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로워리 감독 ‘고스트 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유령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을 태연하게 펼쳐 놓는다. 특히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노골적이다. 눈구멍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이 그가 살던 집으로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교통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C는 유령이 되어 그가 살던 집에 남은 사랑하는 M의 곁에 머문다. 그리고 M의 슬퍼하는 모습과 극복의 과정을 목격한다.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는 죽은 자의 몫으로 그린다. 살아남은 자의 시선이 아니라 철저히 죽은 자의 시선, 곧 유령의 시선을 따른다. 직선적인 세계관을 살다가 순환하고 종횡무진하는 세계로 들어온 유령의 시선으로 시간은 흐르거나 역전되고, 늘어지거나 축약된다. 표현할 수 없고, 전달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집이라는 공간을 떠돈다.
우스꽝스럽게 시작한 유령의 모습은 이내 처연하게 다가온다. 눈구멍 두 개만 뚫린 침대보를 뒤집어 쓴 유령의 변화없는 표정 속에서 무겁게 내려앉는 상실의 얼굴이 읽힌다. 홀로 남은 집, 집은 거대한 쓸쓸함이 되어 슬픔과 함께 뭉쳐져 집안을 떠다닌다. 그 시간 속에서 집은 또 다른 주인을 맞이하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유령 C와 남는다. 귀엽고 소탈하게 등장한 유령은 이제 세상 그 어느 곳, 누구 보다도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어 집에 남는다. M이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모습과 점차 일상을 회복하고 마침내 극복하고 새 삶을 찾아 떠나간 이후에도 유령은 그 집에 머문다.
모든 시선은 유령의 시선과 또 다른 유령과도 같은 관객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 오간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남겨진 자(혹은 그 무엇의 존재)가 되어 관객도 함께 빈집에 머문다. C가 그렇듯 우리는 그저 가늠되지 않는 시간을 지켜볼 뿐이다.
가늠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공허와 상실, 쓸쓸함과 외로움과 애틋함, 아름다우면서도 텅 빈 감정들이 뒤섞인다. 유령 C가 머무는 집과 함께 무언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채워진 집의 어느 곳에서 추억을 더듬는다. 이제 ‘유령 이야기’는 C가 머물며 추억하고 목격한 ‘집’의 시간, ‘집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화면은 일상의 공간, 일상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작은 집 어딘가에 카메라를 놓고서 복도를 비추거나 빈벽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 정물처럼 남은 유령 C가 놓이기도 한다. 빈집이 헐리고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질 때 유령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처음 정착했던 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C와 M이 함께 살던 때까지 목격자로 관객과 함께 묵묵히 시간을 보낸다. 먼지가 쌓이듯 기억의 공간은 두껍고 무겁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메운다.
언제까지건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존재(유령)가 사라지는 순간은 허무하다. 건너편 집의 또 다른 유령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에서 존재의 이유를 가지던 유령도 “안 올건가봐요”라고 체념하는 순간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짧지만 흐름은 느리고 길게 흘러간다. C와 M의 시간, 유령의 시간, 유령이 머물던 집의 시간, 그 집이 들어서기 이전의 시간이 한편의 시처럼 함께 흐른다. 기형도 시인의 시 ‘빈집’의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에서 시작해 사랑과 연민, 쓸쓸함과 공허함, 기억까지 소멸시켜 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까지 놓아 버리게 만든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묵직한 아름답고 처연한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영화가 끝난다. 그 무게만큼 여운이 오래 남는다. /김규형 (주)Engine42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