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7살 4살, 두 딸이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미투(ME TOO) 운동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 우리 아이들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갈 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낑낑대며 읽고 있던 어느 주말로 기억한다. 소파에 누워 소꿉장난을 하는 두 아이를 보고 있었다. 큰 아이가 엄마, 작은 아이가 아빠 역할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언니가 매번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왜 나만 자꾸 아빠 역할을 해야 하는지 따져 물었다. 동생의 투덜거림에 큰 아이는 너무나 당당하게 “너는 머리가 짧고 나는 머리가 길잖아”라고 답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차분히 설명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주말 아침.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세탁이 막 끝난 빨래를 건조대에 널기 위해 가져왔다. 별 생각 없이 아내에게 빨래를 받아서 널고 있는데, 큰 아이의 말이 귓가에 내리 꽂혔다. “아빠가 왜 빨래를 널어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큰 딸이 왜 머리카락의 길이와 엄마·아빠를 연결시켰는지 말이다. 부끄러웠다.
대선을 앞두고 ‘이대남’의 마음을 얻기 위한 거대 양당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성폭력 무고죄 신설, ‘여성가족부’ 폐지 등과 같은 공약이 들린다. 이 와중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젊은 여성 정치인은 자기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힘 있는 야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가, 정확히는 ‘힘’있는 ‘정당’이 정말 젠더평등을 만들 수 있을까?
제도가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제도를 만든다. ‘이대남’을 의식한 정치권의 정책도 ‘취업’이란 일상에서 이대남이 느낀 분노로부터 시작된 것 아닌가. 취업을 위한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최소한의 규칙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정부가 무능력하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서? 그럼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까?
지금의 취업 전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정치계와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공정’과 ‘경쟁’이란 원칙은 ‘위계’를 동반한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에서 벌어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 싼 논쟁을 생각해보자. ‘내가 이 스펙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로 요약되는 분노는 결과적으로 정규직·비정규직의 위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왜 우리는 정규직·비정규직이란 구도를 벗어나기 어려운가? 젠더평등이란 단순히 남성·여성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등과 같은 이분법적 사회 체계 전반을 겨냥한 언어이다.
이런 일상에서 아이들이 학습하는 젠더 감각은 어떤 것일까? 나의 일상과 무의식을 다시 돌아볼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공범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