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재학시절,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는 성실히 했지만,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중상위권의 학생이었다. 아직 체벌이 있던 시대에 특별히 선생님께 매 맞을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선을 넘는 선생님의 폭력에 속으로만 분노하던 경험도 있다. 그 시절 소위 노는 아이 몇 명을 제외하고 인문계 고등학교 대부분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돌이켜보면 많은 학생이 입시를 위한 폭력적인 학교 교육을 묵묵히 견디며, 그 속에서 각자 즐거움을 찾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고등학교 시절의 위기는 2학년이 되자 찾아왔다. 그럭저럭 고등학교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면서 똑같은 교과서로 정답 찾기만 강요하는 학교의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내가 닭장 속의 닭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차,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책상에 놓여 있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그 친구와 책과 학교 이야기를 하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똑같은 책으로 공부하며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다른 독서가 다른 생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간 이후 대학생의 문해력 문제가 언론을 통해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주로 ‘심심한 사과’‘사흘’ 등과 같은 한자어를 알지 못하는 대학생의 어휘력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스마트 폰에 익숙한 학생들이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기 어려운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마트 폰과 함께 살아온 대학생의 문해력 저하가 학생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현재는 ‘챗 GPT’가 상징하는 AI의 시대가 아닌가!
AI는 긴 문서의 요약 정리나 독후감 쓰기 등의 일을 해준다. 아직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성능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문제는 AI가 대학 교육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긴 글을 읽고 요약하는 고전적인 교육 방법의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AI를 적절히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은 무엇을 읽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삶을 상상하고 일상으로 가져오는 과정을 쉽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훈련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읽고 쓰는 행위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가령 ‘심심한 사과’의 뜻을 몰라도 당장 내 일상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심심(深深)’이란 어휘를 알면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다른 세상을 알고 나의 삶을 변화할지 아니면 익숙한 세계에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AI가 만들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에 흥분과 걱정이 교차한다. 그렇지만 다른 삶은 테크놀로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즐거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