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감독의<br/>‘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진이 발명되기 전인 18세기 말, ‘정혼자에게 보낼 딸의 초상화를 그릴 것’ 귀족 부인의 지시는 정략 결혼을 거부한 딸의 초상화를 몰래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산책친구로 위장한 화가 마리안느는 프랑스 어느 작은 섬으로 향하고 대저택에 머물면서 귀족 부인의 딸 엘로이즈를 만나게 된다. 마리안느는 산책시간 동안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기억을 더듬어 초상화를 완성해 간다.
사실성을 중시하던 고전미술은 초상화에 있어서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돋보이게 해야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상화는 법칙이 만들어지고, 법칙 속에서 의뢰자의 만족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것을 위해 화가는 세심한 관찰력이 필요했다. 대상을 고정화시켜 놓은 상태의 작업이 아니라 한정된 조건 속에서 진행되는 초상화 작업은 고도의 집중과 기억의 형상화가 필요한 것이다.
정상적인 초상화 작업이 모델과 화가의 마주보는 시선이라면, 마리안느의 초상화 작업은 일방적이다. 산책의 시간 동안 눈치채지 못하게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해야하는 마리안느의 일방적인 시선과 풍경을 담으며, 아득한 어느 곳으로 생각과 시선이 머무는 엘로이즈의 자유로운 시선이 산책길을 걷는다.
두 여인의 만남과 시선은 이렇게 시작된다. 대저택과 외딴 섬의 풍경 속에 놓인 사람들. 그들 주변을 감싸고 도는 소리와 풍광들이 낮과 밤을 반복하는 사이 의뢰받은 초상화는 완성에 이른다. 관찰이라는 목적성을 가진 시선과 그 시선 속에 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상자. 이 둘 사이는 완성된 초상화를 엘로이즈가 혹평하면서부터 두 가지 본연의 세계로 들어선다.
마리안느가 완성한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그리고 있지만 그녀를 위한 초상화가 아니다. 그 그림을 통해 신부감을 확인하고 감상할 밀라노에 있는 이름 모를 예비 신랑의 평가를 고려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당대의 규칙과 관습에 따라 제작된 그림 속에서 엘로이즈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라며 ‘생기’와 존재감’이 없다고 말한다. 화가인 마리안느 조차도 자신의 시선 속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을 감춘 채 대상을 일반화해서 작업을 완성했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라는 엘로이즈의 평가 속에 함유된 의미는 감정의 교감과 진실을 말한다. 생기와 존재감이 없는 초상화 앞에서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마리안느의 대답에 엘로이즈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다고 응수한다.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진실되게 자신의 감정을 담은 작품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작품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초상화의 얼굴을 뭉개버리고 떠나려는 마리안느에게 그동안 화가 앞에서 포즈 취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가 기꺼이 마리안느의 모델을 자처한다. 이 순간 화가는 ‘생기’와 ‘존재감’이 담긴 작품을 담아야한다는 작가정신의 각성이라는 첫 번째 본연의 세계로 들어선다.
존재감을 위해 진실된 순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연에 들어선다. 이제 일방적이었던 시선은 마주보는 시선으로 교차된다. 화가와 모델로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사회적 관습과 위계질서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떠나 ‘협력자’이며, 연인으로 동등한 시선을 주고 받는다.
영화의 중심에 남성은 없다. 모든 전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부재와 밀라노에 존재하는 정혼자와 임신을 하게 된 하녀 소피의 상대가 누구인지 조차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체적인 여성과 평등, 귀족과 화가, 하녀라는 신분까지 같은 높이의 시선과 동일한 공간 속에서 한시적이나마 평등하게 놓인다. 그리고 이들이 자유로우며 평등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화덕을 배경으로 수평으로 놓인 탁자 앞에서 세 사람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자리잡는다.
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바람과 파도 소리, 미세한 일상의 소리들로 채워 나간 영화는 딱 세 번 화면 속에 음악을 담는다. 절제된 음악 사용은 감정의 분기점마다 놀라운 효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는 마지막 장면은 모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담아 슬프며 장엄하게 폭발시킨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