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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부끄러움의 정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다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2016년 대통령의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결정되던 해에 태어난 첫째 아이가 여덟 살이 된 2024년, 다시 대통령 탄핵 열차가 출발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나라는 10년 동안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받는 국가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대체 왜 대한민국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비상사태를 반복하는 국가가 되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두 명의 대통령 모두, 국민이 투표로 뽑았다는 점이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발동시킨 대통령의 부정선거 논리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곧 우리가 대통령을 제대로 뽑지 못했다는, 다시 말해 국가 비상사태의 책임으로부터 국민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 왜 우리는 다시 정상적인 국정운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마찬가지로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지난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선동당해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를 위해 국회 앞에 모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극단적 인식을 보인 친구가 아니었기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차분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 친구의 논리는 이랬다. 우선 민주당과 그 당의 대표에 대한 거부감이 앞섰고, 이는 다시 민주당의 주장을 시민들이 반복한다는 사고로 이어졌다. 유튜브의 영향이 이런 이분법을 확신으로 만들었고, 이분법의 벽은 무척이나 견고했다. 일단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분법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 추위에 거리로 나간 국민은 특정 정당을 지지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일상이 바쁘지만 더 이상 침묵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나아간 것이다. 이번 계엄 사태는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조차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는 여의도에서 특정 주체가 수행하는 정치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와 시각을 변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대통령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던 날, 국회 앞으로 어린아이부터 중고등학생, 20대 대학생, 그리고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세대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대통령 탄핵을 외쳤지만,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공존했다. 응원봉을 활용한 시위는 이전과 달랐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한다는 점은 같았다.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정치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차별하지 않는 삶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이분법적 현실 인식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새해에는 오래된 이분법에서 벗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함께 어울리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나의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2024-12-23

선의의 순환을 위하여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라는 웹소설이 있다. 소설은 환경오염이 심각해진 가까운 미래에 우주 개척마저 한계에 이르자, 거대 자본을 가진 강대국들이 심해를 개척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심해기지에 도착한 치과의사 박무현은 부임 후 5일 만에 기지가 물에 잠기는 사태에 직면한다. 심해기지는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물과 거주 인원보다 턱없이 부족한 탈출 보트 등으로 위기의 순간을 맞고, 사람들은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에 총을 난사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설은 박무현이 주변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다. 가령 박무현은 생명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탈출을 미루고 동물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을 돌보는 행위를 한다. 선의를 가진 박무현은 곧 죽음을 맞게 되지만 현실로 회귀하여 반복해서 탈출을 시도한다. 보통의 회귀물 웹소설과 다르게 박무현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처음부터 박무현의 관심사는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에 있었다. 이런 박무현의 행동을 일부 사람들은 ‘위선’이라고 비판했지만, 박무현은 ‘선의의 순환’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고 강변한다. 지난 12월 3일 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많은 국민이 고통받고 있다. 이전부터 수많은 시국선언이 있었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 많은 곳에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과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정치집단은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권 연장에 급급한 모습이다. 최소한의 양심도 발견하기 어려운 이들의 뻔뻔함은 분노를 일으키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것이다. 그렇다고 탄핵을 주장하는 정치집단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현 대통령의 탄생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번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에 동조한 사람이다. 국회의 긴급현안 질의에 참석한 이번 사태의 동조자들은 하나 같이 잔뜩 위축된 표정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상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따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닐까. 막상 내가 그 위치에서 상부의 명령을 용기 있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 있지만, 자기의 양심을 지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통령 탄핵이 반복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 대통령은 바로 우리 손으로 직접 뽑았다는 점에서 나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생업이 발목을 잡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서야 한다. 그렇게 선의의 순환이 이루어질 때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바로 나와 나의 아이들을 위해 다시 거리로 나가야 한다. 다시 때가 되었다.

2024-12-09

일상의 페미니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우리 사회에 젠더 문제가 격화된 것은 2018년이었다.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현직 검사, 연극 연출가, 배우, 정치인 등 유명인의 성범죄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으며, 2020년에는 유력 정치인의 자살이 사회적 충격을 주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로 명명되었던 2010년대 후반, 일련의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남성들의 혐오 발언이 있었지만, 자성과 변화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이후 우리 사회는 젠더 갈등이 더욱 심해지고 혐오의 감정은 확산하였다. 2021년 도쿄올림픽 메달리스트에 대한 페미니즘 논쟁이나 지난 대선 당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걸었던 정치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페미니즘에 대한 양가적 시선은 반복해서 재생산되었다. 특히 2020년 트랜스 젠더 학생의 모 여대 입학을 페미니즘 단체를 표방했던 집단이 반대하며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이념이라는 생각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향을 둘러싸고 생겨난 ‘이대남/이대녀’라는 신조어도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이렇게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이념으로 우리 사회에 각인된 듯하다. 최근 본부의 남녀공학 전환 논의에 대학 건물 점거와 수업 거부로 대응했던 모 여대 사건이 보도되며 다시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을 가시화했다. 뉴스를 통해 과격한 발언을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보도되고, 관련 기사를 퍼오며 ‘남성/여성’은 서로를 향한 혐오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이 사태에 대한 내 주위 학생들의 입장도 성별에 따라 둘로 나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선 여대의 남녀공학 전환이라는 대학의 정체성을 변경하는 중요한 문제를 학생들과 소통 없이 진행하려는 본부의 태도가 문제이다. 학령위기의 급격한 감소라는 위기 앞에 남녀공학 전환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는 공감하지만, 학교의 본질을 뒤바꾸는 사안을 학내 구성원과의 협의 없이 진행하려는 독단적 태도가 일을 키웠다. 대학의 의사결정과정이 내재한 위계적 시선이 새삼 드러난 것이다. 학교 발전이란 대의에 모두 공감한다면 각자의 각론을 열어놓고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토의의 과정을 거칠 수는 없었을까. 다시 말해 페미니즘이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사결정에 내재한 위계성을 재고하는 시각일 수 있다. 일상의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시각은 그간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페미니즘 혹은 젠더적 시각에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포괄한 위계와 배제의 시선을 인식하고 넘어서는 일이다. 대학의 의사결정권자들이 학내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학내 구성원을 배제하는 행위가 담고 있는 폭력성과 거기에 내재된 위계의 시선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의 위계성을 파악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젠더 갈등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2024-11-25

수능을 앞두고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언제부터인가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학생이 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있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상당히 많은 학생이 아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동료 교수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우리 대학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대학의 학생이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살률이 OECD 국가 1위라는 불명예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이 있지만, 이와 별개로 청년들의 정신건강은 계속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학기에 만난 어떤 학생은 스물여덟 살이란 나이에 특별한 관심사가 없는 자신의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 후 아버지 사업을 도우며 이 년을 일하고 졸업장을 받아 오라는 부모님 말씀에 따라 복학했지만, 학업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졸업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조급함과 진로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던 학생은 한참이 지나서야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현재 상황을 부모님과 공유하고 치료받기를 권했지만, 그 학생은 부모님께 자신의 병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학생은 어머니와의 갈등이 정신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였다. 오빠와 자신을 차별하는 할머니와 이를 모른 척한 어머니의 태도가 누적되며 학생은 마음이 아프고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이러한 경험이 만든 삶의 태도가 더 큰 도약을 해야 하는 학생의 마음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첫 번째 학생과 비슷했다. 두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두 학생은 자신의 아픔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 대학도 그렇지만 많은 대학이 정신건강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검진을 진행하기도 한다. 분명 과거보다 대학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은 두 학생의 경우처럼 학생들의 정신건강은 미성년기부터 누적된 결과라는 점에 있다. 11월 14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올해 수능을 친 학생들은 2025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다. 수험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마치면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해 좌절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반대로 원하는 성과를 얻은 경우에도 대학 자퇴생의 증가라는 지표가 보여주듯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쪽이든 중고등학교 시절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공이 아니라 실패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그리고 실패한 아이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감싸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협동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픈 청년은 계속 증가할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더욱 감소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2024-11-11

노벨문학상과 문해력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이후 작가의 소설 판매량이 급증하여 단시간에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작가가 과거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실이 소환되어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했으며, 어떤 소설가는 한강의 소설이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스웨덴 한림원 평가의 공정성에 의문을 표했고, 어떤 학부모 단체는 한강의 소설이 왜곡된 성 관념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며 도서관 비치를 반대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 영역에 걸쳐 다양한 논쟁점을 만들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평소 문학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작품을 구매하는 현상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소설책을 사서 읽고 한 번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이 역사를 왜곡했으며,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왜곡된 역사관과 인식론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이로부터 작품을 깊이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강의 소설을 학생들과 읽어왔다. 특히 2016년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를 많이 읽혔다. 이 소설집은 세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젠더 이분법과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다. 그동안 많은 학생과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일부 학생들은 ‘채식주의자’에 수록된 ‘몽고반점’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소설의 전체구조를 읽지 못하고 형부와 처제의 육체적 관계라는 사건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윤리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그들에게는 매우 부도덕한 작품으로 인식된 것이다. 차분하게 이야기해도, 그 학생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소설을 깊이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성인이 된다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학생, 즉 성인이 된 학생들의 인식력과 판단력은 어지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청소년기에 ‘채식주의자’와 같은 도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않은 학생이 대학생이 된다고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아직 미성년이어서 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청소년기 학생들은 이미 온갖 성과 관련한 콘텐츠에 노출되어 있다. 부모나 선생이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이럴 때 검증된(?) 소설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며 문해력을 키우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닐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K-콘텐츠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넘어서, 우리 국민이 사회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동력이 되길 바란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는 ‘한국’을 넘어서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통찰이 담겨 있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 통찰을 읽어낼 수는 없다.

2024-10-28

읽고 쓰는 즐거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고등학교 재학시절,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는 성실히 했지만, 특별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중상위권의 학생이었다. 아직 체벌이 있던 시대에 특별히 선생님께 매 맞을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선을 넘는 선생님의 폭력에 속으로만 분노하던 경험도 있다. 그 시절 소위 노는 아이 몇 명을 제외하고 인문계 고등학교 대부분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았다. 돌이켜보면 많은 학생이 입시를 위한 폭력적인 학교 교육을 묵묵히 견디며, 그 속에서 각자 즐거움을 찾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고등학교 시절의 위기는 2학년이 되자 찾아왔다. 그럭저럭 고등학교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면서 똑같은 교과서로 정답 찾기만 강요하는 학교의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내가 닭장 속의 닭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차,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책상에 놓여 있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었다. 그 친구와 책과 학교 이야기를 하며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똑같은 책으로 공부하며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다른 독서가 다른 생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간 이후 대학생의 문해력 문제가 언론을 통해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주로 ‘심심한 사과’‘사흘’ 등과 같은 한자어를 알지 못하는 대학생의 어휘력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스마트 폰에 익숙한 학생들이 책 한 권을 제대로 읽기 어려운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스마트 폰과 함께 살아온 대학생의 문해력 저하가 학생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현재는 ‘챗 GPT’가 상징하는 AI의 시대가 아닌가! AI는 긴 문서의 요약 정리나 독후감 쓰기 등의 일을 해준다. 아직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성능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문제는 AI가 대학 교육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긴 글을 읽고 요약하는 고전적인 교육 방법의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AI를 적절히 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은 무엇을 읽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이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삶을 상상하고 일상으로 가져오는 과정을 쉽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훈련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읽고 쓰는 행위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가령 ‘심심한 사과’의 뜻을 몰라도 당장 내 일상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심심(深深)’이란 어휘를 알면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다른 세상을 알고 나의 삶을 변화할지 아니면 익숙한 세계에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AI가 만들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에 흥분과 걱정이 교차한다. 그렇지만 다른 삶은 테크놀로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즐거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2024-10-14

각개전투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곧 마무리될 것 같았던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싸고 시작된 갈등이 어느 순간 자존심 싸움으로 치달으며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렸다. 지난 추석을 앞두고는 응급실 진료를 받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사례가 연이어 언론에 보도 되며 긴장감을 높였다. 정부에서는 구급대원의 입을 단속하고 군의관을 현장에 파견하며 문제에 대응하고자 했으며, 의료계는 이런 정부의 태도에 비판적 입장을 표했다. 동시에 정부는 전공의의 현장 복귀와 의대생의 학교 복귀를 꾸준히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의대생의 학교 복귀를 돕기 위해, 두 개의 학기로 구성된 연 단위 학사 일정을 변경하는 학칙 개정까지 각 대학에 요구하고 나섰다. 의대생들의 휴학 신청을 승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학사경고를 받아서 유급되는 상황을 막으려는 대책이지만 현장에서는 교수도 학생도 모두 반대하는 정책이다. 의대생들의 학교 복귀가 요원한 현실에서, 이번 학사일정 변경은 의대생을 위한 특별 혜택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더 이상 이번 사태의 책임을 어느 한쪽으로 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분명한 점은 이번 일로 아픈 국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아이가 두 살 때 자정이 다된 시간에 대형병원 응급실에 급하게 간 적이 있었다. 줄자의 예리한 칼날에 베인 아이 손가락의 피가 한 시간이 넘도록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 의사의 도움으로 베인 손가락을 꿰매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늦은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응급실 밖에는 없다.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 응급실을 자제하라는 권고에 따르면 이런 환자는 새벽에 어디서 치료를 받아야 할까? 국민은 국가를 믿고 일상을 살아간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 추석을 앞두고 지인들과 나눈 인사는 추석 때 절대로 아프지 말자는 자조 섞인 말이었다. 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은 눈앞의 불안과 고통을 감내하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다. 의사들의 이기주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우리는 그 누구도 믿지 말고 각자 알아서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삶, 각개전투의 삶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8년째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8년 동안 빠지지 않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크고 작은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반등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간 출산 장려금 등 부수적인 것에 정책이 집중되었으며, 그럴수록 근본적인 문제, 국가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의료·교육·주거 문제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며 결국 나의 무능력을 탓하는 현실에서 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각개전투의 시대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국가 아닌가.

2024-09-23

나만의 속도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이 년 전 지역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고 달리기 연습을 몇 번 하다 간신히 완주하고 오랫동안 뛰지 않았다. 올해 4월 다시 같은 대회에 참석하고 무슨 이유인지 습관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뛰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러닝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국적인 러닝센터가 생겨나고 지역별 러닝 크루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달리는 진주의 강변에서도 함께 모여 뛰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프로를 들고 뛰면서 유튜브에 러닝 영상을 올리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각자의 이유로 많은 사람이 뛰고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 속도이다. 종목의 특성상 더 강하게 오래 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빠르게 긴 거리를 뛰는 일은 쉽지 않다. 빠르게 뛰면 숨이 차고, 천천히 긴 거리를 달리면 다리가 아프다. 누군가의 코치를 받아서 시행착오를 줄이면 좋겠지만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러닝을 했다. 처음에는 보통의 러너처럼 빠르게 달리기에 초점을 두었다. 기록은 단축되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탄성이 좋다는 굽이 높은 카본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곧바로 구매하여 신고 달리다가 발목에 부상이 왔기 때문이다. 일주일 정도 러닝을 중단하며 내가 왜 달리는지 질문했다. 마라톤 대회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보통 혼자 뛰는 나는 크루원과 어울리며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제야 나는 달리면서 사용하는 근육의 움직임과 사점(死點)을 견디며 넘어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멈추고 생각하자 달리기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본화는 삼분 대 페이스를 뛰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러닝화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최근 러닝 붐의 이유를 크루 문화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에서 러닝 브랜드의 엠버서더 혹은 러닝 인플루언서의 영상과 사진이 공유되며 달리기의 유행이 확산하였다. 브랜드의 이름이 걸린 마라톤 대회도 제법 생겨났다. 이쯤에서 러닝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행이 브랜드 마케팅과 미디어에 의해 기획된 정황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러닝 유행에 깃든 상업성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달리기 위해서 나의 달리기, 나의 시간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20대에는 빠르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지나치게 속도를 높이면 오버 페이스에 걸려서 30대 이후의 삶에서 나의 페이스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긴 거리를 빠르게 뛰는 선수도 있지만 중간에 멈추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달리는 선수도 있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건강하게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만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레이스의 목적과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카본화를 벗고 조깅화를 신자 편안한 조깅이 가능해졌고 자연스럽게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게 되었다.

2024-09-02

개돼지는 되지 말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15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력 신문사 주필 이강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파업 기사에 분노하는 재벌 회장 오현수에게 “대중들은 개돼지”라는 대사를 날린다. 대중들은 개나 돼지와 같아 적당히 먹고 살게만 해주면 더 이상 짖지 않는다는 이 말은, ‘내부자들’의 명대사로 아직도 회자하고 있다.특히 이 말은 2016년 교육부 고위 관료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사용하며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당시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은 김 군 사건을 거론하며, 어차피 모두 평등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을 영화 대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영화의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사회 고위층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 내뱉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게다가 교육부 관료의 말에 동의하는 시선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에 대한 나의 사고가 잘못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이른바 ‘건국절 논쟁’이 촉매제가 되어 정부 주도의 광복절 기념행사에 야당과 독립운동단체가 불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부터 건국절 주장을 하는 세력은 있었지만, 뉴라이트 인사의 독립기념관장 임명 등 대통령의 역사관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건국절 추진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여기저기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그런 와중에 먹고 살기 힘든 국민에게 건국절 논쟁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보도 되었다. 자신은 건국절에 대해 언급한 적도 지시한 적도 없는데 지금의 논쟁은 납득이 어려운 정치 공세라는 것이다.독립기념관장이라는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 좀 더 구체적으로 대통령의 인사권과 역사 인식의 연결고리를 사고하지 못하는,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기사였다.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은 먹고 살기 힘든 국민은 역사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누구보다 ‘먹고사니즘’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우리의 오랜 반일 정서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다. 내 전공 분야에서는 일본인 연구자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역사는 지난 과거, 잊힌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올바로 설계하기 위해서 반성해야 하는 시간이다. 반성하지 못할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평범한 사람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먹고 살게만 해준다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돼지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개돼지가 되어갈수록 권력자들은 뒤에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처럼 말이다. 8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도, 반대로 더욱 예민해진 사람도 많아졌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2024-08-19

일상의 정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언제부터인가 나는 정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서로 상대만 탓하며 그들만의 정치를 하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특정 정당이 압도적 표를 받았지만 뭐 하나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차라리 외면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또한 투표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진실을 알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을 외면하고 싶은 이유도 있다.이런 내가 지난주 우연히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영상을 본 게 실수였다. 이진숙 후보자의 과거 이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장관급 공직자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별 동요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사청문회 영상을 클릭한 것은 ‘광주’라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방송통신위원장이 되겠다는 사람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말하지 못하고 논쟁적이라거나 헌법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세상을 좌/우 이념 대립으로만 보는 모습에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몰려왔다. 이러한 시각이 방송에 투영될 때 어떤 결과가 생길까.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 은평구의 어느 아파트에서 일본도로 이웃을 무참히 살해한 기사를 접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며, 피해자에게 죄송하지 않다는 당당한 모습에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음모론을 반복하는 피의자를 접하니, 돌아가신 분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해당 아파트 게시판을 보고는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을 애도하는 글도 많았지만, 은평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 살인자는 임대 아파트 주민, 망자의 울음소리가 아파트에 가득하다는 식의 조롱과 혐오의 글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 떨어진다는 한탄도 빠지지 않았다.정치와 일상,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실상 우리는 정치와 일상이 분리된 삶을 산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대체되고, 생활인으로서 우리에게 자본의 힘은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생활은 가깝고 정치적 올바름은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언제부터인가 생활인으로서 감각에 익숙해져서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쉽게 말해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며 살기도 버거운 세상이다.그렇지만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공직자와 익명성에 기대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사람의 거리감은 그렇게 멀지 않다. 타인의 고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선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정치인 것이다. 이런 인식이 널리 공유되어 보편성을 만들고 나의 몸과 마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의 근저에는 자본주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나의 삶-정치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정치 뉴스를 외면할 수 있지만 나의 삶-정치를 외면하면 우리의 일상은 좀비가 출몰하는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삶의 태도를 누구와 어떻게 공유해야 할까? 당장 2학기에는 학생들과 조금 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다.

2024-08-05

웹소설의 매력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웹소설이란 장르가 있다.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웹소설 등에 연재되는 소설로 스마트 폰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소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중적으로는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더 유명한데, ‘김비서가 왜 그럴까’ ‘재벌집 막내아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간 나에게도 웹소설은 드라마의 원천 소스이자 스낵컬처로 인식되었다.최근 2년간 입학사정관을 하며 읽게 된 우리 학과에 입학하고자 하는 학생의 고등학교 기록에는 웹소설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웹소설을 재미있게 읽고 국문과 진학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고전을 읽고 국문과 진학을 결심했다면, 요즘 학생들은 웹소설을 읽고 국문과 진학을 꿈꾸는 셈이다. 한편 지난 학기에는 웹소설 연구를 하겠다고 대학원에 두 명의 학생이 진학했다. 웹소설에 대해 단 한 번도 학문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그들에게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지만, 비로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웹소설에는 대중들이 공감하는 어떤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자 웹소설 매출이 1조를 훌쩍 넘었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며칠 전 드디어, 웹소설의 고전인 ‘전지적 독자 시점’을 완독했다. 이 소설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란 재미없는 인터넷 소설을 유일하게 끝까지 읽은 ‘김독자’가 소설이 현실이 된 사회에서 벌어지는 서사를 담고 있다. 소설의 서사가 재현되는 현실에서 김독자가 미래를 알 수 있는 절대적 무기를 가지고 주변을 제압하는 과정과 생존자들의 격투를 채널로 구경하며 코인을 주는 성좌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가상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는 설정, 가상 세계 속 캐릭터와 실존 인물이 성좌에게 받은 코인으로 자신의 능력치를 업그레이드하며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이 몰입감을 준다.그렇지만 가장 큰 즐거움은 현실의 독자가 이름도 독자인 ‘김독자’에게 몰입하는 과정이다. 게임 회사의 인턴사원이지만 정직원 전환에 실패한 김독자는 고등학교 시절 집단 따돌림을 당한 트라우마도 가지고 있는 정글 같은 현실의 패배자다. 이런 그가 멸망한 세계의 구원자가 된다는 설정, 그 자체가 현실의 수많은 김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김독자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를 소설의 예정된 결론이 아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세계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생존하기 위해서 코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에서 종종 코인을 선택하지 않고 사람을 선택하는 다른 등장인물의 모습은 현실과 겹치며 우리의 선택을 되돌아보게 한다.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쇼츠에 빠져드는 아이들을 보면 일정 부분 사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미디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직된 사고가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아닐까.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 시스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웹소설은 우울한 미래를 돌파할 가능성을 가진 미디어다.

2024-07-22

누군가의 시선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주말 넷플릭스에서 ‘THE 8 SHOW’를 보았다. 드라마는 사회에서 각기 다른 실패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여덟 명이 비밀스러운 초대를 받아서 한 공간에 모이며 시작된다. 이들은 1부터 8까지의 숫자를 뽑고 해당 숫자의 층에서 살게 된다. 그들이 뽑은 층수는 매분 벌 수 있는 돈의 숫자와 비례했다. 8층은 1층의 여덟 배를 벌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1층도 사회와 비교하면 엄청난 돈을 벌지만, 그들이 머무는 공간에는 일반 물가의 백 배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THE 8 SHOW’는 직업별 연봉의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부모의 직업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회에서 계급의 고착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이나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경제 살리기를 위한 현금 유동성이 증가하고, ‘파이어(FIRE) 족’에 대한 욕망이 널리 공유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현실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은 이유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이야기가 그만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러한 현실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CCTV로 여덟 명의 행동을 응시하고 있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여덟 명은 자신들의 행동에 CCTV 바깥의 누군가가 만족하면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시간이 곧 돈이기에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더욱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구조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1층이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CCTV를 전부 파괴하고서야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CCTV를 통해 여덟 명의 행동을 관찰하며 웃고 떠들며 돈을 지급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1998년 개봉한 ‘트루먼 쇼’와 ‘THE 8 SHOW’는 자신의 일상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자기의 삶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갔지만, ‘THE 8 SHOW’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일상이 생중계된다는 점을 인지하고도 돈을 위해 기꺼이 게임이 참여한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단 중요한 점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전시(展示)하는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트루먼 쇼’가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면 ‘THE 8 SHOW’는 그 결과를 보여준다. 가난이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한 ‘THE 8 SHOW’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폭력적 행동이 익숙한 까닭은 바로 그 내면을 가진 주체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다시 묻자. 바로 이런 우리의 모습을 감상하며 즐기는 자들은 누구일까? 사람이거나 제도, 그 자체일 수 있다. 소수 권력자에 의해 법과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주 본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 나의 감정과 행동을 보며 즐거워할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는 ‘THE 8 SHOW’처럼 누군가 죽기 전에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2024-07-08

관계 맺기의 방법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미국에 사는 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2년 만에 한국에 왔다. 지난 연휴 기간에 시간을 내어 동생네 가족을 만나러 상경했다. 올해 5살, 7살이 된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은 잠시의 어색함을 극복하고 곧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7살 조카가 8살 된 첫째 아이의 이름을 자주 부르자 첫째 아이는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미국 문화를 설명하자, 아이는 조금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불편함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한국의 문화를 쉽게 벗기 어려웠던 까닭이다.동생으로부터 우리를 만나기 전 아이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의 이야기는 이랬다. 동생이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있을 때, 다른 아이 두 명이 와서 조카들에게 나이를 물었다. 조카들의 나이를 듣자 그 아이들은 바로 형과 동생을 정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있는데 나이가 아니라 ‘이름’을 묻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나이’와 ‘이름’,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이지만, 각각의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나이가 위계 서열화를 동반한다면 이름은 개인의 특이성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위계를 내면화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아이들은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도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어울린다. 문제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바로 그 관습이며, 그것은 아이들이 관계 맺기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왜 아이들은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우리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기까지 관계 맺기에서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습관을 반복한다. 대학에 입학해서 동기들끼리 혹은 선후배끼리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년 전에는 재수생까지는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 살이라도 많으면 바로 호칭이 바뀐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가 어린 시절의 놀이문화부터 형성된 것이라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당장 나부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보다 나이를 궁금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나이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대학에 와서 관계 맺기에 서툰 학생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성장기의 수직적 환경이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선생님 혹은 부모님이란 절대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대부분 수직적이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나이가 혹은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기의 생각을 따르길 사실상 강요한다. 대학에서의 자유, 수평적 관계성이 강조되는 순간이 학생들에게는 낯선 것이다.이제부터라도 관계를 맺을 때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이성을 보려고 해야겠다. 요즘 20대가 아니라 각각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그 학생의 면면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럴 때 관계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2024-06-24

교육 현장의 모순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24년 상반기 대학가의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무학과 단일전공’의 실시 여부였다. 의대 정원 확대와 다르게 무학과 단일전공은 대학 관계자 사이에서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학 교육의 근간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무학과 단일전공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한 급변하는 사회현실에서 대학생의 선택권 보장과 융합 교육의 필요성을 기치로 내걸며 20년 전에도 시행된 바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한 정책임이 증명되었지만, 결국 다시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대입 수험생이 매년 줄어드는 현실에서 의대 입학 정원 확대나 무학과 단일전공 시행이 학생들의 특정 전공 쏠림을 가속화 시킨다는 사실과 의대 입시를 위한 사교육 시장이 사회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이 비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이미 모든 정책이 법적 절차를 통과한 상황에서 더 이상 논란을 만들기보다는 정책이 자리를 잡아서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것이 현명한 행동일 수 있다.하지만 현재로서는 바뀐 정책이 정말 학생들을 위한 것일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학기에 교대 입시를 준비하다가 우리 학과로 입학한 학생을 만났다. 그 학생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발생한 서이초 사건으로 꿈을 포기한 것을 다소 후회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생활기록부에 ‘교사’라고 적은 꿈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학생과 이야기하며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대 입시반’이 있었고 선생님들이 1학년부터 진로를 결정하길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활기록부에 일관된 기록이 있는 것이 해당 학과 선택에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그때야 알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입학사정관으로 활동하며 3년 동안 일관되게 국어국문학과 진로를 희망한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준 행동이 사실은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중ㆍ고등학교의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꿈이 얼마나 다양할까? 결국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편의적으로 생각한 것이다.무학과 단일전공의 시행은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신에게 맞는 전공을 고민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다. 취지만 보면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이상과 현실의 좁힐 수 없는 격차 때문이다.대학 진학을 위해 직업 선택을 강요하는 고등학교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천천히 진로를 생각하라는 대학의 모순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다시 입학사정관으로 활동한다면 다른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을까?입시를 위해 하루빨리 진로를 결정하는 고등학교 교육과 다양한 경험을 한 후에 천천히 진로를 정하라는 대학의 모순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비단 교육 현장의 모순은 이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2024-06-10

교육과 양육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대학 선생이면서 두 딸의 아빠다. 그렇다 보니 아직 아이들이 어리지만, 우리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두 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한다. 내 자식의 10년 뒤 모습을 마주하며 어떻게 아이를 양육해야 좋을지 따져보는 식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아이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요즘 아이들과 소통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도 포함되어 있다.우리 대학에 와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종종 만났다. 우리 대학에 오기 전까지 나에게 고등학교 자퇴는 공부와 담을 쌓고 술·담배에 익숙한 학생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몇 년 전 무표정한 얼굴의 자퇴생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자기가 왜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는지, 또 고등학교 자퇴 후 여행을 다니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후에도 수업 시간에 그 어떤 학생보다 멋지기 발표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자퇴생에 대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2024학번에도 고등학교 자퇴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글쓰기 수업의 에세이 쓰기 시간에 자신의 자퇴 경험을 적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어떤 열정을 가지고 학교에 가는 모습과 그저 급식을 먹으러 학교에 가는 자기의 모습을 비교하며 자퇴를 결심했다고 썼다. 학교생활에 별다른 의욕을 느끼지 못하자, 고등학교 3년이 아깝게 느껴지고, 이는 다시 빨리 대학에 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간의 시간 동안 몰입했던 그림 그리기가 유일한 즐거움으로 남은 학생이었다.몇 년 사이 별다른 꿈이나 열정이 없는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꿈은 학창 시절을 지나며 각자의 이유로 사라지고 내가 어떤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아득해진 채 무기력한 상태로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다고 취업이란 당위명제가 선명한 대학에서 꿈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에게 꿈은 직업이 아니라는 간단한 명제를 이해시키는 것에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반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조금 다른 경험을 한 친구들은 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아마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등학생 시절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 경험이 만든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들이 목표와 열의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기 어려운 과정이 문제이다. 여기에는 국가와 가정의 분위기가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한다. 평소 국·영·수 과목에 집중하지 못하고 체육과 미술을 좋아하는 성격이 영향을 미친 탓이다. 그럼에도 일단 국어와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아이가 크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가 바뀌지 않는다면 의지를 가진 아이로 만들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게 키워줄 생각이다.

2024-05-27

가족의 범주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달은 가정의 중요성을 고취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개인과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건강가정기본법’에 의해 지정된 것이라 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등 가정의 구성원을 생각하는 날이 연달아 있는 탓에, 결혼하여 아이가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있는 달이다. 경제적 이유로 5월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리지 않는 청년 세대가 늘어나는 시대에 가정과 가족의 범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지난주 전공 수업에서 학생들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를 함께 읽었다. 소설은 요양 보호사 어머니의 집에 시간강사이자 동성애자인 딸이 자신의 애인과 함께 들어오며 시작된다. 어머니는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고, 시간강사라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졌으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딸의 성격에도 걱정이 앞선다. 딸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원망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주인공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하지만 이런 엄마를 향해 딸은 자신과 애인인 레인은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외친다. “가족이 뭔데? 힘이 되고 곁에 있고 그런 거 아냐? 왜 이건 가족이고 저건 가족이 아닌데”라는 딸의 말에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인 딸은 우리 사회의 비주류다. 합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정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동성애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기 어려우며, 갈수록 가속화되는 양극화 현상은 청년들에게 결혼에서 출산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을 포기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부모 가정이나 다문화 가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여전한 편견을 떠올리면,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란 개념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이성애자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우리는 절절한 딸의 앞선 외침처럼 딸과 레인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점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딸에 대하여’의 딸과 레인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의 엄마도 그랬다. 젊은 시절 타인을 위해 헌신했던 자신의 환자 젠의 비참한 노후에 분노하지만, 젠과 겹치는 딸의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자기 딸이 젠과 같은 쓸쓸한 노후를 맞이할지 두려운 것이다.그렇지만 소설에서 결국 엄마는 젠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키며 머리와 마음이 일치하는 삶을 이룬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엄마는 젠의 장례식장에서 조금 다른 일상과 “마주 서 있는 지금”만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거창한 미래를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제와 한 뼘이라도 다른 내일만 생각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머리와 마음이 일치하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삶과 마주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많아질 때 다양한 가정이 공존하는 진정한 가정의 달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24-05-13

대학 선생의 역할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최근 2년 사이 우리 학과의 자퇴생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주변의 교수들과 이야기하며 대다수 학과의 자퇴생이 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문·사회계열 학과의 자퇴생이 전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예전부터 1학년 1학기를 다니고 2학기를 휴학하며 입시를 준비해서 타 대학으로 이동하는 학생은 있었다. 우리 학과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목표를 이룬 이런 학생은 힘껏 축하하며 보내주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1학년 1학기 중도에 자퇴하는 학생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이번 학기에 겪은 두 가지 사례는 이랬다. 첫 번째 학생은 상담을 위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직감적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불안한 눈빛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미 비슷한 사례를 몇 번 겪은 나는, 침착하게 학생에게 현재 상태를 질문하고 자퇴가 아니라 휴학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학생의 의지는 강했고 부모도 동의했다는 말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두 번째 사례는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학생이었다. 가정불화가 있고 자신이 집안을 책임지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다가 7년이나 늦게 대학에 왔지만, 한 달여 만에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앞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격려와 함께 힘내라는 말 밖에는 특별히 할 수 있는 조언이 없었다.위 두 사례가 극단적인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재학생 중에도 정신적 아픔과 경제적 아픔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많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위해 열의를 가지고 노력하며 필요한 경험을 쌓기 위해 휴학을 신청하는 학생을 만나면 행복하다. 많은 학생이 크고 작은 아픔을 가지고 뚜렷한 목적 없이 휴학한다. 과연 대학의 선생으로서 나는 이런 학생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시대가 바뀌어서 분과학문의 지식으로는 미래를 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모집 단위 광역화를 시행하여 학생들이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고 연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한다. 사회 흐름을 반영한 멋진 말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현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아픔을 가진 학생이 왜 시간이 갈수록 가파르게 증가하는지, 또 대학은 이런 학생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단순히 대학에 상담센터를 설치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대학의 선생은 과거처럼 학생들에게 자신이 공부한 지식을 전달하고 평가하는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학생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고민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역의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와 맞물려 생존을 위해 더욱 학생과 교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학생을 위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최근 들어 교육부는 몇 가지 정책을 추진하며 대학의 변화를 이끌려 하고 있다. 눈앞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정책이 아니라 크고 작은 아픔을 가진 학생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

2024-04-30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추모하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24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2014년 당시 학계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세미나와 토론회 등 각종 학술행사가 개최되고 다양한 기록물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이후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한 일부의 방해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두 가지 입장이 소모전을 벌이며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다시 물어본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당장 떠오르는 것이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다. 하나의 사건은 커다란 배가 서서히 침몰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학생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의 사건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압사’라는 믿기 어려운 방식으로 수많은 청년이 생명을 잃었다는 점에서 판박이다. 한 마디로 두 참사는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근원적 동일성을 갖는다.그렇다면 대체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반복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책임 있는 기관의 조사로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앞선 두 번의 사례가 증명하듯 사회적 참사를 조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어떤 세력의 조직적 방해가 제대로 된 조사를 막았고, 조사가 안 되니 책임자의 처벌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 시스템이 반복적으로 오작동하게 된 원인을 추적해서 개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지점에서 그간 오작동이라고 생각했던 시스템이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정상인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해 이런 학습의 결과 대다수 국민이 국가 시스템에 별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유례없는 합계 출산율과 투자 열풍이 국가 시스템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라고 판단하는 것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나의 삶과 미래를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세월호 참사는 오작동하는 사회가 정상이 아니라는 인식을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오작동을 멈추는 일은 국가의 몫이지만 여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주 국회의원 선거에서 시민들은 정부 여당을 심판하는 투표를 했다. 국가 권력이 투표로 드러난 다수 시민의 마음을 잘 받들기를 희망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기대가 크면 절망도 크다는 사실을 과거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단 우리 스스로 작은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0년 전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진 나의 신체를 뒤바꾸고자 써 내려간 메모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뒤로 뭐 하나 1년 넘게 꾸준히 실천한 항목이 없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나와 내 주위의 많은 것이 변했다. 다시 메모를 작성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겠다. 이것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4-04-15

대학이란 전쟁터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3월이 끝났다. 대학의 3월은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입학한 새내기와 화사한 봄날이 어울려 빛이 나는 시기이지만, 올 3월 대학가에는 유독 피곤함과 우울함이 뒤엉켜 있었다. 주위의 동료들과 전화할 때마다 전쟁터 같은 대학에서 다치지 말고 살아남자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을 다시 직시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시작은 개강과 함께 폭탄처럼 던져진 본부의 모집단위 광역화(안)이었다. 2025년부터 입학정원의 25%를 무학과 자율전공을 선발하겠다는 안에 대해 학내에서 수많은 문제 제기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본부는 어떤 이유인지 학내의 의견을 듣지 않고 원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입학정원을 한 명만 내놓으면 모든 혼란에서 자유로운 학과에 선발되기 위한 이전투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전선은 함께 살아가는 동료와의 사이에 생긴다.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광경이 대학에도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다음으로 던져진 폭탄은 ‘글로컬 대학 30’사업이다. 작년에 이어 진행되는 이 사업에 전국의 모든 지역 대학이 사활을 걸고 달려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대학은 작년에 선정이 되어서 당장은 별 파도가 없지만 전국적으로 선정되기 위한 이합집산이 활발하다.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학교와 학교, 학교와 지역의 벽을 허무는 것이 관건이 되는 사업이기에 자연스러운 결과다. 하지만 작년에 선발된 대학에서 들려오는 온갖 잡음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눈앞의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 ‘글로컬 대학’이란 간판이 갖는 위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와중에 부산의 어느 사립대에서는 교수 근태 관리를 위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출근부를 작성하는 지침과 이를 어길 경우를 대비한 징계 규정을 만들었다. 명분은 연구와 수업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지만, 교수 사회를 길들이려는 제도임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학교는 비판적 교수들의 재임용 거부 등으로 지역에서 제법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대학을 거울삼아 교수 길들이기가 확산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대학이 대학(大學)이길 포기하고 취업 전문기관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한때 이 사실에 분노하는 교수들이 많았지만, 더 이상 아무도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교수가 취업률이란 지상과제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대학이 지켜야 할 학문의 자율성과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교수의 역할이 근본적인 한계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교수는 연구와 교육을 해야 한다. 우리 학생들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연구자로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 교육의 방식이나 보탬의 구체적 함의는 전공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를 부정하는 교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권력이 정한 연구와 교육만을 강제하는 꼴이다. 토론과 협의는 완전히 실종된 상황에서 생활인으로서 교수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2024-04-01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은밀한 내면을 드러낸 말이다.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유독 저 대사만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머릿속에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괴물로 변하는 주위 사람을 목격하며 사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기 때문이다.지금 대학가에서는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그 출발은 합계출산율의 급감이란 상황이다. 서울에서도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교대의 인기가 예전과 다른 것이 현실이다. 초등학교에 닥친 위기가 몇 년 뒤 대학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예정된 미래였지만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고, 위기를 눈앞에서 목격하고야 바빠지기 시작했다.얽히고설킨 매듭을 하나씩 풀기보다는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듯 그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이해당사자의 말을 듣기보다는 결정권자가 강하게 밀어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할 때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다시 유명해진 ‘하나회’를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해체했듯 말이다.이 정권의 교육 정책은 대학 구성원을 마치 ‘하나회’ 보듯 한다. 정권의 교육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자기 이익 지키기에 급급한 이익 집단으로 취급한다. 자율과 혁신이란 이름으로 ‘글로컬 대학’‘무학과 단일전공’ 등을 추진하며 정작 현장의 목소리는 잘 듣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내기에 바쁘고,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인물로 낙인찍고 있다. 어느 순간 감정적으로 격화되고 있는 의대 정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하지만 나는 정부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무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정부 정책이 사람을 선동하는 방식과 돈 앞에 괴물로 전락해 버리는 우리들의 초상이다. 모든 정책은 지원금을 동반한다. ‘돈’이란 당근으로 정책에 따르길 요구하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물결 앞에 생명이 위태로운 대학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대학의 보직을 맡으면 평상시 모습과 모순되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유독 돈 앞에 모멸감을 느끼는 횟수가 많아지는 요즘이다. 눈앞의 몇 푼에 부끄러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사람이 많은 사회가 정상인 사회라 할 수 있을까.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무기력만 남게 되는 현실이 말이다. 출산율 급감이 웅변하듯,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4-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