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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수가 남긴 것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8일 기록적인 폭우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에 휩쓸려 실종된 사람,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집에서 사람만 간신히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 경우 등 안타까운 사례가 보도되고 있다. 특히 신림동 반지하에 살고 있던 가족 3명이 사망한 사건이 주목을 받았다. 그중 한 분이 장애가 있다는 보도에, 장애와 가난, 반지하의 이미지가 겹쳐지며 소비되고 있다.반지하와 가난, 그리고 홍수는 영화 ‘기생충’을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비는 부자에게는 낭만의 대상이지만, 기택네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대상이다. 엄청난 폭우에 반쯤 잠긴 집에서 물을 퍼내던 기택 부자의 절박함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사장의 저택에서 문광의 남편이 기택의 아들과 딸을, 기택이 사장을 죽인다. 그리고 영화는 건강을 회복한 기우가 사장 집에 기생하고 있는 기택에게 부자가 되어, 그 집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러니까 ‘기생충’은 대한민국의 빈부격차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부자’가 되고 싶다는 공통의 욕망에 초점을 둔 것이다.반지하에 살던 가족 3명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바로 그날 오세훈 서울시장은 ‘그레이트 선셋 한강’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아름다운 석양을 활용한 한강의 재발견 사업으로 ‘서울 아이’ 같은 대규모 관람차와 수상 공연장을 짓는 계획도 포함되었다. 싱가포르, 영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프로젝트로 최대 10년의 공사 기간이 필요한 사업이다. 서울에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서울시민에게 질 높은 문화콘텐츠를 제공한다는 발표에서, 2009년 용산 참사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세르주 라투슈는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에서 성장 위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빈부격차와 환경 파괴의 원인으로 제시하며, 탈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성장 중심의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황당한 논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지금의 사태는 그 논의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현재 강남은 1970년대 강남 개발 당시 늪지대를 아파트로 바꿔서 탄생한 지역으로 홍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장 중심의 사고는 경제적 이익과 거리가 먼 홍수 예방 사업에 예산 투입을 주저하게 했다. 성장 중심이란 쉽게 말해 돈이 되는 일만 선별해서 자본을 투입하는 효율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이익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했지만, 이번 비극이 보여주듯 지금껏 거의 지켜진 적이 없다.전례 없는 폭염과 홍수, 산불이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초래한 결과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자연과 공생하고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경제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성장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 지금의 이상징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가까운 미래에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2-08-17

교육이란 무엇인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7월 29일 교육부가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6세에서 만 5세로 한 살 낮추는 학제개편을 추진한다고 밝히자, 학부모·교원단체·정치권 등 사회 전반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기사를 종합하면 교육부는 학제개편을 추진하는 이유로 저소득층 아이들을 1년이라도 빨리 공교육으로 편입시킬 필요성과 저출산 문제해결을 위해 아이들을 사회에 일찍 진출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들고 있다.이번 개편안은 두 가지 이유를 내세우지만, 저출산으로 인한 부족한 노동력을 사회에 빠르게 공급하겠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정책이라면 미국이나 영국처럼 유치원을 의무교육으로 지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 학제개편은 교육의 목적을 노동력 재생산에만 방점을 둔 자본 중심의 시각이 만든 참사이다. 자본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순응의 장치로서 교육에 대한 인식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해방 후 73년간 변함이 없었던 학제를 개편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 문제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그만큼 다양한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대치동 중심의 사교육 시장과 명문대 입학을 위해 존재하는 중·고등학교 교육의 비정상에 대한 지적은 오래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주듯 학벌주의는 격차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양극화와 학벌주의는 부동산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환경이다.‘강남불패’가 사교육 시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대부분 청년이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제개편은 다양한 줄기와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그렇다면 학제개편만 따로 떼어서 발표하는 교육부의 의도는 무엇일까? 여기서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겹쳐지는 것은 과한 해석일까? 하청 노동자의 목숨을 건 투쟁에 정부는 불법 파업임을 강조하며 손해배상 청구라는 무기로 압박했다. 원청은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주주 이익에 반하는 행동으로 배임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청·하청의 구조에서 하청 노동자는 ‘하퀴벌레(하청 노동자+바퀴벌레)’라 불리며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게 합법의 틀 안에서 형성된 노동구조다.교육부 장관은 논문표절, 음주운전 등이 문제가 되었지만, 대통령은 능력만 보고 인선을 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능력이 출중하니 과거의 논문표절과 음주운전 같은 작은 흠결은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능력이 출중한 교육부 장관의 첫 작품이 바로 이번 개편안이다. 이번 개편안은 사회적 혼란과 분노만 일으키다 실현되지 못할 것이지만, 우리는 이번 개편안을 통해 국가가 생각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또 교육과 노동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자본의 축적 구조를 외면하고 학제만 개편하여 아이들을 한 살이라도 일찍 사회에 내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말 아이들을 위하는 방법인가?

2022-08-03

어떤 부끄러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학창시절에는 외모나 성적에서, 성인이 되어서는 부족한 경제력에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갖는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스스로에 대한 감정이다. 우리는 이런 부끄러움에 익숙하다.한편 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부끄러움이 있다. 이번 학기 종강을 하고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학생은 방학을 맞아 본가에 내려가기 전에 안부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이번 학기 꽤 열심히 수업을 들었으며 곧 4학년이 되는 학생이라 진지하게 이야기 나눴다. 학생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어서 그 방향으로 계속 나가고 싶어 했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의 진로 변경이 늦은 것이 아니라며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림에 몰두하길 권유했다. 학기 말에 아르바이트로 몇 번 결석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하지만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학생의 고민은 어려운 가정 형편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며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는 그 학생의 상황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재능이 있지만 돈 때문에 자기의 꿈을 포기하는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간은 보통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토대를 두고 주변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타인과의 연결보다는 단절에 익숙하다. 경험적 진실의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겸손해지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목격되는 장면은 나와 타인 사이에 장벽을 높게 세우고 대립하는 형국이다. 나의 기준에 따라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거나 무능력한 대상으로 전락한다.지난 3일 연세대학교에서 시급 440원 인상, 샤워기 설치 등을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청소 노동자들에게 세 명의 연세대학교 학생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지난 4월과 5월에도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를 경찰에 고소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으로 청소 노동자들을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는지는 명확하다. 신성한 배움의 전당인 대학에서 ‘노조’의 불법시위로 자신들의 수업권이 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분노의 표시이다.고소한 학생들에게 노조란 무엇이며 청소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이 정당한 것인지를 질문할 여력은 없다. 청소 노동자가 존재해서 자신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 노동자들의 ‘시위’, 그 자체를 대상화시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존재로 규정할 뿐이다. 이러니 청소 노동자들의 요구에 침묵하고 있는 대학본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우리는 왜 문제를 넓고 깊게 보지 못하는 것일까? 소수 대학생에게만 한정된 문제일까? 오늘 내가 편한 것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동은 자본으로 쉽게 치환되지만, 세상에는 그런 교환법칙에 따르지 않는 관계들이 더 많다.

2022-07-20

투자 권하는 사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전남 완도에서 실종된 유나 양 가족이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지난 5월 유나 양 부모는 제주도 한 달 체험학습을 신청한 뒤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학교는 체험학습 기간이 끝나도 유나 양이 등교하지 않고 부모와도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경찰 조사를 통해 유나 양 아버지가 광주의 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 판매를 했으나 작년 7월 폐업했으며, 이후 가상화폐 투자에 실패하고 큰 빚을 진 사실이 알려졌다. 가상 화폐 ‘루나’ 상장폐지 사태와 맞물려 유나 양 아버지가 루나를 검색한 사실이 집중 보도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유나 양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유나 양은 부모의 자살 결정에 그 어떤 의사도 표시하지 못하고 함께 죽었다. 이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지만, 명백히 유나 양을 죽인 범인은 부모이다. 자식을 죽일 만큼 고통스러웠을 부모의 마음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살인은 살인이다.그렇다면 부모의 죄는 어떻게 물어야 할까? 법적으론 가해자가 죽었으니 죄를 묻지 못하는 상황이다. 유나 양 가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의 정비도 더욱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2020년까지 2017년을 제외하고 OECD 국가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살률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던 것이 아닌데, 왜 조금도 좋아지지 못한 것일까?이번 사건을 보도한 기사의 댓글 중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결국 죽음을 불러온다.’에 눈길에 꽂혔다. 아마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가상자산으로 가정을 지키고자 한 사람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이런 비판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우리의 금융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는 불과 2년 만에 실거래 가격이 정확히 두 배가 상승했다. 2년 만에 월급이 몇 억씩 상승하는 사람은 드물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자산을 몇 배씩 불리는 사회에서, 성실하게 일하라는 조언은 ‘벼락거지’가 되라는 말로 들릴 뿐이다.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문화는 2000년에 생겼다. 이것은 곧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 시스템이 길어야 20년 정도 되었다는 의미다. 금융 자본주의라 불리는 이 시스템은 산업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부채, 신용 등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2000년 전후다.문제는 바로 이런 경제 시스템이 개인의 몸과 마음에 미친 영향이다. 벼락거지가 유행처럼 떠도는 시대에 노동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심리·육체적 질병과 높은 자살률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물음에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제 성장을 위한 법 제도 정비의 결과를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최근 법원은 주식, 가상화폐 투자 빚을 없는 걸로 쳐주겠다는 결정을 했다. 투자자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유나 양 부모의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할까?

2022-07-06

벚꽃 피는 순으로 망한다?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22년 현재.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한국 대학은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수도권에 있는 ‘SKY’ 중심의 소수 대학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지방에서는 그 위기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벚꽃 피는 순으로 망한다는 비유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국립대학은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만, 지방 사립대와 전문대를 중심으로 학과 통폐합 혹은 폐과가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물론 지방 대학 위기의 원인이 학령인구 감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에 집중된 양질의 일자리와 젊은 세대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지역의 인프라 등은 지방 대학 신입생 충원율이 떨어지는 중요한 이유이다. 지자체, 대학, 기업이 연대한 ‘공유 대학’이 출범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위기는 기회다. 지방 대학이 처한 지금의 상황은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최근 몇 년 지역의 국립대학이 젊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사립대가 퇴직 교수의 후임을 안 뽑거나 비전임으로 채용하는 동안 국립대학은 빈자리를 빠르게 채웠다. 필자가 속한 학과의 최선임 교수는 50대 초반이며, 최선임 교수가 40대 후반인 학과가 주위에 다수 존재한다. 앞으로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이 마무리되면 지방 국립대학 교수들은 50세 전후가 중심이 될 것이다.필자는 최근에 오는 8월 정년을 맞이하는 교수의 고별 강연에 참석했다. 그분은 1981년에 진주로 내려오셔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자신의 연구를 기반 삼아 지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셨다. 필자가 알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 교수들의 서사도 이와 유사하다. 한 마디로 지역에서 동학들과 학문 정진에 힘쓰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교육에 매진하는 삶의 이정표가 살아 있는 세대였다.이제 신임 교수들이 학교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일해야지만 현실은 막막하다. 과거와 다르게 학계·사회의 경계가 명확해진 점, 신임 교수들의 개인주의적 성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역과 연고가 없는 신임 교수들이 지역과 연계되어 활동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해당 지역 혹은 특정 대학 출신 교수들이 장악한 기득권을 넘어서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나는 우리 대학에 부임하며 지역과 학교 발전에 대한 나름의 계획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입사 1년 차에 치러진 총장 선거에서 ‘조교수 협의회’를 만들겠다는 후보자에게 투표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어느 것 하나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무능력이 가장 큰 탓이겠지만,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카르텔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특별한 반전이 없는 이상 학령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고 지방 대학의 위기감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제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정해진 미래임에도 중앙과 현장, 모두 우왕좌왕하고 있다. 젊어진 대학의 주체들을 제도 혁신의 일꾼으로 이끌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2022-06-22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글쓰기 수업의 학기 말은 고되다. 35명 수강생이 쓴 글을 읽고 대면 피드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 1명에 30분. 단순계산으로 17.5시간, 2학점 수업의 8주 분량이다. 서면 피드백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학생과 직접 만나서야 가능한 질문을 포기할 수 없어서 대면 피드백을 고집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에세이와 칼럼이 첨삭 대상이다.문제는 에세이였다. 예상대로 대학 신입생이 쓴 에세이의 상당수는 대학 입시 과정에서 느낀 고민과 단상으로 가득했다. 부모님과의 갈등, 국문과에 대한 주변의 조소 등 20년 전 내가 대학 입시를 할 때와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30분 단위의 상담에 피로감이 몰려오던 늦은 오후. 어느 여학생 순서가 되었다. 여학생의 글은 에세이와 일기의 경계에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한 문장에 눈이 갔다. ‘고등학교 때까진 성적이 제일 우선이다. 일단 공부부터 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이 문장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에게 건넨 부모의 말이었다. 학생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꿈을 포기시키고 진로를 정하라는 부모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대학에 들어가서…’, 이 문장은 나도 고등학교 시절 숱하게 들은 말이다. 여학생의 부모님도 고등학교 시절 적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통하던 마지막 세대이다. 고등학교 시절 막노동꾼 서울대 수석합격자의 수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1996)를 읽으며 공부에 대한 열의(?)를 되살리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하면 성공신화를 쓸 가능성이 있었다. 2022년 현재는 어떤가?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학생과 부모의 스펙으로 상당한 이력을 채운 학생의 미래가 갖는 거리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개천에서 더이상 용은 나오지 않는다.그럼에도 많은 부모가 고등학교에서는 공부만 하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적인 이유로 공부해서 대학에 가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테다. 꼭 명문대가 아니라도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의식이 여전히 작동하는 까닭이다. 어째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지만, 유독 대학 진학과 관련한 사고는 조금도 바뀌지 못한 것일까?그 여학생은 자신의 고민과 분노에 공감하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휴지를 건네는 것 말고는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면 대학에 와서도 하기 어렵다. 그러니 제발, 공부부터 하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은 하지 말자. 의도야 그렇지 않겠지만, 이제 그 말은 언어폭력에 불과하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이 사태의 공범자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 사슬을 끊어버릴 때가 되었다.

2022-06-08

정치와 욕망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다. 지난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쥔 여당은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패배한 야당은 칼날을 갈며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지방 선거에 임하고 있다. 대선 패배 이후 ‘검수완박’ 법안 통과에 열을 올린 민주당과 대한민국에서 특권 계급 세습의 도구로 전락한 교육 시스템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 국민의힘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현실 정치가 과연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와 닿을 수 있을지 의구심만 가득하다.우리는 누구나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어느 집단에나 정치를 잘해서 탄탄대로를 걷는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 정치를 못해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보통의 사람은 처세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나의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꼭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정치가 아니라도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더 좋은 직장을 얻으려는 욕망도 현실 정치와 경제로부터 형성된다는 점에서, 삶 자체가 정치·경제적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겠다.우리는 어떤 정치·경제적 욕망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적·물적 네트워크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는 특권 계급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비판은 일견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 정치는 대중들의 욕망을 대리한다. 더 높은 계급을 향한 대중들의 공통된 욕망을 현실 정치는 외면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양당 정치 체제에서 두 정당이 품고 있는 전략과 시각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올해 5월을 계기로 광주는 더이상 이른바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으며, 자기 계급의 영속성을 위해 교육 시스템을 악용한 사례는 두 정당이 공유하는 욕망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투자’와 ‘투기’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히 알고 있다.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비난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런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존재하지 않나? 바로 이런 양가성은 특권 계급만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도 21세기 신 계급사회의 출현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현실 정치가 우리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을까? 대중들의 욕망이 변해야 현실 정치도 변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자식 사랑을 비난하면서 나는 그런 욕망과 거리가 먼 사람이란 인식을 하고 있지는 않나? 나의 양가성을 직시하고 응시할 때 변화를 만들 가능성이 생겨난다. 나아가 익숙한 생각의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얼마 전 연세대학교에서 청소 노동자의 파업에 재학생이 수업권 침해를 이유로 노동자를 고소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청소 노동자의 외침을 수업권 침해로 사고할 것이 아니라 학내 구성원이 고통 받는 이유를 질문하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지방 선거에서는 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익숙한 생각의 패턴을 낯설게 만드는 후보에 투표하려고 한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되지는 못하겠지만, 새로운 생각의 패턴이 양가적 현실 인식의 간극을 좁힐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2022-05-25

가정의 달에 생각하는 ‘가족’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자식과 부모, 반려자에 대해 숙고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일상 속에서 무뎌지기 쉬운 관계의 유지와 지속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처럼 챙겨야 하는 아이와 양가 부모님이 계시는 세대들에게 가정의 달은 경제적, 육체적으로 피곤한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의 가정에서 아이 선물과 양가 부모님 용돈, 외식 몇 번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매년 반복되는 5월 가정의 달. 올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권에서 사는 형님네를 찾았다. 양가의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 전이지만 자연스럽게 화제는 아이 교육 문제로 옮겨갔다. 형님은 아이 교육을 위해 중국 주재원을 생각하고 계셨고, 나는 미국으로 연구년을 떠날 계획이 있다. 둘 다 아이 영어 교육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목적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경쟁’에 대한 걱정과 분노를 공유했지만, 동시에 어떻게 우리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평범한 아빠였다.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를 기억한다. 교수 아빠와 엄마가 ‘부모찬스’에 불법까지 저지르며 자식의 스펙을 만들어 대학에 보낸 사실이 드러나고 많은 사람이 분노했다. 검찰의 과잉 수사가 논란이 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준 자식 사랑이 공론화된 사건임은 분명하다.최근 윤석열 정부 장관 후보자들의 자식 사랑도 남다르다. 누군가의 자식은 아빠가 병원장으로 있는 대학에 편입학을 했고, 학교 본부에 신고도 없이 아빠 수업을 들었다. 어느 후보자의 고등학생 딸은 두 달 만에 논문 5편을 학술지에 투고했으며, 1년 만에 영어로 된 전자책 10권을 출간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자식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좌·우를 떠난 공통된 현상이라고 해야 옳겠다.이러니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당연한 귀결이다. 경제력을 갖춘 특권 계급의 자식 사랑에 대다수 부모가 초라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아이를 낳고 싶을까? 자본 시장과 긴밀하게 연결된 경제 공동체로서 가족 개념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여성·남성의 노동 이원화 정책 속에서 출산과 양육을 여성 주도의 사적 영역에 묶어두는 편이 국가 산업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아이를 키우는 일이 오로지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혈연·경제 공동체로서 가족의 의미는 오히려 강화되었다.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얽혀 있어서 쉽사리 해결책을 찾기 어렵지만,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혈연·경제 공동체로서 가족이란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상상력이다. 우리는 특권 계급의 자식 사랑을 비판하지만, 내 자식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이 욕망에 충실한 것이 나와 사회의 발전에 보탬이 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단언컨대 지금은 우리 사회에 안 좋은 영향만 줄 뿐이다. 매년 반복되는 가정의 달에 뻔한 가족의 의미만 추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2-05-10

꿈이란 무엇인가?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요즘 많은 대학에서 학부생 진로 상담은 교수의 의무이다. 우리 대학도 매 학기 학생들과 꿈과 미래를 주제로 상담을 해야 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학과 교수와 진로 상담은 당연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진로란 자신의 관심사에 맞춰 각자 설계하고 노력하는 과정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학부생 진로 상담 제도가 시행되고도 꽤 오랫동안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시대가 바뀌면 제도와 사람들의 인식도 변한다. 이제 대학은 학생의 입학부터 졸업 후 진로까지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이 ‘소비자 만족도 조사 1위’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대이며, 수업에서 ‘가성비’를 따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대학이 취업사관학교가 되었다는 자조가 들려 온 지도 어림잡아 10년이니, 이제 학부생 진로 상담은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 되었다. 당연히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우리 학과 학생들의 고민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보통 처음 만나는 학생들에게는 꿈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이유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는지를 묻는다. 그럼 여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교사, 작가, 공무원 등과 같은 특정 직업이다. 그럼 다시 물어본다. 가령 왜 선생님이 되려고 하니? 라고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는 많은 학생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안정적인 직업이라서 되고 싶다는 경우가 다수이고 일부 학생이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추억하며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사실 꿈을 질문하며 내가 기대한 답변은 ‘가치’였다. 좀 더 정확히는 어떤 가치를 평생 진력을 다해 실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 가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 바로 직업이다. 직업 안정성만 보고 교사가 된 사람보다 윤리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더 좋은 선생님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고난이 찾아왔을 때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크다고는 말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안정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람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윤리적 올바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안정성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지난주 신입생들의 학창시절 고민이 담겨 있는 작문에서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는 행동과 같은 비상식적 모습을 가진 선생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고등학교에서는 우·열반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분들도 한때는 좋은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를 잊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순식간에 괴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조급함을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당장 어떤 직업으로 진로를 결정하기보다는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를 천천히 고민하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올바른 가치 추구라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은 평생 반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꿈은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를 쫓는 과정에서 느끼는 설렘이다. 이번 주말에는 내 꿈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 보아야 겠다.

2022-04-27

능력주의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강사 생활도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18년 포항에서 1년 정도 생활했지만, 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지역을 배회했을 뿐이다. 그러다 현재 재직 중인 학교에 2019년 하반기에 부임했다.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던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코로나 19’로 비대면 동영상 수업을 진행하던 2020년 1학기에 벌어졌다. 부임 첫 학기에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동아리에서 성실히 활동하며 서울 답사까지 함께 다녀온 남학생이 있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세미나 발제를 단 한 번도 대충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1주일이 넘게 동영상 시청을 하지 않고 스마트 폰도 꺼져 있자 실망과 걱정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주일 정도 되었을까, 내가 보낸 메일에 그 학생이 보내온 답장은 이랬다. 그동안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 강의를 시청했는데, 마침 스마트 폰이 망가져서 강의를 듣지 못했으며 수리비를 마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2주간이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못하고, 학생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두 번째 사건은 2021년 2학기에 벌어졌다. 앞의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부임 첫 학기 동아리부터 인연을 맺어 온 비평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오랜만의 대면 수업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수준 높은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어 한 학기 동안 내심 흐뭇해하던 학생이었다. 기말과제를 앞두고 발표했던 소설에 대한 비평을 발전시켜서 완성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소설집을 도서관에 반납해서 그 글을 완성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소설집은 2만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소장해도 좋은 소설이니 한 권 구매해도 괜찮다는 나의 조언에, 그 학생은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했다.능력주의를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 할당제도 지역 할당제도 불공정한 제도이고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만 시험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다. 이럴 때 능력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그 능력은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얻기 어려운 대상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소수와 그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다수가 모여서 능력주의를 만든다.내가 만난 두 명의 학생이 지역에만 있는 특수한 경우인지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일반적인 사례인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두 명의 학생에게는 노트북 한 대, 소설책 한 권을 살 여유만 있다면, 펼칠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학생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능력을 빼앗는 사회야말로 불공정한 사회가 아닐까? 어쩌면 능력주의란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엘리트를 위한 이념일 수 있다. 그 논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2022-03-30

일요일 아침의 페미니즘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에게는 7살 4살, 두 딸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미투(ME TOO) 운동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낑낑대며 읽고 있던 어느 주말로 기억한다. 소파에 누워 소꿉장난을 하는 두 아이를 보고 있었다. 큰 아이가 엄마, 작은 아이가 아빠 역할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언니가 매번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왜 나만 자꾸 아빠 역할을 해야 하는지 따져 물었다. 동생의 투덜거림에 큰 아이는 너무나 당당하게 “너는 머리가 짧고 나는 머리가 길잖아”라고 답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차분히 설명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아침.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세탁이 막 끝난 빨래를 건조대에 널기 위해 가져왔다. 별 생각 없이 아내에게 빨래를 받아서 널고 있는데, 큰 아이의 말이 귓가에 내리 꽂혔다. “아빠가 왜 빨래를 널어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큰 딸이 왜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를 연결시켰는지 말이다. 부끄러웠다.대선을 앞두고 ‘이대남’의 마음을 얻기 위한 거대 양당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성폭력 무고죄 신설, ‘여성가족부’ 폐지 등과 같은 공약이 들린다. 이 와중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젊은 여성 정치인은 자기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힘 있는 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가, 정확히는 ‘힘’있는 ‘정당’이 정말 젠더평등을 만들 수 있을까?제도가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제도를 만든다. ‘이대남’을 의식한 정치권의 정책도 ‘취업’이란 일상에서 이대남이 느낀 분노로부터 시작된 것 아닌가. 취업을 위한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최소한의 규칙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정부가 무능력하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서? 그럼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까?지금의 취업 전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정치계와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위계’를 동반한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에서 벌어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 싼 논쟁을 생각해보자. ‘내가 이 스펙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로 요약되는 분노는 결과적으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위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왜 우리는 정규직·비정규직이란 구도를 벗어나기 어려운가? 젠더평등이란 단순히 남성·여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등과 같은 이분법적 사회 체계 전반을 겨냥한 언어이다.이런 일상에서 아이들이 학습하는 젠더 감각은 어떤 것일까? 나의 일상과 무의식을 다시 돌아볼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공범이 될 수 있다.

2022-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