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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등록일 2022-03-30 20:27 게재일 2022-03-3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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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최병구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수도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했으며 강사 생활도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2018년 포항에서 1년 정도 생활했지만, 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지역을 배회했을 뿐이다. 그러다 현재 재직 중인 학교에 2019년 하반기에 부임했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며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던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코로나 19’로 비대면 동영상 수업을 진행하던 2020년 1학기에 벌어졌다. 부임 첫 학기에 내가 지도교수를 맡은 동아리에서 성실히 활동하며 서울 답사까지 함께 다녀온 남학생이 있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세미나 발제를 단 한 번도 대충한 적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1주일이 넘게 동영상 시청을 하지 않고 스마트 폰도 꺼져 있자 실망과 걱정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2주일 정도 되었을까, 내가 보낸 메일에 그 학생이 보내온 답장은 이랬다. 그동안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 강의를 시청했는데, 마침 스마트 폰이 망가져서 강의를 듣지 못했으며 수리비를 마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2주간이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못하고, 학생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두 번째 사건은 2021년 2학기에 벌어졌다. 앞의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부임 첫 학기 동아리부터 인연을 맺어 온 비평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오랜만의 대면 수업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수준 높은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어 한 학기 동안 내심 흐뭇해하던 학생이었다. 기말과제를 앞두고 발표했던 소설에 대한 비평을 발전시켜서 완성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소설집을 도서관에 반납해서 그 글을 완성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소설집은 2만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소장해도 좋은 소설이니 한 권 구매해도 괜찮다는 나의 조언에, 그 학생은 조그만 목소리로 죄송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했다.

능력주의를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 할당제도 지역 할당제도 불공정한 제도이고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만 시험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다. 이럴 때 능력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그 능력은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만들어진 것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처음부터 얻기 어려운 대상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소수와 그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다수가 모여서 능력주의를 만든다.

내가 만난 두 명의 학생이 지역에만 있는 특수한 경우인지 어느 지역에나 존재하는 일반적인 사례인지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두 명의 학생에게는 노트북 한 대, 소설책 한 권을 살 여유만 있다면, 펼칠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학생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능력을 빼앗는 사회야말로 불공정한 사회가 아닐까? 어쩌면 능력주의란 공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엘리트를 위한 이념일 수 있다. 그 논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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