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상의 공포, 치유의 또 다른 방식

등록일 2022-11-14 18:19 게재일 2022-11-15 17면
스크랩버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
‘큐어’ 포스터.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대사가 있다면 그것은 “왜?”라는 질문과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왜”는 살인의 동기를 묻는 질문이고, “당신은 누구야”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이에게 되받아 치는 질문이다. 이 두개의 질문은 반복된다. 답을 요하는 질문에 서로가 질문으로 맞서니 실마리는 풀리지 않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세 번째 살인. 세기말의 도쿄에서 유사한 형태의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범인은 다르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모방범죄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 동기의 유사성이 아닐까 추측한다. 평범했던 이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왜?”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살인을 저질렀던 범인들이 하나같이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살해동기는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포인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개의 범죄 스릴러 영화들이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던가 무슨 이유로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를 파고들면서 긴장을 유지하지만 ‘큐어’는 그렇지 않다.

범행장면에서부터 범인을 노출시키고 쉽게 체포된다.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이 아니라 유사점도 없는 살인자의 동일한 형태의 살인이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살인과 다섯 번째의 살인이 이어지면서 살인범들의 동선에 모두 한 남자를 만났다는 공통점이 드러난다.

이제 “왜”라는 질문은 모든 범죄의 연결고리인 남자 마미야에게 주어진다. “왜”라는 질문에 “당신은 누구야”라는 질문과 “그러니까 누구라고 넌?”이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반복된 질문이 이어지면서 영화는 새로운 긴장을 형성한다.

도입부 등장부터 텅빈 공간과도 같은 바닷가에서 출현한 마미야는 어디서 왔으며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 반복되는 질문을 던지고 쓰러진다. 이후 마미야를 만났던 이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을 행한다. 늘 그래왔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그들의 일상 속에서 잔인한 살인은 갑작스러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펼쳐진다.

일련의 살인사건은 마미야에 의해 정신적으로 교사되고 있으며, 마미야를 검거하게 되면서 마미야의 선문답과도 같은 “당신은 누구야?”라는 질문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내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 노이로제와 불안감, 신경증과 정신적 문제들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심연의 본질을 마주하라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다.

빛과 어둠, 인간의 선한 마음과 악마성, 이것들은 상호보완적이거나 화합되지 않는다. 하나를 억누르거나 두 가지의 모습을 지닌채 마음은 무거우며 끊임없는 억제와 선택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라는 주문이며, 선택하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사건을 수사하는 다카베 형사는 형사로서의 모습과 남편으로서의 모습 속에서 삶의 짐과 고통, 불안과 분노의 경계를 넘나든다. 불안과 분노는 도처에 등장하는 일상의 소음으로 나타난다. 낮게 깔리며 장면마다 반복되면서 증폭된다. 선과 악의 심리와 선택은 빛과 어둠의 명징한 대비로 등장인물의 현재 위치와 심리적 상태를 나타낸다.

영화 후반부 “기분 좋게 텅 비워 버리고 나처럼 새로 태어나라”라고 마미야는 다카베 형사에게 말한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선택의 의미다. 물론 그 선택의 방향은 마미야의 선택을 권유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그 선택에 의해 그의 방식으로 본질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큐어(cure·치유)’며, 그 전에 영화의 제목으로 하려고 했던 ‘전도사’인 이유다. 영화는 직접적 행동보다 심연의 어둠을 드러내며 진행된다. 드러나지 않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은 또 다른 공포를 유발한다. 낮게 깔리며 증폭되는 영화 속 배경 음향과도 같이 밀려오고 그 속에 빨려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의 영화 읽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