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에서 실종된 유나 양 가족이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지난 5월 유나 양 부모는 제주도 한 달 체험학습을 신청한 뒤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학교는 체험학습 기간이 끝나도 유나 양이 등교하지 않고 부모와도 연락이 닿지 않자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경찰 조사를 통해 유나 양 아버지가 광주의 전자상가에서 조립 컴퓨터 판매를 했으나 작년 7월 폐업했으며, 이후 가상화폐 투자에 실패하고 큰 빚을 진 사실이 알려졌다. 가상 화폐 ‘루나’ 상장폐지 사태와 맞물려 유나 양 아버지가 루나를 검색한 사실이 집중 보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나 양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유나 양은 부모의 자살 결정에 그 어떤 의사도 표시하지 못하고 함께 죽었다. 이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지만, 명백히 유나 양을 죽인 범인은 부모이다. 자식을 죽일 만큼 고통스러웠을 부모의 마음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살인은 살인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죄는 어떻게 물어야 할까? 법적으론 가해자가 죽었으니 죄를 묻지 못하는 상황이다. 유나 양 가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의 정비도 더욱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2020년까지 2017년을 제외하고 OECD 국가 자살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살률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던 것이 아닌데, 왜 조금도 좋아지지 못한 것일까?
이번 사건을 보도한 기사의 댓글 중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결국 죽음을 불러온다.’에 눈길에 꽂혔다. 아마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가상자산으로 가정을 지키고자 한 사람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이런 비판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우리의 금융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는 불과 2년 만에 실거래 가격이 정확히 두 배가 상승했다. 2년 만에 월급이 몇 억씩 상승하는 사람은 드물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레버리지를 이용해서 자산을 몇 배씩 불리는 사회에서, 성실하게 일하라는 조언은 ‘벼락거지’가 되라는 말로 들릴 뿐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는 문화는 2000년에 생겼다. 이것은 곧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 시스템이 길어야 20년 정도 되었다는 의미다. 금융 자본주의라 불리는 이 시스템은 산업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부채, 신용 등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2000년 전후다.
문제는 바로 이런 경제 시스템이 개인의 몸과 마음에 미친 영향이다. 벼락거지가 유행처럼 떠도는 시대에 노동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심리·육체적 질병과 높은 자살률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물음에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제 성장을 위한 법 제도 정비의 결과를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최근 법원은 주식, 가상화폐 투자 빚을 없는 걸로 쳐주겠다는 결정을 했다. 투자자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유나 양 부모의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