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학창시절에는 외모나 성적에서, 성인이 되어서는 부족한 경제력에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갖는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스스로에 대한 감정이다. 우리는 이런 부끄러움에 익숙하다.
한편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부끄러움이 있다. 이번 학기 종강을 하고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학생은 방학을 맞아 본가에 내려가기 전에 안부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이번 학기 꽤 열심히 수업을 들었으며 곧 4학년이 되는 학생이라 진지하게 이야기 나눴다. 학생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어서 그 방향으로 계속 나가고 싶어 했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의 진로 변경이 늦은 것이 아니라며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림에 몰두하길 권유했다. 학기 말에 아르바이트로 몇 번 결석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학생의 고민은 어려운 가정 형편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며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는 그 학생의 상황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재능이 있지만 돈 때문에 자기의 꿈을 포기하는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간은 보통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토대를 두고 주변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보다는 단절에 익숙하다. 경험적 진실의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겸손해지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목격되는 장면은 나와 타인 사이에 장벽을 높게 세우고 대립하는 형국이다. 나의 기준에 따라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거나 무능력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지난 3일 연세대학교에서 시급 440원 인상, 샤워기 설치 등을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청소 노동자들에게 세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지난 4월과 5월에도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를 경찰에 고소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으로 청소 노동자들을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는지는 명확하다. 신성한 배움의 전당인 대학에서 ‘노조’의 불법시위로 자신들의 수업권이 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분노의 표시이다.
고소한 학생들에게 노조란 무엇이며 청소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이 정당한 것인지를 질문할 여력은 없다. 청소 노동자가 존재해서 자신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 그 자체를 대상화시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존재로 규정할 뿐이다. 이러니 청소 노동자들의 요구에 침묵하고 있는 대학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왜 문제를 넓고 깊게 보지 못하는 것일까? 소수 대학생에게만 한정된 문제일까? 오늘 내가 편한 것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은 자본으로 쉽게 치환되지만, 세상에는 그런 교환법칙에 따르지 않는 관계들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