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펫졸드의 ‘트랜짓’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시시각각 독일군이 프랑스로 진군하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마르세이유로 몰려 든다. 이제 마르세이유는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며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장소가 된다.
1940년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독일과의 협상에 의해 프랑스 북쪽은 독일이, 남쪽은 괴리정부인 비시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프랑스를 떠날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은 니스와 마르세이유 단 두 곳뿐이었다.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할 경유지 영화 제목인 ‘트랜짓(Transit)’이 바로 마르세유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마르세유는 각자의 최종 목적지인 ‘그곳’으로 가기 위한 중간지점으로, 다른 곳, 희망하는 그곳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이다. 떠나기 위해 경유지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거대한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마르세이유는 실낱같은 희망과 이제 더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망과 두려움이 뒤섞여 절실함으로 채워진 도시가 된다.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증서로 ‘출국비자’가 필요하다. 그 출국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경유지가 어디고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는 통과비자를 각 나라에서 받아야만 한다.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체류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체류비자는 체류하고자 하는 나라에 다시 체류할 수 있는 증명을 해야한다. 이 과정 속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위의 처음 문장에 썼듯이 ‘떠나기 위해 머물러야 하며 머무르기 위해 떠나야 한다는 증명’을 해야만 비자가 발급된다. 출국비자를 받기 위해 그 전에 발급받아야 하는 증명서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하게 흘러가면서 불안감은 증폭되고 떠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도착했던 경유지 마르세유는 종착지가 된다. 부조리한 과정 속에서 불안은 증폭되고 희망은 줄어들며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만 남는다.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진행되자 파리는 봉쇄되고, 도망자 신분인 게오르그는 자살한 바이델이라는 작가의 유품을 들고 마르세유로 향하는데 유품에는 작가의 원고와 아내에게서 온 편지와 멕시코 대사관에서 온 비자 허가서가 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가 호텔을 예약할 때 경유지의 삶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다. 호텔 주인은 체류 허가증이 없기 때문에 게오르그에게 1주일치 선불을 요구한다. “여기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한다. “여기에 머물기 위해 머물지 않을 걸 증명하란 예기”가 된다.
유품을 전달하고 사례비나 챙기려던 게오르그는 이제 멕시코 영사관 직원의 착오로 자살한 바이델로 오인받게 되면서 호텔 예약의 부조리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각자의 사연과 목적을 갖고 ‘그곳’으로 가기 위한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 속에 합류하게 된다.
영화는 1940년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현재의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한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은 과거가 문제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1940년대는 유럽을 탈출하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는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불법 이민자들이 공존하는 공간, ‘그곳’으로 가기 위한 욕망이 시대를 뛰어넘어 이어지고 있는 장소로써 마르세이유가 된다. 다른 세계로 열린 공간인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르세유는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닫힌 지옥의 공간이 된다.
“누가 먼저 상대를 잊을까요? 떠난 사람일까요? 남겨진 사람일까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곳’과 ‘그곳’, 희망과 절망 사이에 깊은 쓸쓸함이 담긴다. 게오르그가 불법 이민 가족 소년의 라디오를 고쳐주면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몰고기도 집에 가고, 코끼리도 쿵쿵대며 집에 가고, 개미도 서둘러 집에 가고, 등불이 켜지고 날이 저무네”의 가사가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쓸쓸함을 표현한다.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관통하고 있는 경유지에 남은 사람들의 마음처럼.
/(주)Engine42 대표 김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