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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If)과 아마도(Quizas)의 사랑이야기

등록일 2020-12-07 19:58 게재일 2020-12-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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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영화의 제목이 주는 울림이 감상의 다양한 변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영연화’ 또한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의미하는 영화제목은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 그 순간을 쌓아가는 과정과 그 이후의 무너짐을 기대하게 된다. 찬란함이 계속해서 유지됐다면 그것을 ‘순간’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화양연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나 사랑의 기준을 잡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과 끝, 과정의 세심한 감정들을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영화다. 치열하거나 복잡하거나 고난과 시련이 없다. 아니 있었어도 생략되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속 사랑의 진행은 더디다. 완급의 조절에 있어서 모든 결정적 순간들은 한 순간 주춤한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아예 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진행의 단계들은 상세한 설명이나 대사없이 이루기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다만 섬세한 디테일들이 빼곡히 그 간극을 메우며 진행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따지고 볼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젖어 감상하는 영화다.

‘사랑’의 시작에 있어서 핵심은 ‘확인’이다. 상대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확인함으로써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한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사랑한다’는 확인의 장면이 없다. 직접적인 고백이 없기에 시작이 불분명하고 사랑의 진행률이 선명하지 않다. 이 또한 모호한 대사와 미세한 동작과 유려한 영화적 장치들로 짐작하고 느낄 뿐이다.

‘화양연화’의 사랑은 ‘불륜’이다. 상대의 불륜에 나도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개연성을 지니더라도 ‘도덕’의 기준을 들이댄다면 불편한 영화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 ‘화양연화’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과연 불륜을 먼저 저지른 것은 남자의 아내와 여자의 남편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먼저 불륜을 저지른 것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이었지만 그 반대로 읽어도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끊임없이 특정한 선택의 기로에서 ‘가정(假定)’을 한다. 이 가정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을 ‘연습’한다. 가정에 대한 연습이 어느 쪽이 사실이었는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불륜에 대한 알리바이를 ‘가정’했을지도 모른다.

‘화양연화’는 ‘if’에 대한 영화다. 선택과 확인의 기로에서 이들은 다양한 선택을 두고서 연습을 한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헤어지는 ‘연습’이 대표적인데, 사실과 연습이 뒤섞이면서 어느 것이 실제로 진행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고백을 했는지, 실제로 만나서 사랑을 했는지, 사랑하고 헤어진 것이 맞는지, 영화의 모든 결정들을 ‘만약(if)’으로 두어도 좋다.

‘화양연화’중에서 인상에 남는 음악이 넷 킹 콜이 부른 노래 ‘Quizas, quizas, quizas’다. 직역하면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다. 사랑의 확인과 선택의 물음에 ‘아마도’라고 답한다. ‘아마도’는 확답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아마도’는 ‘만약(if)’을 선행시킨다.

사랑의 결과는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밝혀진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버렸다’라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시작과 헤어짐의 과정 중에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 가와 이유가 중요하다.

영화 마지막 남자는 앙코르와트에서 이 모든 사실을 영원히 봉인해 버린다. 추억에 대한 봉인이 아닌 선택과 이유에 대한 봉인이다. 선택과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없어서, 항상 주춤하며 진행되고, 미세한 떨림이 간극을 메우기에 더 애틋한 영화가 된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는 아름다운 영화다. 영상과 음악, 의상과 미술, 미장센까지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감정의 흐름을 흐트리지 않는 영화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의 뒷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화양연화’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다.

/문화기획사 엔진42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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