은 한번도 이야기된 적이 없으며, 누군가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았는지, 어느 오두막에서 천수를 누리며 쓸쓸히 죽어갔는지 알지 못한다.화려했던 한때, 인생의 최절정기에서 소멸해갔던 이들 속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은 한 인물의 이야기. 열차와 은행을 털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인을 저지르던 살인자는 젊고 어여쁜 아내를 맞아 술을 끊고 총을 놓은지 11년이 지났다. 아내가 천연두로 죽은 후에도 캔사스 촌구석에서 어린 아들과 딸을 돌보며 돼지를 키우며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우리는 그의 전성기(?)를 알고 있다. 과거 그의 행적과 악명을 알고 있으며, 젊은 시절 서부를 내달리며 그의 총구 앞에서 쓰러져갔던 또 다른 악인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에서 시작된 그의 행적은 이후 1965년 석양의 무법자에 이어 1966년 석양에 돌아오다의 무법자 3부작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살아남은 자, 서부에서 사라져갔던 이들의 뒷이야기이며, 스스로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무법자 3부작에서 세웠던 서부극의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다.1930년대부터 1950년대는 할리우드의 전성기였으며 서부극의 전성기였다. 당시 서부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이 분명한 정의로운 영웅과 전형적인 악인의 대립을 주된 테마로 삼았다. 선악의 대결이 얼마나 멋있고 치열한가, 살인의 명분을 악인의 악행으로 얼마나 쌓아 올리는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동일 주제로 다양한 변주와 유사품들이 헐리우드의 공장에서 숱하게 양산되던 시기다.1960년대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유사한 장르의 서부극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시절 최절정기에 이탈이아에서 만들어졌던 일련의 서부극을 지칭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가 있었고,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황혼에 돌아온 사나이스파게티 웨스턴은 정통 서부극과 결이 달랐다. 선악의 이분법이 흐려지면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선인과 악인의 명확한 지점에 있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총을 뽑던 인물들은 돈을 위해 총을 뽑고, 정체성에 있어서도 선인과 악인의 경계지점을 오가고 있었다. 정통 서부극이 대결에 있어서 일련의 신사적(?)인 룰을 가지고 있었던데 반해 스파게티 웨스턴은 일대일의 결투에서부터 일대 다수의 결투까지 상상할 수 있는 대결의 다양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었다.그곳에서 살아 남은 자. 무법의 세계에서 촌구석의 농부로 돌아 온 자. 이곳에서 나이를 먹은 무법자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무법자 3부작의 신화를 스스로 해체하고 재해석한다. 그것은 부정과 연민이 아닌 한 시대의 종말을 향해가고 있으며, 영화 속 인물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현실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삶의 변화과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황야에서 보냈던 과거를 마무리하는 중년의 고별사가 되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8년작인 그랜 토리노는 197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했던 영화 더티 해리 5부작의 황혼에 들어선 마무리처럼 보인다. 형사물인 더티 해리는 미국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스펜스 영화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인물이 고스란히 나이를 먹고 황혼기에 접어 들었을 때, 그의 일상의 문제와 직면했을 때의 내용을 그리고 있다.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하고 무료한 일생을 보내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전 참전의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이런 남편의 참회를 바라던 아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버틴다. 그의 차고 속에 고이 모셔 두기만 했던 자신의 1972년산 자동차 그랜 토리노와 이웃집 몽족과의 예기치 않은 얽힘으로 전개된다.한국전 참전에서부터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월트 코왈스키’는 그가 직접 조립한 포드사의 그랜 토리노와 함께 전형적인 미국인을 상징한다. 이웃의 몽족은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있는 현대 미국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가장 미국적이며 보수주의자인 그의 실제 모습을 투영하며 그의 영화 속 인물이었던 더티 해리와 또 다른 작별을 고한다.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서부시대를 살았던 사나이의 중년에 들어선 고별을 목격했다면, 70년대 미국의 정의를 위해 총을 들었던 사나이의 황혼에 들어선 고별을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목격할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제 살아왔던 영화 속 인물들이 늙어가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해 영화와 실제 삶을 오가며 그의 과거를 영화 속에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두 편의 영화는 ‘클린스 이스트우드‘가 영화 속에서 쌓아왔던 삶과 영화 바깥에서 살아왔던 삶의 기록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전개시키고 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그 이후 그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한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같이 나이를 먹고 있었고, 그 모습 그대로 영화 속으로 이어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적 역사와 개인적 역사가 함께 녹아 들어가 있다.2008년 그랜 토리노에서 이 일련의 작업은 종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영화 배우이며 영화 감독으로, 영화 속 삶과 영화 바깥의 삶을 함께 녹여내며 마무리했던 최종 결과물이 영화 그랜 토리노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몇 편의 영화들을 더 연출했지만 배우로 출연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지를 들고 돌아 온 거장2018년 90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가 87세의 마약 운반원의 실화를 다룬 영화 라스트 미션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로 다시 돌아 온다. 영화 바깥의 삶을 영화 속으로 다시 끌어들여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이를 등장시켜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원예사업을 하는 ‘얼’은 자기 분야에서 유명인이며 잘 나가는 사업가이다. 바깥으로 맴돌며 가족을 돌보지 못한 남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사업은 망한다. 늦게나마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지만 그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 그리고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물건을 운반해주면 돈을 준다는 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물건은 마약이었다.영화가 시작되면 2008년의 황혼에 접어들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0년이 지난 모습이 등장한다. 황혼을 지나 노쇠한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등장한다. 구부정한 어깨, 활처럼 휘어버린 등, 더욱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이 그대로 느리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현실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 온 것이다. 세 편의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의 육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종결되었던 그의 영화 속과 영화 바깥의 삶이 라스트 미션에 다시 이어지면서 마무리하고자 했던 그의 영화 안과 밖의 ‘미션’이 아직 남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인 ‘월트 코왈스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라는 것과 라스트 미션의 ‘얼 스톤’또한 한국전 참전 용사라는 점과 가족과의 관계는 여전히 서먹하다는 동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시 영화 ‘안과 밖’을 버무려 돌아 온 이유, ‘마지막 미션’은 무엇일까. 정의로운 죽음, 혹은 사라짐의 선택지를 택했던 그가 또 다른 마무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그것은 라스트 미션의 마지막 장면인 교도소에서 평안히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또 다른 ‘마지막’선택지라고 그의 귀환을 알리는듯 하다. 90세의 노장. 죽음과 사라짐, 평안의 공간을 보여주었던 결말들에서 이제 더 이상 그의 영화 ‘안과 밖’을 함께하는 귀환(영화)은 없을 것 같다.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기대에 가득 찬 영화관람을 할 것이다.영화적 삶과 영화 밖의 실제적 삶을 세월의 궤적과 함께 쌓고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는 전무하다. 그의 온전한 인생이 ‘영화적 삶’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장르가 되어 버렸다.락 그룹 시카고의 대표곡인 데스페라도(Desperado)의 가사,‘무법자여, 오, 당신은 더 이상 젊어지지 않아요 Desperado, oh, you ain‘t gettin’ no younger/…울타리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요 Come down from your fences, open the gate/만약 비가 올지 모르지만, 당신 위에 무지개가 있어요 It may be rainin‘, but there’s a rainbow above you/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게 더 좋을 거에요 You better let somebody love you/ 더 이상 늦지 않게 Before it‘s too late ’의 가사처럼 시작해 조정권 시인의 독락당(獨樂堂),‘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벼랑 꼭대기에 있지만/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이처럼 스스로 올랐던 길을 부숴버린 그 어떠한 경지 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머물고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사다리를 내리고 조용히 찾아와 그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를 일이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그랜 토리노’ ‘라스트 미션’은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08-05

근대의 탄생을 알렸던 세 개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한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은 각국의 이해타산에 의한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초유의 사태가 가져 온 충격적인 현실의 폐허 더미 속에서 인간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초인과 악당, 삶과 죽음, 자유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반성’과 ‘자책’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이 시간도 그리 깊고 길지 않았다. 승전국들이 두드린 계산기는 ‘패권’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들의 계산기를 의심하기보다는 결과치에 치중한 발빠른 각종 협정과 조약들이 체결되어 갔다. 이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전시대를 겪으며,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지금까지도 분단국가로 남아 전세계 뉴스의 중심에 등장하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이 충분하지 않았는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던졌던 수많은 질문과 철학적인 사고들이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던가. 혹은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악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반성과 질문이 그나마 지금의 평화로운(?) 상황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가.전지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을 중심으로 ‘지나친 민족주의는 유럽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협력과 통합을 통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시도가 일어난다.세계의 멸망이 아닌 유럽의 멸망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연설에서 “유럽도 UN과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함으로써 유럽 연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하게 된다.1948년 헤이그 회의에서 약 800여명의 통합론자들이 본격적으로 유럽 통합의 구상을 시작하는데, 유럽의 경제,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통합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이후 1958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이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CC)를 설립하게 되고, 1967년 뜻을 공유하는 각종 기구들이 유럽공동체(EC)를 결성하게 된다. 가입국이 늘고 정치와 문화적인 통합이 성장하게 되면서 좀 더 견고한 공동체 설립의 희망이 커져갔고, 1991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타결과 1993년 발효로 경제공동체, 외교, 안보, 치안까지 하나로 묶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게 된다.… 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제작된 이 영화에서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집약된다.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이해되는 것은 아니다.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사랑’이지만 이 역시모든 퍼즐을 완벽하게맞추지 못한다 …△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현대적 질문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평화’에 대한 열망과 반성의 토대 아래 결성된 유럽연합이 지금 ‘경제’라는 요인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폐인의 경제난과 영국의 브렉시트 모두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폐허의 더미 속에서 던졌던 존재론적 질문보다 경제적인 질문을 먼저 던지고 깊게 사유해야만 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역사에 문화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역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의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연장치로써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선택되어져야할 것이다.1993년 유럽연합이 출범하기 직전에 만들어진 폴란드 출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삼부작 : 블루, 화이트, 레드’는 프랑스 국기의 색깔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로 질문을 던진다.프랑스는 매년 7월이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열린다.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선언하며, 전세계에 이 세 가지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자랑스러워 한다. 200여 년 전에 일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는 막중한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대한 감격과 영광의 표현이기도 하다.전근대와 근대의 기점을 나누는 세계사적인 사건의 결과로 도출된 ‘자유·평등·박애’를 유럽통합을 앞 둔 시점에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는 ‘세 가지 색 삼부작’은 그리 주제를 표현하는 서사가 직접적이지 않다. 우선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이 던지는 질문의 문항은 간명하지만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영화의 줄거리는 간명하지만 그 안에 쉽게 해석되지 않는 수많은 은유들이 간단하게 연결되거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직접적이지 않고 에두른다. 이쯤이라고 생각했을 무렵에 한 발 더 들어가며 들어 온 길을 지워 버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선명한 이미지 블루, 화이트, 레드와 세 명의 여주인공이다.먼저, 자유에 대한 영화 ‘블루’는 ‘기억’과 ‘관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가족들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줄리는 유명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다섯 살 난 딸 안나를 잃고 혼자 살아 남는다. 줄리를 둘러싸고 있던 가장 끈끈한 ‘관계’였던 가족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과정을 이행한다. 먼저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인 집을 떠나고, 그 와중에 그들이 함께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린다. ‘줄리 드 꾸시’라는 이름을 버리고 결혼 전의 이름인 ‘줄리 비용’으로 살아가지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고통스러운 사투를 벌인다. 유럽통합 기념곡을 만들던 남편의 악보까지 버리고 파리의 집까지 가져 온 유일한 물건인 샹들리에는 푸른색이다. 딸아이가 남긴 유품인 파란색 사탕을 마구 씹어먹거나 푸른 수영장으로 헤엄치며 잠기는 줄리의 모습을 담은 미장센들은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과거의 기억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 몰랐던 사실(기억)과 또 다른 관계가 그녀의 도달하고자 하는 자유 속으로 파고든다.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자유의 결정이 또 다른 요인들로 기억을 생산(재생산)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슬픔, 우울을 의미하는 ‘블루’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장면에 등장하고 삽입됨으로써 자유와 함께 내포한 의미 그대로 영상언어를 형성한다. 여기에 음악의 시각화를 웅장하고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영화는 블루라는 시각적 이미지와 음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어울려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남긴다. 특히 악보를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짚어 나가는 장면에 울리는 음악은 강렬하다. 영화는 ‘자유란 기억과 관계의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묻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고립되고, 당겨지면서 기억과 관계는 자유의 의미를 훑는다.△ 유럽통합 직전에 던진 질문, 아직도 유효하다.‘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평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화이트’는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전개된다. 폴란드인 미용사 카롤은 프랑스인 도미니크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지만 성적불화로 이혼당한다. 이혼으로 재산을 빼앗기고 방화범이란 누명까지 쓴 채 노숙을 하던 그는 길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폴란드인 미콜라이의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가까스로 폴란드로 돌아 온다.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법정 장면은 장소를 옮겨 폴란드에서 반복된다. 프랑스어와 폴란드어의 의사 소통과 정치·경제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두 나라의 차이가 형식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특히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할 때 평등은 억압이라는, 자유와 반대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자유, 정치적 자유 모두 평등과 타협(혹은 절충)한 용어일 뿐이다. 법정 장면의 형식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카롤과 도미니크의 결혼 장면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동일한듯 하지만 다르다. 바로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등의 차이(평등이라는 인식의 차이)와 층위를 말하는 것이다.구속, 괴롭힘, 억압과 자유, 죽음, 부활이 ‘평등’을 에워싸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가 선택의 문제에 있는가 인식의 문제에 있는가를 묻는다. ‘세 가지 색 삼부작’ 중에서 제법 쉽게 읽히는 영화가 ‘화이트’이지만 감독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가는 순간 다른 연작들과 다르지 않은 난해함을 겪는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시각적·청각적 영화언어는 유려하다.‘세 가지 색 : 레드’는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레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중에서 ‘박애’를 뜻하고 있으며, 영화 ‘세 가지 색 삼부작’의 총합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스위스 제네바 대학 학생이며 패션모델로 활동하는 발렌틴은 패션쇼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개를 치는 교통사고를 내게 된다. 개의 목에 달린 인식표를 보고 주인을 찾아가고, 개 주인은 은퇴한 법관이며 남의 집 전화를 도청하는 기벽이 있음을 알게 된다.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법정에 있을 때보다 세상 일이 더 잘 보여. 적어도 여기엔 진실이 있지”라고 자신의 기벽을 설명하는 은퇴한 판사. 법의 집행자였던 이의 탈법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그리고 일어나는 일련의 전개들이 도대체 ‘박애’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연작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는 난해함의 강도가 강하다. 직접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제와 연관된 최소한의 장치를 쉽게 제공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유’와 ‘평등’이 대치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지만 ‘박애’ 안에서 포용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세 편의 영화는 법정이라는 장소에서 스치듯 서로 만난다. 그리고 유리병을 재활용하는 노인의 모습이 장소와 방향을 달리해 보여진다. 각각의 영화에서 특정한 기억들은 반복되고, 약간의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반복되는 지점이 있으며 결을 달리한다. 장소의 겹침과 특정 장면의 반복은 동시대성을 말한다.유럽연합의 출범을 앞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감독의 의견은 ‘레드’의 마지막에 집약된다. 그래도 그 집약이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근접한 것이 ‘사랑’이지만 이 역시 모든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 가지 정신의 층위를 유럽통합이라는 하나의 거대조직 안에서 얼만큼 녹여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1993년 크쥐쉬토프 키엡슬롭스키 감독은 먼저 던져 보았다. 2019년, 그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며 해답은 요원하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위에 소개된 세 편의 영화는 네이버영화와 구글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19-07-08

미지의 존재는 우리의 어떤 기억으로 오는가? ‘미지와의 조우’ & ‘콘택트’ & ‘컨택트’

밤 하늘의 무수한 별을 올려다 보던 소년.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하던 소년은 ‘청춘이다하였음’에도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중년이 되었어도 다 헤지 못하고 오늘도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그때 밤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던 그 기억, 그 꿈들은 우주의 어느 행성 사이를 오고가는지.어느 날, 출근을 위해 잠이 덜 깬 눈으로 입에 칫솔을 물고 아침 뉴스를 보고 있노라니 긴급속보가 뜬다. 미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들이 지구에 나타난 것이다. 또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베가성(직녀성)’으로부터 정체 모를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멀리 계신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들의 지구 방문 목적은 무엇이며, 공격을 해야 하나, 베가성은 어디고, 저들은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 속에 오늘 출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냐는 갈등까지 더해진다.일련의 전문가들은 그들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 외계인의 지구방문 목적과 그들이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추측하고 그 와중에도 서로 난상토론을 벌이며 싸우기 바쁘고, 전세계 지구인의 다양한 양태들을 TV는 열심히 실어 나른다. 혼란스러운 화면에 크게 ‘잠시 후 대통령 긴급 담화 발표 예정’이라는 자막이 하나 뜬다.이러한 출현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지구인)는 그들과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하여 그들의 지구 방문 의도를 파악할 것인가.△ 미지의 존재로부터 온 초대장미지의 세계에서 온 외계인과의 조우에서 무엇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며, 그들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인종과의 조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적어도 우리는 지구에서 같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형태적인 유사성이라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온 존재는 형태부터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유성음과 무성음으로 이루어진 언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러한 외계인과의 첫 접촉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미지와의 조우에서 ‘음악’을 그 도구로 사용한다.외계인의 출현으로 전세계의 과학자들은 외계인과 통신할 수 있는 음악코드를 개발해서 그들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음악은 규칙이다. 그 규칙은 수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수학적 비율을 통해 음악이 만들어진다. 소리는 ‘진동’이다. 진동수가 클수록 진동이 빠르고, 더 높은 소리가 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수학적 비율과 진동, 그리고 그 진동을 시각화한 전광판으로 ‘미지와의 조우’를 시도한다.세계적인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는 제목처럼 미지와의 ‘접촉’을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우주에 만약 우리만 있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겠지”밤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던 소녀는 자라서 전파천문학자가 되어 아버지가 들려줬던 말을 따라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 SETI)’프로그램에 지원한다. SETI 프로젝트는 전파 망원경을 통해 우주로부터 오는 각종 전파 중에서 인공 전파를 수신해 외계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다. 어느 날, 주인공인 앨리 애로워는 베가성(직녀성)으로부터 정체 모를 메시지를 수신한다. 처음 그 신호는 점멸하는 단순한 신호로 해독 결과 수학적으로도 분석이 가능한 유의미한 신호이며 인공적으로 보내진 신호로 밝혀진다. 수학적 분석이라고 하지만 그 분석 기준은 점멸하는 신호가 지속적으로 보내는 신호는 바로 ‘소수(1과 자신의 수로 밖에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수로 그 개수는 무한하다)’의 나열이었다. 이후 이 소수 배열의 신호 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들어 있음을 알게되고 이 정보를 해독하여 미지와의 ‘접촉’을 어떻게 이어가느냐의 내용이다.수신된 신호를 두고 ‘우호와 적대’의 갈등양상은 신과 종교, 과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 존재의 의미 등 다채로운 충돌을 보인다. ‘오컴의 면도날(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는 뜻으로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며 수사였던 오컴의 윌리엄에서 따왔다)’을 들어 베가성에서 미지의 존재가 보냈던 신호 속에 내재된 정보는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보내는 ‘초대장’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초대장’을 통해 ‘로젠의 다리(서로 다른 두 시공간을 잇는 구멍으로 웜홀이라고도 한다. 그 이전에 고안자의 이름을 따와서 아인슈타인 -로젠의 다리라고 불렸다)’를 건너 미지와의 조우를 한다. 그리고 그 미지의 존재는 우리들 기억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더 이상 시작과 끝이 무의미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표기법만 약간 다르며 같은 뜻의 영화제목을 가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 역시 외계인과의 첫 ‘접촉’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컨택트는 어떤 이유였는지 국내 개봉에서 어라이벌(Arrival, 도착)이라는 제목을 버리고 ‘컨택트’를 취한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미지와의 조우에서 음악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콘택트에서 수학을 대화의 수단으로 삼았는데 반해 컨택트는 음성이 배제된 시각적 언어(문자)를 통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 것인가를 영화에 담는다.12개의 거대한 비행 물체(쉘)가 세계 각지 상공에 등장한다. 역시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세계 각국은 협업을 통해 이들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이에 각개 각층의 전문가들이 동원되고 미국에서는 언어학 전문가 루이스 뱅크스 박사와 천체물리학자 이안 도넬리를 소환하여 접촉을 시도한다. 인문학과 과학의 협업이 처음부터 수월하지 않다. 이안이 쓴 저서의 서문 ‘언어가 모든 문명의 초석이다’를 두고 “과학이 모든 문명의 초석이다”라고 웅수하며 서로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두고 긴장감을 유발한다. 하지만 18시간마다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쉘 내부로 진입한 순간 놀라움과 함께 ‘어떻게’를 두고 협업의 단계로 곧장 진입한다.쉘의 내부에서 투명막을 두고 마주한 지구인과 외계인은 각자의 문자로 서로의 존재와 이름을 지칭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외계인이 허공에 그들의 이상한 다리를 펼쳐 표현하는 문자는 비선형 철자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떠한 언어 문자와도 다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접촉’의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주인공 이안과 그녀의 딸 ‘한나’와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회상(?) 장면이 연결되어 있다. 그 장면은 불규칙적으로 한나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다. 어떤 장면은 성장이라는 순차적인 과정이 아닌 순서가 뒤바뀌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외계인과의 접촉과 한나의 등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영화적 시간)의 흐름을 방해한다. 이는 외계인과의 접촉을 반복하며 조금씩 그들의 문자를 이해하는 과정에 그들의 문자가 가지는 ‘시간’이라는 특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햅타포드라고 지칭되는 외계인의 문자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시간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지구인에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직선을 그리며, 이러한 시제가 한 순간 한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지구인의 다양한 언어에는 반드시 시제가 등장한다. 물론 그 시제가 흐릿한 언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거의 모든 언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햅타포트의 문자에는 이러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선형 문자인 햅타포드 문자는 그래서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구의 거의 모든 언어가 가로든 세로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시작과 끝이 분명함에 반해 햅타포드의 문자는 시작과 끝이 없다. 바로 시제가 혼재된 문자이기 때문이다.영화 컨택트는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언어학적 가설인 ‘사피어-워프 가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존재는 시간을 포함해 다른 언어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겨우 몇 단어의 햅타포트 언어를 이해하게 되면서 한 단어의 중의적인 해석을 두고 협력관계였던 세계 각국은 의견이 갈린다. 갈린 의견에 따라 한 국가가 외계인에 대해 ‘공격’이라는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자 세계는 공격의 카드를 꺼내든다. 그리고 공격할 것인가, 대화할 것인가의 결정을 두고 이야기는 절정에 오른다.미지와의 접촉, 낯선 세계에서 온 존재들과의 대화의 도구로 음악, 수학, 문자를 사용한 세 편의 영화는 ‘접촉’이라는 공통된 내용으로 각기 다른 전개를 펼친다. 그 속에 철학적인 질문과 수학적·과학적 질문과 용어들을 등장시킨다. 어려울 수 있지만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들이다. 등장과 함께 공격하거나 ‘접촉’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생략한 수많은 외계인 등장 영화들과는 다른결의 영화들이다.이 영화들을 통해 오늘, 모처럼 밤 하늘을 올려다 본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들을 향해 안테나를 높이 올린다. “아~! 아~! 들리는가? 들리는가? 응답바람!”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위에 소개된 세 편의 영화는 네이버영화와 구글플레이,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으며, 일부 문장은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차용하였습니다.

2019-06-10

세상의 모든 첩보원과 직장인에게

△사소한 즐거움을 위해 던진 사표뒤늦은 나이에 홍보담당으로 7년여의 직장생활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의 직장생활은 좋았다. 금전적인 안정과 ‘이것도 경험’이라는 배짱과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회사의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편리한 시스템과 직장 문화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로가 누적되고 한번쯤 딴 생각을 할 시점에 정확하게 통장으로 입금되는 급여가 달콤했다. 거기다 내가 회사를 선택한게 아니라 회사가 나를 선택했으니 언제든 왔던 곳(들판)으로 돌아갈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었다.횟수를 거듭할수록 자신있고 당당했던 들판의 정서가 옅어지고, 승진을 거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인간관계와 묶여 있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간 정확하게 지켜졌던 정시출근·정시퇴근과 휴일의 자유로움이 침해받으면서 안정된 생활과 들판의 기질이 수시로 부딪치고 있었다.저녁 여섯 시,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퇴근길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없는 나날이 많이지면서 ‘사표’를 던져야한다는 울림은 커져만 갔다. 퇴근길 운전하며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만큼의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더 나은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에겐 특별한 계획이나 더 나은 자리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 그저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더 이상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이전에 고단한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직의사를 전하고 사직서가 수리되기까지 한달여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은 황폐했으며, 갑상선 기능 항진증 등 몸엔 이상 반응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들판’은 여느 직장인들이 꿈꾸는 일탈과 희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근사한 여행의 계획도, 평소 하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자유의지로 분주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묶이지 않는,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과 의무적으로 해야할 약속이 없음과 2천여 명의 직장동료와 같은 시간의 궤적(삶의 궤적까지)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지극히 나의 전공과 맞았으며, 여느 동료들보다 상대적인 자유로움을 가졌던 직장생활이었으며, 드라마틱한 순간과 이색적인 체험의 순간이었던 직장이었지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겪었으며 겪고 있을 지극히 현실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음이다. 화려하고 이상적인, 신비롭고 은밀한 직업, ‘직장인으로서의 스파이’를 보여주는 두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다.△직장인의 해고, 그리고 사내 정치이번 ‘영화 읽기’에 소개할 두 편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모스트 원티드 맨’은 첩보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존 르카레’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존 르카레는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SIS, Secret Intelligence Service) 출신으로 MI6(영화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정보기관으로 영국의 대외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비밀정보요원 신분으로 소설작가로서 일을 병행하고 있던 르카레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흥행을 하게되면서 전업작가로 나서게 된다. 그의 소설처럼 두 편의 영화엔 화려한 액션이나 박진감 넘치는 작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시선을 빼앗는 풍광도 스파이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썩은 사과가 있네 짐. 찾아서 도려내야해” 영국 비밀정보부(MI6) 국장인 ‘컨트롤’은 ‘짐 프리도’에게 조직(서커스)내 침투한 러시안 스파이(두더지)를 밝혀내기 위한 비밀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작전의 실패로 인해 책임을 지고 ‘컨트롤’은 조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조지 스마일리’는 해고 당한다. 스파이의 해고. 여느 직장인의 해고와 다르지 않다. 조용히 책상을 정리하고 쓸쓸히 다니던 직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그 이후의 일상은 습관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갑자기 찾아 온 넉넉한 시간과 특별한 목적없는 일상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영화 전반부를 채우고 있다. 이후 은퇴한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에게 서커스 내에 침투한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를 색출해달라는 임무를 맡기를 맡긴다.1960년대 미소 냉전시대 첩보전이 심화되던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들의 소련 이중간첩 사건인 ‘5명의 고리(Rings of five)’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을 존 르카레가 소설로 재구성했고, 이 원작이 바탕이 된 영화엔 그간 봐왔던 스파이의 첨단 무기나 액션, 스릴있게 펼쳐지는 긴장감과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반전은 없다. 서류를 챙기고, 보고하고, 분석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승진을 위해 동료를 견제하는 자잘한 직장 내의 정치가 있을뿐이다. 인정을 받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노후를 위해 스트레스를 참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의 애환으로 보여질만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여느 첩보물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존 르카레의 실제 직업 경험에서 나왔던 전문 용어와 은어들, “원작을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축약해서 보여주며 전혀 친절하지 않은 전개 탓에 더욱 더 낯설고 지루하게 볼 수도 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성, 동성, 양성의 성적정체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설정을 간단하고 은유적으로 처리해 버림으로써 영화의 이해를 쉽지 않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무슨 영화적 재미를 지니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단 하나의 장면과 대사도 놓칠 수 없는 빡빡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도 된다.등장인물들의 성적 정체성은 동료이며 연인으로, 적으로 그 위치를 바꿔가며 영화를 또 다른 차원에서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영화 전체에서 딱 네 발의 총성이 울리고, 세 명의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이 영화를 첩보물이며, 연애담(혹은 치정극)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이다.마지막에 이중 간첩이 밝혀지고 스마일리는 그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이중 간첩은 “도덕적 선택 못지 않은 미학적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덕적 선택’은 이념과 애국심 사이의 선택이었으며, 또 다른 선택의 요인으로 애정의 문제를 고려한 선택, 복잡하고도 미묘했던 순간의 ‘미학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긴말 필요없이 단순하게 이 영화의 구조는 ‘집 나간 아내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시작하여 ‘집 나간 아내가 돌아왔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스파이, 특급비밀, 첩보활동, 은어들이 난무하는 영화 속에서 직장인의 애환과 애정사를 배치할 때,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1970년대의 냉전 속에서,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진 직장인의 애환이 겹쳐지며 묘한 매력과 다양한 퍼즐 맞추기의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 읽기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매끄럽게 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존 허트, 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톰 하디, 베네딕트 컴버배치까지 쟁쟁한 배우들의 말끔한 연기가 한몫을 하고 있다.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결재서류에 사인하는 순간이 주는 극도의 긴장감역시 존 르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은 ‘2001년 모하마드 아타는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911 테러를 구상, 계획하고 정보 수급 실패와 부처간 경쟁 탓에 별다른 방해 없이 공격을 시행하게 된다. 현재까지 함부르크는 주요 경계 도시로 분류돼 2001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독일 및 국제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미소 냉전시대가 저물고 주적이 서방과 아랍으로 대치되었다. 전쟁의 위협에서 테러의 위협으로 갈등의 양상은 전이 되었고, 내부의 적을 향하던 사건의 전개는 외부의 적을 향한 확신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이 영화 역시 화려한 액션이나, 첨단 무기, 탄탄한 몸매와 외모를 자랑하는 스파이와 풍성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나마 몇 발의 총성이 울렸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비해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여느 첩보영화 못지 않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 발의 총성보다 서류에 사인하는 것이 더 긴장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좌천되어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의 수장인 군터 바흐만. 정보원을 미끼로 대어를 낚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에게 함부르크로 밀항한 무슬림 청년이 나타나고, 이를 통해 대어를 낚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간명한 스토리만큼 영화는 직선적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처럼 은유적이지 않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할 만큼 복잡하지도 않다. 바로 이 직선적이고 간명함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원동력이다. 가장 현실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도 ‘직장인으로서의 스파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연기한 군터 바흐만의 뒷모습은 일상의 피곤함에 찌들려 퇴근하는 직장인의 쓸쓸한 뒷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단독 주연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저녁이 있는 삶’을지금도 즐겨 듣는 저녁 6시 라디오 방송프로의 오프닝 멘트에서 언제였던가 “우리를 위로하러 날마다 저녁이 오고 있다”는 대목을 들었을 때의 벅차오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첩보원과 직장인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계신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로 시작하는 라디오 오프닝 멘트와 ‘세상의 모든 음악’을 보낸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안톤 코르빈 감독의 ‘모스트 원티드 맨’은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05-13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강호(江湖)에서

△무협 영화의 ‘수직과 수평’, 그리고 ‘강호(江湖)’액션 영화의 기대치는 ‘강도’에 있다. 총이든, 칼이든 맨손이든 도구의 차이가 있을뿐 형식은 그것의 수직과 수평의 조화에 있다.박진감 있고, 멋지고, 화려하고, 호쾌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의 기저에 바로 ‘강도’가 있다. 그리고 그 ‘강도’에 술(術)과 도(道)와 예(藝)의 의미를 부여하여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고 있는 액션 영화의 장르가 있으니 친숙하고 좋아하는 무협 영화다.무협의 장소는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달빛 고요하고 갈대숲 바람에 살랑이는 나루터이거나, 번잡한 저잣거리이거나, 말을 묶어두고 협객들이 목을 축이는 주점이거나, 대륙의 깊은 곳 모랫바람 휘날리는 사막의 초입이거나. 무협 영화는 이 모든 장소를 묶어 ‘강호(江湖)’라 지칭한다. ‘강호’라는 말뜻의 유래는 다양하지만 그 단어가 주는 울림과 분위기는 수많은 무협 영화를 섭렵하며 자연스럽게 알고 있거나 알 것 같다.무협 영화의 협객들은 이 강호를 들고 남을 반복하며 강도의 수직과 수평을 반복한다. 강호에 들어갈 때의 명분(보통 이 명분은 역사적 사명이나 복수를 목적으로 한다)과 강호를 떠날 때의 구실을 통해 강도만 있던 무협의 세계에 철학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려 넣는다.‘….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이긴 자는 누구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리듬만 들어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무협 영화의 유명한 노래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의 가사일부다. 모든 미련을 버리고, 피가 낭자하고 목숨이 오고갔던 강호를 물러나는 이의 인생무상의 정서가 가득하다.‘…. 의연하게 서서 일만근의 파도를 바라본다/열혈은 태양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니/담력은 단련된 무쇠와 같고, 뼈는 정련한 강철과 같다/가슴에 거대한 포부, 눈빛은 끝없이 멀리/온 마음으로 사나이가 될 것을 내게 맹세한다….’ 영화 ‘황비홍’의 유명한 노래 ‘남아당자강(남자는 마땅히 자기 스스로 강건해야 한다)’의 가사 일부다. 그 내용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강호에 들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각오가 대단하다. 무협 영화의 가장 유명한 두 노래 역시 강호의 들고 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무협 영화는 이처럼 강호(江湖)와 강도를 기반으로 한 구조적인 형태의 장르다. 이 구조 속에서 액션은 공중을 날아다니고 장풍이 오고가며, 칼바람에 거목이 쓰러지고, 휘어진 대나무 위에 가볍게 내려 앉아 몸짓 한 번으로 무수한 적들을 쓰러 뜨린다.△무협 영화의 형식을 빌어 상실과 고독을 이야기하는 ‘일대종사’왕가위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가 시작되면 주인공 엽문(양조위)이 말한다.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거리에서 적들은 수직으로 다가와 수평으로 무너지고 그 적들과 함께 주변의 기물들은 함께 수평으로 밀려나 부서진다. 수직으로 내리긋는 비 속에서 최후까지 수직으로 남는 자가 바로 엽문이다. 이 대사는 다시 영화의 결말에서 반복된다.양조위가 연기한 영춘권의 일대종사 엽문이 실존인물인 반면, 팔괘장의 유일한 후계자로 남아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장쯔이가 연기한 궁이는 허구의 인물이다. “무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천지, 마지막으로 중생을 보는 것”은 팔괘장의 제창자 궁이 아버지 궁보삼의 대사다. 남방 무술의 영춘권과 북방 무술의 팔괘장, 남자와 여자의 차이만큼 무술을 대하는 두 사람의 세계관은 출발이 다르다.팔괘장의 수제자이며 궁이와는 남매와 같은 마삼(장진)이 궁이의 아버지를 해친다. 하지만 아버지의 벗과 친척들은 모두 복수를 말린다. 이는 궁이 아버지의 대사 속에 녹아 있는 무술을 대하는 태도와 통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궁이는 복수를 결심하면서 수평과 수직의 세계, 이기고 지는 엽문의 대사 속으로 들어간다.이에 반해 엽문은 수직과 수평의 세계에서 무술의 또 다른 세계로 한발짝 들어간다. 영화에서 엽문은 팔괘장, 형의권, 홍가권 고수에게 한 수씩 지도를 받는다. 이 지도는 무술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각 문파별로 계승되어 온 무술의 고유한 세계관을 읽는 과정이다. 이 세계관은 각 무술의 품새가 보여주는 동작의 의미를 통해 삶의 철학을 두고 겨루는 대결이기도 하다. 이 중 가장 백미는 엽문과 궁이가 ‘전병’을 맞잡고 겨루는 대결로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느리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대결의 와중에 궁이는 영춘권의 자세를, 엽문은 거기에 호응해 팔괘장의 자세를 취한다. 어찌보면 춤을 추는 것처럼, 두 연인의 희롱과도 같은 느낌으로 표현되었다.무협 영화의 형식을 빌어왔지만 ‘일대종사’는 기존의 무협영화와는 다르다. 이 속엔 액션의 강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며, 강호(江湖)의 들고 남보다는 일제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 속에 머무르며, 맞닿을 수 없는 인연과 높고 높은 경지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흐르는 독백처럼 ‘일대종사’는 왕가위적인 색채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다.△아름다운 풍경에 담긴 ‘인간’ ‘자객 섭은낭’수직과 수평, 강도의 무협영화에서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지워낸 한 편의 무협영화가 있으니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이다. 액션은 아예 없다고 할 정도로 짧고 간단하다. 살인의 이유, 죽이는 자와 죽는 자의 관계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없다. 여기에 영화 초반 흑백으로 섭은낭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을 제외하고 자객은 아예 살인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다.영화의 무대는 당나라다. 당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변방의 위박을 속국으로 삼으려 했지만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히게 되고 마침내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한다. 그리고 위박의 절도사 전계안과 그 집안의 관계를 둘러 싼 암살과 복잡다단한 얽힘이 이야기를 끌어 가고 있다.어려서 집을 떠난 섭은낭은 스승에 의해 암살자로 키워진다. 어느 날, 위박 지역의 절도사이자 정혼관계였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 온다. 하지만 옛 정 때문에 암살을 포기하고 스승과 부모에게 작별을 하고 신라로 떠난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간단한 줄거리에 복잡다단한 얽힘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없고, 감독 또한 이러한 관계를 설명할 별다른 장치들을 마련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여기에, 이기고 지는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제외되어 있다. “너는 검술은 완벽하게 익혔으나 마음이 모질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섭은낭의 스승 가신공주의 말 속에 자객으로써 갖추어야할 필수적인 자격요건중 하나인 ‘마음’이 자객답지 못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섭은낭이 암살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나, 두려움과 도덕적 갈등을 표정에 담거나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조용히 듣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이 다가왔다가 사라질 뿐이다.‘이유없음’이다. 정치적 음모나 복수, 강호의 도리는 없다. 주인공 섭은낭의 표정에서조차 읽히지 않는 까닭모를 ‘멈춤’에 가깝다. ‘망설임’으로 읽힐지도 모르지만 섭은낭의 실력과 주저없는 물러남으로 봤을 때 ‘멈춤’이라고 표현하는게 적절하다. 섭은낭의 ‘섭’은 귀 이(耳)자 세 개가 모인 글자로 ‘소근거리다’는 뜻이다. 잘 듣는다는 의미다. 은(隱)은 ‘숨는다’는 뜻이다. 이름처럼 섭은낭은 잘 듣고 은둔하는 여인이라는 의미다. 영화의 모든 상황에서 섭은낭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기등과 나무 위, 커튼 뒤 어느 곳에선가는 모든 상황을 듣고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다.딱 이만큼이 영화 ‘자객 섭은낭’의 ‘강도’다. 현란한 칼놀림이나, 중력 법칙을 무시하고 공간을 자유롭게 지배하는 무협이 아닌, 잠시 칼을 맞대고 물러나는 정도의 ‘강도’. 장검이 아니라 단검을 들고 다가갈 수 있는 만큼의 거리, 잠시 장검의 길이를 벗어나 단검의 길이로 다가섰다가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정도의 간단한 강도다. 무협 영화의 장르를 빌어왔으나, 수직과 수평, 강도가 다른 영화로 봐야할 것이다. 무협영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들이 말끔히 제거되어 버린 영화로써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 쉽게 알 수 없다는 당혹감과 마주할 것이다.그러나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무협 영화의 장르를 빌어 전작들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상실’과 ‘고독’의 깊이를 말하고자 했듯이, 허우 샤오시엔 또한 ‘자객 섭은낭’에서 그가 끊임없이 밀고 왔던 영화의 중심이 그 속에 있음을 말한다. 2016년 영화 개봉에 맞춰 내한한 허우 샤오시엔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중심과 그의 전작들의 중심은 모두 ‘인간’이며 ‘사람의 감정,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담아내는 데 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무협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들을 발라내버리고, 허우 샤오시엔의 ‘중심(인간)’을 읽으려할 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과 그 풍경 속에 흐르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이 ‘인간’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일대종사’와 ‘자객 섭은낭’은 네이버 영화와 구글플레이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19-04-01

맹렬히 과거를 추적하는 ‘일상의 스릴러’

△미끄러지는 사건과 진실들주고 받는 말들이 심상찮다. 부드럽고 일상적인 대화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날카롭고 예사롭지 않다. 일상의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던 짐작은 번번히 비껴가고, 차갑고 무거운 진실은 예상을 빗나가고 이리저리 자취를 감추며 날렵하게 숨는다.이혼과 결혼을 앞둔 이들과 가족의 일상. 파리의 공항에서 시작된 영화는 다정한 부부사이가 아니라 4년의 별거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이혼합의를 위한 만남이었다. 4년 만에 ‘깔끔한 정리’를 위해 아마드는 마리와 공항에서의 재회를 한다. 아마드와 마리가 살던 집. 그녀가 전남편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메일의 내용과 전달에 대해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볍고 지극히 평범했던 상황이 등장인물이 한명씩 늘어 갈수록 조금씩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마리의 등장. 공항에서 나가는 방향을 찾던 아마드의 등장. 마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서 놀던 그녀의 둘째 딸 레아와 낯선 남자아이. 마당에서 놀던 낯선 남자아이의 친아버지이며 마리와 결혼을 준비중인 사미르 등장. 그리고 큰 딸 루시의 등장. 이러한 순차적인 등장의 중심에는 마리가 있다. 마리는 등장하는 모든 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사람이다. 세 명의 남자, 이혼을 앞둔 아마드와 결혼을 앞둔 사미르와 그의 아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세 명의 여자는 모두를 알고 세 명의 남자는 첫 대면이다.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마드와 이혼을 예정하고 있으며, 사미르와 결혼을 앞 둔 마리. 세탁소를 운영하며 갑작스러운 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두고 있으며 마리와 동거하며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미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이지만 아마드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르는 두 딸들. 이들이 머물렀고 머무르고자 하는 마리의 집.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깊게 잠자고 있던 갈등들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고…. 그것들이 끓어 오르며 부딪치는 장소가 바로 마리의 집이다.이 순서들을 따라 관객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시작하고, 누가 더 상처받고 불쌍하며, 잔인한가를 은연중에 가늠한다.하지만 감정이입은 연이어 등장하는 인물과 대화를 통해 보기좋게 배신당하고, 이곳과 저곳, 배우들을 따라 다니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누가 더 악하고 누가 더 선한가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조금씩 선하고 조금씩 이기적이며, 마음과 다르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에 놓여 있다.한번쯤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고 받았던 신뢰와 믿음, 배신과 상처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믿음과 진실의 변화가 주는 팽팽한 긴장감여기에 아마드가 마리의 큰 딸인 루시로부터 ‘사마르의 아내가 왜 자살을 시도했는가’를 듣게 되면서 누구를 믿어야하며, 누구를 두둔하고 위로해야하는가에 대한 혼란이 시작된다. 믿을 수 없는 사실, 진실을 확인할수록 거기 또 다른 사실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곧장 영화는 ‘진실’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상의 스릴러’ 영화가 된다.국내에 소개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와 ‘세일즈맨’ 역시 평범했던 일상에 던져진 파문과 반전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스릴러’ 라는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공권력이나 정치적인 목적, 원한과 복수의 과정을 화려한 액션과 함께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우발적인 평범한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비록 시작은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고들수록 깊고 커다란 구멍을 남기는 묵직함이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에 이어진다.진실이 믿음의 문제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이 또 다른 사실의 확인으로 이어질 때 진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 의문을 쫓아 다시 한발짝 들어가지만 그것 역시 진실인지 모를 불완전하고 모호한 상태에 이른다.‘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원래 제목은 ‘The Past, 과거’다. 미래를 위해 현재 이곳에 모였지만 과거에 발목이 잡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키고 머물러야할 공간에 결국은 아무도 머물지 못한다. 미래를 위해 모이고 만났던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과거의 공유되지 않은 기억들이다. 하나 둘씩 드러나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마음 둘 곳이라고는 물리적·정서적으로 아무 것도 어디에도 없는 상태로 흘러간다.과거의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드러나는 진실마다 묵직하다. 거기에 모든 사건마다 이유가 존재하니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감정이입의 단계가 순조롭지 못하다. 시작은 누가 더 ‘염치’없는가를 말하는 듯하다가 누가 더 ‘상처’받은 존재인가로 옮겨 간다.△아물지 않는 과거의 상처들마리는 사마르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아마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아마드 역시 미처 다 못챙긴 4년 전의 짐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짐들이 있다. 이혼 판결을 위해 법원 복도에 앉아 임신 사실을 아마드에게 말하는 마리의 심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함이고 그 상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자하는 미묘한 심리가 함께 한다.이는 마리와 결혼을 앞두고도 혼수상태의 아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사마르. “왔다가 잠시 머물다 떠났다”라고 엄마를 거쳐갔던 남자들에 대한 불안감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루시 역시 그러하다.마리와 어린 막내 딸 레아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 번 이상 그 집을 떠나고 싶어하거나 떠난다.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다.비난의 대상이 진실에 접근해 갈수록 연민의 대상이 되고, 연민의 대상이 비난의 대상으로 위치를 옮겨 앉는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진실은 모호하게 남는다.영화 후반부 진실은 모호해지고 갈등은 봉합되지 않은채 놓여 있을 때, 아마드는 마리에게 자신이 “4년 전에 왜 떠났는가에 대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마리는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이제 해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고,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인지 비극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등장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영화의 흐름에 따라 등장인물 모두에게로 감정이입이 옮겨 다니고, 사건을 물고 들어가는 흐름이 대단하다. 거기에 은유와 상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대사 하나에까지 실마리들이 내표되어 있으니 상당한 몰입을 요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몰입의 단계를 높여가게 만드는 솜씨가 좋다.이야기는 리듬을 타고, 감정이 함께 그 리듬을 따라 흐르고, 사건은 감정을 이끌다가 뒤집고 막다른 골목길로 내몰기도 한다. 미래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지만 그 자리 역시 편하지 못하다. 이후가 궁금하지만 마지막 장면으로도 감정을 곱씹기에 벅차다.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을 만나게 될 것이다./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이란의 영화 감독으로 2003년 장편 영화 ‘사막의 춤’으로 데뷔하였으며, 각본가이기도 하다. 국내에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외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세일즈맨(2016)’이 소개되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이 세 편의 영화를 함께 보게 되면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일관된 작품 세계를 알 수 있다.*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

2019-02-25

다가오는 것들과 멀어져 가는 것들

영화를 ‘본다’는 행위로만 말하기엔 영화를 ‘소비’ 한다는 느낌이 짙게 묻어난다. 물론 영화는 오락물이며, 산업이며, 예술로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매체이기에 어느 것 하나로 규정짓는 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관에서, TV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인 자세로 영화를 대하고자 하는 마음에 ‘영화 읽기’라고 표현했다. 하루에도 수 십 편씩 쏟아지는 영화들 중에서, 혹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영화들을 지면으로 소환해 ‘읽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 ‘영화 읽기’를 통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배가 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상실과 희망을 변주하는 두 편의 영화,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삶의 균열은 무엇으로 채우는가? 영화 ‘다가오는 것들’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 저명한 철학교수인 남자의 아내, 죽음이 임박한 홀어머니의 딸이다. 견고한 사회적 입지와 건실한 가정을 쌓아왔을 시간. 그 이후의 시간들이 균열되고 흘러가는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영화의 제목은 ‘다가오는 것들’이지만 실상 그 내용은 다가오는 것들보다 멀어지는 것들이 많은 나이며, 다가오고 멀어지는 것들의 교차점에 선 한 여자의 이야기를 지적이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영화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시험지의 질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 질문은 주인공 나탈리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 전체를 꿰뚫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견고하게 쌓아왔던 그녀의 세월. 그녀의 가정과 철학적 신념들, 학생들에게 던지고자 했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 앞에 그녀가 서게 된다.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이 “딴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랑 살고 싶어”라고 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질문에 답할 시간은 이렇게 통속적이며 느닷없이 그녀에게 찾아 온다. 그곳에 철학적 물음이나 일상적인 분노는 없다. 오직, 매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찾아갔던 바다가 있는 남편의 별장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과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정원, 아이들과의 추억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상실감이 크게 자리 잡는다. 25년을 견고하게 다져왔던 것의 절반이 사라지는 순간이며, 그것은 서재를 가득 메웠던 책의 절반을 남편이 들고 가버린 장면처럼 허전하다. 여기에 자신이 열심히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레비나스를 남편이 가져가버린데 대한 분노가 있다.별장의 추억에 이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던져졌던 질문인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의 답이 될 수도 있는 지침서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나의 존재’를 깊게 사유했던 서양철학은 20세기 초입에 들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으로 귀결되고, 그 결과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막지 못했다. 레비나스에 의해 ‘타자(타인)’에 대한 사유를 달리하면서 ‘나의 존재’와 ‘타인’을 달리 사유하게 된다. 바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선을 행함으로써’ 악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가져가버린 책이 왜 레비나스였던가의 이유다.균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랜 자부심을 가지고 집필해 왔던 철학총서는 유행에 뒤졌다며 다른 교재로 대체되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딸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던 엄마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그리고 그녀 곁에 남은건 엄마가 키우던 뚱뚱하고 늙은 고양이 ‘판도라’뿐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고3때 선생님의 수업과 책이 저를 붙들어줬어요.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라고 말했던 그의 애제자 파비앵과의 다가오는 것들과 멀어져 가는 것들의 충돌이 있다.파비앵은 그의 친구들과 시골 공동농장에서 치즈를 만들고 글을 쓰며 지낸다. 남편과 헤어진 나탈리는 여름마다 찾았던 바다가 있는 남편의 별장 대신 파비앵의 공동농장을 찾는다. 시골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탈리가 새로 산 레비나스를 펼쳐드는 장면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까?’라는 질문의 끈질긴 반복이며, 파비앵을 찾아가는 나탈리의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희망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그러나 그 희망도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만다. 급진적 실천주의자인 제자는 했다”고 항변을 하지만 “사적 영역에 한해서요. 평소에는 원칙을 지킬 테지만 삶의 근간을 흔들지 모르는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으로 여기죠”라고 비판한다.이제 이 균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남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 균열을 나탈리에게 다가 올 허전하고 쓸쓸하며 헛헛한 상실로 채운다. 그래도 나탈리의 딸이 손녀를 낳자 할머니가 되고, 늘 그렇듯 책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다가오는 것들에 밀려 멀어져 가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25년 동안 들었던 브람스와 슈만이 ‘사실은 지겨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세월 속에서도 처음 겪는 이혼과 죽음이 있으니, 멀어져 가는 것들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의 세월이 버티고 있다. 그것이 굳이 행복이 아니어도 좋을 시간. 일상의 풍경 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과 밀려가는 것의 잔향이 담담하게 어우러진다. 그 화면에 아름다운 OST가 흐른다.◇비울수록 채워지는 영화 ‘로마’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것들의 미래를 표현하고 있다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그 대척점에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가오는 것들’이 현재에서부터 다가올 시간에 펼쳐질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로마’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1970년대 멕시코시티 내 ‘로마’라는 지역의 중산층 가정의 젊은 가정부 클레오의 하루 일과로 영화는 시작된다. ‘다가오는 것들’의 주인공인 나탈리와 ‘로마’의 주인공인 클레오는 그 신분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영화는 흑백화면 가득히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로 시작해 하루 일과를 알리는 알람소리와 빨래하는 소리, 식사를 차리고 그릇을 부시는 소리와 담장을 넘어노는 새들의 지저귐과 길거리의 소리들이 가득 화면을 채운다. 그리 대사가 많지 않은 ‘다가오는 것들’조차 ‘로마’에 비하면 수다에 가까울 정도로 이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대사를 사용하고 있다.공통점이 있다면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클레오에게도 여전히 남자는 부재의 존재라는 것이다.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은 클레오가 임신한 사실을 알자 그녀의 곁에서 도망친다. 클레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주인인 소피아의 남편까지 외도를 일삼으며 가족의 품을 떠난다.영화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으로 클레오는 감독이 “가장 사랑했고 애정을 가진 캐릭터이며, 상처를 함께 공유했던 캐릭터”로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가사도우미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영화 ‘다가오는 것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 책들과 철학자들의 말들을 알고 있거나 이해함으로써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로마’는 그러한 지식이 없어도, 오히려 깊은 의미를 찾지 않고 비워 낼수록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라고 하겠다. 바로 절제하고 생략함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는 영화다. 대사가 그러하고 배경음악 없음이 그러하며, 흑백의 거친듯 섬세한 화면이 그러하다.여기에 감독의 개인적인 삶과 스토리가 펼쳐졌던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1970년대의 가정의 상처와 멕시코의 상처까지 교차하고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시선은 본인이 아닌 자신을 키워준 유모 클레오의 시선을 따른다. 어떠한 미화도 주관적인 시선도 배제한채 가장 안정적인 카메라 구도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시선뿐만 아니라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소리까지 클레오의 귀가 들었을 거리감과 입체감을 두어 시각과 청각까지 온전히 녹여내고 있다.영화는 클레오가 지저분한 마당을 물로 씻어내는 장면과 소리로 시작해 흰 빨래를 들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끝난다. 마당에 고인 물에 비친 비행기의 모습에서 시작해 맑고 푸른(?) 하늘을 가로 지르는 비행기가 사라지면서 끝난다.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서 가장 높고 맑은 곳으로, 수평의 공간에서 수직의 공간을 오르며 사라지는 클레오의 모습 속에서 ‘멀어져가는 것들’을 담으며 잔잔하게 다가와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비로소 영화 제목 ‘ROMA’가 화면을 채우며 영화는 시작처럼 끝이난다.※ 미야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은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실시간으로 스트리밍과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으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김규형씨는 포항에서 태어나 영남대 조형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다.

2019-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