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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맺기의 방법

등록일 2024-06-24 20:04 게재일 2024-06-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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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미국에 사는 동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2년 만에 한국에 왔다. 지난 연휴 기간에 시간을 내어 동생네 가족을 만나러 상경했다. 올해 5살, 7살이 된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은 잠시의 어색함을 극복하고 곧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7살 조카가 8살 된 첫째 아이의 이름을 자주 부르자 첫째 아이는 ‘누나’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미국 문화를 설명하자, 아이는 조금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불편함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한국의 문화를 쉽게 벗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동생으로부터 우리를 만나기 전 아이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의 이야기는 이랬다. 동생이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 있을 때, 다른 아이 두 명이 와서 조카들에게 나이를 물었다. 조카들의 나이를 듣자 그 아이들은 바로 형과 동생을 정리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있는데 나이가 아니라 ‘이름’을 묻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나이’와 ‘이름’,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이지만, 각각의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나이가 위계 서열화를 동반한다면 이름은 개인의 특이성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이 위계를 내면화했다는 말이 아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아이들은 서로의 나이를 확인하고도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어울린다. 문제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는 바로 그 관습이며, 그것은 아이들이 관계 맺기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왜 아이들은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기까지 관계 맺기에서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습관을 반복한다. 대학에 입학해서 동기들끼리 혹은 선후배끼리 나이를 확인하고 호칭을 정리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20년 전에는 재수생까지는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면, 이제는 한 살이라도 많으면 바로 호칭이 바뀐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가 어린 시절의 놀이문화부터 형성된 것이라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당장 나부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보다 나이를 궁금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나이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대학에 와서 관계 맺기에 서툰 학생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성장기의 수직적 환경이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선생님 혹은 부모님이란 절대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대부분 수직적이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나이가 혹은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자기의 생각을 따르길 사실상 강요한다. 대학에서의 자유, 수평적 관계성이 강조되는 순간이 학생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관계를 맺을 때 나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특이성을 보려고 해야겠다. 요즘 20대가 아니라 각각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그 학생의 면면을 관찰하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럴 때 관계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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